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나주에서의 성모님발현

 나주에서의 성모님발현

 나주에서 일어난 일들

 나주의 5대 영성

 나주성모님과 성체께
 대한 올바른 신심

 성모님께서 우시는 이유

 나주에서 징표들의 의미

 역사적 성모 발현

나주에 대하여
Mary's by Mail 특별호

 

 

 

 나주에서의 성모님 발현

 

 

해 뜨는 동쪽 아침의 나라 한국의 조용하고 조그마한 남쪽 도시.  비단같이 고운 고을 나주. 병 인박해 때 순교자들의 성지인 무학당 인근에서 미장원을 경영하고 있는 한가정의 평범한 주부가 모시던 성모상에서 1985년 6월 30일부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우시는 성모상의 나주 성모님께서는 1985년 6월 30일부터 1992년 1월 14일까지 무려
700일간에 걸쳐 눈물로 우리를 부르시고 피눈물로 호소하시며, 진땀을 흘리시고 코피까지 쏟으시며 당신의 고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또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성모님의 현존이며 사랑이며 우정이신 장미향기를 만방에 풍겨주시고 온몸을 다 짜내시어 향 기름을 400일간 준비하시어 1992년 11월 24일부터 1994년 10월 23일까지 700일간이나 흘려주셨다.

또한 모령성체에 대하여 경고하시며 성체의 신비를 모든 이에게 전하여 구원받도록 성체에 대한 놀라운 징표도 보여주셨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1985년 7월 18일부터 현재까지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복합적인 사랑의 메시지 말씀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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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초자연적인 목적을 부여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 그들에게 적합한 질서와 선을 부여하심으로써, 모든 진리와 선의 근원이신 당신의 속성(屬性)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이성(理性)을 지닌 인간들이 자연 속의 질서와 선을 관찰함으로써 그리고 추리함으로써 창조주께서 존재하심과 그분의 위대하심과 좋으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섭리하셨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31-34 참조).

우주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특히 인간들에게는 지성과 자유 의지를 허락하셔서 스스로 선을 인지(認知)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심으로써 초자연적인 목적을 부여하셨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DS3005 참조).  인간의 생명은 이 지상에서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무한한 진리와 선과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아있는 것이다.  인간 외의 우주 내의 모든 피조물들은 오로지 인간들이 그 초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358 참조).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자연적으로 알 수 있는 진리들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진리들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원하고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에 대하여 그리고 그 대상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하여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써 인간들을 초자연적인 목적으로 초대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초자연적인 진리로서 인간들이 스스로의 추리만으로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다. 뿐 아니라, 인간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영원하신 생명에 참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에 관한 사항들도 초자연적인 진리이다.

하느님께서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차원을 무한히 초월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초자연적인 진리들을 아는 것이 필수적일 뿐 아니라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과 생활 자체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생명에 의하여 그분의 차원, 즉 하느님의 신성의 수준에까지 들어올림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996 & #1997 참조).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 속에 하느님의 거룩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초성 생명이 주입되어, 마치 차거운 쇠붙이가 불 속에서 빨갛게 달아오르고 녹아 정화되듯이 인간의 본성이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성화되는 것, 그리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2.  천주 성자의 강생을 통하여 진리의 계시는 완성되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때의 충만함에 이르러 당신의 성자(聖子)를 인간 세계에 보내심으로써 진리의 계시(啓示)를 완성하시고 동시에 타락된 인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셨다.  이러한 천주 성자의 강생(降生)은 인간들의 세계 안에 완전한 진리와 사랑과 생명 자체이신 분이 실제로 들어오시어 인간들을 부르시고 이끌어주심을 뜻하며, 어두움 속에서 헤매던 인간들이 이제는 완전한 진리 속에서, 완전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뿐 아니라, 인간들의 세상에 육화하여 임하신 하느님을 가까이서 흠숭하고 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이제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버리고 강생하신 천주 성자 앞에서 겸손히 무릎꿇어 그분의 진리와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한다. 주님의 초자연적인 진리의 계시는 인간들의 자연적인 본성이나 지식을 격하(格下)시키거나 대체(代替)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완성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차원에로 이끌어준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모든 것들이 주님의 강생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실에 연결되고 순응됨으로써 새롭고 진정한,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과 생명력으로 빛나게 된다. (Fundamentals of Catholic Dogma, Dr. Ludwig Ott, Tan Books, p.102 참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초자연적인 가르치심들을 우리가 은총의 빛에 의지하여 우리의 지성과 자유 의지로써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행위이다.  그냥 일리가 있고 좋은 내용같다라고 수긍하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속으실 수 없고, 속이실 수도 없으신,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의 절대적인 진실성에 의지하여 그분의 가르치심 전체를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가톨릭 신앙이다.

