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성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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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4월23일
아시시의 복자 에디지오(질스)
Bl. GILES(Aegidius) OF ASSISI
Beato Egidio d’Assisi
Died:1262 at Perugia, Italy of natural causes
BROTHER EGIDIO FROM ASSISI
아씨시는 에지디오의 고향마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세 동료들의 전기 32).
그가 태어났음직한 연대는 대략 1190년이라고 되어 있다. 그는 본래 하층민 출신이었고, 농민 가정 출신이었다.
첼라노 1생애 25항은 에지디오 형제가 “단순하고 올곧은 사람이었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24명의 총봉사자들에 대한 연대기는 에지디오가 손노동을 하였었고,
땀흘려 땅을 일궈 매일 매일 양식을 구할 만한 기술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다.
에지디오는 1208년 4월 23일 프란치스코가 이끄는 새로운 형제 공동체에 들어갔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세 번째 동료였다. 프란치스칸 사료들은 그가 수도회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첼라노 25항; 세 동료들의 전기 32항; 페루지아 전기 55항; 완덕의 거울 36항).
1208년 봄, 프란치스코는 Ancona의 Marches에서의 첫 번째 설교 여정에 에지디오를 데리고 갔다(세 동료들의 전기 33-34항).
그후, 에지디오는 스페인의 Santiago de Compostela로 순례를 떠났다(1첼라노 30항; 익명의 페루지아 전기 18항).
Legend of St Francis: 7. Confirm!!!!!ation of the Rule-GIOTTO di Bondone
1297-99. Fresco, 270 x 23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에지디오는 1209/1210년에 프란치스코가 인노첸시오 3세를 만나러 갈 때 동행했던 동료들의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 때 작은 형제들의 생활양식 “Propositum vitae”를 구두로 인준해 준 사람이다.
그들은 로마에서 돌아오면서 Orte를 거쳐서 왔고, 포르치운쿨라에 정착할 때까지 리보토르토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1첼라노 32-42).
24명의 총봉사자들에 관한 연대기는 에지디오를 순회 설교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Mantova와 Ferrara 사이에 있는 Ficarolum이라는 곳에 갔으며, 성지와, Ancona, Gargano 산,
대천사 성 미카엘 성지, 성 니콜라오의 성지인 Bari에도 갔다.
1219년의 총회는 에지디오를 북아프리카의 Tunis로 파견하였다. 그는 선교를 너무나 열심히 하였기에
그곳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슬람인들과 상업 거래에 피해를 줄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이태리로 돌려보냈다.
1225년에 에지디오는 리에티로 가서 Clairvaux의 니콜라오 추기경 관저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매일의 양식을 구걸하면서 살 허락을 받았다.
1226년 가을, 에지디오는 아씨시로 돌아와서 임종을 앞두고 있던 프란치스코와 함께 살게 되었다.
프란치스코가 죽자 에지디오는 페루지아 근처에 있는 Monteripido 은둔소에서 그의 여생을 보냈다.
그는 1262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교황 비오 6세가 그를 시복하였다.
I Compagni di San Francesco.
프란치스칸 사료들은 에지디오를 열정적이고 심오한 기도를 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신비주의자로 여겨지고 있다.
완덕의 거울 85항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작은 형제들의 자질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들은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과 에지디오 형제가 가졌던 것과 같은 최상의 덕을 겸비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1첼라노 25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얼마 안 있어 에지디오 형제가 그를 따랐다. 그는 단순하였고, 곧은 사람이었으며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그는 아주 오래 살았는데, 거룩하고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으며,
우리에게 완전한 순명과 육신노동과 고적한 생활과 그리고 거룩한 관상의 모범을 남겨 놓았다.”
성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와 결합한 사람들 중 세 번째 사람은 에지디오 형제였는데, 그는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모든 점에 있어서 그가 남긴 훌륭한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평범했고 배우지 못했으나
프란치스코가 예언한 대로 영웅적인 덕을 실천함으로써 유명하게 되었고, 천상저 관상의 경지로 들어 높임을 받았다.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들어 올렸으며 내 눈으로 직접 보았듯이 그는 너무도 자주 탈혼에 빠져
마치 그는 지상에서 살고 있을 때 천사들과 맞먹는 생활을 하느 것 같았다”(대전기 3장, 4항).
에지디오는 “dicta beati Aegidii”(복된 에지디오의 금언록)에서 자신의 영적인 체험에 대해 기록하였다.
(R.Brown,"Franciscan mystic.The life of blessed brother Giles of Assisi companion of St.Francis".Hanover House,New York,1962).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홈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
이탈리아의 아씨시 태생인 그는 성 프란치스꼬의 초기 동료 가운데 한 분으로 1208년에 수도복을 받았다.
그는 성 프란치스꼬를 수행하여 아씨시 지방의 여러 곳에 복음을을 전하였고,
꼼보스뗄라 순례를 비롯하여, 로마와 성지를 방문하였으나, 사라센인들을 회개시킬 목적으로 갔던 투니스 여행은 실패로 끝났다.
투니스의 신자들은 그의 뛰어난 신앙심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까봐 그를 억지로 배에 태워서 돌려보냈다고 전해온다.
그 후 그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살았는데, 1243년경부터는 몬떼 라피드 은수소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자주 탈혼하였고, 체토나에서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다.
그는 초기 프란치스칸들의 모델로 존경받는다.
성 프란치스꼬의 잔꽃송이에는 그에 대한 행적이 나오는데, 성 프란치스꼬는 그를 "원탁의 기사"로 불렀다.
