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자유게시판

 

운영진글

율리아님말씀

주님께서 예비하신 삶

기도봉헌란

영광의자비의예수님

 

사랑의메시지

나주성지바로알기

나주의진실

나주 동영상

은총증언

 

 

 

 

캐톨릭 교회의 혼란과 진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뱃사공
댓글 10건 조회 3,306회 작성일 12-05-30 10:59

본문

부제 캐톨릭 교회에 들어온 현대 위기의 역사적 뿌리

표지그림 : 갈릴리 호수의 선상에서 난파 위기에 처해 공포에 떠는 제자들

(Rembrandt van Rijn)

1 부

조감도(鳥瞰圖 ;A BIRD'S EYE VIEW)

1 장

개혁

내가 생각하듯이 사람들도 때때로, 여전히 “도대체 캐톨릭에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느냐?”고 질문하는 데, 그럴 때 최선은 “두 가지의 상반되는 사물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답변하는 것이리라. 이 책을 펴낸 목적의 하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처분한 것을 시간과 때에 따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를 계속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에 있다.

1960년도에 교회의 주요 개혁 프로그램에 관한 일을 토론하기 위해 교황의 휘하에 더불어 세계 캐톨릭 주교들이 모여 합법적인 총 공의회(역사상 21번째이자 백년이 채 안 되어 바티칸에서 두 번째 열렸다)를 진수(進水)시킨 내용을 설명해보자. 교황 요한 23세의 요망에 의해 그 회의는 1962, 1963, 1964, 1965년 연속 4년간 매 가을 시즌 두 달씩 열렸다. 이 회기 동안 공의회 위원회와 위원들이 이 과업을 수행했다. 1963년도 요한 교황의 후임자인 교황 바오로 6세께서 2th, 3rd, 4th 회기 동안 주도하셨다.

하지만 공의회는 그 이름을 빌미하여 대부분 교회의 가르침과 권위에 반대하는 것을 들여놓고 커다란 반역의 돌발을 눈앞에 둔 채 줄곧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이 장의 서반부에 상반되는 흐름 중 개혁을 위한 운동을 우선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모든 진실한 개혁의 요청과 같이 공의회 가르침의 핵심은 캐톨릭 신자들로 하여금 더 훌륭한 개인의 거룩함으로 회귀시키려는 요청이다. 이것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이다. 만약 캐톨릭 신자들이 요한 교황께서 시초에 생각하신 것과 같이 더 거룩해졌더라면 교회 양떼의 매력에 끌려 분리된 그리스도인들을 캐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했을 것이며, 또한 그때 모든 불은 진화할 수 있었고, 현대 세계를 변환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본적 요청을 위해 4년간 연속 2천명 이상의 주교들이 로마로 집결할 필요는 없었으니. 공의회를 주도한 사람들의 내심은 더욱 특별한 관심사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공의회 이전 오래 동안 공식적 크리스천의 나라에 살았던 대부분의 캐톨릭 신자들은 자신들의 태도와 외관이 그에 맞추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한 나라에서는 일종의 종교적 무사태평주의가 우세하다. 평탄한 가정의 삶에 비유할 수 있듯이 특징적으로 감명 받을 일은 전무하다.

