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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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 두 번째 임종 준비 (1985년 3월 25일)

 

주님께서 한동안 나에게 세상 사람들의 영혼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 주셨고 성령쇄신 기도회에서는 주님의 가슴이 열리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면서 처절하게 피를 흘리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나는 이때부터 내가 고통 받음으로 인하여 한 영혼이라도 회개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주님께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떠한 고통도 마다하지 않겠노라며 주님께 고통을 달라고 청했다.

주님께서는 나의 청을 들어 주시어 이때부터 고통을 받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더욱더 가중되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미용실에 찾아오는 손님을 거의 받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수반되었기에 나는 자주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가족들이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하루는 병원에 가자고 하였다. 나는 애덕을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가족들이 하자는 대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광주 한방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해 있으면서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으니 가족들은 나를 다시 개인 병원에 입원시켰다. 역시 그곳에서도 전혀 차도가 없었기에 더 큰 병원인 기독교 병원에서 두 달간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차도가 없이 고통이 더욱더 심해졌기에 가족들은 나를 다시 전대병원에 입원시켰다.

전대 병원에서도 너무 심각한 상태였기에 산소 호흡기를 입에 씌웠는데도 가슴이 차 오르고 숨쉬기가 힘이 들었을 뿐 더러 소변조차도 볼 수가 없으니 결국 호스(카테터)를 꽂은 채 지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전혀 먹은 것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심한 설사까지 했고 나중에는 피곱까지 계속해서 나왔으니 참으로 그 당시의 상황들은 하나 하나가 모두 고통스러웠다.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나를 치료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써 보았지만 도저히 안되었기에 나중에는 대학병원에서도 포기하고

"이제는 퇴원하십시오"

하여 우리 가족들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나를 퇴원시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임종준비를 시켰다.

가족들 모두가 다 놀랐지만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그리고 당신한테도 미안하고요.

그리고 얘들아! 엄마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나는 이미 죽었어야 할 몸이었는데 주님께서 살려 주셔서 이렇게 몇 년 동안 덤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란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나를 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었던 우리를 지금까지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돈도 벌게 해 주셨으니 엄마가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많은 돈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는 된단다.

물론 엄마가 없는 것이, 있는 것만은 못 하겠지만 이미 오래 전에 죽어서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할 이 엄마를 지금까지 살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한다." 등등 이야기를 하자 나의 말을 듣고 있던 가족 모두는 엉엉 울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고 그렇게 한참 동안을 비통에 젖어서 나의 말을 듣던 가족들 모두가 나중에는 내 말을 이해하고 내 뜻에 따르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소변이 조금씩 나왔기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요강에 앉은 채로 베개 세 개를 앞에 놓고 팔을 올리고

엎드려 죄인들의 회개만을 위하여 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모습을 가족에게도 보이기가 싫었기에 가족들이 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친정 어머니만은 시중을 들어 주기 위하여 수시로 들어오셨다.

하루는 어머니가 "얘야, 그냥 기저귀를 차고 편안하게 누우면 안되겠냐?" 하셨고 어머니로부터 나의 상황을 전해들은 장부도 미닫이 문 쪽을 향하여 "여보, 그렇게 있으면 어떻게 해. 기저귀를 차도록 하지" 하고 안타까워하면서 권고했으나 나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나의 모습 그대로를 주님께 온전히 바쳐 드렸다.

그리고 고통 중에도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능욕을 기워 갚기 위하여 혼자서 성시간을 지켰는데 어느 날인가 갑자기 공동체 안에서 성시간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내가 주관해 오던 나주 본당 성시간은 내가 고통으로 참석을 못하자 아예 없어져 버렸기에 공동체 안에서 성시간 기도를 하려면 광주까지 나가야만 했다.

그 당시 김 알로이시오 회장님의 집에서 형제 자매들이 모여 성시간을 했는데 그 곳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기저귀를 차고 가야 했다.

가족들이 절대로 안 된다며 나를 붙들고 한사코 만류를 했지만 나는 죽어도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다가 죽고 싶었기에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다가 죽어도 주님의 것이요. 살아도 주님의 것이오니 오로지 주님 뜻을 이루소서" 하고 죽을힘을 다해 그 집으로 가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성시간 기도를 바쳤다.

「단식을 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과 같이 내 생전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성시간에 참여하면서 나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기에 화장을 하고 갔으니 아무도 내가 그렇게 심한 환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얼굴에는 죽음을 향한 기쁜 미소가 가득 담겨져 있었으니 어느 누가 임종을 준비한 환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율리아는 성령운동을 그만 두었기에 주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서 늘 아픈 것이다"고 했기에 나는 그들이 더 이상 판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더욱더 따스한 미소로 그들을 대해야 했다.

내 생애에 주님께 마지막으로 바쳐드리는 공동기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덧 열렬한 기도 속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주님의 성심 안에 깊이 깊이 빠져들고 잠겼다. 나는 주님께 외쳤다.

"말씀 한마디로 온갖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의 위대함 앞에 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초라한 존재인가를 잘 알고 있나이다.

그러나 부족한 이 죄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또한 대양의 물방울 수만큼 많은 죄인들이 회개하여 주님 영광 드러낼 수 있도록 축복해 주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고 천상 옥좌에까지 이르게 하옵소서…" 하고 깊은 기도에 심취해 있을 때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마치 모든 사물이 일시에 정지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에 '아, 이제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려나 보다' 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때 주님의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귀염둥이!

지극히 사랑하는 내 작은 영혼아!

너는 나를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하여

이미 네 목숨까지도 내어놓았으니 그것은 바로 인류 구원을

위하여 나를 온전히 내어놓은 지극히 높은 내 사랑과

합일된 사랑이기에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말 구유에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 삶을

순수한 사랑으로 깊이 묵상하면서 유다와 같은 배반을 탓하지 않고 세상 모든 자녀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내 귀여운 딸아!

자, 어서 일어나거라.

너는 이미 내 어머니와 나를 위한 증거자로 특별히 간택되었으니 너는 이제 구원된 초월자로서 많은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매순간 받는 고통과 희생과 보속으로 바쳐진 아름다운 사랑의 봉헌은 하느님께 반역한 이 세상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어 머지 않은 장래에 온 세상에 나의 성심의 나라가 이룩되리니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인 성녀들이 춤추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어느 샌가 나의 온몸은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오 나의 주님 나의 사랑이시여!

더러워진 제 영혼 육신을 당신께서 흘려주신 보혈로 깨끗이 씻으시어 다시 살려내셨으니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이 죄녀 당신 뜻대로 사용하소서.

그리고 찬미와 감사와 영광과 흠숭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