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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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

뜰 앞 울타리에 개나리가 활짝 꽃봉오리를 터뜨리던 봄날,

1947년 3월 3일, 나는 이 세상에 고고의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세상의 빛을 보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첩첩산중이라고 하는 나주 다도면 덕림리 연봉골. 하늘이 금방 닿을 듯한 산중 허리에 10여 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아담하고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나는 아버지 윤 세진, 어머니 홍 점순(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문학자이시기도 한 아버지는 당시 광주에서 가장 큰 서석초등학교의 교감이셨다. 한학과 시조에 조예가 깊고 인물 또한 출중하신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생님으로 존경받으셨으며, 제자들도 그 인품과 학문에 심취하여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10여 호의 마을에서 7명의 아기가 거의 동시에 태어났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기에 기저귀 대신 헌 옷 같은 것을 사용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다른 엄마들의 치마는 늘 아이들의 소변으로 다 젖어 있었지만, 우리 어머니 치마만 젖지 않고 깨끗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아기를 잘 챙겨 그렇기도 했지만 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잠잘 때는 전혀 쉬(소변)를 하지 않아 항상 깨끗할 수 있었다 한다. 그래서 엄마들 사이에서는 “홍선이는 아기 때부터 효도하는구나.” 하고 칭찬이 대단했다고 한다.내가 태어난 지 5개월 정도 되었을 때 외조모님이 오셨다. 어머니는 친정어머니 오셨다고 장작불을 때서 떡을 해드렸다. 조부님은 귀한 손녀 봤다고 화로도 다 치우고애지중지하셨는데 그와 달리, 외조모님은 밖에 나가 깨진 옹기그릇을 주어다가 장작을 땐 그 숯불을 담아 방에다 놔두고 담배를 피우셨다.

마침 기어 다니는 젖먹이였던 나의 손등이 그 숯불에 달궈진 옹기에 데었다. 너무 순해 배가 고파도 잘 울지 않던 아이가 우는 데도 외조모님은 살펴보지도 않고 “어미야, 애기 젖 줘라.” 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어머니가 젖을 주자 나는 울음을 뚝 그친 뒤 한 번도 울지 않았다. 3일 뒤, 나에게 젖을 물린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오른쪽 손등에 커다란 물집이 잡혀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어머니는 그제야 3일 전에 손이 덴 것을 아셨다. 손녀를 금지옥엽으로 기르시던 조부님은 큰 화상을 입은 젖먹이 어린아이를 붙들고 우셨고, 어머니도 우셨다.

“덴 자식 보채듯 한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불에 데면 다른 무엇보다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도 손등에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을 정도로 많이 데었는데도 젖을 물리자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모두 놀라워했다. 그런데 내가 걸음마를 할 때도 또 비슷한 상황에서 양 손바닥을 다 데었는데도 울지도 않고 잘 버텼다 한다. 이때는 금방 조치를 취했기에 흉은 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고통의 화덕에 단련시키심이리라.

우리 가족은 1948년도에 아버지가 계신 광주 풍향동으로 이사해 큰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나는 조부님과 부모님으로부터 온갖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참으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옛날에 부잣집은 대부분 건축비가 많이 들어도 집터를 높여서 토방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그래야 집에 습기도 안 차고 폭우가 내려도 물에 잠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아주 높았다.

집에서 개도 키웠는데 새끼를 많이 낳았다. 그런데 새끼가 너무 많으니까 젖을 못 먹는 새끼도 있었다. 두 살(만 한 살)이 된 나는 방에서 나와 마루를 지나 토방에 내려섰다. 그리고 매우 높았던 돌계단을 바라보면서 바로 내려가면 앞으로 넘어질 것 같아 한 계단 한 계단 옆으로 기어서 마당으로 내려가 젖을 못 먹는 새끼들을 차례로 어미젖을 짜서 먹였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새끼도 있었지만, 어미 개는 새끼들을 주물럭거리는 나를 물지도 않고 순하게 바라다보았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와 조부님이 비명을 지르시며 뛰어 내려와 나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가 씻어주셨다. 나는 강아지들이 보고 싶어 내려가려고 했지만 다시는 내려가지 못하도록 조부님이 지키셨다. 나는 아쉽지만, 마루에서 손만 흔들었는데 어미 개도 늘 나를 바라보면서 멍멍대며 꼬리를 흔들어댔다. 어렸었지만 지금도 이 기억이 생생하다.

