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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기념일 ☆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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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체사랑
댓글 19건 조회 11,278회 작성일 11-01-28 09:5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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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from the Life of St Thomas Aquinas (detail)-LIPPI, Filippino

1489-91. Fresco. S. Maria sopra Minerva, Rome

 

축일 : 1월 28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St. Thomas Aquinas

San Tommaso d’Aquin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Also known as

Doctor Angelicus; Doctor Communis; Great Synthesizer;

The Dumb Ox; The Universal Teacher

c.1225 at Roccasecca, Aquino, Naples, Italy -

7 March 1274 at Fossanuova near Terracina of apparent natural causes;

relics at Saint-Servin, Toulouse, France

Tommaso = gemello, dall'ebraico(binoculars, from the Hebrew)

Canonized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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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아퀴노 교외 로까세까(城)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는 아퀴노의 란둘프 백작의 아들이며,

로마 황제와 프랑스의 왕 그리고 태오도라와 친척이었다.

그는 불과 다섯 살의 나이로 몬떼 까시노의 베네딕또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에는 그의 교육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나폴리 대학교를 다녔고,

1244년에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칸이 되었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까세까성에 감금시킨 적도 있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고,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파리와 쾰른에서 성 알베르또(대)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250년과 51년 사이의 어느 대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후에는 주로 나폴리, 아나니, 오르비에또, 로마 그리고 비떼르보에서 가르쳤으며,

1259년~68년 사이에 "숨마 꼰뜨라 젠띨레스"를 마루리 지으면서,

저 유명한 "숨마 테올리지까(Summa Theologica.신학대전)"저작에 착수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1269년에는 수도사제와 교구사제간의 논쟁에 말려들었고,

시제르 브라반트와 요한 펙캄 그리고 파리의 탕피에르 주교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리용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희랍과 라틴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토의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리용으로 가는 중에 테라치나 교외 포사 누오바에 있는 시토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323년에 요한 2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비오 5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되었고,

1880년에는 레오 13세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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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칭호는 "보편적인 박사"(Doctor Communis)이다.

레오 13세는 모든 신학생들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에떼르 빠뜨리"칙서까지 반포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지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 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마늄 오뿌스"와 미완성의 대작인 "신학 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질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지적 능력 이외에도, 아퀴나스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다.

그는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몸"축일 성무일도를 집필했고,

지금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미가,

예컨데 "빤제 린과, 베르붐 수뻬르눔, 라우다 시온, 아도로 떼 데보떼.Devoutly I Adore Thee (Adoro te devote)" 등을 썼다.

또한 그는 주의 기도, 사도신경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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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umph of St Thomas Aquinas-TRAINI, Francesco

c. 1340.Tempera on wood, 375x258cm.Santa Caterina, Pisa

 

1225년경 아퀴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먼저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그 다음 나폴리에서 공부했다,

도미니꼬회에 입회하여 파리와 쾰른에서 성대 알베르또의 지도하에 학업을 마쳤다.

철학과 신학에 관한 위대한 저서들 을 남겼고, 많은 이들을 탁월하게 가르쳤다,

1274년 4월 7일 시토회의 포사누오바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369년 1월 28일 툴르즈로 그 유해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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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sion of Saint Thomas Aquinas. by Stefano Di Giovanni Sasetta.

 

아퀴노의 성 토마스 사제의 [강의록]에서

(Collatio 6 super "Credo in Deum")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나당하시는 것이 과연 필요했겠습니까?

네, 극히 필요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러했습니다.

첫째로 죄를 기워 갚는 치료제로서, 둘째로 우리 행위의 모형으로서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죄의 치료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때문에 닥쳐온 온갖 악을 치료할 치료제를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난은 우리의 모범으로서도 이에 못지 않게 유익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전체 생활을 완전히 정향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완덕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멸시하신 것을 멸시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신 것을 지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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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사랑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당하는 곤란이 어떤 것이라해도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내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 상에서는 그것을 더욱 위대하게 드러내 줍니다.

가장 위대한 인내는 두 가지 경우에서 나타납니다.

즉, 큰 어려움을 인내로이 참을 때나 또한 피할 수 있지만 피하지 않은 어려움을 견딜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다음의 성서 말씀대로 그것을 인내로써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당하면서 위협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인내심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스도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치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여러분이 겸손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재판을 받다 죽임당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순종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을 따르십시오.

"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 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것을 멸시하는 모범을 찾고 있다면," 왕중의 왕"이시고 "주님중의 주님"이신 분을 따르십시오.

"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지만"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옷 벗기우고 조롱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셨으며

매맞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마침내는 쓸개와 초를 마시셨습니다.

 

옷이나 재물에 애착심을 두지 마십시오. " 그들은 주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명예를 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조롱당하시고 매맞으셨습니다. 명예직을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예수께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었습니다."

쾌락을 탐하지 마십시오. "목마를 제 그들은 주님께 마실 초를 주었습니다."

(가톨릭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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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교회 박사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일 것이다.

그는 1266년 이탈리아 아퀴노 교외 로카세카 가렐?城)에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란돌프(Landulphus)라는 분이었는데,

황제 프리디리히 바르바로사에게는 조카가 되고, 하인리히 6세는 종형제(從兄弟)에 해당된다.

또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는 노르만디의 제왕을 친척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도 로베르토 기스갈도나 달글레토와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장차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가서

가난하고 검소한 수도 생활을 보내려고 하던 토마스에 있어서는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토마스가 다섯 살 때에 그의 아버지는 교육을 시키기 위해 그를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에 보냈다.

그 수도원장도 역시 란돌프라는 분으로 역시 아퀴노의 집안이었다.

어린 토마스는 덕행이나 학문 면에 놀랄 정도로 많은 진보를 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에도

종종 학문상의 의문이 머리에 떠오르면 즉시 놀음을 그치고 스승에게 달려가서 질문하는 것이었다.

이같이 해서 그는 10세 때 이미 보통의 17, 8세의 소년보다 더 많은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수도원장 란돌프는 아직 어린 토마스를 나폴리의 대학에 입학시켰다.

그 대학은 당시 학생들의 풍기가 나쁜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지만,

토마스는 어떠한 유혹에 대해서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고상한 것만을 찾게 되어 세상사물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마음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특별히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모께서도 늘 그를 보호하셨다.

그가 도미니코회에 들어가는 데도 성모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토마스는 14세때 양친 몰래 그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독실한 신자이기는 했지만 자녀를 수도자로 만들 생각은 없었고 더군다나

도미니코회는 아직 새로운 수도원이었던 만큼 토마스가 무단 입회한 것을 알게 되자

대단히 분노하여 어머니 테오도라는 즉시 아들을 데리러 나폴리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토마스는 그때 장상의 명령에 의해 로마를 출발해 파리로 향해 떠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점점 대노하여 토마스의 두 형인 란돌프와 라이노르도에게 그의 뒤를 쫓게 했다.

그들은 토마스를 붙잡자마자 이유 없이 죄수처럼 로카세카(Rocca Secca)성에 처넣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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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그가 수도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노력하며

심지어는 더러운 여자까지 방에 들여보내어 유혹케 하고 그를 타락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난로 속에서 불붙는 장작을 꺼내들고

이를 휘둘러 그 여자를 내쫓은 다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성모의 보호를 간구했다.

 

바로 그 날 밤의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허리에 거친 띠를 매어 주었다.

그는 그때 격심한 고통을 느껴 저절로 소리를 지르게 되었지만,

그 후부터는 한 번도 유혹을 당하지 않고 일평생 동정을 지킬 수가 있었다.

그것은 온전히 성모 마리아의 보호였다.

 

그의 견고한 의지와 경건한 생활에 우선 감동한 것은 그의 자매들이었는데,

하루는 그를 광주리에 숨겨 성의 창문을 통해 내려보내 유폐(幽閉)의 장소에서 도망가게 했다.

그는 급히 수도원에 돌아와서 그 후 다시 국경을 넘어 외국에 피신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교황의 권고도 있고 해서 양친도 부득이 그에게 수도 생활을 허가하게 되었다.

