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성모님의 진실

공지문의 문제점들

가톨릭 신앙의 보물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공동 구속자(Co-Redemptrix)이신 성모님  —  2000년 7월 18일

구원의 신비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성모님  —  2000년 9월 28일

신앙의 유산에 충실할 것을 거듭 호소하시는 성모님  —  2001년 3월 10일

한국 교회가 나주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들  —  2003년 8월 22일

성체성사는 나주에서의 메시지와 징표들의 핵심  —  2004년 7월 28일

크리스챤 신앙의 초자연성  —  2004년 7월 28일

가톨릭교회 내의 교리 및 전례에 관한 기강 확립을 위하여  —  2006년 10월 24일

공동 구속자(Co-Redemptrix)이신 성모님

 


교회에서는 성모님께 많은 호칭들로써 공경을 드려왔다.  그 호칭들은 그냥 듣기 좋은 수식어가 아니라, 깊은 진리의 뜻을 담고 있으므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어머님," "교회의 어머님," "매괴의 모후," "크리스챤의 도움," "병자의 위로," "죄인의 피난처," "상지(上智)의 좌(座)," "바다의 별,". . . 그 밖에도 수많은 호칭들이 성모님의 고귀하신 지위와 중요한 역할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하느님의 어머님," 즉 "천주의 모친"이라는 호칭만 해도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개신교 뿐만 아니라, 현대의 가톨릭 신자들 중에도 그런 경우들을 가끔 보게 된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데, 인간인 마리아가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친이 되실 수는 없고, 단지 인간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결국 진정한 천주 성자의 육화 즉 강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성을 취하신 참 사람이시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인간이신 예수님이 분리되실 수 없으며, 단 한 분이신 예수님이 계실 뿐이다.  즉 그분의 위격은 천주 성자로서의 위격 한 분 뿐이시다.  예수님께서 "나"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의 아들인 나"와 "사람의 아들인 나"가 따로 계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신 것이다.  즉, 천주 성자의 위격을 가지신 그분께서 인간성을 취하심으로써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함께 지니시게 된 것 이다.  따라서 인성을 취하신 후에 하신 그분의 모든 생각과 말씀과 행위가 천주 성자께서 하신 것이 된다.  그리고, 성모님께로부터 인간의 육신을 받으시어 강생하신 그분께서 여전히 참 하느님이시니,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분께서 성모님의 참 아드님이 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참 아드님이심, 다시 말해서 성모님께서 참 하느님이시오 참 인간이신 예수님의 참 어머님이 되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는 천주 성자의 강생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천주 성자께서 전에는 안 계셨는데, 성모님께로부터 잉태되어 태어나심으로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에서 성모님께서 천주의 모친이라는 것이 아니다.  천주 성자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성을 취하시어 강생하신 후에도 여전히 천주 성자이시니 그분을 세상에서 낳으신 성모님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인간성을 그냥 외투 입듯이 슬쩍 걸치고 계시는 것도 아니다.  그분의 천주성과 인성은 참으로 결합되어 계신다.  그래서,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동시에 우리와 죄만 빼놓고는 똑 같으신 참 인간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우리와 꼭같이 겪으면서 살으셨다.  눈물이 있고, 감동이 있고, 웃음이 있고, 땀이 있고, 피로함이 있고, 고통이 있는 우리의 형제이셨다.  부족한 우리들도 우리의 부모님을 귀중하게 생각한다면, 무한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당신의 어머님을 귀중하게 생각하시고 사랑하시고 의지하셨을까 하는 것도 우리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주에서의 메시지에서도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천상 어머니," "하늘과 땅을 잇는 끈," "보속의 협조자," "이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의 협력자," "교회의 어머니," "하늘의 여왕," "우주의 여왕," "은총의 중재자," "공동 구속자" 등의 호칭으로 불리우셨다.  나주의 메시지들에서의 이러한 성모님의 호칭들을 통하여 교회 안의 진리들이 요약적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호칭들 중에서도 특히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은 현대에 와서 망각되고 희석되어 있는 지극히 중요한 크리스챤 진리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그 진리가 다시금 확실하고 깊게 이해될 때 전체 교회의 쇄신을 위한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 진리는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신을 끊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꼬 8:34)라고 하신 말씀에 담겨져 있다.  이는 바로 주님께서 성취하시고 이끌어 나가시는 인류 구원 사업에 우리들도 협력자로서 참여하라는 말씀이시며 초대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사하고도 남을 충분한 구원의 은총을 얻어 놓으셨지만,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선교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보속하지도 않고, 애덕을 행하지도 않는다면, 주님의 나라가 퍼져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혼자서 다 하실 수가 없으셔서가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그 구원 사업이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시다.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하느님의 섭리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협력해드리지 않으면, 주님의 구원 사업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성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받음을 기뻐하며,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 수난의 부족한 것을 마저 채웁니다" (골로사이 1:24).  이는 주님의 수난 공로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작은 공동 구속자들(co-redeemers and co-redemptrices)이 되기를 원하신다.  구원받아야 할 입장에 있는 불쌍한 죄인들인 우리들로서는 이 얼마나 과분한 처사이시며 영광스런 일인지 모른다.  우리가 감히 공동 구속자, 즉 주님의 협력자가 될 수 있다니!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친구요 형제요 협력자로서 대해 주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 시민과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이다. 

 

나주에서 주시는 주님과 성모님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보면, 끊임없이 우리를 공동 구속자로서의 역할에로 부르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와 보속을 바칠 것을 줄기차게 호소하고 계신다.  만일 우리가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든지, 교회의 멤버가 됨으로써 충분하지 않은가 등의 단순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면, 나주에서 주시는 메시지들은 하나의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이다.  현대에 와서 많이 잊혀진 복음의 메시지의 진수이다.  바로 그것을 나주에서 다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만일 어떤 사제가 교회 안에서 나의 (성체 안에서의) 이 위격적인 현존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공동 구속자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1995년 6월 30일, 나주).  사제들이야말로 주님께 협력해드리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분들이시니 참으로 "공동 구속자들"이 되시며, "작은 예수님들"이 되신다.  이는 사제직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일깨워 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주님의 구원 사업이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협력에 의존되어 있다는 진리를 우리 모두가 깨닫는다면 교회의 참된 쇄신과 신앙의 활성화가 크게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각자가 주님과 성모님의 협력자라고 하는 긍지를 가지고, 또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묵상한다면 성모님께서 공동 구속자(the Co-Redemptrix)가 되심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동등한 구속자라는 뜻도 아니며, 따라서 동등한 구속자가 두 분 계신다는 뜻도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사업에의 참여와 협력에로 부르고 계신다는 맥락에서의 공동 구속자일 뿐이다.  우리가 주님께 협력해드릴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통하여 무한한 공로를 세우셨고, 무한한 은총을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만으로서의 초자연적 공로를 세울 수 없으며,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주님의 협력자요 공동 구속자가 될 수 있지만, 우리 모두 중에서도 성모님의 역할은 지극히 출중하시다.  성모님은 천주 성자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시기 위하여 당신의 어머니로 택해지신 분이시다.  강제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가브리엘 대천사를 보내시어 물어보신 후 마리아께서 사랑과 겸손에 찬 "Fiat mihi!," 즉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동의하신 후에 비로소 천주 성령께서 임하시어 구세주가 잉태되셨다. 

 

그리하여 태어나신 예수님은 마리아께로부터만 육신을 받으셨으며, 마리아의 참 아드님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특히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리아께서는 사랑과 순명으로 아드님의 희생과 당신의 희생을 함께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천주 성부께 바치셨다.  우리가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말씀드리듯이,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며, 따라서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지극히 높은 초성적 가치를 띠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생애와 존재 전체가 티없고 초자연적인 사랑에 가득찬 것이라는 뜻이다. 

 

성모님의 특별한 역할과 지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원죄를 지었을 때, 혼자서가 아니라 여인과 함께 한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뿐아니라, 에와의 범죄가 아담의 죄를 선행하였다.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Fiat"가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했던 것이다.  인간을 남녀로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남녀가 함께 죄를 지었던 것처럼, 구원의 성취에 있어서도 남녀의 협력에 의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리고, 새로운 아담, 즉 예수님께서 모든 이들의 구세주가 되시듯이, 새로운 에와, 즉 성모님께서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상하게 이끄시고 안배하시고 도와주시며 구원의 은총을 분배하여 치유해 주시고 키워 주시는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성모님께서 천주 성령과 일치되신 분이라는 말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했는데, 이는 그 개념을 오해한 데에서 초래된 것이라고 본다.  성모님께서 천주 성령과 한 분이 되셨다는 뜻이 아니다.  한 인격체가 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과 거룩함으로 지극히 밀접해지셨다는 뜻으로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죄를 피하고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여 주님과 일치된 삶에로 향해 가야 한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도 용서와 도움으로써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 모두가 한 사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마리아께서 "Fiat!"를 말씀하심으로써 곧 천주 성령께서 임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셨다.  이런 뜻에서 마리아께서는 천주 성령의 정배가 되신다.  그리고, 천주 성령의 정배로서의 마리아께서는 천주 성령의 힘으로써, 그리고 당신의 중재로써 모든 인간들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도록 하는 역할을 계속하고 계신다.  이것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신비가 펼쳐지는 구체적인 길이다. 

 

또 어떤 이들은 성모 신심을 강조하는 이들을 일컬어 "사위일체"를 주장하는 이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성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이들은 성모님을 하느님이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에 의해서 모든 죄로부터 면제되어 계시는 분이시며,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총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님을 전체 교회와 그 모든 구성원들의 어머니로 삼아 주셨고, 천상의 여왕으로 올려 주셨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의 전적인 순명과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과 지극히 결합되어 계시는 분이시며,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를 잘 묵상하여, 성모님께 누가 되며 하느님을 거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

 

우리가 성체 안에 참으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흠숭하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모님의 중요한 역할을 깨닫고 그분께 의지하며, 또 우리 모두가 주님의 구속 사업에 주님의 협력자로서, 성모님의 협력자로서 참여해야 한다는 이 세 가지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 말로 나주에서 주시는 메시지와 징표의 핵심이라고 보며, 또한 전체 교회의 참된 쇄신을 위한 관건이라고 믿는다.

 

끝으로, 성모님의 역할에 관한 역대 교황님들의 말씀들을 인용한다.

 

비오 9세 (Ineffabilis Deus, 1854)

마리아께서는 천주 성령의 모든 은총들의 거소(居所)가 되신 유일한 분이시다.

 

레오 13세 (Jucunda Semper, 1894)

성전에서 마리아께서 당신 아드님과 함께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바치셨을 때, 그분께서는 이미 인류를 위한 고통의 보속에 아드님과 함께 참여하고 계셨다. 

 

레오 13세 (Adjutricem populi, 1895)

인간의 구속에 있어서 공동 시행자(co-operatrix)가 되셨던 마리아께서는 마찬가지로 구속의 은총을 배부함에 있어서도 공동 시행자(co-operatrix)가 되신다.

 

성 비오 10세 (Ad diem illum, 1904)

그리스도와 마리아 사이에 존재하는 수난과 목적의 일치로 인하여 마리아께서는 지극히 마땅히 타락된 세상을 복구하시는 분(the repatrix of the lost world)이 되셨다.

 

베네딕또 15세 (Inter Sodalicia, 1918)

마리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시는 당신의 아드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고통받으시고 죽어가시는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고 거의 죽으셨으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의노를 누그러뜨려 드리기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께서 희생으로 죽으시게 내어놓으셨음으로 인하여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를 구속하셨다라고 우리가 마땅히 말할 수 있다.

