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4 주간 목요일 (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기념일 )
페이지 정보
본문
축일:3월15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St. Clemens Hofbauer, C
St. CLEMENT MARY HOFBAUER
San Clemente Maria Hofbauer
26 December 1751 at Tasswitz, Moravia as John Dvorak
- 15 March 1820 at Vienna, Austria of natural causes
Beatified:29 January 1888 by Pope Leo XIII
Canonized:1909 by Pope Pius X
Patronage:Vienna Austria (named by Pope Pius X in 1914)
Clemente =indulgente, generous
클레멘스 마리아 홉바우어는 1751년 12월 26일 모라비아의 타스비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빵공장에서 일하였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가능한 한 한 많은 시간을 내어 학업을 계속하였다.
로마에서 구속주회에 입회하였고 사제로 서품된 후 바르샤바로 갔다.
거기에서 폴란드 내의 첫 번째 구속주회 공동체인 ’성 베노’를 열고 매우 풍성한 사도적 결실을 거두었다.
후에 많은 이들의 박해로 비엔나로 옮겼고 거기에서 20여년을 일하고 1820년 3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전구를 통해서 기적적인 은총을 받았으며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구속주회홈에서)
모라비아의 타쓰비츠 태생인 체코 사람으로 그의 본명은 얀 드르략인데 독일 이름인 흡바우어로 개명하였다.
그는 푸주간의 아홉째 아들인데, 어려서 부터 빵굽는 기술을 배웠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항상 은수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으며,
얼마동안은 로마와 비엔나 사이를 오가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브룩크에서 프레콩트레 수도원의
빵굽는 데서 일하였으며, 마침내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요셉 2세 황제가 은수소들을 폐쇄하였을 때, 그는 비엔나로 돌아와서 빵굽는 사람이 되었으나,
친구인 베드로 쿤즈만과 함께 티볼리의 주교 키아라몬띠의 승락을 받고 재차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비엔나와 로마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속죄회에 입회하여, 178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비엔나로 파견되었으나 황제가 많은 수도회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속죄회 수도원 건립이 불가능하게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옛 친구인 쿤즈만을 만나 평수사로 입회시켰다.
그러나 교황 대사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바르사바로 갔으며,
그곳에서 20여 년 간 선교활동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클레멘스는 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일했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웠고,
독일과 스위스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나폴레옹이 수도회를 탄압할 때, 그와 그의 동료 속죄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각기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는 끝내 비엔나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의 이탈리아 구역에서 일하였으며,
울술라회의 지도신부로도 활약하면서 부터는, 그의 설교와 성덕, 그리고 지혜와
고해신부로서의 이해심 등이 높은 명성을 얻게 하였다.
그는 비엔나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였고, 독일 지역의 수도생활 재생을 위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클레멘스는 요셉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과 대치하여 힘찬 싸움을 하였다. 그는 1909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요셉주의 Josephinism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재위: 1741∼1790)의 종교정책으로,
그에 따르면 국가는 교회에 대한 간섭권, 우위권을 갖는다고 한다.
황제는 교회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하고,
교회에 바쳐지는 모든 기금을 종교기금 (Religions fund)에 통합시켜 공공의 종교활동비에 충당하려 하였다.
목적달성을 위해 황제는 모든 수도원을 해산시켰고, 이를 세속용으로 불하하였다.
양초에 관한 규칙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간섭한 요셉 2세는 `제의실의 황제’라고 불렸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클레멘스 호프바우어는 20세기에 새로 성인품에 오른 분으로서
1909년 5월 20일 비오 10세 교황에게 시성되고,1914년 빈의 사도인 동시에 수호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수도명은 클레멘스이고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그는 1751년 오스트리아(Austria)의 빈도보나(Vindobona)에서 태어났다.
열두 형제 중 아홉째의 아들이고, 가정은 가난한 고기 파는 직업이었으나 양친은 모두
신심면에 열심한 분들이었다.
