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성모님의 진실

공지문의 문제점들

가톨릭 신앙의 보물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공동 구속자(Co-Redemptrix)이신 성모님  —  2000년 7월 18일

구원의 신비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성모님  —  2000년 9월 28일

신앙의 유산에 충실할 것을 거듭 호소하시는 성모님  —  2001년 3월 10일

한국 교회가 나주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들  —  2003년 8월 22일

성체성사는 나주에서의 메시지와 징표들의 핵심  —  2004년 7월 28일

크리스챤 신앙의 초자연성  —  2004년 7월 28일

가톨릭교회 내의 교리 및 전례에 관한 기강 확립을 위하여  —  2006년 10월 24일

가톨릭교회 내의 교리(敎理) 및 전례(典禮)에 관한

기강 확립(紀綱確立)을 위하여

평신도의 묵상, 결의, 및 목자들께 드리는 청원


1.  교회 가르침의 신적(神的) 근원(根源)과 권위(權威)에 관하여


우리는 현 교황님 및 역대 교황님들께서 그리고 교황님과 일치하는 전체 주교님들의 공의회(公議會)에서 공표하셨으며 교회의 교부(敎父)들과 기타 성인들에 의해서 설명되고 실천되어온 신앙과 윤리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모든 공적 가르침들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전심(全心)으로 충성할 것을 새로이 다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들이 (1)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가 진리와 계명들을 세상 끝날까지 그리고 만천하에 당신을 대리하여 오류없이 전파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그 교회에 그 사명과 아울러 당신의 권위를 부여하셨음과 (2) 천주 성령께서 항상 교회 안에서 그 구성원들이 그들의 사명을 올바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항상 촉구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에 의거한 신적근원(divine origin)을 지니고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가르치심들에 대한 신자들의 이해(理解)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깊어지며 명확해질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하여 마음 문을 열고 있음과 동시에, “흘러가는 시대의 요구와 정서에 적응하기 위하여” 또는 다른 여하한 이유로든

 (1) 교회 가르침들의 신적 근원과 권위를 경시 내지 부정하거나,

 (2) 교회의 공적 가르침들, 즉 교리들을 얼버무리거나, 희석(稀釋)하거나, 누락(漏落)하거나, 변경함으로써 그 내용을 조작(操作)하거나, 

 (3) 성서 안에 기록된 초자연적 사건들을 우화(寓話)나 소설의 수준으로 격하(格下)하거나,

 (4) 인간중심적이며 진보적인 사상들에 발맞추며 가톨릭 신앙의 전통적 지주(支柱)들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숭고한 가르침들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과장 또는 왜곡되게 해석하며 적응하든가,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들이 이미 전해 내려오고 있는 교회 가르침들을 대체(代替)하며 따라서 이전의 가르침들은 그 유효성(有效性)과 유용성(有用性)이 감소 내지 말소되었다고 하는 허황된 사상이나 인상을 퍼뜨린다든지,

 (6) 현대화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불필요한 변화들을 교회 내의 전례 행사들, 미사 경문을 비롯한 기도문들, 음악, 건축, 성상들, 성화들, 성당 내에서의 신자들의 품행과 복장에 관한 규범들 및 전통들, 교회법의 해석이나 적용 과정 등에 도입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마음속으로부터 초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약화시키며 계시진리의 참된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시도들에 대하여 통탄하며 이를 배격합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한 가르침들을 주시고, 이를 잘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 마음에 은총의 빛을 비추어 주시며, 또 참된 신앙을 오류 없이 고백할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을 보장해 주시기 위하여 (가톨릭교회 교리서#890) 교회 안에 신적 근원의 교도권(敎導權)을 세워 주시고 또 이를 찬주성령께서 보호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당신의 자녀 및 백성으로서 깊은 사랑과 감사를 드리면서, 그 가르침들을 우리의 크리스챤적 신앙생활을 위한 필수적이며 기본적인 토대이며 표준(paradigm)으로 깨닫고 받아들이며, 또 이를 부지런히 공부하고, 실천하며, 지키고, 전파할 것을 결심하는 바입니다.       