"질스 수사의 금언"이란 책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낙천주의 그리고 뜻깊은 유모어가 빛을 발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1980, 분도출판사)
이 책은 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에 관한 일화와 여러 이야기들을 엮은 것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제1부는 총 53장으로 되어 있으며, 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몇몇 동료에 관해 수집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제2부는 "성 프란치스꼬의 오상에 관한 몇 가지 고찰"이라는 다른 제목을 갖고 있다.
이 부분은 단지 5장으로 되어 있으나,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에 가장 빼어난 사실 중의 하나인 오상에 관해 아주 상세히 말해주고 있다.
'잔 꽃송이'는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전기 가운데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인은 단순하고 순박한 분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인간의 단순함과 소박함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보기를 좋아했다.
성프란치스코는 복은성서의 한 구절에서 "어린아이 같은 자라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르10.5)라는 구절을 특히 좋아했다......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토마스 첼라노 저, 1986, 분도출판사)
제1생애(Vita Prima).제2생애(Vita Secunda).제3생애(Vita Tertia)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최초의 전기작가인 토마스 형제는 중부 이태리의 조그마한 도시 첼라노(Celano)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를 언제나 토마스 첼라노라고 부른다. 그의 출생 년도는 확실치가 않다.
바티칸에서 발간되고 있는 월간지 「교회」(Eccelesia,1960년)에서 한 작가는 토마스 첼라노의 출생년도를 1185년으로 잡고 있다.
이것이 비록 확실한 것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비교적 근사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생애를 여러 면으로 고려해 볼 때 12세기 말경에 출생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책 머리에 中】
■성 프란치스꼬의 대전기 (성 보나벤뚜라 저, 1976, 분도출판사)
성 보나벤뚜라(Bonaventura: 1221~1274.7.15) 본명은 요하네스 피단짜(Johannes Fidanza).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이며 뛰어난 성인으로 로마 교황령에 있는 바그노레아에서 출생.
17세에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들어갔고, 후에 파리대학에서 할레시우스에게 사사하였으며,
27세 때 이미 파리대학 교수로서 신학을 강의하였다. ......【작가의 소개 중에서】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홈,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성 보나벤뚜라 주교 학자 축일:7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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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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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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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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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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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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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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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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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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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누리는 좋은 하루 되세요 ^^*
댓글목록
Liliana님의 댓글
Liliana 작성일
ㅡ성인은 단순하고 순박한 분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인간의 단순함과 소박함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보기를 좋아했다.
성프란치스코는 복은성서의 한 구절에서 "어린아이 같은 자라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르10.5)라는 구절을 특히 좋아했다......ㅡ
아멘! 아멘! 아멘!
나주에서 현존하시는 주님과 성모님께서도 율리아 자매님을 통하여서도
얼마나 강조하고 계신가요..
주님 나주 성모님!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회개의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멘!
아시시의 복자 에디지오(질스)시여!
2011년이 한국 나주 성모님의 인준의 해가 되도록
간절히 빌어주소서. 아멘!
아기님의 댓글
아기 작성일
아시시의 복자 에디지오(질스) 시여 !
나주의 빠른 인준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율리아 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아멘 !
성체 사랑 님 항상 감사드려요 ^^
자비의샘님의 댓글
자비의샘 작성일아멘, 감사 ㅎㅎㅎㅎㅎ 부활을 축하드려요
christina님의 댓글
christina 작성일
아시시의 복자 에디지오(질스) 시여 ~
나주의 빠른 인준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예수님 부활과 더불어 나주성모님의 승리의 환호가 울려퍼지기를~!
예수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
수호천사님의 댓글
수호천사 작성일
감사합니다.
심한 자관고통과 더심한 자관고통을 받으신 율리아자매님의
모습에서 저의 죄로인해 고통 받으신다고 생각하니 회개의 삶으로
보답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제가 박아드린 못 제가 뽑아드릴께요
아멘
백합향기님의 댓글
백합향기 작성일
아멘 ...
예수님의부활을축하드립니다~
피난처님의 댓글
피난처 작성일
아시시의 복자 에디지오(질스)!
나주성모님의 떠 빠른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어머니망토님의 댓글
어머니망토 작성일
아시시의 복자 에디지오!!!
나주성모님의 떠 빠른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어머니향기님의 댓글
어머니향기 작성일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리고 새 마음을 주겠다 아멘!!!
아시시의 복자 에디지오(질스) 시여 ~
나주 성모님 인준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예수님 부활과 더불어 나주성모님의 승리의 환호가
울려퍼지기를~! 예수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아멘!!!
엄마꺼님의 댓글
엄마꺼 작성일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날을 기념한다..아멘! 알렐루야~!!!!!
생활의기도화님의 댓글
생활의기도화 작성일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아멘~~~
아시시의 복자에디지오시여
나주서이모님의 빠른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율리아님의 영육간에 건강과안전과 기도지향이 꼭
이루어지시길 빌어주소서. 아멘
자아포기님의 댓글
자아포기 작성일
부활하신 예수님!!!
나주성모님 인준으로 온세상 자녀들이 부활하도록 이끌어주소서!!
부활을 지켜보신 성모님!!
나주가 인준되어 세상 자녀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따르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아멘 아멘
주님뜻대로님의 댓글
주님뜻대로 작성일
아시시의 복자 에디지오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안전, 모든 기도 지향이 그대로 이루어 지도록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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