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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22 주간 수요일 ( 성녀 마더 데레사 기념일 )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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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체사랑
댓글 24건 조회 2,169회 작성일 18-09-05 10:0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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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마더)(Teresa(Mother))
축일: 9월 5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지역: 콜카타(Kolkata)
활동연도: 1910-1997년
같은이름: 테레사, 테레시아

♧♧♧♧ T♧♧♧♧ T♧♧♧♧
성인설명 :

• 성녀 마더 테레사(Mother Teresia, 또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터키가 점령 중이던 알바니아(Albania)의 스코페(Skopje)에서 알바니아계인 아버지 니콜라 보약스히야(Nikola Bojaxhiu)와 어머니 드라네 보약스히야(Drane Bojaxhiu)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다음날 곤히아 아녜스(Gouxha Agne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녀가 태어난 지 2년 뒤인 1912년 알바니아는 터키로부터 독립했지만 스코페는 여전히 알바니아의 영토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스코페는 세르비아를 모태로 탄생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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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신심 깊은 어머니로부터 철저히 신앙교육을 받은 그녀는 9살 때 건축업자였던 아버지를 갑자기 여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소녀 시절부터 성인전과 선교사들의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18세 되던 1928년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평소 선교에 대해 갖고 있던 관심이 자신을 수도성소에로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회원인 본당신부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그 해 11월 29일 인도의 콜카타에서 전교 중인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로레토 수녀회(Sisters of Loreto)에 입회하였다.

· 그녀는 더블린에서 집중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후 1929년 인도(India)에 도착하여 히말라야 산맥 근처에 있는 다르질링(Darjiling)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1931년 5월 24일 첫 서원을 하면서 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된 리지외(Lisieux)의 성녀 테레사의 이름을 자신의 수도명으로 택했다.
그 후 7년간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수녀회가 운영하는 콜카타(옛 지명은 캘커타, Calcutta)의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1937년 5월 24일 그녀는 종신서원을 했고, 1944년에는 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 1946년 9월 10일 연례 피정 참석차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테레사 수녀는 그녀 스스로 후에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 묘사한 놀라운 체험을 했다.
그녀는 수도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소명을 들은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교황청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1948년 수도회 밖에서 수도자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전통적인 서구식 수녀복장이 아닌 인도 여성들이 평상복으로 입는 사리를 수도복으로 택한 그녀는 우선 성가정 병원에서 속성으로 기초 간호학을 이수한 후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 1949년 3월 19일 성모여자고등학교 출신 제자인 슈바시니 다스가 찾아와 아직 형성되지도 않은 수도회에 받아주길 간청해 첫 지원자로서 마더 테레사와 합류했다.
그리고 1950년 10월 7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들 안에서 살고자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가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처음부터 함께한 12명의 회원들이 수련기를 시작했다. 1952년 8월 22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정원까지 아픈 이들로 꽉 들어찼다.
1953년 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빈민굴의 고아들을 위한 집과 콜카타 외곽에 나환자들을 위한 자립 센터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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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2월 1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사랑의 선교회가 세계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다.
교구 설립 수도회로서 지역 주교의 관할 안에서만 활동하던 사랑의 선교회가 이제는 세계 어디서나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이미 사랑의 선교회에는 3백여 명의 수녀들이 여러 개의 시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Venezuela)에 해외 첫 분원을 연 이후 아프리카, 호주, 유럽 등 여러 대륙에 진출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더 테레사의 적극적 후원자가 되어 그녀가 선교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바티칸 시민권을 수여했다.
이렇게 해서 1971년에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 50여 개의 분원을 갖게 되었다.

· 1969년 3월 26일 ‘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회칙을 인가 받아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협조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사랑의 선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마더 테레사와 사랑의 선교회 활동이 세계 곳곳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여러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1979년 12월 10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더 테레사는 그 상을 자신이 온 삶을 바쳐 섬기고 사랑한 가난한 이들의 이름으로 받았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후 사랑의 선교회는 더욱 놀라운 속도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 1970년 이후 마더 테레사는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고 사회 복귀를 돕는 치료 센터를 여러 곳에 열었다.
또한 나환자 병원과 나환자들을 위한 재활 및 사회 복귀 시설을 운영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 시설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그리고 결핵 환자들과 영양실조 걸린 이들을 위한 치료소 및 요양소들도 설치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활동도 시작했다.

