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님의 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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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자(루시아)
자매님께서 분도 형제님께 쓰신 글에 저에 대한 내용도 있기에 그에 대한 답변과 더불어 저의 생각을
적겠습니다. 자매님의 글이 정말 갈수록 부드러워 지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1. 저의 글의 출처를 물어보셨습니까? 제가 인용한 글에 대해서는 모두 출처를 밝혀 놓았습니다. 나주
홈페이지에서 그대로 퍼온 글은, 확인해보면 아시겠지만 없습니다. 출처가 있는데도 근거를 대라시니, 대체 그 근거란 무엇입니까? 제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경위를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의 글 모두가 그 근거이지요.
2. 객관적 근거란 무엇이고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지금 나주에 대해, 신자들은 이단시하는 분도 있고
참된 발현이라 믿는 분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이 양끝 아니면 이 둘 중간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나주 성모님에 대해 책을 쓰고 싸이트를
만들고 토론하는 일들은 양 끝에 계신 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름대로의 확신과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모 아니면
도입니다. 어정쩡하게 이럴 것도 같고 저럴 것도 같은 사람이 싸이트를 개설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싸이트가 있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믿는 쪽이다"라고 판단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 자료라고 인정하실만한 자료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제3자-비신자가 보는 나주나, 해외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눈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실까요? 이것은
'은총은 강물처럼' 싸이트에서 본 내용인데 경당과 성당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월간조선의 기자분도 나주에 취재갔던 일과 더불어 견해를 밝힌바
있습니다. 아마 자매님도 읽어 보셨을 겁니다.
정말로 객관적 자료가 있다면 저 역시 보고 싶습니다. 어디서 찾아야
하죠?
3. 이제민 신부님에 대해서 어떤 분이 존경한다고 하신 그 어떤 분이 저인가요? 그렇게 쓴 적은
없지만, 저는 이제민 신부님을 존경합니다. 그분 뿐 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은 존경받으셔야죠. 하지만 신부님을 존경하는 것과 신부님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과는 엄연히 별개입니다. 저는 이신부님의 글의 신학적 오류에 대해서는 쓴 바 없습니다.
4. 한국 가톨릭이 갈라지는데 대해 걱정을 하시는데, 의견이 갈라진 건 공지문 이후부터입니다. 분열의
원인은 공지문이지 나주 성모님이나 율리아 자매님이 아닙니다. 설마, 왜 발현하셔가지고… 이런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자매님께서 교도권에 순명하는 것이 나주 성모님과 자매님 신앙이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군요. 그것은
자매님이 밝히셨듯 순명하는 이유이지, 나주를 이단시하고 율리아 자매님을 존칭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몰아갈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나주
성모님과 신앙에 상관이 아주 많은 사람도 많답니다.
저희 본당 얘기를 해 드릴까요? 저희 교구는 전에 계시던 주교님께서 많은 것을 금하셨답니다.
다른 교구에서 좀 비웃을 정도로, 하지 말라면 안하고 말 잘듣는 신자들입니다. 원래 태백 산맥 안쪽의 영서지방 사람들은 성격이 드세지를
못합니다. 성령 세미나조차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 쥐죽은 듯 안하고 지냈습니다. 거기다 제가 다니는 성당의 주임 신부님은 어찌나 성격이 터프하고
꼼꼼하신지, 본당 모든 일은 다 주임신부님을 거쳐야 합니다. 바로 전에 계시던 신부님과 대조적이죠. 미사시간에 주일학교 애들이 좀 떠들라치면
경문 외우시다가도 소리를 빽 지르시는, 그런 호랑이 신부닙이십니다.
이런 신부님이 나주에 가지 마시오! 하시니, 그전까지 버스로 몇대씩 대절해서 가던 나주 순례가 딱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글쎄, 우리의 순박한 아주머니들은 전화로 연락을 해서 밤에 몰래 나주에 내려갔다 오시곤 합니다. 그러다, 신부님이 가지
말라는 나주에 갔다왔다고 고백성사를 보는 아주머니도 계시고, 그러자 신부님은 노발대발하셔서 가지 말라그랬잖느냐고 강론시간에 화를 내시고, 그러니
아주머니들은 더욱 조용히 내려가시고…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평화롭던(?) 저희 본당에 이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 신자들은 혼란스러운 겁니다.
교도권이 있는 것이 행복인 가톨릭에서 그 교도권이 따를만한 것이냐를 논하는 것은 신자된 입장에서 차마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몰래 내려가시는 자매님들도 그렇겠죠.
제가 나주에 관해서 문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공지문의 오류 공지문에 오류가 있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공지문 뿐 아니라 나주
조사위원의 한 분이셨던 리순성 신부님께서 나주의 성체변화에 관해 쓰신 논문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면 양떼는 잘못된 길로 갈 것이고, 이는 큰 문제입니다.
