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성모님의 진실

공지문의 문제점들

가톨릭 신앙의 보물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나주 공지문에 대한 의견  —  1998년 3월 7일

"나주 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를 읽고서  —  1998년 3월 28일

한국 주교회의 의장 정진석 니꼴라오 주교님 귀하  —  1998년 5월 11일

진리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  —  1998년 8월 16일

나주의 성체기적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  —  1998년 11월

성체성사에 대한 소고 (小考)  —  1999년 9월 8일
 

† 나주 성모님께 관한 의견


나주 성모님께 관한 여러분들의 견해들을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이해를 넓히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하는 희망에서 부족하나마 저의 의견을 밝히려고 합니다. 

분별의 필요성

첫째, 나주 성모님께 관하여 토론하면서, 메쥬고리에나 황 테레사 씨 등 별개의 사항들은 함께 거론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들은 연계된 사항이 아니며, 이를 함께 토론하다 보면 불필요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미 교회의 인정을 받은 성모님의 발현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우리가 이를 더 공부하고 묵상하고 토론해서 이들을 통한 하느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메쥬고리에나 황 테레사 씨의 경우 등 아직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타지역의 사항들에 대해서는 별도로 토론되는 것은 몰라도 나주 성모님과 연결하여 토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메시지, 발현, 기적 등의 보도가 많은 데, 그 중에는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들도 있겠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지성과 양심을 토대로 올바른 분별을 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또 진리와 교도권에 바탕을 둔 교회의 공적 분별을 존중하고 따라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지한 분별의 노력이 없이 발현들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면, 이 발현들을 교회의 교도권 위에다 놓는 결과가 되며, 주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공적 계시 진리보다 우월 또는 그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과오를 자신도 모르게 범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가톨릭 교회는 발현, 메시지, 기적 등의 사적 계시들의 토대 위에 서있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에게 남겨주시고, 성교회를 통하여 전해지고 가르쳐지고 있는 공적인 계시 진리들을 바탕으로 서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입니다.  그리고 성교회 안에는 그 계시 진리를 세상 끝날까지 오류없이 가르치기 위하여 목자들, 즉 교황 성하를 비롯한 성직자 제도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물론 자신들의 지식과 양심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천주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해서 진리를 가르치고 또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공로로부터의 은총을 신자들에게 분배하여 주는 임무와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받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양심과 지식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계시 진리들을 철저히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하며, 또 교황 성하와 주교님들, 신부님들께서 전해주시는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이고 사랑의 순종으로 따라야 합니다. 또 우리 자신의 양심과 지식이 날이 갈수록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계시 진리들에 순응되고 복종되고 부합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악기의 연주자가 전체 관현악단의 연주에 맞추어가듯이.  우리들 자신의 지식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지식 앞에서 자랑할 것이 못되며, 모든 자연적, 초자연적 진리의 근원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 뿐이십니다.  우리가 계시 진리를 깨닫는 것도 우리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천주 성령의 은총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창조주 앞에서 겸손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시는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사적계시에 대하여