 

비오 11세 (L'Osservatore Romano, 1935년 4월 29-30일 자)

오 사랑과 자비의 어머니시여, 당신의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드님께서 십자가의 제대 위해서 인류의 구속을 성취하셨을 때, 당신께서는 그분의 곁에 서 계시며, 그분과 함께 공동구속자(Co-Redemptrix)로서 고통을 받으셨나이다.  마리아여, 당신께 비오니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보속의 고귀한 열매와 당신의 연민을 유지시켜 주시며 매일같이 증가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나이다.

 

비오 11세 (Miserentissimus Redemptor, 1928)

마리아께서는 구속자이신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으시고, 기르시고, 십자가 상에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그분은 그리스도와의 숨겨진 일치와 그리스도로부터의 유일무이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보속녀(補贖女, the Repatrix)가 되셨다.

 

비오 11세 (L'Osservatore Romano, 1933년 12월 1일자)

그리스도의 구속자로서의 사업의 성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어머니와 그 사업에 있어서 결합되셔야만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마리아를 공동 구속자(the Co-Redemptrix)의 호칭으로 불러드린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주셨고,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십자가에까지 그분을 동행하셔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고뇌와 죽음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구세주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 밑에서 당신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전 우주의 어머니로 선언하셨다.

 

비오 12세 (파티마에의 순례자들에게 하신 라디오 연설, 1946년 5월 13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인류 구속 사업에 있어서 순교자들의 왕이신 분과 결합되어 계셨던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공동시행자(Mother and cooperatrix)로서, 거의 무한한 힘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부터 흘러오는 은총들의 분배에 있어서도 영원히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계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 (Redemptoris Mater, 1987)

성모님께서는 믿음을 통하여 당신 아드님의 죽으심, 보속을 위한 죽으심에 참여하신다.

 

이 분도

2000년 7월 18일

 

 

구원의 신비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성모님

 

나주 성모님께 대한 묵상

 

교회는 흘러가는 인류 역사 안에 존재하며, 가시적(可視的)인 성사들과 교계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그 가시적 표징들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께서 현존하시고 역사(役事)하고 계시며 이는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만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현실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70 참조).  천주 성자께서 육화하시어 수난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스스로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신비가 되셨듯이, 그분의 현존과 구원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 교회 역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성사이며 신비인 것이다.  여기에서 신비란 단어는 "감추어진 구원의 실재를 담고 있는 가시적인 표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74 참조).

 

우리가 신앙이 없는 눈으로 볼 때, 교회는 단지 인간적인 조직체, 형식적인 전례들, 이해할 수 없는 성서와 교리서의 문구들, 일방적으로 되풀이되는 기도 소리들로만 보이고 들릴 수 있다.  온통 인간들의 유물이며, 상징물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위대한 인간에 불과하신 분이 아니라, 참으로 천주 성부의 독생 성자, 즉 하느님 자신이셨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교훈과 모범을 남겨 주셨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인간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실 영적인 힘을 지니신 분이셨다.  마찬가지로 그분께서 세우시고 그분의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 역시 인간적인 조직체일 뿐이거나 외적인 예절들과 경전들만을 갖춘 단체가 아니라, 실제로 인간들의 죄를 사하며, 그들을 성화하며,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한 가족으로 일치시킬 수 있는 주님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즉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 쓰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세 성사를 받으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원죄와 본죄들이 다 씻어지고 성화은총을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세받은 후에 짓는 죄들에 대해서는 이를 참으로 통회하고 사제에게 고백함으로써, 그 사제가 대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권위로써 그 죄들이 참으로 사해진다.  성체 성사에서도 미사 때 면병과 포도주가 축성됨으로써 그 제물들이 단지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외양은 그대로 있을지라도 그 실체가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계신 참 그리스도와 실제로 일치될 수 있게끔 해 주는 것이다.  교회 안의 다른 성사들 역시 마찬가지이며, 진리의 가르침, 기도, 모든 성인들의 통공, 애덕의 실천 등도 단지 외적인 형식과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하느님께로부터의 영적 현실, 즉 우리를 죄로부터 구하시고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힘이 실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톨릭 교회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주님께서 직접 세우신 가시적인 표징들을 통하여 그분의 현존이 지속되며 그분의 영적인 힘이 실제로 작용하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교회 안에 지속되고 있는 영적 현실에 관하여 교회의 가르침은 그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5):

 

교회의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주로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표시하고 실현하신다.  예수께서는 지상생활 동안 파스카 신비를 교훈으로 알리시고 행동으로 예고하셨다.  당신의 때가 이르자 예수께서는 사라지지 않을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신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로마 6,10; 히브 7,27; 9,12 참조) 죽으시고 묻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이는 우리의 역사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면서도 독특한 사건이다.  다른 모든 역사상의 사건들은 한번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고 과거에 묻혀버린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는 과거 안에만 머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물리치셨으며, 그리스도의 모든 것, 곧 모든 인간을 위하여 그분이 행하고 겪으신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현존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이끌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 뿐아니라, 그분 일생 전체가 과거에 묻혀버리지 않고 영원한 현실로서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는 말씀이시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현존하심과 역사(役事)하심이 특히 교회의 가르침과 성사들과 전례를 통하여 우리와 실제로 함께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뻗쳐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각자는 그리스도의 그 파스카 신비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묵상하고, 생활화하고, 전파함으로써 그분의 신비가 우리 자신과 이웃들에게서 구현되도록 해야할 사명에로 초대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신비체라고 하는 교회의 참 의미를 모호하게 하고, 신비의 세계를 인간적으로, 현세적으로만 보려 하며, 교회 안의 모든 것들을 역사의 유물, 상징물들로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이러한 때에 주님께서는 특히 한국의 나주에서 성모님을 통한 메시지들과 많은 징표들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교회 안에 참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신비의 현실이 존재함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이다.  성체 성사의 현실, 사제직의 현실, 고해 성사의 현실, 용서와 회개와 보속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하는 현실, 태아도 엄연히 영혼을 지닌 인간이라고 하는 현실, 그리고, 성모님께서 우리의 참 어머니로써 우리가 회개하지 못하여 지옥에 빠지는 것을 막으시려고 피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며, 애타게 우리에게 호소하시며 도와주시려고 애쓰고 계신다는 이 엄청난 현실에 대하여 우리를 깨우쳐 주시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가 때로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성상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눈물, 피눈물 등이 정말 현실일까?하는 의혹을 가질 수도 있다.  그냥 성모님께서 우리의 관심을 끄시려고 보여주시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나주의 율리아 자매는 여러 번 예수님께서 아직도 십자가 위에서 우리들의 죄 때문에 비참하게 피흘리고 계시는 모습을 뵈었는데, 이 역시 우리의 회개를 위하여 보여주시는, 현실과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환상이 아닐까?  성모님께서도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자신을 높일 때마다 주님을, 그리고 성모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과연 사실일까?

 

그러나, 위에 인용된 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현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이들 각자에게 실재하는 현실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계시는 성모님께서(가톨릭 교회 교리서 #618) 모든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실제로 함께하심 역시 엄연한 현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주에서 보여주시는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은 전혀 과장이 포함되지 않은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성모님의 그 눈물과 피눈물이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의 잘못들 때문에, 그리고 내가 회개하고 생활개선하기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고 계신다는 말 역시 지극히 옳은 말이다.  성모님께서 주시는 향유와 향기는 바로 지금 나 그리고 내 주위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성모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표시해 주시는 것이라는 말 역시 옳은 말이다.  우리 각자가 주님과 성모님께서 부족하고 죄많은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또 나 때문에 그토록 고통받으신다는 현실에 대하여 확실히 인식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려는 우리의 여정의 첫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주에서 주시는 주님과 성모님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대하면서 교회를 통한 주님의 현존하심과 역사하심이 상징이 아니라 확실한 현실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바로 그 현실에 응답하며 참여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되어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분심과 유혹의 물결은 너무나 거세며, 우리는 그 물결 앞에서 너무나 나약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과 성모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고,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그분들께 전적으로 사랑과 충성을 바치는 군사로서 자신과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중요한 진리를 뒷받침해주는 나주에서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에 대해서 이를 "기이한 현상들" 정도로 인식하면서 외면하는 것은 초점을 벗어난 일이 될 것으로 본다.  2천년 전에도 하느님을 잘 공경한다고 자부하던 많은 이들이 막상 주님께서 직접, 가시적으로 그들 앞에 서셨을 때 그분을 몰라보고 배척하였다.  우리들도 만일 그 메시지들과 징표들이 참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이를 경시한다면 자칫 그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주시는 분을 경시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00년 9월 28일

이 분도

Gresham, Oregon, U. S. A.

 

 

신앙의 유산(遺産)에 충실할 것을 거듭 호소하시는 성모님
 

 

성모님께서는 나주에서 윤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주신 메시지들에서 "오류"라는 단어를 누차에 걸쳐서 사용하셨다:

 

1.  "지금 이 시대가 너무 험악하여 오류에 물든 시대이기에 사탄이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 . ." (1987년 4월 23일)

 

2.  "오류가 만연한 이 때에 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이 오류가 엄청나게 파고 들어가고 있다." (1987년 6월 29일)

 

3.  "오류는 세상 어디에나 있어 내가 택한 자녀들 사이에까지도 엄청난 오류에 물들도록 그리고 빠지도록 범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무척 아프단다." (1988년 7월 24일)

 

4.  "티없는 내 성심 안에 모든 것을 맡겨야 되는데 맡기지 않기 때문에 악인과 죄인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악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엄청난 오류에 빠져들고 있다.  또한 대다수의 목자들까지도 복음적 생활을 하지 않으므로 오류에 빠져들고 있으니 더 큰 희생과 극기가 필요하다." (1988년 11월 6일)

 

5.  "보아라.  이 세상은 오류에 물들어 썩어 가고 있다." (1989년 1월 29일)

 

6.  "지금 많은 자녀들은 썩어 없어질 육신과 오류에 물든 세속과 타협함으로써 형식적으로 나를 따르고 있고 . . . " (1990년 8월 15일) 

 

7.  "너무나 많은 자녀들이 나의 피나는 간절한 호소를 거절한 채 붉은 용과 합세하므로, 나의 원수인 사탄은 오류를 환영하고, 도덕적인 이완을 초래하여, 모든 죄까지도 정당화시켜서 죄악 속에 살게 만든다." (1991년 3월 25일)

 

8.  "오류가 세상에 번져 암흑으로 덮쳐지는 이 시대에 신성한 진리를 담은 성서를 가까이 하여 복음적인 생활을 하며 . . . " (1991년 5월 16일)

 

9.  "오류에 물든 악과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이기주의와 욕정과 모든 죄악과 불결의 어두움 . . . " (1991년 12월 5일)

 

10.  "마귀들은 수많은 오류와 죄악들을 세상 여기저기에 퍼뜨리는데 누가 세상을 구하겠느냐." (예수님, 1993년 1월 26일)

 

11.  "수많은 자녀들이 오류에 빠져 악의 조류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려가고 있는 이 때에 짓밟히고 흩어진 양떼를 어서 내 곁으로 데려 오너라." (1994년 1월 21일)

 

12.  "이제는 세계적으로 나의 사제들에게서조차 오류가 선언되어 퍼져가고 복음 선교가 현대 사회에 받아들여지도록 거짓 예언자들에 의하여 문명과 쇄신을 가장한 불성실 속에서 선포되고 전해지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 아들 예수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1994년 11월 24일)

 