2.  인간의 초자연적 목적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스스로 한없이 완전하시고 복되신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호의로 계획을 세우시고, 자유로이 인간을 창조하시어 당신 자신의 복된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  즉 우리의 목적 또는 운명은 이 세상의 관심사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초자연성과 영원성을 띄는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창조되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목적과 의미는 바로 무한한 진리이시며, 정의(正義)이시고, 사랑이시며, 생명이시며, 모든 선들의 참 근원이신 하느님 자신 이외의 그 어느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모태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그리고 그분의 왕국에 속한 충성된 신하로서 하느님과 영원히 일치된 삶을 추구하도록 불림 받아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는 그 어떤 좋은 것, 즉 선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이 그 원천일 수는 없음을 기억하고 자신이나 자신의 업적에 대하여 자랑하거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서의 철저한 허무와 빈곤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비천함과 무력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무한히 위대하심과 거룩하심,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거나 허무감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천(微賤)과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며, 또 이를 위하여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시려고 항상 당신의 손을 우리에게 뻗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포자기한 앉은뱅이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서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충실히 따르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를 거부 또는 사양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호의를 무시하는 교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인간의 본성에 마땅한 것을 훨씬 초월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과 거룩함과 아름다움과 행복한 삶에로 솟아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에 의하여 우리의 영혼이, 그리고 부활 후에는 우리의 육신까지, 성스럽고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처음 받는 것은 보통 성세성사를 받을 때이며, 그 이후의 죄들로 인하여 은총을 다시 잃어버려 영혼이 병들게 될 때에는 진정한 통회와 정개(定改)를 동반한 고해성사를 통하여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선의 근원일 수는 결코 없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시고 또 우리를 당신께로 항상 부르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에 우리는 깊이 감사드려야 겠습니다.   


우리 영혼에 주입된 하느님의 은총, 즉 하느님의 초자연적 생명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자신과 천주성령의 협력(協力)에 의해 성장될 수 있습니다.  마치 쇠뭉치가 불 속에서 뜨거워지며 그 불과 동화될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은총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됨에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더욱 하느님의 사랑과 거룩함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초자연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목적의 성취가 완성되는 것은 천국에서이지만, 그 시작과 성장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의 일치된 삶, 즉 천국이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성취할 수 있도록 천주성령께서는, 우리가 대죄를 짓지 않는 이상, 항상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가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가르치심들을 더 잘 이해하고 충실히, 용기있게 실천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또 이 과정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성부(聖父)의 뜻을 행하는 것(마테오 7:21)이 되며, 이는 또한 우리가 (1) 애덕을 실천하며, (2) 성적(性的)으로 순결과 올바름을 지키며, (3) 진리를 사랑하며 정통 신앙에 충실함으로써 (가톨릭교회 교리서#2518)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하느님의 성성(聖性)에 부합시키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1) 우리의 초자연적 목적을 망각하고 이 세상의 일들이 우리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 삶의 목적 자체인 것처럼 몰두하도록 하며, (2)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이 성화되어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들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과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 양쪽이 다 필요하다는 사실을 얼버무리며, (3) 하느님께의 불순종인 죄가 우리가 은총을 잃어버리게 되는 유일한 원인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대의 불행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지 않으며, (4) 지은 죄들에 대한 통회와 보속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듯이 지도하고, 심지어는 주님께서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받으신 혹독한 고통들과 죽음에 대해서도 그 지고(至高)한 가치와 중요성을 호도(糊塗)하는 모든 오류의 가르침들과 사상을 배격합니다. 