그러면, 사적 계시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공적 계시만 있으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사적 계시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그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사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진리의 계시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 당시, 즉 사도들의 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추가적인 진리가 있을 수 없고, 이미 계시된 진리의 변경도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진리의 추가나 기존의 진리에 대한 변경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하는 확증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 어떤 것이라도, 예를 들어 7성사의 핵심 사항에 관하여 어떤 변경을 주장한다면, 이는 거짓입니다.  어떤 예수님의 사진이 예수님의 참 모습인데, 그 사진에 예수님의 성체적 현존이 있다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이는 성체 성사에 대한 추가 사항이므로 거짓입니다.  또, 부활 때 우리의 죽은 육신이 되살아 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육신을 받는다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이는 계시 진리의 변경이므로 거짓입니다.  또 이제는 천주 성자 대신 천주 성부께서 직접 구세주로 오신다라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계시 진리의 변경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고 계신다라고 주장해도 교리의 변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주 성부와 동등하신 하느님이심을 부정한다면, 이것도 교리의 변경이므로 거짓입니다.  성모님께서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거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치심을 부지런히 익혀서, 이를 일상 생활에서 늘 묵상하며, 이를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의 바탕으로 삼고 또 이에 의거해서 메시지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 진위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 직업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깊은 지식과 숙달된 기술이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령 사업인데, 이를 위해 필수적인 지식인 교회의 가르치심들을 우리가 잘 모른다면 너무나 자신에게 무책임한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과제, 즉 전체 교회의 활성화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계시 진리의 교육을 위한 범 교회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맡겼으니 내가 없는 동안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해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전적으로 일임한다,"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 끝날 때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고 (마테오 28:20), "진리의 영이 오면, 그가 너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주시리라,"고 하심으로써 (요한 16:13)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어주실 것임을 다짐해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된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는 유기체, 즉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그 신비체는 성령에 의해 숨쉬면서 진리와 애덕 안에서 성숙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세계와 인간의 자연적인 세계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실존과 성성과 능력에 의해서 자연적인 차원에만 속해 있던 우리들이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생명과 섭리와 활동 속에 점점 깊이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초자연성을 망각 또는 경시한다면, 우리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변질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상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진리와 계명과 7성사를 주시고, 당신의 실존과 성령의 이끄심을 주고 계신다는 것을 잊는다면, 우리는 교회가 단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고 친목하는 단체이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목적을 부여하셨다고 하는 진리를 항상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The First Vatican Council, DS 3005).

