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성모님의 진실

공지문의 문제점들

가톨릭 신앙의 보물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Augustin Thu 신부님의 편지  —  1998년 3월 6일

인도의 마테오 쿰푸칼 신부님(신학 박사)께로부터 온 편지  —  1998년 8월 9일

프란시스 수 신부님의 증언

인도의 갈멜회 수녀원장님께로부터의 편지  —  1998년 2월  10일

도밍고회 닌파 에스라반 수녀님의 편지  —  1998년 8월 15일

성모님의 눈물의 의미  —  1998년 2월

 '나주 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읽고 (가톨릭 다이제스트 2월호) — 1998년 2월  11일

나주 성모님의 크신 사랑  —  1998년 3월 14일

축구하다가 다친 발이 감쪽같이  —  1998년  4월  29일

나주 성모님께서 David에게 주신 큰 치유  —  1998년 6월 6일

나주 성모님을 알고 낙태할 아이를 순산한 은총  —  1998년 6월 17일

에이미의 신앙체험  —  1998년 6월 22일

욜란다 자매에게 온 편지  —  1998년 7월 13일

마이 리 씨의  편지  —  1998년 7월 20일

로살레스 자매님의 편지  —  1998년 7월 24일

요세피나 자매님의 증언  —  1998년 8월

우리 가정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주신 나주 성모님 — 1998년 8월 12일

내 교회의 가장 큰 보배는 ...  —  1998년 8월 15일

제시카 자매님의 편지  —  1998년 8월 16일

아멜리아 립책 부인의 편지  —  1998년 8월 24일

마리에타 로체스 부인의 증언

Augustin Thu 신부님의 편지 

 

친애하는 율리아 자매님께,

자매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고통을 받으신 분입니다. 저는 자매님을 위하여 계속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과 마리아께서는 항상 당신의 힘이 되어주시고 지탱하여 주십니다. 자매님께서 고통을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과 성모님을 따르시기 때문이며 그분들을 계속하여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광주 대교구의 윤 빅토리노 대주교님께로부터 1998년 1월 1일 자의 "나주의 윤 율리아와 그의 성모상에 관련된 현상들과 메시지들에 관한 공지문"을 받았습니다. 진리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계속하여 예수님과 성모님을 위하여 일해야 하며, 또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모님의 메시지를 하루 속히 인정하여 많은 영혼들이 구원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야 겠습니다. 저는 아들레이드 대교구로 옮겨왔으며 이 대교구 안의 모든 월남인들의 신앙 생활을 돌보고 있습니다.

월남인 센터에서 저는 성모님께서 요구하신대로 성체 조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a)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부터 저녁 6시까지
(b) 매주 금요일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c) 매주 토요일 오후 8시부터 주일 오전 9시까지 (철야)

친애하는 율리아, 성모님께서는 자매님을 선택하셨습니다. 성모님을 대신하여 자매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드리십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치유를 받을 것입니다. 오스트랄리아에 사는 월남 사람들은 자매님을 뵈러 나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매 토요일 밤에 저는 사람들에게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들을 전해줍니다.

친애하는 율리아, 저는 미사 성제를 바칠 때 나주에서 1997년 8월 27일에 내려오신 성체와 같이 가시에 둘러싸이고 사랑의 불꽃이 있는 예수 성심 문양이 있는 면병을 사용합니다. 한국에서도 사제들이 이와 같은 면병을 사용합니까?

영어로 된 나주 성모님의 비디오들을 월남어로 번역하여 월남 사람들이 성모님의 메시지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도록 허락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엘리사“?위아 수녀님이 자매님께 사랑의 인사를 드립니다. 인제 오스트랄리아 인들도 월남인 센터에 기도드리러 옵니다. 그들은 영어로 된 나주의 메시지들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영어로 된 나주 메시지들을 저에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저도 자매님을 위하여 기도드리겠으니, 저를 위하여 기도드려주십시오. 사랑의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그분의 모든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사랑 안에서

 

1998년 3월 6일
Fr. Augustin Ngueyn Duc Thu, SJ
29 South Tce, Pooraka, SA 5095 Australia
전화 (08) 8359 1229

 

 

인도의 마테오 쿰푸칼 신부님(신학 박사)께로부터 온 편지

 

Mary's Touch By Mail 귀하

저는 인도 남부의 선교 수도회인 소화 테레사회에 소속해 있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저는 로마에서 성모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가 끝난 후 인도의 북부 지방 및 남부 지방의 신학교들에서 성모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제가 속한 수도회 안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또 마리아의 사제 운동의 멤버이며 수도자들 및 평신도들을 위한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세미나 동안에 저는 "성모님과 함께 하는 순례"라는 제목 하에 전 세계에서 찍은 250개의 슬라이드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슬라이드 중에는 우시는 성모님의 모습이 담긴 것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나주의 성모님께 대하여 들은 적이 있으며 그 곳의 기적들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최근에 제가 뉴델리에서 성모 신학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던 중에 강의를 듣던 분들이 "사랑의 메시지"라는 제목의 영어로 된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을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점으로 가서 그 책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을 저에게 한 권 보내주실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덧붙여서 성모님께 관한 사진들, 묵주들, 그리고 메달들도 함께 보내주실 수 있으시면 제가 성모 신심을 퍼뜨리려고 노력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인도에는 성모 신심을 전파하는 매우 강력한 평신도들의 노력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주 그들에게 강의도 하고 슬라이드들도 보여줌으로써 도와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귀하들을 위하여 그리고 하시는 활동들이 성공되도록 기도드릴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 안에서

마테오 쿰푸칼 신부
성 요셉 수도원 본원
P.B. No. 122, Aluva - 683 101
Kerala, India
1998년 8월 9일

 

 

프란시스 수 신부님의 증언

 

저는 말레이지아(Malaysia) 시부 교구의 프란시스 수 신부입니다. 1995년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있었던 나주 성모님의 눈물 10주년 기념 행사 중에 목격한 기적들에 대한 증언을 하고저 합니다. 저는 싱가폴 및 말레이지아 순례자들과 함께 나주에 갔습니다. 1995년 6월 29일에 나주에 도착했으며, 4박 5일을 나주에서 보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성모님의 집, 즉 경당에서 사흘 내리 철야 기도에 참석했습니다. 경당은 여러 나라들에서 온 순례자들로 꽉 차있었습니다. 경당 안은 성모님의 장미 향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첫 날, 즉 6월 29일 목요일 밤에 저희 그룹은 성모님께 많은 꽃들을 바쳐드렸습니다. 그리고 저희 순례 여행단의 책임자인 루이 토마스 씨가 성모님을 위한 왕관을 가져왔습니다. 율리아 자매는 저에게 그 관을 성모님께 씌워드리기를 청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영광을 주신 데 대하여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6월 30일 금요일, 우리는 기적의 샘물을 받기 위하여 산으로 갔습니다. 물에서는 장미 향기가 났으며, 이는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한 현존과 우정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을 받은 후 몇몇 사람들은 고해 성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같이들 묵주 신공을 바쳤으며, 묵주 신공 바치는 동안 태양이 돌면서 성체 모양을 이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나주에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그 때 태양이 경당 지붕에 내려오면서 성체 모양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7시 30분에 나주 성당에서 미사가 있었는데 전 세계에서 모인 순례자들로 성당이 꽉 차있었습니다. 미사의 주례는 나주 본당 신부인 김 율리오 신부님께서 맡으셨습니다. 한국어로 미사를 바치셨는데도, 신자들의 응답은 매우 좋았습니다. 네 분의 신부님이 성체를 분배하셨는데, 율리아 자매는 성당 맨 뒤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맨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습니다. 율리아 자매가 성체를 모신 후 자기 자리로 돌아간 지 몇 분이 지났는데, 그녀의 입 안에 모셔진 성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보려고 율리아 자매를 둘러쌌습니다. 미사가 끝나자 미사를 공동 집전하신 신부님들은 즉시 율리아에게 가서 성체의 모습이 변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저도 율리아 자매의 입 안에 모셔진 성체가 피와 살로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또 저에게는 축성된 면병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미사 후 모두들 철야 기도를 위해서 경당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날 경당은 완전히 차있었으며 경당 밖의 뜰에도 사람들로 차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증언을 했습니다. 저도 1995년 5월 처음으로 나주를 방문했을 때 율리아 자매가 낙태하는 이들을 위한 고통을 받는 것을 목격했던 데 대해서 증언했습니다. 아직 제가 증언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율리아 자매의 고통이 또 시작되었습니다. 그녀의 배가 아기를 밴 사람처럼 크게 불러왔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의 수는 천 명이 넘을 것입니다. 저는 자신들의 아기를 죽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내리시도록 다들 기도하라고 얘기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울음을 터뜨렸으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한참 지나서, 율리아 자매의 배는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악은 낙태, 즉 죄없는 아이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새벽 2시 30분 경이 되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는 저에게 성유로써 이마와 양 손을 축성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리아 자매와 남편, 율리오 형제에게 축성해주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는 성모님 상 앞에서 율리오 형제와 저의 손을 잡고 깊은 기도를 드리면서 울었습니다. 잠시 후, 저는 잠이 몰려오면서도 매우 평화스럽게 느꼈습니다. 그 때 저는 성모님의 현존을 매우 강하게 느꼈습니다.

