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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성모성심의 승리를 위하여 온전히 바치나이다.

 

저는 현재 성모님 집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박연훈(루비노)입니다.

제가 율리아 자매를 만나 나주에서 봉사하게 된 동기를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1983년 광주대교구 푸른군대 피정에서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성물과 책 등을 판매하는 율리아 자매님에게 햇빛이 뜨겁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지금 저도 안에 들어가 강론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저는 연옥 불 속에서 단련 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쁘게 봉헌하고 있습니다."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기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피정이 끝난 뒤 하 안또니오 신부님은 율리아 자매님과 대화를 나누시다가 큰 소리로 "진짜 봉사자가 나타났네." 하셨고 신부님께서는 우리 두 사람을 백경그릴의 경양식 집으로 데리고 가셔서 가정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뒤 우리 두 사람은 김 베로니카 자매님 댁에서 함께 철야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도초라는 섬에서 공소회장으로 전교하고 있었는데 제 영혼이 영적으로 너무 갈급하여 전국을 누비며 여러 곳에 피정을 다녀 보았으나 저의 영혼 상태는 늘 채워지지 않은 채,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었습니다.

때로는 산으로 올라가서 눈물로 주님께 호소하며 간절히 기도도 해 보았고, 또는 들에서, 바닷가에서 외쳐보기도 했지만 상처로 찢긴 텅 빈 가슴은 채울 길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도초공소 주변에는 결핵환자들이 많이 있어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곤 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저는 계속 심한 기침까지 하여 약을 먹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어렵게 마련한 돈을 제 손에 쥐어주면서 "육지에 나가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치료를 받으세요."하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육지로 나왔으나 당장 갈 곳이 없어 율리아 자매님을 찾아갔는데 자매님은 반갑게 맞아주며 우선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기도중 자매님은 많은 고통을 나 대신 겪으며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각혈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눈물, 콧물은 어디에서 그렇게도 많이 나오는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상처 속에서 외면당하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며 짓밟혔던 나의 슬프고 쓰라린 과거, 지워버리고 싶었던 일들... 그러나 3일 밤낮을 기도하고 나서 마음의 깊은 상처들이 주님의 은총으로 온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을 만남으로써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본 큰사랑과 위로는 제 영혼을 생기 돋아나게 했습니다. 이제 어둠과 슬픔의 막이 내리고 새로운 희망과 사랑의 밝은 빛이 온 것입니다.

다음날 자매님의 안내로 병원에 가서 X-Ray 를 찍고 검사를 했을 때 병원 원장님이 "아무 이상이 없는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하며 웃으셨습니다.

치료비가 필요 없게 된 저는, 저를 따뜻하게 대해 준 자매님 가족들에게 무엇인가 선물하고 싶었지만 자매님이 극구 사양하였기에 사정사정하여 가장 값이 싼 1단 묵주를 사기로 했는데 "어머, 성모님이 참 예쁘시다."하는 자매님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게 되어 얼른 성모상을 사자고 했더니 아니라고 적극 반대했지만, 저는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하고 7,500원을 주고 그 성모상을 사서 선물했습니다.

성모상을 선물한 지 1년 후 그러니까 1985년 6월 30일 나주에서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소식을 듣게되어 7월 18일 성모상에서 눈물 이 고여 있는 모습을 보았고 7월 20일에는 눈물 흘리심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나주에 도착하자 자매님이 어디에 가기에 저도 같이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쩡하게 걷던 자매님이 나주 매일시장 입구에서 발을 땅에서 떼지 못하며 거의 걷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택시를 부를까요?" 했더니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가신 골고다 언덕을 생각하면서 한 발 한 발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며 가야해요." 하며 땅에 들러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 발을 종종걸음으로 끌며 제자리에서 맴돌기도 하고 한번에 1-2cm 정도를 가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봉헌하며 눈물을 감추고 가다가 막걸리 병마개 안의 동그란 하얀 종이가 땅에 떨어져 발로 밟혀진 것을 보고 불편한 몸으로 주우면서 "이렇게 성체가 많은 이들로부터 짓밟히고 있어요."하고 보이는 대로 다 줍는 것이었습니다. 5분 거리를 1시간 30분 걸려서 도착한 곳은 초라한 집이었는데 그 집에는 맹인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 때 저는 화장실을 가고 싶었는데 그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기에 화장실을 찾아다니다가 시간이 한참 지나서 돌아와 보니 율리아 자매는 벌써 물을 데워서 할아버지 목욕을 다 시켜드린 뒤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왔던 자매님이 성한 몸으로 목욕까지 다 시켜서 옷을 입혀 업어주다니… 어떻게 된 것이냐고 놀라 물었더니, "어? 진짜 내가 정상이 되었네." 하며 웃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님은 할아버지의 목욕을 시켜드리기 위하여 주님과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고통스럽지만 물을 길어와서 물을 데우기 위하여 아궁이에 불을 때며 땅에서 주워왔던 성체 모습 비슷한 하얀 종이를 성체를 모독한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하며 불에 태웠습니다.