2) 조사 과정에서의 문제점 어디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외국 어느 교구에서는 성모님 발현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2000명의 증인들을 인터뷰하고도 아직 조사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주는 14명의 증인만 인터뷰했을 뿐이고
현장조사도 단 한 번 했습니다. 과연 성의 있는 조사였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나주의 기적현상들이 가톨릭 교리에 위배된다면 조사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밝혔듯 교리에 위배된다는 그 내용이 오히려 정통교리에 위배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3) 의견수렴의 부족 일단 조사과정에서는 조사위 신부님들보다 나주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시는
신부님들과의 의견 조율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경청이라도 했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없었습니다. 또한 공지문 발표
후에는, 이렇게 논란이 많다면 공개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인터넷이라면, 증인과의 인터뷰 내용도 올라가 있고, 공지문에
대한 의문사항을 묻고 답하는 내용도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주에 관해 올바로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내적 일치를 위해 이로운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사위의 체면이 깎이고 가톨릭적이 아닌 일이 되는 걸까요?
성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뭔가 부끄럽고 떳떳치 못한 생각이
들게 하는 것처럼, 나주도 아무것도 모르게 한다면 부정적인 소문만 더욱 나돌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반 신자들이 '나주'를 들었을 때 뭔가
위험하고, 뭔가 이단스럽고, 뭔가 음침하고 뭔가 불경스러운 느낌이 들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것은 현실입니다. 근거도 없는 소문으로 율리아
자매님을, 나주를 사랑하는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이들의 영적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나주의 가장 중요한 것은 결실이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고 냉담자들이
돌아오며 신심이 더욱 깊어진 사례가 많습니다. 예수님보다 성모님을 더 떠받들고 율리아 자매님을 추앙하는 부작용이 생기면 문제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원경 자매님 말씀대로, 한국 교회의 일치와 신자들의 신심 도모를 위해서라도, 나주는 다시 조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서의 나주 토론 - 정원경 자매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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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경 자매님의 5번째 글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주 사건과 관련된 책이나 윤 율리아가 말한 것을 모은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단,
미리 '성모님의 말씀이다'라고 전제하고 읽으시면 위험하겠더군요. 객관적인 마음자세를 가지고 한 번 읽어보십시오. 왜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나주에서 있었던 일들이 왜 침묵하도록 명 받았는지...
나주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말씀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정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라
하느님께서는 가정이 인류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공동체가 되도록 섭리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어 그들이 가정을 이루고 번영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의 생활 거의 전부를 성가정 안에서 지내심으로써 인간의 가정을
성화(聖化)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가정이 건전하며 사랑과 화목 가운데 일치를 이루기 바라십니다. 그래서 좋은 가정을 이루려고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특별히 강복하여 주십니다.
반면, 악마는 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들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분노,
폭력, 물욕, 불성실, 불신, 낙태 및 비자연적인 산아 제한, 아동 학대, 음란 출판물 및 비디오, 지나친 여성 해방 주의, 개인 중심주의,
동성 연애 등을 조장하여 가족들이 서로 반목하고 불화하게 하고 서로에게 실망하게 하고 또 가정의 중요성을 망각하게끔 유도합니다. 우리들 세계의
미래는 우리들 가정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나주에서 성모님께서 메시지를 처음 주시던 날 가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들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너희들을 짝지워 주었건만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내 아들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고 있다. 서로 서로 사랑하여라.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구냐? 가정 안에서의 사랑도
못하면서 어찌 나를 사랑한다고 하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여 가정 성화를 아루도록 하여라. 바로 그것이 내
아들 예수가 갈급하게 원하는 것이다. (85. 7. 18)
* 이 세상의 죄악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지금 암흑이 덮쳐 오고 있다. 많은 가정이 병들어 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가 없다. 서로 서로 행복하게 살라고 짝지워 준 부부들이 서로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함으로써 고립된 인간으로 되어가고 있다. (87. 3. 13)
2. 낙태를 중지하여라
나주에서 메시지를 처음 주시던 날 성모님께서 또 한 가지 강조하신 것은 낙태의 중지입니다. 그 후에도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누차에 걸쳐서 되풀이하셔서 낙태가 살인임을 우리가 똑바로 깨닫기를 재촉하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낙태에 관해 말씀하실 때, "무절제한 산아 제한"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습니다. 보통
"낙태"라고 하면, 수술을 통하여 태아를 죽이고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전체 낙태 수의 10-15%만이 수술로 이루어지며, 나머지 85-90%는
약품 등의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특히 수태 초기에 행해지고 있다고 합니다(미국 및 캐나다에서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된 약사들의 단체 책임자인
보고미르 쿠하르 씨의 연구 발표문, 가톨릭 통찰(Catholic Insight) 월간지, 1996년 5월호에
보도).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잉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태아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임신의 진행을 막기 위해 취해지는 그 어떠한 조치든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낙태라고
하는 이 엄청난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할 것을 우리 모두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낙태라는 이 악 뒤에는 죽음의 천사, 곧
마귀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리아 자매는 낙태하는 이들의 죄악을 보속하기 위하여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 무절제한 산아제한으로 나의 가슴은 몹시 아프다. 낙태수술을 막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85.
