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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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머니께서 장사를 시작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 솜씨가 좋고 잘하시는 어머니는 딸을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셨다. 그러다 딸의 미래를 위해 장사를 하기로 맘먹고 유일한 재산인 한 채 있는 이불을 뜯어 솜을 다시 타 그 솜을 물레에 돌려 실을 만들었고, 그 실로 베를 짜 무명천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장사 밑천을 하여 먼 오지까지 다니며 천 장사를 시작하셨다. 이불이 없어져 우리는 덮지도 못하고 그냥 잠을 자야 했다. 그런데 어린 나를 데리고 먼 곳을 걸어 다니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나는 작은 외갓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12. 반란군은 물러갔지만

반란군들은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는데 그들이 옷이며 옷감이며 무엇이든 다 가져가고 불을 질렀다. 사람들이 옷만은 입어야 하니 어머니 천 장사가 무척이나 잘 되었다. 어머니께서 번 돈은 작은외숙이 높은 이자로 빚을 놓아준다고 하셨는데 그때의 이율은 반년에 100%였다 한다. 그 당시 ‘장리’라고 춘궁기인 봄에 돈이나 곡식을 꾸어주면 가을에 추수하여 두 배로 갚던 때였다.

어머니는 과부이기에 타지에는 안 가시고 시댁 고향인 다도면 친척들에게만 다니셨다. 원래 조부님과 아버지께서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고 사셨던 터라 그들도 모두 어머니를 좋아하며 잠도 재워주고 편의를 봐 주었기에 장사하기가 쉬워 많은 돈을 벌었다. 어머니는 한 번 나가시면 3~4일 만에 들어오셨는데 낮에는 베를 매고, 밤에는 그 실로 베를 짜고 잠잘 시간도 없이 쉬지 않고 일을 하여 많은 돈을 버셨다.

그러던 중, 작은외숙이 이자를 놔준다던 어머니의 돈을 자신의 사업 밑천으로 다 써 버리고 우리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슬픔은 더욱 심해져 갔고 그 분풀이를 내게 하셨다. 어머니는 화가 나 매를 들면 그 매가 부러져야만 그쳤고, 그러고 나서 피가 나는 상처를 싸매 주며 나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우셨다.

 

13. 배가 고파서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밤, 내 마음도 추웠다. 어머니는 큰외갓집 마당에서 베를 매는데 외갓집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어린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쪼그리고 앉아 “어머니, 나도 배고파. 밥 먹고 싶어.”라고 했다가 네 쪽으로 가른 마디가 뾰쪽한 대나무 조각으로 피가 나도록 맞았다. 나의 울음소리에 방에 있던 식구들은 열려있던 문을 일부러 “꽝”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외할머니도 계셨기에 어머니는 ‘애가 많이 울면 밥이라도 좀 챙겨주지 않을까?’ 하고 때리셨는데, 오히려 문소리를 크게 내어 닫아버리니 어머니는 나를 더 많이 때리셨다. 어머니는 멍들고 피가 나는 상처들을 닦아주며 어린 것이 불쌍해서 우시고, 나는 아파서 울었다. 딸에게 밥 좀 얻어 먹이려다 죄 없는 어린 자식을 때려야 했던 어머니의 그 마음은 어땠을까?

 

14. 셋방살이의 시작

어머니께서는 나를 작은외갓집에 맡겼다가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할 수 없이 어린 나를 데리고 두 곳으로 셋방살이를 다니면서 장사를 하셨다. 한번 나가면 3~4일 후에나 돌아오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마음은 늘 아프셨다.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먹을 밥을 미리 해놓고 가시지만, 거의 굶으며 쥐가 있는 방에서 어머니를 홀로 기다리고 있는 딸이 너무 가여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작은외갓집에 딸을 맡기자니 과격한 외숙의 성격과 딸을 놀려대는 외사촌들 때문에 마음이 걸리고, 장사를 안 하자니 외숙이 돈을 다 써 버렸기에 안 할 수도 없었다.