예를 들어 또한 너무 빈번히 그들이 고백하는 정도의 믿음에 거의 부응하지 않거나 또는 충분치 않는 삶을 살아온 탓으로, 그 누구도 “신앙과 삶 사이의 간격”이 도래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그들의 신앙의 삶은 믿는다는 사실 뿐, 습관적 종교심이 보이지 않는 많은 부분을 빠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천 국가에 장기간 고착된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즉시 개종시킬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거나 거의 없다고 추측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 모든 사람은 이미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자연히 선교영성도 쇠약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개종시키고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의 여지(餘地)라고 느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보건데, 여전히 크리스천 나라로 불릴 수 있는 많은 나라에서 신자들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 크리스천들은 어디든지 소수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들의 결함은 교회선교임무에 이르기까지 우려할 정도 이상의 더 커다란 결과로 나타났다. 소수라는 사실은 바로 소수라는 그 사실 때문에 언제나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보일 것이며, 종교적으로 소수가 되면 믿는 자들의 행동은 그 믿음의 진실여부에 대한 하나의 규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임무 이행을 지속하고 어떤 나라에서조차도 믿음이 존속할 수 있도록 했었더라면, 신자들은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는 사라진 생기 있는 정신과 영성으로 움직였을 것은 틀림없다. 그들은 말로서뿐 아니라 모범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부름 받았으며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선교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自覺)하도록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외관으로의 변화가 열심히 하려는 생각도 없는데 단순한 명령조의 말로 어찌 원만히 수행될 리가 있겠는가. 신자는 피정을 갈 때, 자신과 인생과 믿음에 도움이 되는 신선한 전망과 유사한 어떤 것을 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미리 예상한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피정에 들어갔다.” 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곧 알게 되다시피 비록 문제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로부터 교회는 그 고유의 본성뿐 아니라 교회의 선교임무와 세계와의 관계, 신학개혁을 유도하거나 또는 교회 믿음을 표현하는 태도를 반영하는 피정 소득을 얻었든가?  이 질문에 관련된 사람들은 캐톨릭 신학의 개혁은 캐톨릭 생명의 개혁을 위해 필수 불가결했다고 했다. 만약 신자들의 믿음이 그들이 개혁해야 했던 사실들 때문에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의 신앙이 불충분한 상태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신자들은 모든 언외의 의미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신자들의 이해 내부에 “블랙 홀”이 있었다. “블랙 홀”은 신앙과 삶 사이의 간격을 초래한 책임을 져야했다.

신학의 개혁은 새로운 믿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의 개혁은 캐톨릭들을 보다 더 열렬하고 사도적이 되게 할 뿐 아니라  가능한 한 신앙을 보다 더 풍성하며 더 균형 잡히고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오해를 사게 될 원인을 제거하여 신앙을 더 알기 쉽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 사람들이 공의회 교령에 신앙의 중심점(中心點)과 전망(이것들은 흔히 “새로운 오리엔테이션”으로 언급되었다.) 및 어떤 신학적 전개(신앙의 양상에 관해 본래의 “유산”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 불명확한 내용을 명백하게 도출해 내는 것)의 단초에 관한 중요한 변동 요소를 포함시켰다.

교회가 신앙의 중심점(요점)을 변동하는 이유는 이전에 대부분 지향했던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 지금까지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고 느낀 것이 있다면 그 불균형을 교정하여 신앙을 더욱 준수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신비는 자연에서 나타나는 사실들처럼 상대적 보완성을 지니고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많은 성분들의 하모니이다. 바로 자연에서 보듯이 빛과 어둠이, 기쁨과 슬픔이, 변화와 안정이 있으며, 그와 같이 크리스천의 신비 안에도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지니시며, 왕이고 하인이시며, 미사는 피 흘리심이 없이 이루시는 갈바리의 희생을 제 지내는 제사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단 한 순간조차도 그 모든 본질적 내용의 전망 안에 전체적인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철저하게 균형 잡힌 근본적 직관의 전반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 이 전체의 모습은 전 세계로 미치는 가르침이 매 주일 전례를 통하여 제대로부터 모든 지침의 형태를 경유하여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충실함은 중심점의 적절한 배분에 의존한다. 생기 넘쳐흐르는 모든 특성들이 골고루 나타나야할 뿐만 아니라, 그 특성들은 각각의 성분과 전체의 양자가 정당한 관계를 보여야 한다. 만일 정당한 밸런스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전체의 의미와 목적에 어느 정도 영향을 초래할 것이다. 그와 같은 방식의 풍부한 사례들을 언급할 수 있다.

