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성모님의 진실

공지문의 문제점들

가톨릭 신앙의 보물들

가톨릭 신앙의 핵심

특수계시의 분별

 

 

1. 만일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제(實際)로, 그리고 실체적(實體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계시며, 따라서 그리스도 전체가 계심을 부정하고, 단지 그분께서 그 성사 안에 징표로서, 상징으로서 또는 능력으로서만 계신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1)

 

 

2. 만일 누구든지 신성하고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빵과 포도주의 실체(實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함께 남아 있다라고 말하며,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그대로 남아 있고 빵의 실체 전부가 살로 변하며,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피로 변하는 이 훌륭하고도 유일무이한 변화, 즉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실체변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를 부인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2)

 

 

3. 만일 누구든지 존경받아 마땅한 성체성사에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한 쪽의 형상 하에서도 그리고 그로부터 분리된 각 부분에도 그리스도의 전체가 내재하심을 부정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트렌트공의회(DS 1653)

 

 

 

   

 

 

 


나주 공지문에 대한 의견  —  1998년 3월 7일

"나주 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를 읽고서  —  1998년 3월 28일

한국 주교회의 의장 정진석 니꼴라오 주교님 귀하  —  1998년 5월 11일

진리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  —  1998년 8월 16일

나주의 성체기적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  —  1998년 11월

성체성사에 대한 소고 (小考)  —  1999년 9월 8일
 

"'나주 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를 읽고서


가톨릭 다이제스트 1998년 2월호에 실린 나주 관련 기사
를 비판하는 글이 1998년 3월 25일자로 컴퓨터 pc통신 상에 게재되었다.  교회 안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신자들 사이에 토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고, 일치된 견해에로 접근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이러한 토론에 있어서 주의할 것은 자기의 뜻과 같지 않다고 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따라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기 쉽다는 점이다.  토론에 앞서 대전제가 되는 것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가르치심과 그분의 거룩하신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 중 누가 옳았고 누가 틀렸고 하는 것은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든 스스로의 오류나 부족함을 인식하게 될 때에는 즉시 이를 인정하고 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해야 하며, 그 분 안에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먼저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글을 읽고서 그 글을 쓰신 분과 동감하는 점들을 밝히고저 한다.  첫 째, 우리가 무엇보다도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가르치심 즉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에 관계되는 모든 사항들이 이 진리에 의해서 분별되어야 한다.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께서는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는 전제 하에서 여러 가지 많은 내용들을 전개하고 계시는데, 정말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다른 내용들은 고려할 필요조차도 없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얘기는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

 

 

둘 째, 우리는 진리를 이해하고 배우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교도권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펴실 때 우리 인간들의 의견이나 주장들을 참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과 순종의 정신으로 당신께서 주시는 진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인정하여 받아들인다.  동시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성과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리들을 로보트처럼, 노예처럼 기계적으로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우리의 지성과 자유 의지를 발동하여 그 진리들에 겸손되이 동의하면서 사랑과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비록 하느님의 진리들을 순명으로 받아들이지만, 우리의 양심이 성령의 빛 안에서 그 진리들의 진실성을 수긍하게 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느님의 무한하신 진실성과 지혜와 좋으심에 기쁨으로 감탄하고 찬미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진리의 엄위하심, 그리고 당신의 교회 안의 교리와 교도권을 통하여 그 진리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라고 하는 대전제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가 없을 줄 알며, 그렇기 때문에 이 토론은 반드시 주님 안에서 공통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추가로,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실린 글의 내용에 대해서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가 지적했던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첫 째, 공지문의 영문판에 나왔던 "The Magisterium"이란 단어가 "無謬之權"이 아니라, "교도권"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The Magisterium"은 무류지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교황님과 또 교황님과 일치하는 전체 주교님들의 교도권을 뜻한다.  각 교구의 교구장이신 주교님들께서 지니신 교도권은 "episcopal magisterium"이라고 하며, 주교님들은 교황님과 일치하고 또 정통적 교회의 가르치심에 충실함으로써 무류지권에 참여하시게 된다.

 

 

둘 째, 나주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많은 외국 순례자들이 나주를 찾아오게 되는 것이 나라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라고 하는 말은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드라도, 지금 신앙과 진리를 논하는 자리에서 전혀 부적당하고 유익하지 못한 내용이라고 본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께서는,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치심에 어긋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계시며, 그분의 글 내용 전체가 그 전제 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 "과연 광주 대교구의 공지가 신자들을 합리적으로 설득시키기에 부족한, 또한 신학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이 있는가?" (2) "과연 광주 대교구가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면서 교회의 명에 따르도록 하여 교회 일치를 역행하고 있는가?" (3) "그들이 교회의 교리와는 다른 것을 원하는 혼란스러운 마음이 당혹해하는 것은 아닌가?" (4) 계시된 진리에서 벗어난 잘못된 열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 않는가?"  (5) "나주에서의 일이 교회의 신앙적 혼란을 야기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나주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치심에 어긋나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대주교님께서 교도권을 가지고 공지문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라는 뜻인 것 같고, 또 거듭하여 "사목"지에 발표된 리순성 신부님의 글("천주교 광주 대교구장의 공지에 나타난 성체 성사의 실체 변화에 대한 이해")을 참조하기 바란다라는 말을 거듭하고 있다.  리순성 신부님의 글에 대해서는 이미 별도로 논평문들이 한글 및 영문으로 나갔으므로 여기에서는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성체 도리에 대한 이 순성 신부님의 글을 읽고서" 및 한 바오로 형제의 글과 "A New Theology of the Eucharist for Both Catholics and Protestants?").