7. 18)
* 지금도 낙태 수술을 하므로 내 배가 찢어지도록 아프다. 묵주 신공을 더 열심히 바쳐다오. (88
1. 30)
* 무자비하게 살인을 하면서도 살인자라는 것을 모르기에 불쌍하게도 지옥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 당하고 부모가 받아야 할 크나 큰 형벌을 어린 생명들이 받아야만 하다니. 이건 너무나 혹독한 형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죄없는 어린 생명,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생명을 무참히도 짓밟아 버리고 잔인하게도 짓이기고 뭉겨서 찢어 죽여야만 했던 부모들의 무지한 소치와
무관심에서 나는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그래서 너에게 어린 생명이 살려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죄인이 회개하여 나에게 돌아오기를
원한다. 어린 생명이 모태에서 생길 때부터 그것은 핏덩이가 아니라 생명이 흐른다는 것을 모두에게 전해다오. (88 7.
29)
3. 사제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순명하며 그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여라.
나주에서 두번째 메시지를 주시던 날(1985년 8월11일) 성모님께서는 사제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교회 안에서 사제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과 예언된 성모 성심의 승리를 위해서
사제들의 역할이 얼마나 필수적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 즉 교황 성하와 추기경들, 주교들 그리고 신부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중추이며 악마를 쳐부시기
위한 그리스도 군대의 정예 간부들입니다.
물론 사제들도 인간이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권한과 사명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사 성제를 거행하여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축성(祝聖)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으며, 고해성사를 통하여 신자들의
죄를 참으로 사(赦)해 줄 수 있고, 다른 성사들을 통하여서도 은총을 전해 주며, 신자들과 세상에 계시 진리를 가르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며 양들을 돌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작은 그리스도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왜 우리가 사제들을 존경하고 순명하고, 사랑하고, 도와 드리고, 또 그 분들이 악마의
공격에서, 보호 받고 성인 신부들이 될 수 있도록 항상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드려야 하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 사제들을 위하여 너희들이 희생 제물이 되어라. 내가 도와 주고 있다. 그러니 끝까지 보호하여라.
그들은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85. 8. 11)
*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여라. 피땀을 흘리는 듯한 너의 고통은 사제를 위해서 힘이 될
것이다. 배은 망덕으로 오류에 빠진 자들을 위해 사제들이 일할 때, 너희의 희생, 보속이 따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들을 죄에서 해방시킬 수
있겠느냐? 자! 사제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깨어 기도해다오. 시급하구나. (87. 4. 18)
* 신자들은 교황과 추기경, 주교, 모든 사제들에게 순명하기 바란다. 그들은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들이며, 죄로 더러워진 무수한 영혼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하여 내 아들 예수의 능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내 아들 예수도 그들에게 순종하여
하늘에서 부터 세상에 내려온다. (87. 6. 29)
4. 봉헌된 삶을 살아라
* 매사에 자랑하지 말며 겸손과 사랑으로 좋은 것을 소유하지 말고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아가자.
천상의 이 엄마의 품에 안길 때까지 언제나 가난하고 작은 자 되어 모든 이를 섬기는 자가 되자꾸나.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간다고 할 때 어떠한 비판 속에서도 너무 마음 쓰지 말며 많은 채찍을 받는다 해도 다른 이에게 평화를 주고 희생과 보속의 생활로
남에게 이득을 주는 일을 하자. 매일 매순간 자신을 낮추어서 갈바리아 예수님을 생각하고 가난, 겸손, 순종, 정결을 통해서 완덕의 길을 걷기
원하는 나 어머니를 따라서 높은 데서 자꾸만 내려가자.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낮아져야 되지 않겠느냐. 더 많이 생활을 바꾸어 보자.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너희 모두의 가치관마저도 버리자. 회개의 삶, 매순간마다 회개하여 예수님과 대화 나누자. 회개라는 것은 죄만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울며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세속적인 생활을 끊어버리고 복음적인 생활을
그대로 실천해 보려고 노력하자. 백합처럼 청순하고 순결하게 살아 보려고 하였던 그 의지 그대로 살아가자. 고단백일수록 썩으면 냄새가 더 고약하고
태양이 빛날수록 어두움이 짙으다. 다시 한 번 죽고 그리스도를 닮자.(1987년 6월 14일)
주님께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 너희들의 잘못을 단순하고 겸손하게 인정하고 순명하여 내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써 더욱
강렬하게 작은 자의 사랑의 길을 갈망하여라. 그러면 쾌락과 명성, 지위와 권력과 지상 재화 그리고 자존심과 체면 존중이 변하여 영웅적인 행위로
바뀔 것이다. (92. 12. 8)
주님과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우리들이 마음 속에서 모든 허황된 집착들, 즉 재물과 명성과 업적,
다른 이들의 존경, 쾌락, 편안한 삶, 지나친 취미 활동, 특히 자아를 만족 시키려는 데 대한 집착들을 버리며, 그 대신 천주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들, 즉 겸손과 사랑과 순명, 맡은 바 임무에의 충실과 근면, 다른 이들(그들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에게 대한 관용과 존중과 봉사, 그리고
기도 등으로 채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적(敵)은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스스로를 변호하려 하고 스스로의 만족을 추구하려
하는 우리들 자아이므로, 무엇보다도 우리들 자신이 그 어느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다른 이들이 비난할 때 화를
내거나 섭섭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다른 이들의 칭찬에 만족을 느껴서도 안 됩니다.