 

 

2. 집안은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조부님과 아버지께서는 대를 이을 아들을 기다리시다 딸이 태어나자 처음엔 예뻐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내 머리를 깎으러 오시는 아버지를 피해 막 도망가다가 부엌으로 숨으려고 했지만, 그 어린 것이 몇 발이나 가겠는가! 바로 잡혀서 아버지에게 머리를 깎였다. 그 어린 것이 무엇을 안다고 안 깎이려고 안간힘을 썼는지? 3대 독자에 아들이 없던 아버지는 아마도 나를 아들처럼 만들고 싶으셔서 머리를 깎으려고 하셨을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이 봉초를 피웠는데, 담뱃대에 넣어서 피우는 잘게 썬 담배를 말한다. 하지만 부잣집에서는 궐련을 피웠다. 아버지께서는 기계를 들여다 궐련을 만들어 피시고 지인들에게도 나누어 주셨다. 세 살(만 두 살)이던 나는 아버지가 하는 걸 눈여겨 봐뒀다가 아버지가 안 계실 때 똑같이 만들어 조부님과 어머니께 드리니 깜짝 놀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또 궐련을 만들어 놨다가 학교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께 드리니 아버지도 나를 높이 쳐들고 너무너무 좋아하셨다.

내가 다른 애들은 오줌도 못 가릴 때 대 소변을 혼자 다 처리한 것은 물론이요, 한번 보면 무엇이든 척척 해내자 집안은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또 딸을 낳으셨다. 어머니도 우시고 다들 서운해하시는데 나는 여동생이 그저 예쁘기만 했다.

 

3. 모함으로 피난길에 오르다

 

1950년, 민족의 비극인 6·25 사변은 행복했던 우리 가정을 고통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영전되어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를 탐내던 사람이 아버지가 반란군과 한패가 되어 반란군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는 누명을 씌워 그 자리를 빼앗았다.

아버지는 인정이 많으셨던 분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늘 사랑으로 도와주시는 자상한 분이셨다. 낮에는 일하시고, 밤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돈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셔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덕망이 높은 분으로 존경을 받으셨다. 특히 사람들 이발을 무료로 다 해주셨는데 그 당시는 이발소가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돈이 귀해 이발하기가 어려울 때였다. 아버지는 이발 기술을 습득하고 머리 깎는 바리깡 기계를 구입하여 항상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다가 제자들뿐만 아니라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면 더럽고 지저분한 거지일지라도 스스로 먼저 다가가 이발을 해주셨다. 그러던 중 6·25가 났는데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중에 반란군에 가담한 사람들도 그것을 가지고 터무니없는 모함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때는 전쟁 중이라 어떤 해명도 소용이 없었기에 그로 인한 아버지의 충격은 대단히 크셨다. 반란군 이발을 해줬다는 모함으로 인해, 큰 부자였던 아버지는 집과 세간조차 다 버리고 이불 한 채와 돈이 가득 든 가방 하나만 가지고 우리 다섯 식구를 데리고 피난을 가야만 하셨다.

 

4. 외가댁으로 피난을 가다

 

아버지는 경찰에게 잡히면 안 되니 먼저 숨어야 하셨다. 조부님은 지게에 이불과 돈 가방을 얹고, 그 위에 만 세 살 된 나를 태우고는 예전에 살던 큰 기와집이 있는 고향으로 출발하셨다. 어머니는 아기를 낳은 지 한 달여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어린 동생을 업고 광주 풍향동에서 나주 봉황면에 있는 친정까지 33km의 먼 길을 걸어서 가셨다. 자궁에서 계속 흘러내리는 피가 신발에 고여 가다가 뿌리고 가다가 뿌리면서 가셨다.

그런데 부잣집인 큰외가에 도착하니 외할머니가 계시는데도 외숙모가 시누이인 어머니를 발도 딛지 못하게 문전 박대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먹지도 못하고 기진맥진해 찾아온 어머니는 젖도 못 먹은 아이를 업은 채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 후 작은외숙이 쓰러진 어머니를 일으켜 데려가셨다.

조부님은 나만 지고 다니셔도 힘드셨을 텐데, 그 연세에 3일간이나 잡숫지도 못하고 지게에 나와 이불과 큰 가방까지 짊어지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러나 고향에는 이미 반란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부님은 발걸음을 돌려 할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조부님의 어머니가 계신 외가 마을을 찾아가셨다.

그런데 조부님은 행여 내가 떨어질세라 지신의 어깨에 나를 새끼로 묶어 둔 바람에 잠들면서 새끼에 얼굴이 자꾸 쓸렸다. 나는 아프면 깨고, 아프면 깨고 했는데 나중에는 내 코와 얼굴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아파 눈물이 났지만, 할아버지가 걱정하실까 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울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게 왔으나 외갓집에서 받아주지 않자 조부님이 많은 돈을 내놓으니 그때야 큰외갓집 문간채에 살도록 해주었다.

