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적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
광주 대교구의 나주 관련 공지문에서는 나주에서의 기적들에 대하여 이를 “갖가지 형태의 기이한 현상들”이라고 일컬으며,
이어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신빙성을 갖게 하기 위한 근거로, 윤 율리아 씨는 자신이 성모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소위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를 사적 계시라고 주장하며 선전하고 있습니 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복음 성서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떠나가서 사방에 복음을
전하였는데, 주님께서 함께 하시어 표징들 이 따르게 하심으로써 말씀을 굳건히 뒷받침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르꼬 16:20) 우리는 위의 두 가지 경우에서
목적과 그 목적을 뒷받침하는 수단의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복음 성서에서는 복음의 전파가 중심이며 징표들이
복음의 진실성과 초자연성을 증거하기 위한 보조의 역할을 하는 뜻
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공지문에서는 “기이한 현상들”이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 들의 중심이며 메시지는 단지 그 현상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것이라는 식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공지문에서의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나주에 가는 사람들은 기이한 현상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다라는 주장이 나오게 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뵈러 간 사람들이든, 나주에 간 사람들이든 기적의 소문을 듣고 처음으로 찾게 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나주에 가는 사람들은 기적을 따라다니는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나주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그렇게 매도하는 것은 그들의 진의와 진심을 부당하게 모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을 찾는 대부분 신자들의 동기는 주님과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도 주위의 따가운 이목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성모님이 그리워 그 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기적을 찾아서 또 오셨군요,”라고 한다면, 이는 현실과 맞지 않는 큰 실례의 말이 될 것이다. 지금 까지 나주를 계기로 하여, 식어졌던 가톨릭 신앙을 되찾은 이들은 수없이 많으며, 고해 성사를 멀리하고, 성체 성사를
상징적으로 생각하던 것을 고치고, 사제직의 고귀함을 더욱 깊이 인식하며, 반목했던 이들과 화해하고, 낙태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물론, 불치병이나 난치병이 기적적으로 낫게 된 이들도 많지만, 그들 중에는 병의 치유를 구해서라기보다는 회개의 삶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뜻하지도 않게 육적 치유까지
받은 이들이 허다하다. 그리고, 향기라든가 기타의 기적적인 현상을 경험한 이들도 많지만, 그들은 그 현상들의 신기함 자체에 매혹되어서가
아니라, 그 현상이 주님과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을 의미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죽은 이들까지 살려주시고, 마귀를 내쫓으시며, 빵 몇 조각과 물고기 몇 마리로 수
천명을 먹이시고도 남은 조각을 주어 모으니 12 광주리나 가득찼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시며, 호수의 물 위를
걸으시며, 거센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등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 기적들의 주요 목적은 당신께서 인간이실 뿐만 아니라, 강생하신
천주 성자, 즉 하느님이심을 증거하시며, 따라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에 신적인 권위와 가치가 있음을 증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기적의 역할을 일반적으로 경시하는 많은 이들은 주님께서 십자가로부터 뛰어내리라고 하는 이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셨다라는 이유를 들면서, 마치
주님께서 기적을 반대하시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에 대한 지나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첫째,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은 주님께서
복음을 뒷받침하시기 위하여 수많은 기적을 친히 행하셨다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며, 또 모든 참된 기적은 사람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만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뛰어내려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인간들의
발상(發想)이었으며, 그것도 조롱과 야유에 가득찬 악한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진리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적이 인간의 뜻으로 일어날 수도 없는 것이고, 인간들의 놀림감으로 전락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진복자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기적의 징표들을 보지 않고서도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확고하게
믿고, 주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충실히 지킨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 안의 현실이 그렇지가 못하다. 성세는
받았으나, 교리를 잘 모르는 이들이 허다하며, 신자의 과반수 이상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다. 고해를 먼저 보아야 할 상황에서 고해하지
않고 영성체에 임하는 이들도 허다하며, 성체가 바로 살아계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믿지 못하는 이들도 너무나 많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주님의 가르침을 더욱 적극적으로 더욱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전하자라는 취지를 밝힌 것을 가지
고, 마치 공의회 이전의 가르침들은 모두 새 것으로 대체되었거나, 희석(稀釋)되었다라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며 또 그렇게
남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지금 많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는 옛 교회의 교부들의 가르침도 별 것이 아니며, 성인들도 지나쳤던 사람들이므로 그들로부터도
우리가 실제로 배울 것이 별로 없다라는 잘못된 의식이 차 있으며, 모든 것을 현세적인 복지와 타협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고지식하게 그대로 주장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라는 판단 내지 잠재 의식까지 알게 모르게 유포되어 있다. 지금 주님께서 특히 나주를 통하여
많은 성체 기적들과 성모님의 모성애와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상기시켜주는 징표들을 보여 주시는 것은 분명히 현대의 교회가 처해 있는 신앙의 위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똑똑하다고 하는 현대인들이
사실은 너무나 꽉 막혀있고 자만심에 차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강력한 메시지들과 물리적인 징표들로써 우리들을 깨우치시며, 격려하시며, 경고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징표들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목표는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시기 위함도 아니고, 이미 완성되어 있는 계시 진리에
무엇을 보태거나 변경하시기 위함도 아니며, 오로지 우리가 그 계시 진리를 더 확실히 알며 충실하고, 교만과 죄악의 생활을 뉘우치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따라 주님을 보조하시는 성모님과 함께 사랑의 희생과 보속의 삶을 살 것을 독려(督勵)하시기 위함일 뿐이다. 그리고, 혹 나
자신이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고 충실한 신자 생활을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는 기적의 징표들이 별 의미가 없다라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적의 징표들이 주어졌다면, 이는 엄위하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렇다
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겸손되이 감사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대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이를
경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그분께 대한 경시나 외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2천 년 전에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잘 지킨다라고
자부하던 이들이 실제로 천주 성자께서 강생하시어 그들 앞에 서셨을 때 그분을 배척하고 단죄했었다라고 하는 역사적인 사실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하여 “이만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되며, 그러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만 맡겨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지난 수 세기 동안, 과달루페, 빠리, 루르드, 파티마 등지에서의 성모님의
메시지들을 통하여 당신께서 인류의 영적, 도덕적 상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많이 알려 주셨다. 몸에 좋은 약이 쓰듯이,
회개하라는 말씀이 듣기 싫을지라도 그 길만이 우리를 참으로 위하는 길이다.