오로지 우리가 추구할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또한 이에 자신을 봉헌하여 참여하는 것입니다.
5. 내 아들 예수와 내가 인류 구속을 위해 받는 고통에
참여하여라
* 그들은 오히려 자신을 앞세우는 불경과 나의 메시지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무례함 때문에 내 아들
예수에게 큰 아픔을 드린다. 그래서 계속 잔혹하게도 매질하고, 경멸하고, 모욕을 드림으로써 지금도 계속해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계신다. 죄를
지은 불쌍한 영혼들, 위선 때문에 영혼이 파멸에 이르는 불쌍한 나의 자녀들, 죄 중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 아들 예수는 비싼 희생을
치루었는데도 그 고마움조차 모르는 채 무관심 속에서 생활하기에 너의 고통을 더욱 아름답게 봉헌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나의
뜻에 의심 없이 따라 주기 바란다. 너희들의 많은 고통이 하늘에 많은 기쁨을 쌓는다는 것도 또한 믿어 주기 바란다. (88. 2. 4)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수난과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의 구원이 자동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에게 '주님, 주님'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루가 복음 6장 46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그의 신비체인 교회에 연결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워 놓으신 무한한 공로에 의지해 은총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라 자아 부정과 애덕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신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나가고 계시는 구속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신자라고, 교회의 구성원이라고 자처하면서 사실은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아무 것도 공헌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구속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부르시고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사업에 참여할 자격이 스스로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참여하면서도 모든 필요한 은총이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어떠한 선도 우리들 자신에서 유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6. 나의 사랑의 메시지를 온 세계에 전하여라
* 어서 모든 자녀들이 눈물과 피눈물로 호소하는 나의 말에 응답하여 회개하도록 서둘러 온 세상에 나의
사랑의 메시지를 용감하게 전하여라. 비참해져 가는 이 세상이 나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위험한 시련의 이 시기에
모성 지극한 나의 현존을 체험할 것이며, 이 세상은 정화되어 하느님의 의노가 풀려 나의 성심이 반드시 승리하여 주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될
것이며, 그 때에 나를 위하여 일하는 너희들은 반드시 나의 곁에 서리라. (94. 1. 21)
위의 메시지 외에도 성모님께서는 누차에 걸쳐서 당신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서둘러 전파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티없으신 당신의 성심이 승리하고 주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은 전 세계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의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소극적이며 편한 길을 택하려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즉, 모든 것은 천주님의 힘으로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수동적으로 있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가 용감하게, 힘차게, 순교자의 정신을
가지고 당신의 원의를 따르며 주님을 따르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마귀도 그의 악한 계획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많은 인간들을 통하여 분노와 증오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류들을 침투시키고, 인색함과 음욕을 북돋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뜻을 인간들을 통해서
성취하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며, 또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의 도움을 끊임없이 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안일한 사고 방식과 생활에 젖어 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메시지와 징표들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경각심을 요구하시고 당신과 함께 희생적으로 싸워 줄 수 있는 진정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천상 어머니께서 당신
성심의 사도가 되라고 부르시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예외없이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 너희들 자신만의 만족을 찾지 말고 단순하게 나를 사랑하여라. 사탄의 횡포가 무서운 힘으로 점점
커져 가고 있는 지금, 열심한 영혼들까지도 나를 배척하게끔 사탄이 기승을 부리고 있구나. 나를 도와다오. 너희 모두가 영혼을 구하도록 나는
너희에게 성심의 빛을 주겠다. 내 불타는 성심의 빛을 받아 성심의 사도가 되어다오. (87. 5. 17)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도가 아직은
완만하여, 너무나 사람들은 나주에서의 계시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모님의 마음은 더욱 아프실 것입니다. 나주 소식은 대개 나주를
다녀온 분들의 증언을 통해서 또는 지금까지 준비되어 온 출판물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힘차게 그리고
바르게 전 세계에 전파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성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유 때문에 희생적으로 나서는 작은 일꾼들이 많이
있어야겠습니다.
7. 기도하여라. 열심히 기도하여라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요한 복음 15장 5절)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진리, 생명, 선함, 사랑은 천주님께로부터만 유래합니다. 그리고, 천주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로우시며, 항상 당신의 자녀들에게 충만한 강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좋으신 우리 아버지께 그 분의 사랑스럽고 신뢰하는
자녀로써 은총들을 우리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위해 구해야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한한 공로를 세워 놓으셨고, 또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심을 가지고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 알퐁소 드 리구오리의 말씀에 의하면, 특별한 은총은 우리가 꾸준히
인내심과 신뢰심을 가지고 구해야만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구원과 완덕에 이르는 방법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모님께서 모든 은총의 중개자가 되신다는 점, 즉 성 벨라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성모님께 당신의 은총을 충만히 채워 주셨고 또 성모님을 통하여 이 은총이 우리들 모두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신다(성 벨라도
설교집)는 점을 명심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랑과 신뢰심을 가지고 성모님의 중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와 온 세상에 우리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가장 유익한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보다 훨씬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오 복음 6장 33절)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도 열절한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누차에 걸쳐
강조하셨습니다.