그래서, 비록 육안으로 잘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은총 지위에 있는 한, 천주 성령과 우리 영혼 사이의 친교 속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이러한 하느님과의 밀접한 친교를 경험하고 있으며, 표현하기 어려운 영적인 감미로움과 평화와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흘러넘쳐서 이웃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또 우리 생활 속의 고통들과 짐들을 더 기꺼이 질 수 있도록 힘도 주시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내적인 평화와 감미로움이 항상 계속되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약한 본성과 자애심 때문에, 우리는 자주 하느님의 선물들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또 자신의 끊임없는 성찰과 통회 그리고 때로는 진실된 고해 성사를 통해서 영혼의 순진성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외적인 징표들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비록 성인 성녀들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러한 경험을 하신다고 봅니다.  결코 우리가 밝히거나 자랑할 것도 아니며, 또 필요한 사항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기적들은 우리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신앙 상의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주 성령의 가시적인 손길과 맥박들이 개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보다 공적인 차원에서 전체 성교회를 위하여 주어질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만 들더라도,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기적의 그림과 메시지를 주신 것은 결코 완디에고 개인이나 그 주변의 몇몇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830년 불란서 빠리에서의 기적의 메달, 1858년 불란서 루르드와 1917년 폴튜갈의 파티마에서의 성모님의 발현과 메시지, 1973년 일본의 아끼다에서의 눈물과 메시지 등도 몇몇 개인들이나 그 지방만이 아니라 전체 교회와 전 인류에게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질의 계시들은 그 메시지 내용 상으로나, 또는 징표의 성격을 고찰함으로써 비록 그 계시들이 사적 계시로 분류되드라도, 매우 중요한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징표들에 대해 전체 교회가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안에 내포된 하느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 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징표들을 통해서, 특히 그 시대에 필요한 경고와, 격려와, 진리의 조명을 주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와 뜻하시는 바를 더 확실히 깨닫고 충실히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š문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7조).  구약 시대에도 노아와 요나 등을 통하여 회개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셨는데, 노아를 통한 경고는 무시되었으므로 세상이 징벌을 받았으며, 요나를 통한 경고는 받아들여졌으므로 니느웨 성은 무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 역사 상의 성모님께 관한 교리의 선포라든가, 성인들의 저서들, 성모님의 발현, 메시지, 기적 등은 그냥 하느님께서 심심하셔서 허락하시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방향성이나 목적성도 없이 아무렇게나 주어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마귀의 세력이 여인에 의해서 분쇄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을 통하여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를 주셨으며, 구세주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임종 직전에 당신의 어머니이신 그 여인을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참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세주의 어머니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중에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이심을 재확인하심, 1964).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생활에 긴밀히 그리고 필수적으로 개입되시어 당신의 자녀들이 오류와 죄악으로부터 벗어나 당신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충직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성모님의 이러한 활약의 일환으로써, 성모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현존과 원의를 메시지와 여러 가지 징표들을 통하여 드러내어 주십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특별한 활동들은 교회가 신앙적, 도덕적 위기에서 벗어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에 바로 도달할 수 있기 위하여 중요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아니시라, 하느님의 피조물이시며, 딸이시며, 여종이십니다.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천주 성자 즉 하느님의 어머님이시며, 천주 성령의 정배이시며, 하늘의 여왕이시며, 우리들 모두의 천상 어머니이며, 구세주의 협력자이시며, 은총의 중개자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세주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를 구세주 안에서 양육하시기 위하여 성모님께 필수적인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깊은 성모 신심은 부녀자들이나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지녀야할, 우리의 성화와 구원을 위해 현실적으로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전체 교회를 위하여 특별히 하시는 일들에 모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겸손하고 진지하게 자녀로서의 사랑으로 귀기울이고 응답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새 신덕 도리를 주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실천적인 메시지를 주고 계시며, 또 계시 진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를 들어 나주에서 지난 1985년부터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그 일들의 매개체가 되었던 율리아 씨나 기타 주변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만을 보고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인간이기 ‹š문에 인간적이고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주란 곳은 초라한 곳이지만,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주로 초라한 곳들을 찾아오셨고 초라한 이들을 도구로 쓰셨습니다.  2천년 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인간이심만을 보고, 그분께서 사셨던 나자렛의 보잘 것 없음을 보고 비웃으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도 나주와 거기 있는 분들을 보면서, 그들을 도구로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너무나 귀하고 중요한 하느님의 말씀들과 징표들을 지나쳐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주에서 정확하게 도합 700일 동안 눈물과 피눈물을 흘려주시고, 또 정확히 700일 간 계속하여 향유를 흘려주시고, 12번 성체가 볼 수 있는 피와 살로 변하게 하시고, 7번 성체가 위에서 내려오는 기적을 주셨으며, 병든 가정들이 화목하고, 죄인들이 회개하며, 사제들이 새로운 용기를 얻으며, 불치병이 치유되고,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향기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 등의 숫자는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메시지들의 내용 또한 현 세계와 교회 안의 문제점들을 핵심적으로 지적하고 계시며 또 그 해결책도 알려주시며, 그 내용 전반에 걸쳐서 교회의 공적 계시 내용들과 심오하면서도 완전한 화합을 이루고 있는 것 등을 볼 때, 과연 나주에서의 계시들은 지금까지의 성모님의 모든 메시지들의 종합이다라고 하신 교황청 소속 신학자 마티아스 페레스 메리노 몬시뇰의 말씀(1990년 8월)을 더욱 수긍하게 됩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중학교까지밖에 못 다니고, 메시지 시작 당시 성교회에 들어온지도 몇 년 안되었던 율리아 자매가, 아니 다른 어떤 분이라도 그와 같은 장엄하고 조화되고 심오하고 사랑에 찬 메시지들을 조작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나주 공지문을 대하면서

