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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향기[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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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탱주
댓글 22건 조회 2,174회 작성일 15-09-19 12:37

본문

프롤로그

나는 전남 광주에서 한학자이자 교사인 윤세진 아버지와 어머니 홍점순 딸로 태어나 온갖 귀여움을 다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로 인해 가족과 재산을 다 잃고 홀어머니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로 인해 여섯 살 철부지 때부터 끊임없이 일을 하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돈이 없어 병원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의사나 법관이 되고 싶었으나 내가 처한 현실은 그 꿈을 이루기에는 멀고 먼 길이었다.

혼자 외롭게 자란 나는 나주에서 미용실을 하다가 1971년 8남매의 장남이던 공무원과 결혼했다. 결혼할 때 신부 측에서 축의금도 받지 않고 신랑 측에서 다 받게 했는데 결혼식을 올리자 시어머니께서 아들 결혼할 때 빚을 졌으니 그 빚을 나에게 갚으라고 하셨다. 수중에 돈이 없던 나는 미용실을 급매하여 결혼 빚을 갚아드리고 남은 돈 3만 원으로 문간채 작은방 하나를 전세로 겨우 얻어 결혼할 때 해간 살림살이와 물건들을 가지러 갔더니 시어머니께서는 장남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께서 또 돈을 달라고 오셔서 3만 원 전세를 8천 원 사글세로 바꾸어 나머지 돈을드렸다. 또한 다섯째 시동생을 법관을 만들기 위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1975년부터 사법시험에 합격한 1980년까지 나 혼자 뒷바라지를 하며 시부모의 엄청난 빚보증까지 혼자 다 갚아야 했으며, 여섯째 시동생과 막내 시누이의 대학 학자금까지 대출받아 다 대느라 한시도 쉴틈 없이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우리 아이들 과일 하나도 제대로 사 먹이지 못 했다.

그러다 셋째를 임신했지만 시댁을 돌보고 시동생들을 가르쳐야 했기에 집에서 골동품 자개 일을 했다. 임신 4개월째에 출혈이 조금 있어 병원에 갔더니 기형아를 낳을 수도 있다고 해 다른 병원에 갔더니 2주전에 아이가 죽었다며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 분명한 태동이 있기에 내가“아이는 죽지 않았어요.”하자 “자궁이 썩어 간다.”며 여럿이서 도망가는 나를 붙잡아 손과 발을 수술대에 묶었다. 돈을 벌기 위해 살아있는 아이를 죽었다고 거짓말하며 강제로 수술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마취를 계속해도 안 되니 마취가 안 된 채 수술을 강행했다. 나는 살아있는 아이를 무참히 찢어 죽이는 그 끔직한 만행을 다 목격해야 했다.

15분이면 끝난다는 수술이 1시간 30분이 넘게 걸렸다. 수술이 끝나자 단 1초의 간격도 없이 엄청난 출산의 진통이 계속됐고, 출혈과 함께 소변이 3분 간격으로 계속 나와 일주일간을 한숨도 못 잤다.

일주일 후, 검붉은 색으로 출혈이 심해졌다. 병원에서는 나를 불러 황급히 재수술을 했으나 다음 날 밤 나는 죽게 되었다. 남편은 나를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는데 나는 이런 모습을 보았다. 내가 여러 사람 대열에 끼어 걸어가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왜 네가 여기 왔느냐? 네가 해야 될 일들이 많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어서 돌아가거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모두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너에게 말하지 않느냐?”하며 내 등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살아났다. 희미하게 남편의 모습이 보였고 자세히 보니 몇사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살아난 지 3일 만에야 정신을 차릴수 있었는데 요강에다 소변을 볼 때 힘이 써지며 무엇인가가 뭉클하게 나와 그것을 싸가지고 나주 산부인과에 갔더니 의사가 “무슨 태를 가지고 다녀요?” 했다. 수술한 지 13일 만에야 아이의 태가 나온 것이다. 이일이 있고 나서 건강을 잃어가자 시어머니와 작은 시어머님과 시할머니께서 나를 불러 어디론가 데리고 가시면서 “홀어머니 밑에 커서 그런다.” 라고들 하셨는데 나는 그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던가. 그래서 처녀 때도 신문에 “들어오면 일꾼 나가면 신사 - 생활력 강한 여자”로 대서특필된 적도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나를 쫓아내기 위해 미리 짜놓았던 점쟁이 집이었다. 점쟁이는 나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갑자기 “당신들 이 며느리 구박 그만 하시오. 하늘에서 내려 준 이 며느리를 방안에 가만히 앉혀 놓고 먹여도 시원찮은데 그렇게 구박하다니...” 호통을 치면서 처음과는 정반대인 말들을 서슴없이 하며 시댁 식구들을 때릴 기세로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동안 시집와서 시달리며 받아 왔던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동안 아이 둘을 낳으면서 피나는 노력으로 시집을 위해 도움 줄 때는 그렇게도 만족해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아났냐? 지어서는 못한다.”라고들 하셨지만 다섯째 시동생 가르치고 시댁 돕기위해 일하다가 몸이 아프니 “아이고, 우리 만복이 얼마나 고생이 많을꼬.” 했고 또 남편의 의형은 “만복아! 아픈 마누라 보내 버려. 내가 처녀장가 보내 줄게.” 하는데도 남편은 아무 말이 없어 얼마나 아픈 마음을 쓰려 내렸던가.