우리가 그러한 주님의 진의를 알아차리고, 주님과 그분의 교회와 그분의 진리 앞에서 진정으로 부복할 때에 비로소 그분께서
주시는 메시지나 징표들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주의 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은 우리의 생각과 생활에 대한 뉘우침과 개선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자들 개개인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지역 교회 전체,
나아가서는 보편적인 교회 전체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가 나주의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무슨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이 된다든가, 가톨릭 교회에 무슨 새로운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본래의 정통 가톨릭
진리들에 참으로 충실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구세주의 어머니시요,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우리 각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최소한 그
정도의 신뢰는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성모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주님께로 바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이 분도
2000년 3월 6일
†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 및 교도권에 대한 충실이다.
광주 대주교님의 나주 관련 공지문이 나온 후 공지문 상의 교리적 의문점들을 거론하며, 동시에 나주에서의 일들에 대한 보다
성의있는 재조사를 청원하는 이들에게 자주 던져지는 질문은 “왜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는 다른 지면들에서 이미
어느 정도 논하여졌지만, 그런 질문이 야기되는 근거에 관하여 문제점들이 발견되고 있고, 또 그런 질문을 받는 이들도 당황하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1. 신자들이 사적 계시(또는 특수 계시)를 포함하여 모든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안들에 대하여 교회의 교도권에 순명해야
함은 그 교도권이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확고부동한 당위성을 지닌다. 교회는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의견들을 주장
하는 이들의 친목회일 수 없으며, 참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진리의 빛을 순 명과 사랑과 감사로써 전적으로 수용하고, 이에 충성하는 이들의 일치된 가 족이어야 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당연히 그리고 기꺼이 사목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특히 교구의 으뜸이신
주교님과 전체 교회의 최고 목자이신 교황님께 극진한 효심으로써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나주에 관한 일들을 논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을
대리하는 사목자들께 대하여 순명해야 된다고 하는 이 중요한 원칙에 관하여 하등의 흔들림이나 양보도 있을 수 없으며, 이를 끝까지 수호하고저
한다.
2. 이와 동시에 우리는 지상의 모든 권력과 권위가 그러하듯이 교회의 교도권도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되어 있는 것임을
(로마서 13:1 참조)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지상의 권력과 권위는 그 자체로서 절대성 및 궁극성을 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어떤
목적을 위하여 쓰여지는 방편이며 시종(侍從)인 것이다. 그리하여, 가정, 학교, 회사, 군대, 국가 등모든 단체에는 그 단체들의 고유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적합한 권력과권위가 그 단체들 안의 책임자들에게 위임되어 있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고, 은총을 전해주기 위한 책임과 권위가 사목자들에게 위탁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까지나 그 교도권은 인류 구원이라고
하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봉사의 기능이며, 주님께서 주신 신앙의 유산을 충실히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한 기능이다. 그리고, 이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86)에도 명백히 선언되어 있다: “그러나 이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고,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하느님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경건히 듣고 거룩히 보존하며 성실히 진술하고, 또한 하느님의 계시로 믿어야 한다고
제시된 모든 것을 이 단일한 신앙의 유산에서 퍼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교도권에 관해서도 그 권한의 행사가 주님의 뜻하심과 가르치심에 자동적으로 부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한을
행사하는 이들의 충성스런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사목의 책임이 부여된 분들께 는 그 책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은총이 풍부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은총이 사목자들을 도와준다는
뜻이지, 그 분들의 자유의지를 대체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교회 안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지성과
자유의지를 올바로 사용함에 의존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업을 혼자서 성취하실 수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 사업에 인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배려에 의한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인류 구속의 공로를 넘치게 세워
놓으셨으나, 그 공로에 의지하여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서 당신의 구원 사업이 성취되어 열매맺게 하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 모두의 협력에 맡겨진
사업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는 늘 지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끊임없이 진리와 오류 사이, 그리고
선과 악의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되는 길을 걸 어가고 있다. 지상에 살고 있는, 명오(明悟)가 열린 그 어느 누구도 이 선택 의 현실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하며, 매 사에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건, 이러한 원칙이 무시되어,
권위가 오히려 진리 위에 서려 하고, 그 권위가 지향하는 목적을 경시한다면, 이는 그 권위의 남용이 될 것 이다.