 

15. 어머니 화가 풀리실 때까지 맞아드리자      

내가 잘못한 일이 없어도 어머니는 화가 나시면 아무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나를 때리셨다. 그중에 가장 아팠던 것은 네 쪽으로 자른 대나무였다. 네 쪽으로 자른 대나무 마디의 안쪽은 매우 뾰족했는데 그쪽으로 사정없이 때리면 살이 파이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피가 나고 아파도 나는 도망가지 않고 어머니의 화가 풀리시도록 그대로 다 맞았다.이모님은 피를 흘리면서도 맞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제발 도망이라도 좀 가거라.”라고 하셨다.

나도 너무 아프면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어머니가 나 아니면 어디다 화풀이를 하시겠는가? 나를 때리심으로 모든 화가 가라앉는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래, 어머니 화가 풀리실 때까지 맞아드리자.’ 하고 그 호된 아픔을 사랑받은 셈 치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면서 참았다. 다 때리고 나신 어머니는 딸의 다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주며 또 우셨다.

어느 날 아랫동네 할머니께서 “이 사람아!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때리는가? 때리고 나면 분이 풀리는가? 제발 죄 없는 어린것 그만 때리고 재혼이라도 해서 새롭게 시작하는 게 어떤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재혼의 ‘재’ 자도 제 앞에서는 꺼내지 마세요.” 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준동 댁이나 철야 댁(어머니처럼 6·25로 인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돼 내 나이의 딸이 하나씩 있었음)은 시부모나 가족들이 있지만, 자네는 그런 가족도 없으니 홀가분하게 재혼하면 되지 않겠나?” 어머니는 “아닙니다. 가족이 아무도 없으니 나는 우리 조상들과 선영(조상의 묘)을 지켜야 해요. 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재혼 안 합니다.”라고 하시자 “그러면 저 어린것을 그만 좀 때리게. 안쓰러워서 못 보겠네.” “안 때리려고 굳게 마음먹는데 나도 모르게 매를 들게 되네요.”라고 하며 대화를 주고받으시다가 슬피 우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때 일이 생각나면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으셨다. 그리고 다음 날 나를 보시면 “내가 착한 너에게 왜 그랬을까이. 그거 생각나서 엊저녁에도 한숨도 못 잤다야.”라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 저 괜찮아요. 어머니가 그렇게 엄하게 키우셨기에 오늘의 제가 있잖아요. 하느님께서 어머니를 통해서 맷집을 먼저 키워주셨나 봐요.”라고 하면서 서로 마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16. 다섯 살 때 헛간에서 있었던 일

내가 태어난 다도면 연봉골에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가까운 준적골 친척 집에 갔다. 그 집은 가족이 많았다. 나와 동갑내기도 있었는데 그 애가 “좋은 곳이 있다.”라며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헛간이었다. “여기가 뭐가 있는데 좋은 곳이냐?”라고 했더니 “이 속에 들어가면 좋은 곳이 있어.”라고 하여 나는 ‘뭐 좋은 것이 있나 보다.’ 하고 따라 들어갔다.헛간 깊숙이 들어간 그 애는 “옷을 벗어봐.”라고 했다. “왜 옷을 벗냐?” “그런 거 있어. 빨리 옷 벗어. 나도 옷 벗을게.” “나 옷 안 벗을래.” “옷 벗어야 해.” “왜 옷을 벗냐?” “남자와 여자가 하는 거 있어.” “야, 그러면 너희 누나랑 해라.” “식구하고는 안 하는 거야.” “나는 안 할 거니까 다른 사람하고 해.” 하고 나오려고 했는데 그 아이는 벌써 옷을 벗고 나를 붙들려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 큰 소리로 “야! 하지 마!” 하고 뿌리치며 나오자 밖에서 어르신이 “너희들 거기서 뭐 하냐?” 해서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리 어머니도 너무나 놀라서 나를 붙들고 우시는데 그 집 식구들은 “어린것들이….” 하고 웃기만 했다.

나는 처녀가 되어서도 남자 옆에만 있어도 아기가 생기는 줄 알고 버스를 탈 때도 벌벌 떨 만큼 바보처럼 순진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바보 같던 나를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지켜주셨음을 이 글을 쓰면서 절감한다.