공의회 꼰칠리움이 더 풍성하고 더 균형 잡힌 신앙의 표현으로 실질적인 변화를 위한 가르침을 마련한다는 목표로 삼은 신학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전례를 변경하고, 교회법을 개정하며, 종교일치를 주도하고, 종교지침을 단순화 시키며, 로마에서 매 삼년 주기로 열리는 주교 시노드와 같은 새로운 행정 조직체와 국내 주교회의, 교구 위원회, 사제회의, 본당 협의회와 기타 등등의 자문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꼰칠리움 교령은 필히 해야 하는 개혁의 형태에 관하여 지침서(guideline)만 내 놓았을 뿐이다. 실제적 변화들은 공의회 이후(以後) 교황과 주교들과 함께 또는 통치하는 교황의 독자적 과제가 되었다. 많은 경우에 그것들은 교령이 시사하고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범위를 상당히 넘어선다.(주석1)

또한 캐톨릭들을 더욱 열렬하고 더욱 사도적으로 만들고, 그리고 이방인들이 더 잘 이해하는 신앙을 만든다면 요한 교황께서 칭 하신 aggiornamento "시대적 요구들에 대한 적응“ 영어로는 “적응(update)” 또는 “쇄신”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될 거라고 믿어졌다.

아죠르나멘토는 공의회의 두 번째 주요한 과업이었다. 사람들은 아죠르나멘토 또는 “적응”을 마치 개혁과 동일한 것처럼 토론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아죠르나멘토”는 엄밀한 측면에서 전혀 개혁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혁이란 외관의 일부분이 일그러졌거나 파괴된 것을 그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에서는 도덕, 영성, 흠숭 양식, 교회 법령, 통치 형태를 말할 수 있고 혹은 우리가 방금 보았다시피 신앙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의 개선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이 작업은 종종 역사의 과정에서 우선 사항이 아니었거나, 무시 되었거나 혹은 본래의 아름다움과 효율성을 가로막는 우연히 부가된 첨삭들을 제거하고 유익한 것들을 복구시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반면에 아죠르나멘토나 적응은 주변 문화 안에서 새로운 사상과 관습과, 검불과 알곡을 선별하여, 그때에 “성세(聖洗)하거나", 혹은 교회의 사상과 관습으로 취하는데 있어서 적법하게 “성세”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교회가 저울질 해보는 것이며, 교회의 임무는 당연히 유익한 것을 채택하는 것임으로 그에 반(反)한 방해는 없을 것이며, 그러면 사람들에게 교회가 어떤 것을 선포하든지 가능한 한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교회로 보이도록 할 것이다. 자연적인 것과 계시된 지식 사이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것은 생각의 수준에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이 공동기도 시간을 포기하고, 또한 강한 의지를 지닌 수도원장이 그들의 외박을 허용하고 다음날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한다면 개혁된 것이다. 선한 이유에서 그가 전화를 설치하거나 초보 수련자들을 위한 윤리 신학과정에서 현대 정신학에 관해 일부 좌담회를 수반한다면 적응된 것이다.

오늘날 “토착화” (선교사가 교회의 허가 하에 교회 건축과 장식, 전례에서의 어떤 지역적 관습, 혹은 가르침이나 생활 속의 신앙에서 표현과 행동에 대한 어떤 지역적 양태를 교회 안에 도입하는 것) 라는 과정은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 새로운 장소에 꼭 맞는 아죠르나멘토”나 적응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새로운 문화와 지속적인 만남의 과정을 거쳐 온 이래로, 아죠르나멘토와 토착화 양자는 교회 안에서도 언제나 계속되어 왔다.