 

토마스는 그 후 독일의 쾰른 시에 가서 유명한 교회 박사 성 대 알베르토의 제자가 되었지만

경건하고 겸손하고 침착한 그는 처음에는 같은 제자 동료 중에서 평범한 사람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러나 그의 예민한 재지(才智), 그의 탁월한 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찬란한 빛을 발휘하여

머지않아 아무도 그를 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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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5년 그는 파리로 유학을 명령받고 그곳의 유명한 대학에서 연구하기로 되었다.

그는 파리의 도미니코회의 한 수도원에 기숙하고 매일 그곳에서 통학했던 것이다.

장성하자 그의 학덕도 점점 깊어지고 또한 높아졌다.

그는 십자가를 가장 좋은 서적이라고 칭하며

가끔 그에 대하여 묵상하고 하느님의 비추심과 은총을 받고 종교의 진리를 깨닫는 바가 심히 많았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과 순명, 정결과 청빈,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의 거울로 존경을 받았다.

 

3년 후 그는 쾰른에 돌아가 신품 성사를 받고 그곳 신학교의 신학교수에 임명되었다.

그 후에는 나폴리, 아니니, 오르비에토, 로마 그리고 비테르보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쉽고도 심원한 서적을 저술하고, 한편 종조 파리의 여러 교회에서 강론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왕 루이(루도비코)의 고문으로서 많은 신임을 받게 되었다.

파리 대학은 당시 전 유럽의 청년 학생을 흡수하고 있었던 만큼 토마스의 명성은 그의 저작과 더불어 삽시간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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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261년 교황 우르바노 4세(Urbanus IV)는 유명한 학자 토마스를 로마에 초대했다.

그리고 1264년 오르비에토에 체재 중 성체 축일을 전 세계에 지킬것을 결정했다.

(이 축일은 벨기에의 리유티히 주교구에서 시작하여 그 당시는 다만 두세 나라에서 지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를 위한 미사 전례문(典禮文)및 성무 일도서에 삽입할 성체 찬미가의 편찬을

당시의 고명한 신학자 성 토마스와 그의 친우 보나벤투라(Bonaventura)에게 위탁했다.

 

두 사람은 편찬을 마치고 난 후 보나벤투라가

먼저 토마스의 것을 읽고 나서 그의 완전함에 놀라 자기의 것을 무용한 것으로 생각해 태워 버렸으므로

교황께서도 토마스가 편찬한 것을 애용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듬해 클레멘스(Clemens) 4세자 교황위에 등극하자,

토마스는 1259년부터 68년 사이에 “숨마 콘트라 젠틸레스”를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걸작인 “숨마 테올로지카”(신학 대전, 神學大全, Summa Theoligica)의 집필에 착수했다.

이것은 고금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 신학서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가장 훌륭한 것이다.

천사적 박사라고 칭하게 된 토마스는 이 대작을 완성하는데 전후 9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그랬던만큼 하느님께서도 이 서적을 축복하시어 하루는 그에게 나타나셔서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보수로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토마스는 “주여, 당신 외에는 다른 것을 원치 않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외 그가 자기 친구 레기날드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그는 하느님의 발현 시에 형언키 어려운 무수한 신기한 일을 보고

자기가 오랜 시간동안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그 날 부터 주님께 대한 동경심에 차라리 죽음을 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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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상의 명을 받을어 볼로냐나 나폴리로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리용에서 회의를 소집했을 때

토마스도 참석하기 위해 그 곳에 가는 도중 조카딸 집에서 병을 얻어 위독하게 되었다.

이미 임종이 가까워온 것을 안 그는 “나는 수도자이므로 수도원에서 죽고 싶다”고 간절히 원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부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포사노바 수도원에 옮겼다.

 

곧 죽음이 점점 다가오자 두 세명의 친우는 아가(雅歌)의 설명을 청했다.

그는 그들의 청을 들어 말하려 했으나 이미 힘이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모시고 얼마 안 되어 그의 영혼은 천국을 향해 올라갔다. 그때 그는 48세였다.

 

성 토마스는 돌아갔으나 그의 불멸의 명작은 지금 더욱 찬연히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는 1323년에 요한 2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비오 5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고,

1880년에는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레오 13세는 모든 신학생들은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에떼르 빠뜨리” 칙서까지 반포했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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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정 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이다.

 

그의 “마늄오푸스”와 미완성 대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질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지적 능력 이외에도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 탈혼 그리고 계시를 체험했으며, 지금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찬隔?

예컨대 ”빤제 린과, 베르붐 수페르눔, 라우다 시온, 아도로 데 데보테(Adoro Re Devote)"등을 썼다.

 

또한 주님의 기도, 사도신경 그리고 성서 일부에 대한 주해서를 썼다.

한마디로 그는 지성과 성덕의 금자탑이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도미니코 사제 축일: 8월8일.
*성 대 알베르토 주교 학자 축일: 11월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 7월15일.
*성왕 루이(루도비코9세) 축일: 8월25일.

* [성체축일]복녀 에바 동정(축일:3월14일)과 복녀 율리안나동정(축일:4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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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의지

 

도미니코회 수사들에게 가장 유명한 선배를 손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들 것이다.

급우들이 ‘길리기아의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던 성 토마스는 불후의 명저 <신학대전>을 집필했다.

그러나 만약 어머니 테오도라의 고집대로 되었다면 그는 도미니코회가 아니라 베네딕토회의 수사가 되었을 것이다.

성 토마스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보냈다.

그는 나폴리 대학에 진학한 후, 도미니코회에 가입했고 결국 그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아들이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장이 되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수도원에 있는 토마스를 납치해서

2년 동안이나 지하실에 가두어 놓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의 결심을 꺾으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아들의 뜻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새해 첫날,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는 작심삼일로 그쳐 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진정한 결단력은 머리 속에서 하는 다짐이 아니라 마음먹은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불굴의 의지를 말한다.

성 토마스는 뛰어난 학문적인 업적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만일 그에게 학문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그의 위대한 작품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영적 성장에 필요한 일을 하고자 할 때, 가족이나 친구가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결심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지키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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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아퀴나스 
[라틴어]Thomas Aquinas  
 
성인. 사제. 교회학자. 축일은 1월 28일이다.


