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
천주 성자께서 강생하여
오셨을 때 그분을 배척하고 죽음에로 몰고간 이들은 바로 하느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부하며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의로움에
차있던 그들이 막상 하느님께서 그들 앞에 오셨을 때 그분을 내친 것이다.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는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대로 전하고 행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하느님께서 위탁하신 권한과 지위를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는 데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께서만이 모든 진리와 역사의 주인이심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틀에
박힌 사고 방식과 생활 습성 속에서 안주하려던 그들이 참된 진리가 그들의 앞에 제시되었을 때 이를 솔직하게 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배척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그리고 하느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자세가 되어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중에 이러한 위선적인 태도에 대하여 많이 꾸짖으셨다 (마태오 15:8-9).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어린 아이처럼
가난하지 않으면 천국을 얻을 수 없을 것임을 밝혀주셨다.
오늘날의 상황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특히 주님께서 주시고 교회에 위탁하신 가르침들을 인간들의 편리에 맞게 적응시켜서 이를 정착시키려는 이들에게는 "순수한 진리,"
"변질되지 않은 복음서의 교훈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이란 개념이 도무지 취향에 맞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00년 간 교회가
가르쳐오고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정성껏 실천해온 주님의 가르치심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교회 안에 얼마나 참된
진리가 가리워져 있는지를 잘 분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은 이들, 심지어는 일부 성직자들까지도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계심을 부정하고 있다. 아직 사해지지 않은 대죄가 있을 경우 영성체에 임하기 전에 고해 성사부터 보아야 된다고 하는 교회의 가르치심이 너무나
자주 무시되고 있다. 미사 참례의 의무가 있는 주일과 축일에 미사를 임의로 빠지는 것이 대죄가 된다는 사실 또한 자연스럽게 얼버무려지고 있다.
아예 죄라는 개념조차가 흐려져 있다. 죄의 개념이 흐려지면 그 반대의 개념, 즉 거룩함과 성화의 개념도 흐려지며, 구원과 보속의 필요성까지도
모호해진다. 개신교 신자들이 흉을 볼까봐서인지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표시하고 실천하기를 자제하고 있는 경우 또한 얼마나 많은가.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자기 부정과 희생 보속의 진리 또한 낡은 개념에 불과하다는 생각 역시 널리 만연되어 있다. 교회가 세상을
진리로써 교화한다기보다는 교회를 세상에 타협시키고 그 진리들과 계명들을 중화시키려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 아닌가. 16세기에 개신교가 나와서
성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갔을 때 교회 안에서는 트렌트 공의회를 통하여 질서와 기강을 다시 잡음으로써 교회는 새로운 힘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현대화, 개인화, 세속화의 정신이 교회 내부에 널리 침투함으로써 교회를 안으로부터 병들게 하고 있다. 내부적으로
진리가 가려지고 기강이 흐트려지고 있다.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가 지옥의 권세에 굴복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여 주셨으니, 이러한 문제들이 결국은
수습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심각하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그 심각성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로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나주에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하여 수많은 징표들을 보여주시고 중요한 메시지들을 주심으로써 인간들이 영적인 잠에서 한시 바삐 깨어날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나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이 꾸며낸 것도 아니고, 우연히 자생한 일도 아니며, 하느님께서 심심풀이로 하시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이들이 그 일들을 너무나 경솔하게 지나쳐버리면서 안심하고 있다. 나주에서의 일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이를
부정해버린 광주 대교구의 공지문이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실이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우려를 야기시키고 있다. 해외의 많은
신자들이 "어째서 한국 교회에서는 교리를 잘 모르는가?"라고 하는 기막힌 질문을 하고 있다. 또 많은 이들이 이번 공지문이 대주교님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니, 그 내용에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 신자들이 의문을 제기할 성질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교회의 가르치심을 잘
모르는 데에서 야기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5조에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고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즉, 교도권은 진리를 부여하는 권한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의 진리를 바르게
전해야 하는 봉사의 기능인 것이다. 따라서 교도권에 의거한 공지문에 진리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다면, 이를 시급히 인정하고 시정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것만이 전체 교회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다.
또 어떤 이들은 "나주에서의
일들이 설사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공적 계시, 즉 믿을 교리(信德道理)가 아니므로 반드시 믿어야 할 의무가 없다,"라고 한다. 물론 하느님께서
나주에서 새로운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 후에는 새로운 공적 계시가 있을 수 없음을 교회에서 가르치신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6조).