교회는 맨 처음 그레꼬-로만 문명의 기준을 취할 적에 그 좌절에 대비해 당시 교회 스스로를 조율하면서 아죠르나멘토와 토착화를 시작했다; 그때에 교회는 그리스 철학과 제국법의 황금을 추출하고 교회의 것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때에 교회는 박해시기 후에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용이하게 하도록 속죄의 엄중함을 완화했다; 그때에 교회는 과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인 프톨레 마이오스의 천동설 우주론을 교회의 신앙으로서가 아니고 당시 과학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교회의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 수용했다; 그때에 교회는 서구의 대다수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어 전례를 중단하고 라틴어로 전환 했다; 그때에 교회는 제국의 몰락에 따라 도시에서 떨어진 지방 사람들을 개종시키려고 점진적으로 움직여갔다: 그때에 교회는 왕들에게 성유를 도포하였고, 기사도 제도를 육성하면서, 하느님의 휴전(중세의 교회가 명령한 일시적 사투 중지령)을 시행했으며, 교황 선거에서 거친 로마 귀족들과 대중을 배제하고 추기경단에 한정하였고, 수도승의 주요작업 중의 하나로 성서필사본을 제작하고, 대학교를 유사 이래 처음 설립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라비아 철학을 상세히 연구하도록 했으며, 문예부흥 시기의 인본주의에서 교회에 가치가 있는 것은 껴안으며, 사제들로 하여금 교육받은 평신도들과 대등한 실력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사제 연수를 위해 신학교 제도를 도입하였고, 그리고 17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과학학습과 더불어 타협이 시작되었다.

불행하게도 교회는 시의적절하게 꼭 필수적인 작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많은 자녀들이 열정적으로 “시대”와의 추잡한 관계를 맺게 되는 사실에 의해 빈번히 방해받는다. - 봉건제도와 르네상스 시대는 후일 결국 성(聖) 교회 사람들을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게 될 사람들의 몇 가지 현저한 사례(事例)를 제공한다. 21세기의 사람들은 명백히 이런 종류의 커다란 과업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교회로서는 불쾌하지만 제때 치료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자주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더욱 중대한 죄악을 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교회가 반대의 답을 할 필요성 때문에 어떤 양상들을 명백히 하고, 불쾌한 것들을 더욱 정밀하게 정의하고 체계적으로 조직화하고, 혹은 결과를 설명할 수 있게끔 하는 경우가 있으나, 새 시대와 장소에서 만나는 시대적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신학적 개혁을 넘어서 믿음을 변경할 정도의 사유는 더군다나 아니다. 달리 말해 그것들은 신학적 내지 교의의 발전을 위한 촉매역할을 할 수는 있다.

지난 과거에도 아죠르나멘토에 대하여 그와 같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근래에 그에 대처하는 특별한 필요성이 있었어야만 했는가라는 것은 지난 150년간에 걸쳐서 사람들의 삶과 그리고 그들이 노출되었든 새로운 사상과 이데올로기 독재의 측면에서 경천동지할 변화를 고려한다면 쉽사리 이해된다.

교회로서는 그것들은 선교의 임무에 기회와 장애의 합성물로 나타나는데, 가장 우호적인 여건을 제공한다 해도 어떤 현황파악에 그칠 뿐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더욱 거룩하게, 더욱 사도적이 되게 하는 것은 여전히 우선고려 사항이다. 다른 모든 것들의 목적은 - 개혁, 현대화, 문화(文化)화 - 신자들의 내적 배열을 새롭게 가다듬고, 그들의 영적 에너지를 소생시켜 발산시키고, 지금까지 나쁜 습관 때문에 부분적으로 폐쇄했거나 폐쇄된 사상, 단조로운 영성, 자신들의 신앙심에 부적절하게 내포한 것을 파악하고, 비효율 적이며 교회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이미 효율적이지 못한 방식과 새로운 기회를 이용함에 따른 태만을 교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1960년경에 교회적 권위의 변동에 이처럼 돌연히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가?

실로 어제 오늘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언급한 바와 같이 (그 기원은 19세기 초로 거슬러 간다.)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개혁 운동이 오래 동안 있었으며, 1-2차 바티칸 공의회 사이 90년간에 이미 커다란 밀약(密約)이 이뤄졌다.