 

 

사실 대주교님의 공지문에 교회의 가르치심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 있다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다.  주교님들은 그리스도의 12사도의 후계자들이시며, 주님을 대신하여 진리를 가르치시고 신자들을 사목하시는 엄위하신 목자들이시다.  모든 신자들은 주교님들께 깊은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 하며, 또 그분들께 순종해야 한다.  이번 공지문의 여하를 불문하고 대주교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며, 또 모든 신자가 그래야 한다.  그리고 주교님들을 도우시는 사제님들을 항상 존경하고 사랑하고 도와드려야 한다.  그런데, 어찌 감히 그분들의 말씀에 異議를 제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스런 일이고, 또 이런 일을 지켜보는 분들에게도 매우 당혹스런 일이다.  만약 이런 일이 신중하지 못하게, 정당하고도 중대한 사유없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으로 온당치 못한 일이며 지탄받아야 될 일일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의 일이라도, 신부님이나 주교님께서 어떤 경우에 잘못된 내용을 말씀하신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자들에게는 성직자들을 판단할 권리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  그렇다면, 의문을 제기하고, 토론조차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는 분명히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봉사하는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제86조).  다시 말해서, 교도권은 진리를 왜곡됨이 없이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 주어져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사항에 진실성을 부여하거나 박탈하는 것은 교도권의 고유 기능이 아니다.  진실성의 근원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니 교회는 이를 교도권에 의거해서 바로 분별하고 가르칠 임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도권에 의한 분별과 가르침에는 반드시 천주 성령의 도움이 함께 하신다.  그리고 또 이에 성직자들께서는 지성과 자유 의지로써 협력하시게 되는 것이다.  교도권은 하느님의 진리에 봉사하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하느님의 도구이다.  그리고, 그 도구가 성직자들게 위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그 도구가 오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주교님이 교도권에 의거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셨다고 하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다는 진리가 부정되거나 변경되는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교도권이 진리에 바로 봉사하지 못하고 진리를 왜곡해서 전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주교님의 사목 지침들은 특히 해당 교구 안에서 순명되어야 한다.)

 

 

그러면, 주교님의 판단에 그러한 오류가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이는 참으로 신자로서 묻고 싶지도 않은 질문이며, 대개의 경우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를 위해서 그 질문은 답해져야만 한다.  우리는 개별 교구의 교구장 자격으로 주교님들께서 신앙과 윤리에 관한 판단을 하실 때 필연적으로 무류지권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Dr. Ludwig Ott, Tan Books & Publihsers, P.300).  개별 주교님들께서 교황님과 일치하여 교회의 정통 교리에 충실하실 때에는 무류지권에 참여하시게 되지만, 그러한 일치와 충실이 결여되었을 때에는 무류지권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과거의 교회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의 교회 상황을 살펴볼 때 불행스럽게도 주교님들이나 사제님들께서 진리와 함께 하지 않으셨던 몇몇 예들을 볼 수가 있다.  과거의 네스토리우스 파와 포티누스 파 등은 주교님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오늘날에 와서도 미국 및 캐나다의 일부 주교님들께서는 교황님께서 거듭 거부하신 여성 사제직을 찬성하고 있으며, 동성 연애를 긍정적으로 보시며, 또 면병 대신 식빵을 사용함으로써 감실조차 없애려고 하시는 현황이다.  (이번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 안의 문제점들은 대주교님께서가 아니라, 공지문 내용의 신학적인 뒷받침을 하신 신학자들께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예들로 인하여 우리들의 주교님들이나 신부님들께 대한 존경과 사랑에 절대로 금이 가서는 안된다.  교황님, 주교님, 신부님께 불손하고, 또 나라에서는 나라의 권위와 법을 경시하고, 학교의 스승을 없이 여기며,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는 풍조는 결코 하느님의 뜻에 부합될 수 없다.  바울 사도께서도 모든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했으니 이러한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야말로 질서있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건일 것이다.  동시에 권위를 위탁받아 있는 분들은 그 권위를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맡겨진 이들의 선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번 나주 관련 공지문 내용에 교리상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거듭하여 나오고 있는 것은 나주를 살리고 안 살리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의 훼손을 막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발생되는 지극히 중대한 사안이다.  가톨릭 교회는 세상을 비추는 하느님의 진리의 등대이며, 모든 신자들은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

 

 