새벽 3시 45분 경, 제 손을 잡고 있던 율리아 자매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성모님 상 위에 있는 예수님 고상 쪽으로 양 손을 뻗치며 무엇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저도 얼떨 결에 함께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놀랍게도 저는 성모님 상 앞으로 성체들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체를 세어보니 일곱 개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체가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으며, 경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완전히 흥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성체 안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경배하며 기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기도회가 끝나고 7월 1일 첫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철야 기도를 위하여 모였습니다. 경당은 사람들로 꽉 찼으며, 성가와 기도와 증언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사제들 및 평신도들이 성모님께서 육신의 치유와 성체 기적 등을 통하여 그들을 주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신 데 대하여 증언했습니다.

7월 2일 일요일 아침 5시 30분 경이 되었습니다. 저는 파띠마의 세 아이들에게 성 미카엘 대천신이 가르쳐준 성체 성사를 흠숭하는 기도를 순례자들과 함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곱 개의 성체 중 하나를 들고서 사람들에게 강복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적으로 내려오신 성체를 보려고 줄을 섰습니다. 그리고 성체 앞에서 경의를 표하며 흠숭했습니다. 그리고 율리아 자매와 저는 한 사람 씩 또는 가족 별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기도를 다 해주는 데 두 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저는 대단히 졸립고 피곤하게 느꼈습니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였습니다.

일요일 저녁이 되니 순례자들 대부분이 이미 돌아간 후였습니다. 경당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수는 약 100명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45명이 싱가폴과 말레이지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며, 홍콩에서 6명, 오스트랄리아에서 2명, 그리고 나머지는 한국인들이었습니다.

윤 대주교님의 지시에 순명하여, 우리는 일곱 개의 성체를 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괌에서 오신 ? 마르시알 신부님으로부터 성체를 첫 번 째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르시알 신부님께 성체를 드렸고, 그 다음에는 율리오 형제, 루비노 형제, 최 갑주 형제 (나주 시의회 의장), 안드레아 형제,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율리아 자매에게 드렸습니다. 율리아 자매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많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체를 모신 후에는 주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서 수 분이 채 안되었는데, 율리아 자매가 머리를 쳐들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녀의 입 안에 또 다시 성혈로 차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던 이들은 울음을 터뜨렸으며 성체 안의 주님을 흠숭했습니다. 저는 손가락으로 율리아 자매의 혀 위의 성혈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손가락을 흰 천으로 닦았습니다. 천 위에는 피 자국이 묻어 있었습니다. 이 천은 나중에 과학적인 조사를 할 경우를 위해서 보존될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그리고 저는 이것이 성체 성사에 대한 재확인과 재강조를 위하여 성모님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체 안의 예수님의 현존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 사제로서 성체 성사를 통하여 사람들의 생활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도록 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의 성체 기적들은 저의 신앙을 북돋아 주었으며, 저의 사제로서의 직분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미사 성제를 봉헌하고 성체를 축성하는 것이 이전과는 다른 경험이 될 것입니다. 저는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참으로 계심을 증언하며 재확인하며, 또 제가 목격했던 성체 기적들에 대해 증언을 계속할 것입니다.

7월 3일, 월요일, 아침 4시 15분 경이었습니다. 경당에서 자원 봉사하는 요한이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와서 경당 밖에 모신 큰 성모님 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가서 보시라고 했습니다. 이 큰 성모님 상도 역시 눈물을 흘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번의 나주 순례 동안 저는 최소한 여덟 번의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우리의 나주 순례는 대단히 의미깊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성체 기적들이 그러했습니다.

저는 성모님께서 저를 나주로 부르셔서 이렇게 많은 귀한 징표들을 경험하게 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확실히 믿습니다. 저의 마음 속에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성모님의 거듭되는 간청들에 응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한 것인가를 확실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을 위해 희생해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옥으로 가고 있으니, 그들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고 희생하여라." (1917년 8월 19일, 파띠마에서)

"용기를 내어 나에게 다가와 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여 붉은 용으로부터 해방되어 주님의 나라가 오도록 도와다오. 그리하여 교황과 모든 주교, 성직자들인 저희들이 일치하여 부활의 승리가 온 세상에 임하도록 해다오. 지금 이 시대가 마귀의 횡포로써 인간의 힘을 빌어 인간을 지배하려고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내 가련한 무수한 자녀들은 붉은 용을 따르고 있어 그들은 더 없는 교만으로 짙은 어둠 속, 즉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고 내가 주는 메시지까지 혼란시키기 위하여 여기 저기서 여러 가지 형태로 교활하게 활동한다." (1989년 7월 5일, 나주에서)

"오 가련한 내 자녀들.  분별없이 어둠 속으로 따라가는 내 수많은 자녀들을 내 사제들이여 손잡아 다오. 내게서 떨어져나간 사제들과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사제들도 많다. 내 사제들을 통해 또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비옥해진 토양 위에 내 아들과 또 나의 빛을 받아 많은 영혼들이 성장하고 있는 반면에 붉은 용이 횡포를 부리고 있으니 어서 깨어서 기도하도록 부탁해다오." (1989년 7월 5일, 나주에서)

"오 사랑하는 나의 사제들이여! 아무리 부패한 영혼일지라도 나는 내가 주는 빛을 그들이 받기를 원하고 있으니 회개할 수 있도록 어서 내 아들 예수께 충절을 다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내가 흘린 눈물과 피눈물이 헛되이 흐르게 하지 말아다오. 사랑하는 나의 사제들이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어주기 바란다." (1989년 7월 5일, 나주에서)

"오 사랑하는 나의 사제들이여! 성사의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행하는 나의 보배여! 내 메시지를 외면하지 말고 티없는 성심을 온전히 믿고서 나의 인도함에 모든 것을 맡기기 바란다. 그래서 끝없는 희생과 보속을 통해 교묘한 여러 가지 수법으로 괴롭히려고 하는 마귀를 짓밟기 위하여 온전히 내 성심에 의지하라. 나의 성심은 반드시 승리하리라. 내 말을 잘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승리함을 보리라." (1989년 7월 5일, 나주에서)

성모님의 이러한 긴급한 메시지들을 실천하지 않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저에게는 앙화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메시지들을 제 마음 속에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께 완전히 신뢰하며 모든 것을 성모님의 인도하심에 맡겨드리겠습니다.

"오, 저의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여! 저는 저 자신을 당신의 모성적 돌보심에 맡겨드립니다. 당신의 사랑의 품 속에 저를 안고 다니소서. 당신의 영적 젖을 먹여 주시옵고,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저를 당신의 티없으신 망토로 덮어주시며 보호하여 주소서. 저의 생애 전부를 당신의 티없으신 성심에 봉헌하나이다. 어머니, 저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제가 당신께 의해서 인도되고 형성되도록 하여 주소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소서. 기도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며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어머니, 저의 양 손을 잡으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로 데려다 주소서. 성모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멘."

Fr. Francis Su
St. Anthony's Church
Sarikei, Sawarak
Malaysia

 

인도의 갈멜회 수녀원장님께로부터의 편지

 

저는 인도의 꿈바꼬남 지방에 있는 성 요셉 갈멜수도원의 테레시타 수녀입니다.

자매님께 편지를 쓰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편지를 자매님께 보내드려서 나주 성모님의 중개를 통하여 저희 가족에게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려드리고저 합니다.

저는 6남매 중 맏이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60세이십니다. 1997년 7월 7일, 어머님께서는 바캄파티에 있는 저의 막내 여동생을 방문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양 다리가 몹시 아프셨습니다. 다리가 아프신 것은 꽤 오래되셨습니다. 그리고, 곧 친척들이 어머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웃고 계셨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곧 친척들은 어머님께서 말을 못하실 뿐 아니라 걸음도 걷지 못하시는 것을 알아채고 즉시 병원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의사는 주사를 한 대 주었으며, 혈압이 너무 높았으므로 알약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절대 안정을 하셔야 되며 혼자 계시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또 의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성 요셉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11시 경에 어머님께 뇌일혈이 있었으며, 몸이 마비되셨습니다. 그리고 성 요셉 병원의 중환자실에 모셔졌습니다. 곧 본당 신부님께서 오셨고 병자의 성사를 주셨습니다.

의사는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했으며, 곧 돌아가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님의 뇌 속에 혈액이 응고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마비 상태에 계셨습니다. 저는 수도원에서 수녀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는 우시는 나주 성모님의 사진이 기억났습니다. 그 사진은 불란서에 살고 있는 Ž?폴이란 분이 나주에 갔다가 가져온 "사랑의 메시지들"이라는 책 그리고 신문 몇 장과 함께 가져다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인도 사람인데 그분의 이모 두분과 사촌 동생이 저희 수도원에 수녀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저희 모두에게 형제와 같습니다. 저희 수도원에는 모두 19명의 수녀들이 있습니다.