* 어서 서둘러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사도들이 나와 함께 모여 기도하며 성령
강림을 준비하였듯이 너희도 내 티없는 성심 안에서 이 마지막 시대의 사도들이 되어 나와 함께 기도하자꾸나. (95. 11.
21)
* 자신들의 멸망의 길에서 되돌아설 줄 모르는 영혼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85. 9.
15)
*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끊임없이 함께 기도해야 한다. (89. 1.
29)
따라서, 우리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뿐 아니라, 전 세계의 운명이 우리들의 기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특별히 묵주 신공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으며, 묵주 신공은 마귀를 퇴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파티마에서 주셨던 말씀, 즉 첫 토요일 신심을 잘 지킬 것을 부탁하셨고, 또 매주 목요일마다
예수 성심이 받으시는 모욕과 성체 성사를 거슬리는 죄들을 보속하기 위하여 성시간 기도를 바쳐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열절한 기도가 이 세상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얼나마 중요한가를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 지금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 때보다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보다도 더 많이 부패한 대타락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대이변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데 너희가 이렇게 모여와 기도해주니 하느님의 진노하심이 늦추어지는 것이다. (1996년 6월
27일, 성시간 기도회 중에 주신 말씀)
열절한 기도를 바침으로써, 우리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주님과 성모님을 도와 드릴 수
있고 따라서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99년 5월 이명길 사도요한
인터넷 상에서의 나주 토론 - 방
인권 형제님께
안녕하십니까?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교육 중이시라 답신을 받기 어려우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중에라도 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님의 글이 일단 공적인 토론의 장에 올려진 이상 그 글을 읽게 되시는 많은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답변이 바람직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답변을 올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주에 관한 토론에 있어서의 저의 역할에 관해 언급하셨는데, 어느 특정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법도 없고, 누구나가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토대로 하여 참여할 수 있는 토론과 의사 전달의 장입니다. 저 역시 이곳에
올라오는 국내외의 여러 형제 자매님들의 글로부터 많은 귀중한 것들을 배우고 있으며 그분들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매개체를
진정으로 진리를 위하고 성 교회의 선익을 위하는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많은 이들을 위한 귀중한 열매들이 맺힐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많은 분들이 주님과 성모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자유롭게 적극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크고 작은 의견
차이들이 표출되기도 하겠지만, 모두가 상대방에 대한 선의를 유지하고 진리와 진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면, 토론 과정의 의견 차이들은 오히려
서로의 이해를 넓고 깊게 해주며 보다 실속있는 일치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여러 지역에
계시는 자매님들께서 이곳에 올라오는 글들을 복사하여 많은 교포 신자들에게 보내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응들이 상당히 좋다고
합니다.
방 인권 형제님의 글의 요점은 교회 안의 일치를 위하여 공지문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기다리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일치를
깨는 것은 가장 나쁜 일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교회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좋은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미 이전의 글들에서도
누차 언급되었듯이 공동체 안에서의 일치의 도모는 우리의 신앙과 양심에 대한 충실과 함께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진리를 바로 전하는 것은 교회의
기본 기능입니다. 만약 교도권의 행사와 진리 사이에 괴리 현상이 발생했을 때, "공동체 안의 일치"라고 하는 대의명분을 위하여 진리 쪽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특히 진리의 전파를 至上 과제로 하는 교회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 개인의 얘기를 하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나, 모쪼록 양해를 구합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님 가정에서 자랐는데, 고등 학교
시절에 좀더 충실한 크리스챤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 개혁 이전의 그리스도교 즉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상식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신교에 대한 불만이라든가 회의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을 모른다든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하나의 약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며 떳떳한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서점에 가서 천주교 서적들을 사다가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예배당에 가기 전에 성당에 가서 미사 구경도 했습니다. 아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 시작되지 않았던 1960대 초기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주 교회가 예배당에서 가끔 들어왔듯이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특히 많은 성인들의 전기는 저에게
전에는 몰랐던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과 거룩하심이 지상에서 실현됨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저에게는 신앙적으로 하나의 지진과도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았던 교리적인 의문점들은 높은 장벽으로 남아있었고, 이 문제들과 씨름하기를 2년 가까이 한 후에야 겨우
개종의 결심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위의 거의 모든 분들이 개신교 신자였고, 더군다나 목사님의 아들로서 개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래도 잘 이해해주시는 편이었으나, 다른 여러 분들이 "일치의 유지"를 위하여 개종하지 않도록 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양심 상의 확신 그리고 이 믿음을 뒷받침해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배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리반에 다닌 후 성세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아버님께서도 "방지거"의 본명으로 가톨릭 부주교님께로부터 병자의 성사를 받고 세상을 떠나셨으며, 미국 온 후에 결국 어머님께서도 아내와 함께
