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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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찬미 성모님
지난 첫토요일에 베드로 회장님께서 왜 입으로 성체를 영해야하는지를 말씀하셨을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성체 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음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께 좀 긴 회칙이지만 신자로서 교황님의 뜻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순시기를 의미있게 보내시길 바라며...
아멘
시간이 없으신분은 파란부분과 빨간 부분만이라도 읽어보세요 ^^;
이 글을 읽는 글자 수만큼 죄인들이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이 글을 봉헌합니다.
아멘
성체성사와 교회의 관계에 관하여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ECCLESIA DE EUCHARISTIA
2003.04.07
IOANNIS PAULI PP. II
SUMMI PONTIFICIS
LITTERAE ENCYCLICAE
ECCLESIA DE EUCHARISTIA
성체성사와 교회의 관계에 관하여
주교와 사제, 부제, 남녀 봉헌 생활자와
모든 평신도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회칙
1.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vivit). 이러한 진리는 일상적인 신앙 경험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비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신 약속의 항구한 성취를 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쁘게 체험하지만, 특히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이러한 현존을 매우 강렬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새 계약의 백성인 교회가 천상 본향을 향한 순례 여정을 시작한 오순절 이후, 이 거룩한 성사는 교회가 지내 온 세월을 끊임없이 기념하며, 그 시간들을 확고한 희망으로 채워 주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1)이라고 올바르게 선포하였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살아 있는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생명을 얻고 또 생명을 주는 당신 살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2) 따라서 교회의 눈길은 언제나 제대의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향하며, 그 안에서 그분의 끝없는 사랑이 온전히 드러남을 발견합니다.
2. 2000년 대희년 중에 저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성찬례를 거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친히 처음으로 성찬례를 거행하신 곳입니다. 다락방은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가 제정된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들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마태 26,26; 루가 22,19; 1고린 11,24 참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마르 14,24; 루가 22,20; 1고린 11,25 참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2000년 전에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되풀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주 예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최후의 만찬에 참석하였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였을까요?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말씀들은 성목요일 저녁에서 부활 아침에 이르는 성삼일 끝에 가서야 온전히 밝혀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삼일은 파스카 신비를 품고 있으며, 또한 성체성사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3. 교회는 파스카 신비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파스카 신비의 뛰어난 성사인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는 이미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교회의 모습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은 성찬례를 뜻합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첫 모습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은 파스카 성삼일로, 곧 성목요일 저녁의 사건들, 최후의 만찬과 그 이후의 일들로 되돌아갑니다. 성체성사의 제정은 게쎄마니 동산의 고뇌를 시작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성사적으로 앞당깁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다락방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로 내려가시어 올리브 동산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지금도 그 동산에는 매우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 나무들은 그날 그리스도께서 고통 중에 기도하시며 “핏방울 같은 땀이 뚝뚝 흘러 땅에 떨어졌을 때”(루가 22,44) 그 나무 그늘 밑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전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에 구원의 음료로 주신 그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피 흘림은 해골산에서 우리 구원의 도구가 됨으로써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셔서 ……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9,11-12).
4. 우리 구원의 시간.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당신의 ‘시간’ 앞에서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요한 12,2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해 주기를 바라셨으나, 외로움과 버림받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40-41). 오직 요한만이 성모님과 충실한 여인들 곁에서 십자가 아래 남아 있었습니다. 게쎄마니에서 겪으신 고통은 성금요일의 십자가 고통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시간, 세상 구원의 시간.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에서 성찬례가 거행될 때마다, 예수님의 ‘시간’, 곧 그분의 십자가와 현양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듯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함께 거룩한 미사를 거행하는 모든 사제는 마음으로 그곳, 그 시간으로 되돌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신앙 고백은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라는 관상과 선포의 말로 울려 퍼집니다. 교회는 성금요일 오후에 모든 이에게 이러한 초대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는 부활 시기 동안 이렇게 선포하며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도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도다. 알렐루야.”
5.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말하면, 신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라고 응답합니다.