3.  참된 기적은 계시 진리에 대한 하느님의 확실한 징표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내용이 우리의 자연적인 지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총의 빛을 통해서만 우리가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만, 비록 은총의 도우심이 주어지드라도 자연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있는 인간들이 그 계시 진리들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뿐 아니라, 이 세상에는 온갖 오류의 사상과 표양이 범람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진리에 항상 충실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또 원죄의 상처로 인하여, 우리의 지성은 균형을 잃고 오류와 편견에 사로잡히기가 쉽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진리를 계시하실 때 자주 우리의 자연적인 감지력으로서도 알 수 있는 확실한 징표 즉 기적을 함께 주심으로써 그 계시가 참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가 보다 쉽게 그리고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구약 시대에도 기적들이 많이 있었지만, 특히 그리스도께서 공생활하시는 동안 놀라운 기적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이는 주님께서 진리의 계시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 엄청난 진리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처럼 많은 징표들을 주셨던 것이다. 성서에는 이러한 징표들에 대하여 많은 기록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내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기적들)이 나를 두고 증언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 5:36)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수많은 표징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 . .  왜냐 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보다도 사람들의 찬사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요한 12:37, 43)

그리하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하늘로 맞아들여져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떠나가서 사방에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며 표징들이 따르게 하심으로써 말씀을 굳건히 뒷받침하셨다. (마르꼬 16:19-20)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기적의 역할을 경시하는 현대주의자들에게 대하여 교회에서는 무류지권(無謬之權)을 발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기적들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 . . 또는 기적들이 확실히 인지될 수 없다든지, 크리스챤 신앙의 신적(神的) 근원이 기적들에 의하여 정확하게 증명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저주받을지어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DS#3034)

이처럼 참된 기적은 단순히 기이한 현상의 차원을 넘어서 계시된 진리의 진실성 즉 신적 근원을 보장해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징표이며, 따라서 우리를 주님의 진리와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이며 도우심이기도 하다.  이것이 참된 기적과 마술 등에 의한 기이한 현상들을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참된 기적은 우리를 하느님의 진리와 그분께 봉사하는 삶에로 이끌어주는 의미와 목적을 담고 있는 반면, 마술이나 심령술 등에 의한 현상들은 주님의 뜻을 담지 않고 있는 빈 껍데기이며 단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이다.

그런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완성되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기적도 필요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지난 2천년 간의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서, 특히 성인들의 생애 중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기적들의 목적은 새로운 진리를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어 교회에 위탁되어있는 진리를 우리가 더 깊이 깨닫고 더 충실히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교회에 침투하는 오류들을 격퇴하고, 나태에 빠진 신자들을 각성시키고 회개시키신다.  교회에서는 "성령께서 교회가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교계 제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은혜들로써 교회를 인도하신다,"라고 가르치신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768).  단, 우리가 기적의 보도들을 접할 때, 맹목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신중히 분별하여야 할 것이다.  그 기적들이 우리를 주님의 진리로 이끌어주는가 아니면 더 멀어지게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분별의 척도가 될 것이다.  

4.  나주에서 주시는 기적들의 의미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14년간 계속되어오고 있는 나주에서의 많은 기적의 징표들은 교회의 진로(進路)를 위하여 지극히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교회가 처한 신앙과 도덕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고 추진력을 공급해줄 수 있다. 그런데, 그 기적들이 주님의 계시 진리와 교회의 사명에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지도 않고, 그 기적들의 가능성조차 무조건 배척해버리는 것은 이미 교회에서 단죄한 매우 잘못되고 위험한 태도일 것이다. 신자들은 나주에서의 일들이 참으로 우리를 주님의 진리에로, 그 진리에 바탕을 둔 삶에로 이끌어주는가를 분별해야 하며, 만약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떠한 진리에로 우리를 이끌어주는가에 대하여 숙고함이 필요할 것이다.

a. 눈물과 피눈물.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눈물도 중요하지만, 내가 주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 (1987년 10월 19일).  즉, 우리는 성모상에서 눈물과 피눈물이 흐른다는 경이로운 현상 그 자체에만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 눈물과 피눈물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을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말해서, 어째서 성모님께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만 계시지 않고, 그토록 슬프게 피눈물을 흘리시는가에 대한 연유를 깨달아야 된다는 뜻이다.