그가 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어머니는 그를 십자가 앞에 데리고 가서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이제부터 네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다"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그 뒤 형제들 중 일곱까지 일찍 다 죽었으므로 요한은 아직 소년의 몸으로 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도하고 또 일하라"(Ora, et labora)함은 유명한 트라피스트(Trappisst)의 표어지만
당시 요한의 생활을 나타낸 말이기도 했다.
거기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손님이 와서 어머니와 대화 중 권태(倦怠)란 말을 여러 번 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 뜻을 전혀 알지 못했다.
조금 뒤 그는 어머니에게 그 뜻의 설명을 들었지만 "하는 일이 없어 심심하다"는 생각은
그가 이제까지 조금도 알지 못했던 관계로 대단히 놀라며
"엄마, 그러한 때에는 기도를 바치면 좋을텐데.."하고 태연히 말했다고 한다.
요한은 어려서부터 항상 사제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으며 얼마동안은 로마와 빈 사이를 오가는 방랑 생활을
하다가 부룩크에서 프레몽트레 수도원의 빵 굽는 데서 일하면서 라틴어 문법을 배웠다.
그 뒤 그는 로마에 가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참배하고 일심으로 기도하고 돌아오는 도중 이탈리라의
티볼리 부근에 초막을 마련하여 잠시 은수자의 생활을 해 보았지만, 본래 사제를 지망하는 그는
이에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그때의 그 생각에는 그 나라의 서울인 빈에 가면 어떻게든지 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막상 가 보니 쉽사리 마음대로 안 되고, 우선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와이리히라는 빵집에
취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신심이 깊었던 선량한 주인 부부는 성실한 요한이 한결같이 마음에 들어 사위로 삼으려고 했으므로
요한은 이를 알자 자못 놀라며 기회있는대로 도망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가 여전히 근방에 있는 스테파노 대성당에서 미사 참여하러가서
복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니 때마침 큰 비가 쏟아졌다.
현관에서는 세 귀부인도 야단난 것처럼 서있었다. 친절한 요한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비오는 가운데 뛰어가서 마차를 불러왔다.
귀부인들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거듭 사례하며 "그대도 함께 탑시다"라고
자꾸 권하므로 사양할 수 없어 같이 탔던 것이다.
가는 도중 요한은 그들이 묻는 대로 자기는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지만
학비가 없어서 될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평소에 그의 열심하고 경건함에 탄복하고 있던 그들 세 사람은 극히 동정하며
"그만한 비용이라면 어떻게든지 장만해 드리겠습니다"하고 생각지도 않던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이처럼 의외로 학비의 혜택을 받게 된 요한은 그 당시 30세라는 나이에
젊은 학생들과 똑같이 어학부터 철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웠다.
그런데 그 당시의 빈 대학에 있어서의 신학의 경향에는 매우 좋지 못한 점이 있어서,
지금까지순수한 가톨릭 교육만을 받아온 요한은 얼마나 마음으로 그것을 우려했는지 모른다.
하루는 어느 교수의 합지주의설에 대한 강의를 듣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그렇다면 참된 가톨릭교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이라고 항의했다.
그래서 그는 순수한 가톨릭의 학설을 배우러 로마에 가려고 결심하고 휴부르라는 친구와 함께 제일 먼 성도
(聖都)로마를 방문해 그 날 밤은 여인숙에서 머물고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종이 울려온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했다.
그것은 근방에 있는 구속주 수도원에 속하는 성 율리아노의 성당이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기묘한 것으로서 오래지 않아 이 두사람은 그 곳의 수도자가 되어
요한은 클레멘스라고 개명하여 35세때 비로소 오랜 세월 갈망하던 사제가 되었던 것이다.
수사 신부인 클레멘스는 총장으로부터 북쪽 유럽에 구속주회를 발전시키라는 분부를 받고
러시아의 독일 이민부(移民附) 사제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가는 도중 휴부르와 같이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당도하니 로마 교황청의 대사 사르쯔오는 그들을 동시에 머루르게 하고
성 벤노에게 봉헌된 성당을 내주며 그 시에 살고있는 독일인 신자들을 맡아보게 했다.