이러한 말들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교회 자신의 신비, 곧 교회는 성체성사에서 나왔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음으로써 태어나 세상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지만, 교회 형성의 결정적인 계기는 분명히 다락방의 성체성사 제정이었습니다. 교회의 토대와 근원은 파스카 성삼일 전체이지만, 이것이 이른바 영원히 통합되고 예시되고 집약되는 것은 성체성사 안에서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에 성체성사를 주심으로써 교회에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현존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성삼일과 세기의 흐름 사이에서 신비로운 ‘시간의 단일성’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할 때면 우리는 깊은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파스카 사건과 수세기 동안 그 신비를 현존시켜 온 성체성사에는 구원의 은총을 받은 역사상의 모든 이를 끌어안는 참으로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성찬례를 거행하고자 모인 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놀라움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성찬례를 거행하는 집전자는 더욱 이러한 놀라움에 가득 찹니다. 성품성사에서 받은 권위로 축성을 이루는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다락방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힘으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사제이지만, 그는 다락방에서 이 말씀을 하신 분의 뜻에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어느 시대이든 교회 안에서 당신의 사제직에 교역자로 참여하는 모든 사제가 이 말을 되풀이하기를 바라십니다.
6. 저는 제가 대희년의 유산으로 교회에 남긴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와 성모님께 관한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에 이어 이 회칙을 발표함으로써 성체성사의 이러한 ‘경이로움’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제삼천년기가 시작될 때 제가 교회에 새 복음화의 열정으로 역사의 바다에 깊이 뛰어들도록 권고하면서 교회 앞에 제시한 ‘계획’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분께서 여러 현존 양식으로, 특히 당신의 몸과 피의 살아 있는 성사로써 당신을 드러내실 때마다 그분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생명을 이끌어 냅니다. 교회는 그분께 양식을 얻고 그분으로 빛을 얻습니다.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이며 동시에 “빛의 신비”3)입니다. 교회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어느 면에서 신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겪은 일을 다시 체험합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루가 24,31).
7.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직무를 시작한 이래 저는 성체성사와 사제직이 세워진 날인 성목요일에 해마다 세계의 모든 사제에게 서한을 보내 왔습니다. 교황 재위 25년째인 올해 저는 온 교회가 “은총이며 신비”4)인 성체성사와 사제직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리는 한 방법으로 이러한 성체성사를 더욱 완전하게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묵주기도의 해를 선포함으로써 저는 저의 교황 재위 25주년을 성모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보호 아래에서 지내고자 합니다. 따라서 저는 이번 성목요일에 ‘성체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 멈추어 서서, 교회를 향하여 성체성사의 중심성을 새롭고 힘차게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에서 그 생명을 이끌어 냅니다. 교회는 이 ‘살아 있는 빵’에서 자양분을 얻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이를 새롭게 경험하도록 어찌 재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8. 성체성사를 생각할 때, 또 사제와 주교로서, 그리고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지낸 삶을 되돌아볼 때, 저는 자연스레 제가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었던 여러 기회와 장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처음으로 본당 사목을 맡은 니에고비치의 성당,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아노 대성당, 바벨 주교좌 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을 비롯한 로마와 세계 곳곳의 여러 대성전과 성당들이 기억납니다. 산길, 호숫가, 바닷가 등에 지어진 경당에서 거룩한 미사를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운동장과 도시의 광장에 세운 제대에서도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소에서 거행한 성찬례를 통하여 저는 성체성사의 보편적인 특성, 다시 말해 우주적인 특성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주적입니다! 성찬례는 시골 성당의 초라한 제대에서 거행될 때에도 어떤 면에서는 늘 세상의 제대에서 거행되기 때문입니다. 성찬례는 하늘과 땅을 결합시킵니다. 성찬례는 모든 피조물을 끌어안고 그 속에 충만히 스며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단 한 번의 숭고한 찬양 행위로, 모든 피조물을 무에서 창조하신 분께 되돌려 드리고자 사람이 되셨습니다.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성혈로 영원한 지성소에 들어가셨으며, 그리하여 모든 구원받은 피조물을 창조주이신 아버지께 되돌려 드리십니다. 그분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의 사제직을 통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성체성사 안에서 성취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손에서 비롯된 세상이 이제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아 하느님께 되돌려집니다.