하지만 1930년, 1940년과 1950년 동안 주로 프랑스, 독일의 신학자들과 학자들 측에서 더 근본적인 신앙의 중심점 변동과 상당수의 세속사상의 더욱 과감한 채택 및 교회가 “성세(聖洗)“해 주기를 바라는 세력들이 결집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이 교회 승인을 득하기 위해 내놓은 신앙의 전시품(展示品)이 ”새로운 신학(la nouvelle theologie)“으로 불리는 것이다.

요한교황의 직전 전임자이셨던 비오 12세께서 교황(1939 - 1958)직에 재위하시는 동안, 새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많은 사상들을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 교황과 자문위원(諮問委員)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다. 회칙 “Human Generis(1950년 ; 캐톨릭 교리의 근본을 위협하는 잘못된 견해들에 대해 하신 말씀)”는 교황께서 당신이 인정할 수 없는 말씀을 적시한 내용이다. 그 사람들 중 일부는 한 동안 강의와 저술을 금지 당했다. 하지만 교황 요한23세는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새로운 신학을 선도하는 대부분의 대표 지도자급이 공의회에 참석했다. 일부는 토의용의 서류 초안을 작성하는 위원회 일을 하도록 초빙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개개의 주교들을 위한 신학고문으로 출석했다.

원래 ‘경멸하는’ 뜻이 있는 “새로운 신학”이라는 용어는 프랑스 신학자 게리구 라그란지 신부(Garrigou-Larange. OP)가 호칭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분은 그들과 라이벌 관계인 준 공식적 신 스콜라 신학계의 지도자이시다.(주석2)

신 스콜라 신학자들과 새로운 신학자들 사이의 대립관계는 공의회에서 많은 투쟁을 기저(基底)에 펼쳐놓는다. 이 한판 투쟁은 AD 400년 경 시작되어 300년 동안 6회기의 공의회에 걸쳐 투쟁하였던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간에 벌어진 우리 ‘주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 신학파는 거의 동 시대의 경쟁관계였지만, 오늘날 그 차이는, 새로운 신학이란 새로 오는 자(New Comer)로 기존의 가르침을 대치하자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선도하는 “새로운 신학자들”의 이름은 리용, 포비에르의 예수회의 앙리 드 뤼박 신부, 예수회 동료인 쟌 다니엘루 신부, 벨기에 Le Saluchoir의 도미니칸 고등연구소 선생으로 대부분의 삶을 보냈던 도미니칸 회의 이브 콩가르 신부, 그의 선생이자 친구인 마리 도미니크 쉐누 신부 등이며, 이 연구소는 나중에 프랑스 변두리로 이사 갔다. 예수회의 고생물학자인 데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는 배경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핵심인물로서 공의회 개막 7년 전 1955년도(부활절 아침 뉴욕에 있는 친구 사제의 아파트에서)에 죽었다.(역자 주)

예수회 신부 칼 라너는 독일 내의 신사조를 대표하는 대장이었고, 중부 유럽에는 도미니칸 회 에드워드 스킬러벡 신부가 대표한다. 스위스 신학자 한스 폰 발다사르 신부는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스 신부는 자신만의 작은 공동체를 세우려고 몇 년 전에 예수회를 떠났지만, 뤼박 신부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의 관점에 대부분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학생이었다. 신 스콜라를 리드하는 평신도인 쟈끄 마리뗑은 “새 신학자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데이야르 드 샤르뎅의 제자이며 공의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깊숙한 영향을 끼쳤던 임마누엘 무리에르의 그룹들을 추종하며 대부분 샤르뎅의 사회적, 정치적 사상을 인정하고 있었다.

새 신학자들은 영향력 있는 소수의 주교들에 힘입어 공의회에서 개혁파 배후의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개혁파”로 말하자면, 내가 그들의 모든 사상을 묘사하거나 언제나 가득한 언외의 의미를 일일이 파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은 공의회에서 시종일관 영향력을 장악한 채 신 신학자들이 주도하는 내용의 대부분을 지원한 사람들의 더 광범한 몸체이다.