저는 당장에 나주 성모님 사진을 막내 동생에게 보내어서 어머님의 몸에다 놓고 성모님께 열심히 기도드리라고 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손발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계셨는데, 저의 이모와 동생이 나주 성모님 사진을 보여 드리면서 쾌유를 위하여 기도 드리시라고 말씀드리니까, 여러번 손을 모아 기도드리시려고 노력을 하셨습니다.  드디어 쉽게 두 손을 모으실 수 있게 되었고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가득차서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후 어머님께서는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셨습니다.   곧 말씀도 잘 하시고 걸음도 걸으시게 되셨습니다.  의사들은 놀라움을 표시하며,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상은 저의 어머님의 기적적 쾌유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이 글을 모임에서 알리셔도 좋고 출판을 하셔도 좋습니다. 저와 여기 모든 갈멜회 수녀들은 성모님께서 하신 너무나 당연하신 부탁, 즉 나주의 성모님 집에 감실이 설치되고 미사가 바쳐질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이 빠른 시일 안에 실현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여기 갈멜회 수녀들 모두는 율리아 자매님과 항상 일치하여 기도 드릴 것입니다.

테레시타 수녀
성 요셉 갈멜수도회 원장
꿈바꼬남, 인도
1998년 2월 10일

 

도밍고회 닌파 에스라반 수녀님의 편지 

 

필리핀, 일로일로의 칼리노그 시
도밍고 회의 에스라반 수녀님께로부터 온 편지
1998년 8월 15일, 성모님 몽소 승천 대축일

친애하는 주님과 성모님의 일꾼들께,

보내주신 소포에 대해 대단히 감사합니다.  신문들은 나누어주었으며, 비디오와 책들은 돌려가면서 보고 있습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대단히 기뻐하고 있으며, 주님과 성모님께서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시고 고해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시는 데 대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읽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고 있으며, 다시 미사에 참석하고 성체를 모시고 있습니다.  보내주신 신문들과 책들의 양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본당들과 신자들이 신문과 책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더많은 신문과 책과 비디오를 보내주시기 바라며, 또 최근의 메시지들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리책들도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지구 상의 이 지역에서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게 된 데 대하여 특별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앞으로도 성모님의 메시지 전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저희의 부탁에 대해 좋은 답을 주시기를 바라면서, 주님께서 당신들께 천국에서 백배로 갚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감사드리는

Sr. Ma. Ninfa Eslaban, OP
Mary Immaculate Academy
Calinog, Iloilo
Philippines

(번역자 주:  에스라반 수녀님께서는 어려우심에도 불구하고 미화 20불까지 넣어보내셨습니다.  오늘 나주 성모님 관련 출판물 수백불 상당의 양을 선편으로 보내드렸습니다. 특히 수도자의 신분이시므로, 필리핀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모님 메시지를 전파하시는데 큰 성과를 거두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의 눈물의 의미

 

나주 성모님의 광주 대교구 대주교님의 발표 이후로 여러 가지 사람들의 의견과 신부님의 의견을 담은 글을 읽고 부족한 나의 소견과 체험 또한 알리려고 이 글을 쓴다. 나는 나주에서 일어난 성모님의 발현하셨던 기적, 징표, 메시지를 떠나서 20세기 동안 여러 곳에 발현하셨고 자체 교구의 인정을 받았던 파티마, 보렝, 바느, 아끼다, 베타니아 등에서의 성모님의 발현, 메시지와 성모님이 나타내신 슬픔과 눈물 등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천주 교회의 역사 속에는 거의 500년 마다 이단들이 일어나고 또한 박해가 있고, 그럴 때마다 성모님이 발현하시거나, 성인 성녀들을 보내시어 불굴의 용기와 성령의 지혜로써 교회를 쇄신하도록 하셨다. 우리 천주교의 과거 행보를 보면 때로는 하느님의 특은이 잘못 이해되어지고, 오해받았던 적도 여러번 있었다. 불란서의 성녀 쟌 다르끄는 오해로 인하여 화형에 처해졌고, 예수 성심을 전하였던 성녀 마리아 말가리다, 그리고 자비의 기도를 전한 파우스티나 수녀에게도 시련의 시기들이 있었고 교회에서 10년 간이나 자비의 기도를 전하지 못하게 막았던 사례도 있었다.

그러기에 신자로서 고구장이신 주교님의 뜻에 따라 공식적인 행사나 주교님이 금지하신 것을 지키는 것은 신자들의 순명의 도리이지만, 막지 않은 것까지 불러서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우리들은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하고 대접해 드렸는가? 안나와 가야파 같은 그 시대의 사제, 대사제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맞아들였으며,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였는가? 예수님을 가까이 대하고 지척에 살았던 나자렛의 주민들은 가장 인간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며,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하고 인간적인 방향에서만 판단하였지 않은가? 대사제나 사제들, 지식으로 꽉찬 그들에겐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이단의 모습으로 비추어졌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에 충실한다는 이유로 교만과 아집에 가리어져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죄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지 않았는가? 가믈리엘과 같은 훌륭한 율법학자도 예수님을 하느님이시라고 확실하게 고백하지 못하였고, 단순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하느님이심을 성령의 감도로 고백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한 번쯤 이런 것들을 묵상해봐야 한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2000년 전에 오신 것처럼 가장 초라한 곳을 거처로 삼고, 거리의 무숙자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사제님들, 교회를 사목하시는 회장님들, 열심한 신자님들이 이런 초라한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알아볼 수 있겠는가? 하고 묻고 싶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마지막 잡혀가실 제 안나와 가야파 사제들은 지식과 율법에 가리어 말씀이 사람되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신성 모독처럼 여기었다. 거기 더하여 우매한 군중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때리고, 예수님을 모독한 내용이 성경에 쓰여있다. 만약에 나주에서 여러 가지 징표로 발현하셨던 성모님이 시련과 암흑의 시기를 거쳐서 인정이 된다면, 함부로 떠들고 판단하였던 사람들은 옛날 우매한 군중들이 범하였던 것과 똑같이 예수님에 이어서 성모님을 박해한 것이 될 것이다. 여러 곳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시어 좋은 메시지,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판단하지말고 기적에 대한 호기심도 갖지 말고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성모님의 메시지의 부탁들을 실천하고 자신의 생활을 바꾸고 우리에게 맞겨진 가정 생활을 성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자세히 보고 느끼고 알아보지 않고 성급하게 판단한다면, 교회 안에서는 싸움 대장이 되고 그것이 바로 악마가 원하는 바이고 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1989년에 나주에 우연찮게 들렀다가 성모님의 현존을 실제로 체험하고 그 이후로는 자신의 성화와 가족들의 성화 내 이웃의 성화를 위하여 매일같이 저녁 식사 후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묵주 신공을 바치고 그 외에 여러 가지 기도들(사제와 교황님을 위한 기도, 천사들께 드리는 기도, 낙태된 아이들을 위한 기도, 청소년을 위한 기도, 여러 성인 성녀들께 드리는 기도)을 첨가해 드리고 있다. 나 자신을 포함한 죄인들의 끊임없는 회개와 내 이웃들을 위하여 매일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희생들을 성모님께 기쁘게 바치고 하루 일과 중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도 묵상하며 항상 충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내 남편에게 더욱 더 감사하고, 매일 싫다하지 않고 기쁘게 기도에 동참해주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자라는 아이들에게도 감사하고, 당신 자신들을 희생으로 내놓으신 사제님들과 수녀님들에게도 감사하고, 불행하고 불쌍한 이웃들이 나의 죄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기워갚고 보속한다는 생각에서 감사하고 나의 힘닿는 데까지 사랑으로 보답하고저 노력한다. 이것들이 나주에서 성모님이 나에게 주신 열매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그 당시에 인간적인 눈으로는 무력해 보이고, 율법에 맞지 않는 것도 같고, 그 제자들은 얼마나 비천하고 초라해 보였던가?

교만은 항상 오류를 만든다. 우리는 성모님을 닮아서 어떤 중요한 일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며 침묵으로 답하셨던 성모님의 신중함을 본받아야 하겠다. 나는 윤 대주교님의 신중성이나 충실하게 사셨던 사제 생활, 주교님의 성덕으로 보아도 만약 나주가 정말 나에게 느껴졌던 것과 같이 성모님의 진실한 발현이라면 충실한 사제들을 언젠가는 당신 편에 서게 하시리라 생각하고 확신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호산나! 호산나!하고 찬미하고 성지 가지를 흔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자신의 겉옷을 깔아드리는 친절을 베풀고도 돌아서서 그 다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그리고 바라빠를 놓아주시오! 하는 그런 우매한 군중들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지 않을까. 본인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현하시고, 눈물을 보이시며 호소하시는 성모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복음화를 외치고, 천주교, 개신교 모두가 하느님을 매사에 들먹이며 이야기하지만,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 세상이 2000년 전보다 윤리로부터 타락하고, 사악하며, 소돔과 고모라 때보다 낙태 등 죄악은 더 심하고, 어려운 시기가 오는 것은 크리스찬이라고 불리우는 우리 모두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짠맛을 잃고 우리의 마음은 돌밭이요 가시밭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과 자비에 재대로 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반성하고 돌이켜보며, 오늘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죄들을 하느님께 내 기도와 함께 봉헌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와 부족하지만 뜨거운 나의 사랑을 바친다.