그 교회는 황폐하기 짝이 없어 클레멘스는 우선 손질과 청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때는 마침 프랑스 대혁명의 시초였고, 그의 영향은 바르샤바까지 미치게 되어,
시민은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교회의 중요 신앙 조목조차도 모르고도 수치로 여기지 않던 상태였으므로
클레멘스는 신앙의 부흥을 위해 다음 세대의 국민인 아이들에게 교리를 철저히 가르칠 필요성을 통감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빈민이나 고아들의 구호 사업에 착수하고, 자신은 빈궁을 감내하면서도
그들에게는 부자유를 주지 않으려고 힘껏 일하며 그것 때문에 친히 구걸하러 다니고,
때로는 박해나 수치를 당해도 조금은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한 예를 들자면 어느날 그가 요리점에 가서 구걸을 애원하니까 손님 중의 하나가 욕성르 퍼부으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래도 그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천천히 그것을 씻고 나서
"지금 것은 나에게 주신 것이고, 이번에는 불쌍한 고아들에게도 아무것이나 베풀어주지 않겠습니까?"
라고 정중히 말해 상대자도 매우 부끄러워하고 또한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대단히 감동하여
각기 응분의 희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같이 구걸하면서도 부족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기적으로 도우신 때도 종종 있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성 벤노 교회 사제의 감탄할 만한 활동 상태는 오래지 않아 그 부근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자 동정하는 이도 증가되어 기부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성당을 보살펴 주는 이도 있었다.
교회는 날로 새로워져서 자유로 장엄한 예식도 거행할 수가 있게 되었고,
나중에는 "성 벤노 교회는 신심의 보금자리(오아시스)"라고 불리기까지 되었다.
이 칭찬의 언사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가 구속주 수도원이 형제들과 활동을 개시하던
첫 1년간 성체를 영한 신자수는 2천명이었지만
그로부터 14년후에는 10만여명에 달했다는 점으로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일했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웠고, 독일과 스위스로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그런데 선행을 멸망시키려는 악마는 도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클레멘스는 사악(邪惡)한 사람의 모함을 당하여 나폴레옹이 수도회를 탄압할 때,
그와 그의 동료 구속주 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각기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그렇게 번성하던 성 벤노 교회도 하루 아침에 멸망의 운명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클레멘스는 사방을 헤매다가 1808년 빈에 돌아와서 그곳 우르술라회(Urusline convent) 수녀들의
지도 사제가 되어, 고해 성사도 주고, 강론도 하며 가난한 이의 아버지, 학생들의 좋은 지도자로서
바쁜 생활을 보내기를 13년간이나 했다.
일류의 학자나 정치가도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에게 교훈을 청하고 또한 프러테스탄트 인으로서
그의 지도에 의해 개종한 이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빈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했고 독일 지역의 수도 생활 재생을 위해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는 요셉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과 대치하여 힘찬 싸움을 했다.
그러던 중 성자 클레멘스에게도 드디어 이 세상을 떠나 영혼의 고향인 천국에 개선할 날이 다가왔다.
뜻밖에 장티푸스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된 그는 1820년 3월 15일 정오,
요란히 들려오는 삼종소리를 들으며 "삼종소리가 들리니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장레식의 시각은 계원(係員)의 불찰로 발표를 잊고 있었으나 어떻게들 알았는지
정각에는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깊은 애도 속에 성인의 유해는 묘지까지 전송되었다.
"클레멘스 사제의 죽음은 나에게도, 국민에게도,
심지어 교회에 대해서도 다시 찾을 수 없는 손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유일한 교회의 기둥이었기 때문이다."라 함은
그의 죽음에 오스트리아의 프란트 황제가 발표한 애도사 중의 한 구절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 우르술라회(The Ursuline Sisters) 창설자
성녀 안젤라 메리치 동정 축일:1월27일.
*성녀 우르술라 동정 축일:10월21일.
|
댓글목록
순교정신님의 댓글
순교정신 작성일
나주 성모님의 인준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구해 주소서.
