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걸음마다 자국마다 (1986년 7월 28일)
그 당시 본당 박 요한 신부님께 내가 봉 할아버지에게 세례를 주시기를 청하였더니 쾌히 승낙하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목욕 재계한 상태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해 드리려고 할아버지 집으로 막 가려던
참에 당시 도초 공소 회장님이었던 박 루비노 회장님이 오셔서 함께 가게 되었다.
중앙동에서 매일 시장을 거쳐 교동까지는 약 5-10분 거리였는데 시장 골목 어귀에서부터 갑자기 온
몸이 심하게 아프면서 동시에 나의 발이 땅에 딱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혼신을 다해서 발걸음을 옮겨 보려 했지만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지지를 않았기에 안간힘을 쓰면서
발을 끌다시피 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지만 한 걸음마다 채 5cm도 옮겨지지가 않았으니 그야말로 걷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닌 상태였다.
갑작스런 현상에 깜짝 놀란 루비노 회장이 “택시를 부를까?”
하기에 “아니에요. 이 고통을 죄인들의 회개와 봉일동 할아버지 치유를 위하여 바칠 거예요.”
“그렇지만 이런 몸과 다리로 어떻게 거기까지 걸어 갈 수 있단 말이야.”
“회장님! 내가 하고자 하는 희생에 동참해 주시려거든 함께 가시고 그렇지 않으려면 돌아가 주실래요?”
“그래, 나도 율리아 자매님과 함께 희생에 동참하겠어”
하며 나를 부축하고 내 발걸음 속도에 맞추어 함께 걸었다.
그렇게 걷는 모습이 남들 보기에는 인간적으로 창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것은 이미 초월해
버렸기에 창피한 줄 모르고 힘겹게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
다 뒤따르는 고통들을 한 발자국마다 한 영혼씩 회개할 수 있도록 희생으로 온전히 바쳐 드렸다.
그때 나는 예수님께서 온갖 수모와 편태와 조롱을 다 받으시면서 무수히 많은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신
몸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갈바리아를 고통스럽게 오르실 제 우리 예수님이 당하셨을 처참한 수난을 깊이 묵상할 수가 있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조용히 속삭이듯 들려왔다.
“오 오, 내 귀여운 작은 영혼아!
고맙구나.
나는 네가 매일 매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나의 찢긴 성심을 기워주기 위함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바치는
생활의 기도를 통하여 큰 위로를 받으며 기쁨에 차 오른다.
그리고 이웃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라 온갖 희생과 보속과
봉헌으로 점철된 너의 충성된 그 사랑 앞에서 나는 잠시라도 고통을 잊을 수가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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