13.  "내 아들 예수와 또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폭풍우에 휘말려 이 엄청난 위험에 처한 수많은 자녀들이 오류에 빠져 불신앙으로 인하여 지금 교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전례도 규율도 뒤범벅이 되어, 많은 목자들까지도 그 혼란에 빠져 그들을 따르는 양들과 함께 지옥의 길로 향하고 있으니 지옥문은 그 영혼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활짝 열려 있다." (1995년 2월 2일)

 

14.  "길잃어 헤매는 양떼들을 돌보아야 할 많은 사제들은 진정한 믿음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으며 불신과 오류가 세상에 퍼져 세속주의에 빠져 있기에 그들은 예수의 부활 사건까지 망각해 버릴 때도 있다." (1995년 5월 9일)

 

15.  "오류의 맹렬한 회오리 바람은 치열하게 일고 있어 이단과 추문과 악표양이 교회 안에까지도 퍼져 가고 있다." (1996년 6월 30일)

 

성모님께서 오류의 해악에 대하여 이처럼 애타게 경고하시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신앙의 대상으로 계시하시어 당신의 교회에 맡기신 진리의 가르치심들이 온갖 오류들에 의하여 가리워지고 잘못 전해짐으로써 많은 신자들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에로 유혹하기 위하여 마귀가 사용한 무기는 바로 오류였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분명히 알려 주셨으나, 마귀는 그 열매를 먹으면 죽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허황된 오류를 우리 원조의 마음에 심어 주었다.  인간이 오류를 받아들이면 하느님의 말씀에 등을 돌리는 불충을 범하는 것이 되며, 인간은 그 불충 속에서 타락하여 결국 멸망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고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빛 안에 머물러야 한다.  아무 것이나 나의 뜻이나 취향대로 받아들이고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대로, 그 계시를 교회에서 설명하여 주시는대로 겸손되이 바로 배우고 실천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해 주신 초자연적인 계시 진리들을 우리의 머리로써 반드시 이해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인하여 그 진리들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이 필요하며, 이 신앙은 크리스챤적 생활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 즉 신덕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빛 안에서 우리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성장되는 것이다.  지금 많은 개개인 신자들과 교회 전반에 걸쳐서 신앙의 위기가 닥쳐 있다면, 이는 그러한 신앙의 토대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며 그 신앙이 잘 성장해 오지도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왜 신앙이 필요한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에게는 지성과 자유의지가 있어서, 참된 것과 그릇된 것을 구분하며,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고, 또한 그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물론 인간이 초자연적인 차원에서 분별을 하고 선택을 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지성과 자유의지 뿐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의 도우심이 필수적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지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들이 하느님께서 무한히 좋으심을 날로 더 깊이 깨닫고, 당신을 더욱더 사랑하며 당신의 뜻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고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무지 속에서, 타의에 의해서, 별로 내키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따른다는 것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대하여, 그분께서 알려 주신 진리들에 대하여 확실하게 배우고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좋으심을 모르면서 어떻게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길을 모르면서 어떻게 구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기초적인 교리를 배우고 성세를 받고 나면, 더 이상 배우려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성세를 받음으로써 구원에 대한 최종적인 보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성화의 삶, 그리고 주님을 이웃에게 증거하는 삶을 바야흐로 시작하는 것 뿐이다.  사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사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정성들여야 할 사업이 바로 구령 사업이다.  왜냐 하면, 다른 모든 사업들은 우리의 지상에서의 일시적인 필요와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구령 사업은 우리의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를 들어 의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의사가 된다든가, 건축학을 충분히 익히지 못한 채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한다든가, 항공기 조종술을 습득하지 못하고서 항공기를 조종한다든가 하는 것이 위험천만한 일임을 쉽게 수긍하면서도, 가장 어렵고도 중대한 구령 사업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제대로 몰라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무리일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우리가 머리로만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우리의 온 마음과 우리 생활 전체를 통한 매일 매일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하여 습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가르치심을 머리로 배워 익히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집착하며,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육신의 건강을 위하여 매일 필요한 영양분을 알맞게 잘 섭취해야 되듯이, 우리 영혼의 양식인 진리를 배움에 있어서도 우리 영혼을 멸망에로 인도하는 오류를 피하고 순수한 진리를 습득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꾸준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치심을 순수히 지키고, 그분께서 주신 계명들에 충실하는 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충성에 대한 가늠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톨릭 교리서와 성서 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치심을 충실히 실천하신 성인, 성녀들의 전기들과 저서들을 매일 읽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러 통로들을 통하여 수많은 정보들을 흡수하게 된다.  정확한 정보들뿐 아니라 온갖 오류들과 쓸데 없는 정보들도 함께 흡수하게 되어 우리의 마음은 산란해지고 신앙이 식어지기 쉽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이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지고 병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매일의 겸손된 기도와 묵상과 독서를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공기를 마시고 양분을 섭취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매일의 성찰과 반성 및 때때로의 고해 성사를 통하여 끈질긴 자아에의 집착과 싸워 이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오류의 핵심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핵심은 주님께서 가톨릭 교회에 계시 진리와 그 진리를 바로 가르칠 교도권을 위탁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누구나가 성서를 읽고 개인적으로 받는 영감을 따르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성서의 내용을 다르게 해석하여 수많은 교파들이 생기게 되었고, 그 중에서 누구의 주장이 주님의 뜻에 확실하게 부합된다고 단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1,500년 간의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 신앙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설명해 놓으신 수많은 교부들, 성인, 성녀들의 가르침들도 경원시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는 지나친 개인주의가 초래한 불행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절대적이고 완전무결한 진리에 우리가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되고, 진리 자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흐려지게 되었으며, 주님의 진리를 전적인 신뢰로써 받아들이는 신앙보다는 즉흥적인 종교적 감성이나 열광에로 치우치는 경향이 퍼지게 되었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근래에 와서 그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오류가 가톨릭 교회 안의 많은 신자들과 일부 성직자들 사이에까지도 잠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시 진리를 경시하는 풍조의 만연

 

특히 지난 30여년 간의 기간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고귀한 가르치심들을 아전인수격으로 이용함으로써 2천년 간의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진리들을 왜곡하고, 희석(稀釋)하고, 경시하는 풍조가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왔다.  그러나, 공의회에서는 전통적 교리들을 전혀 변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를 더 자세하고,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과거에 다소 경직되고 소극적인 자세들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보다 적극적이고 사랑에 찬 자세로써 구원의 진리를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힘차게 전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소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부르짖으며, 마치 전통적인 교리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아도 무방한 것처럼 말하고, 계명들과 교회법들에 대해서도 이완된 자세를 취하며, 진리를 수호하고 가르치는 교회의 교사(敎師)로서의 임무와 권위를 존중하기보다는 개인들의 의견과 자유를 더 중요시하는 풍조를 조성하여 왔으며, 이를 마치 교회를 전통의 구애(拘?)에서 벗어나 현 세계와 더 발맞추어 나갈 수 있게 하는, 말하자면 교회를 전보다 더 낫게 개혁하는 방안인 것처럼 선전하여 왔다.  교회가 신자들을 진리로써 양육하고 계명으로써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풍조에 적응하여 나아가려는 타협적인 모습을 보여 주어 온 것이다.  특히 현대주의 사상에 물든 일부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탈선된 사상들로써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의 유산을 허물고 대체하려는 일에 열중해 왔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과 신심이 메마르게 되었으며, 교회는 세상의 오류들과 악습들과 과감히 싸우기보다는 소극적이고 어느 정도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주님의 경고 말씀대로, 소금이 짠 맛을 잃고, 등불이 됫박 밑에 숨겨진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 위탁된 계시 진리의 의미가 가려지고, 교도권이 경시되는 풍조 하에서 “모든 종교들이 다 좋다,”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고 주님께서 명하신 선교의 필요성조차 망각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환생이나 믿고, 기수련 또는 그 밖의 동양 종교들에 매혹되며, 크리스챤 윤리관을 현시대에 맞지 않는 불편한 것으로 여기는 풍조 역시 가톨릭 정통 가르침에 충실하지 못하는 데에서 초래되는 영적인 빈곤과 병폐일 것이다. 

 

우리는 가톨릭 신앙의 전통에로 되돌아 가야 한다

 

우리는 이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만족할 때가 아니며, 교회가 참으로 세상의 악을 극복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더욱 충실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바로잡는 데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그 출발점은 바로 주님의 계시 진리에 대하여 다시 충실해지는 것이다.  2천년 간의 가톨릭 전통 가르침과 신심을 되찾는 것이다.  근본적인 잘못이 시정되면, 나머지의 과제들은 보다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물질 문명에 있어서는 새 것이 옛 것보다 더 낫고 발전된 것인 경우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까마득한” 2천년 전에 주신 가르치심이 현대에 와서 그 진실성이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님께서 주신 가톨릭 신앙은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확고한 신뢰심을 가져야 하며, 따라서 현대화를 논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토착화를 말하기 전에 정통 가톨릭 신앙의 뿌리에 대하여 진정으로 깊이있게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모쪼록 사목자들께서도 말씀과 글을 통하여 신자들을 인도하시고 양육하심에 있어서 확고하게 가톨릭의 전통 가르침에 뿌리를 두시고 그 가르치심을 순수하게 그리고 힘있게 전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신자들 개개인의 생활과 교회 안의 모든 것들은 정통 가톨릭 신앙과 사도좌의 인도하심에 비추어 항상 점검하고 반성해야 하며 정통 신앙과 정신에 맞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주님께 충실하는 길이며, 사도전래의 가톨릭 신앙을 제대로 수호하는 임무를 바로 수행하는 길이다.  그리고, 정통 신앙과 정신에 충실하고 도움이 되는 범위 안에서 지역적인 특성들도 살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중심을 잃고 변화를 따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가르치심과 뜻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지게 될 수 있으며,  스스로 충실한 신자임을 자부하면서도 성모님께서 거듭 경고하신대로 실상은 배교의 상황에까지 빠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주에서 주신 성모님의 메시지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자.

 

1.  "사랑하는 나의 사제들!  예수 성심과 불타는 내 성심의 복합적인 사랑을 내려 주리라고 말한 나의 원의를 잊지 말고 신뢰로써 일치된 온전한 사랑으로 강경하고 용감하게 너희에게 위탁된 신앙으로 나를 따르라." (1993년 5월 27일)

 

2.  "용기를 가지고, 너희에게 위탁된 신앙의 유산을 가지고, 불타는 나의 사랑의 메시지를 따라 더욱 겸손하게 교황과 일치하여라." (1997년 1월 18일)

 

3.  "하느님의 말씀으로 모든 이를 양육해야 하는 그들이 그들에게 위탁된 신앙의 유산을 간수하지 못한다면 마귀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1997년 8월 28일)

 

4.  "내 반대자인 사탄이 승리하기 위하여 많은 자녀들과 성직자들까지도 꾀어 이기주의와 세속주의에 타협하게 하고 마음의 문을 닫게 하니, 그들은 귀머거리에 눈먼 맹인이 되어 정통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배교의 풍조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표선처럼 흔들리고 있다." (1999년 5월 8일)

 

이 분도

2001년 3월 10일

 

 


한국 교회가 나주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들

 

 

나주에 관한 지금까지의 공식 문서들(주로 광주 대교구에서 발표한 공지문 및 서한들), 여러 성직자들 및 평신도들의 논문들, 세미나 내용, 인터넷 상의 토론들, 기타의 자료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해 볼 때 아래에 열거된 근본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나주의 일들이 부정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이유들이 계속 존재하는 한 지금 한국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사상과 나주의 메시지들 및 기적적인 징표들이 지향하는 바 사이에는 아무런 해결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한국 교회의 현황 하에서는 나주의 일들이 객관적으로 정당하게 조사되어 그 신빙성이 인정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며, 이를 또 바꾸어 말한다면, 한국 교회가 나주의 일들을 제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는 한국 교회 내의 신학 사상들이 근본적으로 수술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보여진다.

