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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물 좀 떠다 주시오" 하던 눈뜬 맹인  (1984년 5월 14일)

     

어느 날 김 글라라 자매와 함께 레지오 활동을 하러 다니던 중 교동 골목을 내려오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물통을 들고 길에 서서 있다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물 좀 떠다 주시오" 하시기에 "네" 하고 물을 떠서 그 할아버지의 집에 가 보았더니 하수도가 막혀서 물이 내려가지 못하니 마당 안이 온통 질퍽거렸고 집안은 엉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내친김에 그 할아버지의 집안 곳곳을 청소 해 드린 뒤 막힌  하수구도 뚫어 보려고 한참을 끙끙대고 있는데 그 할아버지 말씀이 뒷집에서 시멘트로 막아버렸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집에는 화장실도 없어서 할 수 없이 하수구에서 소변을 보셨다는 데 물이 내려가지를 못하니 지린내가 진동을 했고 대변은 고무 들통에 연탄재를 깨어 넣고 거기에다 보았는데 구더기가 여기저기 기어다니고 있었다.

"할아버지, 왜 혼자 사세요? 자녀분은 없으세요?" 하고

물었더니 3남매였던 그분은 결혼한 형이 일찍 혼자되어 자기가 돌보게 되었으며 누이동생도 시집갔다 쫓겨와 그 동생도 함께 살면서 본인도 장가를 갔는데 부인이 시집 온지 한 달만에 친정에 다녀온다고 갔다가 친정간지 한달 만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불치병에 걸려 있던 딸을 처녀귀신으로 죽게 하지 않을 심산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그만 시집온 지 한달 만에 친정에 다니러 가서 죽은 것이다.

"그런데 왜 재혼 안 하셨어요?"

"돈이 있어야 재혼을 하지요. 게다가 아픈 형과 여동생까지 먹여 살려야 되는데 마땅한 재주도 없고 하니 고기나 잡아서 팔아 가지고 근근히 끼니나 때우며 살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개천에서 고기를 잡아 가지고 오다가 넘어지면서 돌부리에 오른쪽 눈을 다치게 되었는데 변변한 치료 한번 받아보지도 못한 채 그냥 그대로 나뒀더니만 오른쪽 눈이 안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남은 왼쪽 눈마저도 안보이게 됩디다.

결국 그렇게 맹인이 되고 말았지요."

"예? 그러면 지금 눈을 못 보신 단 말씀이에요?"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맹인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단지 노인이시라 몸이 쇠약하신가 보다 했다.

우리가 너무나도 뜻밖이라는 듯이 놀라자 할아버지는 대뜸

"나는 눈 뜬 당달봉사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뒤 형님도 돌아가시고 동생도 죽고 나 혼자 남아

그 당시 호남 비료 공장(지금의 럭키공장)자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비료 공장을 짓기 위하여 그 집을 비워 주는 대신에 내가 살도록

이 집 하나를 준 것이라오.

그런데 뒷집에서 자기 집을 지으면서 우리 하수구까지 다 막아버리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는데 세상에 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니 앞 못보는 내가 죽지도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소.

그래서 참말로 내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라오."

우리는 할아버지와 함께 울고 말았다.

그 다음날부터 우리 가족은 번갈아 가면서 할아버지에게 다녔다.

할아버지 집에는 찬장이 없어서 그릇들을 대충 마루에 엎어놓았는데 쥐들이 계속 지나다니는 바람에 새까맣게 되어 더럽고 불결해서 우선 찬장을 먼저 들여다 놓은 뒤 그릇들을 깨끗이 닦아서 찬장 안에 넣어 두고 필요한 물건들을 들여놓아 드렸다.

그 뒤부터 나는 하루 종일 미용실에서 손님 머리를 해주고 난 뒤 밤이면 사랑과 희생으로 할아버지의 이불도 손수 만들고 요도 만들고 베개도 만들어 다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