9. 신자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 구원의 현존이며 그 영적 양식인 성체성사는 역사를 통한 여정에서 교회가 지닐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재산입니다. 이는 교회가 언제나 성체성사의 신비에 보여 온 생생한 관심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러한 관심은 또한 공의회 문헌과 교황들의 문헌에서 권위 있게 표현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반포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과 미사의 거룩한 희생 제사에 관한 교령에서 설명하는 교리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교령들은 수세기 동안 신학과 교리교육을 이끌어 왔으며, 지금도 성체성사에 대한 신앙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 백성의 지속적인 쇄신과 성장을 위한 교의적 준거가 되고 있습니다. 비교적 현대에 발표된 회칙들 가운데에 세 가지를 든다면, 레오 13세의 회칙 「놀라운 사랑」(Mirae Caritatis, 1902.5.28.)5)과 비오 12세의 「하느님의 중개자」(Mediator Dei, 1947.11.20.)6), 그리고 바오로 6세의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9.3.)7)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관하여 특정 문서를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문헌 전반에 걸쳐, 특히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과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에서 성체성사의 다양한 측면들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저도 베드로좌에서 사도직을 시작한 첫 해에, 교황 교서 「주님의 만찬」(Dominicae Cenae, 1980.2.24.)8)을 통하여, 성체성사의 신비가 지닌 몇 가지 측면과 그 신비가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다루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때 드렸던 말씀을, 더욱 벅차고 감사한 마음으로, 시편 저자의 말을 인용하여 다시 한 번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 115[116], 12-13).
10. 성체성사의 신비를 선포하는 교도권의 노력에 발맞추어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내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공의회가 시작한 전례 쇄신은 신자들이 제대의 거룩한 희생 제사에 더욱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분명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많은 곳에서 성체 조배는 일상의 중요한 신심 실천이 되고 또 성덕의 무한한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하는 성체 거동에 신자들이 경건하게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은총이며, 이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해마다 큰 기쁨을 안겨 줍니다. 성체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드러내는 다른 긍정적인 징표들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빛과 나란히 그림자도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성체 조배 관습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또 교회의 여러 지역에서는 이 놀라운 성사에 관한 가톨릭 교리와 건전한 신앙에 혼란이 생기는 폐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극단적으로 축소하여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찬례가 지닌 희생 제사의 의미를 없애 버리고 단순히 형제애의 잔치로 거행하기도 합니다. 또 사도직 계승에 바탕을 둔 직무 사제직의 필요성이 때때로 흐려지고, 성찬례의 성사적 본질이 일종의 선포 형식이라는 단순 효과로 축소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여기 저기에서, 비록 의도는 좋지만 교회의 신앙 표현 원리에 어긋나는 성찬 관습에 빠져 드는 초교파적 행위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상황에 깊은 슬픔을 감출 수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너무도 큰 은총이어서 모호성이나 평가 절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회칙이, 용인할 수 없는 교리와 관습의 어두운 구름을 걷어 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성체성사가 그 찬란한 신비로 끊임없이 빛나기를 바랍니다.
************ 나머지는 내용이 길어서 첨부파일로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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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와 교회의 관계에 관하여.pdf (628.0K)
41회 다운로드 | DATE : 2011-03-24 19:00:14
댓글목록
주님뜻대로님의 댓글
주님뜻대로 작성일
사랑하는 수호천사님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분명 저희들이 이 내용을 잘 알고 있다면 도움이 되겠네요.
그런데 내용이 좀 길어서 한번에 보기 힘들어하실 분들도 있을듯한데
중요한 부분만 추려서 올려주시고 나머지는 첨부파일 형식으로 올려주시면 어떨까요?
저도 틈틈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Liliana님의 댓글
Liliana 작성일
+“빵과 포도주의 축성은 빵의 전 실체를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전 실체를 그분의 피의 실체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거룩한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적절하게 불러 왔습니다.”23) 참으로 성체성사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거룩한 성사에 관한 교회 교부들의 교리에서 흔히 설명되듯이,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이며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수 있는 신비입니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단지 자연적인 요소로만 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그것들은 당신의 몸과 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다르게 받아들이더라도,
신앙이 그것을 여러분에게 확신시켜 줍니다.”24)+
아멘!