1. 생애 :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나폴리?가까운 로카세카(Roccasecca) 성에서 1224 년 말이나 1225년초에 태어났고 부친은 아퀴노의 백작이었다.
다섯 살 때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의 성 베네딕토 수도 원 학생으로 그의 학문을 시작하였다.
1239년 14세에 나폴리대학으로 옮겨, 1244년에는 나폴리의 도미니코 탁발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245년에 파리로 가서 1248년까지 있었고, 같은 해에 알베르토(Albertus Magnus)를 따라 쾰른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때에 그는 스승 알베르토의 영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기 철학이나 신학적 도구로 받아들였다.
1252년부터 파리에서 성서와 롬베르투스의 명제집(命題集)을 강의하였고, 1254년에 교수 자격인 박사학위를 받고 1259년까지 파리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 뒤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1268년까지 교황청 부속연구소에서 후에 교황이 될 분들에게 신학을 강의하였다.
1268년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 1272년까지 강의하면서 아베로이스파 학자들과 논쟁을 하였고,
이어 나폴리로 돌아와서 도미니코회 총회 신학원을 설립하려 했으나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이 소집한
리용 공의 회에 참석하러가던 중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에 선종하였다.
그의 생애는 연구와 저술과 교수생활로 일관하면서 진리 연구와 옹호를 위해 일생을 바쳤고, 깊은 영성에 충만한 삶이었다.
토마스가 죽고 난 뒤 그의 가르침은 파리나 옥스퍼드에서 한때 단죄되었으나 뒤에 다시 복권되었고,
1323면에 성인품에 올랐으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정통성의 시금석처럼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 뒤 20세기 토미즘(Thomism)이 부흥되기까지 거의 무시된 상태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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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상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먼저 피조물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견 해가 신학안에서의 인간 이성의 위치,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전능,
즉 은총과의 관계, 정치 사회에 관한 그의 사상을 결정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게서 독립적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자율적이다.
창조주의 활동은 피조물의 활동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피조물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조물들이 자율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활동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로운 것은 하느 님의 활동에도 불구하고도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활동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자유 가 없는 피조물들의 행동은 인과적(因果的)으로 다른 피조물들에 의해 결정되게 하고,
자유를 가진 피조물들의 행동은 타자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행동들은 결국 하느님에 의해 일어나는 피조물들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자유란 하느님과의 어떤 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원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하느님 능력이 드러남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토마스가 하느님에 대해 가진 사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창조주이시다.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의 어느 유(類)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피조물을 서로 대조적인 두 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에 필적될 수가 없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피조물에 원인이 있고, 또 어떤 것들은 하느님에게 원인을 돌리는 식으로 서로 대조시킬 수가 없다.
모든 피조물 들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행동한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지(認知)한다는 것은 곧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구별들을 함께 초월하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우연적 존재들'과 따로 구별되어 있는 `필연적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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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은 모든 피조물들의 절대적 근원으로서 `필연적 존재'이다.
우연적 존재들은 소멸될 수 있고, (질료적) 가능성이 (형상에 의해) 현실 화된 것이다.
우연적 존재들이 쉽게 파괴될 수 있는 것은 이 존재들의 질료성(質料性) 때문이다.
어떤 능동자가 우연적 사물들 의 형상(形相)을 다른 것으로 바꿈으로써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질료(質料)는 형상적(形相的 또는 可知的, 現實的)이 아닌 유형적 사물들 안에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것이 곧 개체화의 원리이고, 이 원리에 의해 동일한 형상 또는 동일한 가지성(可知性, intelligibility)을 가진 다수의 개체적 사물들이 있게 된다.
개체 사물들은 이들이 가진 물질성 때문에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가지적인 (intelligible)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개체 사물도 한 단어의 의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개체적 사물들을 감각 지각으로만 안다.
천사들은 질료와 형상의 합성이 아닌 존재들로서 질료를 현실화 하지 않는 자존적 형상들 (subsistentforms)이다.
이런 존재들은 개체도 없고 멸하지도 않으며, 그 자체로 가지적이지만 우리들에겐 가지적이 못 된다.
이는 우리의 인식양식이 피조물을 통해서만 작용하고, 또 상상(imagination) 안에서 물질적 상징들의 의미만을 이해 하도록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양식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 사물들의 형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인식활동은 개체 사물들의 형상들을 지성의 대상인 가지성에로 끌어올리는 일이고,
정신이란 이러한 형상들이 가지적 으로 또는 지향적으로(intentionally) 존재하는 곳이다.
이러한 작용을 토마스는 추상(抽象, abstraction)이라고 한다.
추상이란 물 질 안에 잠겨 있던 개체적 형상들이 상징들(symbols)의 의미(meanings)가 되게 하는 활동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들을 이용하 여 진리를 파악하고, 선언으로 표현된 판단을 내린다.
피조물들 중에 큰 부분(즉 천사의 세계)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간다고 하면 하느님은 더욱 더 우리에겐 알 수 없는 분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다.
토마스가 신 존재 증명에서 논증 하고자 하는 바는 경험 세계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불가피하게 존재(esse)에 관한 어떤 형태의 근본적 문제에로 우리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즉 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 한 해답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하느님에 관하여 무엇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란 말을 사용하게 하고 의미를 주는 피조물들이 가진 근본적 문제성을 안다는 것과 같다.
하느님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분이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라는 것이다(이것은 대답이고 동시에 문제이다).


이 밖에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이러저러한 분이 `될 수 없다'는 것뿐이다.
하느님 안에는 질료와 형상의 구별도 없고, 하느님은 개체도 아니 며 어떤 유에 속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이란 천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존재 안 할 수도 있다.
천사들의 존재들이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있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들을 창조 안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뚯에서 천사 들의 본질(essence)도 그 존재에 비하면 가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에겐 본질과 존재의 구별이 없다.
이러한 구별은 단지 피조 물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다. 하느님에겐 순순한 현실태만 있고 어떠한 가능태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퀴나스가 말 하는 창조주 하느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범주(範疇)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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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바로 존재 자체이시라고 한다면, 피조물은 존재 자체에 의해 존재를 받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 아니라 존재를 말하고, 이에 따라 아리스토 텔레스 이론이 아닌 성체(聖體)의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 이론을 말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빵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존재로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한 장소에나 정한 시간 안에 존재하실 수 없다.
만물을 지탱하시는 하느님은 어느 장소에 있는 어느 것에나 현재로 계신다.
그리고 하느님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그것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때는 어느 때나 진실이 될 것이다.
이렇게 영원성이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한 것으로 끝이 없는 지속을 뜻하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삶에는 전 후관계란 없다.
그분은 먼저 하나를 행하거나 알고, 다음에 다른 것을 행하거나 아는 일이 없다.
물론 그분 이 행하고 아는 대상들은 시간 안에 서로 연속될 수 있다. 하느님의 전능이란 당신이 뜻하는 바를 무엇이든 발생시킬 수 있다 는 뜻이다(예컨대 시작도 끝도 없이 시간 안에 우주를 창조하는 일 등).
그러나 사각원이나 과거를 변경시키는 일 등은 하느님 의 권능에서 제외된다.
하느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악을 행 할 수가 없으시다. 악이란 존재의 부재 혹은 결핍이고 한 사물의 구체적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기대되는 것의 결여(缺如)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토마스는 하느님의 절대적 초월성(바로 이 이유 때문에 역시 내재적임)을 주장하고 나서, 그러면 어떻게 우리 언어가 그분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토마스는 은유적 언어(metaphorical language)

〔예컨대 "주님은 나의 목자시다"와 같은 말〕와 자구적(字句的) 사용(literal usage) 〔예 컨대 "하느님은 선하시다"와 같은 말)을 구별한다.
은유적 표현은 부정적 표현과 비교될 수 있으나 자구적 사용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구적 표현에는 유비적 (類比的) 말(analogical term)을 인정한다.
유비적 언어란 체계적으로는 모호한 것이 지만 일의적(univocal) 언어도 아니고, 다의적(equivocal) 언어도 아니다.
내가 "친구를 사랑한다", "좋은 과실을 사랑한다.", "나의 조국을 사랑한다."라고 할 때에 `사랑'이란 의미는 서로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들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선하다'라는 말을 할 때에도 `선하다'라는 말이 항상 사용되고 있던
그 문맥의 의미와 관련을 맺으면 그 의미를 하느님의 신비에까지 늘려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선성의 의미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유비 (類比, analogy)란 언어 사용의 이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유비적으로 어떤 말을 사용할 때에 그 말이 뜻하고 있는 바 를 모두 알고 있는 것같이, 또는 그 말로써 하느님에 대한 술어로 간단히 언급할 수 있는 것같이 그렇게 그 말을 다루지 말라는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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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인간에 대해 영과 육의 이원론을 배척한다.
물질적 사물에서는 실체적 형상이 그 사물의 존재 원리로서 그 사물을 `있게' 하고 `행동'하게 하고, 그 사물이 `무엇이 되게' 한다.
반면 질료는 가변성의 원리로서 존재자에 대해 가능적인 것이고, 지금 그 사물이 무엇이 아닌 상태이다.
생명체에 있어서는 그 생명(혹은 혼)이 그 생명체의 형상이고, 그 생 명체의 살아 있는 그것이 곧 그 생명체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죽은 고양이는 이미 고양이가 아니며, 더욱이 고양이 혼이 없는 육체만 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실체이다.어느 동물이고 그 모든 생명활동은 그 동물 혼의 활동이고, 비이성적 동물들에게는 그 동 물 혼의 육체적 활동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떤 활동들(예컨대 사고하는 것, 선택하는 것 등)은 그 자체로 보면 육 체 안에 있는 과정이 아닌 인간 영혼의 활동들이다.
물론 이런 행동들이 상상이나 감각등 육체적 행동들의 도움 없이 자연적으로 는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자체로 보면 육체 안의 과정은 아니다.
이렇게 인간의 영혼은 육체로 하여금 인간 육체의 작용을 하는 인간 육체를 만드는 일 그 이상의 일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를 초월하고 그러한 활동들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이유때문에 육체가 존재하기를 그 치고 시체가 되더라도 영혼은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 육체에 혼을 불어넣는 일 없이 홀로 있는 영혼은 무엇과 같 을까에 대해서 아퀴나스는 설명이 궁해진다.
그러나 그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그 자체로 인간이 아니며, 부활이라는 계시 교리가 없다 면 인간에게 있어 죽은 자의 소생이란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비이성적인 것들은 그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의 본성 을 결정한 자연적 원인들 때문에 자기들의 목적과 자기 자신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적으로 가진 형상뿐만 아 니라 정신 안에 지향적으로 가진 형상들에 의해서도 행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고등동물들과 같이)어떻게 자기 목적들에 도달 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무슨 목적들을 지향할 것인가도 선택할 수 있다.