그러다 장부가 나주에서 영암 지소장을 거쳐 영암 군서면 지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나는 “아이 때문에 병이 났으니 다시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잘하면 된다.”라는 얘기를 듣고 아이를 가졌으나 계속 유산이 되었다. 그러다 셋째를 임신했는데 8개월부터 계속 진통이 왔으나 병원비가 걱정돼 집에서 견뎠다. 아이 둘도 낳을 때 한약을 먹고 집에서 낳았기에 셋째도 집에서 낳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진통이 와서 한약을 먹으려면 진통이 멈추기를 계속했다. 11개월이 되었을 때 집에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광주 병원에 가니 이대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며 유도 분만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시아버님은 서울 경성대학을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오셨고, 시어버님도 교육자 집안에서자란 인텔리였다. 그래서 동경에서 장부를 낳을 때 이상이 없었어도 한 달을 병원에 입원해 낳으셨기에 시어머님께 유도 분만을 해야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이는 시와 때가 있는 것이다. 집에 가서 기다려라!” 호통을 치셔서 진통 중에 집으로 내려와야 했다. 날이 갈수록 극심한 진통이 계속 되어도 시어머님의 말씀에 순명하기 위해 병원도 못갔다.

친정어머니는 심상치 않은 내 상태를 보시고 한의원에 데리고 가니 한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이를 못 낳겠다고 하니 우리 어머니는 “우리 딸 좀 살려주시오!” 통사정하니 “그러면 비싸도 용약을 한번 먹여보시오.” 하고 약을 지어줬다. 그 약을 먹고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한약을 둘러쓰고 나왔고 나는 그대로 실신해 버렸다. 피를 얼마나 많이 쏟았는지 어머니께서 큰 세숫대야와 요강에 하나 가득 손으로 훔쳐 넣었다 한다. 8개월부터 미 진통이 왔고, 9개월부터는 매일매일 진통 올 때마다 한약을 먹으려고 하면 멈추기를 3개월이 되어서 용약을 먹고서야 아이을 낳은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와 “여보, 나 없어도 살 수 있지?” 하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병원에 가니 혈압이 너무 높아 에러가 나왔다. 남편은 얼마 동안 주사를 맞다가 주사를 맞지 않으려고 모르게 퇴원했다. 나는 병원에서와 똑같은 주사약을 구해 정성을 다해 놓으면서 살려 달라고 계속 기도했는데 하나도 안 아프다며 주사도 잘 맞고 금방 좋아졌다.

안집 할머니는 “이 부부가 버릴 것이라고는 똥 오줌밖에 없다.”라고 할정도로 좋아하셨다. 우린 2년 이상 오순도순 살았다. 1979년 1월 말쯤, “아들을 잘못 뒀다.”며 안집 할머니를 윽박지르던 며느리가 당장에 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할머니가 “세입자가 산달이니 조금만 기다리자.”하고 사정해도 막무가내였다. 엄동설한의 추운 날씨에 힘든 몸을 이끌고 이사를 했다.

이해 처음으로 의료보험이 생겨 넷째는 병원에서 낳았다. 4개월 후, 나는 3살 된 셋째를 데리고 개울에서 빨래를 하다 폭포수 같은 물속에 빠진 셋째를 구하려고 물속에 뛰어들어 아이는 구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영암병원에서는 급성맹장염이라며 복막염 가능성이 있으니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남편과 타협해 전남대병원에 입원했다. 광주에는 시댁 식구들이 다 살고 있어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정어머니는 다섯째 시동생 합격할 때까지 내가 시댁을 도와드릴 수 있도록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우리 집으로 다 가져오셨으니 농사를 안 지을 수 없는데다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 남편과 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돌봐주셔야했기 때문이다. 전남대병원에서는 내과와 산부인과에서 계속 검사만 했는데 병명이 ‘자궁 뼈 골반염’, ‘열병’, ‘자궁 외 임신’, ‘맹장염’ 4가지로 나왔다.

