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서의 징표들의
의미
1.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초자연적인 목적을
부여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 그들에게 적합한 질서와 선을
부여하심으로써, 모든 진리와 선의 근원이신 당신의 속성(屬性)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이성(理性)을 지닌
인간들이 자연 속의 질서와 선을 관찰함으로써 그리고 추리함으로써 창조주께서 존재하심과 그분의 위대하심과 좋으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섭리하셨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31-34 참조).
우주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특히 인간들에게는 지성과 자유 의지를
허락하셔서 스스로 선을 인지(認知)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심으로써
초자연적인 목적을 부여하셨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DS3005 참조). 인간의 생명은 이 지상에서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무한한 진리와 선과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아있는 것이다. 인간 외의 우주
내의 모든 피조물들은 오로지 인간들이 그 초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358 참조).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자연적으로 알 수 있는 진리들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진리들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원하고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에 대하여 그리고 그 대상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하여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써
인간들을 초자연적인 목적으로 초대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초자연적인 진리로서 인간들이 스스로의 추리만으로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뿐
아니라, 인간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영원하신 생명에 참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에 관한 사항들도
초자연적인 진리이다. 하느님께서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차원을 무한히 초월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초자연적인 진리들을 아는 것이 필수적일 뿐 아니라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과 생활 자체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생명에 의하여
그분의 차원, 즉 하느님의 신성의 수준에까지 들어올림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996 & #1997 참조).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 속에 하느님의 거룩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초성 생명이 주입되어, 마치 차거운 쇠붙이가 불 속에서 빨갛게 달아오르고 녹아
정화되듯이 인간의 본성이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성화되는 것, 그리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2. 천주 성자의 강생을 통하여 진리의 계시는
완성되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때의 충만함에 이르러 당신의 성자(聖子)를 인간 세계에 보내심으로써 진리의 계시(啓示)를
완성하시고 동시에 타락된 인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셨다. 이러한 천주 성자의 강생(降生)은 인간들의 세계 안에 완전한 진리와 사랑과 생명
자체이신 분이 실제로 들어오시어 인간들을 부르시고 이끌어주심을 뜻하며, 어두움 속에서 헤매던 인간들이 이제는 완전한 진리 속에서, 완전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뿐 아니라, 인간들의 세상에 육화하여 임하신 하느님을 가까이서 흠숭하고 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이제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버리고 강생하신 천주 성자 앞에서 겸손히 무릎꿇어 그분의 진리와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한다. 주님의 초자연적인 진리의 계시는 인간들의 자연적인 본성이나 지식을 격하(格下)시키거나 대체(代替)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완성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차원에로 이끌어준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모든 것들이 주님의 강생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실에
연결되고 순응됨으로써 새롭고 진정한,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과 생명력으로 빛나게 된다.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Dr. Ludwig Ott, Tan Books, p.102 참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초자연적인 가르치심들을 우리가 은총의 빛에
의지하여 우리의 지성과 자유 의지로써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행위이다. 그냥 일리가 있고 좋은 내용같다라고 수긍하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속으실 수 없고, 속이실 수도 없으신,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의 절대적인 진실성에 의지하여 그분의 가르치심 전체를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가톨릭 신앙이다.
3. 참된 기적은 계시 진리에 대한 하느님의 확실한
징표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내용이 우리의 자연적인 지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총의 빛을 통해서만 우리가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만, 비록 은총의 도우심이 주어지드라도 자연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있는 인간들이 그 계시 진리들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온갖 오류의
사상과 표양이 범람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진리에 항상 충실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또 원죄의 상처로 인하여, 우리의
지성은 균형을 잃고 오류와 편견에 사로잡히기가 쉽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진리를 계시하실 때 자주 우리의 자연적인 감지력으로서도
알 수 있는 확실한 징표 즉 기적을 함께 주심으로써 그 계시가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가 보다 쉽게 그리고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구약 시대에도 기적들이 많이 있었지만, 특히 그리스도께서 공생활하시는 동안 놀라운 기적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이는 주님께서
진리의 계시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 엄청난 진리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처럼 많은 징표들을 주셨던 것이다. 성서에는 이러한 징표들에 대하여 많은
기록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내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기적들)이 나를
두고 증언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 5:36)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수많은 표징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 . . 왜냐 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보다도 사람들의 찬사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요한 12:37,
43)
그리하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하늘로 맞아들여져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떠나가서 사방에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며 표징들이 따르게
하심으로써 말씀을 굳건히 뒷받침하셨다. (마르꼬 16:19-20)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기적의 역할을 경시하는 현대주의자들에게
대하여 교회에서는 무류지권(無謬之權)을 발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기적들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 .
. 또는 기적들이 확실히 인지될 수 없다든지, 크리스챤 신앙의 신적(神的) 근원이 기적들에 의하여 정확하게 증명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DS#3034)
이처럼 참된 기적은 단순히 기이한 현상의 차원을 넘어서 계시된 진리의
진실성 즉 신적 근원을 보장해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징표이며, 따라서 우리를 주님의 진리와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이며 도우심이기도 하다. 이것이 참된 기적과 마술 등에 의한 기이한 현상들을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참된 기적은 우리를 하느님의 진리와 그분께 봉사하는 삶에로 이끌어주는 의미와 목적을 담고 있는 반면, 마술이나 심령술 등에 의한 현상들은
주님의 뜻을 담지 않고 있는 빈 껍데기이며 단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이다.
그런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완성되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기적도 필요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지난 2천년 간의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서,
특히 성인들의 생애 중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기적들의 목적은 새로운 진리를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어
교회에 위탁되어있는 진리를 우리가 더 깊이 깨닫고 더 충실히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교회에 침투하는 오류들을
격퇴하고, 나태에 빠진 신자들을 각성시키고 회개시키신다. 교회에서는 "성령께서 교회가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교계 제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은혜들로써 교회를 인도하신다,"라고 가르치신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768). 단, 우리가 기적의 보도들을 접할 때, 맹목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신중히 분별하여야 할 것이다. 그 기적들이 우리를 주님의 진리로 이끌어주는가 아니면 더 멀어지게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분별의 척도가 될 것이다.
4. 나주에서 주시는 기적들의
의미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14년간 계속되어오고 있는 나주에서의 많은
기적의 징표들은 교회의 진로(進路)를 위하여 지극히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교회가 처한 신앙과 도덕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고 추진력을 공급해줄 수 있다. 그런데, 그 기적들이 주님의 계시 진리와 교회의 사명에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지도 않고, 그 기적들의 가능성조차 무조건 배척해버리는 것은 이미 교회에서 단죄한 매우 잘못되고 위험한 태도일 것이다. 신자들은
나주에서의 일들이 참으로 우리를 주님의 진리에로, 그 진리에 바탕을 둔 삶에로 이끌어주는가를 분별해야 하며, 만약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떠한 진리에로 우리를 이끌어주는가에 대하여 숙고함이 필요할 것이다.
a. 눈물과
피눈물.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눈물도 중요하지만, 내가 주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 (1987년 10월 19일). 즉, 우리는 성모상에서 눈물과 피눈물이 흐른다는 경이로운 현상 그 자체에만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
눈물과 피눈물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을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말해서, 어째서 성모님께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만
계시지 않고, 그토록 슬프게 피눈물을 흘리시는가에 대한 연유를 깨달아야 된다는 뜻이다. 그 연유를 모르면, 성모님의 눈물, 피눈물의 징표에
대하여 거부감부터 먼저 느끼게 될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이시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그러면,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의 어머니이심도 틀림없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심에 대하여 이를 남의 일처럼 지나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녀로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고 그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한히 거룩하시며 사랑 자체이신 삼위 일체 하느님께 지극히
밀접히 일치되어 계시는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염려하시며, 도와주려고 하시며, 또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에 얼마나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가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성모 신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나주에서의 메시지들을 통하여 처음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서, 성모님께서는 인간들의 구원과 성화를 위하여 필수적인 역할을 해오고 계시며, 이는 무엇보다도
모든 성인들의 생애를 통하여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 교회 안에서조차 그리스도의 강생에 대한 신앙이 희석(稀釋)되고 따라서
성모님께 대한 공경도 뒷전에 밀려있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되어 있다. 교회는 커다란 하나의 가정인데, 그 가정의 어머니를 소홀히하고
경원시(敬遠視)함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 온갖 문제점들이 발생해오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챤 진리의 핵심은 천주 성자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육화(肉化)되어 우리 가운데 강생하여 계신다는 사실이다 (요한1서 4장 2절 참조).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천주 성자의 강생이 동정녀 마리아의
사랑과 겸손에 찬, 그러나 자유로운 동의에 의해 출발되기를 원하셨다. 마치 에와가 마귀의 꼬임에 먼저 빠져서 아담을 끌어들였던 것처럼, 한
여인의 겸손과 사랑에 찬 순명을 토대로 구세주의 강생이 이어지고 인류 구원의 역사가 펼쳐져나가기를 섭리하신 것이다. 어머니가 빠진 가정은
따뜻함과 생동력이 결여되기 마련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주에서의 징표들을 통하여 우리가 성모님께 대한 참되고 깊은 신심을 다시 활성화하기를 원하고
계시며, 또 이를 통하여 인류 구원 사업의 핵심인 천주 성자의 강생과 수난 사실에 대한 신앙을 되찾기를 원하고 계신다. 오직 그 길만이 현재
교회를 세속화시키려는 현대주의를 확실히 극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성모님께서도 나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주님의 협력자로 간택된
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함이고, 너희들도 또한 나의 협력자로 간택받았음을 명심하고 나의 말을 잘 받아들여
모두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여라" (1991년 8월 27일). 자녀들의 수많은 문제점들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며 모든
자녀들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시며, 또 신앙의 상실과 도덕적 타락에 빠져있는 인류에게 내릴 하느님의 정의의 진노를 막아주실 분은
오직 한 분, 성모님 뿐이시다.
b. 향유와
향기. 성모님께서는
나주에서 700일간 주신 향유와 수시로 주시는 향기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과 우정"을 뜻한다고 알려주셨다
(1993년 4월 8일 메시지). 모든 참된 기적들이 그러하듯이, 나주의 향유와 향기 역시 단순히 기이한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징표들을 통하여 사랑과 믿음이 메마른 인간들의 마음 속에 천상 모후의
따뜻한 사랑을 불어넣어주시고 성모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위한 강력한 은총의 중개자요 변호자가 되심을 일깨워주고자
하신다.
성모님께서는 메시지를 통하여 당신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임을
누차에 걸쳐서 알려주셨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약하여, 성모님께 대한 신뢰심이 흔들리기 쉽다.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다가도 어려움에
부딪치면 쉽게 용기를 잃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모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때때로 향기와 향유의
징표들을 사용하시어 우리에게 당신의 현존과 사랑과 우정, 그리고 당신의 기쁨을 외적으로 표현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향기가 나지 않을 때에도
항상 성모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믿고, 성모님께서 맡기시는 일을 변함없이 해나가야 할 것이다.
c. 성체 기적들 (1).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의 외양이 주님의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하는 기적은 지금까지 12회에 걸쳐서 일어났다. 이 기적들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성체와
성혈로 변한 것이 아니고, 미사 때 사제의 축성을 통하여 이미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주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하고 오직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남아있었으나,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주신 기적들을 통하여 그 신비에 싸인 진실을 외양으로도 보여주시는 것이다. 즉 이 기적들을 통하여 이미
교회를 통하여 가르쳐지고 있는 성체 성사에 대한 진리를 재확인하여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기적들을 보여주심으로써 식어진 우리의 신앙이 다시
불타오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 기적들의 기이함을 경탄함에 머물지 말고, 그 기적들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성체
성사에 대한 우리의 잘못되거나 나태한 신앙 자세를 고쳐야 할 것이다. 지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체 안에 당신의 살과 피와 영혼과 신성을
지니시고 실제로 계시는 주님께 대한 신앙이 개탄할 정도로 약해져 있으며, 고해 성사를 먼저 볼 필요가 있는 경우에도 이를 게을리하고 그대로
영성체에 임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하여 깊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체 성사에 대한 신앙의 상실과 모령성체 때문에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계시며 성모님께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d. 성체 기적들
(2). 나주의
성체 기적들 중에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체가 기적적으로 위에서 내려오신 기적이 일곱 번에 걸쳐서 일어났다.
이러한 기적들과 위에 언급된 기적들을 합하면 모두 19회에 걸쳐서 성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양으로 변함이 없이 위에서
내려오신 기적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7회에 걸친 이러한 기적들은 주님께서 성체 성사 안에 실제로 계심을 외양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떠한 진리에로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가?