그리고 아직 크리스챤 복음을 접하기 전이라도 자아를 다스리며 악을 피하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자연적인 지혜와 덕을 쌓는 것은 가상하고 가치 있는 일이며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사랑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되겠지만, 그 자체만으로써 죄의 사함과 영혼의 성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신적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님을 이해합니다.  우리의 원죄와 본죄들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강생하신 천주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구속이 반드시 필요함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계시되고 마련되었으며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결실을 맺고 있는 구원사업이 마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여러 구원의 길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옳지 않음을 믿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복음화하며, 실망, 무지, 나태, 교만 등으로 인하여 교회를 떠나 있는 영세자들이 되돌아오게 하고, 현재 교회에 다니고는 있으나 아직 신앙이 확고하지 못하고 애덕과 선교의 불이 타오르지 못하며 타성적이 되어 있는 많은 신자들에 대한 확실한 교육과 지도의 필요가 그 어느 때 못지않게 절실한 것입니다. 


3.  성체성사 - 지속적(持續的)인 주님의 실체적(實體的) 현존(現存)


천주성삼위(天主聖三位)의 제2위이신 성자(聖子)께서 온 인류의 구세주로 강생(降生)하신 것은 인류 역사 상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하여 멸망의 운명에 빠진 인간들을 구하시려는 하느님의 지고(至高)하신 자비와 사랑의 역사(役事)이셨기 때문입니다.  뿐 아니라, 교회에서는 천주성자 강생과 구속사업의 신비가 역사의 흐름에 파묻혀 버린 과거사(過去事)에 그치지 않고 모든 세기에 걸쳐서 지속되고 있는 살아있는 현실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는 과거 안에만 머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물리치셨으며, 그리스도의 모든 것, 즉 모든 인간을 위하여 그분께서 행하시고 겪으신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영속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생명에로 이끌고 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085).     