 

1.  성체성사에 관해서

 

성체성사에 관한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현재의 한국 교회 안에 풍미되고 있는 신학 사상 또는 정서와의 사이에는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내용을 살펴 보자. 

 

[제1374조]     성체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방식은 독특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모든 성사 위에 들어 높이시고 “영성생활의 완성과 모든 성사가 지향하는 목적으로” 삼으신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실제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결합되어 담겨 있으므로 그리스도 전체가 담겨 계신 것이다.”  “이 현존이 ‘실제적’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다른 현존 방식이 ‘비실제적’이라는 배타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현존이 탁월하게 실체적이라는 의미다.  즉, 그 현존으로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또 완전히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제1376조]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톨릭 신앙을 요약하여 선포한다.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내어 주시는 것은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이러한 확신을 지녀 왔으며 공의회는 이를 다시금 선포하는 바이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서 빵의 실체 전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변화라고 불러 왔다.”

 

즉, 성체와 성혈은 비록 외양은 빵과 포도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살아계신 주님의 참 살과 피이시라는 뜻이다.  우리의 육안에 빵과 포도주로 보이는 성체와 성혈을 참으로 주님의 살과 피라고 확실히 믿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이 필요하며, 우리의 이성을 스스로 속으실 수 없으시고 우리를 속이실 수도 없으신 주님께 맡겨 드리는 전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전선(全善)하시고 무한히 거룩하신, 사랑 자체이신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전적인 신앙과 신뢰와 사랑을 요구하신다.  지극히 당연하시고도 마땅하신 요구이시다.  “비록 저의 육안에는 빵과 포도주로 보이지만, 제가 가장 사랑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믿나이다,”라고 겸손되이 고백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거듭 쓸데없고 이질적(異質的)인 토를 다는 설들이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지금도 그러한 불신의 풍조가 심지어는 일부 성직자들사이에까지도 퍼져 있다.  그리고 비록 성체 관련 교리들을 잘못 믿거나 가르치지는 않더라도, 오류의 사상들을 명확하고도 단호하게 배격하고 경계하고 설명해 주는 목소리가 크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니, 나주에서 거듭 메시지들과 기적적인 징표들, 즉 이 시대를 위한 경고이며 전체 교회에 주시는 주님과 성모님의 뜻을 바로 받들지 못하고 함부로 “기이한 현상”이라느니, “개인신심”이라느니 하여 이를 폄하하려는 언사들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모쪼록 모든 신자들이 성체성사에 관한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에로 되돌아가 그 가르침들에 충실히 일치한다면 나주에서 주시는 성체성사 관련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들과 징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주님과 성모님께서 간절히 부탁하신대로 참된 성체도리와 신심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2.  성모신심에 관해서

 

인류 구원을 위한 성모님의 필수적인 역할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967조]      동정 마리아는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따르고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위하여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된다.  이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독특한 지체”가 되고, 교회의 전형이 된다.

 

[제968조]      그런데 교회와 온 인류에 대한 동정 마리아의 역할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마리아는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써 영혼들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구세주의 구세 사업에 비길 데 없는 협력을 해 드렸다.  이 때문에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었다.”

 

[제 969조]     “은총의 계획 안에서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였던 그 순간부터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없이 지속되었다)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은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을 위한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 준다. (...) 그 때문에 교회에서는 복된 동정녀를 변호자,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교회 역사 상 우리의 영적 親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깊은 사랑과 정성을 지니지 않았던 성인 성녀들은 한 분도 안 계셨다.  성 루이 드 몽포르께서도 주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듯이 우리는 마리아를 통하여 주님께로 가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교회는 평범한 하나의 사회집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족이며 왕국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신자들 모두를 지체로 하여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그 초자연적인 신비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며,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에 의하여 양육되며, 형제 자매들을 서로 사랑하며 도우는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적인 우선순위들을 앞세우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형식적이고 속빈 존경만을 말하며, 형제 자매들이 하느님께 충성하고 성모님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심과 양심을 힘으로 압박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지금 한국 교회에는 소위 갈려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빌미로 하여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교리들까지 변질시키고,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정통 가르침과 신심을 경시하는 풍조가 퍼져 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인간들의 비위를 맞춤으로써 일치하려고 한다면, 이는 정치 단체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며 하느님께는 불충을 저지르는 일이 될 것이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시면서 우리의 갈 길을 알려 주시고 호소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뜻을 냉정히 외면하고 경시하고 있는 것은 성모님께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정통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교황님의 수위권에 대해서

 

우선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내용을 살펴 보자.

 

[제881조]      주님께서는 당신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시몬 한 사람을 당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다.  주께서는 그에게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으며, 그를 양 무리 전체의 목자로 세우셨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맡겨진 맺고 푸는 권한은 단장과 결합된 사도단에도 수여된 것이 확실하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이러한 사목적 책무는 교회의 기초에 속하는 것이다.  이 책무는 교황의 수위권 아래서 주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제882조]      로마 주교이며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주교들의 일치와 많은 신도들의 일치를 유지시키는 항구하고 볼 수 있는 원천이며 기초이다.”  사실 “로마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직책 상으로 완전한 최상 전권을 가지며 언제나 자유로이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제883조]      “주교단은 그 단장인 로마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한의 주체이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이 권한의 주체가 결코 될 수 없으므로 로마 교황의 동의 없이는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서의 일부 신학자들과 젊은 사제들이 근년에 발표한 글들과 발언들을 살펴 보면, 한국 교회가 교황님을 따르고 일치해야 할 필요성보다는 지역 교회의 독립성을 더 강조하는 경우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들에는 한국 교회 내의 교계제도까지도 공격하고 부정하는 글들까지 발표되고 있다.  우리는 특히 교리와 전례, 신심, 교회법 등 교회의 핵심 사안들에 관하여 한국 교회가 로마와 전적으로 일치되기를 원하며, 그밖에 지역 내의 행정사안들이라든가 세부실천사안들에 대해서는 독립적인 결정이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이들 또한 항상 교황청과의 일치 및 순명의 정신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성체도리, 성모신심 등에 관해서 교황청의 가르침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한국형의 가르침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이는 이단이 될 것이며, 만일 성직자가 이단을 가르친다면 이는 교회법에 의한 징계의 대상이 될 것이다 (교회법 제1364조).  또 다른 예를 들면, 불교, 유교, 도교 등의 동양사상 안에도 포함되어 있는 부분적인 진리의 빛을 보고서 이를 귀중히 여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 사상과 전통에 분별없이 심취되어 그 오류들에까지 물들며, 전통 가톨릭 진리들과 신심들에 불충을 저지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불교 신자들이 수용하고 있는 윤회설 같은 것, 또 그 밖에 범신론, 뉴에이지, 진화론 같은 사상들의 오류를 분명히 밝히고 경고하여 이들이 신자들 사이에 퍼지는 것을 확실하게 막아야 할 것이다.  또, 지금까지 교황성하께서는 나주의 일들에 대하여 거듭 깊은 관심을 표시하시고, 교황청을 방문하신 한국 주교님들께 부탁까지 하셨으며, 나주의 율리아 자매님께는 성하의 비서이신 주교님까지 파견하시어 성하의 관심과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신 바 있으시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주교회의, 교구 및 본당 차원에서 이러한 교황님의 뜻을 이해하여 받들려고 하는 아무런 시도도 없었다.  교회의 반석이신 교황님을 진심으로 따르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가톨릭 교회의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와 일치하지 않고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고 하는가?

 

모쪼록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 및 평신도들은 성체성사 및 성모신심에 관한 교회의 정통 가르치심에 확고히 충실하며, 또한 교황성하께 깊은 사랑과 존경심으로써 일치하여 지존하신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주는 이를 이루기 위한 하늘로부터의 특별한 도우심이요 절호의 기회이다. 

 

이 분도

Mary's Touch By Mail

Gresham, Oregon, U. S. A.

2003년 8월 22일

Feast of the Queenship of Mary

 

 

성체성사는 나주에서의 메시지와 징표들의 핵심

 

 

캐나다에서 오신 주교님과 신부님께서 성체기적을 목격하시다

우크라니아 출신 주교님이시며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사목하고 계시는 로만 다닐랙 주교님께서는 1995년 9월 22일 오후 늦게 나주 부근의 성모님 산 위에서 미사를 드리셨는데 뜻밖에도 성체분배 도중에 성체기적을 목격하게 되셨다.  윤 율리아 자매가 주교님께로부터 방금 받아 모신 성체가 그녀의 혀 위에서 작은 심장 모양의 살아서 움직이며 피 흘리는 두꺼운 살덩어리로 변한 것을 주교님께서 보신 것이다.

 

캐나다로 돌아오신 후 주교님께서는 증언을 쓰셨는데 그 증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들이 그들의 육안으로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살아계신 심장을 보았다.  인류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그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번제(燔祭)로 바치신 바로 그 심장을 보았다." (나주 성모님께 관한 영문 증언집: Ad Jesum Per Mariam, 발행자: Mary's Touch By Mail, 2003)

 

캐나다로부터 다닐랙 주교님과 동행하여 오신 신학박사, 요셉 피터 핀 신부님께서도 미사를 공동집전하고 계셨는데 율리아 자매를 통한 그 성체기적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으셨다.  캐나다로 돌아오신 후 신부님께서는 “살아계신 현존”이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나주에서의 놀라운 경험에 대한 증언을 쓰셨다.  다음은 그 책으로부터의 발췌이다:

 

"신빙성있는 교회 당국의 견해에 의하면, 서유럽 전체에 걸쳐서 가톨릭 신앙과 특히 성체성사에 계신 주님께 대한 사랑과 흠숭이 사라지고 있다.  이곳 캐나다의 많은 가톨릭 가정들에서도 주일 미사가 더 이상 한 주간의 영적인 정점(頂點)이 되지 못하고 있다.  온타리오 주에서는 가톨릭 고등학교에 등록된 성세 받은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홀로 또는 그들의 가족과 함께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성체성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삶 안에서 중요한 자리에 모셔지지 않고 계신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개탄하신대로 많은 이들이 죄의식을 상실하여 더 이상 진실된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 있으니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서 얼마나 많은 모령성체(冒領聖體)가 범해지고 있는 것일까?" (The Reality of the Living Presence, 발행자: Ave Maria Centre, Toronto, Canada, 1996, Imprimatur by Bishop Roman Danylak)

 

필리핀에서 온 순례자들도 성체기적을 목격하다

 

필리핀 마닐라의 제리 오르보스 신부님께서 인솔하시는 순례단은 1991년 5월 16일 나주 성당에서의 미사 중에 율리아 자매를 통한 성체기적을 목격하게 되었다.  율리아 자매의 입 안에서 성체가 살과 피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신 후 오르보스 신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주님,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  너무나 자주 무관심하게 영성체에 임해 온 우리 모두를 용서하여 주소서..."