그 일곱 번 중에 맨 첫 번 기적은 1994년 11월 24일 당시
교황 대사님이셨던 죠반니 불라이티스 대주교님께서 나주의 경당에 오셨을 때에 일어났다. 기도하시는 중에 갑자기 큰 성체가 이미 둘로 나뉘어져서
한 쪽은 율리아 자매의 오른 쪽 손가락들 사이에, 다른 한 쪽은 왼쪽 손가락들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성 미카엘 대천사로 하여금
죄 중에 있는 사제가 성체를 영하기 전에 모셔오게 하신 것이라고 메시지를 통해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이 기적이 지니는 뜻, 즉 교훈은
무엇일까? 아마도 무한히 거룩한 성체 성사를 주관하는 사제들의 성성을 강조하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사제직의 고귀성, 그리고 그 고귀성에
합당한 거룩함과 믿음, 그리고 복음서의 교훈에 바탕을 둔 생활을 주님께서 요구하고 계시는 것 같다. 동시에 성체 성사의 지극히 고귀하심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 일깨워주시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징표를 주심으로써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교황 대사님께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성체 성사에 대한 진리를 널리 전하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기신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하느님께서 징표를 주실 때에는 항상
그 징표를 받는 이들에게 그 징표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고 하는 임무를 주시기 때문이다.
e. 성체 기적들
(3). 성체가
내려오신 일곱 번의 기적들 중에서 1995년 7월 1일 새벽과 1996년 7월 1일 새벽에 있었던 일들은 또다른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두 번의 경우에는 철야 기도 중에 율리아 자매가 나주의 경당의 앞, 성모님 상 위에 걸려있는 예수님의 고상이 갑자기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일곱 상처로부터 많은 피를 흘리고 계심을 보았다. 그리고 곧 그 성혈이 일곱 개의
하얀 성체로 변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 성체들이 1995년 7월 1일에는 성모님 상 앞의 제단 위에 힘차게 소리를 내며 내려오셨고, 1996년
7월 1일에는 율리아 자매의 입속으로 임하셨다. 즉, 이 두 경우에는 위에서 내려온 성체의 출처가 밝혀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마다, 성체가 면병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우리 죄의 보속을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희생을 바치고 계시는 예수님 자신이심을 잊지말도록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두 경우의 성체 기적이 담고 있는 진리, 즉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들의 죄 때문에 수난하고 계시는 사실, 그리고 이 사실이 특히 미사 성제를 통하여 재현되며 성체는 바로 그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라는 진리는 가톨릭 신앙의 진수라고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현대에 와서 너무나 망각되어 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시어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시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은 반드시 용서해주시지만, 동시에 무한히 공의로우신 분이셔서, 뉘우치지 않은 죄,
보속되지 않은 죄를 그대로 수용하시지 않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이시고 선이시고 거룩함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진리와 사랑과 거룩함이 아닌 불순한 그 어떠한 것도 당신 안에 수용하실 수 없으시다. 이는 마치 뜨거운 태양에 불순한 티끌들이 가까이 간다면
순식간에 타버리지 않을 수 없음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피하고, 지은 죄를 뉘우치고 보속하며, 또 남은 보속은
연옥에서 완전히 한 다음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인식을 흐려주며, 고해 성사와 보속에 대한
필요성을 망각하게 하는 현대주의의 무서운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나주에서 주시는 십자가와 보속의 메시지들에 대해 이해하고 또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의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그 한 번의 희생 제사로 인하여 모든 인류의 죄가 넘치도록 충분히 보속되었다. 주님께서 더 이상 수난하시는 것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2천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고, 성장하시고, 노동하시고, 기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사실은
그 당시의 시간과 장소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의 매순간 마다에 현존하는 사실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5 참조).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것은 그 당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며, 그 당시와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함이었으며,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실이 우리의 삶 속에 더욱 깊어지고 강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2천년 전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미사 성제를 통하여
실제로 재현되고 지속되고 있음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상들 및 성화들도 이러한 구세주의 육화의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해주고 있으며, 또 삼종
기도, 묵주 기도, 성로 선공, 묵상, 영적 독서, 등을 통하여, 그리고 극기와 이웃들에 대한 애덕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강생을 기억하게 되고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 전체가 그리스도의 강생과 인류 구속 활동의 현실 속으로 점입되고 일치되어야
한다.
그런데, 율리아 자매가 1981년 처음 입교한 후 철야 기도를 바치는
중에 예수님께서 처참히 피흘리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특히 주님의 성심이 찢어져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를 본 율리아 자매는 세상의
죄를 보속하여 주님을 위로해드리고저 스스로 보속의 생활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이러한 사건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의 환시로서만 생각해서는
안되며, 지금도 현실로서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의 수난의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누차에 걸쳐서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 상에서 고통받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계시는데 무슨 고통이냐고 반론을 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 사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 개개인들이 연결되어 있는 현실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18 참조).
그렇다면, 1995년 7월 1일과 1996년 7월 1일에 율리아
자매가 보았던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은 단순한 환시일 뿐이거나 극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망각해왔던, 그러나 교회의 가르치심에 확고히
부합되는 엄연한 현실임을 알 수가 있다. 주님께서 지금 수난하시는 것은 2천년 전에 주님께서 받으신 고통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2천년 전의
주님의 수난이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모든 인간들에게 현실로서 적용된다는 뜻이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원의 은총이 모든
이의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다.
(f) 보속의 협력자이신
성모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실이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현실로서 적용된다면, 그리스도의 필수적인 협력자이신 성모님의 역할 역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에게 현실로서 접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누차에 걸쳐서 당신께서 그리스도의 인류 구속 사업에 있어서의 협력자,
즉 공동 구속자이심을 말씀하셨다. 이는 구세주가 두 분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제2의 아담을 돕는 제2의
에와로서 구세주의 활동에 필수적으로 참여하시고 협력하신다는 뜻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18 참조). 성모님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가 된 우리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마르꼬 8:34) 작은
보속의 협력자들이 되고 작은 공동 구속자들이 되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
성직자들께서는 더욱 그러하시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 중에서 성모님께서는 가장 뛰어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협력자가 되고 공동 구속자가
되신다. 왜냐 하면, 성모님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그 역할을 위하여 잉태 순간으로부터 죄에 물듦이 없이 보존되셨고
지극한 사랑과 겸손과 거룩함으로 가득차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동안에만 협력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실 것이다. 특히 창세기 3장 15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악마의 머리를 짓밟으실 여인으로서의
성모님의 역할이 날이 갈수록 더 강화되고 뚜렷이 드러나게될 것이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상을 통하여 도합 700일간이나 눈물과
피눈물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이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의 현실을 보여주시는 징표인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몽소 승천하시어 천국에 계시는데 어째서 지금도 그처럼 고통을 받으시고 피눈물을 흘리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현실로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리고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필수적으로 개입되어 계심을 기억한다면,
성모님의 보속의 협력자로서의 역할이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로서 적용되고 나타남에 대하여 조금도 의아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주에서의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은 하나의 상징이나 극적인 표현이 아니라, 확실한 현실이다.
5. 결론
지금까지 나주에서 있었던 기적의 징표들은 그 숫자로 보나 강도로 보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것들이었다. 교회 역사 상 수많은 징표들이 있었지만, 나주에서처럼 한 곳에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있었던 일은
없었다. 모든 참된 기적의 징표들이 귀중한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나주의 기적들이 담고 있는 하느님의 뜻과 교훈은 참으로 엄청난
것들일 것이다. 우리가 아직 그 작은 일부밖에 깨닫지 못하고 있는 나주에서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의 깊은 뜻은 앞으로 두고 두고 많은 신학자들과
신자들 모두에 의해 연구되고 음미되고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나주라는 작은 곳을 통하여 전 인류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 전체를 위하여 엄청난 은총을 베풀어주려고 하심이 틀림없다.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등을 돌리고 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 때가 늦지 않았다고 하시며 모든 자녀들이 한 시 빨리 깨어나기를 애타게 기다리신다. 위기가 닥치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서 성모님의 손을 잡아야겠다.
Mary's Touch By Mail
나주 성모님 반대론의 문제점들
바다에 사는 연어가 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지 그 이유를 모르면, 그 연어가 어리석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스승께서 십자가의 길을 걷지 마시도록 간곡히
말렸다.
우리의 사고 방식과 개념의 기본틀에 문제가 있을 때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볼 수 없고 엉뚱한 추측과 결론에 이르기 쉽다.
작금에 나주 성모님께 관련하여 온갖 왜곡된 내용들이 유포되고 있는 현황과 관련해서,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2천년 전에 유대 민족이 구세주의 강림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우리 민족이 구세주의 모친을
배척하려는가.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 하면, 만약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이
현세적 사고 방식과 타협하는 내용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반대가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따라 내려간다면
얼마나 쉬울까? 반대와 모함이 있다는 것은 성모님께서 가져오시는 것이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진리라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나주 성모님을 반대하는 분들이 무신론자도 아니고, 바로 성교회의 자녀들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현재 우리 교회의 구성원들의 믿음에 문제가 없는가? 과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탁하신 진리들을 희석시키거나 변질시킴없이 바로
수용하고 있는가?
만약 현재 가지고 있는 믿음의 내용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와 잘 부합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리고 나주에서의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성모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저항과 갈등을 느끼게 될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체 성사에 대하여 교회의 가르침대로 믿지 못하고 있다면, 나주에서의 성체 성사 관련 메시지들과 기적들이
모순과 골치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크리스챤의 길이 십자가의 길, 즉 사랑과 희생의 길이라는 것을 망각했다면, 율리아 자매가 보아 온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고통받으시고 피흘리시는 예수님, 성모상을 통하여 피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 그리고 율리아 자매의 거듭되는 고통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 낙태를 찬성하고 있거나 과거의 낙태를 아직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성모님의 낙태 관련 메시지들, 그리고 율리아 자매가
받아온 낙태 보속 고통들을 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마음 속의 장벽이 너무나 높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근년에 와서 우리 나라 뿐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이 약화되고, 모든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신심도 잊혀지고, 고해 성사도 잘 보지 않고, 사제직과 수도 성소의
가치에 대한 인식도 희박해지고, 주일 의무도 등한시하고, 낙태를 비롯한 수많은 악에 대하여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향이 전개되어 오고 있는
실정이다. 주님께서 베푸시고, 교회 학자들이 설명해오고, 성인 성녀들이 실천해 온 영원한 진리가 우리들의 안일주의 때문에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주 성모님의 순수하고도 강력한 사랑과 진리의 메시지들에 대하여 갈등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닐까? 나주에서의 메시지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의거하여 변화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속적 사고 방식을 버리고, 가정의 평화를
회복하며, 기도와 사랑과 자아 포기와 봉헌의 삶으로써 성모님께서 이끄시는 영적 전투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통한 주님의 가르치심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과거에도 내려주셨고 또 지금도 나주를 통해
주시는 성모님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쉽게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에 와서 특히 등한시되고 있는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진리들과 성체 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고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류 구원 역사(役事)에 있어서의 성모님의 필수적인 역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성모님께서 필수적인 보조 역할을 하시도록 섭리하셨다. 그리하여, 먼저
천사를 통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동의를 구하시고, 마리아께서 동의하시자 곧 성령께서 임하시어 구세주가 강생하셨다. 성자께서는 성모님의 모태에서
성장하셨으며, 탄생하신 후에도 성모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자라나셨다. 그리고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시기까지 약 30년을 성모님과 함께
생활하셨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에도 성모님의 역할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으나 밀접하고도 필수적인 방법으로 당신의 아드님을
뒷받침하고 계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공생활 동안의 성모님의 역할의 일부를 엿볼 수 있으니, 즉 가나에서의 혼인 잔치에서 우리들의 필요와
어려움을 자상히 살피시어 주님께 부탁드려주시는, 즉 은총의 중개자로서의 성모님의 역할을 보여주고 계시며 (요한 2장 1-11절), 십자가
밑에서는 당신의 아들과 함께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을 바치시는 보속의 협조자로서의 성모님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요한 19장
26-27절).
그리고 십자가 상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모든 크리스챤을 대표하는 요한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주심으로써 성모님께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시며 성교회의 모친이 되신다는 중요한 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다.
성모님의 이러한 역할이 성모님의 몽소 승천과 더불어 끝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교회를 통하여 특히 성체 성사를 통하여 우리와 계속 함께 계심과 같이, 성모님께서도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항상 성교회를 어머니로서 돌보고 계시며, 온 인류가 회개하고 구원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도리들을 베풀어주시고 혹독한 고통과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의 은총을 마련하시어 이를 당신 교회에 위탁하셨으나,
인간들이 이를 잘 깨닫지 못하고 거듭하여 오류에 빠져서 진리를 멀리하고 허황된 목표들을 향하여 가는 탓에, 성모님께서는 누차에 걸쳐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어 방황하는 당신의 불쌍한 자녀들을 불러모으고 계신다.
특히 16세기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 메시지와 징표를 주셔서 천만 명 가까운 멕시코 주민 거의 모두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시고 해마다
수만 명의 사람을 잡아 우상에게 제사 바치던 악한 풍습을 소멸시켜주셨다.
1830년에는 불란서의 빠리에서 카타리나 수녀를 통하여 메시지를 주시고 기적의 패를 만들도록 해주심으로써 인간들이 성모님께
의지하여 악에서 벗어나고 주님께로 갈 수 있도록 수많은 은총을 퍼부어주고 계신다. 그 밖에도 루르드, 파티마 등 여러 곳에서 인류가 영적인
태만과 잠에서 깨어나도록 계속하여 호소해오고 계신다.
1985년부터는 한국의 나주에서 지금까지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더 강력하게 메시지와 징표들을 내려주고 계심으로써 드디어
창세기와 묵시록에 예언된 여인과 마귀와의 전투가 과연 절정에 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주 성모님의 사랑의 메시지 내용들과 징표들에 대한 소식은 그 동안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 전해지고 있으며, 수많은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깊은 감명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또 성모님의 원의를 실천하려고 진지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아마 그들이 평소에 성체 성사와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깊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성체께로 우리를 이끄시는 나주 성모님
나주에서 성모님이 가장 강조하시는 내용이 바로 성체 성사 안에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우리가 알아차리고 또 이 엄청나게 중요한
도리를 모든 이들에게 바로 전하라고 하는 부탁이시다.