+교회는 파스카 신비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파스카 신비의 뛰어난 성사인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는 이미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교회의 모습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은 성찬례를 뜻합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첫 모습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은 파스카 성삼일로, 곧 성목요일 저녁의 사건들, 최후의 만찬과
그 이후의 일들로 되돌아갑니다.
성체성사의 제정은 게쎄마니 동산의 고뇌를 시작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성사적으로 앞당깁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다락방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로 내려가시어 올리브 동산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지금도 그 동산에는 매우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 나무들은 그날 그리스도께서 고통 중에 기도하시며 “핏방울 같은 땀이 뚝뚝 흘러
땅에 떨어졌을 때”(루가 22,44) 그 나무 그늘 밑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전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에 구원의 음료로 주신 그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피 흘림은 해골산에서 우리 구원의 도구가 됨으로써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셔서 ……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9,11-12).
아멘!
+이러한 신비를 이해하려는 모든 신학적 설명이 가톨릭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으려면, 빵과 포도주는
축성된 이후에는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이 더 이상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주 예수님의 숭고한 몸과 피가 그 순간부터 실제로 우리 앞에 성사의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계시다는 것을 확고하게 단언하여야 합니다.”26)
아멘!
+전례 규범들은 성찬례의 진정한 교회적 본질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점이 규범들의
가장 심오한 의미입니다. 전례는 전례의 집전자나 신비가 거행되는 공동체 그 어느 쪽의 사적 소유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 거행에서 중대한 잘못을 저질러 분파와 당파를 초래한 고린토 공동체를 질책합니다
(1고린 11,17-34 참조).
우리 시대에도,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현존하는 하나이며 보편된 교회에 대한 성찰과 증언으로서
전례 규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전례 규범에 따라 충실히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들과 그 규범을 따르는 공동체들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말없이 그러나 설득력 있게 증언합니다.
바로 전례 규범의 이 심오한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자 저는 교황청 관할 부서들에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하여 법률적 성격의 규정들을 포함하여 더욱 구체적인 문서를 준비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맡겨진 신비를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성찬례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다루거나 그 거룩함과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멘!
+성모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노래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성찬례 안에 이미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계획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습니다.
성모의 노래(Manificat)는 성모님의 영성을 드러내며, 성체성사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데에
이보다 더 탁월한 것은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삶이 성모님의 삶처럼 완전한 찬미와 감사의 노래가 되도록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멘!
수호천사님~
성체성사에 관한 중요한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는 나주 비닐성전에서 성체예수님 모실 때가 제일 기쁘고 행복해요.
예수님! 성모님!
비천한 죄인인 저를 그 거룩한 성전에 불러주심에 진심 감사드립니다.
아멘!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일깨움과 동시에 묵상할 수 있도록
수고하여 주심에 감사드려요.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과 은총 가득 받으소서. 아멘!
사랑해여~*
엄마꺼님의 댓글
엄마꺼 작성일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아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아멘
(요한6/53)
길동이님의 댓글
길동이 작성일
성체성사는 너무도 큰 은총이어서 모호성이나 평가 절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회칙이, 용인할 수 없는 교리와 관습의 어두운 구름을 걷어 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성체성사가 그 찬란한 신비로 끊임없이 빛나기를 바랍니다.
아멘.아멘.아멘.
수호천사님, 감사드립니다.
애쓰시는 님의 가정에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애인여기님의 댓글
애인여기 작성일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아멘!!!
수호 천사님, 수고 하셨어요. 감사드려요^^*
생활의기도화님의 댓글
생활의기도화 작성일
특히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이 뒤따랐던 시기에 창의성과 적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결과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던 수많은 남용이 있었음은 애석한 일입니다. ‘형식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특히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교회의 위대한 전례 전통과 교도권이 정한 ‘형식들’을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 흔히 전혀 부적절한 독단적 쇄신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성찬례 거행의 전례 규범을 매우 충실히 준수할 것을 간절히 호소할 의무를 느낍니다.