추가하자면, 또한 포괄적 전망도 갖추지 않은 채 일종의 어떤 변화를 열망하는 많은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교회 전반에 걸쳐 있었다. 얼마 후에 철학자 디트리히 폰 힐데브란트 교수는 전례의 변화와 또 다른 분야의 폐해에 반대하여 격렬히 저항하면서, 독일의 현상학적 방법을 포함하는 광의의 철학을 가르치기를 원했으며,(역주) 그리고 새 가르침의 즉각적인 여파 속에서 “이차 바티칸 공의회”의 위대성을 역설했고, 한편 오푸스 데이의 설립자인 스페인의 성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궤르의 가르침은 특히 평신도에 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창조 계획안에서의 거룩함의 보편적 소명과 인간의 노동의 자리에 관한 가르침을 앞당긴 것으로 인정된다.(주석3)

이 장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공의회에 관해서 세 가지의 요점이 언급되어야 한다.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은 “사목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자들이 마음과 삶에서 더 많은 것을 “털어놓고 말해서” 교회의 가르침을 구하고자 하는 것과 주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엄정한 정의(定義)나 아나테마(단죄)도 없었다. 이리하여 교리적 가르침은 거의 도외(度外) 시 하다시피 했고, 소설과 유사하거나 취미에 따라서 소설답지도 않은 성서 내용은 무시해도 된다고 결론을 내린 캐톨릭인들이 부지기수에 달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교황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제안할 수 있고, 그렇기도 하지만 최후엔 하느님의 처분하심에 달린 것이다.

어떤 엄정한 한계조항이나 단죄사항은 없었을는지 모르지만 “교회헌장”이라는 자격이 부여되어 있는 두개의 중요한 문서 (교회와 계시의 원천) 는, 전체적으로 교령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신학자들”과 개혁파들에게도 대부분 신뢰를 주며 불공정하지 않고 가장 위대한 가치를 지닌 교리적 재료의 자산(資産)이다.

두 번째 요점은 공의회 개막 시(時) 요한교황이 연설하신 유명한 한 구절과 관련이 있다. 교황께서는 교회의 “불가변적(不可變的) 교리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내야 한다. 유일한 것은 신앙의 유산이며, 이것은 성(聖) 교리 안에 함유된 진리들로 구성 되어있다. 표현의 방법은 달리할 수 있지만, 언제나 동일한 중대성과 의미와 더불어 있다.” 고 하셨다. (주석4)

어떻게 그 구절을 이해시켰고 적용시켰는가 하는 방법은 공의회에서 핵심이슈의 하나가 되었고, 그 이후 무수한 문제들을 야기한 원인이 되었다. 새 신학자들이 선사한 신선한 증정품이 단지 말과 스타일, 혹은 개념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뿐이었나? 그러면 여러분은 의미는 바꾸지 않은 채 개념은 바꿀 수 있겠는가?

잭(Jack)과 질(Jill)에 관한 자장가를 일별해 보면 약속의 난해함을 알게 될 것이다. “잭과 질은 물 한 동이를 길으러 언덕으로 올라갔어요.” 이제 “물”을 “액체”로 대신해서 길어 온다. 여러분은 의미를 완전히 변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별로 명확하지도 않다. 그들이 운반하고 있었던 것은 백포도주, 혹은 비소(砒素) 한 통이었다고 제안해도 될 것 같다.

공의회에서 흔한 일은 전문용어를 대부분 의미가 더욱 흐릿한 것으로 역이용하는 것이며, 공의회 때부터 교회에 반(反)하는 반역신학자들은 공의회의 권위를 입고 저러한 의미의 변화를 들여놓을 수 있었다.

세 번째 요점은, 꼰칠리움의 가르침과 개혁 안건들이 미친 영향은 캐톨릭 교회에 한(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크리스챤 조직체들도 자신들의 관습과 확실성에 액체 또는 비소로 어느 정도 희석되거나 혼합된 요소를 지니게 되었다.