그런데 교회 안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많은 평신도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일부 성직자들까지도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실존을
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에는 일획의 의심도 여지도 없다. 즉, 미사 때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순간부터, 빵과 포도주의
형태는 남아 있지만, 그 본질은 없어지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죽으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존재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혼이 함께 존재하신다. 즉, 완전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계신다. 빵과 포도주 안에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는 그
형태만 남아있을뿐 그 본질이 없어졌으므로, 성체 바로 그 자체가 살아계시는 예수님이시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체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본질로써 흠숭하고 조배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보잘 것 없는 물체에 불과한 밀떡과 포도주의 형태 속에 당신의 고귀하신 본질을 감추시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 째는 우리들과의 내적 일치를 위하여 우리들 안에 쉽게 오실 수 있으시기 위하여 우리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밀떡과 포도주의 형태를 취하신 것이요, 둘째는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시기 위하심이다. 성체를 볼 때 우리 육신의 눈은 빵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 축성된 밀떡이 당신의 몸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빵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체를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인정하여 흠숭하고 또 받아모시는 것이다. 주님 본래의 모습은 밀떡의 형태가
아니라, 무한한 영광과 위엄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에 싸여 계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을 다 드러내시면 주님을 환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가난하고 작은 마음들이다. 그리하여 당신을 미천한 모습으로 낮추시고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수많은 이들이 당신을 무시하고 짓밟고 비웃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러나 그 많은 군중들사이에서 진정한
작은 사랑들을 아직도 찾고 계신다.
분별의 기준은 주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계시 진리이다.
신앙과 윤리에 관한 모든 사항들, 즉 우리의 사견들, 주장들, 학설들, 토론 내용들, 사적 계시들 모두에 대하여 우리는 교회에
맡겨진 주님의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하여야 한다. 한 개인이 개발해낸 신학이 있을 수 없으며, 한 사회나 한 국가, 또는 한 시대에 적응된
진보적인 진리가 있을 수 없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불변하는 영원한 진리이다. 이
진리가 변질됨이 없이 보존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지켜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교리들에 충실해야 하며, 교황님의 가르치심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따라야 한다. 그리고 교황님과 일치하는 모든 성직자들을 따라야 한다. 또 성인들의 가르침과 전기를 자주 읽고 묵상하여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자주 점검해야 한다.
결국 나주 성모님께 관련한 찬반의 논의도 교회에 위탁된 주님의 진리, 즉 공적 계시 내용에 의하여 판결이 나야 된다. 어느
쪽이든 주님의 가르치심에 참으로 충실한 쪽이
진실된 쪽이다.
징표의 역할과 중요성
나주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이 지적하는 한가지는 나주에 너무 기적이 많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무슨 TV Show에 출연하신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럴 수 있느냐고 한다.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유대교
지도자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기적을 행하시기를 단호히 거절하셨다는 예로써 기적들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이와 결부하여 심지어는 율리아 자매가 기적들을 조작해내고 있다라는 비난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근거없는 비난은 무고한
사람을 단지 의심과 짐작을 바탕으로 하여 하는 것으로서 책임있는 사람으로서는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무고하게 남을 비난하거나 단죄하는 것은 십계명 중 제 8계명에 어긋나는 일이다.
기적 즉 징표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는 하느님께서 징표들을 쓰시는 목적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징표들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주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재미있게 해주시거나 자랑하시기 위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은 떠나가서 사방에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며 표징들이 따르게 하심으로써 말씀을
굳건히 뒷받침 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르꼬 16장 20절). 사실 주님께서도 공생활 중에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 그 목적은 당신의
가르치심이 진실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심이었다.
오늘날 세계에는 메시지를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수많은 이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참된 메시지와
거짓 메시지들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 기준은 간단하다. 메시지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되는가를 보아야 되고, 또 확실한 징표가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메시지와 함께 주어지는 징표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도 “눈물도 중요하지만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라고 하심으로써 (1987년 10월 19일) 징표가 메시지의
참됨을 확인해주기 위해 주어지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즉 메시지를 통하여 성모님께서는 주님께서 이미 주신 가르치심들을 모성적인 자상함과 사랑으로 자세히 설명해주셨고, 또 당신의
티없으신 성심이 왜 그렇게 슬프신지도 알려주셨다. 그리고 눈물과 피눈물이라는 징표로써 그 메시지를 뒷받침하셨다. 또 그 다음에는 향유를 흘려주심으로써,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당신의 현존을 재확인하여 주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듭하여 보여주시는 성체 기적들은 이 기적들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대기적은 미사 때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마다 일어나고 있다.
전 세계의 성당들에서 매일 끊임없이 그 놀라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육안으로써 그 변화를 볼 수 없을 뿐이다. 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우리가 더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하여 그 신비의 내용을 외적으로도 보여 주시는 것이 나주에서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성체 기적들이다. 즉, 이 성체 기적들이 성체 성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치심을 보조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기적의 의미이다. 진리를 우리가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중한 역할인가?
그런데 우리가 여러 가지 헛된 말로써 징표들을 멸시하고 징표를 주시는 주님의 뜻을 망각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들 중 일부는 성체가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체가 나주의 경당 안에서 위로부터
강림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마 율리아 자매가 호주머니에서 면병을 꺼내놓은 것일 것이라는등 억측을 하는 이들도
있다.
당시에 경당 안에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가능성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성체가 위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비디오에
찍힌 경우도 있기 때문에 율리아 씨나 다른 분들이 개입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도, 위에서 내려온 것이 성체인지 면병인지 알 수가
없다는 의견들이 나오기도 했다. 사제의 축성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1995년 7월 1일 일곱 개의 성체가 내려왔을 때 대주교님의 명에 의하여 성체를 영하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율리아 자매가 영한 성체가 살과 피의 형태로 변하였다. 그 피의 일부를 프란시스 수 신부님과 피트 마르시알 신부님께서
손가락으로 찍으셔서 흰 수건에 닦으셨는데, 이 수건에 묻은 피가 나중에 서울 대학교 법의학과 실험실에서의 DNA검사 결과 사람의 피라는 판명이
나왔다.
그리고, 나주에 내려오신 성체가 어떤 성당에서 천사에 의해 옮겨진 것일 수도 있고, 또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인지도 모른다.
성체는 천사들의 양식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1917년 파티마에서 성 미카엘 대 천사가 성체를 모셔와서 아이들에게 영해준 전례도
있다.
성체란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이시므로, 그분께서 어떤 형태로 언제 어디에 임하시든 이는 그분의 뜻에 달린 것이지, 우리가
“주님, 그렇게 오시면 안됩니다.”라고 막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고위 성직자들이나 신부님들 앞에서 일어났던 점을 들어서 율리아가 원하는 때마다
기적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러면, 1531년에 과달루페의 징표가 당시 그 지방의 교회 최고 장상이셨던 추마라가 주교님 앞에서 주어졌던 사실도 이상하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성의가 아니라, 완 디에고의 개인적인 의도였을 것이라고 의심해야 하는가? 구약 시대에 하느님의 기적이 모세를
통하여 거듭하여 이집트 왕 파라오 앞에서 일어났던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징표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성체 기적이 성교회를 대표하시는 분들 앞에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바로 교회의 중요성, 그리고 성체 축성권과 사죄권 및 교도권을 위임받아 계시는 성직자들의 중요성을 주님께서 강조해주시는
것이며, 또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 성체 성사를 더욱 중요시하고 또 이를 가르치라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명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는 현실을 부정하고 내세만을 강조한다는 비난도 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현세를 나쁘게 보는가라고 하는 주장이다.
나주에서의 메시지 전반에 걸쳐서 세상에 창궐하는 죄악과 불신이 탄식되고 있고 회개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
이것이 현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가?
주님께서 죄인들과 가까이 하신 것은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지, 그들의 죄를 용납하셔서가 아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죄 중에
잡혀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으리니, 가서 이제는 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요한 8장
11절).
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이라고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했으니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요한 15장
19절).
무한한 선이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좋다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과거에 현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고
우리의 육신도 나쁜 것으로 보는 이단도 있었으나, 교회의 가르침은 이와는 다르다.
그러면, 현세와 물질과 육신을 우상화하는 현대의 사상들과 교회의 가르침과는 유사한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
교회의 자녀들은 현세를 하나의 독립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영원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본다. 영원과 비교할 때 우리의 현세는
너무나 짧고 제한이 많다. 그래서 이 현세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때 그것은 너무나 허망되고 비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는 현세안의 매순간의 가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한다. 왜냐 하면, 우리는
현세안에서의 삶을 통하여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사랑과 행복의 열매를 엮을 수도 있고, 영원히 지속되는 불행의 씨앗을 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현세에서의 단 한 순간도 낭비하거나 잘못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나주에 대하여 현세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어색한 비난이 나오고 있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현대에 와서 교회
안에까지 현세 중심적인 사상이 침투해서일 것으로 본다. 주님께서 펴신 가르치심의 중심이 마치 이 현세를 어떻게 잘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인양
설명하려는 풍조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교회는 현세의 문제들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다. 역사상 가톨릭 교회만큼 교육과 병원 기타 복지사업을 해온
종교나 단체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배고픈 자들을 먹여주셨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고 물질을 필요로하는
이상 교회의 박애 사업은 항상 계속될 것이고 또 힘껏 지원되고 참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외적인 선행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마르따와 그의 아우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마르따는 주님께 마리아를 책망하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마리아가 더 나은 쪽을 선택했다라고 말씀하였다
(루까 10장 38-42절). 성바오로 종도께서도 사랑이 없는 자선 행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고린토 전서 13장
3절).
테레사 수녀 같은 분도 그처럼 사랑과 자비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그 밑바탕에는 깊은 내적인 신심 생활, 즉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또 성모님과의 밀접한 일치가 있었다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체 조배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관상 수도 생활을 현실 도피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진수를 모르는 데에서 유래된
착오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작고 가난한 길로 오시는 주님
2천년 전 구세주께서는 베들레헴의 누추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 성모님께서도 마찬 가지로 나주라고 하는 작은 곳에서 평범한 한
가정을 택하시어 지금까지 엄청난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주어 오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비천함에 싸여 계신 주님의 고귀한 손길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손길에 담겨진 주님의 깊은 사랑과
자비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도 작고 가난해져야 한다. 그래서 하루 속히 나주를 통하여 뻗쳐주시는 성모님의
손을 잡고 성교회를 활성화하며 세상을 교화하는 일에 모두들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진리의 빛이 오류의 암혹을 몰아내고, 교회를 통한 은총의 강물이 힘차게 흘러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나라와 자연적인 인간 세계가
성모님을 통하여 다시 한데 묶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원한 목적은 이 세속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아니며, 오직 완전한 선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이 분도
Gresham, OR
97030, U. S. A
결국 무엇이 근본 문제인가?
1. 삶의 우선
순위
최근에 보도된 미국의 한 여론
조사 결과가 흥미로웠다. "당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에 1위를 차지한 대답은 "안정된 가정"이었고, 2위가
"재정적인 안정," 그리고 3위가 "종교" 즉 "신앙 생활"이었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보아서 당연한 대답인 것 같기도 하고, 신앙 생활이
3위라도 된 것은 미국 사회에 아직 크리스챤 전통이 꽤 남아있다는 뜻 같기도 하다.