이번 윤 공희 대주교님의 공지문에 관한 문제점들에 관한 논의는 다른 지면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나주 공지문을 읽고서").  해당 지역의 교구장께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신 사항이니 신자들이 이를 존중하고, 또 그 사목 지침들은 특히 해당 교구 안에서 실시되어야 합니다.  뿐 아니라, 정상적인 경우에는 다른 교구들에서도 그 공지문이 화합과 존경의 정신 속에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지문의 문제점을 논하고 대주교님 결정의 재고를 청원해야만 하는 심정은 매우 착잡한 것입니다.  대주교님은 바로 12 사도들의 후계자 중의 한 분이시며, 이번 공지문 여하를 막론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런데도, 공지문의 내용에 대해 이론을 논하는 것은 매우 곤혹스럽고 또 대주교님께는 죄송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를 피할 수 있으면 하는 느낌 간절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공지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느냐,"라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왜냐 하면, 공지문에는 진리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이번의 부정적인 결정도 그러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평신도가 감히 진리 운운하면서, 대주교님의 결정에 수긍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교만이고, 불순명이다,"라고 말씀하실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부모님이 어린 자식들에게 밥을 먹여주고 계십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없이 즐겁게 밥을 받아 먹습니다. 만약, 맛이 없다라든지, 더 비싼 고기 반찬을 달라고 하면서 주는 음식을 받아먹지 않고 말썽을 피운다면, 참으로 고약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밥을 잘 받아먹고 있던 아이의 입 안에서 갑자기 돌이 씹혀졌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울쌍이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얼른 뱉으라고 하시고, 밥에 돌이 또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밥을 먹여주십니다.  만약 그 때 부모님께서, "아니, 돌은 무슨 돌?  주는대로 받아먹을 것이지.  내가 밥과 돌도 구별 못하고 섞어서 줄 것 같으냐?"라고 역정을 내신다면, 매우 예외적인 경우가 되겠습니다.  교회에서도 교도권이 하느님께로부터의 진리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86조).

빌라도가 체포되어 오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왕이냐?"  에수님께서는, "...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함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한 18:37).  천주 성자께서 강생하신 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진리들을 가르쳐주시고, 또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사업을 계속하는 교회 역시 인간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계명을 지키도록 이끌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나누어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진리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2천년 간의 교회 역사 전체가 온갖 이단들, 오류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였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느님의 속성이며, 하느님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십니다.  반면, 오류는 마귀의 속성이며, 마귀는 모든 오류의 아버지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주지만, 오류는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이끌며 우리 영혼의 건강을 해치는 독소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고 (요한 8:32), 진리가 우리를 성화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 17:17).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므로, 그의 백성들은 진리 안에서의 생활에로 불리어져 있다,"라고 교회는 가르치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65조).  따라서,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진리를 지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바로 진리의 단체이며 진리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많은 이들이 가톨릭 교회에로 귀의하는 것은 교회 안에 참다운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우리가 교회 안의 목자들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그분들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주님께서 주신 권위로써 가르쳐주시며 주님의 은총을 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계시 진리가 세상 끝날까지 오류 없이 교회 안에 전해지고 가르쳐질 수 있도록 천주 성령의 이끄심을 통하여 보호하여 주고 계십니다.  특히 교황님과 전 세계 주교님들께서 교황님과 일치하여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공적인 해석이나 가르치심을 주실 때에는 일체의 오류가 섞이지 않도록 보장하여 주십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서, 만약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 안에 어떠한 오류가 단 하나라도 섞인다면,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마귀의 세력이 침투했다라는 말이 되며 이는 교회가 지옥의 권세를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주님의 약속(마테오 16:18)에 어긋나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주교님들은 교황님과의 일치, 전체 주교님들과의 일치를 통하여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침들에 충실하심으로써 그 무류지권에 참여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 주교님들께서 신앙에 관한 결정을 하실 때에도 무류지권이 적용됩니까?  그렇지 않다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p. 300, Dr. Ludwig Ott, Tan Books and Publishers)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교회 역사상에 일부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이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치심을 벗어났던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 네스토리우스 파, 포시누스 파, 루터 파 등등)  오늘의 현실을 보아도, 미국에서는 이미 교황님께서 여성 사제직은 안된다고 거듭 선포하셨는데도, 아직 이를 주장하는 일부 주교님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을 따르는 신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혼란과 고통이 되겠습니까?