개신교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성부께로 승천하셨으며 세상 마지막 날에 모든 이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맞는 말이기는 하나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을 빠트리고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지상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으며(마테오 16:18) 이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강생과 수난과 부활의 현실이 지속되도록 하셨으며, 또 그렇게 하심으로써 교회가 세상 끝날까지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인간들을 회개와 성화에로 이끄는 사업을 계속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고 하셨는데(마테오 28:20), 주님의 이 말씀이 단지 영적이거나 상징적인 현존만을 뜻하신 것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주님께서 지상(地上)에 설립하신 교회는 단지 신자들의 공동체라든가 기도회 모임정도를 훨씬 더 초월하는 개념이며 조직체입니다.  교회는 내적으로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실과 외적으로 가시적(可視的)인 현실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살아있는 조직체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천주성자(天主聖子)이시라고 하는 초자연적인 내적 현실을 지니고 계시며 외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지니고 계심과 마찬가지입니다.  내적 현실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시적인 현실보다 덜 실제적이거나 덜 중요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의 내적 현실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은총의 근원이심을 의미하며, 또한 천주성령께서 교회의 영혼이 되시어 교회를 보호하시고 이끌어가심을 의미합니다.  외적으로 교회에는 (1) “나의 양을 치라”(요한 21:15-19)고 하신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지상에서 그분을 대리하여 그분의 구원사업을 이끌어나가는 목자들과 그들로 구성된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있으며, (2) 목자들을 따르며 그분들로부터 지도와 성사들의 집행을 받으면서 자신들 영혼의 성화와 세상의 복음화라고 하는 주님의 명을 수행하고 있는 평신도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외적으로 볼 수 있는 예절과 성사들과 성서, 교회법, 음악, 성당건물, 성상들, 성물들, 교육 및 자선 사업 등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비록 이 지상에 있지만, 참으로 하느님의 영(靈)으로 살아있고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하늘나라의 영광에 이미 입성(入城)한 승리의 교회와 합류할 때까지 지상의 온갖 악들과 오류들과 싸우면서 그리고 모진 박해들을 견디어내면서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전파하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군대인 것입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모든 시대들의 모든 이들은 2천년 전에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살아계신 주님께 실제로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즉 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의 신적 진리들을 그 정통성에 대한 하등의 염려 없이 받을 수 있으며, 성사들을 통하여 죄 사함과 기타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은총들을 받을 수 있으며, 갈바리아 산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의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인 미사를 통하여 주님의 그 희생제사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으며,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으로뿐 아니라 실제로(really), 실체적으로(substantially) 주님과 함께할 수 있고 또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주성자의 강생과 구원의 현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현존될 수 있도록 안배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전능하심에 우리는 영원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외형이 빵과 포도주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성체가 사실은 빵과 포도주가 전혀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와 영혼과 신성을 다 함께 지니신, 참으로 살아계시며 완전하신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미사에서 사제가 주님께서 주신 형식과 명(마테오 26:26-28; 마르꼬 14:23-26; 루까 22:14-20)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 빵과 포도주의 외양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 실체는 완전히 주님의 살아계신 살과 피의 실체로 변화된다는 것(Transubstantiation)이 확고한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무한히 진실하시므로 스스로 속으실 수도 없으시고 우리를 속이실 수도 없으신 분이시며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신적 권위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성체에 대한 교리를 주관적인 확신만이 아니라, 객관적 확실성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당신의 진리를 오류없이 가르칠 수 있는 권위를 교회가 받아있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 많은 유대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없는 그들의 눈에는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며 성부와 하나이라(요한 10:30)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단지 인간으로만 보였고 그래서 설독(褻瀆)을 범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감각을 더 신뢰하였으므로 신앙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같은 테스트를 받고 있습니다.  성체는 겉으로는 빵과 포도주로 보이고 빵과 포도주의 맛으로 느껴지지만, 주님께서는 그 빵과 포도주로 보이는 것이 당신의 몸이요 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주님 곁을 떠나가는 제자들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도들에게까지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시면서 그들의 신앙 여부를 물으셨습니다(요한 6:22-71).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신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르꼬 16:16).  성 바오로 사도도 같은 말씀을 거듭거듭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 3:7-14).  만일 주님께서 성체성사에서 당신의 영광과 아름다우심과 위엄을 외적으로 드러내 보이신다면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고백할 수 있는 여지는 없을 것이며 또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테스트하실 수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의 신비(神秘)인 것처럼 성체성사 역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힘이라고 하는 내적 현실이 가려져 있는 신비입니다.  성체의 외양이 빵과 포도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하나의 복된 기회일 수도 있고 또는 우리의 신앙과 사랑이 모자라서 넘어질 수 있는 하나의 불행한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체성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결정적이고 확고함에도 불구하고 성체에 대한 진리를 믿기 어려워하는 이들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신앙이 결핍되거나 아예 마음이 불신과 무관심으로 굳어져버린 이들을 깨우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성체의 외양이 가시적인 살과 피로 변하는 기적들, 그리고 여러 성인들이 사제의 매개(媒介)를 통하지 않고 주님께로부터 또는 천사로부터 직접 성체를 받아 모시는 기적들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성체성사에 현존하시는 주님께서는 고통 받으시며, 피 흘리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그리스도이심과 동시에 영광 속에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영성체에서 주님을 모시는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다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구속사업에 기꺼이 참여하며 그분의 가르치심과 계명들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면서 주님과의 밀접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나아갈 때마다 주님을 흠숭하며 그분과 일치하고자 하는 열정을 새롭게 하며 또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결의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천한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시면서 바라시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사랑과 우정뿐이시지만, 동시에 당신을 불신과 경시와 무관심과 학대와 모독과 독성의 큰 위험들에 노출하여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들이 최소화되도록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즉 영성체 전후의 열심한 기도와, 자신의 잘못들에 대한 통회와, 필요하다면 영성체 전에 고해성사를 보는 것, 그리고 아동들과 예비신자들, 그리고 성인(成人) 신자들을 교육 및 재교육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잘 가르치지도 않고서 잘 알아서들 하겠지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생각이며 태만입니다.  또 우리는 성체성사에 관한 부주의와 경솔을 조장하거나 허용하는 모든 처사들이나 습관들을 시정해야 될 것이며, 올바른 성체신심을 북돋아주는 아름답고 귀중한 가톨릭 전통들을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들을 위하여 우리는 목자들께 다음과 같은 청원들을 드립니다.

 (1) 감실의 위치를 성당의 옆 구석이나 부속실로부터 성당의 전면 중앙으로 회복시켜 주십시오. 

 (2) 모든 성당들에 신자들의 장궤틀을 다시 설치하여 주십시오.