· 1990년 4월 16일 마더 테레사는 건강을 이유로 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같은 해 9월 총장직에 다시 선출되었다.
1997년 9월 5일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세계 모든 이들의 영적 어머니인 마더 테레사는 87세를 일기로 콜카타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선종 소식에 종교와 이념,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 전 세계가 한결같이 ‘인류의 참 어머니’를 잃었다며 애도하였다.

· 2003년 10월 1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살아서부터 ‘성녀’로 추앙받았던 마더 테레사 수녀의 시복식을 선종 6년 만에 거행했다.
교황은 30여만 명의 순례자들이 모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마더 테레사를 새로운 거룩함의 모범으로 제시해 주셨다”며 그녀의 시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2016년 9월 4일 같은 장소에서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그녀를 성인의 품에 올렸다.
교황은 시성식 강론에서 온 생애를 통해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풍성히 나누어준 성녀를 기억하며, 성녀를 통해 이해와 자비를 바라는 인류에게 희망과 기쁨이 함께하길 빌었다. 

ㅡㅡ※ㅡTㅡ※ㅡㅡ

2.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 9월5일 성녀 마더 데레사 >
...... (안젤라 2010.09.01 Ud.)

* 注 : 시성☞2016년 9월 4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그녀를 성인의 품에 올렸다
(아타시 韓 '17.9.5 17:30 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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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일:9월5일

< 복녀 마더 데레사 >
- Mother Teresa of Calcutta
- Beata Teresa di Calcutta (Agnes Gonxha Bojaxiu)
(=注: 알바니아어☞아니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
- TERESA of Calcutta

- Born : 26 August 1910 in Skopje, Macedonia(Agnes Gonx-ha Bojaxhiu)
- Died : 5 September 1997 in Calcutta, India of natural causes

- Beatified : 19 October 2003 by Pope John Paul II
- 시성 : 2016년 9월 4일 by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7.9.5 아타시 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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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아니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Agnes Gonx-ha Bojaxhiu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건물 청부인이요 수입업자였고, 어머니는 깊은 신앙을 가진 여인으로 엄격하면서
도 다정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생활은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옷과 수예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니스는 소녀 시절 신우회라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예수회 사제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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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열 여덟 살 때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진 로레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는 이른바 첫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인도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데레사는
먼저 아일랜드로 사서 영어를 배운 다음 인도로 가서 캘커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6일 캘커타에 도착한 아니스는 1931년 5월 24일 로레토 수녀로서 허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외(Lisieux)의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선택했다.

자기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과
데레사를 허원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마더 데레사의 힘과 특징 그리고 목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실마리가 된다.
단순한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열정,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이 열정을 보면 마더 데레사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 선교생활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마더 데레사는 처음부터 개척정신이 있었다. 그런데 선교활동은 연민에 찬 활동만은 아니다.
마더 데레사가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택한 것을 보면
그분의 선교 활동이 관상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리지외에서 보석상의 막내딸로 태어난 데레사는 1888년 열 다섯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갈멜 수도회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소명은 <사랑>이며 가장 큰 의무는 사제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몸이 약해 선교사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순성, 희생정신, 관용으로 가득한 영성,
즉 복음의 근본 진리로 향하는 건강한 영성의 길을 따랐다.
데레사는 <나의 작은 길은 영적인 어린이 됨의 길, 절대적인 신뢰와 자기 포기의 길이다>라고 했다
리지외의 데레사는 자신을 <아기 예수의 손에 있는 공>으로 비유한 반면
마더 데레사는 신뢰와 자기 포기라는 단순한 길을 좀더 실제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있는 연필> 이라고 불렀다.