그러나, 나주에서의 일들이 새로운
믿을 교리라고 주장되거나 암시된 일도 없으며, 또 교회에서는 믿을 교리를 믿는 것만으로 우리가 구원된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믿는 것만으로
구원된다고 하는 것은 루터가 범한 오류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마태오 7:21).
그러므로, 나주에서의 일들이 믿을 교리가 아니므로 무시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일인가를
묻는 것이 참으로 필요한 질문이다.
그 일들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들이나 마귀에 의한 것인가를 신자들 각자가 자신의 양심과 신앙에 기초하여 분별하여야 하며, 또 조사 위원회에서 교회의 공적인
분별을 위하여 조사해야 할 사항이다.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면 아무도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모두가 정성을 다하여 귀를 기울이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할 사안이다. 우주 창조 및 인류 구원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하느님 중심의 역사이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해놓으시고, 또 구원 사업을 이룩해놓으시고 멀리 가버리셨으므로 나머지는 인간들이 알아서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인류 역사의 목적은 하느님뿐이시며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역시 하느님이시다. 대개는 자연적인 방법들을 통하여, 때로는 초자연적인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다. 이러한 하느님의 개입하심이 사도 시대에 끝난 것도 아니고, 교회 역사 내내
계속되어 왔으며,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인간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에 겸손되이 시선과 귀를 기울이고 따라야 하며, 교회에서는
이를 막을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도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주에서뿐 아니라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진정한 하느님의 개입하심에 대하여 신자들은 겸손하고 진지하게 마음 문을 열고 있어야 하며, 또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기적들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한 특별한 기적들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중요한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천주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천주 성부의 말씀이 들려왔다. 이는 단순히 기적이라기보다 삼위 일체의 도리를 드러내주시는 대단히 중요한
진리의 계시였다. 예수님의 현성용의 기적 역시 당신께서 인간이신 동시에 참 하느님이심을 보여주는 중대한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나주 및 세계의
여러 곳에서 성모님 상을 통하여 눈물과 피눈물을 보여주시는 것 역시 기적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보속의 협조자로서의 성모님의 역할을
재강조하여 보여주시는 것이며 또한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니고 계시는 지극한 사랑의 사실을 역력히 보여주시는 것이다. 향유와 향기 역시
성모님의 말씀대로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과 우정을 의미하는 징표들이다. 성체가 살과 피의 모양으로 변하는 기적들은 주님께서 성체 성사 안에
실제로 계신다고 하는 중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금 깨우쳐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적들은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는 특별히 중요한
징표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징표들을 우리가 배척한다면, 그 징표가 담고 있는 진리 자체에 대한 배척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루르드에서의 성모님 발현과 메시지의 핵심은 성모님의 무염 시태(無染 始胎) 도리였다. 따라서 루르드의 발현, 메시지, 기적적인
치유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자로서의 의무는 아니라 할 지라도 이를 거부한다면 무염 시태 도리조차도 거부 내지 경시하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모든 징표 중에서도 인간으로
강생하신 천주 성자, 즉 그리스도께서 가장 위대한 징표이실 것이다. 즉 진리 자체이신 성자께서 인간의 육을 입으시고 우리 사이에 오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징표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징표는 2,000년 전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즉
주님의 실체는 성체 성사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으며, 주님의 진리는 교회의 가르치심으로 이어져나가고 있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기타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의 은총을 주시는 것은 성사들을 통하여 전승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성사들을 행하는 사제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활동하고 계신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지속적인 징표인 것이다.
인간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징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자유의 행사에는 책임이 수반된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지고한 징표를
받아들인다면 영생이 주어지겠지만, 그분을 거부한다면 구원에의 길이 열릴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 하느님을 잘 믿고 섬긴다고 생각하고
또 남들에게 인정받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방문하심을 배척했다면, 하느님을 거부한 것이 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징표들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무시하는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주에서 주시는
메시지들과 징표들은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진리들을 재조명, 재강조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즉 교회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끊임없이 계속되는 하느님의 개입하심이다. 만일 나주의 일들이 허위라면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헛된 것을
경솔히 받아들이는 것이 벌받을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일들이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이를 거부한다면, 이는 심각한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징표들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시기 때문이다.
"나주의 일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라는 방관의 자세를 취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 일이 허위라면 방관을 하든 배척을 하든 문제될 것이 없지만,
참으로 하느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는데 이를 방관한다면 결국 배척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일을 배척하면서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해도 허사일
것이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다른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마태오 6:33)."
이 분도 Gresham, OR, U.
S. A. 1998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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