교리를 공부하고 개종하여 시카고의 한국 성당에서 성세를 받으셨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교롭게도 천주 교회 안에서 "일치"와 "진리" 사이의 갈등이라고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저는
천주교에 들어와서 여태까지 35년 동안 이러한 갈등을 한 번도 겪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가톨릭 서적들의 내용은 진리의 말씀들이었고,
신부님들의 가르침은 하등의 의심없이 완전한 신뢰심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그분들도 사적으로는 제한점들을 가진 인간임을 알고 있었으며,
학교의 성모회 중심으로 여러 신부님들과 등산도 다니는 등 인간적으로 친하기도 했습니다. 주교님들은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어려운 아주 높으신 분들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러한 마음의 자세는 예전보다 약간 성숙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대체로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 교회가 주님의 계시 진리를 충만하게 그리고 오류없이 유지하고 또 전해주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또 저는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야말로
무한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주님을 대신하여 성사들을 거행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시며 신자들의 영적 안위를 돌보아주시는 지극히 고귀하시고 고마우신
분들임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광주의 공지문 관계로 토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직자들께 대한 마음과 자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또 사실
공지문 관계로 현재 저와 의견이 다르신 신부님들은 전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소수에 불과하심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만약 일시적인
문제점이 있으면 고치면 되는 것인데 그것을 인간적으로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가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며, 또 서로를 감싸고 위해주어야 하는 것이며, 잘못이 발생했을 때 이를 고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교도권이나 다른 어떤 명분으로도 계시 진리가 희생될 수는 없다라는 점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을 인용하여 여러
번 설명되었습니다. 교도권은 신자들에게 진리를 바로 전하기 위하여 있는 봉사의 기능임도 강조되었습니다. 교도권도 하나의 권한인데 그 권한으로써
개인들이 그들의 양심을 거스리도록 요구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권한보다도 교도권은 더 우리의 양심과 부합되어야
하고 더 충실하게 진리를 수호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삶을 살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와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지난 2천년 동안 어떠한 내외부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주신 순수한 진리를 지켜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며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교회를 당신의 티없는 신부(新婦)로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진리를 양보할 수도 있다," "진리도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라는 사상이 교회 안에 침투해 있다면 우리는 이를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일치"라고 하는 명분을 위해서도 진리는
희생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진리를 양보하여 얻어지는 거짓 평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써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지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노라" (마테오 10장
34절).
그러나 "일치"라는 것이 가치가 없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의 공동체들 안에서 사랑의 일치는 지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공동체 안에서의 일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우리는 명시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천주
교회 안에서 일치의 기준은 가장 선차적으로 (1) 신앙의 유산 즉 정통 교리와 (2) 교황의 수위권입니다. 본당이나 교구 등 지역 교회 안에서의
일치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본당 신부님을 중심으로 사랑과 화목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리고 주교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단위에서의 일치는 신앙의 유산 및 교황권이라고 하는 기준에 최우선적으로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정통 교리에서 부분적으로라도
이탈된다든가, 교황님의 지도를 경시하는 상태에서의 지역 교회의 독립적인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건전한 일치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의 가능성은 세계의 어느 지역 교회에서든 존재한다고 봅니다.
물론 교회는 지역 교회의 독특한 문화적 유산을 존중하며, 가톨릭 신앙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역적인 문화의 포용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역 교회에서 발생하는 신학적, 전례적, 신심적인 전통이 사도 전래의 전통에 부합되지 않을 때 즉 신앙의
본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위험이 있을 때에는 이 지역적인 전통들을 수정 내지 파기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 83조 및
제1204-1206조 참조).
결국 나주의 일들에 관한 논의들도 한국 교회 내에서의 일치 및 한국 교회의 전통의 맥락에서만 고려해서는 안되며, 사도전래의
신앙의 유산에 의거하여 교황님을 중심으로 한 전체 교회의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지금 공지문 상에 발생한 교리적 문제점들을 덮어둠으로써
한국 교회 안의 일치를 유지한다고 해도, 그렇게 얻어지는 일치가 전체 가톨릭 교회 안의 일치라고 하는 보다 우선적인 목표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교회가 지향하는 참된 일치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회사라든가 정치 단체, 또는 친목 단체 등의 인간적인 단체와는 다른,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단체입니다.
그리고 이미 다른 분들도 지적하셨듯이 나주의 일들에 대한 인정을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교도권에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공손히 기다리는 것은 신자로서 가져야 할 필요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주의 인정만이 당면 사안이 아닙니다.