3.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진리와 뜻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2천년 전의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직접 여쭈어보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지금에는 어떻게 하는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10일 만에 천주
성령을 보내시어 그 때로부터 항상 교 회 안에 거하시게 하심으로써,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교회가 진리 안에 확실히 머물게끔 인도하시도록 하셨다 (요한
14:25-26; 15:26; 16:13 참조). 이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그 안에 현존하시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가톨릭 교회 안에
객관적으로 확실한 계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 다. 교회 안의 진리는 성서와 성전(聖傳)을 통해서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으 며, 교회에서 그 내용을 교리, 즉 도그마로서 확실하고도 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 교리들은 천주 성령에 의지한 무류지권(無謬之權)에 의한 것이므로, 신자들은 하등의 의심도 없이 신앙의
순명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계시 진리에 대하여 확실하게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은 교황성하와 교황님께 일치하는 공의회에
지속적으로 위탁되어 있으며, 각 교구들의 주교님들 또한 교황님과 일치함으로써 그 무류지권에 참여하실 수가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유권적인
가르침은 아닐지라도, 수많은 성인들 과 거룩한 신학자들의 고귀한 저서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계시하신확실한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
러한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며, 이를 수호하고 전파해 야 할 사명을 받아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진리는 인류를 암흑과 멸망으로 부터 구하고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빛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성세 성사의 준비를 위하여 어느 정도 교리 공부를
하다가 준비가 끝나면, 교리 공부도 “졸업”을 해버리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교리는 계시 진리의 요약으로서 그 의미의
깊이는 무진(無盡)하다. 그깊은 의미들을 더 잘 깨닫기 위하여 우리는 일평생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며, 그 계시 진리로써 우리의 모든
사고(思考)와 가치관의 기본틀을 삼아 야 할 것이다. 주님의 가르치심이 확립되어 있어야 할 우리 마음의 한 가운데에 온갖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선입견들이
자리잡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생활의 진보도 어려울 것이고, 오류들을 분별하고 극복할 힘도 모자랄 것이고, 남들에게 신앙의 전파를 할 능력이나
의욕이 생기기도 힘들 것이다.
4. 결국 지금 나주 관련 공지문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교회의 교도권을 존중하느냐 않느냐 하는 차원에서가 전혀 아니다.
교도권에 대한 존중은 흔들릴 수 없는 대원칙이다. 지금의 현안 문제는 그 지엄한 교도권에 의지하여 선포된 내용에 주님의 진리와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이 이러한 부류의 의견을 사목자들과 다른 신자들에게 알리고 호소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있다 (교회법 제212조 참 조). 그리고, 공지문에 성체 성사에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시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는 지적은 다른 지면들에서 자세히
다루어졌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어디까지나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들의 의견을 발표하고 또 기도하는 것 뿐이며, 문제의 시정 자체는 교도권을 가지신
사목자들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만일 공지문의 내용에 참으로 교회의 교리를 잘못 제시한 점들이 있다면, 이는 그냥 덮어두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시급히 시정되어
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도권이 오류를 지탱하고 있는 상황은 결 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의 수많은 중요한 일들 중 에서도 주님의 계시 진리를 바로 보존하고 왜곡됨이 없이 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우선적인 임무일 것이다.
5. 참된 일치와 교도권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진리에 충실할 때에만 가능 하다. 신자들이 진리에 대해서 논하고 나주의 일에 대하여 재조사를 청원 하는 데에 대하여 이는 “교회의 일치를 해치는 일이다,”라는 말을 가끔 듣게 된다. 일치는 지극히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관한 토론 조차를 막고 사실을 외면하는 선에서 일치를 추구한다면 이는 참된 일치일 수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제께서
“성체는 밀떡이지만, 그 안에
는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현존하신다,”라는 가르침을 펴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일 미사를 고의로 빠졌더라도, 고해
성사 없이 통회만 하면 성
체를 다시 모실 수 있다,”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가르침 들이 교회의 정통 신앙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치와 순명을 위하여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인가? 권력과 여론에 눌려서
진리가 왜곡되는 것을 눈감아 준다면, 우리는 진리를 저버리는 비겁자가 될 것이며 하느님 앞에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진실을
어기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크
나큰 불성실이며, 계약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64).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가르치
신다 . . . 인간은 진리를 높이 평가하고 증언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 .그 리스도인은 우리 주님을 위해서 증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66, 2467,
2471). 진리를 무시하면서 얻어지는 평화와 일치는 거짓 평화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치가 아닐
것이
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에 충실함으로써 참된 일치를 이루고 교 도권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진 리와 진실에의 충실이 결핍된 평화와 일치란 모래밭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세상에 거짓
평화를 주려고 오셨더라
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무엇이었겠는가?