마더 데레사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배웠다.
그리고 1944년에는 교장 직을 맡게 되었다.
그 때는 식량은 아주 적고 할 일은 너무 많았던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잖아도 별로 튼튼하지 못했던 데레사는 결핵에 걸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히말라야산 기슭의 작은 언덕에 있는 다릴징으로 보내졌다.
마더 데레사가 <부르심 안에서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것은
1946년 9월 10일 기차 안에서였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과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데레사가 교사에서 종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공동체에서 예외적인 신앙과 뛰어난 비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옮겨가는 허락을 얻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성 마리아 학교에서 19년 동안 마더 데레사와 함께 일한 수녀님들 중에는
그 시절 마더 데레사는 몸이 허약하고 아주 평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마더 데레사는 어디에 뭐가 필요한 지를 알아 적절히 대응하고
모든 의혹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하고, 회헌을 작성하고,
전세계에 지부를 파견하는 등 전형적이고도 정력적인 실업가로 보인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에게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하늘과 땅> 사이에 적절한 균형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는 기도를 통하여 얻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가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길수 있는 것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데레사는 자신의 성덕의 진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과 나, 하느님의 은총과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진보를 이루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에게 거룩함이나 성스러움에 대해 질문을 하면
"거룩함은 필수품입니다. 그것은 수도자 등 소수에게 맡겨진 사치품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라고 일상적으로 설명했다.

마더 데레사를 "살아있는 성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현대에서 점점 더 높이 평가받고 있는 개념, 즉 균형과 관계있는 것 같다.

인도의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거룩함이 <온전성>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석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갈라진 지체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고르게 결합된다는 의미이다.

마더 데레사의 영적인 길은 관상생활이 사랑의 활동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단순성 뒤에는 탁월한 신앙과,
의지와 지혜에서 나오는 여러 해 동안의 체험과 봉헌이 숨어 있다.

마더 데레사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조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존경스러우면서도 친밀감 있고, 실용적이면서도 통찰력 있고,
상처 입기 쉬우면서도 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관상적일 수도 있다.

- (사랑의 선교회홈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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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레사 수녀 연보

1910년: 8월 27일 현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건축업자의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세속명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1928년: 캘커타에서 활동하는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 아일랜드, 더블린을 거쳐 인도 지질링 도착.
1929-1948년: 캘커타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학 교편을 잡다 교장에 임명, 로레토 수녀회와 관련 있는 인도 수녀회인 성안나 수녀원의 수련장 맡음.
1946년: 결핵 때문에 요양차 기차를 타고 산간 도시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음. 곧바로 빈민촌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원장 수녀에게 밝히고 허락을 요청.
1948년: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하얀 사리와 이마에는 푸른 줄무니가 있는 새 수도복을 입음. 3개월간 미국 의료수녀원이 잇는 파트나에서 간호학을 수학. 그해 성탄절에 캘커타로 돌아와서 빈민촌에 학교를 세움.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창립.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 '니르말 흐리다이(순수한 마음)'를 설립, 다음해 고아원을 세움.
1962년: 파드마 슈리상 수상, 상금으로 여러 곳에 새 안식처를 건립.