이번 공지문 상에서 교리상으로 지적되고 있는 점들은 주로 성체 성사에 관련된 부분들인데, 이에 대해서는 별지에서 상세히 논해졌으므로, 여기서는 줄이기로 한다 ("나주 성모님 관련 공지문을 읽고서"와 "나주 성모님께 관한 의견").  이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개인들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교황청에서 다루어주실 줄 안다.  물론 광주 대교구 또는 한국 주교단 차원에서 해결해 주신다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그리고 성체 성사에 관한 문제는 비록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교회에 관련된 것이므로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논하고 판단함으로써 성체 성사에 대한 정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전 세계 신자들이 더 확실히 깨닫고 믿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께서는 "신앙과 도덕의 보전을 위해 노력하는 목자를 음해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셨는데, 정말 이러한 논의가 우리의 목자들을 음해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또 필자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환시나 기적을 신앙보다 강조하여 우리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나주에서의 일들을 너무나 잘못 이해한 데에 기인한다고 본다.  이미 누차에 걸친 글에서 강조되었지만, 사적 계시들은 공적 계시의 위에 서거나 동등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공적 계시를 밑에서 보조하는 것이다. 공적 계시 밑에 종속되어 이에 봉사하지 않는 것이면, 발현이나 메시지 뿐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어떠한 주장이나 학설이나 대화나 그 어떤 것이라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주문제를 생각해 본다'를 비판하며"의 필자는 또 "예수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메시지가 뭐가 부족하여 굳이 성모님을 통해 또 말씀하시는가?"라는 의문을 던짐으로써 모든 사적 계시들을 거부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공적 계시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에 완성되었다.  그 계시들을 우리가 믿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의 길이 단지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셨다 (마테오 7장 21절).  그리하여, 우리가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을 걸으며 성부의 거룩하신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족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반성하고 회개하고 또 때로는 고해 성사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됨들을 시정해야만 한다.  우리 교회 전체, 그리고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정체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성장되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부분적으로 병이 들 수도 있다.  교회 전반에 걸쳐서 신앙과 애덕이 식을 수도 있고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오류들이 침식해들어올 수도 있다.  이러할 때에 교회를 끝까지 지켜주시기로 보장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인간들에게 경고와 격려와 도움을 보내주신다.  어려운 시기에 큰 성인들을 보내주시기도 하시고, 성모님을 보내시기도 하신다.

 

 

16세기에 성모님의 기적 그림과 메시지를 통하여 천만 명에 가까운 멕시코 민족 거의 전부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켜주신 것은 하나의 좋은 예이다.  그 후에도, 빠리에서의 기적의 메달, 루르드, 파티마에서의 발현과 메시지 등을 통하여 교회의 어머니로서, 모든 은총의 중개자로서, 그리고 보속의 협조자로서의 성모님의 역할이 우리 각자의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하여 깨우쳐주고 계신다.  이는 새로운 진리를 펴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셨던 진리가 더 깊이 이해되고 더 강력히 위력을 발휘하게 됨을 뜻한다.  마치 씨가 뿌려지고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교회도 그리고 교회 안의 진리에 대한 인식도 시대를 흐르면서 성숙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복음서의 메시지가 이미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성모님을 통하여 또 말씀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의 흐름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되는 것이라고 본다.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주님께서 이끄시는 구원의 역사는 동시에 우리의 구원을 원치 않는 마귀와의 투쟁의 역사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담과 에와를 죄에로 이끈 마귀는 아직도 끊임없이 오류를 인간들 마음 속에 주입시키고, 인간들을 분열시키고, 타락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마귀의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수많은 거짓 발현, 거짓 기적들을 들 수 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거짓 메시지와 거짓 발현들에 매혹되어 휩쓸리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진리에 의거해서 냉철한 분별을 해야 하며, 또 교회에서도 그러한 미신적인 현상들을 단호히 격파해주실 것을 기대한다.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주님의 가르치심에 부합되는지 하는 것과 참된 징표라고 볼 수 있는 진정한 기적들이 있는가 하는 점을 철저히 조사함으로써 충분히 분별될 수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신심 활동이 그러한 잘못된 곳으로 미혹되지 않도록 그리고 신자들이 공적 계시를 보다 깊이 확실히 이해하게 되도록 신학자들의 적극적인 공헌이 기대된다.

 

 

또 한 편으로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무조건 배격하는 현대주의 사상 역시 경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분이시며, 우리 인간들에게 초자연적인 목적을 부여하시고, 초자연적인 생명을 주시며, 초자연적인 은총의 도움을 주고 계신다.  교회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현실이다.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육적 현실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육적 현실을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올려주시려고 하신다.  우리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서 하느님과 그분께 관한 모든 것들을 아주 먼 곳으로 밀어내어버림으로써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세계와 우리의 자연적인 세계를 격리시키고저 하는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인성을 취하사 우리 가운데 실제로 거하시며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성부께로 이끌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사랑하며,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천주 성자의 강생 및 그분의 활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는 보속의 협조자, 우리의 모후이신 티없으신  사랑의 성모님께 의지하는 작은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분도
Gresham, Oregon,  U. S. A.
1998년 3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