끝으로,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그 어느 일부인들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 안의 신앙의 침식, 오류의
유포, 혼란, 불일치 등은 우리 모두가 오랜 기간 기도와 자아 부정과 희생과 애덕의 실천과 교리 공부를 소홀히 해온 누적된 결과일 것이다.
지금 교회와 세상에 닥친 신앙과 도덕 의 위기는 우리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하고 절박한 상황 이 되어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염려하시는 성모님께서 전력을 다하시어 메시지 말씀을 주시고
도와주고 계신다. 수많은우리의 순교 선열들 또한 우리를 위하여 열절히 기도하고 계실 것이다. 그 러나,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우리가 싫다고 고집하면 하느님께서도 어쩌실 수 없으시다. 우리가 무한한 선이시며
진리이시고 사랑이신 하
느님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분을 거절할 수도 있는 이 엄청난 자유의지가 우리가 지상에 사는 한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명심하고 이 귀중한 시간을허비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광주의 대주교님께 우리는 변함없는 존경과 사랑을 드리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분을 위하여 매일 열절한 기도로써 도와드려야 할 것이다. 대주교님께서 나주에 대하여 일단 부정적인 발표를 하신 것은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확실히 확인하기 위하여 짐짓 한 번 철퇴를 내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도 든다. 우리 모두는 진리와 교도권에 대한 확고한 충성을 다짐하며, 또 한 편으로는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그로부터 열
리는 좋은 열매들이 대주교님과 모든 사목자들께 확신을 드릴 수 있는 징표 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이 분도
2000년 6월 29일
†
나주의 경당에 내려오신 성체의 진실성을 믿는 이유
나주의 성모님 집에 내려오신 성체가 과연 진정한 성체인가 하는데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사실은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에서 나주의 성체 기적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한 단정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에 대해서이다. 즉, 나주에
내려온 성체가 사제의 축성을 거쳤다는 증거가 없으니 진정한 성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게시판에서도 요시비님이 그와 같은 의사를
표시했으며, 이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이미 좋은 해답을 해주셨으나, 그것이 워낙 중대한 사안인지라 몇 가지를 덧붙이고저
한다.
먼저 다른 분에 의해 이미 설명된대로, 1994년 11월 24일 당시 교황 대사님의 방문 중에 내려오신 큰 성체가 이미
축성된 성체라는 증거가 있었다. 바로 그 성체가 둘로 나뉘어서 율리아 자매님의 양손의 손가락들 사이에 받아졌는데, 교황
대사님께
서 성체의 두 쪽을 맞추어보니 한 쪽 끝이 떨어져나가고 없었으므로, 이는 미사를 드리는 사제가 그 부분을 떼어서 성작에
넣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교황 대사님께서 직접 증언하신 내용이다.
또 한 가지는 1995년 7월 1일의 철야 기도회 중에 율리아 자매님은 십자고상의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변하시고,
일곱 상처에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 피가 점차로 하얀 성체로 변하여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성모님 상 앞의 제대에 소리를 내며
내려온 7개의 성체를 기도회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직접 목격하였다. 다음 날 광주 대주교님의 명에 의해서 7개의 성체를 두 신부님들과 다섯
명의 신자들이 영했는데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한 율리아 자매님의 입 속에서 볼 수 있는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했으며, 신부님들께서 그 일부를
채취하여 흰 수건에 닦았으며, 그 피가 나중에 서울 대학교 법의학과 실험실에서의 DNA 테스트 결과 사람의 피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로써,
그 성체들이 사제에 의해서 축성되었다는 증거가 없었고, 예수님의 성혈이 직접 성체로 변한 경우였지만 진정한 성체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1994년 11월 24일에 내려오신 큰 성체를 제외하고는) 나주에 내려오신 성체들이 사제에 의해 축성되었다는
증거가 없었으므로, 진정한 성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논리는 사실은 교리적인 근거가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체는 주님의
현존을 담고 있는 특수한 물체인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몸소 신자들에게 실제로 오시기 위하여 성체 성사를
세우셨고, 성체 축성권을 사제들에게 부여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체 성사와 사제의 성체 축성권은 주님께서 신자들에게 실제로 오시기 위한 길이요
방편인 것이지, 주님의 현존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주체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성체 성사로서 우리에게 오시기 이전에 하늘 나라에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며,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어느 곳에든지, 언제든지 계실 수 있으시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체의 모습으로든 어떤 모습으로든 사제의 축성을 통해서만 계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무리일 것이다.