정치적이고 이성적 동물인 인간 본성은 자기가 목적으로 하는 어떤 선(善)들이 자기의 완성을 위해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인간은 가끔 더 큰 선들을 희생하고 더 하급의 선들을 우리 마음이나 정신 안에 간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는 경우 인간은 결국 자기 완성이 나 행복에 이르는데 실패한다.
윤리덕(倫理德)들 (정의, 용기, 감정의 절제 등)은 인간이 참으로 인간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성향(性向)들로서 교육으로 습득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덕행들은 선행에 대한 실천적이고 지적인 덕행인 분별력(prudentia)에 의존한 다.
이 분별력은 역시 습득된 덕으로 무엇을 행하여야 하고, 어떤 목적으로 지향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게 해 주는 성향이다.

덕행론(德行論)에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고 있지만, 정치적 동물로서 사회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은 또한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는 면에서는 그와 다르다.
이러한 하느님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는 은총으로, 저 세상에서는 영광속에 누리게 되어 있다.
은총이란 일차적으로 우리가 소유한 본성이다. 우리로 하여금 성삼위이신 하느님의 본성 에 참여하게 하는 인간의 정치적 본성과 다르지 않으나 이 본성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상응한 윤 리덕들이 있는 것과 같이 은총을 받은 우리 본성에 상응한 덕들이 있다.
전자는 교육으로 습득된 것이지만, 후자는 습득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infused) 덕들로서 신덕(信德)·망덕(望德)·애덕(愛德)이다.
신덕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성적으로 원하면서 받 아들이는 것으로, 성령이신 사랑을 함께 나누는 망덕과 애덕의 전제가 된다.
죄로 인한 타락 때문에 인간은 죄를 극복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며 충만한 인간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이는 어떠한 사회적 덕들도 지속적으로 합당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덕 없이는 애덕도 없다.
주요 저서로는 ≪신학대전≫(神學大典, Summa Theologiae), ≪대이교도 대전≫(對異敎徒大典, Summa Contra Gentiles), ≪명제론집주해≫ (命題論集註解, 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영혼에 대하여≫ (De Anima) 등이 있다. (→) 토미즘 (朴石熙) (참고문헌) M.D. Chenu, Int개ductions a l'etude de saint Thomas d' Aquin, 1950/F.C. Copleston, Aquinas, 1955, (강성위 역, 토마스 아퀴나스, 바오로서원, 1968)/E. Gilson, The Christian Philosophy of St. Thomas Aquinas, 1957/A.C. Kenny, Aquinas; (ed.), Aquinas: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1969/J.A. Weisheipl, Friar Thomas D' Aquino, 1975/G.K. Chesterton, Saint Thomas Aquinas, 1933 (박갑성역, 성 토마스論, 1962). 
(가톨릭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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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대전 
[라틴어]Summa Theologiae 
[한자]神學大全 
  
성 토아스 아퀴나스(1225 1274)가 쓴 가콜릭 신학의 주요 교리에 대한 종합적인 저서.
여기에 쓰고 있는 방법은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실질적으로 수정하지 않고,
교리와 도덕을 체계적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적용하였다.
이 저작은 하느님을, `존재'로서 의 하느님을, 그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만물의 근원으로서 외부 사물과의 관계에서 고찰한다.
다음으로 `선(善)'으로서의 하느 님, 창조된 것, 특히 천사와 인간의 목적으로서의 하느님의 고찰,
마지막으로 인류가 하느님에게 도달하는 `길'을 고찰한다.
추상적인 인류가 아니고 구원받기 위하여 강생(降生)한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타락한 상태 의 인류를 고찰한다.
참고문헌 La Renaissance du XII si cle, Paris 1933.
(가톨릭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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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설교자회(도미티코 수도회)홈에서

 

1. 토마스의 생애

  1) 출생

토마스의 출생지와 출생년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토마스가 사망한 해의 나이에 관한 초기의 전기 작가들의 증언,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에 들어간 나이로부터의 역산 등으로 인해 그가 1224년부터 1226년 사이에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태어난 장소는 그에 관한 자료의 상세한 검토 결과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 지점인 아퀴노의 마을 근처에 로카세카 (Roccasecca 마른바위 : 몬테카시노의 아빠스인 만소네가 994년 축조)에 축조된 산성이었다. 성주인 그의 아버지 란돌포는 시칠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령이라는 두 세력이 격돌하는 지점에 있는 영지를 지켜온 무장이었고 어머니 테오도라는 나폴리 출신의 귀부인으로서 1243년 경 란돌포가 사망한 후에는 1255년경 세상을 뜨기까지 로카세카에 아퀴노가의 지주로서 역할을 다한 용맹한 성품의 여성이었다. 토마스가 유년생활을 함께 했다고 생각되는 형제, 자매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사실은 조금밖에 없다. 아버지 란돌포는 먼저 세상을 뜬 아내와의 사이에 몇 명의 아이를 두었으며 테오도라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남자 4명(또는 7명), 여자 5명으로 토마스는 막내아들이다. 큰 누나(장녀)는 베네딕도회의 수녀원장이 되고 그 밑의 누나 두 사람과 누이 한 사람은 각기 백작의 가문에 속하는 귀족과 결혼하였다.

 

토마스는 이 가운데 산 세베리노 백작가의 로게로와 결혼한 누나 테오도라에게 특히 친근감을 갖고 있었던 듯하며 토마스가 사망하기 몇 개월 전에도 누나를 방문한 적이 있음이 전기작가들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토마스는 가문 가운데 로카세카 계열을 타고났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붙여진 '데 아퀴노(De Aquino)'라는 칭호는 일부 역사가들이 주장하듯 아퀴노 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출신 가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토마스는 박학하고 품위있는 귀족에 속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백작보다는 낮은 지위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형 레지날도는 1246년 카파치오에서 황제를 암살하려던 음모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명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당시 신앙과 정치가 매우 혼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을 도와 황제를 정복시킴으로써 개인적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이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려는 열정보다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퀴노 가문에서는 레지날도가 신앙과 교회의 이름으로 죽은 순교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토마스의 생애와 저술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 세계가 말려들고 있었던 서글픈 무질서 상태에 한편으로는 이론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응답했다. 

 

  2) 성장배경

로카세카 산성의 분위기는 전란의 거친 분위기와 귀족 생활의 우아함이 뒤섞여 있던 것으로 보인다. 날마다 무기소리와 말발굽 소리의 울림들, 동시에 눈부신 복장의 기사들의 마장 시합, 당당한 기마행렬, 음유시인들이 연주하는 음악, 강력한 성주들의 지원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이탈리아 노래 등의 색채풍부하고 활기찬 전경은 토마스의 혼에 깊이 새겨졌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가 탁월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5살난 어린이와 같이 순결했다' (토마스의 동료 레지날도가 시성조사에서 증언) 는 것은 로카세카의 지리적, 시대적 환경이 만들어준 결과라고 본다. 토마스가 술과 노래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고 후에 그와 수도회를 공격하는 반대파에 대해 당당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어린시절 그의 주변환경의 영향이 컸으리라 본다. 
    