문간채에서 살게 된 우리 가족은 쌀을 구하지 못해 밥값으로 많은 돈을 주고 외갓집 신세를 졌다. 아버지도 오셔서 함께 했는데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게 되신 아버지께서는 시골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모아 한글은 물론 한문까지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 당시 이발을 못 해 머리가 긴 사람들과 지나가는 거지까지도 불러 이발해 주셨다.

 

5. 아버지의 행방불명

 

많은 사람을 이발해 주다 보니 이발 기구가 금세 다 닳았다. 1951년 3월 10일, 영산포 장날, 아버지는 이발 기구도 사고 바람도 쐴 겸 장에 다녀오겠다며 나가셨는데 그길로 소식이 끊어졌다.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조부님과 어머니, 외가 가족들까지 나섰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경찰서에 잡혀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는 아버지를 모함했던 사람이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 날까 봐 두려운 나머지 또다시 아버지를 영산포 경찰서에 반란군 앞잡이라고 고발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자 경찰은 돈을 갖고 오면 빼내 주겠다고 해 돈을 갖다주자 “아무래도 윗분까지 손을 써야 하겠다.”라고 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한 번만 더 돈을 주면 꼭 풀어 주겠다.” 하고 약속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

하룻밤만 더 자면 아버지가 풀려 날것이라는 희망은 산산이 깨져버렸다. 그날 밤 반란군들이 경찰서를 습격해 불이 나는 바람에 아버지의 행방조차 알지 못한 채 더는 알아볼 방법조차 없게 되었다.  

 

6. 화폐 교환

 

그런 와중에 정부의 조치로 화폐개혁이 단행되었다. 우리도 새로 나온 돈으로 바꾸어야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 헤매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교환을 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 교환하지 못한 돈을 들키면 부정한 돈이라고 큰일 난다고들 했다. 그리하여 그 많은 돈을 작은외숙의 네 칸이나 되는 집 지붕 용마름 밑에 두껍게 깔고도 많이 남아서, 나머지를 큰외갓집 두엄 속에 묻었다. 어렸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가 슬피 우시자 나도 어머니를 따라 울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외숙의 도움을 받아 그 돈을 묻으며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돈을 하나도 쓰지 못하고 남김없이 다 묻어서 썩혀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무엇에 비길 수가 있으랴. 그동안 어머니께서 하신 고생이 떠올라 눈이 촉촉이 젖어온다. 땅을 파고 독 속에 묻어 놨더라면 어머니가 그 고생을 안 하셔도 되었을 텐데…. 그때 돈을 몰래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나중에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고향에는 반란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남편의 행방은 알 길 없었으며, 시아버님을 모시고 두 딸까지 보살펴야 했으니 그런 어머니에게 남겨진 것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깊고 깊은 절망감뿐이었으리라.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안고 꺼억꺼억 우셨다.

이것 또한 주님의 예비하심이었기에 세월이 지난 지금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랑 받은 셈 치고, 또 동생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고 셈 치며 아름답게 봉헌해보지만, 그러나 가슴이 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7. 돈 잃고 조부님마저도 총살당하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 아버지 잃고, 돈과 집과 세간도 다 잃자 외가에서는 밥 한 그릇도 주지 않았다. 조부님께서는 “가족이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한다.”라며 반란군이 득실대는 산중 고향마을 소작인에게 맡겼던 보리를 수확하러 가셨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조부님을 찾기 위해 삯꾼과 함께 그 깊은 산중에 가셨는데, 반란군이 총을 들이대자 함께 간 사람은 도망가고 어머니는 ‘만약 돌아가셨다면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라는 일념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산속을 헤매다 반란군들을 여러 번 만나셨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라며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그럴 때마다 죽음의 압박감을 느끼신 어머니께서는 ‘그 어린 것들을 한 번만 더 보고 올 것을….’ 하시며 두고 온 자식들 생각에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리셨다. 하지만 조부님 찾는 걸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한 번은 반란군들이 또 총부리를 들이대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이고, 사모님! 이 무서운 곳에 웬 일이십니까?”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아버지의 제자였다. 어머니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경찰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총살을 당하셨습니다.” 하고 그간의 사정을 알려주었다.