사제가 받아 있는 성체 축성권은 지극히 고귀한 것으로서 유효하게 서품된 사제 외에는 그 어느 사람에게도 주어지지
않았
으며, 심지어는 천사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위대한 능력이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주님을 사제의 축성 행위에 대한 포로가
되시게 하실 수는 없는 일이다. 사제님 들의 성체 축성권, 고해 성사권 역시 주님과 주님의 백성을 위한 봉사의 기능인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57)"에도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세례성사에 매어 놓으셨지만, 하느님 자신이 성사에 매여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되어 있다. 그런데, 이 교리서의 한글 번역문이
아니라, 원문을 보면 "하느님 자신이 성사들에 매여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성사"가 복수로 되어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세례성사를 포함하여 일곱 성사들을 주셨지만, 당신의 현존과 힘이 그 성사들에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씀
이다. 즉, 세례성사의 경우에도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정상이나, 예외적으로는 순교를 통한 혈세(血洗), 불타는 신앙을
통한 화세(火洗)를 통하여서도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 있어서도 정상적으로는 밀떡과 포도주를 사제가 축성함으로써 성체와
성혈이 있을 수 있으나, 사제의 축성함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본다. 교리에서 유효한
서품을 받은 사제만이 성체 축성권을 가진다라는 말씀의 뜻은 사제가 아닌 다른 인 간들에게 그 권한이 없다는 것이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심으로써 특별히 개입하심까지를 부인하는 뜻은 아닌 것이다.
사제의 축성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성체가 내려오신 사례는 교회 역사 상으로 많이 있었다. 그 중의 몇 가지
예만 든다면,
(1) 서기 4세기 안씨라의 주교였던 성 클레멘스는 감옥에서 순교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주님께로부터 직접 성체를 받아
영했다.
(2) 13세기의 성 보나벤뚜라는 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3) 14세기의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주님께로부터, 때로는 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4) 16세기의 성 파스칼은 젊은 시절에 일 때문에 성당에 갈 수 없었을 때 여러 번 천사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5) 16-17세기의 빠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역시 주님께로부터 성체를 받아 모셨다.
(6) 1917년 폴튜갈의 파티마에서 천사가 성체와 성작을 세 아이들에게 모시고 왔다.
(7) 오상을 받았으며, 1962년에 선종한 테레사 노이만 수녀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기적적으로 혀 위에 나타난 성체를
모셨다.
(이상 "성체 기적들" 죠앤 캐롤 크루즈 여사 저, Tan Books &
Publishers)
그러면, 만일 성체 같이 생긴 물체가 위에서 내려온다면 무조건 성체라고 믿어야 되는가? 결코 그런 뜻은 아니다. 신앙과
도덕에 관한 모든 말과 글과 행동과 현상 은 냉정한 분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인위적인 조작이 있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나주에서 성체가
내려오는 모습이 비디오에 찍혔다고 하여 조작이라고 단정했는데, 이는 실제의 상황을 무시한 억측이며 속단이다. 나주의 경당에는 천정에 비디오
카메라들이 항상 장치되어 있어서 중요한 기도회나 방문 등 을 자동적으로 기록하게 되어 있다. 기적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서 카메라를 켜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마귀가 했는가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분별해야 한다. 마귀가 예수님이신 성체를 모셔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마귀가 보통 면병을 가져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성체가 내려오는 기적이 있었다면, 이와
관련된 메시지라든가, 기타 상황들을 주의깊게 관찰해보아야 한다.
마귀가 한 짓이라면 분명히 허영적이고 혼란스럽고 신앙에 위배되는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나주의 경우에는
성체가 내려오시는 기적과 더불어 주님과 성모님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내용의 메시지들이 주어졌으며, 성체가 내려오시는 방식도 그 어떤 허황됨이나
난잡함도 없이 경건한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였으며, 특히 위에 언급된대로 1995년 7월 2일 율리아 자매님이 영한 성체가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성체 강림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요한 형제님이 이미 설명하신 것이지만, 그 일이 인간에 의해서 조작되었거나 마귀에 의해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배제되어
하느님께서 이루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간주될 경우에 성체가 아니라 보통 면병이 내려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다. 왜냐하면, 내려온 물체를 성체로 신자들이 인식하게 되는 상황에서 성체가 아닌 면병을 보내신다는 것은 진실함 자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실 수도 없으시고 혼란을 주지도 않으신다. 그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면, 확실한 성체임을
전혀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고귀한 선물을 주시는데, 우리가 마음이 완고하여 자꾸 의심만
한다면 큰 실례가 될 것으로 본다.