이  로사
2835 Skyview Lane
West Covina, California 91791. U. S. A
1998년 2월

 

'나주 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읽고 (가톨릭 다이제스트 2월호)

 

† 찬미 예수님!

 

가톨릭 다이제스트의 ‘나주 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읽고 편집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감히 펜을 들어봅니다.

지난 1월 신문을 통해 나주에 관한 광주 대주교님의 공식 발표를 접하면서 뭐라 표현할 수가 없는 안타까운 심정에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대주교님의 발표를 존중하고 순명함을 우선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많은 혼란이 엄습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이제스트의 글을 접하고 위로와 희망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저 같은 경우 나주 성모상의 눈물, 피눈물 등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메시지 책자, 테이프와 비디오 등을 보면서 혼란스러움보다는 오히려 깊은 회개와 진정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고 생활 개선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로 인해 남편은 물론 가족들이 영세를 받게되고 무엇보다도 자녀를 2명으로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죄인 줄도 모르고 행해왔던 낙태를 회개했습니다. 첫째와 14년 차이가 나는 세째를 낳고, 또 다시 넷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주변의 반대가 많았고 부끄러움과 심지어는 모욕까지 감내해야 했지만 낙태의 죄를 다시 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고통들을 잘 봉헌할 수 있었던 힘은 호소하시는 성모님의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요 그 호소의 소리가 저의 모든 상황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도록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한 제가 알고 있는 분들에게 나주에 관한 메시지를 전할 때 긍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긍정적인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삶을 보면 각자 자기 위치에서 선하게 살려고 애쓰고, 나보다는 타인을 위해 기도하면서 호소하시는 성모님의 성심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파 어려움, 고통등을 잘 봉헌하며 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나주의 여러 현상들로 인해 혼란을 겪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주 성모상과 관련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각자 더욱더 예수님 사랑에 불타고 모령성체, 모고해 등을 하지 않기 위해 전보다 영혼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이것이 기쁨이요. 감사요. 구원의 길이 아니겠는지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셨습니다. 좋은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신은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 하셨고, 아흔 아홉의 우리 안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셨습니다. 천상의 어머니를 통해 멸망으로 가는 줄도 모르고 가고 있었던 이 영혼을 살려 주신 당신께 무엇으로 보답하오리까. 다만 당신 사랑과 자비에 의탁하오며 찬미 감사 드리옵니다.

보잘것없는 영혼들이 드리는 작은 기도와 희생과 고통 등의 봉헌을 받아 크게 쓰시는 분이오시니 받으소서 우리의 사랑과 고통을….      -아멘-

 

1998. 2. 11

보잘것 없는 사람 이 베로니카

 

 

나주 성모님의 크신 사랑

 

† 찬미 예수님

냉담자인 나에게 나주 성모님은 나를 당신 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나주 성모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0년 몇월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느 자매님을 통해서 우연히 나주 성모님을 방문하였고 철야 기도에도 두세번 참석 했습니다. 그뒤로 저는 나주 성모님을 잊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속적으로 살다가 어느날 부턴가 주일을 지키지 않다가 3년 동안 냉담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주 성모님 상본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그 상본을 보는 순간 성모님께서 라파엘라야 이젠 그만 방황하고 나의 품으로 돌아 오너라" 하고 다정스럽게 말씀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주 성모님 상본을 대하기 전의 제마음은 타성에 젖어 있었으며 무감각하고 마음은 돌처럼 딱딱하고 굳어 있었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책감이 없었으며 만사가 불만과 미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나주 성모님 상본을 본 순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모든 것을 통회하고 회개 했으며 그 즉시 고해성사를 보고 성당에 다시 나갔습니다. 그리고 나주 성모님을 뵙고 싶은 열망에 6년만에 나주 성모님을 방문했으며 늘 겸손하고 온유하시며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고통을 기쁨으로 잘 참아 받으시는 율리아 자매님의 모습을 보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고통을 원망하며 살아온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어떤 역경과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먼저 제 마음에선 감사가 흘러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주 성모님의 뜨거운 사랑과 율리아 자매님의 희생의 대가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주 성모님의 크신 사랑은 저의 가족과 친척 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나주 성모님 집에 초대해 주셔서 냉담자에겐 열심한 믿음을 주셨으며 하느님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게 해 주셨으며 삶의 용기와 희망을 잃고 좌절과 고통속에 살아가는 영혼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셨으며 병들고 상처받은 영혼에게는 치유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분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저는 나주 성모님께 율리아 자매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미희  라파엘라
대전 광역시 중구 대흥 2동 308-17번지
Tel. 042-226-5598
1998년 3월 14일

 

 

축구하다가 다친 발이 감쪽같이

 

저는 지속적으로 여덟 번째 나주에 가는날 아들(초등5학년)을 데리고 갔습니다. 나주에 다녀온 후 그 아이가 학교에서 축구를 하다가 발이 삐어 절면서 귀가했습니다. 많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벌겋게 부어 있었습니다. 손이 살짝만 닿아도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병원은 이미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런 경황 속에서 저녁을 먹고 아들은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잠깐이면 된다고하며 신발도 제대로 신을수 없어서 슬리퍼로 끌고 간신히 계단의 난간을 잡고 3층에서 1층 마당으로 내려 갔다합니다.

마당에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니 그곳에 나주의 성모님이 지붕 꼭대기에 계시더랍니다.(1998년 4월 23일) 그 순간에 발이 전혀 아프지가 않았답니다. 아픈 발을 움직여도보고 뛰어봐도 아프지가 않아서 계단을 뛰어 올라와 저에게 큰소리로 "어머니 기적이예요!" 하면서 이야기 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이 신비,
저희는 하느님의 권능과 두려움에 떨면서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 머리속이 텅텅 빈 것 같아요.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못할 거예요. 말하지 마세요" 하였습니다.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저희를 보호해 주시는 저희의 참 어머니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998.  4.  29
대구시 수성구 신매동 599번지 301호
이 베로니카

 

 

나주 성모님께서 David에게 주신 큰 치유

 

저희는 나주에서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하느님과 성모님의 은총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만나뵙지 못한 것은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경당에 와서 기도드리면서 성모님께 저희가 얼마나 성모님과 성모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말씀드리며 우리들이 가져온 청원들을 드릴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된 복된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나주에서 성모님의 품에 안기며, 또 성모님께 율리아 자매님이 저희 죄인들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을 바치고 계시는가를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 즉 산에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신 데 대해 다시 감사드립니다. 저희 세 명이 모두 목욕을 하는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씻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저희에게 크나큰 영적 치유의 경험이었습니다. 뿐 아니라, 성모님께서는 저희가 산에서 장미 향기를 맡으며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의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 David에게 주신 큰 치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David은 지난 4월 16일부터 매일 24시간 계속 기침을 했습니다. 두 분의 의사를 찾아갔었고, X-ray를 찍었으며, 여러 가지의 약과 한약을 썼지만, 기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다 쉬어버려서 나중에는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기관지염 및 천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코로 숨을 쉴 수 없었으며 밤에도 낮에도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싱가폴을 떠나기 전에 한국의 날씨가 그의 병을 더 심하게 할 것이라는 걱정을 했었습니다. 사실 한국에 와서 계속 기침을 했습니다. David은 성모님께 왜 자기를 나주로 부르시는지 여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싱가폴에 가져갈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산에서 샘물을 마시고 목욕을 했을 때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치유를 하여 주신 것입니다. 싱가폴에 돌아와서도 전혀 기침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침이 깜쪽같이 없어졌습니다. 성모님과 성모님의 아드님 예수님께 감사드릴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매주 금요일에 모이는 싱가폴에서의 기도회 때 저희는 나주에서의 일들과 율리아 자매님의 고통들에 대해 이야기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율리아 자매님 그리고 나주에 계신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리아님과 여러분 모두를 위해 계속해서 기도드릴 것입니다. 기도 중에 저희들도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나주에 다시 올 것이며 다음 번에는 한 그룹을 데려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998년 6월 6일
David & Maggie Chow
965B Upper Changi Road North
Republic of Singapore  507665
Fax (065) 3636460.

 

 

나주 성모님을 알고 낙태할 아이를 순산한 은총

 

1997년 5월 1일 우리집 막내 성훈(안토니오)이가 태어났다.(엄마나이: 39세) 몸무게는 3. 97Kg으로 순산이었다.

 

1년전 나는 병원에서 아기의 잉태 순간을 확인하고 기쁨보다는 절망의 늪으로 빠졌었다.주변의 자매님, 가족들의 말씀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날 2시 낙태 수술하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향하는 마음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럽고, 빨리 내일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남편과 병원에서 약속이 3시로 미루어지면서 순간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가 머리에 번득이며 떠올랐다.

 

'아! 내가 살인을 하려는구나, 안되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된다'는 주님의 말씀이 흔들리는 마음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성모님과 성령님께서 저의 마음을 일깨워 주셔서 저희 가족에게 우리 성훈이를 안겨주셨으니 주님과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은 큰 딸 승민 안젤라(10세), 큰 아들 성원 안젤로(6세), 막내 성훈 안토니오(2세) 이렇게 5식구입니다.