현실이 그렇다 치드라도,
당위성으로 볼 때 그 대답들의 순서가 그리 잘되지 못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신앙 생활, 즉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일이
가정의 행복, 재정의 안정보다 낮은 순위를 차지한 것은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의 결과일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에게는 당연히 "하느님의 일들"이 최고 순위일 것이다. 아니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가정의 안정과 번영을
도모해야 하고 직업에서 살아남고 성공해야 하는 일반 평신도들로서는 그럴 수 없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당연히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 관한 일들이 결국은 인간의 행복과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부수적인 사항이 되고,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계명들이 인간적인 목표들과
기준 밑에 종속되며, 그 계시들의 내용이 인간적인 가치관과 필요에 맞게 조정(調整)되고 타협될 위험이 있지는 않을까? 우리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는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필요에 따라 적응되며 우리의 뜻으로 경영되는 형태로 변질될 위험이 있지는 않을까? 가정과 직장이
지극히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와 기준이 그 수준에서 그쳐도 되는 것일까? 좋은 가정을 이루고, 직업에서
성공하고,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면 그것으로써 성공적인 인생이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보다 충분히
살피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교회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인간 자신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하여, 즉 절대선이신 당신을 알고 사랑하며 당신께 봉사하고 일치되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58조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 뜻하신 이러한 목적이 달성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성취된다고 설명한다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Dr. Ludwig Ott, Tan Books, p. 102). 또 교회에서는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시며,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시고, 모든 진리와 선의 근원이시라고 가르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8조, 214조 참조). 결국 우리 인간들은 독자적으로 또는 우연히 생성되거나 유지되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서
진리와 선과 생명력의 근원을 찾을 수도 없으며,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임의로 설정한 목표들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걸도록 되어있지도 않다라는
뜻이다. 우리 존재의 시작과 유지(維持)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으며, 모든 진리나 선이나 생명력도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향해지고 귀결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초보적인 겸손이요 깨달음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비하(卑下)하자는 것도 아니고 현실을 왜곡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현실
이상으로 과대포장하여, 인간의 허영과 야망을 부추기고, 인간의 능력과 업적을 찬미하며, 인간이 자신의 삶과 사회의 궁극적인 주인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추하고 어리석은 경지에로 추락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인간들은 (천사와 인간을 제외한) 다른 어떤
피조물과는 달리 그들이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에로 초대받아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에 대한 행복감과 감사와 긍지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지성과 자유 의지를 주셔서 스스로 당신의 좋으심을 깨닫고 당신의 부르심에 자유롭게 응답하기를
기다리시며 은총으로써 도와주신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스스로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격체로서 존중하시며 하느님과 진리와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신다. 이 얼마나 우리가 희열하고 감사해야 할 일인가! 자아 중심적인 목표들에 탐닉하고 그 성취를 대견스러워하며 거기로부터
오는 일시적인 열매들에 만족하는 소아(小我)적인 차원을 벗어나, 절대선이신 하느님을 알고 흠숭하며 그분의 뜻에 겸손되이 순응하는 삶을 살 때
인간은 말할 수 없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그의 생활 환경조차가 영적으로 아릅답고 거룩한 분위기에 싸이게 된다. 그 고귀함과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이고 근원적인 선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적으로 지닐 수 있는 그 어떤 가치와 아름다움보다 월등히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세의 유한한 목표들에
우리 삶의 최고 순위를 부여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이는 마치 수레를 우마 앞에 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주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더음으로 주어지리라"(마테오 6:33)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한 교훈을 주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로부터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회개는 자아 중심의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를 지양하고 만유의 주인이시며 거룩함과 완전함 자체이신 하느님 중심으로 우리의 사고와 삶을 변환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 홀로만으로서는 얼마나 나약하고 신뢰할 수 없고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인가를 인정하고, 전지, 전능, 전선하신 하느님께 귀의해야 된다는
뜻이다. 그 회개가 참된 것이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타협하려고 해서도 안되고 조건들을 달아서도 안된다. 하느님의 진리와 나 자신의 주장을
반반쯤 섞는다든가, 하느님의 계명을 선별적으로만 받아들이려 한다면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이 진정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마음은 전부여야 하고 절대적이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절대적인 흠숭과 복종과 사랑과 헌신을 요구하실 수 있으실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무한히 좋으시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로부터 무엇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으시지만, 당신의 넘치는 사랑과 선을 피조물들인 우리에게도 나누어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이웃들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들의 자유 의사에 맡겨져 있다.
2. 우리에게
계시(啓示)하시는 하느님
당신께로 향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자연적 및 초자연적인 방법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뜻을 전해주신다. 우리는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관찰하면서,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느끼는 완전한 선과 영원에 대한 갈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존재하심과 좋으심과 전능하심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각자의 마음 속에 심어주신 양심에 의거해서 자연적인 차원에서의 도덕적인 선을 추구할 수 있다. 초자연적으로는, 우선
하느님께서 특별히 유대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계명과 예언을 주시어 그들이 하느님께 충실함으로써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를 예비하도록
섭리하셨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초자연적 진리의 계시는 천주 성자께서 육화되시어 인간 세계에게 들어오심으로써 드디어 완성되었다.
강생하신 천주 성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인간이시자 참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적으로 죄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계신다. 완전하신 분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셨으니 이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진리의
계시가 완성된 것이요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과 사랑의 힘이 본격적으로 우리 가운데에서 활동하시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구세주를 목격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은 이들 모두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그분의 인성만 보고 신성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그를 배척하고 급기야는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몰고갔다. 하느님께서는 강생하신 천주 성자의 현존과 말씀과 징표들을 인간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은총의 빛을 내려주시지만, 그들이 마음문을 열지 않고 하느님의 빛을 배척하면 그리스도의 본성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3.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십자가 상의 수난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보속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중에 직접 모으시고 교육하신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계속을
맡기셨으며, 승천 후 열흘만에 그들에게 천주 성령을 보내시어 당신의 교회를 본격적으로 출발시키시고 활성화하셨다. 이렇게 시작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겨자씨처럼 작은 것이었지만, 인류 역사 속에서 온갖 박해와 이단의 공격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성장해왔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성령께서 영혼이 되시며 신자들이 지체가 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이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업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이 교회는 비록 불완전한 인간들을 구성원으로 하고 있지만, 인간들이 주도하는 단체도 아니고 인간들의 지혜와 힘을 바탕으로
지탱되는 조직체도 아니다. 교회는 특히 성체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실체가 현존하시며, 기타 성사들과 특히 사제직을 통하여 죄를 사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실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계시 진리가 교회에 위탁되어 있으며, 이를 바로 해석하고
전파할 사명이 교회에 주어져있는 것이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목권을 지상에서 대행하는 교황, 즉 베드루의 후계자를 중심으로 일치를
유지함으로써 명실공히 한 몸, 즉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회는 단순히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쓰시는 하느님의 도구이며, 불완전한 인간들을 품안으로 모아들여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성령의 힘으로
성화해나감으로써 그 구성원들 전체를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완성해나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전 시대를 걸쳐가는 교회는 비록 건전한 문화적, 시대적인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으나, 한 분의 성령께서
이끌어주심으로 인하여 교회 안의 공적인 가르침들은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그 가르침들을 점차적으로 더 깊이 그리고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발전은 있으나, 가르침의 내용 자체가 변한다든가, 첨가 또는 삭제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들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가르침들이 오류없이 보존되도록 성령께서 교회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완전하고 순수한 영원 불변의 진리들이다.
4. 현대의 신앙 상의
혼란은 교리를 등한시한 탓이다
먼저 교리 즉 교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치심을 살펴보자.
우리의 영적인
삶과 교의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 교의는 우리들 신앙의 길을 비추는 빛으로서 이 길을 밝혀주고 확실하게 해준다. 거꾸로 우리의 삶이
올바르다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개방되어 신앙 교의의 빛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9조).
교리교육은
교회 생활 전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교회의 지리적 확장이나 교회의 수적인 증가는 물론 교회의 내적 성장과 하느님의 계획에 호응하는
작업이 근본적으로 교리교육에 달려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조).
천주 교회의 교리는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및 그 진리와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진리들을 교회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교도권에 의거하여 명확하게 정의한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8조). 그러므로 이 교리들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의 권위에 의하여 오류가 전혀 없는 초자연적인 진리로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위한
필수적이고 확고부동한 기본 지침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탈선없이 제대로 하고, 하느님의 뜻을 바로 실천하려면, 교리들을 확실히
바르게 알고 자주 이를 묵상하여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 운동 선수로서 성공하려면, 기본 체력을 기르고 기본 기술들을 숙달하는 것이
우선적이듯이,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기본 진리들을 숙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머리로 알 뿐만 아니라, 그
진리들이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위하여 주신 지극히 귀중한 영적인 보배임을 깨닫고 항상 이를 사랑하며 익혀야 한다. 교리를 잘
모르면, 영적인 눈이 어두운 것이며, 오류가 포함된 생각을 하게 되고 오류를 발설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류를 남들에게도
전해주게 된다. 많은 이들이 교리의 참뜻과 중요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시적인 감정이라든가 개인적인 의견을 신앙 생활의 지침으로 삼게 되기
쉽다. 감정과 의견 등이 다 유익할 수 있으나, 객관적인 진리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사실 과거에는 성세 성사를
준비하는 예비자들이 수많은 교리와 기도문을 외워서 본당 신부님의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지금은 암기보다는 이해 중심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
같다. 반드시 암기를 하지 않드라도, 교리의 뜻이 모호하지 않게 그리고 쉽게 잊혀지지 않게 확실하게 가르쳐져야 한다. 그 교리들이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영원불변의 진리로서 확실히 인식되고 습득되어야 한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은 무슨
회원권을 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애덕을 키우기 위한 일평생에 걸친 길고 힘든 여정의 첫 걸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리를 배워서 신자가 된
후에도 꾸준히 진리를 공부하고 실천하여 신앙과 애덕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런데 교리 교육을 소홀히함으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못하여 진리와 오류들이 함께 섞여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을 바로 하지 못하며, 오류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싸울 수도 없게 된다. 오류가 있는 곳에는 죄악이 번성하기 쉬우며, 진정한 평화가 유지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교회 전반을 뒤덮고
있는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이고 알찬 교리 교육이 실시되어야 하며, 우선 신자들 각자가 이에 대한 필요성을 통감하고 노력해야
한다. 사목자들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와 계명들을 희석됨이 없이 확실하게 가르쳐주시기를 희망하며, 현대의 불신앙과 악습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질타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현대 사회의 불신앙과 도덕적 불감증의 장벽이 너무나 두텁기 때문이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공의회의 정신과 가르치심들을 현대주의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진리의 광채가 많이 흐려져 있는 현실이다.
많은 이들이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 가르침들은 더 이상 효력이 없어진 듯이 말하며, 교리 자체가 시대적 여건에 따라 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그 결과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들에 대한 많은 사제들 및 신자들의 개념이 흐려지고 약화되어있다. 예를 들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신앙의 약화와 상실이 계시 진리 전반에 걸쳐서 발생되고 유포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2천년 간 전해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들을 하나도 변경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주님의 진리를 현대 사회에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포용적으로, 효과적으로 전해줄 수 있을까 하는 데에 대한 지침과 권장들이 첨가되었을 뿐이다. 특히 우리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의 지도 하에 발간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자주 읽고 익힘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확실하게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에도 접할 수가 있다.
5. 선교의
중요성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하나인 성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라고 선언하셨으며, 이 가르침은 무류지권에 의한 영원 불변의 진리이다 (DS #802).
그리스도의 교회 밖에서 구원이 없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주신 길은 오직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이며,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고 그리스도의 성사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께 합치될 수 있고
그분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을 받을 수 있다. 포도나무의 가지들이 그 줄기에 연결됨으로써만 생명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음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치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여러 갈래의 길들을 마련해주셨고, 따라서 어느 종교를 믿어도 상관없으며 선교의
필요도 없다라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위의 교리가 가톨릭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구원이 되고, 가톨릭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도 구원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교회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은총을 내려주신다는 사실 또한 교회의 가르침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19조). 그러나 가톨릭 교회밖에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진리와 은총의 빛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로에 의하여 천주 성령께서 인도해주시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통로에 의해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밖에서 은총이 주어진다면
이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가톨릭 교회로부터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만 계시 진리와 구원의 은총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며, 가톨릭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이끌어나가시는 그분의 유일한 신비체인 까닭이다. 그래서 계시 진리와 성사들의 충만함은 오직 가톨릭 교회에만
주어져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들은 오류없이 완전한 진리와 성사들을 교회에 위탁하신 주님께 감사드림과 동시에, 비록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신앙과 애덕에 충실하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겸허해야 하며, 교회밖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도 절대로 그들을 경시하거나 배척해서는 안되며,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진정한 형제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진리와 은총의 충만함이 있는 가톨릭 교회에로 이끄는 선교의 노력과 기도를 해야 한다.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마테오 28:19-20). 선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지상의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를 사명으로 하니 이는 교회가 성부의 계획에 따른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50조).
안 그래도 가톨릭 신자들은
소극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일리가 있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종교를 믿어도 상관없다라는 식의 인식을 가지게 되면, 선교를 전혀 하지
않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오류를 믿으면 우리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가 하는 좋은 예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증거함에
있어서 주저하거나 등한시하지 않도록 경고하신다:
누구든지 다른
이들 앞에서 나를 증거하면 나도 그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증거할 것이다 (마테오 10:32).
누구든지 나와
나의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자신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이런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가
9:26).
특히 현대에는 좋은 교회
출판물들이 선교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6. 교회 구성원들의
사명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수난하시고 죽으신 공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완전히 보속하고도 남을 만큼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당신의 공로에 의한 은총이 교회의 지체인 구성원들에게 넘치도록 흘러가도록 섭리하셨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첫걸음이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 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다.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로에 의지해서 우리가 구원될 것을 확실히 믿음으로써
구원된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설명을 그치면 옳지 않은 뜻이 될 수도 있다. 왜냐 하면, 비록 주님께서 무한한 가치의
수난 공로를 세워놓으셨지만, 그 공로에 의지하여 개개인들이 구원의 길을 걸으며 극기와 애덕의 과정을 통하여 구원 즉 성화가 완성되는 과업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는 이미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완전한 부활과 승리의 역사(役事)를 완전히 성취되어
계시지만, 그 신비체의 지체들인 교회의 구성원들은 아직 미완성 단계에 있고 성화의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이 지상에서 못 다하면
연옥에서라도 계속하여 모든 죄와 잠벌이 다 씻어지고 티끌만큼의 흠도 없는 다이아몬드처럼 순수해질 때에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애심이나, 기타 순수한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것이라도 그냥 지니고서 하느님 앞에 설 수는 없기
문이다.