 

신부님과 다른 순례자들은 오랫동안 감실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으며, 그 중에는 흐느껴 우는 이들도 있었다.  그로부터 약 3년 후 (1994년 9월 24일) 나주를 다시 방문하신 오르보스 신부님과 필리핀의 순례자들은 다시 나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율리아 자매를 통한 또 한 번의 성체기적을 목격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성체신심이 약화된 원인은 교회 안에 유포된 현대주의

 

지극한 경외심을 일으키며 무한한 존귀함과 거룩함을 지니신 성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간 거의 전 세계에 걸쳐서 성체께 대한 신심이 부식(腐蝕)되어 왔다.  가장 영예스럽고 존귀한 경험인 영성체는 자주 피상적인 신심에 토대를 둔 습관적인 행위로 변해 버렸으며, 때로는 독성죄를 범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널리 퍼진 이 성체신심의 약화에 대한 근본 원인은 많은 이들이 성체성사에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이러한 신앙의 상실은 대체로 교회일치 운동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왜곡되게 유포해 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공의회의 교부들께서는 이러한 위험을 미리 우려하시고 다음과 같이 명백히 경고하셨다: "가톨릭 교리의 순수성을 해치고 그 교리의 진정하고도 확정적인 의미를 흐리게 하는 거짓 평화주의처럼 교회일치의 정신에 더 부합되지 않는 것은 없다." (공의회 헌장 Unitatis Redintegratio, 1964년 11월 21일).

 

이러한 염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진보주의적인 신학자들은 갈라진 형제들과의 화해에 대한 공의회의 강조를 (1) 전통적인 교회 가르침들을 희석시키고, (2) 그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키며, (3) 화해를 추구한다는 명목 하에 교회의 정통 가르침들을 더 이상 열심히 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그들 자신의 일정(agenda)을 추진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교회 안의 이러한 진보적인 세력들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가르치심을 양보하면서까지 일치를 위한 일치를 주창해 왔는데,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성한 가르치심들은 인간들의 편리나 취향, 그 외의 어떤 이유나 핑계로서 변경할 수 있는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 내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악을 시정하고 정통 가톨릭 신앙의 찬란함과 순수함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교회 안에서 성취되어야 할 가장 시급하고도 중대한 과제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절정이다.  다른 성사들과 교회직무와 사도직 활동은 모두 성체성사와 연결되고 성체성사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가톨릭교회 교리서 #1324) 성체성사께 대한 경시와 무관심 및 모독이 현재 교회에 닥친 신앙 및 도덕적 위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성체성사에 대한 참된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교회와 세계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진정한 쇄신에의 관건(關鍵)인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독생 성자의 강생을 성모님을 통하여 성취하셨으며, 교회의 완성 및 악에 대한 승리 역시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고저 하시므로 (창세기 3:13 및 성 루이 드 몽포르의 복되신 동정녀께의 참된 신심, #50), 성체신심의 강화는 성모신심의 회복 및 강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 두 신심이 동시에 쇠퇴되어 온 것은 우연의 일이 아니었으며, 그 두 신심의 회복 역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주님께서 윤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주신 성체 관련 메시지

 

"성체의 신비 속에 나의 실제적이고 위격적이고 육체적인 현존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무한한 사랑과 겸손, 무한한 능력과 지혜의 신비체인 성체는 바로 살아있는 나의 현존이기에 모두가 그대로 믿도록 하기 위하여 몇 번이나 피와 살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건만. . .   만일 어떤 사제가 교회 안에서 나의 이 위격적인 현존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공동구속자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참 하느님이요, 참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 나를 무시하는 그 결과를 본다면 공공연하게 나의 인성은 인정하고 천주성은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바로 선과 악에 대한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에 대한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1995년 7월 1일 새벽, 나주의 경당에서의 철야기도회 중에 일곱 성체가 내려오신 후에 주신 메시지)

 

성모님께서 윤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주신 성체 관련 메시지

 

"십자가를 통해서 가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사제들을 통하여 너희와 함께 하시고자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사랑의 기적을 행하고자 하시는 그 놀라운 성체의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성체 즉 주님을 더욱 소중하게 모시기 위하여 고해성사를 자주 보고 너희의 마음을 활짝 열어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하여 주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궁전이 되게 하고, 주님을 모시는 감실이 되도록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면 주님은 부족한 너희 안에서 생활하시며 사랑의 불을 놓아 주실 것이다."  (1991년 4월 21일, 율리아가 이 세상에 대한 대징벌과 이어서 성모님의 승리를 환시로 본 후에 주신 메시지)

 

"성체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의 주역인데도 이미 수많은 자녀들로부터 모독과 모욕과 능욕을 받으며 짓밟히고 있으니, 어서 내 사랑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더욱 강하게 전해져 성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의 새로운 성령 강림의 때를 단축시켜 맞이해야 한다." (1994년 11월 24일, 교황대사님의 방문 시 기적적으로 성체가 경당에 임하신 후에 주신 메시지)

 

"미사의 중요성과 고해성사의 중요성 그리고 성체성사의 신비를 모르는 세상 자녀들에게 어서 알려 최후 만찬의 빠스카와 부활의 빠스카 신비의 선물을 영속시켜라.  오늘 보여준 성체의 변화는 세상의 모든 죄악을 그의 성스러운 피로 씻어주기 위하여 갈바리아와 골고타에서 완성하셨기에 지금까지도 되풀이되는 성체성사의 희생을 통해 너희에게 오신 것임을 증명해 주기 위함이다.

 

목이 터져라고 외치는 내 사랑의 메시지를 체면과 이목 때문에 오류를 보면서도 진리를 옹호하지 않고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거나 뒷전에서 바라보는 성직자들이 얼마나 많으냐.

 

미사 성제 안에 항상 함께 하시며 수혈자로 오신 그분의 성스러운 현존을 모든 이에게 알려 영혼의 추한 때를 씻도록 도와드리고 영원한 흠숭과 찬미를 드리도록 하여라." (1995년 10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바티칸의 소성당에서 율리아 자매를 통한 성체기적을 목격하신 후에 주신 메시지)

 

성체성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트리엔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톨릭 신앙을 요약하여 선포한다.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내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이러한 확신을 지녀왔으며 공의회는 이를 다시금 선포하는 바이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써 빵의 실체 전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변화라고 불러왔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376)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신성과 함께 그분의 몸과 피, 즉 그리스도의 전체가 참으로, 실제로 그리고 실제적(實體的)으로 계심을 부인하며,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하나의 징표나 표상(表象) 또는 능력으로 계신다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리엔트 공의회, 제13차 회기, 1551년 10월, DS #1651)

 

"만일 누구든지 공경하올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각 외형 하에서와, 그 외형이 분리될 때 각 외형의 각 부분 하에서 그리스도 전체께서 계심을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리엔트 공의회 제13차 회기, 1551년 10월, DS #1653)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현존이며 그 공동체의 영적 양식인 성체성사는 교회가 역사를 통해 가는 여정에서 가장 귀중한 소유물이다. . . 교회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성체성사를 그저 많은 선물들 중의 하나로서 (아무리 귀할지라도) 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유일무이한 선물로 받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주시는 선물이시며, 거룩한 신성을 입으신 당신 인격체를 주시는 선물이시며, 당신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役事)를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회와 성체, 2003년 4월 17일)

 

성체성사에서의 주님의 현존은 “완전하며 전적(全的)인 현존”
(가톨릭교회 교리서 #137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全能)하심, 전지(全知)하심, 전선(全善)하심을 통하여 그리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들의 제 1원인이 되심을 통하여 우주 안의 모든 곳에 현존하신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신자들의 영혼 안에 초자연적인 은총 즉 당신의 신적 생명과 성령의 빛을 통하여 현존하시며, 교회 안의 교계제도와 성사들과 가르치심 그리고 기타의 사목활동을 통하여서도 초자연적인 현존과 활동을 유지하신다. 

 

그러나 성체성사에서의 주님의 현존은 유일무이하게 탁월하니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이 성사 안에 전적이며 실체적인 방식 즉 당신의 몸과 피로서 영혼과 신성을 함께 지니시고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374 참조).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으시고 죽으셨으며 사흘 만에 인류의 죄악과 죽음과 모든 악들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신 살아계신 우리 주님께서 성체성사 안에 전적으로 현존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성체께 아무런 제한 없는 흠숭지례(欽崇之禮)를 바쳐드리는 것이다. 

 

성체는 비록 외적으로는 빵과 포도주의 모양을 지니고 있으나 실제로는 전적으로 참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을 취하신 분, 즉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주 성삼위께서는 동일한 천주성을 공유(共有)하심으로써 완전히 일치되어 계시니 우리가 영성체를 통하여 천주성부와 천주성령과도 일치하게 되며, 또 당신의 아드님께 어머니로서 그리고 보조자로서 항상 일치되어 함께 하시는 성모님과도 밀접하게 일치하게 되는 것이며, 더불어 하느님의 가정과 왕국에 속하는 모든 자녀들 즉 천국의 모든 성인들과 천사들, 연옥 영혼들 및 지상의 교회에 속한 형제자매들과의 일치와 화합 또한 증진되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현실이 빵과 포도주의 외형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이다. 

 

2천년 전에 많은 이들이 신앙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참된 신앙의 부족 때문에 성체성사 안에 계신 우리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참된 신앙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선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왜 당신을 빵과 포도주의 형상 뒤에 감추시는 것인가? 

 

그 이유는 이 지극한 거룩함과 위엄을 지니신 선물 즉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 우리가 당신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진정한 마음과 자세를 짚고 넘어가시기 위하여 잠시 당신 본연의 영광과 위엄을 빵과 포도주의 초라한 외형 뒤에 가리시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영광과 위엄을 그대로 드러내신다면 많은 이들이 순수한 믿음과 사랑보다는 이기심과 허영심의 동기로 인하여 주님께 접근하는 일이 허다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앙과 사랑이 없다면, 성체를 모실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 성체를 모신다면 주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성체를 모시기 위하여 필요한 "신앙"이란 우리가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정통 교리들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것과 또한 우리가 성세를 받은 교회의 일원일 것임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뜻하는 "사랑"이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대죄 상태에 있지 않음을 뜻한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대죄 상태에 있지 않을 때에라도 항상 겸손하며 통회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필요하며 특히 영성체에 임할 때에 그러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매일의 생활에서 소죄들까지 완전히 피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며, 설사 우리가 죄를 범한 것이 의식되지 않을 때라도 무한히 거룩하신 하느님 대전에서는 부족함과 죄스러움 투성이이기 때문이며, 또 우리가 성체성사에 초대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들을 사해 주시기 위하여 수난하시고 죽으신 주님의 공로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한 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강한 자들을 그들의 권좌로부터 내치시고 겸손한 자들을 들어올리셨도다.  굶주린 자들을 좋은 것들로 채워 주셨으며, 부유한 자들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도다." (루까 1:52-53)라고 성모님께서 성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어 노래하신 것처럼, 만일 우리의 마음에 자만심, 분노, 물욕, 음욕, 부정직, 불신앙, 불의와의 타협, 기타 자신이나 세속에의 집착들이 들어 있다면 성체를 모심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지탱되는 신앙과 사랑을 지녔다면 빵과 포도주의 외형이라고 하는 외적 장애를 극복하고 성체가 바로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 엄위하신 주님이심을 인식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목적은 우리가 주님과 내적으로 일치되는 것이며 주님께 흠숭과 사랑을 드리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391 참조).  이러한 하느님과의 일치와 그분께의 흠숭은 우리 각자가 달성해야 할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되며 우리의 궁극적 행복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  우리와의 친밀한 일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신적 생명으로써 양육하시며 강화하여 주신다.  그리고 온 세상에 당신의 진리와 사랑을 용감하게 전파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여 주신다.