 (3) 성당 내부의 구조 상 불가능하지 않다면, 성체난간(communion rail)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신자들이 서서 혀에 성체를 받는다면 성체분배자의 손가락이 영성체하는 이의 혀를 건드리기 쉬운데, 성체난간을 사용한다면 이 문제를 상당히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성체를 손에 받을 때 작은 성체 조각이 손에 떨어져 분실되기 쉬우므로 성체를 혀에 받는 오랜 가톨릭 전통을 장려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성체를 손으로 받는 이들이 때때로 경박스러운 태도를 취하거나 성체를 금방 영하지 않고 손에 들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켜 주십시오. 

 (5) 평신도 성체분배자들을 이용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할 중대한 이유가 있을 때만으로 제한해 주십시오.  평신도 봉사자들을 통상적으로, 심지어는 우선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성체성사를 보호하며 관장하는 사제직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인식과 존경을 흐리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6) 미사 때에 사용하는 면병과 포도주는 반드시 교회에서 정한 법과 규율에 부합되게 준비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예를 들면, 미국의 일부 본당들에서는 누룩이 들어간 빵을 사용함으로써 큰 혼란을 일으키며 불순종의 표양을 보이고 있습니다.) 

 (7) 미사 경문의 기도문들을 사제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변경하는 것, 그리고 미사예절 중의 어느 부분을 임의로 생략하거나 임의로 첨가하는 것을 피해 주십시오 (예를 들면, 사제가 손을 씻는 예절을 빼거나, 면병과 포도주를 한꺼번에 봉헌하는 등.) 


교회의 교리에는, “누구든지 존귀한 성체성사에, (빵과 포도주의) 그 어느 외양으로든지 그리고 그 외양이 분리되었을 때에는 그 모든 부분에, 주님의 전체가 계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트리엔트 공의회 DS#1653)라고 되어 있습니다.  손으로 성체를 받을 때 가끔 성체의 작은 조각이 영성체자의 손에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손으로 성체를 받고 나서 손바닥에 성체조각이 남아있는지를 확인하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사 때 너무 큰 면병을 사용해서 신자들의 영성체 때 그 성체를 많은 조각으로 나누어주는 경우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성반 위에 작은 성체 조각들이 수없이 많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성체를 손으로 받는 이들의 손이나 성당마루에 떨어질 위험도 높아집니다.  성반 위에 떨어진 수많은 성체조각들을 사제가 깨끗이 씻어서 영하셔야 되는데 영성체 후에 사제가 하셔야 할 일들에 관하여 교황청에서 공표하신 규율들이 항상 잘 지켜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현실입니다.  과거의 많은 성인들께서 (성녀 소화 테레사를 포함하여) 성체를 얼마나 정성과 조심을 다하여 다루셨는가, 작은 성체조각을 성당의 마루바닥에서 발견하고 얼마나 큰 슬픔과 죄송함과 정성으로 모셔갔는가에 대하여 우리가 읽는다면 아마 크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에서의 예수님 사랑, 스테파노 마넬리 신부님 저, 가톨릭출판사, 1996).


교황청의 예절 및 성사 성성(聖省)에서는 미사와 성체성사에 관하여 지켜야 할 바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의 문서를 발표하셨습니다:  Redemptionis Sacramentum (2004년 4월 23일).  이 문서의 영문판, 불어판, 독일어판, 이태리어판은 교황청의 인터넷 싸이트에서 접하실 수 있습니다 (www.vatican.va).  이 문서가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으므로 이렇게 귀중한 지침들을 준비해 주신 목자들의 원의와 염려를 생각하여 우리 모두가 이를 읽고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성체를 마땅히 모시기 위하여 올바른 마음가짐과 은총 지위에 있는 것이 필요하므로, 성체를 모시기 전에 무슨 중요한 잘못이 마음에 걸릴 때에는 먼저 고해성사를 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일에 고해성사를 주는 본당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약속을 하면 언제든지 고해성사를 준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미리 약속을 해서 고해하는 것을 꺼립니다.  고해성사를 등한시하게 되면, 성체신심도 약해지게 마련이며, 죄에 대한 경각심도 둔해지게 되고,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인식도 희미해지며, 교회를 통한 주님의 구원사업 전체의 의미가 희석되기 쉽습니다.  크리스챤 가르침들로부터 죄의 개념과 죄사함의 필요성을 빼버리거나 모호화(模糊化)하면 그것은 더 이상 주님의 가르치심이라고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고해를 듣고 죄를 사해 주며 보속을 명하고 지도를 주시는 것은 미사성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제의 임무이며 보람입니다.  교회의 모든 목자들께 신자들이 고해성사에 더 자주,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힘으로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들을 실제로 고쳐주시는 일이 얼마다 귀중하고 고귀한 일입니까!