토마스가 5살 되었을 때 그의 생활환경은 산성에서 부모에 의해 수도원으로 바뀐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의 토마스는 성서, 교부들의 저작,라틴어 문법, 기초수학, 음악이론 등을 배운 것으로 작가들은 적고 있다. 실제 토마스는 라틴어에서 매우 미숙하였는데 라틴어 교육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토마스의 사색과 탐구에 근원적인 특징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침착했으며 말수 적은 소년으로 혼자 들어박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많은 시간을 독서에 보낸 탓임에 틀림없다. 토마스가 어린시절 마을에서 떨어진 산 꼭대기 수도원으로 보내어져 그곳에서 그가 그 후에 전생애를 통해 지켜온 생활습관을 형성한 것이, 그의 학자 또는 연구자로서의 생활을 여러가지 의미에서 좁고 편중된 것으로 만들었다는 해석도 성립할 것이다. 그래서 몬테카시노의 주위에 펼쳐진 산들의 풍경은 토마스 안에 자라나고 있던 영적인 소망을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추진시키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고 본다. 작가 발츠(A. Walz)는 "산, 고독, 그리고 수도원의 침묵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를 도와 관상에로 이끌었으며, 그는 가장 단순한 사물로부터 최고의 것으로 상승해야 할 것을 배우고 이렇게 하여 남들보다 신속하게 신의 현존을 알아본다는 것을 배웠다" 고 적고 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은 토마스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여 그를 나폴리의 대학으로 보내 학업을 계속케 하도록 부모에게 권장하였다고 하였지만 당시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점령되는 등 전화에 휘말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토마스의 신변 안전을 염려한 부모에 의해 로카세카 성으로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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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도미니코회 입회

1239년 가을 나폴리 대학에 진학한 토마스는 인문과에서 여러 가지 자유학예(Artes Liberalis)를 공부하였는데 이는 수사학, 논리학 등이 주된 내용들이었다. 나폴리에서는, 토마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일과 삶에 결정적인 방향을 주는 두 개의 만남이 일어났다. 하나는 그가 철학을 배우기 시작한 발단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만나게 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미니코회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모든 부분을 라틴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시도를 착실히 실행하고 후에 거인(Magnus)이라고 불릴 정도의 박학을 구가한 스승 알베르토(그는 1223년 파도바 대학에서 삭소니의 조르단의 설교에 감화되어 도미니코회에 입회를 결심했다)의 지도 하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게 된다. 토마스가 도미니코회에 입회할 결심을 굳힌 것은 같은 나폴리 출신의 요하네스 데 산 줄리아노 신부의 지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기작가 토코는 적고 있다(나폴리에는 1231년 도미니코회의 수도원이 이미 발족되었다).

그러면, 어렸을 때부터 침묵 속에 기도와 관상에 전념하는 베네딕도회의 수도생활에 끌려있던 토마스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택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도미니코회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였을까? 첫째로 토마스에게는 (그의 생애가 보여주듯이) 권위와 명망에 대한 집착이 없고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자기가 택하려 하고 있는 길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세속적인 권위나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친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또 몬테카시노는 당시 명백히 토마스가 바라고 있는 수도생활을 보내기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약 20년 후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은 젊은 날의 토마스의 생각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수도회의 다른 수도회에 대한 차이는 무엇보다 첫째로 목적면에서 파악되고 둘째로는 실천 면에서 파악된다. 만약 목적이 동일하다면 수도회 우월성은 2차적으로 실천의 양에서가 아니라 의도된 목적에 대한 실천의 대응에 따라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더 우월하다. 그 까닭은 빛을 발하기만 하는 것보다도 조명하는 쪽이 더 큰 것이듯이 관상만 하는 것보다도 관상한 것을남에게 전하는 쪽이 보다 큰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다"(신학대전 제 188문 제 6항). 그러나 토마스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토마스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장이 됨으로써 일족의 위세와 번영에 기여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의 아퀴노가의 아들이 희사에 의존하면서 활동하는 탁발 수도회에 몸을 바치는 것은 일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테오도라가 나폴리의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달려갔을 때 토마스는 가족의 반대를 피하려고 총장(요하네스 빌데스하우젠)을 따라 볼로냐를 경유하여 파리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토마스의 형 레지날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토마스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형 레지날도는 1244년 5월 초순에 로마와 피렌체의 중간에서 처음엔 설득으로 나중엔 강제로 토마스를 붙잡아 로카세카로 끌고 왔다. 토마스는 로카세카 성의 한 방에서 약 1년 동안 감금당하게 된다. 그 가운데 젊은 여자를 고용하여 유혹하려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1245년 여름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도미니코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년∼1254년)를 통해 토마스의 해방을 종용하고 있던 터라 가족은 토마스의 해방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의 몸이 된 토마스는 나폴리 수도원에 복귀하여 수도원의 방침에 따라 알프스를 넘는 여행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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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활동

1245년 5월 토마스는 파리에 도착하여 생자크 수도원에서 거주하며 파리대학 신학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던 대 알베르토와 에땀프의 굴리엘무스와 만났다. 토마스는 파리대학에 와서 유럽최고의 학문적 수준을 가지고 진행되던 성서연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한복판에 서게 된 셈이다. 그곳에서 알베르토의 제자가 된 그는 침묵과 근면으로 연구에 투신하며 기도에 헌신했다. 토마스는 스승으로부터 "우리는 이 사람을 '벙어리 황소'라고 불렀지만 그가 앞으로 가르치게 될 때 그 소리는 세계로 울려퍼질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알베르토는 토마스에게 오늘날로 말하면 청강하는 학생이 아니라 조교에 해당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실제 토마스는 알베르토가 행한 '신명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관한 강의의 기록을 했다.  
 

토마스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대학원에 걸친 7년간 알베르토의 지도를 받았다. 두 사람은 도미니코회의 이상에 관해서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그 연구를 추진할 구상에 관해서도 생애를 통해 친밀한 사제 관계로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학문탐구 방법을 보다 자세히 비교하면 자연연구나 논리학에의 관심의 강약이라는 차이 말고도 알베르토가 스스로 철학적 입장을 자각적으로 확립하지 않고 다양한 철학사를 신학 속에 끌어들이는 경향을 보였음에 비해 토마스는 존재와 인식의 근본문제에 관한 스스로의 이해를 일관한 방법으로 심화시키고자 노력하고 그로부터 얻어진 철학적 통찰에 의해 독자적인 신학적 종합을 성취했다는 인상을 준다. 전기작가들은 토마스가 쾰른에서 면학을 시작할 때 "그는 감탄할만할 정도로 말수 적고 침묵을 지키기 시작했다" 고 적고 있다.

 