 

1998년 6월 17일
수원시 팔달구 매탄 4동 삼성 1차 아파트 7동 306호
임 모니카

 

 

에이미의 신앙체험

 

Dear Mr. Lee,

이번에 저와 나주로 함께 갈 순례객 한 분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부인의 이름은 황 에이미 (월남인) 이며, 미국의 뉴져지 주에 살고 있습니다.  약 한 달 전에 어떤 분이 그 부인에게 영어로 된 나주 성모님 메시지 책 (Messages of Love) 한 권을 주었습니다.  그 부인이 메시지 책을 읽고 있는 도중에 나주로 가라고 하는 성모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서 들었습니다.  그 부인은 곧 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문제는 외국 여행을 할 경우 미국에 재입국할 수 있는 허가서가 아직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허가서를 발부받으려면 3주가 걸릴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신청서들을 다 기입해서 제출했으며, 6월 24일 San Francisco로 가야 하는 날 이전에 허가서를 받을 수 있도록 매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 부인이 신청 서류들과 함께 제출하도록, 서울의 서 경원 씨에게 그 부인 앞으로 6월 27일까지는 한국에 도착해야 된다고 하는 편지를 팩스로 보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 부인은 뉴져지 주의 뉴와크 시에 있는 이민국에 서류 심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갔습니다 (오후 1시 경).  이민국에 가면서 새로 나온 신문, Mary's Touch 특별호, 1998년 제2호, 몇 장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 신문의 첫 장에는 나주에서 피눈물 흘리시는 성모님의 흑백 사진이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산 호세 시에 있는 (나주 성모님 메시지 월남어 책을 출판하신) 마이 리 씨가 그 신문 여러 장을 그 부인에게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이민국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그 부인은 그 신문을 읽으려고 펼쳤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사진으로부터 피방울들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부인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엄지 손가락으로 피를 닦아내었습니다.  그런데도, 피는 계속해서 흘러나왔습니다.  그 부인이 지니고 있던 신문들 모두에 피가 묻었습니다.  그 부인은 옆에 있던 아프리카 출신의 침례교에 다닌다고 하는 신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나주의 성모님께 대하여 얘기해주었고, 신문 한 장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 기도드리라고 했으며, 그 신사분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부인은 인제는 피가 말랐다고 합니다.  그 부인은 자기가 나주에 가는 것을 성모님께서 도와주고 계신다고 하는 징표를 주십사고 기도드렸었다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Yolanda Chankuo
430 Athens St.
San Francisco, CA 94112,  U. S. A.
1998년 6월 22일

 

 

욜란다 자매에게 온 편지

 

(이 글을 쓰신 분은 미국 샌 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필리핀 계 미국인인 간호사, 욜란다 챵쿠아 씨이며, 1995년부터 매년 여러 순례자들을 인솔하여 나주 성모님을 찾아 뵙고 있으며, 평소에도 나주 성모님 전파를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여러 지역에 이분처럼 헌신적으로 나주 성모님의 일을 하고 있는 많은 신자들이 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고, 또 우리 한국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샌 프란시스코 발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김포에 도착한 것은 1998년 6월 27일 오전 6시 10분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우리 일행 15명은 모두 지쳐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주에서 특별히 현존하시는 당신을 방문해달라는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순례의 길에 오른 것을 조금이라도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 베드루 씨는 우리를 버스에 태워서 서울 시내를 구경시켰다.  

1년 전 나주 순례 도중에 만났던 하와이에 거주하는 60대의 일본인 남자분의 얘기가 생각난다.  그분은 신자가 아니었는데, 신자인 형님의 권고로 함께 나주에 왔었다.  이 분은 80세 넘으신 병환 중의 모친을 돌보고 있는 분인데, 나주 성모님 상을 모친이 계시는 방으로 모셔갔더니 방 안이 장미 향기로 가득차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분은 호놀눌루의 성 미카엘 대천사 센터에 모셔져 있는 성모님 상이 미소를 짓는 것도 보았다고 하며, 또 한 번은 성모님께서 입을 좀 벌리고 웃으셔서 치아까지 보았다고 한다.  나주 부근의 기적의 샘이 있는 성모님 산에 갔을 ‹š에는 그 곳에 모셔온 성모님 상이 머리를 서서히 돌리시며 산에 와있던 순례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돌아보시는 모습까지 보았다고 한다. 그 때 아직 신자도 아니었던 그를 성모님께서 이끄시기 위하여 많은 사랑의 징표들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다음 날, 6월 28일, 우리는 명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공항으로 가서 광주 행 비행기를 탔다.  광주에서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고 다시 모여 나주로 갔다.  성모님 집을 들어서는 순간 강한 향기를 맡았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시는 것이었다.  성모님 집을 들어서면서 우리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그 곳은 거룩한 분위기에 싸여있었다.  우리들은 기적의 성모님 상 앞에 한 사람 씩 무릎을 꿇고 인사드렸다.  모두들 가슴 속 깊은 곳이 뭉클해졌으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처럼 많은 사랑의 메시지들과 사랑의 징표를 주시고 세상 만민을 안아주시려는 성모님, 그리고 아직도 배척받고 계시는 성모님!  말할 수 없이 인자하고 사랑에 찬 이 성모님의 얼굴 위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피눈물이 흘렀던고.  그리고 지금도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 모두가 천국에 무사히 도달할 때까지 끝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성모님 상 앞 쪽 마루에는 1997년 8월 27일에 성체가 내려오셨던 거룩한 장소가 있다. 그 장소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놓여있는데, 윗 부분은 유리로 되어있고 열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상자의 밑 부분이 좀 떠있기 때문에 순례자들이 그 틈사이로 묵주라든가 작은 물체들을 집어넣어서 그 거룩한 장소와 접촉하려고 한다.  바로 그 장소로부터 강한 향기가 계속 풍기고 있다.  이틀 뒤 철야 기도가 끝났을 때에는 그 향기가 더욱 강해졌다.

6월 29일, 월요일에 우리는 하루 종일 성모님 집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놀라운 선물을 마련해두고 계셨다.  사실 그 날 아침에 호텔에서 함께 오신 몬씨뇰의 주례로 미사를 드렸을 때 몬씨뇰께서는 모든 일, 좋은 일, 궂은 일 모두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므로 감사드리자고 말씀하셨었다.  절대로 불평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오후 2시 경에 서 베드로 씨가 산에 다같이 가자고 하였다.  신부님께서는 샘물로 순례자 한 사람 씩 모두 축성해 주셨다.  날씨는 계속 더웠고 습했다.  다들 둘러서서 고통의 신비 묵주 신공을 드리기 시작했다.  제 4단에 이르렀을 때, 함께 왔던 태국 출신의 50대 부인인 퓨리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오, 하느님!"하자 몬씨뇰께서는 다들 조용히 하고 기도를 계속하자고 하셨다.  그러나 퓨리타는 큰 소리로 계속 울면서 태양을 보라고 손짓을 했다.  태양이 빙글 빙글 돌면서 여러 가지의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태양이 밑으로 떨어져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또 어떤 이들은 푸른 색의 둥근 공 같은 빛들이 태양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현상이 상당히 오랫 동안 계속되었다.  퓨리타가 나중에 말하기를, 기도 중에 누군가가 자기에게 "태양을 향하여 서라,"고 말했는데 둘러보니까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가 태양을 보았을 때, 태양은 막 구름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는데, 점차로 강력하게 빛을 발하였다.  그리고는 번개와 같은 빛이 태양으로부터 나와서 퓨리타의 심장을 꿰뚫었는데, 부지직하는 소리까지 났다고 한다.  그리고 퓨리타는 표현할 수 없이 큰 기쁨을 느꼈고 그 때문에 큰 소리를 지르고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몸이 완전히 건강하게 된 것을 느꼈다.  이번에 순례오기 전까지 퓨리타는 두 차례에 걸쳐 큰 심장 수술을 받았었다.  그리고 의사가 곧 세 번 째의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했다.  그는 항상 피로했으며 좀 오래 앉아있으면 다리가 부어올랐다.  게다가 작년에 30년 간 같이 살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몹시도 우울하였다.  그런데, 그날 산에서의 일이 있고부터는 생기에 가득차서 계속 노래부르고 춤추고 웃으면서 얘기하였다.  그는 태국으로 가서 친척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며칠 후에 샌 프란시스코에 돌아왔는데, 조금도 피로의 기색이 없었다.  나는 퓨리타에게 증언을 써달라고 부탁했으며, 의사의 진단을 다시 받으라고 했다.  그는 10월에 예루살렘 성지에 가려고 했던 계획을 취소했으며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여러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나주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다.