결국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신분 상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구원의 길, 성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가 9:23)라고 하셨으며, 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마테오 5:48)고 가르치신 것이다. 또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들어간다" (마테오 7:21)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앙에 기초를 둔
실천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우리 자신의 구원과 성화를 이루어나가고, 또 이러한 신앙에 의거한 삶을 다른 이들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노력을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전체의 성화와 성장에 기여하게 된다. 교회의 구성원들의 이러한 노력과 희생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히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작은 공동 구속자들 즉 인류 구원의 협력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우주 창조의
역사(役事)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아있기 때문에 자녀를 낳아서 기르며 또 우리가 사는 사회와 환경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건설하고 가꾸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또 그 목적을 위하여 여러 가지 학문을 열심히 공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役事)에도 참여하여 나 자신과 이웃들의 구원과 성화를 도모하는 과업에로 부르심을 받아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림과
동시에 긍지와 사명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시종이지만 자녀가 되었고, 죄인이지만 인류를 구원하고 교회를 완성하는 숭고한 사업의
협력자가 되었다. 우리의 기도, 자선 행위, 보속과 희생, 선교 활동 하나 하나가 나 자신 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주님의 교회를 완성하는 데에 이바지된다고 하는 이 엄청난 진리를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하며, 그 동안 이 진리를 흐려온 현대주의적 오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왜냐 하면, 그러한 오류가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 안에 깊이 침투하여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개신교인들처럼 생각하고 신앙 생활을 해오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성모님께서
"모든 은총의 중개자," "우리의 변호자," 그리고 "공동 구속자"가 되심을 교황님께서 믿을 교리로 반포해주실 것을 청원하는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동시에 이에 대한 반대 또한 거세다. 특히 "공동 구속자"라는 칭호에 대한 반대가 심하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언급된대로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구세주의 협력자가 되어야 하고 인류를 구하기 위한 작은 공동 구속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한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며
협력하는 모든 이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신 성모님께서 참으로 공동 구속자가 되심에 대하여 하등의 의심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주에서도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보속의 협력자"이심을 거듭하여 말씀하셨고, "공동 구속자"이심도 말씀하셨다. 이는 1858년 루르드에서 당신을
"무염시태"라고 부르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중요한 교리적 내용을 포함한 말씀이시다.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성모님께서 자신의 영예를
추구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성모님의 역할이 교회 안에서 명백해지고, 신자들이 성모님께 진정한 자녀로서의 사랑과 신뢰로서 의지하는 것이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실질 상으로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자녀들의 구원을 애타게 원하시는 성모님께서 그 비결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실 때 성모님을 통하여 주셨음에 유의해야 한다. 완전한 진리이시며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께서 성모님을
어머니로 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자라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택이셨고 섭리셨다. 구세주를 구름에 태워서 보내주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들의 본성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께서는 하느님이심과 동시에
우리와 같으신 인간이 되셨으며, 남녀로 구성되어있는 인류 사회의 본성에 의거하여 성모님께서 구세주의 인류 구속 사업에 있어서 필수적인 협력을
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인간들이 개성 뿐 아니라 사회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워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가
인간들만의 단체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므로,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며,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어머니가 되신다.
7. 성체 성사에
대하여
인간의 상식으로 성체 성사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천주 성자께서 어떻게 하찮은 물체에 지나지 않는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실 수 있다는 말인가?
분명히 빵과 포도주로 보이는데 하느님으로 흠숭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가?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이는
참으로 기막힌 일이고 어리석음의 극치로까지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왜 주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택하셨을까? 좀더 호화롭고 위세있는 모습으로
오신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환영해 드릴 텐데.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피조물인 인간에 비하여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더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조금도 아쉬움이 없이 무한한 선과 사랑과 행복으로 홀러넘치는 분이시다. 그런 분이 하찮은 인간들, 게다가 하느님을 배반하기까지 한
인간들을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시키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인간들의 죄를 보속하게 하셨다. 이는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도 부족해서 이제는 보잘
것 없는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많은 이들에게 멸시당하고 냉대받고 조롱받으실 것을 예상하시면서도 그렇게 오신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기막힌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어느 정도라도 깨닫는 것이다. 사랑이란 원래 사람을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철길로 뛰어드는 어머니의 행동 역시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 성자를 보내시어 희생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무한히 고귀하신 당신의 성자께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인간이 되시어 가난과 냉대 속에서 생활하시고 결국에는 모함과 멸시와 고통을 받으시고 죽게 되심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거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인간들에게 오시고 그들과 일치되시기 위하여 빵과 포도주의 모습을 취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신다. "주님, 왜 그렇게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오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고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너희에게 오기까지 하는 나의 사랑은 쉽게 이해가 된다는 말이냐?"라고 되물으실지도 모른다.
또 한 편으로는,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 하면, 만약 주님께서 보다 화려하고 엄위한 모양으로 오신다면 많은 이들이 그분에게
진정한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동기로 접근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위가 높고 부유한 사람들 주위에는 늘 많은 이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체 성사는 사랑의 성사이며 그 사랑으로 인한 희생을 기념하는 성사이다. 따라서 이 성사는 순수한 사랑의 응답을 요구한다. 진정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있으면, 주님의 초라한 외모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랑하는 영혼은 외적인 조건들을 꿰뚫고 그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무한히 고귀하시고
아름다우시고 거룩하시며 사랑 자체이신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체성사와
십자가는 걸림돌들이다. 그 두 가지는 같은 신비이며 끊임없이 분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336조).
그러므로,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신앙과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우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성체 안에 참으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없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또 우리에게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면 십자가까지도 감미로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체의 초라한 외양 때문에, 그리고 십자가의
무거움과 아픔 때문에 우리의 신앙과 사랑이 결핍될 때에는 걸려넘어지게 되어 있다.
2천년 전에, 무한히 좋으시고
높으시며 무한한 사랑 자체이신 분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을 때 많은 이들은 그분을 제대로 대접해드리지 않았다. 대개는 그분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함부로 무시하며 모함하며 드디어는 십자가에 못박는 몹쓸 짓을 하였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분께서 천주 성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심을 몰랐던
것이다.
주님께서 성체 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심은 2천년 전에 그분께서 오셨음과 본질상으로 같은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실제로, 즉 당신의 천주성과 영혼과 몸과 피를 다
가지신 완전하고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왕림하신다는 것이 성체 성사의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대접해드리고 있는가? 빵과
포도주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서 경솔하게 대해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차거운 마음으로 무관심하게 대해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성체 성사 안에서의
그분의 현존을 믿지 않음으로써 아예 그분을 부인해버리지는 않는가? 씻지 않은 대죄를 그대로 둔 채 그분을 모심으로써 독성죄를 범하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믿는다 하고 신자로서의 의무를 잘 지킨다고 자부하드라도, 주님께서 실제로 방문하실 때 그분을 냉대하고
거절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분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된다. 2천년 전에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께서 강생하여
그들 앞에 서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거부하였다. 우리는 성체 앞에서 기도할 때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성체로서 현존하시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생각해보고 그분께 합당한 대접을 해드리도록 노력해야겠다.
8. 기도가 필요한
이유
하느님께서 인간을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하여 창조하셨으니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활동은 하느님과의 의사 소통 즉 기도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께 흠숭과
찬미를 드리며, 무한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데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과 축복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동시에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의 빛이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와 채운다.
하느님과의 이러한 마음의 교제가 없으면 인간의 영적인 생명이 유지될 수 없고 성장될 수도 없다. 말하자면,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에 항상 그 호흡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늘 마음문을 하느님께 열고 하느님과의 대화를 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진리와 거룩하심과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흘러들어올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의사소통을 통하여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갈 수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은총을 항상 주고 계시지만,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마음문을 열지 않으면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마치 라디오 전파가 항상 우리 주위에 있으나,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맞추어야만 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음과 같다.
우리가 기도, 즉 하느님과의
대화의 생활에서 진보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며, 특히 영적인 독서가 유익하다. 자칫하면, 우리의 기도가 자기 중심의 독백이 될 수도
있으므로, 우리는 성서와 교리서, 성인전, 성인들의 저서 등을 자주 진지한 마음으로 읽음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자기 중심의 테두리를 벗어나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특히 현대를 사는 우리의 주위에는 기도를 방해하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볼거리, 읽을거리, 오락거리가
가득차 있다. 특히 TV 보는 시간을 줄이고 영적 독서와 가족의 묵주 신공 등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신, 흘러가면 다시 오지않는 시간의 귀중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특히 지난 수 세기에 걸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신앙과 도덕의 위기로부터 구하시기 위하여 성모님을 여러 차례 보내셔서 경고와 권고와 도움을 주시고, 우리의 회개와 기도의
생활을 촉구하셨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공동체로서 성모님께 의탁하면서 성교회 안에 진리와 사랑의 광채가 다시 찬란히 빛나게 해주시기를
하느님께 열절히 구해야 하겠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의 필사적인 기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9. 나주에서의 일들에
대하여
광주 대교구장께서 1998년 1월
1일자로 나주의 일들에 대한 부정적인 공지문을 발표하신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주지된 사실이다. 이에 따라서 율리아 자매와 부군 율리오 씨는
메시지 전파에 관련된 모든 외부 활동을 중지하고,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고 계신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공지문 상의 교리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으며, 조사 위원회의 활동이 너무나 미흡했고 현대주의적 선입견에 의존한 것이었음을 탄식하면서 그
일들에 대한 공정한 재조사를 교황청에 청원드리고 있다.
또 한 편으로는 특히 한국의 교회
안에서 많은 신부님들과 평신도들이 나주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조차 삼가며 광주 대주교님의 결정에 대한 절대적인 순명을 주장하고 계신다. 광주
대주교님의 사목 지침은 특히 광주 대교구 안에서 지켜져야 하며, 정상적으로는 전 세계의 교회가 이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사목자들의
교도권이 하느님의 진리를 바르게 전하기 위한 것이지, 그 진리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6조).
교회의 교도권은 운동 경기에서 심판이 가지는 판정권과는 다른 것이다. 교도권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판정하는 권한이 아니라 분별하는
권한이며, 그 일들이 신자들에게 바로 전해질 수 있도록 진리를 옹위하는 권한이다. 결국 교도권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는 기능인
것이다.
따라서 주교님의 이름으로 발표된
공지문에 교리상의 문제가 있고 조사 위원회의 활동에 심각한 하자가 있었다면, 진리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것을 지상(至上) 과제로 하는 교회의
구성원들은 당연히 이를 토론하고 사목자들께 청원드릴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907조 참조). 평신도들도 그들이 진리의 보존과
전파의 의무에서 면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91조 참조).
신자들은 광주 대주교님을 비롯한
모든 사목자들께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에 조금도 변화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며, 동시에 진리를 지키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포기하거나 체념해서도
안된다. 진리와 교도권 이 두 가지가 다 귀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공지문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이를 광주 대주교님이나 그 밖의
어느 분들의 탓으로 돌려서도 안된다. 근본적으로 보아서, 현재의 혼란이 빚어진 것은 한국 교회 전체의 책임이며, 세계 교회 전체의 탓이다.
교회 전반에 걸쳐서 계시 진리의 빛이 흐려져 있기 때문에 발생된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나주에 대한 결정이 바로잡아지기 위해서는 교회 전체
안에서 주님께서 위탁하신 계시 진리가 다시 확고히 빛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일은 사목자들과 신자들 모두에게 맡겨진
과업이다.
나주에서의 메시지와 징표들이
하느님의 축복인 것처럼, 현재의 어려움들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어려운 시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정화되며 우리 모두가 순수한 신앙을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될 수 있도록 모든 신자들이
무기력하게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또 진리의 전파에 나서야 할 것이며, 사목자들께서도 전 세계의 수많은 신자들이
성모님을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하루 속히 듬뿍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기를 청원드리는 바이다. 오늘도 많은 가정들이 분열되고 있고,
수많은 애기들이 낙태로 희생되고 있다. 그러나, 신자들은 성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꾸준히 애덕과 감사 속에서 자신들의 임무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 분도 1999년 5월
11일 Mary's Touch By Mail
성모님께서 이끄시는 영적
전쟁
("성모님의 손길" 소식지 1999년 9월호에서
번역)
성모님께서는 1531년에 남북미 대륙의 중심점에 위치한 멕시코의
과달루페에 발현하심으로써 마귀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셨습니다. 그곳에서의 메시지와 기적의 그림을 통하여 성모님께서는 근 천만 명에 이르는
멕시코 인들이 우상 숭배를 떠나 가톨릭 신앙으로 귀의하게끔 이끌어주셨으며, 당시에 매년마다 수만 명씩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 우상에게 제사지내던
악습도 퇴치시켜주셨습니다. 바로 이 즈음에 유럽에서는 프로테스탄트 혁명이 일어나 가톨릭 교회의 중심 신앙을 정면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1)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워주신 교회의 사도 전래성, (2) 성체 성사에서의 예수님의 실체적인 현존 및 고해 성사와 보속의 필요성, (3)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이 다 필요하다는 교리, 그리고 (4)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모님의 필수적인 역할에
대해서입니다. 마귀는 가톨릭 신앙의 기둥이 되는 이러한 교리들을 공격함으로써 혼란의 씨앗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주고 길러주었습니다.