전례 규범들은 성찬례의 진정한 교회적 본질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점이 규범들의 가장
심오한 의미입니다. 전례는 전례의 집전자나 신비가 거행되는 공동체 그 어느 쪽의 사적 소유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 거행에서 중대한 잘못을 저질러 분파와 당파를 초래한 고린토 공동체를 질책합니다
(1고린 11,17-34 참조). 우리 시대에도,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현존하는 하나이며 보편된 교회에 대한
성찰과 증언으로서 전례 규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전례 규범에 따라 충실히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들과 그 규범을 따르는 공동체들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말없이 그러나 설득력 있게
증언합니다.
바로 전례 규범의 이 심오한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고자 저는 교황청 관할 부서들에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하여 법률적 성격의 규정들을 포함하여 더욱 구체적인 문서를 준비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맡겨진 신비를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성찬례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다루거나
그 거룩함과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멘~~~아멘~~~아멘~~~
소중한 내용들 올려주신 수호천사님 감사드려요.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어요.
늘 영육간에 건강하시길 빌며 예수님 성모님 사랑
가득받으시길빕니다. 아멘
천국을향해님의 댓글
천국을향해 작성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성모님께서는 또한 강생의 신비로써 교회의 성체성사 신앙을 선취하셨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성모님께서는 이미 사람이 되신 말씀을 잉태하고 계셨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현존하신 역사상 최초의 ‘감실’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태중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나, 말하자면 성모님의 눈과 목소리를 통하여 당신의 빛을 비추심으로써 엘리사벳의 흠숭을 받으셨습니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를 품안에 안고 들여다보시는 성모님의 기쁨에 넘치는 그 눈길이야말로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비할 데 없는 사랑의 모범이 아니겠습니까?
아멘~~~!!! 아멘~~~!!! 아멘~~~!!!
사랑하는 수호천사님~~~
감사하고 사랑해요~~~
♥아기천사님의 댓글
♥아기천사 작성일
사랑하는 수호천사님!~^ ^*
감쏴!~
영 육간에 건강하시길 기도해요!~
어머니망토님의 댓글
어머니망토 작성일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아멘!!!
수호천사님 수고와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성모님의사랑님의 댓글
성모님의사랑 작성일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아멘.
사랑하는 수호천사님 성체성사의 주요성을 알게 해주심
감사드립니다.
다같이님의 댓글
다같이 작성일
저희 본당에서 신부님이 성체 분배를 하시는데 어느 젊은 자매님께서 성체를
모시지 않고 성체를 손으로 쥐고 신자석으로 가는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랬지요
내 눈앞에서 저런일이 그러나 다행스럽게 신무님께서 보셨는가 다른 사람이 보셨는가는
몰라도 다시 신부님께서 오시라 하여 성체를 모시게 하여 아무 소리없이 끝나게
되었지요 이걸보고 손으로 영하는 성체의 불경에 죄가 많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알게되었습니다 저희 교회가 성체성사가 없다며 부실한 말씀 강론 듣고 성당에
다니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수호 천사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안에서
건강 하십시요 아멘
자아포기님의 댓글
자아포기 작성일
교회는성체성사로 살아가는 것!!
예수님께서 이세상 끝날때까지 함께 계시는 그 모습이 바로 성체로 우리에게 내려오셨으니까요!!!
감사! 아멘 아멘 아멘
어린이정카님의 댓글
어린이정카 작성일
교회는 파스카 신비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파스카 신비의 뛰어난 성사인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는 이미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교회의 모습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은 성찬례를 뜻합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첫 모습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은 파스카 성삼일로, 곧 성목요일 저녁의 사건들, 최후의 만찬과 그 이후의 일들로 되돌아갑니다.
아멘. 주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그 분을 제 안에 모시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뜻대로님의 댓글
주님뜻대로 작성일
성체성사는 너무도 큰 은총이어서 모호성이나 평가 절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회칙이, 용인할 수 없는 교리와 관습의 어두운 구름을 걷어 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성체성사가 그 찬란한 신비로 끊임없이 빛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너무도 큰 은총이여서 모호성이나 평가 절하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에 대한 교리 뿐 아니라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영성체를 하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을 말씀해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하나 둘 바꾸다 보면 본질이 흐려짐을 아시기에
성체성사는 절대 조금의 타협도 할 수 없는 매우 중대한 은총이며
그러기에 어떠한 모호성이나 평가 절하를 용납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라고 하심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수호천사님 ^^ 글 감사드립니다.