이것은 통상 연구에의 전념과 겸손의 표시로 풀이되기도 하고 스승 알베르토와 자기 생각의 차이를 의식한 토마스가 스승의 견해에 대한 찬성을 보류하고 스스로의 견해를 쉽게 표명하지 않았던 신중성의 표출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1250년(1251년) 사제로 서품된 토마스는 도미니코 총장(요하네스 빌데스하우젠)으로부터 파리대학 신학교수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의뢰받은 알베르토에 의해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1252년 가을 토마스를 맞이한 파리대학 신학과는 환영이나 우호적인 분위기와는 상당히 멀었고, 오히려 적의에 차 있었다. 반 도미니코회 운동의 배경에는 교구 성직자로 이루어진 교수단과 수도회(시토회, 가르멜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간의 반목의 역사가 있다. 교구 성직자 교수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수도회 교수단들이 대학의 규칙이나 관행보다는 수도회 방침을 우선시키는 경향(파업불참)과 교황이 파리대학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려하는 것에 봉사와 협력의 자세 등이 이유로 거론된다. 이러한 상황은 급기야 수도회(도미니꼬,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대해 강좌수 제한 규정, 선서를 거부하는 교수들(수도회 소속)을 교수단으로부터 추방한다는 결정까지 나왔다. 특히 도미니코회에 대한 공격은 언론이나 문서로 그치지 않았고, 도미니코회 수사들은 교수 성직자들(생타무르기욤, 1272년 사망)과 그들을 추종하는 학생들의 폭력이 두려워서 먹을 것을 구하러 수도원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국왕 루이 9세가 수도자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한 때는 경비병을 주둔시켰을 정도였다. 1252년 토마스는 성서학 강사로 임명되어 이사야서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토마스의 강의내용은 성서에 관한 상세한 주석을 위한 입문 또는 준비로써의 역할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며 때로는 중요한 개념에 관해 상당히 자세한 설명을 하는 일도 있었으나 오로지 성서의 자구에 관한 간단한 해설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의 예언적인 현시에 관한 강의는 훗날 '진리론'과 '신학대전'에서 상세히 고찰되고 있다. 1253년 명제론집 강사에 임명되어 1256년까지 강의를 맡았다. 토마스는 강의 때에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여 해결의 새로운 방법을 찾고 해결을 뒷받침하기 위한 새로운 논증을 창출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경탄하고 면학에의 열의를 불태웠다." 고 작가들은 적고 있다. 그러나 파리대학에서의 수도회 교수단(특히 탁발 수도회)에 대한 반대파의 움직임은 여전히 강력했다. 그들은 탁발 수도회에게 "육체노동은 않고 희사에 의존하는 것은 복음에 따라 완전한 생활 목표를 한다는 주장과 어울리지 않으며 사회 골치거리로 전락한다"며 거세게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파의 움직임은 1256년 10월 기욤이 쓴 '최근의 위험에 관하여'가 로마에서 단죄되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 의해 파리에서 추방되고 반대파들이 자기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그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토마스와 보나벤투라를 교수 공동체에 받아들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259년 6월 도미니코회의 방침에 따라 교수직을 물려준 토마스는 파리와 쾰른의 중간에 있는 발렌시안느에서 열린 도미니코회의 총회에 출석토록 지시받았다. 그 이유는 도미니코회 내부의 신학, 철학의 연구교육에 관한 근본 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의의 기록을 보면 도미니코회가 학문 연구의 수준을 높이고 유지하는 데에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도미니코회의 대학에 파견되어야 할 학생의 자격, 교수의 선정에 관한 엄격한 조건, 교수는 그 직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체의 잡무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임이 규정되어있다. 신학자 사이에서는 세속의 학문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과 불신이 보였던 당시의 전반적 상황에 비추건대, 이는 하나의 영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알베르토와 토마스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1260년 9월에 나폴리에서 열린 로마 관구의 회의에 출석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파리대학 교수를 그만둔 후 로마의 교황청 소재지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의 강사를 지내고, 교황청을 이전시킴에 따라 거처를 옮기며 교황청 신학고문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토마스는 1260년 이후, 이탈리아 각지에서 열린 관구회의에 출석할 의무가 주어졌다. 토마스는 그 생애에 걸쳐 스승 알베르토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으나 수도회 고문이 된 그에게는 여러 사람들(교황, 도미니코회 총장, 군주나 영주에서부터 동료, 기사)로부터 많은 강의 요청이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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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성체축일을 제정할 것을 포고함에 있어서 토마스에게 당일 미사의 전례를 포함하여 성무일도를 만들 것을 명하였다. 토마스는 1265년 아나니에서 열린 도미니코회 로마 관구 회의 결정에 따라 새로운 신학대학을 산타 사비나 수도원에 발족시켰다. 이 학교는 신학 외에 철학부문을 갖춘 종합적인 대학이 아니라 교수 토마스를 중심으로 로마 관구의 각 수도원으로부터 파견된 수도회자들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연수센터였다. '신학대전'의 제 1부를 다 썼을 즈음 토마스의 이탈리아 체제는 끝나고, 약 5년간에 걸쳐 제 2부는 파리에서, 다시 미완으로 끝난 제 3부는 나폴리에서 쓰게 된다. 애초에 초학자를 위한 신학입문서로서 쓰여진 신학대전은 16∼17세기 이후는 엄청난 주석서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러한 주석가들에 의해 신학대전의 기본사상이 이미 해명된 것이 아님은 오늘날 토마스 학자들 사이에 학파가 형성되어 있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대로이다. 1272년 봄, 파리를 떠난 토마스는 피렌체에 도착한다. 6월 12일부터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에서 열린 도미니코회의 총회, 로마 관구 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관구 회의는 토마스에게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도록 일임했다. 당시 로마는 쇠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비해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의 도움으로써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활기 넘치고 있었으므로, 토마스는 나폴리를 대학 설립의 장소로 선택했다.

 

그는 1272년 9월부터 나폴리 대학에 인접한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강의를 개시했다. (토마스 시성을 위한 조사회에서의 전한 바에 의하면) 나폴리의 거의 모든 시민이 토마스의 설교를 들으려고 운집했다고 한다. 1273년 부활절 끝무렵, 토마스는 다음 해 5월 7일부터 리옹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1271∼1276)로부터 공식 요청을 받았다. 이 제 14차 공의회의 주요 의제는 동방 그리스 정교회와 서방 라틴교회와의 재결합이였기 때문에 토마스는 우르바노 4세의 요청으로 저작한 '그리스인의 오류를 반박함' 을 지참하도록 명을 받았다고 한다. 토마스는 동료 레지날도와 다른 수사들을 데리고 아픈 몸으로 여행을 나서다가 길로 나와 있던 나무가지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혀 거의 기절하여 일어설 수가 없었다.

 

토마스 일행은 그대로 여행을 계속하면서 몬테카시노, 아퀴노를 지나 로카세카 성에 들른 후 북쪽으로 향했다. 이 때 토마스는 쇠약과 피로가 심해져 병이 악화되고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작가들은 적고 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토마스는 세속의 집에서 죽음을 맞기를 바라지 않아 이전부터 초대를 받고 있었던 거기에서 가까운 시토회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 수도원에는 토마스가 그 생애의 마지막 10여일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객실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마지막으로 수도자들의 요청으로 구약성서의 '아가' 강해를 했다고 하는데 그 사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토마스는 일요일에 대수도원장(테오바르도) 손으로부터 성체를 영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1274년 3월 7일 수요일 이른 아침에 토마스는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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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토마스는 성서 가운데 난해한 곳을 만나면,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힘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토마스의 악필은 유명하다. 그 문자에는 '판독 불가능'하다는 별명이 붙었을 지경이다. 그래서 이미 첫번째 파리 대학 교수 시절부터 그의 곁에는 늘 몇 사람의 필기자가 딸려 있어서, 그의 저작 활동을 돕고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도미니꼬회는 일찍이 '동료'라는 제도를 두고서, 교수나 연구에 종사하는 이들이 잡무에서 가급적 해방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1) 토론

토론에는 통상의 수업의 일환으로서 행해지는 '정기 토론(또는 정규 토론)'과 성탄절과 부활절 전주에 일반 공개로 행해지는 '임의 토론(또는 자유 토론)'의 두 가지가 있었다.

 

  2) 진리론

이 「진리론」은 "진리에 관하여"라는 제 1문제로부터 시작되는데, 이어서 신의 앎, 이데아, '말', 천사의 인식, (인간)정신 등, 주로 인식에 관계되는 문제가 제 20문제 "그리스도의 영혼의 앎"까지 언급되어 있다. 제 21문제 "선에 관하여"의 다음에는 주로 욕구에 관한 문제가 제 26문제 "영혼의 정념에 관하여"까지 고찰되며, 최후의 세 문제(제 27∼29문제)에서는 은총의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만물의 발원, 만물의 정점인 이성적 피조물의 하느님에의 귀환, 이 회귀의 '길'로서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상에 기하여 배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토마스는 진리의 개념을 가장 중요한 줄거리로 삼았다고 말할 수 있고, 이는 나중에 '신학대전'에서 성숙한 형태를 띠게 된다. 여기서는 그의 독자적인 신학적 종합의 구상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3) 교사론

토마스는 인간에 의한 새로운 지식의 획득은, 모든 확실한 지식의 기초인 자명한 제 1원리가 그것에 의해 인식되는 이성의 빛이 신에 의해 우리 안에 심어져 있다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며, 인간에 의한 모든 교수 활동은 이 빛 덕분에 유효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의미에서는 신만이 '내적으로, 그리고 주로' 가르치는 자인 한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신만이 가르친다고 하는 아우구스티노의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신만이 '내적'으로 가르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토마스는 지적한다.

 

  4) 페트루스의 108개 명제

총장(요하네스)으로부터 동료의 '이단적' 견해를 검토하라는 명을 받은 토마스는 이 108개의 명제 하나하나에 관하여 엄정히 그리고 주의 깊게 논평한다. 전체를 통하여 토마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히 페트루스에게는 개념 규정의 불명확성과 용어상의 혼란은 있으나 그러한 것들을 '이단적'이라고 고발하는 것은 오히려 고발자측의 이해의 부족과 악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중상의 의도가 빤하다는 것이다.