아멘~
성체사랑님
수고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엄마와함께님의 댓글
엄마와함께 작성일아멘!~~~^♡♡♡^
사랑의성심님의 댓글
사랑의성심 작성일
아멘^^
성체사랑님, 은총 가득 받으세요~!!!
여명님의 댓글
여명 작성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이시여!
나주성모님의 빠른 인준과 율리아님의 건강회복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 - 멘..
제가 지향하는 모든 이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 - 멘..
생활의기도화님의 댓글
생활의기도화 작성일
클레멘스 마리아 홉바우어는 1751년 12월 26일 모라비아의
타스비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빵공장에서 일하였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가능한
한 한 많은 시간을 내어 업을 계속하였다.
로마에서 구속주회에 입회하였고 사제로 서품된 후 바르샤바로 갔다.
거기에서 폴란드 내의 첫 번째 구속주회 공동체인 ’성 베노’를 열고 매우
풍성한 사도적 결실을 거두었다.
후에 많은 이들의 박해로 비엔나로 옮겼고 거기에서 20여년을 일하고
1820년 3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전구를 통해서 기적적인 은총을 받았으며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이시여!
율리아 엄마의 빠른 회복 전구해 주소서.아멘
엄마작은꽃님의 댓글
엄마작은꽃 작성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여 율리아 엄마를 지켜주시고 저희가 엄마의 양육대로 온전히 성장하여
엄마께 힘이 되어드리게 간구해 주소서 아멘!
한처음님의 댓글
한처음 작성일아~멘~ 아~멘 아멘.
영적인사랑님의 댓글
영적인사랑 작성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지향하는 모든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빌어주소서..
아멘~~!!*
성체사랑님 감사합니다..
위로의샘님의 댓글
위로의샘 작성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지향하는 모든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빌어주소서.
아멘!!!
사랑하는 성체사랑님!
님의 정성과 수고에 늘 감사합니다.
주님, 성모님 사랑과 은총 가득히 받으세요.
아멘!!!
어머니향기님의 댓글
어머니향기 작성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인준을 위하여 전구해
주소서 아멘!!!
기적의샘터님의 댓글
기적의샘터 작성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시여
나주성모님의 빠른 인준과
율리아엄마의 영육간의 건강과 안전
그리고 제가 지향하는 기도가 이루어질수 있도록 전구해주소서 아멘
포근한님의품님의 댓글
포근한님의품 작성일
아멘!
감사합니다^^
귀염둥이님의 댓글
귀염둥이 작성일
아멘~
감사합니다 ~♡
야고보님의 댓글
야고보 작성일
+아멘+
+감사합니다+
루치아님의 댓글
루치아 작성일성 클레멘스 마리아 성인이시여! 부족한 저희를 모든 악하디 악함에서 구하시고 세상을 구하시고 나주 인준위하여 분열의 마귀로부터 승리하게 하시고 마마쥴리아님의 영육간 건강 회복시켜주시어 장수케하시어 부족한 저희들의 미소가 항상 영원히 떠나지 않게 하소서!아멘.아멘.아멘.아멘.아멘.
자아포기님의 댓글
자아포기 작성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시여!!
나주성모님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율리아님의 영육간 건강과 기도지향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함께 빌어주소서!아멘
애인여기님의 댓글
애인여기 작성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인준과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빠른 건강 회복을 위하여 전구하여주소서.
봉헌하시는 기도 지향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전구하여주소서.아멘
사랑의길로님의 댓글
사랑의길로 작성일감사 드립니다.
님의것님의 댓글
님의것 작성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이시여!
나주 성모님의 인준을 위하여,
율리아님의 영육간의 건강과
빠른 건강 회복과
봉헌하시는 기도 지향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전구하여 주소서.아멘
lily님의 댓글
lily 작성일아멘~!
믿음님의 댓글
믿음 작성일
아멘!!!
감사합니다
전심전력님의 댓글
전심전력 작성일아멘!!!
Liliana님의 댓글
Liliana 작성일아멘~*
- 이전글당신과 함께라면 (님을 향한 사랑의 시) 18.03.15
- 다음글나주성모님의 더 빠른 인준을 위한 묵주의 9일기도 제 15 일 18.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