그리고, "진리와 교도권의 수호를 위하여" 책자 2권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이지만, 율리아 자매님이 본대로 십자가 상의
예수님께서 흘리시는 성혈이 성체로 변하여 내려온 경우들에는 사제의 축성이 있었고 없었고가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밀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주님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하기 위해서는 사제의 축성이 필요하지만, 주님의 성혈이 성체로 외양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실체
변화가 없으므로 사제의 축성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전능하시니, 성혈의 외양을 성체의 모습으로 바꾸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주님께서 나주에서 성체 강림의 기적들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2천년 전이거나 현대이거나 호기심 만족의 차원에서 기적들을 대하는 이들도 있으며, 또 기적들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기적들을 주로 그러한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경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적들은 그렇게 허황된 것이 아니며,
주님의 뜻을 담고 있는, 특히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징표들이다. 우리는 기적에 대하여 보고 들으면서, 거기에 담긴
고귀한 주님의 뜻을 공적 계시의 맥락 안에서 살피고 마음에 새기고 이를 실천하는데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기적 자체에 도취되는 것도,
기적을 경시하는 것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주에서 지금까지 일곱 회에 걸쳐서 성체의 강림이 있었는데, 이에 담긴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열두 번에
걸쳐서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바뀌는 기적들의 뜻은 다소 이해하기가 쉽다고 볼 수 있다. 즉, 성체 안에 실제로 계시는 주님을 많은
신자들이 믿지 않고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특수한 방법을 통하여 성체 성사의 참 의미와 중요성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려고 하시는
것이다. 성모님 상을 통하여 보여주신 눈물, 피눈물, 향유는 온 인류에 대한 성모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염려, 그리고 수많은 죄악들과 불신앙에
대한 성모님의 슬픔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가 회개하고 성모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주님께로 갈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경우에 사제의 축성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이 직접 성체로서 오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칫하면,
사제의 성체 축성권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경계될 수도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이와 같은
징표들을 주셨다.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에 대한 충분한 해답은 앞으로 신학자들에 의하여 두고 두고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주님께서
중대
한 이유없이 그런 징표들을 주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우선 지금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경당 안에 감실을 설치하여 주님을 항상 모시며, 미사 성제를 바치도록 하라는
간절한 부탁을 하셨다. 이를 통하여 마귀를 쫓고, 신자들에게 수많은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와 같은 주님과 성모님의
뜻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미사 성제를 바치고 성체를 이루고 모시는 임무를 위탁받아 계시는 사목자들께서 아직도 그 청을
들어주지 않으시니, 주님과 성모님께서 안타까운 심정을 알리시기 위하여 직접 성체를 내려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95년 7월 1일
새벽, 일곱 개의 성체를 내려주신 후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감실을 마련해 달라고 내 어머니는 몇 번이나 부탁했건만 실제적인 감실이 마련되지 않아서 이는 오늘 너희 모두를 위하여
특별히 내려주는 내 살과 내 피이니라."
위에 열거된 여러 성인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또는 천사들을 통하여 성체를 영하게 해주신 경우들에도 그 성인들이 감옥에 갇혀
있거나, 병들거나,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성당에 갈 수 없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편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도록 마련해주신
길이 막혀 있을 경우에 우리에게 오고저 하시는 당신의 지극한 사랑의 원의를 특별한 방법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성체의 외양이 변하는 기적들은 나주 성당, 경당, 성모님 산, 바티칸, 로마, 란치아노, 하와이, 말레이지아 등
여러 군데에서 일어났지만, 성체가 내려오시는 기적들은 모두 나주의 경당 안에서만 일어났다. 성체가 내려오시는 기적들이
경당
에 감실의 설치와 미사의 봉헌을 원하시는 주님과 성모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성체 강림의 기적들은 사제의 축성권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며, 신앙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모쪼록
교회의 지도자들께서 주님과 성모님의 간절하신 원의를 이해하시고, 하루 속히 적합한 조치들을 취하여 주실 것을 삼가 간청드린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 "영을 끄지 말고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시오. 모든 것을 살펴보고 좋은 것은 굳게 지키시오. 온갖 형태의 악을 멀리하시오," (1데살
5:20-22)라고 하셨듯이, 우리가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신중히 분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나, 그 특별 계시들을 완전히 배척함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의 은총이 영적으로 병들고 굶어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힘차게 흘러가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다.
이 분도
2000년 7월 5일
† 나주의 성체 외양 변화들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가?
1988년부터 1997년 사이에 모두 12 차례에 걸쳐서 나주의 윤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가
혀위에
서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하는 기적적인 현상들이 일어났다. (다섯 번은 나주 성당에서, 그리고 나주의 성모님 경당,
나주 부근 산, 이태리의 란치아노, 로마, 바티칸, 말레이지아의 시부, 그리고 하와이의 카일루아에서 각각 한 번씩 일어났음.) 성체가
정상적으로 지니는 면병( 餠)과 포도주 의 형상이 기적적으로 살과 피의 모습으로 바뀌는 현상은 교회 역사 상 상당히 많은 횟수에
걸쳐
서 일어났으며, 그 중의 다수가 이미 교회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들에 대한 역대 교황님들의 관심은 지대하였다. 예를 들면, 1263년
볼세나-
오르비에또에서 피흘리는 성체를 직접 목격하신 교황 우르바노 4세께서는 크게 감동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성체 공경을
위한 기도문을 짓도록 하셨으며, 또한 성체 축일(the Feast of Corpus Christi)을 설정하셨다. 1887년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란치아노의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성 프란치스꼬 성당을 순례하는 이들에게 전대사를 그 지방 대주교님을 통하여 허락하셨고, 1964년
8월에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성체 기적이 일어났던 볼세나-오르비에또의 대성당에서 그 기적을 기념하는 미사를 거행하셨다. 그리고, 교황께서는
1976년에 그 곳을 다시 방문하셨다.