1963-1978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교황청 인가 취득, 첫 해외시설을 베네수엘라 코코로트에 건립. 사랑의 선교회 남자 수도회가 앤드루 수사에 의해 창설, 국제 데레사 수녀 협조자회와 자매결연.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교황 요한 23세 평화상을 받음. 상금으로 나환자들의 재활센터를 지어 '평화의 도시'라고 명명. 69년 중국 방문.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상금 19만 2천 달러는 나환우 구호소 건립 기금에 씀.
*1981-1985년: 81년, 82년, 85년 3차례 한국 방문.
1982년: 포위된 베이루트의 한 병원에서 37명의 지진아를 구조하는 동안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들에게 총격을 멈추도록 설득.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하는 동안 심장 발작을 일으킴.
1985년: 미국 '자유의 메달' 수상. 뉴욕에 에이즈 말기 환자를 위한 병원 건립.
1989년: 두 번째 심장 발작. 삼장 박동 조절장치를 주입시킴.
1990년: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표명. 후계자 선출을 위한 비밀 투표에서 데레사 수녀 자신을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재선됨.
1991년: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폐렴 발생. 심부전 발생.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 입원.
1993년: 5월 로마에서 넘어져 늑골 3개가 부러짐. 8월 뉴델리에서 말라리아로 입원. 9월 막힌 혈관을 뚫는 수술을 받음.
1996년: 미국 명예시민권 받음. 또다시 넘어져 쇄골이 부러짐. 8월 말라리아 발병, 좌심실 부전, 폐감염, 심장병 재발, 11월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다시 입원.
1997년: 3월 13일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9월 5일 밤 9시30분 캘커타에서 심장마비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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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자들의 어머니 데레사 수녀...출생에서 선종까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iu)'.
1910년 8월 27일. 옛 유고연방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데레사가 태어나자 알바니아인 부모는 막내딸에게 '꽃망울(곤히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데레사는 건축업자이자 시의원인 아버지,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언니 아게, 오빠 라자르와 어울리며 비교적 안락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곤히아가 7살이던 1917년,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와중에서 동업자가 재산을 빼돌리는 바람에 길거리에 나앉은 가정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어머니는 옷과 수예품을 파는 일로 3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데레사는 소녀 시절 신심회라는 본당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당시 예수회 신부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2살 때였어요. 수녀가 되겠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어요," 데레사 수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처음에 "수녀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며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6년 뒤 데레사가 수녀가 되고 싶다는 뜻을 재차 밝히자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는 "너의 손을 예수의 손에 얹고 예수만 따라 가라"고 당부했는데 데레사 수녀는 어머니의 이 당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창 세상을 동경할 나이인 18세(1928). 데레사 수녀는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까지 배웅 나온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했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는 인도 벵골에 수녀원을 두고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 수녀회에서 평소 생각했던 봉사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레사는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배운 다음 1929년 1월 6일 인도 캘커타로 건너갔다.
캘커타 로레토 수녀원에서의 첫 소임은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마리아 고등학교의 교사, 데레사 수녀는 1931년 5월 24일 그곳에서 첫서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꽃'으로 알려진 프랑스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정했다.
데레사 수녀는 성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공부했다. 1944년에는 교장직을 맡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가뜩이나 몸이 허약했던 데레사 수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라야산 기슭의 지질링에 가서 요양을 했다.