공의회를 요청한 요한교황의 결정은 하느님의 영감(靈感)에서부터 온 것으로 믿은 것인지, 혹은 아닌지? 달리 말해서 하느님의 능동적인 작업이었을까, 아니면 당신의 의지(意志)로 허용하신 작업이었을까? 그 누구도 알 수 없다.(주석5) 그러나 설혹 다만 후자일지라도 하느님의 의지(意志)하심은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공의회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주석

*주석 1. 사람들을 마주보는 제대들은 전례교령에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공의회가 요청한 범위를 넘어선 주도권 행사의 한 예이다. 반면에 광범한 범위에 걸쳐 토마스 철학과 신학을 포기한 것은 꼰칠리움 가르침의 출발이다.

*주석 2. 용어 “새로운 신학”은 당초 프랑스 신학자들 그룹 사이에 퍼지는 생각들에 사용되었다.

이어서 이 용어는 라인 강을 따라서, 또 중부 유럽 아래쪽의 나라들에서 비슷한 사상을 지닌 사람들도 포함하면서 확장되었다. 신 스콜라 신학은 교회 가르침을 영원한 형식으로(불변) 나타내는데 반해 신 신학은 역사적 발전 요소(가변)를 강조했다. 철학에의 주관적인 출발점과 진화적 실재성의 관점을 선호했는데, 이 관점에서는 ‘사물의 발달과정이 존재보다 더욱 중요시된다.’

주석 3 ; “당신의 이상(理想)이 진짜로 위대한 것이다. 바로 그 시작에서부터 공의회 이후 뒤늦게 교회의 성격을 묘사한 평신도들의 신학이 예상 되었다.”라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 8월 19일 오푸스 데이의 회원들에게 설교했다. 성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가 종교 기관의 수장과 상담역 신학자로서 공의회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두 분야의 초청을 거절한 이유는 저러한 연유에 있다.

(알바로 뽀르띠요의 “하느님 안에서 침례” 프린스턴 왕립 출판. 1992년. 9쪽-14쪽 참조)

*주석 4. 공의회 문서의 첫 영어 번역(대수도원장 - 갈라거)은 엄청 중요한 문장인 “언제나와 같이 동일한 중대성과 의미와 더불어”라는 구절을 빠뜨린다. 그리고서는 요한 교황께서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한 파렴치한 바티칸 관리가 연설문이 주어지자 그 뒤 공식적 인쇄 교본에서 은폐했음이 드러났다. 요한 교황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은 옥스퍼드 교수 죤 휘니스 가 “타블렛” 독자투고란에서 효과적으로 논박하였다. (1992년 1-2월호)

주요한 포인트는 왜 캐톨릭들은 뜻의 변화를 원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요한 교황께서 ”언제나 . . .“의 구절을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고 열망하는가?

*주석 5. 교황 요한은 2000년 9월 3일 성 요한 23세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셨다. 독자들 각자가 결론 낼 여지를 남겨둔다.

역주.

1. 종교 철학자 디트리히 폰 힐데브란트 교수.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20세기의 교회박사라고 칭송하셨다. 그는 데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를 "거짓 예언자”라고 했다. 현상학적 방법은 자연계 이외의 실재성과 초월성을 논외(論外)로 하고 그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자는 철학사유의 방법.

2.

a. 예수회 빈센트 P 미셀리 신부는 저서 “적 그리스도”에서 데이야르 드 샤르뎅을 “적 그리스도의 앞잡이”로 묘사.

(미국 뉴욕 교구인가.)

b. 폴 A 위킨스 신부 저 “그리스도 부정되시다”, (Tan book 출판사.)

데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성적 위선과 신앙적 허구성을 밝힘

3. 앙리 드 뤼박 신부. 하느님의 성에 들어온 트로이의 목마” 참조. 1967년도 9월, “새로운 교회,..... 예수그리스도의 교회와는 다른 교회가 생겨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범신론에 근거를 둔 배교로 향할 위험에 처해있다.”고 하셨다.

d. 데이야르 드 샤르뎅의 편지 : “나에게 가장 흥미롭고 열중하게 하는 것은 인격적 하느님은 지나간 시기 위대한 신석기시대의 주인 이상이 아니며, 세계의 혼(에너지, 또는 우주의 영)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종교( 개량된 그리스도교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를 설립하고 주위에 전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종교적 문화적 단계에서 이것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레온틴 잔타에게 보낸 1936. 1. 26 편지.