하지만 산부인과와 외과에서는 위중한 환자를 방치했다. 나는 계속되는 진통 속에서 넷째와 둘이 있었기에 젖먹이는 젖이 안 나와 배가 고파서 울고, 나는 많이 아파도 아이도 돌보아야 되니 제대로 몸부림칠 수도 없어 울고...말도 못하고 걸을 수도 없었던 나는 입원 한 지 3일 만에 기어서 외과를 찾아가 우여곡절 끝에 맹장수술을 받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토하며 걷지도 못하는 나를 간호사는 엄살이 심하다며 발로 차고 때렸다.

퇴원 후에도 먹으면 토하고 병이 점점 더 심해졌다. 장로교 목사님과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와 기도해주고 자가용으로 교회에 데려가고, 데려다 주었다. 당시 남편은 직장 충신으로 밤에는 청소년들을 모아 공부시키고, 낮에는 특수작물 하느라 옷 갈아입을 때나 들어오니 나는 뒤틀린 배를 아이들 모르게 나 혼자 병마와 처절하게 싸웠다.

수술한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 밤 열두시 넘어 열 바늘 꿰맨 자리 중 세 번째가 너무 아파 보니 뭐가 조금 보였다. 장부도 없어 그것을 화장지로 잡아 당겨보니 피고름과 함께 계속 길게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큰딸은 너무 놀라 “엄마! 창자가 나오나 봐!” 하며 소리 내어 울었다. 큰딸과 나는 부등켜안고 울었는데 수술 자리에서 터져 나온 것은 거즈였다.

매일 치료를 받았어도 겉만 아물었다가 다시 터져 피고름이 나기를 3개월간 계속됐지만 남편은 너무 바빠 나를 광주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갈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친정어머니께서 아픈 나를 부축해 7개월 된 아이를 업고, 우유 보따리와 기저귀 보따리 들고, 세 살 된 아이는 걸리고, 초등학교 1학년짜리와 3학년짜리를 데리고 수술한 전남대병원으로 가는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찰 결과 다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자기들끼리 “피고름이 계속 나오니 장이 썩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또 수술할 수 없으니 꼭 나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고 애원했다. 바르는 약과 먹는 약을 처방해주면서 “그럼 이 약을 먹고 바르다가 시간 될 때 수술하세요.” 했는데 수술한 지 4개월이 넘어서야 상처가 아물었다. 하지만 잘 먹지 못하고, 잘 걷지도 못하여 기어 다니면서 토했다. 그때 시어머님이 오셔서 또 다섯째에게 돈을 보낸다며 돈을 달라고 하셔서 “다음 달이 보너스 달이니 이번만 검찰청 다니는 둘째가 대납해 주면 다음 달에 갚을게요.”하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루를 꽝꽝치면서 화를 내시다 일어서시기에 붙들고 “죄송해요. 조금만 기다리셔요.”하고 기어가서 돈을 빌려 시어머님께 드렸다.

그리고 95세 되신 시외조모님이 며느리와의 갈등 때문에 힘들어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모셨다. 당시 나는 내 몸 가누는 것도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고통받고 계시는 할머니가 불쌍하고 안쓰러워 우리 집에 모셔와 업어 주고 주물러 드리며 맛있는 것 해드리니 금방 회복되셨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너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선녀임이 분명해.” 하시며 내 손을 꼬옥 잡고 우셨다. 나는 온몸이 굳어가고 걸을 수 있는 힘도 없었지만 할머니가 좋아하시니 나도 덩달아 좋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셋집 마당에 쌓아놓은 주인집 땔감에 불이 나자 우리는 또 그 집에서 쫒겨 났다. 이사철이 아니라 할 수 없이 단칸방으로 이사 가려고 하니 많은 이들이 “그 집 주인 할아버지는 곡괭이여서 10년 동안 한 달 이상 산 사람이 없었다.”며 말렸다. 그러나 나는 두 칸 방이 나올 때까지라도 그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비좁은 단칸방에서 많은 가족이 살게 됐다. 나는 할머니가 힘들어하실까 봐 “두 칸짜리 방 얻을 때까지만 집에 가 계셔요.” 하고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할머니를 업고 가 집에 모셔다 드렸다. 그런데 우리집을 떠나신 지 16일 만에 건강했던 분이 돌아가셨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보고프셨을까?’