이는 인류에게는 구약 성서(창세기 3장)와 신약 성서(묵시록 12장)에 예언된대로 하나의 숙명적인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발꿈치로써 뱀의 머리를 분쇄하심으로써 극적인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의 과달루페 발현과 프로테스탄트 혁명 이후에도 그 영적인 전투는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마귀는 물질주의, 인종차별주의 및 무신론을 통하여 오류와 윤리적 타락을 광란적으로 유포시켰습니다. 반면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거듭 방문하시어 중요한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주셨습니다. 즉 1830년에는 불란서 빠리에서 기적의 메달 신심을 출발시켜주셨으며,
1846년에는 역시 불란서의 라살레트에서 발현하시고, 1858년에는 불란서의 루르드에서 발현하시어 "무염시태"의 도리를 확인하여 주셨으며,
1871년에는 불란서의 뽕뜨멩에서 발현하시어 메시지를 주시고, 1917년에는 폴튜갈의 파띠마에 오시어 죄에 대한 보속의 필요성과 당신의 티없으신
성심께의 봉헌을 강조하셨고, 1932년에는 벨기에의 보렝에서, 1933년에는 벨기에의 바늬에서, 1973년부터 1981년에는 일본의 아끼다에서,
그리고 다른 곳들에서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발현들은 서로 연관없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이 아니라, 마귀와 그의 세력을
쳐부시라는 하느님의 명을 거행하기 위하여 승리의 그날까지 줄기차게 계속되는 성모님의 일련의 노력들입니다. 성 교회에서도 성모님께 관한 주요
신덕 도리들을 반포하심으로써 성모님과 발맞추어 왔습니다. 즉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는 성모님께서 천주의 모친이심을 확인, 반포하셨으며,
649년의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성모님께서 평생 동정이심을, 1854년에는 교황 비오 9세께서 성모님의 무염시태를, 그리고 1950년에는 교황
비오 12세께서 성모님의 몽소승천을 신자들이 믿어야 할 교리로 선포하셨습니다. 성모님께 관한 교리들을 확고히 하는 것이야말로, 천주 성자의
강생 및 구속 도리를 튼튼하게 보조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절정에 이른 현 시대에서 악마의 영향은 전 세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를 도우시고 구출하시려는 성모님의 노력 또한 극도에 달해서 성모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때로는 당신의 성상들을 통한 눈물과
피눈물을 통하여 표출되기도 합니다. 악마가 끼쳐온 해악은 지극히 가공스러운 것으로서 세계 곳곳에 전쟁들이 계속되었고, 인종 간의 차별과 싸움,
학살, 마약, 음란 출판물, 폭력 사건들, 가정의 파괴, 낙태, 기타 도덕적인 타락은 지상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발생해오고 있습니다. 마귀의
영향은 교회에까치 침투해 들어와, 내부로부터 신앙과 윤리의 침식을 가져왔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정통 교리들을 부정하며 계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널리 유포되어오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들이 세속적인 일들에 정신이 빠져서 그들의 영적인 필요들에
대하여서는 망각하게끔 이끌어 줍니다. 마귀는 오직 하느님께서만이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참 근원이시며 하느님께서만이 전능하신 창조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심을 잊게 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통탄스러운 상태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어 현
시대에 영적 및 도덕적인 위기가 존재함을 부정하게끔 또는 의식하지 못하게끔 만듭니다. 마귀는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들과 성모님의 참된
메시지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마음 문을 닫고 무관심하게 지내게끔 유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에 구세주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리아를 통하여 구세주께로 가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의 가장 중대하고도 위험한 이 현 시기에 우리의 참 천상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아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이 세상의 악들을 물리치고 교회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하여 분투하심에 우리들이 참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영적인 전투에 우리들이 성모님 편에서 참여할 수 있기 위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이
자신을 당신의 티없으신 성심에 전적으로 봉헌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봉헌은 우리가 자신의 전체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바의 성취를 위하여 성모님께서 마음대로 쓰실 수 있도록 내어드리고 맡겨드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들 일상 생활에서의
하찮은 일들까지도 당신께 봉헌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성모님과 함께 사랑으로 한다면 영원한 가치를 띄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께 봉헌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애덕의 관계를 유지할 것이 요구됩니다. 즉 우리를 해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귀중한 자녀이며, 하느님의 왕국에 참여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초대받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비례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합당한 신의를 지키며 의무를 행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봉헌된 삶은 또한 세상의 회개를 위한 열절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뜻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바친다면, 성모님께서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하느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시는 데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실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요청은 하나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기
문입니다. 파띠마에서 성모님께서는 "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주고 희생을 바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옥으로 가고
있다,"라고 슬프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영적으로 가난해야겠습니다. 물질적인 재물만이 아니라
영적인 재물에도 집착되지 않아야겠습니다. 즉 어떤 선이든지 우리 자신에게서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따라서 영광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혹 우리를 칭찬할 때에도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의 불충한 종이며 매일 많은 잘못을
범하면서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생의 모든 것에서, 심지어는 고통과 어려움 중에서도, 하느님의 좋으심을 볼 줄
아는 눈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겠습니다. 왜냐 하면, 선물의 가치는 주시는 분의 신분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실패로부터도 선으로 유도해내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들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보속으로 하느님께 바친다면 이는 사랑과 신뢰와
자아부정의 선행이 될 것입니다.
봉헌된 삶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 선교의
열정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로부터의 진리와 사랑의 빛에 대하여 굶주려 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그 빛을 가져다 줄 사람이 없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동시에 이 세상은 물질주의와 도덕적 타락과 온갖 오류들의 정보와 악한 표양이 홍수처럼 넘치고 있습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들이 교회의 정통 가르치심과 성모님의 참된 메시지들을 전파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 나주에서 성모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990년 11월
11일)
"잃어버렸던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되찾을 수 있도록
내 사랑의 메시지를 모든 자녀들에게 힘차게 전해다오. 폭풍은 이미 거칠어져가고 있는데, 이 폭풍우에 휩쓸려 멸망해버릴 크나큰 위험에 놓인 이
세상을 나의 티없는 성심의 사랑에로 피난시키고저 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성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천국의
모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길은 겸손과 사랑의 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는 우리들로부터 위대함을 찾지 않으시고 작고도 전적인 사랑, 어머니를
신뢰하고 따르는 어린 아이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예수님과 함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들이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불타는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분도 미국 오레곤 주, 그레샴 시 1999년 8월
13일
가톨릭 신앙의
수호를 위하여
1. 우리 삶의 중심과 목적은 하느님이시며
우리 자신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선에 있어서 무한한 완전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의
무한하신 생명은 영원하시며, 그분 외의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시나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알려주셨듯이 "영원히 스스로 현존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하고 완전하신 진리, 사랑, 정의, 힘, 거룩하심,
아름다우심, 그리고 그분의 존재 자체는 우리들 인간의 본성적 이해 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피조물들에 의해 흠숭받으시고
영광받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로지 그분의 뜻만이 영원토록 이루어지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좋으심을 조금이라도 참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흠숭하고 찬미하며 그분께 봉사하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는 어떠합니까? 거의 완전히 인간
중심의 세상으로 되어 있으며, 하느님은 후견자의 입장으로 밀려나셨거나 아예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으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는 우리가 급하고
아쉬울 때만 찾는 분이 되신 것 같기도 합니다. 때로는 여러 지역 교회들에서조차도 세상을 용감히 가르치고 회개시키려고 하기보다는 현상태대로
공존의 길을 모색하려는 듯이 보이기까지도 합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을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에 동화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개인과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진정한 성찰과 통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위한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나 그리고
우리"에로 다시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2. 우리의 원조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겼다
하느님께서 천사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그들이 당신께 필요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넘치는 사랑과 선하심과 행복을 지성과 자유 의지를 가진 피조물과도 나누고저 하심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롭게 스스로의
결정을 할 수 있는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하시어 그들이 하느님의 좋으심을 자유롭게 깨달으며 스스로 원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천사들 중의 다수는 겸손하고 기쁘게 하느님을 섬기기로 선택하였으나, 다른 많은 천사들은 교만해져서 자신들의 뜻을 따르며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함으로써 마귀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인류의 원조 또한 마귀의 꼬임에 빠져서 하느님께 불충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많은 자손들 역시 그들의 지성과 자유 의지를 거듭 잘못 사용하여 오류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허망된 목표들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실행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나가고 마는 피조물들에 하느님께보다도 더 많은 신뢰와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었던 것입니다. 무한한 선이시며 만유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피조물보다도 더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3.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 성자를 보내셨으며,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인류 구원 사업을 계속하신다
인간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써 당신의 성자를 구세주로 보내시어 인간들에게 진리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그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으로 바치시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구세주께서 신성을 그대로 지니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한 여인의 아들로 태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를 그 잉태 시로부터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보호하셨으며 또 그를 당신의 은총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심으로써
하느님의 모친이 되기에 합당한 분이 되도록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구세주의 강생과 성장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 전체를 통하여 그분의 가장 긴밀하고도 필수적인 협조자가 되시기를 섭리하셨습니다. 이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의 범죄에 에와가
필수적으로 협조했던 것에 비교되는 일이며, 또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이 함께 꾸려가는 인류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당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 구원 사업에 있어서 구세주의 협력자로서의 성모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수적인가를 깊이 인식함으로써
성모님의 역할을 망각시키고 뒷전으로 밀어내려는 모든 시도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는 인간들이 성모님을 망각하고 경시함으로써 육화(肉化)되신
천주 성자께 대한 바른 인식과 사랑에 이르지 못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당신의 신비체인 교회를 설립하시고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그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이로써 당신의 구원 사업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로서 당신의 어머님과 함께 이미 영광 속으로 개선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만민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일이며 그들을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 의하여 성모님의 전구(轉求)를 통하여 세상 끝날까지 성화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4. 우리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여 나가는 것이다
당신의 교회가 그 사명을 잘 수행해나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1) 성서와 성전(聖傳)의 형태로 보존되고 있는 계시 진리와, (2) 그 계시 진리를 오류없이 가르치고 신자들을 영적으로 양육할 수
있기 위한 사목자들의 교도권과 사목권, 그리고 (3) 신자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은총들을 전해주기 위한 일곱 가지의 성사들을 맡기셨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교회는 모든 인간들을 교회로 불러모아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치며 그들의 죄를 사해주고 그들을 성화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실 것임을 약속하셨으며, 또 진리의 영이신 천주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를 인도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에게는 기도와 보속과 애덕의 실천, 및 성사를 통하여 자신의 성화를 도모하며, 다른 이들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이미
성취되어있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과 그분의 영광이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도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5. 우리의 임무는 영적인 전쟁을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의 임무가 풍파와 어려움 없는 평온한
상태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마귀와 그의 군대는 인간들을 멸망에로 이끌기 위하여 오류와 도덕적인 타락을 유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짓말의 아버지인 마귀가 에덴 동산에서 에와를 꼬이기 위하여 사용했던 방법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아직도
마귀는 온갖 오류들, 즉 진리에 어긋나는 사상과 개념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교회 안에 보존되고 있는 참된 진리를 바로 알아볼 수 없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일단 잘못된 선입견에 빠져버리면 스스로 잘못된 길을 걸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퍼뜨리는 오류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수단은 하느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계시 진리로써 우리의 마음을 확고하게 무장하는 것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상당한 교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계시
진리의 참 가치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심지어는 계시 진리를 개인들의 견해 정도의 차원에까지 끌어내리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충실한 크리스챤이
되기 위한 첫 발걸음은 하느님과 그분의 무한히 거룩하신 권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며 그분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그분의 권위에 의지하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계시하신 진리들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원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통
가르침들을 우리 삶의 확고한 기초로 삼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하여 오류들에 의해 시달리게 될 것이며, 오류들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싸울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역으로, 우리가 주님의 계시 진리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실천함에 있어서 힘차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신자들 사이에서도 교리, 즉 계시 진리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주님을 믿고 따르면 되지 않느냐라는 인식이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몰라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도 교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모든 선의
근원이시라는 것도 교리입니다. 고해 성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실제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도,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계신다는 것도
계시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하여 더 깊이 더 확실히 앎으로써 그분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계시 진리를 잘
모른다면, 많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개념과 판단들이 계시 진리가 차지하고 있어야할 우리 마음 속의 가장 중심 부분을 차지하고 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바로 잘 자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신앙이 습관이나 순수 감정적인 체험으로 전락하는 날
그것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주님께서 주신 계시 진리 위에 확고하게 서있어야함을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공의회의 고귀한 가르치심들을
현대주의적으로 에누리하고 잘못 적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결과 계시 진리 즉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 대한 신자들의 개념이 매우 흐려져 있는
현실입니다. 마귀는 먼저 진리의 희석, 오류의 유포를 통하여 인간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어 무방비 상태로 만들며, 이어서 윤리의 타락을
조장합니다. 따라서 현 시대에 교회가 당면해있는 이 진리의 가리움과 왜곡은 지극히 심각한 위기가 전체 인류와 교회에 닥쳐있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현대의 복잡한 사상은 "이럴 수도 있다," "저럴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위기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확고히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무한한 진리 자체이신 구세주를 태중에 품으셨던 "상지의 좌 (上智의 座)," 성모님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그냥 알아서 편리하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는 우리의 삶을 밝혀주는 횃불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길입니다.
6.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하여
누가 교회도 현실에 참여해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하등의 주저함도 없는 "예,"입니다. 천주 성자께서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에만 머무르지 않으시고 실제로 인성을 취하시어 인간 세상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보속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시켜주시고저 극심한 심적, 육신적 고통을 받으시며 죽으셨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셨으며, 슬픈 이들을 위로하셨고, 진리를 갈구하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공생활
이전에도 인간의 가정 생활을 충실히 살으시고 인간의 노동을 구슬땀을 흘리며 하셨읍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그야말로 현실 참여의 계속이었습니다.