산에서 한 신부님께서는 티없으신 성모 성심의 승리가 나주에서 시작될 것임을 확실히 믿으신다고 말씀하셨다.  또 몬시뇰께서는 나주에서의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으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설사 우리가 죽고 난 후라고 할지라도 나주는 반드시 루르드와 파티마와 같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7월 3일까지 나주에 머물렀다.  함께 온 순례자들 모두가 너무나 많은 은총을 받은 데 대해 주님, 성모님께 감사드렸으며, 본래 샌 프란시스코에서는 이번 10월의 순례 계획이 없었지만, 이를 변경하여 10월에 또다시 순례단을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미 20명 정도가 모였다.  지면 상 자세한 사연들은 줄이고 1994년 11월 24일에 주신 성모님의 메시지를 묵상하면서 이 글을 맺으려고 한다.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여라.  이제는 너희가  티없는 나의 성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아무도 너희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며, 내 모든 덕행의 옷을 너희에게 입혀줄 것이니, 너희의 일거수 일투족이 나의 향기에 이끌려 작은 자의 영혼으로 살게 될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 모든 영광과 찬미와 흠숭이 마땅히 지금과 영원히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욜란다 챵쿠아
430 Athens St.
San Francisco, CA  94112   U. S. A.
1998년 7월 13일

 

 

마이 리 씨의  편지

 

욜란다 씨 귀하,

나주 성모님 순례 중에 찍은 사진들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나주 성모님께로부터 많은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 은총 중의 첫 번 째는 기도의 은사입니다.  동행하셨던 폼피 몬시뇰께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신 데 대하여 특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번에 몬시뇰을 만나게 되고, 욜란다 씨 및 순례자 모두를 만날 수 있게 안배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심장병 때문에 이번 순례를 해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모님께 갈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대단히 열심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광주 대주교님의 공지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성모님께서 받으신 상처를 보속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번 째 선물은 순례에 다녀온 이후로 저의 심장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저를 치유해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5월, 6월에는 겨우 20분 동안을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분 이상 다리가 아프거나 가슴이 답답함이 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증상들이 없어졌습니다.  항상 졸립고 목이 마른 증상도 없어졌으며, 한 시간 이상 무슨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증상도 없어졌습니다.  계단을 오르거나 운전할 때 가슴이 아픈 증상도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포도주도 조금씩 마실 수 있습니다.  즉 혈관 속에 있던 응어리들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던 것도 정상적으로 되었습니다.  의사의 진단을 받을 약속이 9월이므로, 그 때 모든 것이 확인될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저는 파 신부님께 저에게 부탁하시는 어떤 타이핑도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손으로 쓰신 183페이지의 불어로 된 서류를 보내주셨고, 저는 한 번에 세 시간 씩 피로를 느끼지 않고 타이프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세 번 째 선물은 저의 누이 동생이 서울에서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졌었지만, 아무런 탈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과 꼭 같이 건강합니다.  얼굴이 많이 찌그러진 헝 씨도 치유가 되지는 않았지만,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그는 10월에 아내와 세 살 짜리 딸을 데리고 나주에 다시 가겠다고 합니다.  환 씨도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순례 중에 찍은 비디오를 편집하느라고 며칠 간을 수고했습니다.  도중에 밧떼리가 다되어서 6월 30일의 철야 기도 광경을 하나도 찍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저는 제가 나가는 기도회 모임에서 이번 순례 비디오와 작년 6월과 8월의 성체 기적 비디오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같이 묵주 신공을 바쳤습니다.  

저는 때때로 광주 대주교님께 대하여 답답함과 불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화를 내기보다는 그분의 마음이 변하시기를 바라며 성모송을 바칩니다. 대주교님께서 당신의 오류를 깨달으시고 이를 공적으로 인정하실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도와주시도록 우리 모두가 하루에 한 가지씩 희생을 바치도록 결심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율리아가 모든 것을 순교자의 정신으로 기쁜 마음으로 잘 인내할 수 있기 위하여.  이번에 몬시뇰께서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작은 영혼들의 도움으로 승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작은 영혼들이란 바로 우리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의미합니다.  욜란다 씨!  나주에서 그리고 나주 및 율리아와 연관된 다른 곳들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또 다시 큰 기적이 있으리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요?  이 편지를 이번 순레에 참여했던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시고  모두에게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Mr. Mai Le
P.O. Box 32254
San Jose, CA  95152, U. S. A.
1998년 7월 20일

(마이 리 씨는 월남의 육군 장교였으나, 월남 공산화 때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지금 캘리포니아 산 호세 시에서 살고 계십니다.  지금 연세는 70대이시며, 심장병으로 고생하셨으나, 이번 순례 후에 많이 좋아지셨다고 합니다.  마이 리 씨는 주님과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매우 깊으시며, 또 영어에 능통하시기 때문에, 수 년 전에 영어로 된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월남어로 번역하여 책으로 출판하셔서 미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월남인들에게 나주 성모님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로살레스 자매님의 편지

 

Mary's Touch By Mail 귀하,

 

참으로 오랫 동안 제가 할 일을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텍사스에 사는 로살레스예요. 지난 5월에 나주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저의 두 올케와 큰 언니와 조카 그리고 저의 아들과 며느리 이렇게 일곱 사람이 다녀왔습니다.  저의 조카는 그 곳에 가면서도 이모 때문에 간다고 하더니 그 곳에서 돌아온 날 밤에 자는 식구들을 깨워 묵주 신공을 드렸답니다.  저의 큰 올케는 신부님이 믿지 말라고 하셨다며 망설이시더니 내가 먼 곳에서 와서 나 때문에 간다고 하시더니 나주에 다녀와서는 이 일을 이웃에 꼭 전하겠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어요.

 

Mary's Touch By Mail을 알게되어 주님께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저는 죄 속에 싸여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제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다 하던 튼튼하게 여기던 벽이 무너져버렸어요.  제 사진을 눈여겨 보면 볼수록 텅텅 빈 껍질 뿐이어서 오히려 두려움과 고독이 얼마간은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었어요.  겁이 나서지요.  나주에 다녀온 후로 여러 가지 비디오를 본 후로 내 자신이 교만스럽게 나를 믿었던 것이 죄악이며 또한 여러 가지 죄악을 피하려 노력하며 열심히 나주 성모님 메시지를 전하는데 노력하고 있어요. 벽에 부딛칠 때 특히 제가 들어줄 사람이라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냉냉한 소리를 들었을 때 조금 기운을 잃었었지만 성모님 말씀대로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하며 부지런히 어머니 말씀을 전하면 항상 저와 같이 계시겠다고 하신 그 다정하신 약속을 저는 믿어요. 이제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는거지요.  용기도 조금 나구요.  남편과 딸과 사위가 제 편을 많이 들어주어서 고맙지요.  제가 근간에 절실히 체험한 것은 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다 내주어야지만 진실한 사랑의 평화가 지속된다는 거였어요.  남의 잘못을 탓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요.

 

10월에 남편, 딸, 사위 그리고 한 살된 손자와 함께 나주를 가겠으니 곧 연락드릴께요. 저의 딸이, "엄마, 나주 성모님 메시지 전하는 일을 우리 온 가족이 함께 해요,"라고 했으니, 저희들 위해 기도해주세요.

 

Mrs.  Yongsu Rosales
1117 Lesa Lane
Garland, TX  75042,  U. S. A.
1998년 7월 24일

 

 

요세피나 자매님의 증언

 

세상 사람들이 말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내가 주님을 느끼고, 주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었음을 나 자신이 확실하게 압니다.  육신의 병이 사라졌고, 영적 기도 생활을 열망하는 자세로 바뀌어진 것은 오직 나주 성모님을 방문한 후에였습니다.

십수 년을 성당을 매일 다니다시피 했어도, 간절한 주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무지"를 나주의 성모님을 통해서 깨닫게 되어 통회하는 마음과 남을 사랑하는 자세로 변화되고 있음을 내가 아는데, 어떻게 나주 성모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이러한 변화와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일반 신자들이 늘 원하고 바라던 일이며 성당에서 늘 가르치는 일 아닌가요?

저는 1998년 6월에 처음으로 나주 성모님 댁을 방문했는데 율리아 자매님은 만나뵙지 못했지만, 성모님을 통해서 영적, 육적 치유를 받았습니다.  저는 위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주에 갔다 와서 꿈에 성모님께서 오셔서 나의 위를 손으로 쓸어주셨으며, 그 이후로 위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미국인인 저의 남편도 이번에 나주에 가서 산으로부터 성모님 물을 나르는 일을 열심히 도왔는데  그날 밤 과로로 쓰러졌으며 새벽 녘에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위급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성모님 물을 갖다 주어서 남편이 마시자 곧 기운을 차리고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저희는 가구점을 하고 있는데, 나주에 다녀온 후로는 성모님께서 도와주셔서 그 동안 어렵던 사업도 회복되어 지금은 잘 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지방에는 나주 성모님께 대해 아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 힘자라는 데까지 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분도 선생님, 보내주신 우편물 감사히 받았습니다.  하시는 일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번창해져서 가슴 벅차게 기쁜 이 마음을 세상 사람들이 많이 알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10월에 나주 가신다니 저희 가족도 기억해주십시오.  저는 나주에 너무나 또 가고 싶습니다.  마음 같아선 이곳의 모든 것을 팔고 나주에 가서 살고 싶기도 합니다.  