1980년 9월에는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또 다른 성체 기적지인 이태리의 시에나를 방문하셨다. 그 밖에도 성체
기적들을 인정하시고, 순례자들에게 전대사를 베푸시고, 또는 몸소 성체 기적의 유물들을 살펴보신 교황님들이 많이
계신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성체 성사 안에서의 주님의 살아계신 실체적 현존에 대한 신자들의 인식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이다. 이러한 기적이 현대에 와서 율리아 자매를통하여 12 차례나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 시대에 성체를 상징적으로만 이해하려는 불신의 경향이
교회 안에서
조차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성체
기적들에 대해서도 바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오히려 그 기적 들을 이단시, 미신시하게 될 것이다. 성체 성사에 관한 오류 사상들에 대하여 크게 염려하시는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의) 신비를 글로써 또는 구두로 다루는 이들 중에 신자들을 불안하게 하며 그들의 마음을 신앙에
관한 큰 혼란으로 채워주는 견해들을 퍼뜨리는 이 들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누구든지 이미 교회에서 정의(定義)한 교리를
망각해도 무방하며, 교리 문구의 순수한 뜻과 그 문구에 담긴 기존의 인정된 개념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 . 실체변화의 신비를 논하면서 빵의 실체 전부 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하는 트렌트 공의회에서의 선언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 상의 변화(transignification)'라든가 '상징적인 변화 ransfiguration)'에 대해서 말하며, 또 미사의 희생 제사가 끝난 후에는 축성된 면병 안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현존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견해 들 및 이와 유사한 견해들을 유포하는 것이 신성한 성체 성사에 대한 믿음과 신심에 큰 해를 끼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전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체 신심의 활성화가 거짓된 의견들의 유포에 의해서 좌절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사도좌의 권위로써 존경하는 형제들인 여러 분들(주교님들)께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알려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사목적 염려와
걱정을 일으키는 이유들 - "신앙의 신비 (Mysterium Fidei)" (1965))
2천년 전 인성을 취하시어 강생하신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 서셨을 때, 그들은 입은 옷을 찢으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밝히시는데 대하여 분개하였다. 그들이 스스로 하느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들의 마음이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들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사고방식 과 자만의 틀 안에 안주함으로써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께서 강생하시어 우리와 함께
실제로 계신다고 하는 개념 (Emmanuel)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며,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혼란을 초래하는 자로 단죄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인류는 2천년 전의 유대인들이 당면했던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 세상의 다른 여러
종교들 안에도 부분적인 진리가 있지만, 오로지 주님께서 직접 세우시고 이끌어 가시는 가톨릭 교회 안에만 인류의 구원을 위한 충만한 계시 진리와
은총의 통로가 있다는 현실을 많은 이들이 수용하기 어려워 한다. 가톨릭 교회가 단지 신자들의 모임만이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과
진리가 있고, 천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 즉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라고 하는 사실을 배척하는 주장들은 교회 안에서조차도 자주 들을 수
있다. 특히 성체 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이 영적인 현존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몸과 피를 통한 실체적이며 물리적인 현존이라는 사실,
그래서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천주성과 인성을 지니시고 지상에 실제로 현존하시고 구속 사업을 하시던 때와 기본적으로 같은 현실이 교회와
성사들을 통하여 지속되고 있음에 눈을뜨고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가톨릭 신앙의 기본이며 핵심이다. 그러한 핵심적인 신앙의 현실에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면, 그 현실을 가시적으로도 보여주시는 주님의 기적들에
대한 이해 또한 용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주의 성체 기적들에 대해서는 광주 공지문에서 그 현상들이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라고 선언하었다. 이러한 단정은 나주의 일들이 오류이고
따라서 신앙의 혼란을 초래하는 위험한 현상들이므로 이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는 사목 지침에 대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위에 인용된 공지문 상의 교리 제시가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다른
여러 지면들에서 설명되었다. 간단히 요약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은 변하지 않지만, 빵과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한다는 것이다. 즉, 사제의 축성은 빵과 포도주의 실체를 변화시키는 기능만 가지고 있고, 그
외양을 변화시키는 기능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지문에서는 사제의 축성이 끝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그대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는,
교리에 없는 뜻이 첨가되어 선언되어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사소한 차이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심각한 차이이다.
만일 공지문 상의 그 교리 제시가 옳다면, 나주의 성체 기적 들 뿐 아니라, 교회 역사 상의 성체 기적들이 다 부정되어야 하고, 그들 중 다수를 인정한 교회의 결정들도 다 번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성체 축성 후에도 여전히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어야 한다," 라는 공지문 상의 표현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성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이를 오류라고 볼 수는 없다고 변호하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 때문에 공지문 상의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고 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하는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성체 성사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살펴보자.