공지문 상에는 특히 성체 성사에 관하여 세 가지의 심각한 교리적 문제점이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교도권에 의하여 정통 교리가 잘못 제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사 위원회의 주요 교의 신학자께서 쓰신 논문에 의하면 공지문 상에서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부정되었던 진정한 이유는
개신교와의 일치라고 하는 전제 하에서 발전된 새로운 성체 신학에 그 성체 기적들이 부합되지 않기 때문임을 밝히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교회의 성체 도리, 즉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주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참으로 변한다라고 하는 교리가 양보되고 밀려난
것입니다. 그러한 새로운 신학을 지켜주기 위하여 우리가 정통적인 성체 도리를 양보하고 그 도리를 뒷받침하는 징표들에 대한 단죄를 양심 상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입니까? 지금 모든 신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선택은 교도권에의 순종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도권에의 순종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습니다. 문제는 정통적인 신앙이 가리워지고 잘못 제시되는 것을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도권의 이름으로 교리상의 문제점들이
제시되어 있다면, 이의 시정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교도권을 수호하는 길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나주에 관한 논의는 교회 전체에 그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라는 오도(誤導)된 기치(旗幟) 하에서
유포되어온 정통 가톨릭 신앙의 희석(稀釋)이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문에 그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고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가톨릭 신앙을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슨 계기(計器)들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가끔 그 계기들이 정확한지를
점검하며 필요한 조정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개인의 신앙 생활도, 우리 본당에서의 생활도, 그리고 우리 교구 차원에서의 일들도 신앙의 유산과
교황님의 지도에 잘 부합되고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고 필요할 때에는 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뜻에 보다 더 부합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특히 나주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의 유산에 다시 충실하고 교황님을 따르도록 말씀과 징표들로써 도와주고
계십니다.
첨언: 한 가지 덧붙입니다. 형제님의 글 일부를 인용합니다. ". . . 저는 교회의 서적을 읽고 묵상하기도 바쁘고,
성서의 내용을 실천하기도 어렵구요. 현재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살아도 충분하기 때문에 새로운 메시지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끝으로 저는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하지만 교회 일을 생각하고 활동하고 공동체를 가꾸는 데는 2등하기 싫습니다.
그렇게 표현도 자주하고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제가 느끼기는 저처럼 열심히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위의 말씀은 소위 사적 계시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에 열심하면 되는 것 아니냐 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분들은 비록 어떤 메시지나 징표들이 진실된 경우에도 이를 신자들이 꼭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사적 계시들이 믿을
교리가 아니라는 뜻이라면 이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및 사도들의 시대에 공적 계시를 완성하셨으므로, 그 후에 새로운 믿을
교리를 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적 계시들이 믿을 교리냐 아니냐 하는 것이 지금 현안 문제가 아닙니다.
나주에서의 일들이 믿을 교리라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일들이 기존의 믿을 교리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그
교리들을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다라는 점은 우리가 꼭 주시해야 할 사항입니다. 결국 사적 계시들에 관한 우선적인 사항은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아무도 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계시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하는 실천 상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장병들이 장군의 명령에 귀기울여야 하며, 운동 선수들이 코치의 지시를 따라야 함과 유사할 것입니다. 사적 계시 또는 트렌트 공의회의 문서에서는
이를 특별 계시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계시들은 이미 주신 진리를 우리가 더 깊이 깨닫고 이에 더 충실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탈선할 때 바른 궤도로 다시 불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 계시는 어떤 시대에 특별히 적용되는 하느님의 의사
전달이십니다. 우리가 이를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계시들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지 못함이 될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노아를 통한 하느님의 경고를 많은 이들이 무시했다가 대홍수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은 요나 선지자를 통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현 시대의 특수 계시들은 현 시대의 전체 교회와 전 인류께 주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니 그분의 뜻하심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가장 율법을 잘 지키고 신앙이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이들이 천주 성자께서 막상 그들 앞에 서셨을
때에 그분을 몰라보고 박해했었음을 다같이 묵상했으면 합니다.
이 분도 드림 1999년 8월 10일 미국 오레곤 주 그레샴 시
방인권 형제님께 보냅니다.
방인권형제님의 글을 읽고 제가 느낀 점을 적어드리고자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단지 개인적인
저의 생각일 뿐이지 나주의 성모님발현을 믿는 이들의 대표자적인 성격에서 쓰는 글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드리고 싶습니다.
처음 도입부분에서 풍겨지는 온화함에서 저는 이 글이 읽어 볼만한 글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개의
경우 나주의 성모님발현에 대해 의구심을 갖은 분들의 글은 형제적인 조언이라기 보다는 조소와 비아냥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읽어가는 동안 평화를
잃게 하곤 합니다. 물론, 발현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모든 글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몇 분의 글들에서 교도권에 대한
순명과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리 안에서 고민하며, 나주의 성모님 발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전파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는가를 고민하는 저에게
도움이 되었던 글들도 있었습니다. 이 게시판을 들르는 기쁨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그런 글들을 접함으로써 저의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님의 글도 그런 기쁨을 기대하며 읽어 내려갔지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실망하였습니다. 형제님의 글은
조소와 비아냥을 넘어서서 "두고보자"라는 식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씀을 한다 하더라도 "너는 틀리고 나는 맞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두고보자."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말이나 글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형제님께서 나주의 성모님발현을 믿는
분들에게 던지는 말씀 중에 하나는 '개인적인 진리를 맞다하고 교회는 교도권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주의 성모님발현을 믿는 분들의 고민은 형제님의 말씀대로 '교회의 일치와 진리 안에서 어떻게 식별하고
생활할 것인가' 입니다. 분명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에는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사람의 판단에 따라 그 일은 악이 될 수도 있고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악으로 다가온 일도 선으로 바뀔 수가 있으며 반대로 선으로 다가온 일도 악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런 일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성녀 소화데레사께서 "사랑은 제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지요."라는 말씀처럼 오직 사랑에 의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들려주는 음성에는 사람은 귀를 기울이겠지만 조소와 비아냥을 들려주는 음성에는
사람의 귀는 문을 닫아 버릴 것입니다. 그럼 서로 자기 얘기만 하다 끝나 버리겠지요.
