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지팡이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1981년 5월
1일)
내 마음은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강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어 강론 말씀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머리를 '꽝'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에
강론하시는 수녀님을 순간적으로 바라보았더니
"하느님께서는 지팡이로 사용하시고자 나무를 자르실 때 아무 나무나
자르시지를 않고 반듯한 나무를 골라서 잘라 내십니다.
그러나 반듯한 나무를 자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좋은
지팡이로 쓰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 내고 껍질을 깎아내야 하기에 그 나무는 잘라지고 깎이는 아픔을 겪어야만 합니다"
라는 것이 아닌가?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에게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 아까 그분이 예수님이셨던 모세였던 나에게는 상관이
없어,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이 사용하시기 위한 도구로 만들기 위하여
잘려지고 깎여지고 다듬어지는 아픔과 고난을 나에게 허락하셨을 거야.
또한 내가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기에 합당한가를 알아보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험도 해 보실 수도 있으셨을 테고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살아오던 나의 마음에 절망감을 안겨주어 하느님과 나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획책한 교활한 마귀의 장난이었을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니 나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주님! 사랑하올 나의 주님!
죄송해요. 철야기도회 때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해 놓고서도
이렇게 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군요. 이제
알았어요.
나를 해치려고 하는 그 어떤 사람도 내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마귀는 나의 약점을 이용했어요.
우리 어머니를 다치게 하는 것만이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는
방법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마귀가 저의 약점을 이용하여 시어머님을 도구로 이용했어요. 죄 없는 시어머님, 아마 시어머님은 그런 사실조차도
까마득히 모르고 계실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까요.
마귀의 간교한 계략에 휘말려 잠시 잠깐 도구로 사용되었으니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오, 주님! 저를 이토록 사랑하셨습니까?
저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제가 크게 깨닫도록 안배해 주셨군요.
이제 알았으니 더 잘 할게요.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기에 부당하고 무자격자이오나 당신의 뜻대로 따르겠나이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울고 있는데 제대 앞에서
밝은 빛이 비추어지더니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그것이다. 내 착한
아기야!
나는 너를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죽음에서 살려냈으니 온전한 신뢰심으로 나와 내 어머니만을 바라보며 따라오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절제할 수가 없어 성당 밖으로 나온 나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장부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하셨던 역사였음을 이야기하고 난 뒤 곧바로
시어머님을 찾아가서 큰절을 올리며 용서를 청했다.
그랬더니 시어머님께서는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시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야, 너희들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러냐? 세상 천지에 너희들만큼 잘하는 자식들이 또 어디 있다더냐" 하시는 것이 아닌가.
'오, 나의 사랑 나의 주님! 당신의 높으신 그 경륜을 감히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고해 성사를 드리고자 새벽부터 서둘러 여러 성당을 헤매었으나
주님께서 계획하지 않으신 일이라면 어떻게 그렇게도 철저하리 만큼 신부님들을 만나지 못할 수가 있었겠으며, 또한 오는 도중에 시간이 지체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강론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고해성사를 보고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할 때 더욱 풍성한
하느님의 사랑을 내려주신다는 사실을 이날 체험으로 깨닫고 난 뒤 모셨던 그 성체의 맛은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높고 깊고 넓은
사랑이며 크나큰 보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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