그 연유를 모르면, 성모님의 눈물, 피눈물의 징표에 대하여 거부감부터 먼저 느끼게 될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이시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그러면,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의 어머니이심도 틀림없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눈물과 피눈물을 흘리심에 대하여 이를 남의 일처럼 지나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녀로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고 그 눈물을 닦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한히 거룩하시며 사랑 자체이신 삼위 일체 하느님께 지극히 밀접히 일치되어 계시는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염려하시며, 도와주려고 하시며, 또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에 얼마나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시는가에 대하여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성모 신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나주에서의 메시지들을 통하여 처음으로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서, 성모님께서는 인간들의 구원과 성화를 위하여 필수적인 역할을 해오고 계시며, 이는 무엇보다도 모든 성인들의 생애를 통하여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 교회 안에서조차 그리스도의 강생에 대한 신앙이 희석(稀釋)되고 따라서 성모님께 대한 공경도 뒷전에 밀려있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되어 있다.  교회는 커다란 하나의 가정인데, 그 가정의 어머니를 소홀히하고 경원시(敬遠視)함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 온갖 문제점들이 발생해오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챤 진리의 핵심은 천주 성자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육화(肉化)되어 우리 가운데 강생하여 계신다는 사실이다 (요한1서 4장 2절 참조).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천주 성자의 강생이 동정녀 마리아의 사랑과 겸손에 찬, 그러나 자유로운 동의에 의해 출발되기를 원하셨다. 마치 에와가 마귀의 꼬임에 먼저 빠져서 아담을 끌어들였던 것처럼, 한 여인의 겸손과 사랑에 찬 순명을 토대로 구세주의 강생이 이어지고 인류 구원의 역사가 펼쳐져나가기를 섭리하신 것이다.  어머니가 빠진 가정은 따뜻함과 생동력이 결여되기 마련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주에서의 징표들을 통하여 우리가 성모님께 대한 참되고 깊은 신심을 다시 활성화하기를 원하고 계시며, 또 이를 통하여 인류 구원 사업의 핵심인 천주 성자의 강생과 수난 사실에 대한 신앙을 되찾기를 원하고 계신다.  오직 그 길만이 현재 교회를 세속화시키려는 현대주의를 확실히 극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성모님께서도 나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주님의 협력자로 간택된 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함이고, 너희들도 또한 나의 협력자로 간택받았음을 명심하고 나의 말을 잘 받아들여 모두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여라" (1991년 8월 27일).

 자녀들의 수많은 문제점들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며 모든 자녀들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시며, 또 신앙의 상실과 도덕적 타락에 빠져있는 인류에게 내릴 하느님의 정의의 진노를 막아주실 분은 오직 한 분, 성모님 뿐이시다.

b.  향유와 향기.   성모님께서는 나주에서 700일간 주신 향유와 수시로 주시는 향기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성모님의 "현존과 사랑과 우정"을 뜻한다고 알려주셨다 (1993년 4월 8일 메시지).  모든 참된 기적들이 그러하듯이, 나주의 향유와 향기 역시 단순히 기이한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징표들을 통하여 사랑과 믿음이 메마른 인간들의 마음 속에 천상 모후의 따뜻한 사랑을 불어넣어주시고 성모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위한 강력한 은총의 중개자요 변호자가 되심을 일깨워주고자 하신다.

성모님께서는 메시지를 통하여 당신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임을 누차에 걸쳐서 알려주셨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약하여, 성모님께 대한 신뢰심이 흔들리기 쉽다.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다가도 어려움에 부딪치면 쉽게 용기를 잃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모님을 실망시켜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때때로 향기와 향유의 징표들을 사용하시어 우리에게 당신의 현존과 사랑과 우정, 그리고 당신의 기쁨을 외적으로 표현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향기가 나지 않을 때에도 항상 성모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믿고, 성모님께서 맡기시는 일을 변함없이 해나가야 할 것이다.

c.  성체 기적들 (1).    율리아 자매가 모신 성체의 외양이 주님의 살과 피의 모습으로 변하는 기적은 지금까지 12회에 걸쳐서 일어났다.  이 기적들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성체와 성혈로 변한 것이 아니고, 미사 때 사제의 축성을 통하여 이미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주님의 살과 피의 실체로 변하고 오직 빵과 포도주의 외양만 남아있었으나, 율리아 자매를 통하여 주신 기적들을 통하여 그 신비에 싸인 진실을 외양으로도 보여주시는 것이다.

 즉 이 기적들을 통하여 이미 교회를 통하여 가르쳐지고 있는 성체 성사에 대한 진리를 재확인하여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기적들을 보여주심으로써 식어진 우리의 신앙이 다시 불타오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 기적들의 기이함을 경탄함에 머물지 말고, 그 기적들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성체 성사에 대한 우리의 잘못되거나 나태한 신앙 자세를 고쳐야 할 것이다.  