나주의 성체 기적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가?

최근에 나주 성모님께 관련하여 한국의 어느 몬시뇰께서 "(나주의) 성체 변화 현상이 교회의 정통 신앙에 위배되므로 .... 굳이 번거러운 과학적 분석을 할 필요가 없을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심으로써, 성체 변화 현상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점이 이번 결정의 핵심적인 근거 중의 하나가 되었음을 재확인하셨으며, 이는 공지문 안에서도 이미 언급된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가르침에 부합되느냐 않느냐, 즉 진리인가 오류인가 하는 문제가 핵심적인 사항입니다.  만약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참으로 위배된다면, 나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거나 생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나주를 살리기 위하여 진리를 양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꼭 같은 이유로 인하여, 만약 이번 공지문 내용의 일부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시급히 이를 시정해주셔야 하며, 이번 결정의 번복내지는 재조사를 시작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만약 공지문에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 있는데 시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다면, 이는 매우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이번 공지문 내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체 성사에 관한 부분들입니다.

(1) 공지문에서는 "윤 율리아씨가 입에 모신 성체가 입안에서 살덩어리와 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도,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제의 축성 후에도 성체의 외적인 형상이 변해서는 안되며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남아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얼핏 보면은 하자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정확히 분석하여 과연 이것이 교회의 가르치심과 부합되는지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위에 밑줄이 쳐진 부분은 교회의 교리를 문자 그대로 인용하신 것이 아니고 의역하신 것입니다.  특히 "'실체 변화'한 후에도 그 형상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여야 하는"이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부분에 담겨진 뜻이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되지 않으며, 따라서 교리의 왜곡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공지문에서 언급하시는 원전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이 문제에 적용이 된다고 보는 DS 1652, 즉 트렌트 공의회의 성체 성사 관련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If anyone says that in the sacred and holy sacrament of the Eucharist there remains the substance of bread and wine together with the body and blood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denies that wonderful and singular conversion of the whole substance of the bread into the body, and of the entire substance of the wine into the blood, the species of the bread and wine only remaining, a change which the Catholic Church most fittingly calls transubstantiation, let him be anathema. (번역: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 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남아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외형만 그대로 남아있고, 빵의 실체가 완전히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의 실체가 완전히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절하게 "실체 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이 말씀은 가톨릭 교회의 신덕 도리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담겨진 의미에 대하여 일체의 왜곡이나, 첨가 또는 빠트림이 없이 정확하게 해석되고 가르쳐지고 믿어져야 합니다.  특히 밑줄쳐진 부분이 지금 토론의 초점이 되고 있는데, 이는 빵과 포도주의 외형만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지만,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화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제가 축성을 할 때 실체 변화만 있고 외형 변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외형 변화가 없는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써 이를 극복하기를 주님께서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 교리는 사제의 축성의 효과가 어떠한가를 설명하는 교리입니다.  이것이 이 교리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공지문에서는 이를 달리 해석하여 사제의 축성으로 실체 변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변해서는 안된다라고 설명하시는데, 이는 교회의 가르치심이 아닙니다.  성체가 이루어진 후에 성체가 감실 안에 모셔지면, 상당 기간 변화없이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서히 변질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또 성체를 우리가 모시면, 우리 몸 속에서 얼마 후에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 역시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까?

율리아 자매의 입에서 성체가 볼 수 있는 살과 피로 변한 것은 분명히 사제의 축성이 끝난 이후였습니다.  율리아 자매가 성체를 영한 것도 사제 축성 행위의 일부가 아니었고, 입속에서 성체의 외형이 변한 것도 사제 축성 행위의 일부가 아니었는데, 여기에 사제 축성의 효과에 관한 교리가 적용되는 것은 부당합니다.