그분의 활동을 이어받아 있는 가톨릭 교회 역시 진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베풀며, 불쌍한 이들을 돌보며, 죄악과 싸우는 일을 2천년 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교회의 현실 참여 여부는 이미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교회의 필수적인 임무요 끊임없이 계속되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의 인간 현실에 대한 참여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현실에 참여해야 함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간 세상의 현실은 구원의 역사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며 선과 악이 싸우고
있는 전쟁터입니다. 하느님의 초자연적 현실은 우리의 궁극적 목표이고 진정한 고향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있는 곳이며, 우리가 인간
세계에서 영적 전투를 싸우는 데 필요한 진리와 은총의 힘을 부어주는 원천입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분의 뜻을 찾으며 그분의 진리와 계명에 충실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의
선과 사랑을 이 세상에서 구현하기 위하여 활동해야 합니다. 그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됩니다. 외적 활동을 중요시하느라고 미사 참례, 성체 조배,
묵주 신공, 영적 독서, 묵상 등을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와 교통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성모상을 뒤로 치우고 고해 성사를 등한시해도
안됩니다. 특히 성직자들께서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진리와 계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가장 고귀한 임무를 맡아계십니다. 사제들은 하느님의
일들을 위하여 전적으로 봉헌되신 분들이십니다. 그분들은 신자들을 성화하고 그들의 마음에 주님의 진리와 사랑과 극기의 정신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그 진리와 사랑의 불길을 효과적으로 퍼뜨려나갈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제들께서 영성적인 일들을
제쳐놓으면서까지 직접 정치적인 활동 등에 나서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도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만민이 믿고 행하도록
가르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도들에게 정치 및 사회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라고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님도
밝혀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도 임하시며 하느님의 뜻이 지상에도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들을
지상에서의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을
더음으로 주시리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회 참여를 더욱 활성화하되 그 방법론에 있어서 잘못된 점들을 반성하고 고쳐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징표를 주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특히 지난 수 세기에 걸쳐서 과달루페, 빠리, 루르드,
파띠마, 아끼다 등에서 당신의 어머님을 통하여 중요한 말씀과 징표들을 인류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징표들은 거듭하여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다시 당신의 품으로 이끄시려는 주님의 간절한 부르심입니다. 인간들이 자기들 중심으로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함을 상기시켜주시는 부모로서의 사랑의 호소이며 개입이십니다. 현 시대에 와서 특히 한국 나주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교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력하고 종합적이며 애절한 메시지와 징표들을 주고 계십니다. 나주에서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님께서 계시하시고
교회에 위탁하신 신앙의 유산에 다시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계시 진리가 너무나 가리워지고 희석되어 왔음에 대한 하느님의 엄중한
경고이십니다. 성체 성사와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비롯하여, 고해 성사 및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르는 보속의 중요성, 낙태, 가정 파탄, 기타
수많은 윤리적 타락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의 필요성, 교황님의 교도권에 대한 진정한 순명, 사제들을 위한 기도와 존경과 협력의 필요성 등이
나주에서의 메시지와 징표들의 핵심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신앙의 유산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충실하지 못하면 진리를
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영적, 지적인 교만을 버리고, 주님께서 보내시는 사랑의 충고와 징표들을
주시하며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주에서의 일들이 율리아 자매가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며 실제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을 배격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과연 하느님께서 보실 때에 진정한 것일 수 있을까요? 루르드, 파띠마, 나주 등에서의
일들은 그 일들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하느님의 메시지와 징표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역사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가 다시 수긍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분도 미국 오레곤 주 그레샴 시 1999년 8월
22일
우리는 가톨릭 신앙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
한국 교회의 일부 신학자들은 소위
신앙의 토착화를 부르짖으며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에 의하면, 가톨릭 교회 안에
전해내려오는 가르침들과 전례들은 유럽 중심의 문화와 사고 방식 및 언어의 틀에 맞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동 아시아의 문화 및
전통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과 동 아시아 나름대로 하느님의 지혜와 도덕률이 계시되어 왔으며 따라서 유데오-크리스챤적인
전통만이 인간 구원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들과 전례 및 신심은 이러한 동양적인 전통과 문화에 맞게 적응 및
변화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뿐 아니라 그들은 동서양의 문제를 떠나서도, 가톨릭 교회의 교리들이 옛 시대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는 부적합하며 적용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문화와 모든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하고 확정적인 진리는 없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신학자들은 분명히 2천년의 전통을 가진 가톨릭 교회와는 본질적으로 매우 다른 신앙 형태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미 한국
교회 안에는 신자들이 알게 모르게 그들의 영향이 스며들어와 있다고 보여진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무한히 선하시고 전능하신 인격체이신 하느님께서 천사들과 인간들을 역시 자유 의지와 지성을 가진 인격체들로 창조하시어 그들을 당신께로, 당신의
나라에로 초대하셨다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당신의 초자연적인 진리의 계시가 천주 성자의 육화를 통하여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의 전체
인류를 위하여 확정적으로 완성되었다라고 가르친다. 또 이 진리가 당신께서 직접 세우시고 이끄시는 교회를 통하여 이어지며 가르쳐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단지 하나의 개념이나 상태로서만이 아니라 분명히 인격체로서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고 하는 개념은 지극히 친근하고도 중요한 인격적 관계를 뜻한다. 그리고 구약 및 신약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핵심적인 개념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Covenant)의 개념이다. 이 계약은 인간 사회에서의 거래에서 말하는
계약(Contract)과는 다른 것으로서 인격체와 인격체 사이에서 상호간의 全的인 충실을 전제로 하는 밀접하고도 굳고도 영구적인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이 계약(Covenant)을 어기면 배신이 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부르시는 관계는 이러한 계약에 의거한 확고한 충성과
사랑의 관계이며, 그보다 먼저 당신께서 당신의 독생 성자를 인간 세계에 보내시어 수난하고 죽으시는 피의 계약을 맺어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동양 사상에서의 하느님의
개념은 상당히 다르다. 하느님은 우리와 구별되는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우리 자신 속의 나쁜 것들을 다 떨쳐버림으로써
도달될 수 있는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또 이러한 신적인 경지는 각자의 마음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를 권선징악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따르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신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상 만물에 신의 본질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범신론적인 개념도 쉽게 발견된다. 구약 및
신약 시대에 걸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개입하시는 인격체이신 유일신 하느님과는 대단히 다른 관념들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인격체로서
인식되지 않는 동양의 사상에 의하면, 위에서 말한 계약(Covenant)의 개념도 성립되지 않으며, 하느님께의 충성이나 불충이 논의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죄의 개념도 달라진다. 全善하신 하느님의 뜻을 어긴 데 대한 보속의 필요성도 없으며 구세주의 필요성도 의식되지 않는다.
구세주의 활동을 계속하는 교회의 개념도 변질되어버린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보다는 하나의 신자들의 공동체로 인식될 뿐이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관계가 더 강조되는 것이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하지 않고서도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되므로, 이러한 사상을 크리스챤 신앙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하느님을 비인격체인 대상으로
인식함으로써 그분과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할 수 없게 되며, 이는 인간 사회에서의 하느님의 역할이 수동적인 것으로 격하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느님 대신 인간들이 역사의 주인이 되겠다는 뜻이다. 인간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 스스로 하느님이 되겠다는 말이 될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오갔던 대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것은 신앙의 토착화가 아니라 신앙의 변질을 말하는 것이며 신앙의 유산에 대한 반기를 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계약(Covenant)을 어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주 등에서의 성모님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우리의 죄 때문에 비참하게 피흘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의 아들 예수와
함께 자녀들의 죄악 때문에, 그들을 향한 어머니로서의 사랑 때문에 끝없이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생활하시려고 오신 천주 성자, 그리고 그 강생의 현실을 세상 끝날까지 계속하기 위한 교회 안에서의 성체
성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성모님의 존재와 역할이 뚜렷해질수록 강생하신 천주 성자의 현실이 더 뚜렷해지며, 우리에게 인격체로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더 확실해지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성모님이야말로 강생하신 하느님께 대한 가장 확실한 증인이 되심을 알게 된다. 또 그
메시지들과 징표들은 영원 불변하신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 즉 신앙의 유산에 대하여 말하여주고 있다. 새로운 신학이 말하는 비인격체적인
신의 개념,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한다라고 하는 진리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개념을 나주의 일들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뚜렷이 보여주는 기적들은 우리 자신들이 신으로 변할 수 있다라든가, 만물 안에 하느님의 본질이 현존한다라고 하는 궤변들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새로운 신학을 하시는 이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주의 일들을 그토록 맹렬히 배척하고
있을 것이다.
가톨릭 신앙 이외의 사상들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저 한다. 모든 인간들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민들에게 그들의 양심을 통하여, 그들의 자연적인 지혜를
비추어주심으로써 그들이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도록 이끌고 계신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위한 확정적이고도 충만한 초자연적인 진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셨고 이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모든 인간들에게 전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들에서도 여러 가지의 지혜와 좋은 도덕률이 발견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길을 여러 가지로 마련하여 주셨구나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지극히 경솔한 판단이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신앙의 상실을 초래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톨릭 교회 밖에서도 발견되는
지혜와 도덕률을 존중함과 동시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확실하고도 충만한 초자연적인 진리와 은총의 수단들이 위탁되어있는 가톨릭 교회에로 모든 인류를
이끌고저 하는 선교의 노력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종교들과 사상들의 좋은 점들을 존중하면서도 그 곳들에 존재하는 많은 오류들과
제한점들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Mary's Touch By
Mail 1999년 8월 26일
이 어려운 시기를
거쳐가는 우리의 자세
주님께서 부활의 승리에 이르시기까지에는 십자가 상의 혹독한 고통과
죽으심이 있었다. 모든 성인 성녀들의 생애 역시 애덕의 실천을 위한 자기 부정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빠리, 루르드, 파띠마 등에서의 성모님의
발현, 파우스띠나 수녀를 통한 예수님의 자비의 메시지, 비오 신부님의 거룩한 생애 등이 교회의 인정을 받기까지에는 숱한 장애와 박해를 겪어야만
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진리의 길이요 사랑의 길이요 영원한 승리와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길이지만, 그 길은 또한 좁고 어려운 길이다.
그 길을 겸손과 인내와 사랑으로 걸음으로써 우리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주에서의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일들이 엄청나게 중요하면 할수록 공식 인정 때까지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아기가 탄생하기 전까지의 진통일 것이다. 이 어려움들은 우리에게
아픔을 주지만, 그것이 바로 주님의 영광에로의 길임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 고통들을 기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려운 여정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본받게 되며 우리 자아의 것들을 더 떨쳐버릴 수가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정화의 시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기간에도 기쁨과 희망을 잃지 않으며, 모든 이들에 대한 애덕과 너그러움을 지닐 수 있으며, 주님께의 감사와 찬미가 마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기간은 또한 우리들 자신이 테스트받는 기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서도 손쉽게 테스트를 통과한다는 보장은 없다. 사실 그 테스트는 무척 간단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시험이다. 자칫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첫 번째 테스트는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우리가 주님과 주님의 진리에
끝까지 충실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우리가 어떤 불이익과 비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진리와 진실을 진리와
진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테스트이다. 주님께서 주신 귀중한 신앙의 선물을 우리가 충실하게 지켜내는가를 보시기 위하여 짐짓 어려움들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모든 정당한 권위와 권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그래서 모든 정당한
권위와 권력 그 자체는 선한 것이며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어떤 확실한 목적을 위하여 위임되어 있는 것이다. 권력이 목적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권력을 위임받은 이들은 그 목적의 추구에 충실해야 된다.
그러나 인간들의 부족함 때문에 때로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권력이
진리와 진실을 보호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자포자기(自暴自棄)하거나 방관자의 입장으로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진리와 진실을
지켜야 한다. 나는 빼고 남들이 지켜주기만 기다려서도 안된다. 성녀 쟌 다르크는 화형을 당하면서까지도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와 사명을 지켰다.
우리의 순교 선열들도 끝까지 가톨릭 신앙을 전하며 지켰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도,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인간들의
부주의와 선입견 때문에 진리와 진실이 가리워지는 경우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 십자가 상에 달리신 주님 곁에 서있던 사도 요한의 모범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주의 일들에
대하여 말하고, 사목자들께 청원드리며, 진리와 진실을 전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는 우리가 교도권의 중요성과 엄위함을 몰라서가 아니다. 교도권에
의거한 발표에도 불구하고, 나주에 오신 성모님을 차마 성모님이 아니시다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주에 성체로서 오신 주님을 주님이
아니시다라고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양심 상 그 일들을 하시는 분들이 주님이시고 성모님이심을 확실히 믿는데, 이를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신앙의 배반이 될 것이다. 우리가 침묵한다면, 이 또한 진리를 증거해야 할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박해와 비난이 두렵다고 하여 신앙과 양심에 등을 돌릴 수는 없으며, 또 진리와 진실을 옹호하고 전파하며 자신이 받은 은총에 대하여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제자들 때에도 그랬고, 로마의 박해 시대에도 그랬으며, 우리 나라의 박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육신의 생명을 내어놓으라고
한다면 혹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주님의 오심을 부인하고 성모님의 말씀과 징표들을 부인하며 교회의 정통 가르침의 왜곡에 동의하라고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만약 나주의 일들의 진실성을 믿는 이들이 주위의 압력과
비판에 못이겨서, "그래, 인제 그만 포기한다. 나주의 그 모든 일들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해버린다면, 이는 압력 밑에서 자신의 진실성이
깨어지며 주님과 성모님께의 충성에 금이 갈 뿐 아니라, 나주의 일들에 대한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그 일들에 대한 교회의
인정도 더 힘들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신자들이 저버리고 무관심한다면, 어떻게 교회의 지도자들께서 관심을 보이시고 인정해주실 수가 있을
것인가? 반면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끝까지 지킨다면 이는 그 일들이 진실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는 강력한 증언이 될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그 백성이 하느님께로부터의 엄청나게 귀한 선물을 받기에 합당함이 입증될
것이다.