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과 당신의 교회에 어머니가 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1) 에덴 동산과 나자렛 사이의 유사점(類似點)들


아담과 하와의 범죄 당시의 상황과 천주성자께서 마리아의 아들로 잉태되어 강생하시던 때의 상황 사이에는 여러 가지 유사점들이 발견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 즉 범죄하여 나락으로 떨어진 천사가 먼저 여인에게 접근하여 하느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먹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여인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그 열매를 따먹고 또 남편에게도 따먹게 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모든 초자연적 은혜와 특혜들을 박탈당하고 동산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또한 그들의 모든 자손들도 초자연적 은총과 혜택들이 결핍되며 본성까지도 약화된 상태로 태어날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갈릴레아 지방의 나자렛에서는, 하느님께 충실한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를 방문하여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녀에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는지, 천주성자의 모친이 되는 영예와 고귀함 뿐 아니라 구세주로서 온갖 멸시와 모진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할 아들의 어머니로서 필연적으로 무서운 고통이 따르게 될 그 성소(聖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이에 마리아는 깊은 겸손과 순종과 자아포기와 사랑과 용기로써 “주님의 여종이오니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소서”(루까 1:38)라고 응답함으로써 천주성자께서 강생하시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드렸으며 또 이로써 아담의 범죄에 협력했던 하와의 잘못을 상쇄하였습니다. 그 후에 성장하신 아드님께서는 십자가 모양의 나무 위에서 아담의 불순종을 당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상쇄하시고,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보속으로 피흘려 희생 제사를 성부께 올리심으로써 아담으로 인해 잃어진 모든 것들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2)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개인성과 사회성을 지니도록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과 모상(模像)으로 인간을 창조하자,”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라는 단수형이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을 쓰신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하나의 신성(神性)을 지니신 유일신(唯一神)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의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세 위격을 지니신다고 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암시하시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홀로 외로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세 분이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진리와 영원한 생명 안에 완전히 일치되어 계시는 무한히 이상적(理想的)인 공동체를 이루어 계십니다.  우리 인간들이 이러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우리 각자가 독립성과 존엄성을 지닌 개개인의 인격체들임과 동시에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들임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 역시 개인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각자의 은밀한 기도를 들으시고, 개인적으로 임무를 주십니다.  그리고 심판 때에는 각자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각자에게 적합한 상이나 벌을 주실 것입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교회, 국가, 도시, 가정 등 당신 자녀들의 공동체 단위로 단체적으로 사명을 주시고, 도와주시고, 축복하시며, 또 잘못할 때에는 경고와 벌도 주십니다.  천주성자이신 예수님께서도 지상에서 생활하실 때 한 개인으로서 생활하심과 동시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 즉 당신의 어머님, 요셉 성인, 친척들, 친구들, 이웃들, 학자들, 나그네들과 교제하셨고, 서로 도움을 주기도 받기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타고난 개인성과 사회성 그 어느 쪽도 무시하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들도 그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인류의 죄를 충분히 보속할 수 있는 분은 강생하신 천주성자, 즉 예수 그리스도 단 한 분뿐이시지만, 주님의 구원사업이 실제로 인간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개인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족, 즉 교회 내 구성원들의 협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말이나 글로 전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복음을 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범죄와 타락에 빠져 스스로 회개할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주위 사람들의 기도와 희생과 권유 등에 의해서 회개할 수가 있습니다.  사제는 평신도의 도움이 필요하며,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가르침과 영적양육이 필요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신앙과 구원은 오직 우리 각자와 하느님 사이의 문제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유일한 구세주이시므로 다른 어느 누구도 주님과 개인과의 사이에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개인성에만 초점을 두고 사회성은 망각하고 있는 불충분한 가르침입니다.  피조물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게 진리를 전해 주며 사랑의 실천으로 돕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주신 진리와 이루어 놓으신 은총들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고 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쳐야 되고, 주님의 진리를 전해 주며, 애덕으로 용서해 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인간들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들이 공동체들 안에서의 자신의 몫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개인성과 사회성을 부여하신 하느님의 섭리이십니다. 