 

17. 안집 아저씨가 가르쳐준 노래

군대에 갔던 안집 아저씨가 휴가를 나왔다. 여섯 살인 내가 부끄러워서 숨었더니 “아가, 이리 와 봐, 나 무서운 사람 아니란다.”라고 하였다. 내가 머뭇거리자 건빵 한 봉지를 건네주면서 “어쩌다가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가 그런 참극을 맞았단 말인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밥을 못 먹어 배가 고팠기에 처음 보는 그 과자가 너무 먹고 싶었지만, 장사를 나간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머니가 돌아오셨을 때 함께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는 다시 장사를 나가셨는데 아저씨는 “낮에도 방에 쥐가 있으니 혼자 어떻게 자느냐?”라며 주인집 부부와 안방에서 같이 자자고 해서 함께 잤다. 나는 주인집 식구들과 자면서 쥐가 없어 너무나 좋았다. 다음 날, 아저씨는 나를 품에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혀놓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딱 한 번 가르쳐 주고 다음 날 귀대했다.

아저씨가 계셔서 따뜻한 봄날 같았던 시간도 잠시, 나는 또다시 쥐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외롭고 쓸쓸했지만, 아저씨가 가르쳐준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가사 하나하나가 다 떠올라 불러보니 할 수 있었다. “한 많은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에, 어젯밤 이슬비에 목메어 우는구나, 떠나가신 그 옛님은 언제나 오나, 기나긴 한강 줄기 끊임없이 흐른다.”

나는 커서도 노래는 이것밖에 몰라 누가 노래 부르라고 하면 이 노래를 하곤 했는데 커서 생각하니 너무 우스웠다. 이 노래를 들어본 이들은 모두 의아해하며 ‘그 아저씨는 어린아이에게 왜 이런 노래를 가르쳐 줬을까?’ 하고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나는 ‘떠나가신 그 옛님’을 ‘떠나가신 아버지’로 생각했다. 그 집 가족은 내게 너무 고마운 분들이라 은인으로 생각하여 평생 잊어 본 적이 없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들에게 뭐라도 해드리고 싶어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마음을 담아 해드리곤 했다.

 

18. 번데기가 먹고 싶고, 어머니 곁에 있고 싶었지만

 

우리 어머니는 동네에서 무엇이든 잘하기로 유명해서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많은 일을 척척 해내셨다. 하루는 누에를 많이 키우던 어느 분이 어머니께 누에고치에서 실을 빼내는 일을 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서 물에 누에고치를 넣고 물레질을 하셨는데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그 일을 하셨다. 배가 고팠던 1950년대에 그 일을 하면 배고픈 동네 아이들이 냄새를 맡고 다 모여든다. 누에고치에서 실이 빠져나오면 번데기가 나온다. 그러면 서로 받아먹으려고 아우성이다. 나는 어머니가 장사를 나가시니 늘 함께할 수 없어 그때라도 옆에 있고 싶었지만, 딸인 내가 거기 있으면 나에게 먹여주실 것이기에 ‘다른 아이들이 나를 얼마나 부러워할까?’ 하고 번데기를 먹은 셈 치고 그들이 먹도록 자리를 피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에게 먹이고 싶어 하셨지만, 딸의 마음을 아시고 일이 끝나면 나를 안아주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셨다. 그럴 때면 먹는 기쁨보다도 사랑받은 기쁨이 더 좋았다. 그들은 먹고 싶은 것을 먹어서 좋고 나는 받고 싶은 사랑을 받아서 좋았다.