 

"가톨릭교회는 항상 성체성사에 대하여 미사성제에서 뿐만 아니라 미사 이외에서도 흠숭지례(欽崇之禮: latria)를 바쳐왔고 또 바치고 있다.  그리하여 축성된 면병을 지극한 정성으로 보존해 왔으며, 신자들이 장엄하게 공경할 수 있도록 현시해 왔고 성체행렬을 해 왔다."  (교황 바오로 6세, 신앙의 신비, 1965)

 

성체의 아주 작은 한 조각에도, 성혈의 아주 작은 한 방울에도 현존하시는 주님
(위에 언급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 DS #1653 참조)

 

"프랑스 리지외의 소화 테레사 성녀가 한 번은 미사가 끝난 후에 성반(聖盤) 위에 아직 남아 있는 작은 성체조각 하나를 보았는데, 즉시 수련자들을 불러서 천사적인 우아함과 공손한 태도로 성반 위의 성체를 모시고 함께 제의실 안으로 행렬하여 들어갔다. 

 

그리고 테레사 마가렛 성녀는 제대 부근의 마루 위에 작은 성체조각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대한 불경을 생각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사제가 와서 성체를 감실로 모실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성 비오 신부님의 제자이신 스테파노 마넬리 신부님께서 쓰신 성체성사의 예수님 사랑, 한국어판 발행자: 가톨릭출판사 2000)

 

이 분도

2004년 7월 28일

오레곤 주 그레샴 시

 

 


크리스챤 신앙의 초자연성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기적의 징표들로써 당신의 신성(神性)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셨으나, 많은 이들은 외적으로 보이는 그분의 인성(人性) 뒤에 감추어진 이 엄청난 초자연적인 현실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신앙이 결핍된 그들의 눈에 예수께서는 단지 나자렛으로부터의 무명의 목수에 불과하셨으며, 기껏해야 예언자들 중의 한 분으로 인식되실 뿐이었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한 10:30)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돌을 집어 들고 그를 쳐 죽이려 하였다 (요한 10:31).

 

또 한 편으로는,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당신의 인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오로지 하느님이셨으며 단지 인간처럼 보이셨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크리스챤 공동체들을 이러한 오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편지에 쓰셨다:  “하느님의 영(靈)을 분별하는 방법은 이러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肉化)되어 오셨음을 인정하는 모든 영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요한1서 4: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주성자로서 인성을 취하신 분이시니,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니고 계신다.  이 두 가지의 본성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혼합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두 본성이 각각 온전(穩全)히 그러나 실제로 한 분의 천주성자 위격(位格) 안에 결합되어 계시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64-469 참조).  그리스도는 신성을 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참 하느님이신 것이다.  비록 강생하여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분의 인격체, 즉 주체(主體)는 여전히 천주성자 한 분의 인격체이시다.  동시에 우리는 그분께서 취하신 인성이 마치 우리가 옷을 걸쳐 입는 것처럼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참 인간으로서의 본성이 그분의 신성과 결합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죄만 빼고는 우리와 같으신 인간성을 지니셨으며 (히브리 4:15) 따라서 우리의 참 형제이시며, 인류를 참으로 대표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실제로 고통과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보속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신대로 (마테오 28:20)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교회 안에 현존하심 역시 신적이며 인간적인 현존, 즉 초자연적인 동시에 가시적인 현존이심이 당연하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우리 가운데에서의 그분의 현존이 단지 영적일 뿐이며, 그분의 완전한 현존은 당신께서 재림하신 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으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며, 천주성자 즉 참 하느님이며 동시에 수난을 거쳐서 부활하신 육신을 지니신 참 인간이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약(新約)의 시대는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실제로 함께 거하시는” 시대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당신의 신비체로 설립하신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현존 및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내적이며 초자연적인 현실과 동시에 교계제도, 수도회, 평신도, 성사들, 예절, 교리, 성서, 교회법, 교회음악, 건축과 미술, 교육 및 자선 활동 등의 외적으로 볼 수 있는 현실을 함께 지니고 있다.  두 가지가 다 교회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이며, 이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서 신성과 인간성을 함께 지니고 계심에 의거한 당연한 이치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챤으로서의 우리 각자의 삶 역시 내적인 초자연의 현실과 가시적인 외적 현실이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내적인 초자연의 현실이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어 가는 고차적이며 주도적인 원리와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며, 외적인 자연적 현실은 그 초자연적인 원리와 목적을 지상에서 현실화하고 추구하는 필수적인 수단이며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챤들의 삶은 외적으로 보아서는 다른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수 있으나, 그들의 내적 삶은 천주성령에 의해서 생명력을 얻고 인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자연적인 삶 또한 초자연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져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부합되게 변화되고 성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을 충실히 따른다면 우리 생활의 가장 사소한 것들까지도 초자연적이며 영원한 가치와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며, 이는 이미 수많은 성인들의 삶에서 뚜렷이 실현된 사실이다.

 

에페소 공의회에서의 진리의 승리

 

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總主敎)였던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께 두 인격체와 두 본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즉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와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구별하여 인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두 분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주장에 따르면,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는 인간이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뿐이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지는 않으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오류의 의견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교회는 431년에 에페소에서의 공의회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단죄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천주성자 한 분의 인격체 안에 신성 및 인성이 결합되신 분이시라고 하는 진리를 재확인하였다.  예수께서 두 인격체를 지니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천주성자께서 우리 인간 세계에 참으로 육화되어 들어오셨다는 사실 즉 천주성자의 강생도리를 부정함에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신적이며 초자연적인 현실이 이 세상 안에 실제로 존재하며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되며, 천주성자 강생의 징표들로서 나타나는 기적들 또한 배척하거나 경시하게 된다.  그러한 주장은 천주성자 한 분의 인격체 안에 신성과 인성이 참으로 결합하여 계심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당신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니시고 지속적으로 교회 안에 실제로 그리고 전적으로 현존하신다는 가르침과 화합될 수 없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신성과 함께 현존하시는 성체성사의 현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도록 그들의 마음속에 선입견을 주입시키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인들, 심지어는 일부 가톨릭 신자들까지도,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를 거부 내지 주저하며, 단지 “(인간이신) 예수의 어머니”라고만 부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천주성자께서 우리 가운데 참으로 강생하셨고 그 강생의 현실이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천주성자께서 강생하심으로써 동정녀 마리아의 참 아드님이 되셨으며 우리의 참 형제가 되셨다는 사실을 얼버무리고 있다.  그것은 크리스챤 신앙의 기본 토대를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다.

 

천주성자 한 분의 인격체 안에 당신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심(Hypostatic Union)에 대한 불신은 초자연에 대한 감성(感性)의 상실을 초래한다

 

천주성자 한 분의 인격체 안에 당신의 신성과 인성이 참으로 결합되어 계심을 확실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역사상의 예수는 한 인간에 불과하며, 반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는 신성을 지니신 분으로 인식되고 있다 (참조: 가톨릭교리 기본, 루드비히 옷트 박사 저).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당신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니시고 교회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며, 교회를 통하여 교회의 구성원들을 도구로 삼아 인류구원사업을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개념이 상당히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교회 안에 널리 퍼져있는 이러한 진보적이며 현대주의적 사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 걸쳐서 교회 안의 모든 것: 성체성사, 다른 성사들, 성모님, 다른 성인들, 천사들, 예절, 음악, 건축 및 교회의 가르침 등의 초자연적 내용에 대한 신자들의 감성이 둔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많은 성당들 안의 분위기가 마치 개신교의 예배당과 비슷하게 되어 교회 안의 신적 현존에 걸맞으며 교회역사 전반에 걸쳐서 가톨릭 예절과 신심에 깊이 배어 있던 천상적인 거룩함, 아름다움 및 장엄함이 결여되어 있다.  어떤 때에는 성당이 하느님께 흠숭과 기도를 드리는 곳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잡념들과 소음들로 가득한 사교(社交) 장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가 신적 현존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켜내지 못한다면, “흠숭” 또는 “예배”는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초자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다면 크리스챤 신앙과 가르침 역시 피상적으로만 인식될 것이다.  크리스챤들은 이제 주님의 자비를 빌면서 감실 안에 참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신 주님 앞에 겸손되이 무릎꿇고 흠숭드리며 기도드리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목적을 부여하셨다" (신덕도리, 가톨릭교리 기본, 루드비히 옷트 박사)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지복직관(至福直觀) 즉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것이다.  인간들이 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며 인간들에게는 초자연적인 행복으로 채워준다" (가톨릭교리 기본, 루드비히 옷트 박사). 

 

우리가 초자연적인 목적에로 불리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서의 삶 후에 하느님의 영원한 왕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에 의해서 지탱되고 동기(動機)되는 삶을 살기 시작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우리 생의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서 추구하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이며 충실한 종으로서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영적 교통을 유지해야 하며 또 교회의 성사들을 통한 은총에 의지하여 죄를 씻고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자연적 차원의 삶이 초자연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포도나무에 속한 가지가 포도나무의 생명력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무엇에 의지하여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삶의 초자연적인 면과 자연적인 면은 따로 분리되어 있거나 그냥 외적으로만 합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이 초자연인 생명과 내적으로 결합하여 초자연의 차원으로 들어올려지고 변화되어 성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참된 목적이며,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어야 하는 우리의 과제이다.  하느님께로부터의 은총을 통한 우리 삶의 초자연화는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아름답고 귀하게 완성시켜 주며 성화시켜 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추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무한히 선하심과 정의로우심이 우리의 영혼 안에 반영되고 배어들어 우리의 삶이 도덕적으로 성숙되는 것이 바로 우리 생활의 초자연화가 구현(具現)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초자연은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  초자연은 단지 외적으로 자연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존재 자체와 능력에 배어든다.  그리고 피조물의 차원 안에서나 또는 존재와 활동을 신적 차원에로 들어 올려서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  교부(敎父)들과 신학자들은 초자연을 쇠덩이를 붉게 달아오르게 하는 불에 비교하거나, 가지를 다른 나무에 접목하는 것에 비교하였다." (가톨릭교리 기본, 루드비히 옷트 박사) 

 

"그리스도의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죄에서 치유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당신의 무상(無償) 생명이다.  이 은총은 세례로써 받는 성화(聖化)은총 또는 신화(神化)은총이다.  이 은총은 우리 안에서 성화활동의 샘이 된다. . . 성화은총은 하느님과 함께 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영혼 자체를 완전하게 하는 상존(常存)은총이며, 지속적이고 초자연적인 성향(性向)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999 & 2000)

 

아담과 에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과 그 자손들이 그들의 초자연적인 목적, 즉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달성할 수 있는 문이 닫혀 버렸다.  그러나 구세주의 수난과 죽으심에 의한 무한하신 보속 공로에 의하여 인간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되찾게 되었다.  우리는 이 지극히 중요한 사실에 대하여, 아마도 눈앞에 닥쳐 있는 이 세상의 급한 일들 때문에, 거의 습관적으로 경시하고 망각하면서 살게 되기가 쉬운 것 같다.  이 세상의 많은 일들도 우리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일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와 영광을 드리며 동시에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는 보다 중요한 맥락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모든 좋은 것들의 진정한 원천이시며, 그분께서만 우리의 전적인 사랑과 봉사와 감사를 받기에 마땅하신 분이시며, 또 오로지 그분과의 일치를 통해서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인간 또는 어떤 사물이 하느님보다 더 중요하게 또는 동등하게 여겨진다면 그 인간이나 사물은 우상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의 초자연적 목적에 봉사하도록 종속시킴으로써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차원으로 들어올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명성과 업적을 남긴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물거품같은 허무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세상의 수많은 음악 작품들 중에서도 슈베르트나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우리의 영혼을 성모님께로 향하게 하며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향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초자연에로 이끌어 주는 불멸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미술 작품들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의 조각, 삐에타는 우리들 마음에 크리스챤 신앙의 중심인 주님의 수난과 그 수난에 성모님께서 동참하심을 상기시켜 주는 귀중한 역할을 한다.  반면, 성탄절의 본래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점증하는 세속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퇴색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궁핍해지고 있음을 뜻할 것이다.

