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시어머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날 (1984년 8월 14일)
시어머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날 나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영세식이 거행되는 광주 중흥동 성당에
가서 세례식 미사에 참례한 뒤 시어머님 세례식 기념사진도 찍어 드리고 선물과 꽃다발도 드리며 축하해 드렸다.
행사가 끝난 뒤 시어머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중흥동에 살고 있는 C자매와 P자매님,
그리고 몇 분의 자매님들이 나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하여 자기들 집으로 데려갔다.
거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기에
"무슨 일이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한 자매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오늘 자매님의 시어머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니까 자매님께서 당연히 우리 성당에 오실 줄을 알고 미리 기다렸다가 영세식이 끝나자마자 우리 집으로 모셔 오려고
모였답니다.
사전에 말씀드리면 오시지 않을 것 같았기에 말씀드리지 않고 강제적으로 모셔오다시피 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며 나를 데리고 온 이유에 대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주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면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데 한 6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떤 자매님이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나- 갈꺼야-" 하며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또 다시 무시하듯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자매님을 보는 순간, 온통 미움과 분노와 격정으로 가득차서 일그러지고 상처나 있는 영혼
상태를 직감할 수 있었기에 그 분 발 밑에 쪼그리고 앉아 그분 몰래 치맛자락을 가만히 잡으면서 기도했다.
"오,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
당신은 죄인인 우리에게 구원의 빛나는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하여 이 자리에 오셨나이다. 이 분을 좀
잡아주세요. 그리하여 미움과 분노와 격정으로 상처 나고 무디어진 마음을 바로 잡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어 참 생명을 주시며 부활의 승리 얻어
기쁨과 사랑과 평화 누릴 수 있도록 삼구 전쟁에서 승리 얻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했다.
나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가겠다며 나를 노려보던 그 자매님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지면서 다시 소파에 앉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시 그 자매님을 따라가 발치에 앉아서 또 기도했다.
"오, 나의 주님이시여! 이 자매님이 주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영적으로 닫힌 문,
아니 자물쇠로 채워진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듯이 이 자매님의 눈에 끼어 있는 비늘도 떨어지게 해 주시어 사도
바오로와 같이 당신을 증거 하는 증거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라며 기도하자마자 그 자매님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도 방으로 들어간 뒤 둥그렇게 둘러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주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우선 중점적으로 병든 가정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야기와 함께 개인적인
신앙체험을 이야기해 준 뒤 기도를 했다.
기도가 진행되면 될수록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흐느낌이 잦아지더니 영가를 할 때쯤에는 온 방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기도회가 끝나자 아까 나를 무시하듯 쳐다보던 자매님이 손을 번쩍 들더니 "내가 이야기 좀 하면
안될까요?" 라고 하기에 "말씀하세요" 했더니 "아이고, 참말로 내가 정신이 어떻게 되었다가 깨어난 기분이요"
라며 한숨을 쉬더니 그동안 마음 안에 감추어 두었던 말들을 꺼냈다.
"사실은 내가 신부 어머니인데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해야 되겠네요.
제 큰아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며느리가 하도 미워서 아들 부부를 이혼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율리아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모든 것이 비로소 「네 탓」이 아닌 「내 탓」임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죄인은 다름 아닌 바로 나네요. 오늘 당장에 사돈네랑 며느리에게 용서를
청할 랍니다.
그리고 나는 그 동안 내가 진 십자가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크고 무겁다고 원망하면서 피정이란
피정은 모두 다 다녀 보았지만 메마른 내 영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 충만한 율리아 자매님이 온다고 하기에 기다렸는데 거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자매님을
처음 보는 순간 어찌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아, 글쎄 자매님의 나이가 30대 중반쯤 되었다고 하기에 몸집도 좀 있고 나이도 좀 들어 보일 줄
알았는데 천만 뜻밖으로 20대 초반도 안되어 보이는 호리호리한 처녀가 들어오기에
'아이고 저런 풋내기한테 무슨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실망한 끝에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자꾸만 멈춰지고 끝내는 방으로까지 들어오게
됩디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하느님의 참다운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매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매님을 섣불리 판단한 잘못에 대하여 용서해 주세요" 하며 용서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자매님, 축하드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답니다. 단지 주님께서 필요하실 때 잠시
잠깐 저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니 오직 주님께 감사할 뿐이지요"
라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 드렸다.
그 자매님의 뒤를 이어서 방안에 있던 다른 분들도 그 날 자신들이 체험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들 역시도 그동안「네 탓」으로 알고 살아 왔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모든 잘못이「네 탓」이 아닌
바로「내 탓」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면서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바로 그때 내 귓전에 주님의 음성이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왔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나에게 달아드는 사랑하는 내 작은
영혼아!
나의 진리가 네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곧바로 나아가거라. 내 사랑의 외투를 너에게 입혀 주었으니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님을 항상
기억하여라."
"오, 나의 주님!
저는 죽어도 당신의 것, 살아도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오직 당신 뜻대로
하소서.
오늘 주님께서 용서와 화해로써 인간의 끊겼던 정과 말살된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으니 이제 폭넓은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 완전히 하나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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