(3) 신앙은 구원의 시작이요 토대이지만 완성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은 모든 인간들의 죄들을 보속하며 전체 인류를 하늘에 계신 천주성부와 화해시킬 수 있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개신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지만, 문제는 그 가르침의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다는 점입니다.  개신교에서는 구세주께 대한 신앙이 구원을 받기 위한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라고 가르치지만, 사실은 인간의 구원이 신앙을 가지는 순간 완성되고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을 토대로 하여 주님의 가르치심과 계명들에 충실한 생활을 삶으로써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일생의 과업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살고 있는 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가진 후 언제라도 그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다시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길에서 탈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항상 명심하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관한 성서 말씀 몇 구절만을 인용합니다.


누구든지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오직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을 행하는 자만 들어갈 것이다,” (마테오 7: 21)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힘쓰십시오,” (필립보 2:12).


누구든지 안전하게 서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 고린토 10:12).


누구든지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며 그 안에 진리가 있지 않습니다,”(1요한 2:4).


(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자와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가 계시기를 원하셨다


하느님의 백성 즉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그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시며, 동시에 하느님 가까이 계시면서 자녀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어머니가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며 하느님께서 이루신 무한하신 사랑의 기적이며 선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구세주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기르셨을 뿐 아니라, 구세주께서 성인이 되신 후에도 항상 아드님과 한 마음으로 일치되시어 그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용기와 위로를 주시는 지극히 가까운 분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도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과 함께 하시면서 아드님과 당신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모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천주성부께 봉헌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각박(刻薄)하고 위험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신 천주성자께서 그나마 지극히 순결하시며, 당신과 항상 밀접히 일치되어 계시며, 굳은 믿음과 지극한 사랑으로 협력하시는 동반자며 위로자로서의 어머니와 함께 하실 수 있으셨던 데 대하여 자녀된 우리들도 크게 다행으로 생각하며 천주성부께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첫 어머니였던 하와가 아담의 동반자로서 그의 범죄에 밀접하게 협력하였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과정에 있어서도 모든 여인들의 대표로서 그리고 아드님의 동반자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협력하시는 어머니가 계실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셨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우리들 모두의 참 어머니가 되심으로써 우리 각자가 구원될 수 있는 확률을 현저히 높여주시고 또 훨씬 많은 이들이 구원될 수 있도록 해 주고 계십니다.