 

우리가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초자연적인 열매들을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의 가르치심(마테오 22:37-39)대로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사랑과 이에 기초를 둔 이웃에 대한 사랑에 의해 동기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선순위를 바로잡아 하느님의 뜻을 가장 중하게 추구할 때 자연적인 축복까지 풍부히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음으로 주시리라.”  (마테오 6:33).

 

구원(救援)이란 우리의 성화(聖化) 즉 우리의 초자연적 목적이 달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16세기의 마르틴 루터와 그를 따르던 이들은,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공로가 귀속(歸屬)되어 그들이 의인(義人)으로 간주됨으로써 구원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구원의 개념은 죄인의 내적 변화, 즉 성화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 하에서는 특별히 시성(諡聖)된 성인(聖人)이라는 개념도 있을 수 없으며,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도 수많은 죄인들과 믿는 이들 중의 한 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영혼의 실질적인 성화 즉 초자연화가 없이도 단지 신앙에 의해서 구원이 보장되므로 구태여 힘들게 보속(補贖)을 할 필요도 없고 사후에 연옥이라고 하는 정화(淨化)의 장소를 거칠 필요도 없게 된다.  루터는 심지어 인간의 본성이 돌이킬 수 없도록 부패하였기 때문에 성화가 가능하지도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원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신앙에서만 온다고 믿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신앙행위 안에 성모님이나 다른 성인들, 천사들과의 역할이 들어설 자리는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믿지 마리아를 믿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개혁자들의 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공로에 우리 자신들을 포함한 그 누구도 아무런 보탬을 할 수 없으며, 또한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어 주님의 교회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주님의 왕국과 가족이라고 하는 영적 차원에서의 사회성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 자유의지는 인간의 범죄로써 많이 약해져 있기는 하지만, 진리와 오류, 그리고 선과 악 사이를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회의 범죄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을 것이고, 또 죄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게 될 것이다.  판단과 선택의 능력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선이나 죄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우리의 지성이 어두워져 있고 자유의지가 약해져 있다고는 하나 기능이 정지된 것은 아니며, 꾸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길러질 수 있고, 특히 기도와 성사를 통한 하느님께로부터의 은총에 힘입어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는 초자연적인 덕들을 양성할 수 있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신앙을 고백하며, 성세를 받음으로써 신앙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원을 향한 삶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5세기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를 그대 없이 창조하신 이께서는 그대 없이 그대를 의화(義化)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대가 알지 못하는 중에 그대를 창조하셨으나, 오직 그대의 동의와 원함이 있어야만 그대를 의화하실 것이다,”  (설교집 169, II, 13).  성 바오로 사도께서도 수차에 걸쳐서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구원된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추구하는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기본 바탕이 되는 살아있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 성 야고보 사도께서도 누차에 걸쳐 강조하셨으며 (야고보 1:22; 2:20; 2:24; 2:26), 성 바오로 사도께서도 거듭 강조하셨다: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라,” (코린토 전 10:12); “하느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성화이니라,” (데살로니카 전 4:3); 또 성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통하여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님을 언급하셨으나, 사도께서 말씀하신 “율법”은 구약시대 유대교의 할례를 포함한 복잡하고도 염격한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그 유대교의 율법들이 더 이상 구속력을 지니지 않음을 강조하신 것뿐이다.  사도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거나, 우리의 양심에 쓰인 자연법들 및 사회의 정당한 법들과 규칙들을 지키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며, 구원을 위한 성화의 필요성을 부정하신 것도 아님은 물론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법이나 예언자들을 폐지하려고 왔다고 생각지 말라.  내가 이를 폐지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노라,” (마테오 5:17).  “너희가 만일 나의 계명들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될 것이다,” (요한 15:10).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포도나무의 줄기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요한 15:1-5).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줄기로부터 생명력과 영양분을 받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이웃들의 구원을 위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은 주님과의 일치 안에 머물러 주님의 가르치심과 은총들을 지속적으로 받음에 의해서 가능하다.  물론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니, 신적 은총의 도우심에 협력하고 않고는 우리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많은 실패와 부족함을 발견하고 놀랄 필요가 없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도 이미 자동적으로 구원이 완성되거나 보장된 것이 아니라 만일 그들이 자유의지를 남용하고 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언제라도 실족(失足)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닌 채 하루하루의 삶을 힘들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떨면서 너희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하라," (필립보 2:12).

 

우리가 구원을 향하여 가는 길은 힘이 드는 길이다.  이는 우리가 아직 자기본위의 아집들을 가지고 있고, 세상의 유혹들이 있으며, 마귀의 함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목표는 높기만 하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게 되어라,” (마테오 5:48)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들로부터 완전히 정화되고 성화되어 하느님의 왕국에 들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심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완전하게 될 수가 있는가?  자연적인 방법들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완전함의 가능성을 상상하기에조차 우리는 너무나 나약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간들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마테오 19:26).  교회에 수천 명의 시성된 성인 성녀들이 계신다는 사실은 성성(聖性)의 성취가 가능하다는 데 대한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또 이 세상에서 못 다한 정화(淨化)를 연옥에서 마저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완전히 성화되어 천국에 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연옥에 대하여 성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이들의 업적은 불에 의해서 그 업적이 어떤 것인지 검증될 것이다.  만일 누가 쌓아올린 업적이 남게 되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다.  어떤 이의 업적이 타버린다면, 그는 손해를 보겠지만, 그 자신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다만 불을 거쳐서 가듯 할 것이다,” (코린토 전 3:13-15).  

 

우리의 구원이 믿음만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하는 개혁자들의 주장은 주님의 가르침이나 사도들의 신앙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는 지극히 중요한 사안으로서, 교회와 교회 안에서의 크리스챤의 삶 (성체성사, 성모님, 교도권, 다른 모든 성사들, 시도, 보속, 성인들, 연옥, 기도 등을 포함한) 전체에 대한 크리스챤의 도리들이 우리의 구원이 과연 믿음만으로 성취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신적 은총들에 끊임없이 협력함을 통한 성화를 통해서 성취되는가 하는 데에 달려 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이들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마테오 7:21)라고 하셨다.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으며. . . " (사도신경)

 

포도나무의 가지들이 줄기로부터 생명력과 영양분을 받듯이 교회의 구성원들은 주님께로부터 필요한 다양하고 풍성한 은총들을 받는다.  뿐 아니라, 그들은 다른 구성원들과도 서로를 위한 기도, 가르침, 충고, 격려, 희생 등을 통하여 갖가지 도움을 주고 받게 된다.  반면, 어느 한 구성원이 죄를 범하여 영적으로 병들게 되면, 교회 전체에 손해와 아픔을 끼치게 된다.  구원의 역사(役事)는 개인의 차원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테오 6:9)께 기도드릴 것을 가르치셨다.  이는 우리가 개별적인 인격체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우리 자신들의 구원을 추구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가족이며 왕국인 교회를 튼튼하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이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 먼저 탄원과 기도와 중재(仲裁)와 감사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바쳐지기를 바라노라,” (티모데오 전 2:1)고 하셨고, 성 야고보 사도도 “너희들이 구원될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왜냐하면 의로운 이의 지속적인 기도는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야고보 5:16)라고 하셨다.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또한 우리가 받는 고통들이 교회를 위하여 구속적(救贖的)인 가치를 지닌다고 하셨다: “지금 나는 너희를 위하여 고통받으며, 그분의 몸, 즉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수난하심에 결핍된 것을 내가 육신(의 고통)으로써 채움에 대하여 기뻐하노라,” (콜로사이 1:24).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가 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부족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 신비체의 머리로서 이미 성취하신 것을 그 신비체의 지체들이 또한 성취함으로써 전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완성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교황 클레멘스 6세께서도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가치는 (그 피가) 말씀(즉 천주성자)께 결합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그 작은 한 방울만이라도 온 인류를 구속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셨다 (Unigenitus Dei Filius, 1343).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수난공로를 단지 죄인들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그들을 의인시(義人視)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수난공로로부터 흘러오는 은총에 의거해서 실제로 내적으로 성화되며, 우리의 노력과 희생을 통하여 당신의 인류구원 사업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기를 원하는 이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라야 한다,”(마테오 16:24)고 하셨다.   이 점에 관하여 교회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의 최상의 주인이시다.  그러나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 피조물들의 협력도 이용하신다.  이는 무능력의 표징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의 표징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단순히 실존하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근원이 되며, 이로써 하느님 계획의 실현에 협력하는 품위도 주셨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30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선(全善)하심으로 인하여 인간들에게 지성과 자유의지를 부여하시어 그들이 자유로이 하느님께서 무한히 선하시며, 정의로우시고, 사랑 자체이심을 깨닫고 자유로이 그분을 영원히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김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서 그들도 구원될 수 있도록 섭리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공동구속자(共同救贖者)들로 부르심 받아 있는 것이니, 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 즉 교회가 성장하고 완성되는 데에 실질적인 공헌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것이다.  교회는 지상에서 아직 전투하고 있는 교회뿐만이 아니라 이미 천국으로 승리하여 입성한 교회와 아직 연옥에서 정화의 고통을 거치고 있는 교회까지 포함하므로, 성인들의 통공은 지상과 천국과 연옥의 모든 크리스챤들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954-959).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완전한 열매이시며 죄인들을 위한 모든 은총의 통로이심

 

천주성부께서는 당신의 독생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1) 오류에 빠져 어두워진 인간들의 마음을 밝혀줄 구원의 진리들과 (2) 우리들의 영혼을 죄로부터 씻어 성화시켜줄 구원의 은총들의 원천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곧 보내시어 교회를 통하여 추진될 인류구원 사업을 위한 생명력과 빛이 되게 하여 주셨다.  이에 덧붙여 필요한 것은 인간들에 의한 협력이니, 이는 하느님께서 아무에게도 당신의 뜻을 따르라고 강제하지 않으시는 까닭이다.  인간들이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에와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아담이 범죄하도록 협조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자신들과 전 인류에게 고통과 죽음이 초래되게 하였다.  반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인류를 위한 구세주를 보내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셨으며 (루까 1:38), 그 동의의 결과로서 당신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되셨다 (루까 2:35).  마리아께서는 모든 인간들의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바치시는 아드님의 희생과 함께 당신의 슬픔과 고통을 천주성부께 바치심으로써 주님께 협조하며 주님의 희생에 참여하는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의 공동구속자가 되셨다.  그리고 당신의 아드님께서 천주성자이시니, 마리아께서는 마땅히 천주의 모친이시다.  이는 하느님께서 마리아께로부터 태어나심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이 진정(眞正)으로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대한 교리는 천주성자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강생하셨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또 교회는 마리아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므로, 교회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마리아께서는 참으로 어머니가 되시며,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는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다.  교회 전체를 위한 마리아의 모성적인 역할은 당신께서 몽소승천(蒙召昇天)하신 후에도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교회가 완성되고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은총의 계획 안에서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였던 그 순간부터 -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었다 -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은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전구(轉求)로써 영원한 구원을 위한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준다.  그 때문에 교회에서는 복된 동정녀를 변호자,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969).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영혼을 성화시키기 위한 모든 은총들의 원천이시며, 마리아께서는 이 은총들의 가장 완전한 열매이시자 그 은총들을 자녀들에게 전해 주시는 통로이시다.  그리스도께로부터의 은총에 힘입어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시는 순간부터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완전히 보존되시어 (교황 비오 9세, Ineffabilis Deus, 1854)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가득차셨으며 (루까 1:28), 이로써 하느님의 모친이 되시기에 합당한 분이 되셨다.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류의 초자연화 즉 성화가 피조물로서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정점에 달한 것이다.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께는 지극히 사랑스러운 따님이시며 인간들에게는 끝없이 자애로우시고 필요하신 어머니이시다.