나는 그 슬픈 소식에 할머니의 생애를 생각하며 ‘내 건강이 회복된다면 훗날 자식이 있어도 힘든 할머니들을 모시고, 사랑으로 살기위해 양로원을 해야겠다’ 하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변조차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계속 악화 되었는데 관장도 못하고 너무 아파 병원과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해도 계속 심해져만 갔다. 항문 밖에 가득 차게 튀어 나온 것이 치질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변도 불 수 없으니 인공 항문을 해야 하는데 혈압이 40-50이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링거 500cc를 24시간 동안에도 다 못 맞아 팔, 어깨, 발, 이마에 번갈아 가면서 맞아도 5분의 1을 버려야 했다. 병원에서는 항문을 열어 보기 위해 주사 3대를 놓아도 안 돼 5대, 7대의 주사를 놓았으나 항문이 꽉 찼으므로 보호자를 부르기에 “안돼요!" 하자 남편은 얼른 나갔고 어머니만 들어오셔서 나의 아픈 곳을 보게 되었다. 의사는 ”왜 남편을 못 들어오게 한 것이요? 병이 너무 심하니 남편에게 보입시다.“ 이미 항문까지 전이되어 퍼져 나온 암을 가족에게 보여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추한 꼴 보이고 사느니 차라리 보이지 않고 죽는 편이 났겠어요“ 했다.

몇 달 후 의사는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요. 집에 가서 맛있는 것이나 많이 잡수세요.”라고만 했다. 어머니와 남편과 자식들 때문에라도 살아보려고 몸부림쳤던 고통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고, 그 모든 노력들도 죽음이라는 그늘 속으로 묻혀 사라져야 한다는 현실 앟에 세상은 온통 잿 빛이었다. 이제 남은 내 생애가 얼마나 더 연장될지 모르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내 몸을 아낌없이 바쳐 가족을 위하여 불사르겠다.“고 다짐하고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꿈 많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뒤돌아보며 저 높은 창공에 나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묻어 보냈다.

시한부 인생인 나는 공기 맑고 물 좋은 시골에서 주인집 노부부와 함께 오순도순 살며 생을 마감하고자 했는데 1980년 초, 갑자기 남편이 나주로 발령이 났다. 사랑과 정에 굶주렸던 나는, 사람들이 말리던 곡괭이가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 오랜만에 정을 나누고 살게 되었는데 그것마저 허락 되질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나주로 이사했다.

시골에서는 땔감을 사용하고 시장 안 봐도 됐는데, 도시로 오니 연탄을 때야 했고 시장을 봐야 하기에 모든 것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올해 다서째가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않으면 큰일이다.’ 하는 생각에 열심히 기도했는데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 기쁨도 잠시, 시어머님이 오셔서 “다섯째 합격했으니 이제 아파트를 사줘야 된다.”하고 하시니 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아파 눕자 친정어머니가 살림을 도와주셨는데 시동생이 합격했어도 시동생 때문에 시작한 농사는 마무리해야 되니 친정어머님은 시골에 가시면서 시어머님께 부탁드려 시어머님이 나주로 내려오셨다. 넷째에게 우유도 먹여야 되고, 낮이 되어 아이들 밥도 챙겨야 되는데 오시자마자 어디론가 가시고 보이지 않아 애들에게 물어보니 안집 아기 목욕시킨다고 했다. 나는‘곧 오시겠지.’ 하고 기다려도 안 오셔서 또 찾으니 안집 아기 안아 주고 있다고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자 그냥 홀연히 떠나가셨다. 이튿날 안집 새댁이 와서 호들갑스럽게 얘기했다. “댁은 시어머니 너무 잘 두셔서 좋으시겠어요 세상에 우리 집 오셔서 아기 목욕시키고 이 넓은 집 청소 다해주시고 아이 낳느라 고생했다며 녹두까지 가져와 녹두죽을 다 써주셨어요. 얼마나 좋으셔요?”라고 하여 “네." 하며 우리 아이들 먹인 셈치고 봉헌했다.

나는 어머니 가슴에 무덤이 되지 않으려고 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최선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몸은 얼음장처럼 차졌다. 그때 문병왔다 돌아가던 두 개신교 신자들이 대문가에서 “목숨이 아깝고 인생이 불쌍하지만 차라리 죽어 주는 것이 사는 사람들의 걸림돌을 치워 주는 것이지. 쯔쯔쯔...”하는 대화는 어떤 깨달음처럼 다가와 나에게 죽음을 준비하게 했다.