모령성체 하는 이들을 성령의 불로 활활 태워주시어 회개의 은총으로 주님의 마음을 기워줄 수 있도록 기도하며 태웠는데 그때부터 몸에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체! 그렇다. 믿는 자의 구원인 성체, 내가 공소에 있었기에 성체의 신비에 대하여 잘 깨닫지 못했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성체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시는구나!' 하고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자매님은 할아버지를 혼자 성당까지 업고 다니면서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 후 나주에 갔을 때 또 자매님을 따라 갔는데 부엌으로 들어간 자매님이 갑자기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가까이 가보았더니 밥통 속에 쥐가 들어가 밥을 파먹고 들락날락하여 밥이 온통 시커멓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 더러운 밥을 할아버지가 모르고 잡수셨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자매님은 눈물 흘리고 계신 성모님 때문에도 '미용실을 해야 되나?, 안 해야되나?' 갈등 속에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고 싶은 열망으로 급하게 미용실을 팔고 이사한 집에서 짐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병원에 가서 눈을 수술해 드렸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단 0.1%도 가능성이 없다는 85세 된 노령의 할아버지가 시신경이 파괴된 눈을 뜨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매님의 지극한 '심청이의 정성'이라고들 동네에서 말들을 하였습니다.

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복음 말씀 그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매님의 모습 안에서 살아 계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보게 되었고 그 깊은 사랑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 어느 날은 암환자 방문을 가던 자매님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가던 중에 자매님은 호주머니에 든 우황청심원이 껍질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아! 우황청심원까지 씻겨져 버렸네. 주님! 그 약이 꼭 필요한 이에게 약효를 주세요."하지 않는가.

저는 제 자신을 반성하며 깊이 묵상했습니다. 자매님은 성녀 소화 데레사를 본받아 "사랑, 사랑, 오직 사랑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아름다운 작은 영혼"이라는 것을 더욱 잘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영적인 독서를 많이 해온 제 머리 속에는 영적인 지식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매님은 영적인 독서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를 모함한 많은 이들이 말하기를 "희생벌레", "하느님 사랑에 미친 여자"라고까지 일컬었습니다.

책이나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 실천이 중요하기에 지식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또 어느 날 나주에 왔을 때 자매님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영가를 부르는데 너무나 아름다워  녹음을 하게 되었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자주 보았기에 바로 그 내용이 시편 29장의 내용인 것 같아서 성서를 펴보았더니 똑같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성모님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는데 '성모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셨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제가 소속된 본당 신부님께 말씀드리고 1987년 6월 23일 나주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그 뒤 성모님께서 주신 눈물과 피눈물, 이마에서 흐르는 진땀, 향유, 성체, 성모님의 메시지, 수많은 징표들을 직접 보고 접해 오면서 자매님을 도와주며 일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항간에 떠돌던 유언비어, 그것은 바로 율리아 자매님이 너무 사랑이 많아 사랑을 베풀어주면, 그 사람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시기와 질투로 터무니없는 말을 본당 신부님들이나 주교님들께 거짓증언을 함으로써 진실이 왜곡된 말들임을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유언비어를 통해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러나 자매님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하면서 그 아픔과 고통들을 기쁘게 봉헌하면서 수많은 고통을 아름다운 미소 속에 감출 때,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는 제 마음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율리아 자매님은 어려서부터도 그랬지만 특히 1982년부터 불쌍한 사람들을 숨어서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 살기를 바라고 원했었기에, 성모님의 일을 하면서 1993년도부터는 양로원까지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늘 자신이 부족하므로 사제님들과 평신도들이 판단하고 비판하는 죄를 짓는 것을 너무 안타까워하며 숨어서 보이지 않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율리아 자매님을 생각하면 성모님의 아픈 마음을 깊이 묵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너의 수많은 고통들은 인성에서 떼어내는 생살 한 조각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자매님은 그 말씀대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시고자 하시는 성모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과 기쁨으로 영혼과 육신의 고통을 아름답게 봉헌하며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주님, 죽어도 당신의 것, 살아도 당신의 것입니다." 하며, 힘겨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갈바리아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주 성모님을 쓰러뜨리려고 자매님을 박해하고, 모함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해도 자매님은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으니 그들이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율리아 자매님의 그 극심한 고통을 통해 저를 포함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뉘우치고 회개하며 영적으로 육적으로 치유되고 있으니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성모님을 몰랐던들 이 부족한 죄인이 진정 부족한 줄도 모르는 채 무척이나 영적으로 교만하여 죄인 중의 큰 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비를 베푸시어 영적인 교만을 꺾어 주시고, 부끄러움뿐인 죄인 중의 죄인을 부르시어 낮은 자로 주님과 성모님의 일꾼으로 써 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와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남들은 뭐라고 해도, 행여 육신이 지치고 힘이 들지라도,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아 순교의 정신으로 작은 자의 사랑의 길을 걸으며 하늘과 땅을 잇는 끈이시며 우리를 하늘 항구까지 도달시켜 주실 성모님의 손을 꼭 붙들고 우리 모두 천국 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 성모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 곁에 모여드는 모든 영혼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심 안에 품어주소서. 아멘!

 

1995년 6월 18일

나주시 금계동 수강아파트 302호

박연훈(루비노) T.332-2883

(은총은 강물처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