 

*우리들은 로만 캐톨릭의 계시신앙이 교회에 들어 온 현대주의에 부정되고 있음에도 거의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소중한 신앙을 부정하는 이 사상을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도입했으며, 오늘날 이토록 사악한 사상이 어떻게 교회의 혈관과 뻐에 기생하여 교회를 난파직전의 위기에 처하게 하고 있는가를 지금 부터 이 책을 통해 그 대장정을 함께 시작해 보십시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엄마꺼님의 댓글

엄마꺼 작성일
profile_image

어머니망토님의 댓글

어머니망토 작성일

아멘!!

profile_image

생활의기도화님의 댓글

생활의기도화 작성일

아멘~~~

profile_image

어머니향기님의 댓글

어머니향기 작성일

우리들은 로만 캐톨릭의 계시신앙이 교회에 들어 온 현대주의에
부정되고 있음에도 거의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소중한
신앙을 부정하는 이 사상을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도입했으며,
오늘날 이토록 사악한 사상이 어떻게 교회의 혈관과 뻐에 기생하여
교회를 난파직전의 위기에 처하게 하고 있는가를 지금 부터 이 책을
통해 그 대장정을 함께 시작해 보십시다 아멘!!!

성모님의 승리와 세분신부님 수녀님 생활의기도모임 지원자님들
그리고 율리아님의  영육간에 건강과 안전을  기도지향이 꼭 이루어
지기를 뱃사공님의 그 정성과 사랑 저희의 작은 정성 합하여 바쳐
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뱃사공님... 감사합니다
교회의 흐름과 상황을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늘 깨어있는 작은 영혼으로서
성모성심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함께 기도의
모아요 영육간에 건강을 빕니다 아멘!!!

profile_image

달님님의 댓글

달님 작성일

사랑하올 뱃사공님
정말 로 깨어 현 상황을 그대로
알려 주시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시니
그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 집니다
언제나 나주에 오신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 가득 받으세요 아멘

profile_image

주님함께님의 댓글

주님함께 작성일

공의회의 가르침이
개인의 거룩함으로
회귀시키는 요청임을 안다면
쓸데 없는 토를 달지 말아야 했습니다.

profile_image

다같이님의 댓글

다같이 작성일

뱃사공님 저에 머리로는 이해 하기 쉽지 않는 글이지만  잘읽고

저희들에 교회 혼란에 시초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오늘날 이렇게

정체성을 흔들리면 가고 있는지 갈수록 흥미 진지 하게 느껴지며

저희들은 어떻게 하면 이 혼란에 와중에 정통적 하느님 신앙을 이어

가야 할지 고민 하겠금 하는 글입니다  뱃사공님 하느님 사랑안에 평화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profile_image

자비의샘님의 댓글

자비의샘 작성일

아멘

profile_image

자아포기님의 댓글

자아포기 작성일

쉬운 걸 어렵게 만들어 둔건 아닌지! 짧은 머리로  생각하기 어렵네요!
그저 주님 성모님의 말씀만 믿고 따릅니다! 성경을 읽고 성모님주신 메시지 읽으며~
나주성모님 인준이 이루어질 날 고대합니다!! 아멘아멘아멘

profile_image

Liliana님의 댓글

Liliana 작성일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을 허락하소서. 아멘!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마리아의구원방주

주소 : 전남 나주시 나주천 2길 12 (우.58258)
전화 : 061-334-5003 팩스 : 061-332-3372

접속자집계

오늘
6,692
어제
2,874
최대
8,248
전체
4,390,802
Copyright © http://www.najumary.or.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