내가 살아왔던 한 생애를 되돌아볼 때 기쁨보다 고통과 슬픈 세월의 나날들... 외롭고 고독했던 처참한 세월 속에 이제는 묻혀서 잊혀 질 나의 슬픈 운명...남몰래 흘렸던 그 눈물방울들이 모여져 작은 시내를 이룰 수 있을 만큼 깊은 침묵의 절규들을 그 누가 알 수가 있겠는가? 어려운 사람과 이웃을 도우며 잘 살아보려던 소망을 고통과 죽음이 샘이라도 하듯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반려자처럼 나를 뒤쫓아 다녔고, 이제는 가장 가까운 길동무가 되어 눈보라 치는 어두운 밤을 걷자고 졸라대었다.

나는 먼 항로를 여행이라도 하듯 지친 몸을 이끌고 나아갔지만 폭퐁우와 거센 풍파는 나를 앗아가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힘겹고 고독한 몸부림 속에서도 인내심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칠전팔기 오뚝이처럼 대항해 왔는데 이제 그 모든 눈물 어린 노력들과 나의 꿈들을 뒤로하고 사랑하는 내 어머니와 가족들을 남겨둔 채, 한 번 가면 영원히 다시 올 수 없는, 그리웠던 아버지가 계시는 저세상으로 가야 되는 이 처절한 현실 앞에 나의 한 생애가 조용히 막을 내리려는 것인가. 이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뒤로하고 죽음의 현실 앞에 나를 내어 놓기 위하여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하려고 하나하나 모두 정리해 갔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정들었던 어머니와 남편과 아이들의 물건들을 눈물 속에 정리해 놓고 먼 길을 떠나기 위하여 나는 내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나는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어머니와 남편과 네 아이들과 새 부인이 될 사람에게까지 총 7통의 유서를 썼다. 그때 남편이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오면서“여보! 여보! 오늘은 성당에 좀 갑시다.”

죽기 위하여 집을 나서려는 아내를 성당에 데려가기 위하여 퇴근시간이 아닌데도 남편이 집에 들어온 것이다. ‘나의 육신이 때가 되어 사랑하는 남편과 오늘 아침에 마음으로 마지막 작별을 고했건만 이게 무슨 운명의장난이란 말인가?’ 남편과 함께 성당을 찾아 신부님께 “신부님, 하느님이 계시고 신이 계신다면 너무 가혹하십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쓴잔을 마셔야 만 할까요?”했다. 어려서부터 내가 불편하더라도 상대방이 화평하기만을 바라며 살아왔기에 우리 집은 거지들, 장사꾼들이 머물러 가는 집이라고 일컬을 정도였는데... 신부님께서 “아주머니는 지금 몸으로 은혜받고 계시네요.” 하셔서 ‘아멘’ 으로 응답하자 얼음장 같았던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일곱 통의 유서를 태우고, 성물 판매소로 달려가 필요한 성물들을 샀다. 그리고 성상들을 서랍장 위에 모시고, 촛불을 밝힌 뒤 장미꽃 한 송이를 꽂아두고, 미사보를 쓰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3일째 되던 날 “성경을 가까이 하라, 성경은 바로 살아 있는 나의 말이니라.” 하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와 성경을 펼쳤는데 루가 복음 8장 40절 이하의 말씀이 나왔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와 살아난 야이로의 딸)의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 아멘으로 응답하자마자 항문 밖으로 퍼져 나왔던 암덩어리들이 순식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깨끗했다. 발가락 사이로 퍼져 나왔던 암 덩어리도 없어지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으며 바늘로 쑤시는듯 아팠던 눈과 모든 신체들이 다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것이 놀랍기만 하여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혈압과 자궁과 간장을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40-50이었던 저혈압은 70-120으로 정상이 되었고, 간장 수치와 자궁도 다 정상인 건강한 몸과 마음이 되었다. 나의 가슴은 기쁨과 환희로 부풀어 올라 그 즉기 미용실을 경영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나를 죽음에서 살리신 뒤, 사람들의 영혼 상태가 얼마나 심각 한가를 몇 해 동안 보여주셨는데 성령쇄신 기도회에서는 주님의 가슴이 열리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처절하게 피를 흘리시는 모습도 보여 주셨다. 나는 1982년 사순시기에 ‘내가 고통받음으로 주님께 위로가 되고 한 영혼이라도 회개 할 수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게노라.’ 다짐하면서 ”천하디 천한 이 육신은 끊임없는 병고로 신음할지라도 주님께서 하시는 사업에 티끌만 한 도움이라도 되올 수 있다면 제가 받는 그 고통은 얼마나 행복한 고통이리이까?“ 하며 주님께 고통을 달라고 청했다.