데레사 수녀가 '부르심 안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은 바로 이때다.
데레사 수녀는 지질링을 다녀와서 "수녀원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데레사 수녀는 훗날 당시의 결심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빈민가로 갔습니다.
가장 미소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데레사 수녀가 교장에서 빈민들의 '종'으로, 그리고 안전한 공동체에서 가난과 질병이 들끓는 빈민굴로 자리를 옮기는 데는 수녀회 허락이 늦어져 2년이란 기간이 소요됐다. 데레사 수녀가 빈민가로 들어갈 때 몸에 지닌 총재산은 단돈 5루피(약 1백20원).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인도 고유의 부인복 '사리'에 푸른테를 두른 옷으로 갈아입은 데레사 수녀. 수녀원 바로 옆의 빈민굴 모트지힐에서 쓰러져 가는 가건물을 빌려 학교를 열고 칠판도 없이 붉은 땅바닥에 나무막대기로 알파벳을 써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빈민구호소를 차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 돌봤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빈민구호소는 연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거지와 병자, 사경을 헤매는 노인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 소문은 또 성마리아 학교 재직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제자들을 한 두명씩 자원 봉사자로 불러모은 신비로운 힘을 발휘했다.

연약한 수녀의 몸으로 아무 계획도 없이 시작한 빈민구호사업.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빈민구호사업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태평양의 물 한 방울 정도라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이 물 한 방울이 태평양에 있지 않다면 태평양의 물은 어떻든 한방울이라고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린이 집'과 '영생의 집'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가 데려온 이 어린 창조물들은 길가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데레사 수녀는 1950년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창설했다.
데레사 수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산파들이 데려오는 유아, 쓰레기통에서 건져오는 죽음 직전의 핏덩이, 그리고 거리에서 쥐와 개미에 몸을 파먹힌 채 죽어 가는 나환자 등 보호가 필요한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사랑의 손길을 뻗쳤다.
고된 희생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현재 1백 19개국에서 운영하는 사랑의 집은 5백57개.
데레사 수녀는 기적같은 사랑의 열매를 맺었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몇 년 전부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96년 여름 말라리아와 고열, 고질적인 심장병과 폐질환 등으로 사경을 헤매던 당시 치료를 담당했던 센 박사는 "구부린 자세로 병약자를 돌봐온 오랜 봉사활동이 여려 질환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데레사 수녀를 위해 인도의 힌두교와 회교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인들이 쾌유를 빌어 세간에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우리를 더욱 더 감동시켰던 것은 그때 병원에서 인공 호흡기를 떼자마자 "병원비가 꽤 많이 나왔을 텐데..."라며 병원비 걱정부터 한 것이다.
더욱이 그해 11월에 또 다시 심장마비로 입원 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해 의료진들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노벨 평화상, 케네디 인권상, 인도 최고의 바라트라트나 훈장...
세상은 '가난한 이의 어머니' 데레사수녀에게 화려한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데레사 수녀는 79년 노벨평화상 수상 때 "수상 축하연을 열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조건을 내걸고 수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정도로 세속의 영광조차도 가난한 이들의 '양식'으로 돌렸다.
데레사 수녀는 그 작은 체구로 50년 넘게 빈민가를 지키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고 4일 밤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

데레사 수녀는 우리 곁을 떠나면서 이 메시지를 남겼다.
"가난한 이들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의식주가 아니라 따뜻한 온정입니다. 그들이 늘 괴로운 것은 사실 가난 때문에 생겨난 '버림의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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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레사 수녀의 어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신들의 존엄성이 존중 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봅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느님 바로 그 분을 돌보아드리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입니까."


(1974년 인터뷰에서)

"쌓아 두면 쌓아 둘수록 줄 수 있는 것이 적어집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누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 되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 이상을 돌려 줍니다. 그들은 강한 사람이여 음식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저주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1977년 인터뷰)

"며칠 전 제가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는 꿈을 꿨습니다. 그러나 성베드로께서는 '지상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에는 빈민굴이 없느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96년 연설)

"낙태는 '자궁 내 살인'입니다. 아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그를 원하지 않으면저에게 보내주십시오."


(유엔 연설에서)

"저는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쓸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십시오."


(일일묵상집 '사랑은 철따라...'에서)

"만일 달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면 물론 그곳에도 갈 것입니다."

"나는 빈민들의 가난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배고프고 헐벗고 집 없는 사람과 불구자, 맹인, 나환자,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돌봄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 짐이 됐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기피했던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하느님은 보다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복종하는 또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고 선교회는 그대로 지속될 것입니다."


(1989년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 원장 사임 의사를 밝히며)

"평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이 전쟁에서 단기간에 우리가 모두 두려워하는 승자나 패자가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고통과 참상, 당신들이 무기가 저지른 생명의 손실을 정당화하지 못할 것입니다."


(1991년 조지 부시와 사담 후세인에게 보낸 서한)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그리고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가난은 놀라운 선물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사랑의 등불 마더 데레사'에서)

"나는 전쟁터에 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근과 주검은 봤습니다. 나는 전쟁을 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낄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이해가 안됩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1982년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싸우는 베이루트 전장에서)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내 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그리고 배우자끼리도 서로에게 시간을 내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세계 평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교만은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진정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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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울한 80년대 한국에 사랑 전한 데레사 수녀의 방한행적

가난했던 삶. 그럼으로써 오히려 풍요로웠던 삶. 생전 '빈자들의 어머니'로 불렸던 데레사 수녀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데레사 수녀가 한국을 찾은 것은 81년과 82년, 85년 등 모두 3차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에서 비롯된 사랑, 복음적 사랑의 참뜻을 전해주었던 데레사 수녀의 방한 행적을 다시 떠올려본다.