성 요세피나 드림
미국 캔자스 주 오벌랜드 파크 시
1998년 8월

 

 

우리 가정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주신 나주 성모님

 

† 찬미 예수님 성모님

제가 나주 성모님 집을 방문하게 된것은 92년 8월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냉담자였고 바로 위에 오빠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촌언니가 나주의 성모님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며 그곳에가 오빠를 위해 기도하자고 하여 성모님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저를 냉담자로 소개했지만 사실상 저는 교회에 대해서도 성모님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희 집은 부모님께서 신자였기 때문에 5남매 모두가 태어난지 일주일만에 유아 세례를 받았고 저는 9살 때 첫영성체를 하고 줄곧 냉담하였기 때문에 교리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도할 줄도 몰랐지만 그저 마음속으로 오빠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며 그날 철야 기도회를 마치고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와야지"하는 생각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나주 성모님을 잊고 지냈고 성당에도 다니질 않았으며 세속과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나주 성모님집을 다녀온후 몇 개월지나 오빠는 식물인간이 된 상태에서 퇴원하여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희 오빠의 사고가 저희 집에 불행에 끝인줄 알았는데 시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늑막염과 비뇨기 계통에 이상으로 몇차례 병원에 입원했고 수술 받으셨으며 엄마도 지병인 담석증으로 두차례 담석제거 수술을 하였습니다. 큰 언니도 자궁을 완전히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았으며 저희 장조카도 첫돌을 몇주 앞두고 탈장 수술을 하였으며 몇 개월 후 일본 어린이들만이 주로 걸린다는 가와사키 병으로 입원 치료를 했고 둘째 오빠도 사기꾼들에게 걸려 돈버리고 괴로움을 당하고 가족들도 이 일로 2년동안 고통스러운 나날로 힘들게 지냈으며 식물인간이 된 오빠도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여러차례 병원을 드나들었습니다. 정말 병원을 내집 드나들 듯이 다니고 고통스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집안의 여러 가지 일들과 육체적 질병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어디 한군데 의지할곳 없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성당에 나가야 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주 성모님이 떠올랐습니다. 몇 년전에 가보았던 곳인데 아직도 그런곳이 존재할는지 의문을 갖고 혼자라도 수소문하여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제가 냉담을 풀고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이 96년도 3월 성지 주일 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전에 가끔씩 성당에 다닐때는 미사시간이 그렇게 지루하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많이 했는데 이날 미사는 너무 거룩했고 저에게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후로 주일 미사에 계속 참례하게 되었고 저를 처음 나주 성모님집에 방문할수 있도록 이끌어준 사촌 언니로부터 같은해 6월달에 나주 성모님 집에 가자고 전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흥쾌히 승낙하였습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고백성사를 볼 용기가 나질 않아 영성체를 못하고 있었는데 성모님께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고백성사를 보고 성모님집을 지난 96년 6월 30일 눈물 흘리신지 11주년 행사때 다시 방문할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경당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는데 어머니께서는 사촌 언니와 저를 경당 뒷자리에 앉혀 주셨습니다. 새벽 3시경 '아' 하는 비명소리를 들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율리아 자매님 입안 가득히 성체를 넣어 주시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순간 그칠줄 모르는 눈물과 함께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고 지난날의 삶에 대한 회개와 은혜의 자리에 부족한 것을 불러 주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날 이후 저는 매달 첫토요일을 나주에서 성모님과 함께 보내게 되었고 저의 가정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당시 아버지는 오빠가 억울하게 사기당한 일로 마음에 평화를 잃고 원망하고 그들을 미워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말기암이라는 진단까지 받으셨습니다. 한쪽 신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으셔야 하는데 연세도 많으셨고 합병증도 우려되고 가장 큰 걱정은 미워하는 마음 가득안고 수술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술당일 병원에 들어서면서 짙은 장미 향기를 맡았고 수술은 10시간이나 걸리는 어려운 수술이었지만 저의 모든 걱정들을 뒤로하고 수술이 잘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한달만에 회복되어 퇴원하셨고 모든 것이 나주 성모님의 은혜임을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께서도 받아들였고 성모님집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러번 다녀오셨으며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들도 용서하시고 마음에 평화를 찾고 작년 12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식물인간이 된 오빠는 사고후 병원에서는 이틀도 못넘긴다고 준비하라고 하였는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떠나 한동안 대순진리회에 다녔던 오빠를 버리지 않으시고 병자성사를 받게 하셨고 5년 3개월 동안 고통스러운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지난해 8월에 저희 곁을 떠났습니다. 임종후에 오빠의 모습은 너무 편안해 보였고 천사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큰 언니도 몇십년간 고백성사를 보기 싫어서 영성체도 못하고 주일 미사 참례만 하였는데 성모님집에 다녀온 뒤 총고해를 보고 성체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둘 째 오빠도 냉담자였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고해성사를 보고 성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제자신이었습니다. 나주 성모님집에 다니면서 성체성사의 신비를 깨닫고 자주 고해성사 보고 성체를 영하게 되었으며 총고해도 받았습니다. 전에는 집에서 지내는 시간들을 TV나 비디오를 보며 무의미하게 보냈는데 지금은 성당에가 성체조배하고 기도하며 성서를 가까이 할 수 있게 되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주 성모님을 어느 자매님께 전하고 메시지 테이프를 들려 주려고 했는데 카세트에 메시지 테이프만 넣으면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정지하고 이런 현상이 몇번이나 반복되어 자매님이 가지고 있는 테이프를 넣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매님이 가지고 있는 성가테이프를 넣으면 소리가 잘 나는데 메시지 테이프만 넣으면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로 성모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악의 세력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너무 마음이 완고하고 완악하여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하느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가까이 가지 못하고 한때는 저를 버리셨다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었었는데 성모님께서는 고통속에 있는 저를 손잡아 하느님께 인도해 주셨고 하느님이 한없이 자비하신 분임을 깨닫게 하시고 '마리아의 구원방주'에 태워주셨습니다. 고통의 순간순간마다 함께하여 주시고 손잡아 주신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 드립니다.

나주 성모님께서 하루빨리 교회의 인준을 받아 길잃어 헤매는 양들이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길 두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나주 성모님 사랑합니다.

1998년 8월 12일
김 미자 요셉피나
대전 광역시 대덕구 오정동 신동아아파트 2동 205호

 

 

"내 교회의 가장 큰 보배는 지극히 거룩하신 내 어머니 마리아다."

 

1995년 9월 22일 나주에는 귀한 손님 두 분이 찾아오셨다.  한 분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토론토 시의 로만 대닐랙 주교님이시며 또 한 분은 역시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런던 시에서 오신 요셉 피터 핀 신부님이셨다.  주교님과 신부님 그리고 한국 신부님 한 분 및 율리아 자매를 포함한 십여 명의 평신도들이 나주 근교의 산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영성체 때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가 살과 피의 모양으로 변하였다.  율리아 자매를 통해서 일어난 열 한 번 째의 성체 기적이었다.  이번에는 성체가 단지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한 것만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분명한 심장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대닐랙 주교님께서는 캐나다에 돌아가셔서 나주에서 직접 목격하신 이 성체 기적을 담은 사진들을 소아과 전문의들에게 보여주셨다.  의사들은 그것이 분명히 아기의 심장 모습이라고 말하였다.  1997년 11월 8일 캘리포니아 주의 롱 비치 시에서 열렸던 성모님 대회에 참석하셨던 대닐랙 주교님께서는 나주에서의 그 기적이 2,000년 가톨릭 교회 역사 상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성체 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성심을 보여주신 것이었다고 증언하셨다. 요셉 핀 신부님께서도 당신이 목격하셨던 나주에서의 성체 기적에 대한 증언과 칼라 사진들, 그리고 대닐랙 주교님의 공적인 증언을 실은 책자를 출판하셨다. 그 날의 성체 기적은 사진 뿐 아니라 비디오로도 상당히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율리아 자매는 주교님의 명에 의하여 성체를 삼켰으며 곧 묵상 기도에 들어갔다. 묵상 중에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서 성체 신심이 약해지고 상실되어있는 심각한 현황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주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의 작은 영혼아!"라고 율리아 자매를 부르시고 나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당신의 메시지를 시작하셨다:

"내 교회의 가장 큰 보배는 지극히 거룩하신 내 어머니 마리아다."

이 메시지를 받고서 필자는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나주에서 주시는 주님과 성모님의 메시지들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메시지들의 심오한 뜻과 아름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이미 계시하시어 교회에 맡기신 공적 진리들과의 완전한 공명(共鳴)에 감탄하면서 이에 대해 주님께 감사해오고 있는데, 처음으로 이 날의 메시지 때문에 고민이 생긴 것이다.