주님께서는 나의 청을 들어 주시어 이때부터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미용실에 찾아오는 손님을 거의 받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가중되어 자주 눕게 되었고, 1984년 말부터는 고통이 더욱 극심해졌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가족들이 안타까워 병원에 가자고 하여 애덕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입원하게 되었다. 광주 한병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해 있으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자 개인병원 입원시켰다.

그곳에서도 전혀 차도가 없었기에 유서 깊은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해서도 계속 촛불 봉헌하고 병실에 누워서 죄인들의 회개 위하여 기도했다 기독병원에서도 차도가 없이 고통이 더욱더 심해졌기에 두 달 만에 다시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때는 너무 심각한 상태였기에 산소호흡기를 했는데도 가슴이 차오르고 숨쉬기도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소변도 보지 못해 결국 호스를 꽂게 되었고, 먹은 것이 없는 데도 계속 심한 설사와 피곱까지 나왔다. 전남대병원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 치료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도저히 안 되니 결국 포기하고 “이제는 퇴원하십시오.”하였다 가족들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나를 퇴원시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임종준비를 시켰다.

모두 다 놀랐지만 나는 차분하게 마음 이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그리고 당신한테도 미안하고요. 그리고 얘들아! 엄마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들어라. 나는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이었는데 주님께서 살려 주셔서 이이렇게 몇 년 동안 덤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란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나를 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었던 우리를 지금까지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돈도 벌게 해 주셨으니 엄마가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는 된단다. 물론 엄마가 없는 것이, 있는 것만은 못 하겠지만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할 이 엄마를 지금까지 살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등등 이야기를 하자 내 말 듣고 있던 가족 모두는 엉엉 울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고 그렇게 한참 동안을 비통에 젖어서 나의 말을 듣던 가족들 모두가 나중에는 내 말을 이해하고 내 뜻에 따르기로 했다. 골방에 누워 있는데 나도 모르게 소변이 조금씩 나왔기에 요강에 앉은 채로 베개 세 개를 포개어 앞에 놓고 팔을 올리고 엎드려 기도하면서, 시시각각 닥쳐오는 임종의 그 고통들을 죄인들의 회개만을 위해 온전히 봉헌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가족에게도 보이기 싫어 가족들이 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친정어머니만은 시중 들어주시기 위해 수시로 들어오셨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얘야 , 그냥 기저귀를 차고 편안하게 누우면 안 되겠냐?” 하셨고 상황을 전해 들은 장부도 문 밖에서 “여보, 기저귀를 차도록 하지.”하고 안타까워하며 권고했으나,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내 모습 그대로를 주님께 온전히 바쳐 드렸다. 그리고 고통 중에도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능욕을 기워 갚기 위해 혼자 성시간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동체 안에서 성시간 기도를 하고 싷어졌다. 그러나 내가 주관하던 나주 본당 성시간은 내가 고통으로 참석을 못하자 없어져 버렸기에 공동체 안에서 성시간을 지키려면 광주까지 나가야만 했다.

그 당시 성령 쇄신 김 알로이시오 회장님 댁에서 성시간을 했는데 그곳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기저귀를 차고 가야 했다. 가족들이 절대 안된다고 말렸지만 나는 죽어도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다가 죽고 싶었기에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다가 죽어도 주님의 것이요, 살아도 주님의것이오니 오로지 주님 뜻을 이루소서.”하고 죽을 힘을 다해 그 집으로 가서 성시간 기도를 바쳤다. “단식을 할 때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처럼 내 생전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성시간에 참여하면서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기에 화장을 하고 갔으니 아무도 내가 그렇게 심한 환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구나 모든 고통을 기쁘게 봉헌하는 내 얼굴에는 죽음을 향한 기쁜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으니 어느 누가 임종을 준비한 환자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들은 “율리아는 성령운동을 그만둬서 주님께 벌을 받아 늘 아픈 것이다.”했기에 그들이 더 이상 판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욱더 따스한 미소로 그들을 대해야 했다. 내 생애에 주님께 바쳐드리는 마지막 공동기도라고 생각했기에 어느덧 열렬한 기도 속에 빠져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주님의 성심 안에 깊이깊이 빠져들어 주님게 외쳤다.

“말씀 한마디로 온갖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의 위대함 앞에 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초라한 존재인가를 잘 알고 있나이다. 그러나 부족한 이 죄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또한 대양의 물방울 수만큼 많은 죄인들이 회개하여 주님 영광 드러 낼 수 있도록 축복해주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고 천상의 옥좌에까지 이르게 하옵소서...”