1차 방한(1981. 5. 3)
81년 5월 3일 오후 5시40분 김포공항.
데레사 수녀가 대한항공 618기편 트랩을 내렸다.
전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첫 방한이었다. 마디진 손에는 성서와 묵주, 잿빛의 작은 헝겊가방이 전부였다.
그러나 인도 고유 의상 사리에 감춰진 작은 몸매와 깊은 주름이 팬 얼굴에서는 어머니만이 줄 수 있는 자애로움과 따뜻한 미소, 평화가 흘렀다.
이미 구면이었던 김수환 추기경과 손을 맞잡고 따스한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교황대사였던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 프란 즈페 주한 인도대사, 수도장상연합회장 황우경 수녀 등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5백 여명의 환영 속에 도착한 데레사 수녀, 그녀의 첫 마디는 "가난하고 병들어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며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도착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데레사 수녀는
"79년 노벨평화상 수상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라며 "
사랑의 선교회가 벌이고 있는 봉사활동은 빈민 구제의 성격을 띤 사회사업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봉사활동이 복음에 근거한 사랑의 실천임을 분명히 했다.

잇따르는 기자회견과 서강대 및 효성여대 강연, 사회복지시설 희망원 방문, 병인박해 순교성인 28위의 순교신심이 살아 숨쉬는 절두산 순교성지 방문 등 빽빽한 일정 속에서도 데레사 수녀는 시종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서강대 교수회관에서 마련된 기자회견의 한토막.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가?" 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데레사 수녀는 "여러분과 내가 가난을 나눌 때 벌써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데레사 수녀는
"가난을 나눈다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하고
"한국의 이 도시에서 만이라도 아무도 고독하고 버림받은 상태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도록 사랑을 실천한다면 세상의 가난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해 평생 '가난'과 함께 해온 수도자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

2차방한(1982. 4. 28)
두 번째 방한은 무척 짧았다.
불과 18시간동안 이뤄졌다. 82년 4월 28일 오후 4시10분 김포공항을 통해 '혼자서' 한국에 들어온 데레사 수녀는 이튿날 오전 10시30분 마카오로 떠나기까지 만 하루도 못 되는 시간동안 당시 서울 용산에 임시로 마련돼 있었던 사랑의 선교 수녀회에 머물렀다.
방한 목적은 단순했다. 81년 7월 한국에 설립했던 사랑의 선교 수녀회 한국분원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2차 방한 기자회견에서의 에피소드 한토막.
한 가지가 "수행원도 없이 혼자 들어오셨느냐?"고 묻자 데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왔다"고 대답했다.
스승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의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랑의 사도다운 대답이었던 것.
특히 데레사 수녀는 당시 사랑의 선교수녀회 지원자들과의 대화에서 "가난은 우리가 기쁘게 선택해야 하며 그것은 바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
작은 일에 충실하려 했던 소화 데레사 성녀를 따라 생활의 어떤 부분에서도 충실하라"면서
수녀회 지원자들에게 어머니다운 당부도 잊지 않았다.

3차 방한(1985. 1. 26).
세 번째 방한은 84년 103위 시성식이 열린 지 8개월 만인 85년 1월 26일부터 31일까지 5박6일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에서의 체류기간이 가장 긴 방한이었다.
특히 중국 방문에 이어 이루어진 3차 방한에서 데레사 수녀는 판문점을 방문, 북녘 땅에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등 북한 교회를 포함해 침묵이 땅에 버려진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판문점 방문 길에서 데레사 수녀는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는 '기적의 패' 5개를 북녘 땅 가까운 곳에 던져 북한을 방문케 해달하고 기원하기도 했다.

26일 오후 8시30분 타이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데레사 수녀는 경기도 안양에 있던 사랑의 선교 수녀회 분원에 머물면서 27일 오후 안양 라자로 마을을 찾아 1백 여명이 나환우들을 위로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데레사 수녀는 또 27일 오후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는 '휴양의 집'을 방문한데 이어 29일 절두산 순교성지, 30일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각각 방문해 버림받은 이들이 사랑 안에서 살아갈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잊지 않고 꼭 버려진 이들을 만나 위로하고 기도했던 데레사 수녀,
맨발로 사랑의 긴 그림자를 남기며 다가오던 데레사 수녀의 발길은 이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존엄성을 일깨웠던 정신만은 세월의 무게를 딛고 천년을 이어가리라.
아, 데레사 수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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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더 데레사 시복식, 30여만명 운집

가난한 이들의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이 열린 성 베드로 광장에는 무려 30여만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데레사 수녀에 대한 인종과 계층, 종교를 넘어선 깊은 애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500여명의 사랑의 선교회 회원들이 흰색에 푸른 줄이 있는 고유의 사리식 수도복을 입고 참석했으며
맨 앞줄에는 3500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초청돼 자리를 잡았다. 시복식에는 또 동방교회 대표단과 알바니아의 2개 이슬람 공동체가 초청돼 참석했다.