 

  5) 대 이교도 대전

토마스 자신은 이 책의 제 1권의 제 1장에서, 지혜있는 이의 직무는 최고의 의미에서 진리인 신적 진리에 관해 숙고하고 진술하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립하는 오류와 싸우는 것이라고 서술한 후, 제 2장에서 인간이 종사하는 모든 탐구 가운데 지혜의 탐구야말로 가장 완전, 고귀,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하며 지혜의 탐구를 찬미한다. 이 책의 집필에 나선 것은 라이문도의 요청이었을지도 모르나 이 책 속에서 토마스는 여러가지 형이상학, 인간학, 윤리학적 문제에 관하여 다른 어떤 저작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상세히 철학적 논의를 소개하고 있으며,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체로서 「대 이교도 대전」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진리를 해명하고, 이론을 반박한다는 호교적 색채가 강한 신학적 저작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6) 신학대전

<구성>
제1부 거룩한 가르침, 유일한 신, 삼위 일체인 신, 창조(악의 고찰을 포함),
        천사, 인간, (만물의) 통치.
제2부(제1편) 인간의 궁극 목적 및 지복, 인간적 행위, 정념, 습관과 덕, 악덕과 죄, 법, 은총.
제2부(제2편) 대신덕(신덕, 망덕, 애덕), 윤리덕(지혜, 정의, 용기, 절제), 예언, 관상적 생활과
                   실천적 생활, 직무와 신분.
제3부 그리스도, 성사(제 90문제, 고해 성사의 중도까지).

 

'신학대전'은 모두 512개의 문제를 포함하는데, 주목할 말한 것은 토마스 자신이 '윤리적인 사항'을 논하는 부분이라 하고 있는 제 2부가 303개의 문제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토마스가 제 3부를 예정대로 썼다고 해도, 양적으로 '신학대전'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중세 고딕 대성당이 오늘날도 늘 새로운 찬미와 경이의 원천이듯이 '신학대전'도 허다한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7) 아베로에스파와의 논쟁

'아베로에스파'라는 명칭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이슬람 사상가 이븐 루시드(1126∼1198)-라틴세계에서는 아베로에스(Averroes) 로서 알려져 있다-의 해석을 최상의 것으로 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해하는 데 열중했던 데서 생겨난 것이다. 토마스가 아베로에스파 내지 그들이 해석한 한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1) 모든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지성밖엔 존재하지 않는다(따라서 개개의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2) 의지는 필연성에 의해 지배된다, (3) 세계는 영원하다, (4) 개개의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다, (5) 신의 섭리는 개개 인간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는 등 신앙의 진리와 정면에서 대립하는 명제를 철학적으로 논증된 사항-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는 부르지 않았지만-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왜곡자'라 부르는 게 적합한 것이다.

 

  8) 아우구스티노파와의 논쟁

아우구스티노파와의 논쟁 속에서 토마스는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라고 제목을 붙인 논쟁적 저작을 발표하였다. 이 저작에는 "투덜거리는 이들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실상 토마스의 논점은 미묘하기는 하나 극히 단순하며, 어떤 것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과, 그것이 늘 존재했다고(그 의미에서 영원하다고) 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고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토마스는 신앙과 신학을 철학의 우쭐대는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는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스스로 철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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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토마스의 설교

그리스도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 첫째로, 믿음으로 영혼은 하느님과 맺어지게 됩니다. 그 까닭은 믿음으로 영혼은 말하자면 하느님과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둘째로, 신앙으로 우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을 아는 것이므로, 주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그들이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요한 17, 3)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 셋째로, 믿음은 현재의 생활을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착하게 살려면 착하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 넷째로, 믿음으로 우리는 유혹에 이길 수 있기 대문입니다. 히브리서(11, 33)에도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정복했다"고 합니다. 유혹은 악마, '세속'이나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악마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이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을 지지하지 않도록 유혹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으로 배제됩니다.

 

  10) 저작의 중단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 축일은 수요일에 해당하였는데, 이 날 아침 토마스는 여느 때처럼 성 니콜라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미사 도중 "이상한 변화를 느끼고"(카푸아의 바르톨로메오의 증언), 미사 후 토마스는 쓰는 것도 구술하는 것도 일체 그만두고 말았다. 제 90문제 제 4항으로 영영 붓을 놓아 버린 것이다.  토마스는 동료 레지날도의 "예의를 망각한 많은 힐책에" 대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입 밖에 내지 말 것을 서약 시킨 후에, "내가 보고, 내게 계시된 사항에 비하면 내가 쓴 것은 모두가 나에게는 지푸라기처럼 보인단 말이네"하고 답하였다는 것이다. "지푸라기"-그것은 성서의 자구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고 한다-라는 말은 확실히 하느님의 신비를 탐구해 마지않는 인간의 숙명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탐구 노력이 그 궁극의 갚음(즉 신비의 직시)을 얻었을 때, 신비에로 이끌었던 말(그 때까지 탐구에 의해 생명과 힘이 불어넣어진 말)이 힘 없는 것이고 한낱 말에 불과하며, 지푸라기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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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 론 
 

토마스의 장례는 수도원 대성당에서 치러졌으며, 테라치나의 주교, 베네딕토회·도미니코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들, 그리고 캄파냐 지방의 많은 영주들이 참석하였다. 대성당 중앙 제단 곁에 토마스의 유해가 매장된 후, 레지날도 수사는 주위의 권유로 추도 설교를 하였다. "토마스에게 성인칭호를"이라는 운동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294년, 도미니코회의 시칠리아 관구가 로마 관구로부터 독립한 해이며, 제 1차 증인조사는 1319년 7월 21일부터 9월 18일까지 나폴리의 대주교관에서, 제 2차는 1322년 11월 10일부터 20일까지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있었다. 이른바 '악마의 대리인'이 제출한 시성 반대의 논거는 토마스가 생전에 행한 기적 수가 적다는 점이었는데, 교황 요한 22세는 "토마스는 그가 교수로서 해결한 문제의 수만큼 기적을 행한 것이다."라고 말해 이 반대론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시성을 위한 절차가 모두 끝나, 토마스가 교회의 성인이라고 공식으로 선언된 것은 1322년 7월 18일 아비뇽의 노트르담 데 돔 교회에서였다.  
 

오늘날 우리 생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존재관과 인식관은 중세 스콜라 학의 다양한 입장 가운데 하나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더욱이 그러한 입장이 근대, 현대 사상으로 받아들여짐에 있어서, 그 이전의 오랜 지적·정신적 전통을 뛰어난 방법으로 종합한 토마스의 사상은 거의 완전히 망각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와 같은 실수에서 출발한 근대 사상의 답보 상태에 직면하여, 또 하나의 선택지로서의 토마스 사상에 눈길을 돌리는 데는 뭔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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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회의 영성. 도미니코회의 독특한 생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자신을 수도회에 일치시키는 선서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축성하며,

특히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보편 교회에 바치며 하느님 말씀의 완전한 복음화를 위하여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근본 회헌 § III)

 

사도들의 사명의 협력자들인 우리는 성 도미니코가 생각했던 생활 방식을 따라,

사도들의 생활을 본받아 공동 생활에서 한마음을 이루고, 복음적 권고[순명, 정결과 청빈]의 선서에 충실하며,

전례의 공동적 참여, 기본적으로 성체성사와 성무일도, 기도[묵상, 묵주기도와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녀께 대한 신심 등]와 금욕에 열성을 가지고,

진리를 근면하게 공부하며, 꾸준히 규율을 준수[봉쇄, 침묵, 수도복 착용, 참회 고행으로 하는 일 등]한다.

 

이 요소들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 균형을 이루며 조화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여, 그 총체가 우리 수도회의 고유한 생활을 이루는 것이다.

즉 가장 완전한 사도생활은 풍부한 묵상에서부터 설교와 가르침이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근본 회헌 § IV)

 

그러므로 우리 형제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코회의 카리스마를 "관상하고 관상한 것을 전한다"로 요약하였는데,

이것은 우리의 소중한 모토가 되었다.

(천주교설교자회.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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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인도를 구하는 기도문

 

형언할 수 없는 창조주 하느님,

당신께서는 넘치는 지혜로

천사의 세 품을 만드셨고,

하늘의 놀라운 질서를 마련하셨으며,

우주 만물을 각자의 품위대로 배치하셨나이다.  

 

당신께서는 빛과 지혜의 원천이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라 불리십니다.  

 

당신의 찬란한 빛으로

저의 지성의 어둠을 밝히시어

타고난 죄와 무지의 두 암흑을 몰아내 주소서.  