깊은 기도에서 심취되었을 때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마치 모든 사물이 일시에 정지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에 ‘아, 주님께서 이제 나를 데려 가시려나 보다.’ 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때 주님의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 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귀염둥이! 지극히 사랑하는 내 작은 영혼아! 너는 나를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이미 네 목숨까지도 내어놓았으니 그것은 바로 인류 구원을 위하여 나를 온전히 내어놓은 지극히 높은 내 사랑과 합일된 사랑이기에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말구유에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 삶을 순수한 사랑으로 깊이 묵상하면서, 유다와 같은 배반을 탓하지 않고 세상 모든 자녀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내 귀여운 딸아! 자, 어서 일어나 거라.

너는 이미 내 어머니와 나를 위한 증거자로 특별히 간택되었으니 너는 이제 구원된 초월자로서 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매순간 받는 고통과 희생과 보속으로 바쳐진 아름다운 사랑의 봉헌은 하느님께 반역한 이 세상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어 머지않은 장래에 온 세상에 나의 성심의 나라가 이룩되리니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인 성녀들이 춤추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끝나자 어느 샌가 나의 온몸은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되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1985년 3월 25일

두 번째 임종 준비 중에서...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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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길로님의 댓글

사랑의길로 작성일

주님께서 친히 간택하신  율리아 엄마의 삶을

통해서 영적인 삶으로 살아갈 수있음에 감사 드립니다.

엄마에게 더욱 양육되어 단순한 어린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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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사랑님의 댓글

영적인사랑 작성일

엄마의 죽음의 고통이 아려져오는 삶이
혹독하고 처참하리만큼 가슴에 스며듭니다..

이제는 그 모든것이 우리가 조금이라도 엄마에게
힘이되는 삶을 살게 이끌어 주시여 영적 투쟁에서

승리하는 기쁨을 맞보게 해주시어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 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일어서세요..화이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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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처음님의 댓글

한처음 작성일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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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기도화님의 댓글

생활의기도화 작성일

처참한 율리아님의 일생이 철저하게도
고통의 화덕에 ...

그 모두가 저희들을 위한 고통들을
대신받음으로 회개와 치유로 돌아가기
위한 엄청난 주님의 사랑이였다고

하시지요. 하지만 너무나 그 사랑이
그 고통이 커서 잠시 쉬어가듯
고통이 좀 줄어들였으면 합니다만

이 죄인이 부족하여
잘못살아 더욱더 고통을 드렸으니
율리아님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사랑해요.
고맙습니다. 율리아님!
영육간에 건강하시길, 빠른회복 기도
드려요.아멘

수고해주신 탱주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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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님의 댓글

장미 작성일

아멘!!!
영화속같은  고달픈 인생기!
그것이 율리아님께서 살아오신 인생
고통의 화덕속에서도
고함치거나 슬프하는일 없이
묵묵히 그 자리에서 봉헌과 셈치고의 삶을 살아오신분
덕분에 우리들은 호사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의 님이여
고맙습니다  그리운 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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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샘님의 댓글

위로의샘 작성일

“ 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귀염둥이! 지극히 사랑하는 내 작은 영혼아! 너는 나를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이미 네 목숨까지도 내어놓았으니 그것은 바로 인류 구원을 위하여 나를 온전히 내어놓은 지극히 높은 내 사랑과 합일된 사랑이기에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말구유에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 삶을 순수한 사랑으로 깊이 묵상하면서, 유다와 같은 배반을 탓하지 않고 세상 모든 자녀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내 귀여운 딸아! 자, 어서 일어나 거라.

너는 이미 내 어머니와 나를 위한 증거자로 특별히 간택되었으니 너는 이제 구원된 초월자로서 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매순간 받는 고통과 희생과 보속으로 바쳐진 아름다운 사랑의 봉헌은 하느님께 반역한 이 세상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어 머지않은 장래에 온 세상에 나의 성심의 나라가 이룩되리니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인 성녀들이 춤추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끝나자 어느 샌가 나의 온몸은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되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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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성심님의 댓글

사랑의성심 작성일

아멘!!!