만약 공지문의 말씀이 옳다면, 교회 역사상 일어난 많은 성체 기적들이 다 부정되어야 하며, 그 중 다수를 인정하신 교회의 결정들이 다 실수였다라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교리를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여, 우리의 성체 신심을 확고하게 해주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성의에 순종하여 성모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귀중한 성체 기적들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공지문에서는 또 "윤 율리아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성체의 기적이라고 함부로 주장하고 있는 현상들은, 유효하게 서품받은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만 성체가 이루어질 수 있고,"라는 교회의 성체에 대한 믿을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되어있습니다.  1215년에 개최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일반적인 사제직을 주장하는 왈덴시안 이단에 대항하여 유효하게 서품받은 사제만이 성체 축성을 할 수 있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DS 802).  즉, 유효한 서품을 받은 사제가 아닌 수도자나 평신도, 이단의 성직자, 기타 그 어느 인간도 성체를 축성할 수 없으며 또 축성해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교리에 하느님의 특별하신 개입조차도 있을 수 없다라는 뜻은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 교리가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대항하여 선포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의 사제직을 주장하는 이단에 대항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진리가 하느님의 개입하심을 부정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성, 즉 영혼과 육신을 신성에 결합하여 계시기 때문에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동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체의 모습을 직접 취하시기 위해서는 실체 변화가 필요치 않으십니다.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하기 위해서는 사제의 축성이 필요합니다.  1995년 7월 1일 및 1996년 7월 1일에 율리아 자매는 십자고상의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변하시어 당신의 일곱 상처로부터 성혈을 흘리심을 보았고, 곧 그 성혈이 하얀 성체로 변하여 내려오셨는데, 그 내려오는 모습을 기도회에 참석했던 많은 이들이 목격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성혈이 성체로 변하는 것은 외형상의 변화이며 실체의 변화가 아닙니다.  거기에 사제의 축성이 없었다고 하여, 내려오신 성체를 단순한 면병으로 취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특별한 방식으로 오셨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머리로 왈가왈부할 성질의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아직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우리 시대를 위한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에 대한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우리가 겸손하게 하느님의 징표를 받아들이고 기다려야 할 줄 압니다.

(3) 공지문에서는 또 "그리스도와 그분 성령의 힘은 성체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개인적 성덕과 관계없이 성사 안에 성사를 통하여 작용한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정확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1994년 11월 24일 교황 대사님께서 나주에 오셔서 목격하신 성체 기적을 부정하는 데에 적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미카엘 대천사가 한 사제로부터 성체를 모셔왔다고 하는 것은 성체 축성이 이루어진 이후였으므로 유효한 성체 축성이 부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항목은 교리의 잘못된 적용입니다.

결    론

기타 공지문 내용 상의 문제점들은 교리에 관한 것이 아니며, 위에 언급된 다른 글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이 글은 어느 누구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오로지 주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진리를 바로 지키려는 노력이며, 이러한 진리의 올바른 이해를 토대로 하여 성모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메시지들과 징표들을 우리가 경솔하게 배척하기보다는 신중히 분별하고 또 그 신빙성이 인정되었을 때에는 전체 교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교회의 활성화와 개개 신자들의 회개와 전 세계의 교화를 위하여 과거 16세기에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 약 천만명의 사람들이 성교회로 귀의했던 것처럼 크나큰 은총의 열매가 열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입니다.  나주에서의 일들이 율리아가 꾸민 것이고 그 주변 사람들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면, 일순간의 지체도 없이 이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마귀의 장난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우리가 이를 배척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이 엄청난 가능성에 대해 모든 신자들이 진지하게 기도하고 생각해보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모쪼록 이번 일이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의 참뜻을 더 진지하게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성모님과 함께 충실히 수행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께 영원한 영광이 있으시기를.

이 분도 드림
Gresham, OR, 97030
1998년 3월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