▨ 시복 선언에 환호

교황은 시복식 미사가 시작되면서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마더 데레사를 새로운 거룩함의 모범으로 제시해주셨다』며 마더 데레사의 시복을 선언했다.
캘커타 대교구장 루카스 시르카 대주교가 교황에게 캘커타의 데레사를 복자위에 올려 주기를 청한데 이어 마더 데레사의 간략한 이력이 소개됐다.
이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더 데레사를 복자로 선포하자 침묵 가운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수많은 순례자들은 뜨거운 환호를 올렸다.


▨ 인도 춤과 노래로 경축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서 시복식은 인도의 전통 춤과 노래들이 펼쳐지면서 축제 분위기가 됐다.
이어 젊은 여성들이 마더 데레사의 유해를 제단 앞까지 옮기는 행렬이 이어졌다.
교황은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마더 데레사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모든 인간적인 논리를 거스르는 사랑과 봉사의 여정을 걸었다』고 치하했다.

이날 시복식 미사에서는 성찬의 전례에 이어 인도의 전통적인 경배 형식에 따른 예식이 거행됐는데 갖가지 색의 사리를 입은 인도 여성들이 꽃과 불을 봉헌했다.
교황은 9월 5일을 마더 데레사 축일로 선언했다.

이날 미사는 50개국에 생중계로 방송됐고 시복식 미사에 초청된 가난한 사람들은 미사 후 사랑의 선교회 총장인 니르말라 수녀와 바오로 6세 홀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표지”

마더 데레사의 뒤를 이어 사랑의 선교회를 이끌고 있는 니르말라 조쉬 수녀는 시복식에 즈음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은 『우리도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표지』라고 말했다.
데레사 수녀가 타계하기 6개월 전인 1997년 3월 후임으로 임명된 니르말라 수녀는 『데레사 수녀의 시복은 그의 삶과 행적이 하느님께 옳게 보였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며 『마더 데레사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표지』라고 말했다.

- (가톨릭신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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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사,람,안,에,계,신,예,수,님, ]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는데,
불행하게도 가난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유행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난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까지 모두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될 때 비로소 그들의 삶에 하느님을 모셔다 드릴 수 있고,
그들 또한 하느님에게 나아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의 굶주림을 채워 주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야 합니다.
그들의 처지와 공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너무나 바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미소 지을 시간조차 없는가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이는 모두 예수님입니다.
그는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선 예수님인 痼都求?

<사랑의 선교회>의 수도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때마다
그것이 진정 예수님을 돕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음식과 옷은 가난한 이들은 먹고 입는 것과 똑같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는 문명화되고 부유한 서구의 교회 활동이,
캘커타나 사우스 예멘처럼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추위를 막을 옷 한 벌,
허기를 달랠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문제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 (마더데레사 말씀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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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3,1-9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8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말씀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제 마음안에 친히 오시어   사랑의 불을 놓아 주시고   사랑의 기적을행하시어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복음
  •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말씀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제 마음안에 친히 오시어   사랑의 불을 놓아 주시고   사랑의 기적을행하시어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묵상
  • 오늘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하여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는 많은 이가 몰려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곳까지 찾아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에 응대하지 않으시고 길을 떠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현실에 안주하려다 보면 복음 선포의 사명보다 편안한 신앙생활을 바라게 됩니다. 신자의 사명과 책임은 외면한 채, 그저 복을 받기만 바라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온갖 병이 치유되고 사업이 성공하기를 바라곤 하지요. 그러다 보면 이기적인 신앙심이 생기게 되어 자신만, 자기 집단만 잘되도록 기도하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은 없어지게 됩니다. 이 사회가 어떻게 되든지, 옆 사람이 굶든지 아프든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되지요. 오늘날에도 많은 이가 이런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늘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청하는 기도의 자세를 정화해 나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내가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다고 여겨질 때, ‘주님을 원망하기보다는 그 아픔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웃을 관심 있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 말씀처럼 우리도 안정된 현실에만 머무르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확산하려고 늘 길을 떠나는 순례자의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출처 매일 미사-