사랑하는 탱주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성모님의 축복 가득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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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렐루야님의 댓글

알렐루야 작성일

우아 이 글씨 다 타자로 치셧나봐요 ㅠㅠ
쓰신 공로에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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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것님의 댓글

님의것 작성일

아멘!
율리아님을 저희에게 보내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 드리옵니다

사랑하는 탱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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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혁님의 댓글

유민혁 작성일

거룩하신 예수님의 오상의 성혈과 일곱상처의 보혈로 저를 포함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시고
성모님의 참젖과 눈물과 피눈물 향유로 성모님을 못 알아보는 이들의 눈을 뜨게 하여주소서.
세분신부님과 나주의 생활의기도 지원자분과 율리아자매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댓글을 봉헌합니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모든 성인성녀 그리고 성모님 나주의 인준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아멘아멘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님의향기를 틈틈히 쭈욱 읽어보았습니다.
정말 가슴이 뭉클뭉클 눈시울이 붉어지고
어찌 이런 사랑이 있을까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숨고 싶었습니다.
율리아님께 양육받아 저도 그렇게 되려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나 화이팅!!! 하소서 탱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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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빛님의 댓글

세상의빛 작성일

아멘!!!
고통의 연속, 온갖 고통이 엄마를 덮쳐도 포기 하지 않으시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고 계신 엄마-!
엄마의 존재로 제 영혼은 날마다 힘을 얻습니다^0^

사랑하는 탱주님, 수고와 정성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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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여기님의 댓글

애인여기 작성일

아멘!!!
율리아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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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ana님의 댓글

Liliana 작성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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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닮은아기님의 댓글

엄마닮은아기 작성일

어마어마한 율리아님의 생애...
그 삶을 전하라 하셨기에 지금까지도 엄청난 고통속에서도
당신의 삶을 전심전력하여 전해 주시는 율리아님...!

우리 모두 당신님의 뒤를 잘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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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님의 댓글

여명 작성일

"너는 이미 내 어머니와 나를 위한 증거자로 특별히 간택되었으니
 너는 이제 구원된 초월자로서 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매순간 받는 고통과 희생과 보속으로 바쳐진 아름다운 사랑의 봉헌은
 하느님께 반역한 이 세상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어 머지않은 장래에
 온 세상에 나의 성심의 나라가 이룩되리니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인 성녀들이
 춤추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아 멘.아 멘. 아 멘. 아 멘. 아 멘..
 주님  성모님!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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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샘님의 댓글

자비의샘 작성일

아멘~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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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삶님의 댓글

순교자의삶 작성일

너는 이미 내 어머니와 나를 위한 증거자로 특별히 간택되었으니 너는 이제 구원된 초월자로서 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매순간 받는 고통과 희생과 보속으로 바쳐진 아름다운 사랑의 봉헌은
하느님께 반역한 이 세상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어 머지않은 장래에 온 세상에 나의 성심의 나라가
이룩되리니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인 성녀들이 춤추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아멘아멘아멘!!! 율리아님을
통해 주시는 모든 은총들 다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성모님! 저도 더욱 아름답게 봉헌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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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기쁨님의 댓글

천상의기쁨 작성일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인간으로 가늠하기에 너무 힘든것

그래서 주님께서 감복하시어 구원된 초월자 세상죄인 회개를

위해 특별히 간택하셨나봐요 이죄녀 냉담중에율리아엄마의 대속고통을

통해 회개하고 부활의삶을 살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무지무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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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마리아님의 댓글

아베마리아 작성일

참으로  가슴아프고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난을
겪어신 율리아엄마....
사랑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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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함께님의 댓글

엄마와함께 작성일

아멘!

저도 읽고 마음이 짠 했어요...ㅠㅠ

너는 이미 내 어머니와 나를 위한 증거자로 특별히 간택되었으니
너는 이제 구원된 초월자로서 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매순간 받는 고통과 희생과 보속으로 바쳐진 아름다운 사랑의 봉헌은
하느님께 반역한 이 세상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어 머지않은 장래에
온 세상에 나의 성심의 나라가 이룩되리니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인 성녀들이
춤추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아멘!

율리아님 사랑해요....많이요^^
탱주님, 고마워요.
은총 풍성하게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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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향기님의 댓글

어머니향기 작성일

너는 이미 내 어머니와 나를 위한 증거자로 특별히
간택되었으니 너는 이제 구원된 초월자로서 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매순간
받는 고통과 희생과 보속으로 바쳐진 아름다운
사랑의 봉헌은 하느님께 반역한 이 세상을 구하
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어 머지않은 장래에 온
세상에 나의 성심의 나라가 이룩되리니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인 성녀들이 춤추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아멘!!!아멘!!!아멘!!! 글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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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포기님의 댓글

자아포기 작성일

우와!!! 마지막 글! 새털처럼 가벼워진 몸!!!
엄마 축하드려요!
마지막 기도 열렬한 기도!!
아멘아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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