지금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체 안에 당신의 살과 피와 영혼과 신성을 지니시고 실제로 계시는 주님께 대한 신앙이 개탄할 정도로 약해져 있으며, 고해 성사를 먼저 볼 필요가 있는 경우에도 이를 게을리하고 그대로 영성체에 임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하여 깊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체 성사에 대한 신앙의 상실과 모령성체 때문에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계시며 성모님께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d.  성체 기적들 (2).     나주의 성체 기적들 중에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체가 기적적으로 위에서 내려오신 기적이 일곱 번에 걸쳐서 일어났다.  이러한 기적들과 위에 언급된 기적들을 합하면 모두 19회에 걸쳐서 성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성체의 외양이 살과 피의 모양으로 변함이 없이 위에서 내려오신 기적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7회에 걸친 이러한 기적들은 주님께서 성체 성사 안에 실제로 계심을 외양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떠한 진리에로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가?  

그 일곱 번 중에 맨 첫 번 기적은 1994년 11월 24일 당시 교황 대사님이셨던 죠반니 불라이티스 대주교님께서 나주의 경당에 오셨을 때에 일어났다.  기도하시는 중에 갑자기 큰 성체가 이미 둘로 나뉘어져서 한 쪽은 율리아 자매의 오른 쪽 손가락들 사이에, 다른 한 쪽은 왼쪽 손가락들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성 미카엘 대천사로 하여금 죄 중에 있는 사제가 성체를 영하기 전에 모셔오게 하신 것이라고 메시지를 통해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이 기적이 지니는 뜻, 즉 교훈은 무엇일까?  아마도 무한히 거룩한 성체 성사를 주관하는 사제들의 성성을 강조하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사제직의 고귀성, 그리고 그 고귀성에 합당한 거룩함과 믿음, 그리고 복음서의 교훈에 바탕을 둔 생활을 주님께서 요구하고 계시는 것 같다. 동시에 성체 성사의 지극히 고귀하심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 일깨워주시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징표를 주심으로써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교황 대사님께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성체 성사에 대한 진리를 널리 전하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기신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하느님께서 징표를 주실 때에는 항상 그 징표를 받는 이들에게 그 징표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고 하는 임무를 주시기 때문이다.

e.  성체 기적들 (3).     성체가 내려오신 일곱 번의 기적들 중에서 1995년 7월 1일 새벽과 1996년 7월 1일 새벽에 있었던 일들은 또다른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두 번의 경우에는 철야 기도 중에 율리아 자매가 나주의 경당의 앞, 성모님 상 위에 걸려있는 예수님의 고상이 갑자기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일곱 상처로부터 많은 피를 흘리고 계심을 보았다.  그리고 곧 그 성혈이 일곱 개의 하얀 성체로 변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 성체들이 1995년 7월 1일에는 성모님 상 앞의 제단 위에 힘차게 소리를 내며 내려오셨고, 1996년 7월 1일에는 율리아 자매의 입속으로 임하셨다.  즉, 이 두 경우에는 위에서 내려온 성체의 출처가 밝혀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마다, 성체가 면병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우리 죄의 보속을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희생을 바치고 계시는 예수님 자신이심을 잊지말도록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두 경우의 성체 기적이 담고 있는 진리, 즉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들의 죄 때문에 수난하고 계시는 사실, 그리고 이 사실이 특히 미사 성제를 통하여 재현되며 성체는 바로 그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라는 진리는 가톨릭 신앙의 진수라고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현대에 와서 너무나 망각되어 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분이시어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시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은 반드시 용서해주시지만, 동시에 무한히 공의로우신 분이셔서, 뉘우치지 않은 죄, 보속되지 않은 죄를 그대로 수용하시지 않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이시고 선이시고 거룩함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진리와 사랑과 거룩함이 아닌 불순한 그 어떠한 것도 당신 안에 수용하실 수 없으시다. 이는 마치 뜨거운 태양에 불순한 티끌들이 가까이 간다면 순식간에 타버리지 않을 수 없음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피하고, 지은 죄를 뉘우치고 보속하며, 또 남은 보속은 연옥에서 완전히 한 다음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인식을 흐려주며, 고해 성사와 보속에 대한 필요성을 망각하게 하는 현대주의의 무서운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나주에서 주시는 십자가와 보속의 메시지들에 대해 이해하고 또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의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그 한 번의 희생 제사로 인하여 모든 인류의 죄가 넘치도록 충분히 보속되었다.  주님께서 더 이상 수난하시는 것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2천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고, 성장하시고, 노동하시고, 기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사실은 그 당시의 시간과 장소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의 매순간 마다에 현존하는 사실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5 참조).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것은 그 당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며, 그 당시와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함이었으며,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현실이 우리의 삶 속에 더욱 깊어지고 강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2천년 전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미사 성제를 통하여 실제로 재현되고 지속되고 있음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상들 및 성화들도 이러한 구세주의 육화의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해주고 있으며, 또 삼종 기도, 묵주 기도, 성로 선공, 묵상, 영적 독서, 등을 통하여, 그리고 극기와 이웃들에 대한 애덕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강생을 기억하게 되고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 전체가 그리스도의 강생과 인류 구속 활동의 현실 속으로 점입되고 일치되어야 한다.