엄마와함께님의 댓글
엄마와함께 작성일
교회는 성체성사에서 그 생명을 이끌어 냅니다.
교회는 이 ‘살아 있는 빵’에서 자양분을 얻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이를 새롭게 경험하도록 어찌 재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체안에 현존해 계신 주님을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아멘!
사랑하는 수호천사님. 수고하셨습니다 (^0^)*
christina님의 댓글
christina 작성일
교회는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생명을 이끌어 냅니다.
교회는 그분께 양식을 얻고 그분으로 빛을 얻습니다. 아멘~!
성찬례는 하늘과 땅을 결합시킵니다. 성찬례는 모든 피조물을 끌어안고 그 속에 충만히 스며듭니다. 아멘~!
많은 곳에서 성체 조배는 일상의 중요한 신심 실천이 되고 또 성덕의 무한한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멘~!
수호천사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
새롭게님의 댓글
새롭게 작성일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살아 있는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생명을 얻고 또 생명을 주는 당신 살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아멘~~~
성체 성사의 중요성~!!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체와 성혈로 새로운 부활의 삶으로 이끄시기에,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께 부족하나마 사랑을 드리고자 노력하겠나이다~~~아멘!!!
사랑하는 수호천사님, 주님 성모님 사랑과 은총 안에서 풍요로운 행복 누리소서~~~
카타리나님의 댓글
카타리나 작성일
성체성사는 너무도 큰 은총이어서 모호성이나 평가 절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회칙이, 용인할 수 없는 교리와 관습의 어두운 구름을 걷어 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성체성사가 그 찬란한 신비로 끊임없이 빛나기를 바랍니다..아멘!!!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머니향기님의 댓글
어머니향기 작성일
성찬례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다루거나 그 거룩함과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멘!
+성모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노래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성찬례 안에 이미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계획되어 있고 예정되어 있습니다. 성모의 노래(Manificat)는
성모님의 영성을 드러내며, 성체성사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데에 이보다 더 탁월한 것은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삶이 성모님의 삶처럼 완전한 찬미와 감사의 노래가
되도록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멘!!!아멘!!!아멘!!!
사랑하는 수호천사님...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과 성모님의 크신 사랑안에서 가족함께 영육간에 건강
하소서 아멘!!!
성모님의 승리와 장신부님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에 건강과
안전을 기도지향이 꼭 이루어 지기를 수호천사님의 정성과
사랑 저희들의 작은 정성도 합하여 바쳐드립니다 아멘!!!
사랑해요 수호천사님...
피난처님의 댓글
피난처 작성일아멘! 감사함니다.
여디디아님의 댓글
여디디아 작성일
아멘^^
성체성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이 정말 성체안에 참으로 살아계시며 현존하신다는 것,
나주에 와서 알게 되었고 주님과 성모님 성심의 사도이자
성체의 사도이신 율리아님을 통해 더욱 절실히 느끼고 체험 할 수 있었어요^^
정성되이 모신다고는 했으나 실제 예수님의 몸으로 생각지는 못하고
예수님의 몸이라 '생각' 하고 모셨었는데...
나주 성모님을 만나고, 율리아님을 만나고 나서 성체가 참으로 예수님의 몸,
우릴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살심장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당^^ ㅎㅎ
성체 안에 살아계시며 참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lily님의 댓글
lily 작성일
성체성사가 그 찬란한 신비로 끊임없이 빛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hana님의 댓글
hana 작성일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제 넘 길어서 다 읽지 못하고 오늘 읽어야지 했는데, 나머지 부분이 사라졌네요^^;
좋은 것을 즉시 채우지 못한 제 부족함을 탓하며
죄송하지만 첨부 파일로 전체 글을 한번 더 올려 주시면 꼭 다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호천사님의 댓글의 댓글
수호천사 작성일
나머지 부분은 PDF 파일로 올렸습니다. 지면이 너무 길어 스크롤의 악박이 심해서요 -.-;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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