어머니께서 ‘남편의 제자가 어느새 반란군이 되다니….’ 하고 생각하시는데 그는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면서 “죽은 사람들을 모두 저 구덩이에 넣었으니 찾기 힘들 것입니다. 목숨이 위험하니 빨리 내려가십시오.” 하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새 옷을 지어 드렸으니 옷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하셨다.

그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곳에 가본 즉 옷을 다 벗겨 구덩이에 넣었고 시체들이 거의 부패하여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죽더라도 시아버님 시신은 찾아야 한다.’라는 일념으로 그 속을 뒤졌다. 우리 아버님과 조부님은 키가 아주 크셨다 한다. 어머니는 시신들이 뒤엉켜 썩고 있어 누가 누군지를 잘 몰라 한없이 울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찾다가 기어코 키가 큰 시신 가운데 할아버지를 찾아내어 보자기에 싸 들쳐 매고 와서 장사를 지내 드렸다.  

 

8. 동생 순덕이도 가고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고, 동생은 두 살이었다. 어머니가 조부님 찾아 헤매며 장사를 지내는 동안 어린 동생 순덕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다리에 심한 화농까지 겹쳤다. 그러나 나도 어렸고, 먹을 것도 없으니 동생을 무척 사랑했던 나도 어떻게 도와줄 도리가 없었다.

외갓집에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아무도 돌봐주는 이가 없어 다리의 상처는 더욱 악화되어 그 자리에 파리가 알을 까 구더기가 우글우글하였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너무 불쌍하고 끔찍하여 눈물이 앞을 가린다. 결국, 동생 순덕이도 아버지와 조부님을 따라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슬피 울며 큰이모님과 함께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가 혼자 돌아오셨다. 내가 “순덕이는?” 하자 “순덕이는 이제 저세상으로 갔단다.”라고 하셨다. 내가 “저세상이 어딘데? 빨리 저세상에서 순덕이 데리고 와, 빨리 순덕이 데리고 오란 말이야!” 하자 “순덕이는 죽었어.” 하셨다. 그래서 내가 “눈뜨고 있었는데…. 죽지 않았는데, 어디에 두었어! 응?” 하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품으로 달려들자 어머니는 나를 안고 말없이 울기만 하셨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 하염없이 울었다. 내 동생 순덕이는 너무나 순하고 예뻐서 이름도 ‘순덕’이라고 지었다 한다. 그런 자식을 당신 손으로 묻고 왔으니 어머니의 눈물은 그냥 눈물이 아니라 갈가리 찢기는 아픔이고, 애끓는 피눈물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어린것을 가슴에 묻으셨으리라.

 

9. 남편을 따르자니 자식이 울고

 

이제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다. 어머니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 땔감조차 없는 썰렁한 방에서 신세를 한탄하시며 “우리 함께 죽어 버리자.”라고 하실 때, 철부지인 나는 불안한 마음에 울면서 어머니의 치마끈을 놓을 줄을 몰랐다.

목숨이 무엇인지, 죽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때 내가 죽기를 바라셨다. 나 때문에 죽지도 못하시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받은 충격으로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린 어머니께서는 어린 딸을 굶길 수밖에 없는 처지에다 살아갈 길이 막막하지만, 남편을 따르자니 자식이 있어 목숨을 끊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10. 다리가 너무 아팠지만, 미륵이 데려갈까 봐

 

나는 4살 때 어머니를 따라 20Km나 떨어진 발산마을 친척 집에 가야 했다. 그 산길은 어린 나에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나는 업어 달라고 했다. 무거운 나를 업기 힘드신 어머니와 언니와 어른들이 산을 가리키시며 “업어 줄 수는 있는데 업고 가면 저 미륵이 너를 데려간단다. 그래도 좋으냐?”라고 하셨다. 나는 미륵이 진짜 데려갈 줄 알고 “아니, 아니! 나 걸어갈 거야! 걸을 수 있어!” 하고 걸었더니 함께 가시던 어른들이 웃었다.나는 그 모습에 더 씩씩하게 걸어갔지만, 점점 더 다리가 너무 아파 한참 후에 주저앉았다. 어머니가 업어준다고 해도 미륵이 데려갈까 봐 쉬었다가 걸었다가 했는데 어머니가 “이제 미륵이 안 보이니 업혀도 된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혹시 미륵이 안 보이더라도 갑자기 나타나 나를 데려가면 어머니와 헤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끝까지 버티고 걸어갔다. 어른들은 “쪼그만 게 고집이 대단하다.”라고들 하셨다. 그 후로도 나는 한번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가 보지 않아도 기어코 해냈다. 어린 시절부터 평생 나를 봐오신 두 이모님과 어른들은 “그것이 네 천성”이라고들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