성체 성사는 빵과 포도주라고 하는 물체를 가지고, 유효하게 서품된 사제에 의해서, 주님께서 주신 축성 기도문을 바침으로써
거행된다는 것이 그 기본틀이다. 그리고, 성체 축성이 끝난 후, 신자들이 성체를 영하면 그들의 몸속에서, 또는 가상적으로 감실 안에서라도 너무
오래 보존되어 성체가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한다면 더 이상 성체라고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주님의 실체적 현존이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빵과 포도주의 가시적 표징은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광주 공지문에서, 그리고 공지문의 내용을 변호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근거일 것이다.
그래서, 나주의 성체 현상들에는 성체 성사의 필수적인 가시적 표징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논리와 그에
따른 성체 기적들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이 과연 타당한가?
(1) 나주의 성체 외양 변화 현상들이 인위적으로나, 자연적으로 일어났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다. 성체 성사의 빵과
포도주라고 하는 가시적 표징을 제거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인위적인 의도나 노력도 없었으며, 따라서 교리를 어겼다고 지적당할 수 있는 책임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율리아 자매가 한 것은 성체를 영한 것 뿐이며, 성체 기적이 일어난 것은 율리아 자매의 의도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이다. 교회 역사 상에 일어난 성체 기적들과 수많은 다른 기적들에 대해서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거나 자연적으로 발생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버린다면 이는 기적들의 진정한 주체이신 주님의 역할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257조에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세례성사에 매어 놓으셨지만, 하느님 자신이 성사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교리서의 원본에는 "성사들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성사"가 복수로 되어 있다. 그 뜻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7성사를 세워 교회에 위탁하셨지만, 하느님께서 현존하심과 역사하심이 그 성사들에 제한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체 성사에서의 주님의 현존이 정상적으로는 반드시 빵과 포도주라고 하는 형상에 결부되어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를 초월하여
기적적인 방법으로 개입하실 수 있으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사와 자연 법칙과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2) 그리고, 주님께서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하는 기적들을 주신 목적은 성체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지, 성사의 보편적인 방도를 변경시키고저 하심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기적들을 주시면서, 앞으로는 빵과 포도주의
외양으로보다는 살과 피의 모습으로 이 성사를 거행하도록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나주에서의 메시지들에서 주님과 성모님께서는
사제직과 성체 성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강조하셨던가! 그리고, 사적 계시(또는 특수 계시)가 공적 계시를 더 빛나게 해주고 그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해줄 수는 할 수 있어도 그 내용을 변경시킬 수 없음은 이미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성체 성사의 기본틀에 수정을
가하려는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체 성사의 내적 현실을 특별히 가시적으로도 보여주시려고 내려주시는 기적들에 대해서 "성사적인 견지에서"
논하면서, 그 현상들이 성사의 기본틀에 맞지 않는다고 단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일이다.
(3) 나주의 성체 현상들이 성체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성체의 실체, 즉 주님의 살과 피라고 하는 사실이 변한
것은 아니므로), 변한 것은 오직 성체의 외양 뿐이었다. 그것도 꽃나무라든가, 돌이라든가 하는 성체의 실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형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성체의 실체와 자연적으로 완전히 부합되는 살과 피의 형상으로 된 것이다.
지금까지 빵과 포도주의 외양에 가리워져 있던 진정한 현실이 그 기적적인 현상을 통하여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 뿐이다.
인간들이 성체의 현실을 하도 인식하지 못하니까, 주님께서 베일을 벗겨서 현실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 현상들에서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라고 하는 성사의 가시적 표징은 벗겨졌으나, 주님의 살아계신 실체적 현존이라고 하는 성체 성사의 핵심적 현실에는 하등 변화가 없다. 결국
빵과 포도주의 외양도 성체 성사의 가시적 표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며, 성체 성사에 주님의 실체적 현존이 있게 하는 것은 그 가시적
표징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시다.
(4) 결국 이 문제는 그 성체의 외양 변화 현상들이 하느님의 뜻과 힘에 의한 초자연적인 기적들인가 아닌가 하는 데에로
귀결되는 것 같다. 특히 현대에 와서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있는 세속 주의, 현대주의에 물든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의 흐름에 친히 개입하시고 그 안에 임하신다는 사실로부터 유래되는
기적들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기적의 가능성과 의미가 모호해지면, 성체 기적들, 그리고 당신의 "Fiat!"로써 천주
성자의 강생이 이루어지게 협력하신 성모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모든 가시적인 사랑의 징표들을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성체의 내적
현실을 외적으로도 보여주시는 기적들을 극구 반대하는 이들이 성체 성사에 관한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들이 많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체를 주님의 참 몸과 피라고 믿는 이들을 "식인종"이라고까지 부르면서 비난하고 있다. 옛날 로마 제국
하에서의, 그리고 우리 나라의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도 그와 같은 비난을 받았었다. 성체 성사에 대한 교회의 정통 가르침이 바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때 성체 기적들에 관한 의견의 일치도 어렵지 않게 성취될 것이다.
이 분도
2000년 7월 1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