그런데, 율리아 자매가 1981년 처음 입교한 후 철야 기도를 바치는 중에 예수님께서 처참히 피흘리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특히 주님의 성심이 찢어져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를 본 율리아 자매는 세상의 죄를 보속하여 주님을 위로해드리고저 스스로 보속의 생활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이러한 사건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의 환시로서만 생각해서는 안되며, 지금도 현실로서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의 수난의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누차에 걸쳐서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 상에서 고통받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계시는데 무슨 고통이냐고 반론을 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 사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 개개인들이 연결되어 있는 현실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18 참조).  

그렇다면, 1995년 7월 1일과 1996년 7월 1일에 율리아 자매가 보았던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은 단순한 환시일 뿐이거나 극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망각해왔던, 그러나 교회의 가르치심에 확고히 부합되는 엄연한 현실임을 알 수가 있다.  주님께서 지금 수난하시는 것은 2천년 전에 주님께서 받으신 고통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2천년 전의 주님의 수난이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모든 인간들에게 현실로서 적용된다는 뜻이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원의 은총이 모든 이의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다.

(f)  보속의 협력자이신 성모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실이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현실로서 적용된다면, 그리스도의 필수적인 협력자이신 성모님의 역할 역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들에게 현실로서 접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누차에 걸쳐서 당신께서 그리스도의 인류 구속 사업에 있어서의 협력자, 즉 공동 구속자이심을 말씀하셨다.  이는 구세주가 두 분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제2의 아담을 돕는 제2의 에와로서 구세주의 활동에 필수적으로 참여하시고 협력하신다는 뜻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618 참조).  

성모님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가 된 우리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따라 (마르꼬 8:34) 작은 보속의 협력자들이 되고 작은 공동 구속자들이 되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선 성직자들께서는 더욱 그러하시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 중에서 성모님께서는 가장 뛰어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협력자가 되고 공동 구속자가 되신다.  

왜냐 하면, 성모님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그 역할을 위하여 잉태 순간으로부터 죄에 물듦이 없이 보존되셨고 지극한 사랑과 겸손과 거룩함으로 가득차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동안에만 협력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실 것이다.  특히 창세기 3장 15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악마의 머리를 짓밟으실 여인으로서의 성모님의 역할이 날이 갈수록 더 강화되고 뚜렷이 드러나게될 것이다.

나주에서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상을 통하여 도합 700일간이나 눈물과 피눈물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이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의 현실을 보여주시는 징표인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몽소 승천하시어 천국에 계시는데 어째서 지금도 그처럼 고통을 받으시고 피눈물을 흘리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수난이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현실로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리고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필수적으로 개입되어 계심을 기억한다면, 성모님의 보속의 협력자로서의 역할이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로서 적용되고 나타남에 대하여 조금도 의아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주에서의 성모님의 눈물과 피눈물은 하나의 상징이나 극적인 표현이 아니라, 확실한 현실이다.

5.  결론

지금까지 나주에서 있었던 기적의 징표들은 그 숫자로 보나 강도로 보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것들이었다.  교회 역사 상 수많은 징표들이 있었지만, 나주에서처럼 한 곳에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있었던 일은 없었다.  모든 참된 기적의 징표들이 귀중한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나주의 기적들이 담고 있는 하느님의 뜻과 교훈은 참으로 엄청난 것들일 것이다.  우리가 아직 그 작은 일부밖에 깨닫지 못하고 있는 나주에서의 메시지들과 징표들의 깊은 뜻은 앞으로 두고 두고 많은 신학자들과 신자들 모두에 의해 연구되고 음미되고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나주라는 작은 곳을 통하여 전 인류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 전체를 위하여 엄청난 은총을 베풀어주려고 하심이 틀림없다.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등을 돌리고 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 때가 늦지 않았다고 하시며 모든 자녀들이 한 시 빨리 깨어나기를 애타게 기다리신다.  위기가 닥치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서 성모님의 손을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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