 

당신께서는

어린이들의 입에서도 찬양을 자아내시니,

제 혀가 당신의 지혜를 말하고,

제 입술이 당신 축복의 은총을 쏟아내게 하소서.  

 

이해의 명석함을,

보유할 수 있는 역량을,

배움의 방법과 수월함을,

해석에서는 정확함을,

말을 할 때는 충만한 은총을 주소서.

 

당신 영의 감도로 시작하게 하시고,

도중에 저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며,

마칠 때 완성하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을

주님이시고 사람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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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인도를 구하는 성 토마스의 기도문에서

         

빛과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           

당신의 밝은 빛으로           

저의 어두움을 비추시어           

제가 지닌 죄와 무지를           

없이 하소서.

          

말할 때는 풍부함을,           

해석할 땐 정확함을,           

배움은 수월한 방법을,           

잊지 않는 능력으로           

뛰어난 이해력을 주소서.

          

저의 모든 시작이           

당신의 영으로 있게 하시고           

모든 과정의 발걸음을 인도하시어           

완전한 마침을 허락하여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설교자회 로사리오 성모 수도원 (수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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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 엎디어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 사랑 길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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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는 1225년경 이탈리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토마스는 18세가 되던 해에 가족의 반대에도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었고, 파리와 쾰른에서 대 알베르토 성인의 지도 아래 학업을 마쳤다. 철학과 신학에 대하여 위대한 저서를 많이 남겼고,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는 1274년 세상을 떠났으며, 1323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
말씀의 초대
사람들이 빛을 받았다는 것은 진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것을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자들의 과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회상시키며,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잘 견디어 나가도록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제1독서). 하느님 나라는 마치 땅에 나무가 자라듯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새 훌쩍 자란다. 아주 작은 겨자씨도 자라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커진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다(복음).
제1독서
<많은 싸움을 견디어 냈으니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32-39 형제 여러분, 예전에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어떤 때에는 공공연히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한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재산을 빼앗기는 일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보다 더 좋고 또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말씀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제 마음안에 친히 오시어 사랑의 불을 놓아 주시고 사랑의 기적을행하시어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복음
<씨를 뿌려 놓으면,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말씀안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부족한 제 영혼을 다스리시어 매순간 말씀 안에서 살아 숨쉬며 복음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묵상
“혼인하고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홀시어머니와 외아들 사이에서 시집살이를 하며, 병 수발까지 해야 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라는 구절을 마치 씨앗처럼 가슴에 심고 묵상하며 어려움을 견디어 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인내하며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순간들이 제가 하느님 앞에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을 보낸 때였습니다.” 한 자매의 신앙 고백입니다. 말씀을 씨앗처럼 품고 자신의 삶을 통해 물 주고 가꾸어, 지금은 가족 안에 평화와 기쁨의 열매를 맺었다는 나눔입니다. 신앙이 없고 말씀이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한 그루의 나무를 가꾸는 심정으로 살아 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주십니다. 다 자란 큰 나무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마다 하느님 나라를 열어 줄 믿음과 희망, 사랑의 씨앗을 주십니다. 우리가 비록 돌밭 같은 마음을 가졌을지라도, 우리 안에 심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물 주고 가꾸면, 어느덧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우리 자신이 큰 나무가 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 주님을 향한 희망 그리고 이웃을 품어 주는 사랑의 마음이 자라면 우리가 큰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나의 넉넉한 그늘 아래 쉴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바로 그렇게 자란 우리 큰 마음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 오늘도 생활의 기도를 통하여 ~~~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누리는 좋은 하루 되세요 ^^*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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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처님의 댓글

피난처 작성일

옷이나 재물에 애착심을 두지 마십시오. " 그들은 주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명예를 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조롱당하시고 매맞으셨습니다. 명예직을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예수께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었습니다."

쾌락을 탐하지 마십시오. "목마를 제 그들은 주님께 마실 초를 주었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님!
나주성모님 인준과 저희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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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님의 댓글

달님 작성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여 
나주 성모님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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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향기님의 댓글

어머니향기 작성일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아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시여  ~~~~
나주 성모님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사랑하는 성체사랑님...오늘도 변함없는 정성에
감사합니다 영육간에 건강하시고~축일을 맞이
하신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아멘!!!

성모님의 승리와 장신부님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에 건강과
안전을 기도지향이 꼭 이루어 지기를 성체사랑님의 정성과
사랑 저희의 작은 정성도 합하여 바쳐드립니다 아멘!!!

사랑해요 성체사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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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꺼님의 댓글

엄마꺼 작성일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보수로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토마스는 “주여, 당신 외에는 다른 것을 원치 않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아멘!

성토마스아퀴나스이시여,
나주성모님의 인준과 율리아님의안전과 기도지향을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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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작은꽃님의 댓글

님의작은꽃 작성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시여~~~
나주성모님의 하루빠른 인준을 위하여 율리아엄마의 영육간의 건강과안전을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아버지께 간절히 전구하여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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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님의 댓글

위하여 작성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님이시여
오류에 빠진 사제들이 회개하도록 빌어주소서!
나주성모님의 빠른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사랑하는 성체사랑님의 가정에
주님과 성모님의 무한한 축복과 사랑과 평화가 늘 가득하시길 빕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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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함께님의 댓글

엄마와함께 작성일

당신께서는
어린이들의 입에서도 찬양을 자아내시니,
제 혀가 당신의 지혜를 말하고,
제 입술이 당신 축복의 은총을 쏟아내게 하소서.아멘! 

*☆ ☆*  
      ☆*
    ☆ *☆
┏━━˚*LOVE*♥˚♥˚♥˚♥˚♥˚**************━━┓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성인성녀들과 순교자들이시여!
      나주 성모님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율리아님의 영육간에 건강하심과 안전 그리고
      기도지향마다 꼭 이루어질 수 있도록 빌어주소서.아멘!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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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이님의 댓글

길동이 작성일

당신께서는
어린이들의 입에서도 찬양을 자아내시니,
제 혀가 당신의 지혜를 말하고,
제 입술이 당신 축복의 은총을 쏟아내게 하소서. 
아멘.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님이시여,
나주성모님의 빠른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성체사랑님, 감사드립니다.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기쁨과 사랑과 평화 누리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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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na님의 댓글

christina 작성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여 나주성모님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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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천사님의 댓글

♥아기천사 작성일

아멘!!!~

성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님!
나주성모님 인준과 저희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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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여명님의 댓글

새로운여명 작성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다음의 성서 말씀대로 그것을 인내로써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당하면서 위협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멘...

성체사랑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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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여기님의 댓글

애인여기 작성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시여!
나주 성모님 빠른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안전을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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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화관님의 댓글

기쁨의화관 작성일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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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님의 댓글

새롭게 작성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빠른 인준과 함께 율리아님의 영육간 건강과 안전,
봉헌하시는 모든 기도 지향이 이루어지시도록
전능하신 하느님께 간절히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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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님의 댓글

어린양 작성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시여! 나주 성모님의 더욱 빠른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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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꽃님의 댓글

위로의꽃 작성일

성 토마스여!
나주 성체의 기적을 잘  아시는 성인이시여!!
나주의 인준을 위하여 강력히 전구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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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기도화님의 댓글

생활의기도화 작성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시여
나주성모님의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에 건강과
안전과 봉헌하시는 모든 기도지향이 이루어지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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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포기님의 댓글

자아포기 작성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시여!! 나주성모님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성 토마스 아퀴나스(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시여!! 율리아자매님의 기도지향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함께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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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ana님의 댓글

Liliana 작성일

+여러분이 사랑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당하는 곤란이 어떤 것이라해도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이 인내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 상에서는
그것을 더욱 위대하게 드러내 줍니다.
가장 위대한 인내는 두 가지 경우에서 나타납니다.
즉, 큰 어려움을 인내로이 참을 때나 또한 피할 수 있지만
피하지 않은 어려움을 견딜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다음의 성서 말씀대로 그것을 인내로써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당하면서 위협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인내심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스도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치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아멘!

+여러분이 겸손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재판을 받다 죽임당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순종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을 따르십시오.

"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 입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보수로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토마스는 “주여, 당신 외에는 다른 것을 원치 않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학자시여!
한국 나주 성모님의 인준을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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