두 번째 테스트는, 우리가 진리에 충실하는 동시에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과 자세를 확고히 유지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되었듯이 모든 정당한 권위와 권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특히 교회 안의 교도권과
사목권이 그러하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듯이 교회를 따르고 모든 사목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잘못된 점들을 토론하고 말씀드리며
시정을 위한 청원을 드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교회의 권위를 수호하려는 의지(意志)와 병행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를 교회에 맡기시고 그 진리의 수호를 위하여 교도권을 위임하셨으니, 우리가 주님의 진리에 충실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교도권을 수호함에
있어서도 필요불가결의 일이 될 것이다. 반면 우리가 진리와 진실에 불충실하다면, 이는 교도권의 수호가 아니라 손상(損傷)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많은 분들이 나주의 일들의 진실성을 짐작하면서도, 그 일들이 공식
인정된 다음, 즉 예수 성심, 성모 성심의 승리가 도래된 다음에야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과 성모님께서 정작 우리의
도움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시는 때는 부당하게 단죄되시어 고통받고 계시는 지금이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용기있는 신앙고백과 주님과 주님의 진리를
지켜드려는 희생적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가 아닐까? 모쪼록 한 사람이라도 더 늦기 전에 주님과 성모님을 위한 증언자의 입장에
서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현재의 영적 전투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열절하고 꾸준한 기도로써 주님과 성모님, 그리고
천상의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이 분도 1999년 9월 15일 통고의 성모님
축일
SBS의 나주 기적들에 대한 방영을 보고
지난 99년 10월 10일 SBS
TV 방송국에서는 가톨릭의 초자연적 현상들을 다루면서 나주에서의 일들에 대하여 약 20분간 방영하였다. 초자연적 현상들의 참 의미, 즉 그
현상들의 이유와 목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가톨릭 신앙의 견지에서 다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호기심 차원의 수박 겉핥기 식의 보도가
되지는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남겼지만, 그래도 방송국에서 상당히 성의있는 자세로 사실 조사에 임해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나주에 대한 자료들이
대체로 기피되고 있는 현실 하에서, 진실을 어느 정도나마 객관적으로 파헤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 이번 방영의 의의였다고 본다. 아쉬운 점들은
앞으로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의 방영은 좋은 시도였으며, 나주의 일들을 바로 이해하려는 우리 모두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일들은 단순히 "기이한 현상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담아 우리에게 보내시는 매개체들이기 때문이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주시는 가르치심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외적(外的)으로 증명해 주시시기 위하여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예수님 자신께서 참 하느님이시요 동시에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즉,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성자(聖子)께서 인성(人性)을 취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강생(降生) 즉 육화(肉化)의
사실은 초자연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의 만남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실로부터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며 불가피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이란 바로 자연의 물리적 세계 안에서 초자연적인 목적과 원인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적들은 초자연적이신 분께서 자연적인 세계 안에 친히 개입하심을 알려주는 징표들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은 아니고 하느님이실 뿐이시라면,
그분은 우리가 가까이 느끼기 힘드는, 초월적인 분이실 것이며, 반면, 그분께서 하느님이 아니시고 인간일 뿐이라면, 스스로 초자연적인 능력이 없는
자연적인 인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기적들을 행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보내심을 받아 세계 만방에서 당신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통하여서도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여
오셨다 (마르꼬 16:20 참조). 그분의 기적들이 2천년 전에 천주 성자의 강생의 사실과 그분의 가르치심을 뒷받침했듯이,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특히 성인들의 생애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로써 당신 교회의 존재와 사명의 초자연성을 증명하여 주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관심이 기적들에 머물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그 기적의 징표들이 지향(指向)하고 있는 그분의 뜻과 말씀에 충실할 것을 원하고
계신다.
SBS의 방영에서 나주의 여러
현상들이 다루어졌는데 그 중에서 부정확한 점이 있었다라고 생각되는 부분들만에 대해서 언급하고저 한다.
1. 방영 중 나레이터는 성모님
상으로부터 흐른 피의 분석 결과 사람의 피로 밝혀진데 대해서 그것이 사람의 피이기 때문에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라는 언급을 했는데, 이는 이해되기
어려운 논리라고 본다. 성모님께서 흘리신 피가 사람의 피로 판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만일 그 피가 사람의 피가 아닌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면 그야말로 그 기적의 신빙성을 의심해야 될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2. SBS의 검사자들이 나주의
경당에서 경당 앞벽의 환풍기 있는 곳으로부터 면병을 떨어뜨려 보았는데, 면병이 밑으로 내려오게 할 수는 있었으나, 실제의 기적 때 성체가 일정
방향으로 내려온 것을 설명하기는 어려웠고, 또 1995년 7월 1일에 일곱 개의 성체가 성모님 상 앞에 함께 내려와 가지런히 포개어졌던 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특히 1997년 8월 27일에는 성체가 "S"자 모양을 그리고 돌면서 나비처럼 날아와서 기도하고 계시던 파 신부님과
고통받고 있던 율리아 자매 사이의 위치에 정확하게 내려왔다. 당시에 경당 안에 아무런 바람도 없었는데, 경당 앞벽으로부터 5-6m 떨어진
곳까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날아온 것을 자연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SBS의 방영을 통하여 그 기적에 대하여 처음으로 알게 된 분들 중에는 나주에서의 기적 때 성체가 환풍기로부터 떨어졌었다라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SBS에서 온 분들이 환풍기 쪽으로부터 실험을 해보았다는 것이지, 실제 기적 때 성체가 환풍기로부터 내려왔다는 하등의 근거가
없으므로, 이 점에 오해가 없으시기 바란다. 오히려 기적 당시 율리아 자매는 경당 앞벽에 걸려있는 십자 고상의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변하심을 보았고 십자가 상에서 흘리시는 성혈이 하얀 성체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내려오신 성체의 출처는 다름아닌 십자가에
달려서 피흘리시는 예수님 자신이심을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인지(認知)해야 할 것이다.
3. SBS 프로그램 안에서의
사진 전문가들이 나주의 경당에서 찍은 몇 장의 기적적인 사진들에 대하여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즉 면병을 벽에다 붙인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이다. 성작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성체와 성작의 모습들이 함께 사진에 나타났으므로, 성체의 모습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된다면 이는 성작의 모습 또한 문제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첫 째, 그 사진들이 조작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가장 신빙성있는 증거는 그 날(1993년 6월 27일) 현장에 있었던 신자들의 증언이다. 아쉽게도 이번 SBS의 방영에서는
증인들의 말을 참고하려고 하는 노력이 결핍되었다. 그 날 경당에서 기도하고 있던 이들은 갑자기 성모님 상이 마치 성모님 상의 뒤쪽, 오른쪽에
공간을 만들고저 하시듯이 앞으로, 왼쪽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며, 율리아 자매는 사진을 찍어야 된다라고 하는 영감을 받았으므로, 율리아
자매와 다른 이들이 같은 카메라를 이용하여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육안으로는 성모님 상 뒤에 성체나 성작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누가 무슨 장치를 한다든가 조종을 한다든가 하는 낌새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로 그 필름이
현상되었으며, 아무도 예상치 못한 성체와 성작의 모습들이 사진 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그 사진들과 관련한 아무런 조작이 없었다라고 하는
것은 그 날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날의 기적 사진들의 참 의미는 그 날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주신
성모님의 메시지를 고찰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촬영된 여러 사진들을 보면, 성체의 문양도 여러 가지이고 성체와 성작
사이의 거리도 사진들 사이에 다르다. 만약 이것이 조작이었다면, 누군가가 성체를 붙였다가 떼었다가 하는 동작을 여러 번 해야 되었을 것이고,
성작의 위치도 변경시켰어야 했는데, 그 날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 그런 동작들은커녕 성체와 성작의 모습조차 전혀 보지 못했으니, 그 일들이
조작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근거없는 가정에 불과하다.
둘 째, 그 날 찍은 사진들 중
하나에서 (성혈이 묻은 성체와 성작 사이의 거리가 먼 사진) 성체의 모습을 보면 오른쪽 위의 가장자리 일부가 밝게 나와 있는 것을 보고서 이는
면병을 뒷벽에 붙이기 위하여 사용한 접착제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는데, 이 역시 성급한 가정에 불과하다. 왜냐 하면, 문제의 사진이 찍혀지고
난 후에 곧 찍은 사진에 보면 성체와 성작이 더 가까워져 있는데, 이 사진에서 더 크고 자세하게 보이는 성체에는 가장자리 전체가 매끈하게 나와
있고 다른 사진에서 가장자리의 일부가 밝게 보이는 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성체의 가장자리에 아무런 접착제의 흔적이나 손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의 사진에서
성체의 가장자리 일부가 밝게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이렇다라는 결론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성체의 가장자리에
접착제가 묻었다기보다는 빛의 작용으로 보는 것이 더 신빙성있어 보인다. 사진들 안에는 성체의 가장자리 뿐 아니라 많은 곳들에 빛의 반사
흔적들이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성체와 성작 사이의 거리가 먼 사진에서는 성체에 나타난 예수님 모습 옆에 천사의 모습처럼 보이는 작은
문양이 있는데 그 문양 자체는 어둡게 되어 있으나 그 문양의 오른 쪽과 윗 쪽 가장자리가 밝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문양의 빛나는 곳과
성체의 빛나는 가장자리 부분과는 같은 방향이다. 이는 다른 사진에는 없는 현상이다. 이와 연관하여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문제의 사진에서
성작 윗 끝으로부터 빛이 강하게 반사되고 있는데, 그 반사된 빛이 위로 올라가는 것같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빛이 위에 있는 성체에
닿아서 어떤 작용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능성 그 자체가 아니라, 성체의 가장자리의 일부가 밝게 보이는
것은 접착제가 아니라 빛의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라는 점이다. 그것이 접착제일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이 일이
조작일 것이라고 하는 의심을 전제로 한 논리의 비약이다.
셋 째, 이 사진들이 조작인
것같다라고 하는 생각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은 성작의 모양과 성작 주위를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성체와 성작이 가까워진
사진을 보면, 성작으로부터 반사되는 빛들이 성모님의 푸른 망토에 반영되어 있다. 뿐 아니라, 그러한 빛의 반영이 나무로 된 옆의 벽에도 있고
푸른 색의 뒷벽에도 있다. 이것은 만약 성작이 진짜 성작이 아니라 성작의 사진을 뒷벽에다 붙여놓은 것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오로지 3차원의
성작이 뒷벽과 옆의 나무벽와 성모님 상의 사이에 있음으로써 그러한 빛의 반영들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성작 자체를 보면, 성작의
왼쪽 표면에 붉으스름한 나무벽의 반영도 있고, 성작의 아랫쪽 표면에는 푸른 색 뒷벽의 반영도 보인다. 그리고 성작의 오른 쪽 표면에는 푸른
성모님 망토의 반영도 보인다. 특히 나무벽에 있는 빛의 반영은 성작의 앞부분이 나무벽보다도 더 앞으로 돌출되어 있음을 뜻한다. 반영을 일으킨
나무벽 자체가 푸른 뒷벽보다 어느 정도 앞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성작의 표면에 보이는 나무벽의 반영은 직선이 아니라, 성작 표면의 굴곡을
따라서 굽어져 있다. 즉 그곳에 사람들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성작이 실제로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작의 무게를 생각할 때 성작이
아무런 장치도 없이 그처럼 떠있게 한다는 것은 자연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뿐 아니라, 여러 사진들 사이에 성체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으나, 성작의 상하 위치가 다르게 되어 있다. 사진들이 찍혀진 순서를 살펴볼 때, 성작이 성체를 향하여 위로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조작의 결과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거없는 억측에 불과할 것이다. 더군다나 현장을 줄곧 목격했던 증인들은 성체와 성작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은 성모님
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장치된 아크릴 판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찍었고, 나머지 사진들은 아크릴 판을 치운 다음에 찍었는데, 진행자는 이것이 마치
조작의 근거가 되는 듯이 언급했는데, 어째서 그것이 그런 근거가 되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다. 납득되기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였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나주에서의 기적
사진들에 대해서 조작의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라고 말한 것은 증인들의 증언과 자료에 대한 조사가 충분치 못한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성급한
고찰이었다. 바로 그 기적적으로 나타난 성체와 성작의 모습 옆에 계시는 성모님의 이마로부터 흐르고 있는 향유와 그로부터 발하는 강하고도 상쾌한
향기 역시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자비로우신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강력하고도 확실한 징표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계시들을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와 사랑으로써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천사들의 메시지를 받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주저함없이 즉시 아기
예수께로 달려갔던 것처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적 순종이 이성(理性)에도 부합하도록, 당신 계시의 외적(外的) 증거들이 성령의
내적 도우심과 함께 주어지기를 원하셨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56조).
따라서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기적의 징표들은 우리의 이성적(理性的)인 사고(思考) 및 판단과 결코 모순될 수 없다. 만약 그 징표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고 있는데
우리가 배척하고 있다면, 이는 그 징표들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사고와 판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나주에서의 징표들은 앞으로 교회의 지도 하에서 철저하고도 객관적으로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는 시복(諡福)과 시성(諡聖)을 위한
심사 때에도 기적에 대한 철저한 과학적인 조사를 시행한다.
이 분도 1999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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