저는 그런 글들을 쓰시는 분들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씀대로 나주의
성모님 발현이 가짜이고 공지문이 옳다면 나주의 성모님 발현을 믿는 분들은 대단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단히 측은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말이지 가난한 사람들을 본다면 그리스도 신자로써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들을 본다면 마땅히 사랑을 가지고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과 말씨로 어떻게 하면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내 볼까 하는 마음에 안타까워해야 도와 줄수 있는 여러 가지의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복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른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을 볼 때에도 그런 마음이 들진대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아 형제요, 자매로 부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투로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정말로 형제라는 사랑을 느끼신다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겁니다. 두 손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거긴 아니냐, 나랑 가던 길을 가자."해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애절하고 안타까운
사랑의 표현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너는 틀렸어, 너는 틀렸어, 두고 보자, 두고 보자."하며 약을 올리듯이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옳은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어투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분노하게 만듭니다. 분노하는 영혼에게 바른
식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영혼은 영원히 자신의 길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형제님께서 원한 것이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형제님의 행동은 사람을 그렇게 몰고 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또 한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저도 역시 형제님의 말씀대로 기도하며 나주의 성모님 발현이 인정받을
때까지 침묵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저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무어라도 해야지 만이 저의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도 나주의 성모님 발현이 인정될 때까지 저에게 주어진 하나의
조그마한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나주의 성모님을 알지 못했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성모님께서 받으신 따돌림과 이를 믿는 형제들의 고통을
안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주의 성모님 발현을 언젠가는 세상이 인정하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주어진 몫이 있습니다. 두손 놓고 앉아서 방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하느님은 인간의 몫을 조금
떼어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이래로 하느님께서 혼자 하신 일은 없습니다.
홍해를 가르실 때도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찍기를 원하셨고, 라자로를 소생시키실 때에도 라자로를 싸고
있던 베를 사람이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하는 일은 그 정도의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일이며 아주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실천의 몫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가를 때에도 피난하는 이들의 긴박한 기도가 있었고 라자로의 소생 때에도
주위사람들이 눈물어린 간청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나주의 성모님 발현을 믿는 분들 중에도 아무런 말없이 침묵하시면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조그마한 몫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다할 때 하느님의 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영성인 것입니다.
기다림의 영성을 사는 사람도 있고 한편에선 실천하는 영성, 탐구하는 영성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공존하며 연대하고 일치할 때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고 옳다고 생각하는 영성을-기도만을, 실천만을- 종용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의원님이나, 이분도형제님, 마르띠노 형제님, 그리고 이 게시판을 운영하고 계시는 분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아주 조그마한 몫을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을 비난하는
일입니다.
저는 오는 9월 초첨례에도 기도하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찾아가는 아닙니다. 물론 기적을
찾아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신앙에 대해 뭐라고 할 마음은 없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 분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부러운 점도 있으며 더불어 그분들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 지기도 기도드립니다.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나주를 거론하지 않아도 저나 형제님께서 계시는 본당에도 그런 분들은 계시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을 기적을 찾아 모여든
곳이라고 자체적으로 비난하는 신자들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이비교에서 그렇게들 가톨릭을 공격합니다. 그러면 그런 공격을 어떻게 변론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이 형제님께서 나주를 찾는 분들을 기적을 찾아가는 분들이라고 정의하신 것에 대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기적은 매일 같이 일어납니다. 매일의 미사에서 성체의 기적이 일어나는데 굳이 나주를 관광버스를 대절해
찾아가는 것을 웃기는 일이라고 하셨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매일의 미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가 일어나는데 순교성지에 관광버스를 대절해
찾아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신앙을 견고케하기 위함입니다. 형제님도 순교성지에 한번쯤은 다녀오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시면 나주에 사람들이 왜 모이는 지를 이해하실 것이라고 봅니다.
순교자의 숨결이 살아 있는 성지에서 느끼는 체험보다 더 진한 신앙의 체험이 나주의 성모님 집에는
있습니다. 순교성지는 200년 전에 순교 당하시고 그 뜻을 기리는 곳이지만 나주의 성모님집은 바로 현재, 성모님께서 순교하시고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주에 모이는 분들 중에는 그런 성모님의 고통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모이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도 하나의 큰 기쁨과 위로가 되어 주곤 합니다. 방인권형제님도 초대하고 싶습니다. 같이 느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형제적 사랑이
배어나는 조언을 나누고 싶습니다.
1999년 8월 26일 승근배(마르첼로)
(worker@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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