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용서되지 않은 이틀 간
(1981년 4월 30일)
정말로 악몽 같은 날이 지나갔지만 도저히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내 생전에 아니 하느님을 알기 전에도 이렇게 사람이 원망스럽고
용서가 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친정 어머니께서는 시어머님의 회갑 잔치를 해 드리기 위하여 친정
이모님들까지 불러서 며칠을 고생하시면서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여 회갑 잔칫상을 차려드렸는데 바로 그 다음날 찾아와서 다른 누구도 아닌 친정어머니를
밀쳐 다치게 하셨으니 더욱 용서가 되지를 않았다.
시어머님께서 "가족들끼리 모여서 그냥 간단하게 밥 한끼
먹자"
고 하셨지만 그럴 수는 없어 시댁 형제들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않고 정성껏 회갑 잔치를 해 드렸는데…
시댁 형제들은 잔칫날 시어머님과 함께 와서 차려 놓은 음식을
먹었을 뿐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생 고생해서 시어머님 잔칫상을 마련해 주신 친정 어머니께서
죄없이 시어머니로부터 당한 셈이 되고 보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남편만이라도
"여보 젊은 우리들이 참고 봉헌해야지 어쩌겠는가?"
하고 한마디만 해주었더라도 이내 봄눈 녹듯 녹았을 터인데 남편은
나를 이해시키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시어머님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도록 퉁명스럽게 화를 내었다.
'차라리 고아에게 시집을 가서 이 정성을 쏟았다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머릿속에 감돌았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행여라도(행여나)
"아비 없는 자식" "홀엄씨(홀어머니) 딸" 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 아끼지 않고 얼마나 노력하며 살아왔던가.
그리고 외롭게 자란 나는 시부모님이 계시고 형제간도 많은 집에
시집가서 오순도순 서로 우애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보고픈 마음으로 내가 택한 길이었기에 시집오는 날부터 허리끈 졸라매고 굶어가면서까지 시어머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살았으며 소처럼 쉬지 않고 일하면서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그 수많은 일들을 치렀건만 시어머님은 "내가 없으면 다 저그들이 할
일인데 뭐…" 하며 큰자식이 한 모든 일들은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한 것이라며 당연시 하셨다.
물론 나도 마땅히 해야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기쁘게
해왔다.
반면에 작은 자식들이 한 일들은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때마다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하며 자랑하셨지만 나는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마땅히 해야 될 일을 기쁘게 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장손이라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시집갈 때 해갔던 물건들 (장롱, 찬장, 이불,
베개, 농지기 등등)까지 시어머니께서 모두 사용하셔서 살림날 때 하나도 가져오지 못해 친정어머니께는 죄송했지만 그러나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힘들여 회갑잔치 해드리느라 고생하신 친정어머니에게 보답은 못해드릴망정 다치게 하시다니…
나 하나만을 위해 이날 이때까지 고생만 하시며 청상으로 늙으신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종갓집의 8남매 장손 며느리로 시집을 가는 바람에 잘 모시기는커녕 오히려 딸을 위해 딸의 시댁에까지 희생하고
고생만 하셨는데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에게 그 어떤 봉변을 주어도 모두 용서하며
「셈치고」 살아왔기에 설사 누가 나를 짓밟고 죽인다해도
나는 그들을 오히려 내 십자가이려니 생각하며 기쁘게 잘 봉헌했을
텐데
나를 이해해 줄줄 알았던 남편의 몰이해는 나를 더욱 견딜 수 없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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