 

성성(聖性)은 영혼의 상태에 관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동적인 개념으로서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거룩하심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흘러오는 것이며 다시 하느님께로 전적인 사랑과 봉헌과 감사로 되흘러가는 것이며 이웃 인간들에게도 한 가족으로서의 사랑과 봉사로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칼쿠타의 복녀 테레사 수녀께서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기 전에 매일 아침 몇 시간 씩 감실 앞에서 기도를 바쳤다.  그녀가 지녔던 이웃에의 애덕은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전적인 사랑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맺어지는 열매였던 것이다.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성모님의 끝없는 모성애와 마귀를 반드시 이기시는 티없으신 성성(창세기 3:15; 묵시록 12)은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감싸고 계시며 교회 전체를 보호하며 양육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복되신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마음과 존재 전체로써 하느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계시며, 동시에 당신의 자녀들의 참 어머니로서 지극히 다정하고 강력하신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염려하며 도와주고 계신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거듭하여 당신의 성심이 “사랑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세상의 수많은 자녀들이 아직도 죄 중에서 지옥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으므로 성모님께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드러내시며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주시고 인간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계신다.  성모님께서는 최대한으로 많은 자녀들이 구원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하여(1991년 8월 27일 나주에서의 성모님 메시지 참조)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보내주신 그들의 어머니이시며 구세주의 협력자이시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오류”라는 단어를 20회 이상 사용하시면서 교회 안에까지 암처럼 무섭게 퍼져 있는 위험한 이단의 사상들을 개탄하셨다.  이러한 오류의 개념들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으며 그들에게 구원은 신앙만으로 또는 다른 어떤 쉬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안이한 인식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구원,” “죄,” “통회,” “보속,” “성성,” “성화은총,” “기적들,” 그리고 “초자연” 등과 같은 개념들은 잊혀지거나 퇴색되고 있다.  이러한 영향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사업의 핵심인 초자연적 현실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게 하며, 크리스챤 신앙의 중심, 즉 우리 주님의 수난과 부활이라고 하는 파스카 신비에 대해서 그리고 이 신비가 지속적으로 교회를 통하여 현존하며 역사(役事)하고 있다는 사실 및 교회 구성원들 각자의 영혼 속에서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게 하고 있다.  교회 역사 상 과거의 이단들은 신자들 사이에 오류를 퍼뜨려 교회로부터 이탈하게 했지만, 오늘날의 이단은 교회 안에 머물면서 신자들을 오도(誤導)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이며, 현재 교회 안의 이러한 상황이 많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부 성직자들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신비의 초자연성에 대하여 둔감해지게 하여, 나주에서의 메시지와 초자연적 징표들에 대해서도 이를 배척하게끔 하고 있다.  오늘날 알게 모르게 현대주의의 영향은 교회 안에 매우 널리 퍼져 있고 깊이 배어 있으며, 전통적인 정통 가톨릭 신앙을 희석시키고 있다.  

 

결  론

 

현대주의의 물결을 되돌리고, 인류의 도덕적인 타락과 무신론적인 자만으로 인하여 초래될 재앙을 막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가정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초자연에 대한 감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우리는 천주성자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하여 강생하심으로써 한 분의 위격 안에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참으로 결합되어 있는 놀라운 구원의 신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성체성사 안의 주님의 현존이 단지 상징적이거나 영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는 오류를 퇴치해야 한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모친이 되셨으며 또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심을 깨닫고, 성모님의 성성과 마귀를 쳐부수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린 자녀들에게 가장 귀중한 선물은 그들의 어머니일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조차 어른인 것처럼 행세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치 않은 듯이 자만하지 말고, 겸손되이 자신의 도덕적 나약과 영적인 궁핍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들과 교계제도와 교리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엄위하신 힘이 작용하심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초자연에로 이끌며 상기시켜주는 수단들, 즉 성서와 교리책, 성인전 등의 교회서적들, 교회음악, 성상들, 미술품들, 건축물, 십자고상, 묵주, 스카풀라, 메달, 성수 등을 귀중히 여기고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진리의 가르침들에 대하여 경외심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공부하고 묵상해서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전체를 다스리는 원리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영적인 삶과 교리들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  교리들은 신앙의 길을 비추는 빛으로서 이 길을 밝혀주고 확실하게 해준다.  거꾸로 우리의 삶이 올바르다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개방되어 믿을 교리들이 발하는 빛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89).  우리들 각자에게 허락된 제한된 시간 안에서 만일 우리가 천국으로부터의 두 가지의 큰 징표들, 즉 성체성사와 성모님을 따르는 데에 충실하다면 우리의 초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나주의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주신 메시지들

 

"오류가 세상에 번져 암흑으로 덮쳐지는 이 시대에 신성한 진리를 담은 성서를 가까이 하여 복음적 생활을 하며, 급해진 이 시대에 세계 각처에서 발현으로, 눈물로 호소하시는 내 어머니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여라.  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를 따르는 길, 그 길이 바로 지름길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라.  내 어머니 마리아의 승리의 때가 다가온다.  어서 회개하여 마리아의 구원방주에 타도록 하여라.  내 어머니는 나의 빛나고 영광스러운 계시에 이르는 천상의 예언녀로, 또 나의 협력자로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의 말을 따르라.  내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1991년 5월 16일).

 

"수세기를 통하여 내 어머니께서 하신 다정스럽고 친절한 말씀들을 따르지 않았기에 지금 교회까지도 죄악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1995년 9월 22일).

 

"먼저 나는 내 거룩한 어머니인 마리아의 모태에서 육체를 취하였기에 내 어머니 심장의 고동에 호응하여 내 심장은 너희를 위하여 뛰기 시작했으니 내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고 그의 말을 따르기 바란다.  그를 사랑하고 그를 따르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따르는 것임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1996년 10월 19일).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내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나는 한국 나주에서 수많은 사랑의 메시지와 징표들을 보여주었건만 그러나 사랑의 기적을 체험한 많은 내 자녀들까지도 마귀의 꼬임에 빠져 산산이 흩어지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며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1998년 4월 12일).

 

"경악을 금치 못할 세상, 잿더미로 변해버릴 세상, 마귀의 공격으로 패망할 이 시대, 그러나 작은 영혼들이 많아질 때 나와 내 어머니의 성심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어서 서둘러 부활의 빠스카 신비를 영속시켜라.  내가 도와줄 것이다," (1998년 4월 12일).

 

"내 어머니만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눈물과 피눈물과 향유로써 현존과 사랑과 우정을 직접 보여주시며 호소하신 사랑의 메시지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여 온전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내 어머니가 마련하신 마리아의 구원방주에 길잃어 헤매는 양떼들을 모두 태우고 하늘항구에 도달시켜라," (2000년 11울 2일).

 

"내 구원 사업의 협력자이자 은총의 중재자이시며 공동구속자인 내 어머니를 통하여 나에게 달려오는 자녀들은 마지막 심판 때 알곡으로 뽑혀져 내 나라 내 식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 (2001년 11월 8일)

 

성모님께서 나주의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주신 메시지들

 

"불쌍한 영혼들의 간절한 기도소리가 하늘에 닿을 때 하느님의 의노는 풀릴 것이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나는 위험에 빠진 이 시대에 너희를 구하고자 주님의 협력자로서 이 세상에 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나를 따를 때, 멀지 않아 너희의 진정한 어머니로, 또 이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의 협력자로서의 나의 역할이 분명해질 것이다.  내가 주님의 협력자로 간택된 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함이고, 너희들도 또한 나의 협력자로 간택받았음을 명심하고 나의 말을 잘 받아들여 모두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여라," (1991월 8월 27일)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나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느님의 진노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경고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역사를 한 번 뒤돌아 보아라.  그 시대 사람들처럼 오늘 이 시대에도 하느님의 말씀과 내 사랑의 메시지를 외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시대는 어찌되겠느냐?  보속의 협조자인 이 어머니의 말을 명심하고, 속으로 피흘리는 아픔까지도 잘 봉헌하기 바란다," (1991년 9월 17일).

 

"내 아들 예수와 또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폭풍우에 휘말려 이 엄청난 위험에 처한 수많은 자녀들이 오류에 빠져 불신앙으로 인하여 지금 교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전례도 규율도 뒤범벅이 되어, 많은 목자들까지도 그 혼란 속에 빠져 그들을 따르는 양들과 함께 지옥의 길로 향하고 있으니 지옥문은 그 영혼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활짝 열려 있다," (1995년 2월 2일).

 

"내 반대자의 분노가 격증하고 악이 승리하려고 많은 성직자들까지도 나락(奈落)으로 빠뜨려 성공했다고 쾌재를 부르고 있는 이 때 천상의 이 어머니도 정통교회를 벗어난 이단들 때문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구나.  길잃어 헤매는 양떼들을 돌보아야 할 많은 사제들은 진정한 믿음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으며 불신과 오류가 세상에 퍼져 세속주의에 빠져 있기에 그들은 예수의 부활 사건까지 망각해 버릴 때도 있다.  이렇게 커다란 배교의 풍조는 가톨릭교회 내부에서조차 넓게 퍼져가고 있으니 너희는 이제 내 모성 가득한 사랑의 징표가 되도록 노력하여라," (1995년 5월 9일).

 

"너희가 언제나 하늘과 땅을 잇는 끈인 천상의 어머니인 나를 따라올 때 나는 너희를 받아들여서 너희를 보호하여 더욱 강해지고 굳세게 하여 줄 피난처를 마련해 줄 것이다.  그러니 어둠에 헤매는 수많은 자녀들에게 눈물과 피눈물로 호소하는 내 사랑의 메시지를 어서 전하여라. . .  자녀들아!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내 아들 예수와 천상 어머니인 내 사랑이 너희의 영혼과 마음과 존재에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믿음과 신뢰로써 온전히 의탁하여라.  내 아들 예수와 내 티없는 성심의 승리를 위하여 너희의 피나는 희생과 보속과 사랑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니 어서 서둘러 기도하고 나의 원의에 따라주기 바란다," (1996년 1월 6일).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이미 끝나가고 있으니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를 묵상하며 이 세상에 내려질 징벌과 타오르는 유황불의 재앙을 면할 수 있도록 어서 깨어 기도하여라.  불림받은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미 이 세상은 극도의 죄악으로 인하여 잿더미로 변해버릴 위기에 빠져 있으나 너희 작은 영혼들의 간절한 기도와 희생과 보속이 있었기에 내 아들 예수께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불림받은 너희들만이라도 화목제물이 되어 오신 예수 성심과 내 성심 안에 온전히 용해되어 생활의 기도화로 피흘리신 주님의 상처를 싸매 드리고 기워드리며 닦아드려라.  성삼위 안에 사랑으로 일치한 너희 작은 영혼들의 기도 소리가 합쳐져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때 3차 대전의 위기는 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자녀들이 끝내 나와 내 아들 예수가 주는 사랑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회개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한다면 나도 이제는 더 이상 하느님 진노의 잔을 붙들 수가 없을 것 같구나," (2001년 1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