그 이유는, 천주 교회 안에서의 가장 큰 보배는 성체 성사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서 교회의 가장 큰 보배라고 하시는 것이다.  성모님께서 두 번째로 가장 큰 보배라고 하셨다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아마도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님을 매우 존중하시고 대우해드리고 싶으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나보다라는 생각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이시고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이시니 성모님을 그렇게 부르실 수 있으시리라고도 생각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이 메시지가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개운한 해답을 얻었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그 일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를 얻게 되었다.  애당초 그러한 의문이 생겼던 것은 우리가 흔히 예수님과 성모님을 따로 격리해서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 방식 때문이었다.  두분을 따로 떼어서 생각들을 하니까, 개신교에서처럼 성모님 공경이 예수님 공경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두분을 격리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이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시는 성모님께로부터 예수님을 떼어놓아야 할 것인가?  그렇게 잔인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새로운 이해를 얻게된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성모님을 보물 상자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그 안에 담긴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보물 상자와 보물을 따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보물 상자는 보물을 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보물 상자가 보물을 담지 않은 빈 상자라면 그냥 상자에 불과하지만, 보물을 담고 있으면 귀중한 보물 상자인 것이다.  보물을 담고 있는 보물 상자를 가리켜 귀중한 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등 이상하거나 부적합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교회 안의 가장 큰 보물이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과 격리된 혼자만의 성모님을 의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담고 계신, 예수님과 일치되어 계시는 성모님을 의미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메시지에는 하등의 하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메시지 안에는 기막히게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금 깨우쳐주시는 비결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담고 계시고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주시는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천주 교회의 가장 큰 보배이시다!  

위의 메시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주 예수님과 성모님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에 대해서 책망을 주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아기 예수가 계실 수 있겠는가?  이는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구세주 강생의 길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천주 성자 강생의 필수적인 통로가 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천주 성자께서 인간 세계에 우리의 구세주로 내려오신 사실과 성모님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잉태와 탄생만을 위해서 성모님을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다.  성가정 안에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가장 이상적인, 가장 밀접한 사랑으로 일치된 모자 간의 관계, 인간의 관계를 이룩하여 계셨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일생 동안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남김없이 완전히 봉헌된 삶을 사셨다.  성모님께는 예수님이 전부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하신 과정에서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된 동반자요 협력자의 역할을 하시게 된다.  즉 성모님께서는 공동 구속자가 되시는 것이다.  성모님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속하는 모든 성직자들, 수도자들, 평신도들이 다 작은 공동 구속자들이 되어서 인류를 구원해내는 사업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바로 이 점이 나주의 핵심이며, 가톨릭 신앙 생활의 핵심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님과 천주 성자의 강생 사실과의 불가분의 관계 때문에 우리가 성모님을 소홀히 생각할수록 구세주의 강생 및 지상에서의 활동 전체에 대해서조차도 더 희미해진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주셨던 하느님께서는 인제 다시 마리아를 통하여 죄악에 빠진 인류를 당신께로 이끄려고 하신다는 루이 마리 몽포르 성인의 말씀 역시 이러한 구세주와 성모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를 멀리할수록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되고 멀어지게 된다는 이치에 대해 우리는 깊은 인식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다시 한번 나주에서의 메시지들의 심오한 뜻과 힘에 대하여 놀라게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그 메시지들 한 마디 한마디 깊은 뜻이 들어있음을 알게 되고 우리에게 긴요한 교훈들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메시지를 읽을 때 좀더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세, 주님과 성모님께로부터 진리와 사랑의 말씀을 듣는 겸손하고 경건한 자세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성경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나주 성모님의 메시지를 매일 자주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분도
Mary's Touch By Mail
Gresham, OR,  U. S. A.
1998년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

 

 

제시카 자매님의 편지

 

To:  Mary's Touch By Mail

지난 주말 양일간 동부 뉴져지 북쪽 휄리션 가톨릭 대학에서 열린 성령 대회에 다녀온 후 이곳 한인 천주교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나주에 대해 너무도 알려고 하지 않고 결과에 대해 몇몇 신부님들을 무조건 추종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욱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성령 대회 후 돌아오는 밴 승용차 내에서 동승했던 한국 여성들이 율리아 자매가  한국 수녀로부터 바톤을 물려받아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고 바톤을 넘겨주는 것을 비디오로도 보았다고 하면서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었으며, 전에도 경험했듯이 성령 대회에서 만난 한국의 어떤 수녀님도 발표문을 읽어보지도 않아 어떠한 절차를 거쳐 윤대주교님이 부정적인 발표를 한 것인지 전혀 모르면서도 무조건 나주에 대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해 우선 그렇게 조처를 내릴 거라고 하면서 오히려 하느님의 많은 기적과 은총을 감사해야될 마당에서 아예 거부 반응을 나타내고 있어 한심스러워서 이렇게 몇자 올립니다.  더구나 아이러니한 것은 어떤 나라에서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책으로 엮어 차 안에서 배포했다는 점과 그들이 그 메시지를 받는 장소가 교회에서 인정 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책은 한국의 모 신부가 번역한 것으로 나주 메시지는 제쳐놓고 인정 받지 못한 외국에서의 어느 곳 성모님 메시지는 열심히 받아들이고 있는 점을 볼 때 극단적인 표현이 될 지 모르지만 "외제 선호"하는 뿌리가 이런 곳에서조차 드러나고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많은 이들이 평화를 깨는 방해자라고 예수님이 자기네 마을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많은 반대파들에게 소란을 피우는 자로밖에 인정 못 받았고 그들로부터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물며 이곳 저희 성당 미국 신부님도 나주에 대해 가는 것을 말리지도 권하지도 않는 중립 입장을 솔직히 얘기하셨는데, 나주에 갈 필요 없다, 가지 말라고 하며 온갖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교인들을 막고 있는 몇몇 한국 신부님들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제가 직장 근처에서 점심 시간을 이용하여 나가는 19 세기에 지은 오래된 미국 성당에서도 나주 메시지를 제가 두도록 반대하고 있지 않으며 제주 김 창렬 주교님의 성체 기적 때 찍은 사진도 이 성당 입구 게시판에 용감히 꽂아놓고 걱정했는데 그 성당 측은 그 사진을 두 달간 그대로 두었습니다. (새 소식을 붙여놓기 위해 가끔 바꾸기도 하는 것 같았지만)

저의 친구인 미국 여성 간호원도 자신의 생각엔 나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정말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으며 워싱턴 D.C. 지역의 가톨릭 신문, 가톨릭 스탠다드, 광고 담당자도 제가 나주에 대해 전화로 오래 얘기했어도 흥미진진하게 관심을 나타내면서 나주의 비디오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조금 들어서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비디오는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 대회에서 이 곳 젊은 세대들에게 나눠준 나주 메시지와 그곳 대학에 둔 메시지가 마음을 활짝 열고 사는 이들의 손에 들어가서 빛을 보게 되길 기도합니다. 또 오늘은 길가에서 채소를 파는 한 미국 남자 대학생에게 나주 얘기를 했고 소식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천주교 신자 학생임)

"뒤늦게 후회해야 이미 때는 늦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마음의 준비 없이 마지해서야 되겠느냐?"고 하신 성모님 말씀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저 자신 무척 의심이 많은 편인데 지금껏 단 한 번도 나주 성모님 메시지에서 단 한 단어도 저를 의심스럽게 한 것이 없답니다.  제가 하고저 하는 일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Mrs. Jassica Sunday
5613 Foxview Ct.
Clarksville, MD  21029,  U. S. A.
1998년 8월 16일

 

 

아멜리아 립책 부인의 편지

 

Mary's Touch By Mail 귀하

나주의 성체 기적에 대한 비디오와 작년 롱 비치에서의 성모님 대회에 관한 비디오를 주문합니다.

나주 성모님의 일들에 대하여 조사 위원회가 부정적인 보고를 한 데 대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긍정적인 보고가 너무 쉽게 나온다면 그것이 오히려 메시지와 징표가 참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발현들은 교회의 인정을 받기 전에 시련을 거쳐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순명해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1998년 8월 24일
Mrs. Amelia Lipchack
2925 Rollingwood Road
Petersburg, VA  23805, U. S. A.

 

 

마리에타 로체스 부인의 증언

 

1995년에 저는 저의 남편(마르코스 로체스)과 함께 제리 오르보스 신부님께서 이끄시는 순례단의 일원으로 한국의 나주를 방문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저희 필리핀 순례단을 산으로 초대하셨으며, 산에서 점심을 먹고 성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율리아 자매님은 우리들에게 물을 한 컵씩 주셨고 또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율리아 자매님은 젖은 수건을 저의 가슴에 깔고 저의 머리를 뒤로 제치게 한 후 저의 두 눈에다 물을 부으셨습니다.  저는 대단히 놀랐습니다.  물이 저의 콧구멍에도 들어갔으며, 저의 상의가 매우 젖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율리아 자매님은 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물 한 통을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의 발 가까이에는 물통이 몇 개 있었는데, 순례단 중 단지 몇 명에게만 그 물통을 하나씩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리아 자매님이 저에게 한국말로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못 알아들었지만, 물통을 가져가서 눈에다 넣으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필리핀에 돌아와서 그렇게 했습니다.

마닐라에 돌아온 후 의사를 방문하여 눈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는 저의 녹내장이 완전히 치료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순례단의 그 누구에게도 저에게 녹내장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율리아 자매님이 아셨을까요?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율리아 자매님께 감사드립니다.

마리에타 로체스
537 Wack Wack Road
Greenhills, M. Manila, Philipp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