★  오늘도  생활의 기도를 통하여
 
기쁨과 사랑과 평화 누리는 좋은 하루 되세요.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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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보님의 댓글

필립보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이시여~
어서 빨리 나주성모님 인준과
극심한 고통을 봉헌하시는 율리아 엄마의 빠른 회복과
산소 포화도의 숫치가 올라감과 두통과, 심부전, 자율신경 치유와
영육간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또한 어린 양들의 참목자이시고 진정한 영적 아버지이신
장홍빈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영육간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여 영광과 찬미를 영원히 받으소서~ 성모님 기쁨만 가득하소서~ 아멘! 알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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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성심님의 댓글

사랑의성심 작성일

아멘!
고요한님 은총 가득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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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처음님의 댓글

한처음 작성일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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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갑옷님의 댓글

성령의갑옷 작성일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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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함께님의 댓글

엄마와함께 작성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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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옥합님의 댓글

향유옥합 작성일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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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염시태님의 댓글

무염시태 작성일

아멘♡ 평화와 가난을 사랑하셨던
            마더데레사 성녀시여!~저희들의
            사랑을 받으소서!~*^^*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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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사랑님의 댓글

영적인사랑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지향하는 모든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빌어 주소서..

아멘~~!!*
성체사랑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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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님의품님의 댓글

포근한님의품 작성일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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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홍수님의 댓글

사랑의홍수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 이시여 !!!
나주성모님의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안전 그리고
봉헌하시는 기도지향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전구해 주소서.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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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샘터님의 댓글

기적의샘터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시여
나주성모님의 빠른 인준과
율리아엄마의 영육간의 건강과 안전
또한 장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빠른 쾌유
그리고 제가 지향하는 모든기도가 이루어질수 있도록 전구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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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향기님의 댓글

어머니향기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 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인준을 위하여

전구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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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님의 댓글

여명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이시여!

나주성모님의 빠른 인준과 율리아님의 건강회복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 멘..
장신부님 빠른 회복과 쾌유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 멘..
제가 지향하는 모든 이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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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전력님의 댓글

전심전력 작성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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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님의 댓글

장미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이시여!

나주성모님의 빠른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 건강과 안전을 위하여 
세계평화 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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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필리에버님의 댓글

해필리에버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빠른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 건강과 빠른 쾌유,
봉헌하시는 모든 기도지향이 그대로 이루어지시도록 전구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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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작은꽃님의 댓글

엄마작은꽃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여 율리아 엄마를 지켜주시고 마귀의 횡포에서 건져주시며
악을 선으로 바꾸도록 간구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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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님의 댓글

야고보 작성일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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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끌리나님의 댓글

마끌리나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이시여~!!!

+ 나주 성모님의 빠른 인준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안전, 빠른 회복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 한국 천주교회의 영적 성화와 올바른 쇄신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성체사랑님... 감사합니다.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과 사랑 가득가득가득 받으시고,
영육간에 건강하시며, 5대영성으로 매순간 행복하시기를 빕니다.아멘~!!!

예수님... 이 글의 글자 수만큼 저를 포함한 죄인들이 회개하고,
나주 성모님 동산으로 순례오게 하시어,
나주가 인준되는 시간이 앞당겨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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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님의 댓글

미소 작성일

아멘아멘 아멘
성녀 마더데레사이시여.
율리아엄마
영육간에건강위해기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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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기도화님의 댓글

생활의기도화 작성일

아멘!!!

성녀 마더데레사이시여!
율리아님의 빠른 건강 회복과 기도지향이
그대로 이루어 지게 전구해 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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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것님의 댓글

님의것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 이시여 !!!
나주성모님의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안전과
봉헌하시는 모든기도지향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전구해 주소서.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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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여기님의 댓글

애인여기 작성일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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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포기님의 댓글

자아포기 작성일

성녀 마더 데레사 시여!!
나주성모님 인준을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율리아님의 영육간 건강과 기도지향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함께 빌어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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