성 알퐁소 리구오리께서도 당신의 저서 “마리아의 영예로우심”에서 성모님을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목에 비유하면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로부터 흘러오는 모든 은총들이 성모님을 통해서 그 지체들인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하셨습니다.  끌레르보의 성 벨라도와 그 밖의 많은 성인들께서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모든 은총들을 성모님의 손을 통해서 주신다고 증언하셨고, 여러 교황님들께서도 이 진리를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교황 비오 11세께서 당신의 회칙 Ingravescentibus malis (1937)에서 성 벨라도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마리아를 통하여 받게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으니, 남자인 예수님께서 모든 구원의 은총을 피땀 흘려 얻어 오시고, 여인인 성모님께서 그 은총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합당한 자녀들이 되도록 양육하신다는 것은 지극히 아름답고도 적합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서 성모님께서는 전체 교회와 그 구성원들을 알뜰히 돌보시며 특히 이단이나 전쟁이나 역병(疫病)이나 기타 재난과 위기들로부터 구해주시는 일을 꾸준히 계속해오고 계십니다.  어떤 때에는 개인들의 필요를 위해서 그들을 방문하신 적도 있었고, 때로는 전체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개입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교회 전체를 위하신 경우에는 당신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확실한 초자연적 기적의 징표들을 주셨습니다(마르꼬 16:20 참조).  1531년의 과달루페, 1830년의 빠리, 1858년의 루르드, 1917년의 파티마, 1973년의 아키다 등에서의 발현이 그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파티마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수성심과 티없으신 성모님의 성심을 통하여 세상을 구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현 세계가 처해 있는 엄청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매일의 생활에서 매괴신공 등 많은 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모든 어려움들을 희생으로 봉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571년 크리스챤 유럽 전체가 이슬람을 믿는 터키 군대의 침략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교황 성 비오 5세는 모든 신자들이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선포하셨고 그 결과 성모님의 특별하신 도움으로 유럽 함대는 10월 7일 레판토 해협에서  몇 배가 되는 터키군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교회에서는 지금도 이 날을 매괴의 성모님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1985년 이래 한국의 나주에서도 윤 율리아 자매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끊임없이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오상의 징표를 받았으며, 특히 한국 등에서 수많은 이들이 자행하고 있는 낙태에 대한 보속, 그리고 파도처럼 번지고 있는 음란죄에 대한 보속 고통도 자주 받고 있습니다.  1995년 9월 7일에는 율리아 자매가 환시를 보았는데, 붉은 유니폼을 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다가오는 무서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면서 열심히 기도를 드리자 그 군인들의 팔에서 힘이 점차 빠지면서 총을 들고 있던 팔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군복의 색깔이 붉은 색에서 점차로 회색으로 변하더니 다시 연한 푸른색으로 변하였고, 결국 그들은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곧 성모님께서 아름답고 찬란한 빛에 싸여 나타나셔서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 환시는 현재의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신앙과 도덕의 대타락, 또 그로 인한 테러리즘, 핵 확산 등의 미증유(未曾有)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시바삐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무릎꿇어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또 성모님의 전구(轉求)와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성모님께 마귀를 쳐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창세기 3:15).  성모님의 궁극적 승리는 보장되어 있지만, 우리 자신들과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 승리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과 기도와 생활개선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는 선교의 노력 또한 필수적입니다. 


2천년 교회역사 전반에 걸친 교회의 확고한 가르침이며 뿌리깊은 전통인 성모신심은 16세기 경부터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에 의해서 배척되었고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즉 1960년대부터는 가톨릭교회 안에서조차 많이 억제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교회 안에 불거져있는 많은 문제들은 성모신심의 약화로 인해 초래된 결과라고 판단됩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오류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퍼진 결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천주성자를 돌보시고 협력하신 천주성자의 어머니이시며, 교회를 돌보고 계시는 교회의 어머니이실 뿐 아니라, 모든 은총들을 전해 주시는 통로이신데 그 어머니를 멀리하고 은총의 통로를 막아버리니 결과가 참담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의 성모님의 역할을 경원시(敬遠視)하고, 신앙의 탈초자연(脫超自然)과 교회의 세속화를 밀고 나간다면, 과거의 모든 성인들이 믿으시고 실천하신 것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이 될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모신심은 교회의 미래 진로를 결정하는 관건(關鍵)입니다.  온갖 혼란과 무질서를 계속 악화시켜 나갈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하여 진정한 개혁과 가톨릭의 진리와 질서를 회복할 것인가가 우리 앞에 놓여진 선택입니다.   


(위의 글에 뜻을 같이 하시면, 복사하시어 교우들에게 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Mary's Touch By Mail

P.O. Box 1668

Gresham, Oregon  97030, U. S. A.

편집인:  이 분도

2006년 10월 24일, 성 안토니오 클라렛 대주교님 축일


위의 글 영문판은 Mary's Touch By Mail의 지도신부님이신 Robert J. Billett 신부님께서 검사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