 

 

19. 어머니와 함께 죽으러 가다

어머니는 밥을 해놓고 장사를 나가셨는데 나는 배가 고파도 쥐가 방에 들락거려 밥을 먹기 싫었다. 그때 누군가 떡을 조금 줘서 먹었는데 그 뒤로 이상하게 몸도 으슬으슬하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물조차 안 마셨는데도 계속 토하기만 하는 것이었다. 나흘 만에 돌아오신 어머니가 “왜 아무것도 안 먹었냐?”라고 물으셨다. 몸에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누가 떡 줘서 먹었다고 하면 어머니가 떡 먹고 탈이 났다고 누가 줬냐고 하실까 봐 괜찮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이 걱정돼 “혼자 있으면서 먹지도 못하니 어떻게 하느냐?”라며 우셨다. 어머니가 밥을 지어 함께 먹으려는데 먹는 대로 다 토했다. 나중에는 물만 마셔도 토했다. 어머니께서는 이 약 저 약을 구해다 먹이셨는데 입으로 들어간 것은 모두 다 토하니 별별 방법을 다 써보셨다.

가마솥 밑의 숯검정을 긁어서도 먹여 보고, 밥에다 약을 섞어서 먹여 보고, 상추에다 싸서 먹여 보고, 과자와 함께 꿀꺽 삼키게도 하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다 토했다. 토하는 게 너무 힘들어 안 먹으려 하니 때리셨는데 맞으면서도 토하여 옷이 엉망이 되면 어머니는 울면서 내 옷을 갈아입히고 또 때리셨다. 너무 아팠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때리시도록 그냥 있었다.

그러기를 한 달이 다 되어도 어떤 방법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러다 애기를 놓치겠다. 영산포 의원한테라도 데려가 봐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의원한테 갔지만, 의원도 “이 아이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준비하셔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집에 와서 “너 때문에 내가 죽지 못해 이렇게 살고 있는데 네가 죽는다면 내가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우리 함께 죽자.”라며 축 늘어진 나를 씻기고 새 옷을 입히셨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씻으시더니 새 옷을 입고 샘가로 데려가셨다. 죽는 것이 뭔지 잘 몰랐던 나는 처음엔 어머니가 하시는 대로 보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샘에 빠져 죽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소리쳤다. “어머니! 나 안 죽고 싶어!” “그러면 먹을래?” “응, 먹을게.” 그렇게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시면서 “넘어오려고 하면 다시 꿀떡 삼켜야 한다.”라고 하셨고 “응!”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입에 넣고 삼키자마자 웩하고 토하니 똥물까지 넘어왔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웬 똥물이 나온단 말인가? 어머니는 그런 나를 또 때리셨다.

그날은 외갓집 제사였다. 제사에 다녀오신다고 가신 어머니가 새벽에 오셨다. 옛날에 그렇게 아플 때 제사음식 먹으면 ‘지골 맞아 죽는다.’라고 했으나 어머니는 ‘기왕에 죽을 아이 이 떡이라도 먹여 보자.’ 하고 떡을 가지고 오셨다. 나는 그 떡을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이게 웬일인가! 토하지 않고 먹을 수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죽을 바에는 빨리 죽어라.’ 하고 먹인 떡이 죽어가는 아이를 살린 것이다. 그 이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건강하게 잘 지냈다.

 

20. 펜치로 생니를 뽑다

우리 셋집 옆에 어머니 오촌 동생이 살았는데 그 집에 영자라는 딸이 있었다. 12월 어느 날, 늘 혼자였던 나에게 그 애가 같이 놀자고 해 그 집으로 가서 놀고 있는데 작은외숙이 오셨다. 나는 무서웠지만 인사하고 그냥 놀았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외숙은 펜치를 들고 나에게 와서 입을 벌리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무서워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 어린 것이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는가?

외숙은 나를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넣어 꼼짝 못 하게 하고 억지로 입을 벌려 펜치로 어금니를 빼려고 했다. 내가 몸부림을 치며 오랫동안 실랑이를 하니 입안 곳곳이 다 패였다. 외숙이 흔들리지도 않던 어금니를 억지로 뽑으니 살점까지 함께 떨어져 나왔다. 외숙은 살점이 붙은 이를 지붕 위에 휙 던지고 사라졌다. 나는 계속 피를 흘렸지만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울면서 계속 피를 흘렸고,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피를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다음 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장사하고 사흘 만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딸을 보고 목 놓아 우셨다. 나는 이빨 뽑힌 것을 말하지 않고 넘어져서 입속을 다쳤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