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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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비틀거리다가 쓰러진 셋째 아이

 

그렇게 순하고 얌전히 잘 놀던 셋째 아이가 두 돌이 지난 어느 겨울에 갑자기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면서, 눈까지 빨개져 비실거리더니 쓰러졌다.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1학년짜리 아들이 “엄마, 이것 봐.”라고 해서 달려가 보니 남편이 혈압이 높았을 때 사놓았던 100정짜리 혈압약 병이 열려 있고, 그 약이 쏟아져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아이가 이것을 먹지 않았을까?’ 하고 수를 세어보니 혈압약을 36알이나 먹어 버린 것이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먹어야 하는 그 약은 어른도 반 알씩만 먹어야 하는 독한 약인데 두 돌이 지난 어린아이가 그 독한 약을 많이도 먹었으니 어떠했겠는가! 나는 걸을 수도 없는 상태였기에 친정어머니가 업고 병원에 데리고 가실 때 아이는 이미 어깨와 다리 힘이 다 빠져 축 늘어져 있었다. 어렵게 낳은 아이가 이대로 죽는가 싶어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다.

아이를 본 의사가 “아이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의사는 깜짝 놀라며 아이의 혈압을 재었지만, 혈압이 전혀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더니 의사는 집에 데리고 가서 잠이나 재우라며 아무런 조치 없이 집으로 돌려보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마음만 졸이며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는데, 아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무책임한 의사를 탓하기 전에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야 된다는 일념으로, 출장 가서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수소문하여 찾아 차를 불러 아이를 데리고 영암 병원으로 갔다.

그렇게 죽어가던 아이는 5일 만에 퇴원할 수 있었고, 병원에서는 “아이가 살아난 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입니다.”라고 하였다. 죽을 뻔한 아이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슬펐다. 엄마가 건강하여 집안일을 잘 보살폈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아이들이 물건을 찾다가 약병이 내려져 있었는데, 내가 미처 치우지 못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셋째 아이가 병뚜껑을 열고 약을 먹었던 것이다. 단칸방의 어려운 살림, 아무리 잘살아 보려 노력해도 부딪히는 현실들은 꿈 많았던 나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었던가.

 

332. 추한 꼴을 남편에게 보이기 싫어요!

 

발에 무좀인 듯한 물집들이 생겨 약을 바르고 병원에 가서 치료해도 소용이 없었고, 한약방에 들러 약을 지어 발랐는데도 전혀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계속 심해지기만 했다. 퉁퉁 부어 전혀 걸을 수조차 없었기에 친정어머니와 남편의 부축을 받아 어렵게 영암 대성병원으로 갔다. “제 발이 왜 이런가요? 약을 쓰는데도 더 심해져요.”라고 하자, 의사는 자세히 보더니 “우리는 알 수가 없으니 큰 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해보아야겠습니다.”라고 하며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병이 들어 발만 아픈 게 아니라, 물 변도 잘 보지 못하여 관장을 하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관장기가 항문에 들어가지를 않아 띵띵 부은 항문이 얼마나 아팠는지 견딜 수가 없어 울곤 하였다. 병원에서는 그런 나를 진찰대에 올려놓고 항문에 주사 세 대를 놓아 벌려보려다 안 되니, 다시 다섯 대를 놓고 벌려도 안 되어 또 일곱 대의 주사를 놓고 나서야 겨우 항문이 벌려 의사는 어머니와 남편을 불렀다.

주사라면 어떤 주사라도 잘 맞았는데, 그 주사만큼 아픈 주사는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그때의 심정은 ‘어떤 수술을 하더라도, 혹은 불 속에서 살을 태우는 아픔이라 하여도 그 주사만큼 더 아프지는 않으리라.’ 하고 생각될 만큼 많이 아팠다. 주사를 놓을 때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밖에서 기다리던 어머니와 남편은 너무 안타까워하며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가슴이 탔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잘 견디고 인내하며, 어렵게 아이들을 낳으며 고통스러웠어도 단 한 번도 소리를 질러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와 남편이 들어오는 모습에 놀라 큰소리로 “안 돼요!”라고 했더니 남편은 얼른 나갔고, 어머니는 들어오셔서 나의 아픈 곳을 보게 되었다. “왜 남편을 못 들어오게 한 것이오? 병이 너무 심하게 되어버렸으니 남편에게 보입시다.”라고 하는 의사의 말에 나는 “이렇게 추한 꼴 보이고 싶지 않아요. 보이고 사느니 차라리, 보이지 않고 죽는 편이 낫겠어요.”라고 했다. 이렇듯 나의 완강한 뜻에 따라 결국 남편에게 추한 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죽음 앞에서도 남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너무도 원치 않아 보이지 않았으나, 훗날 주님께서 나의 고통을 통해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며 드러내길 원하셨을 때는 기쁘게 “아멘.”으로 순명하였다.

 

333. 사형선고를 받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나 혼자서 또다시 영암 병원으로 갔다. “어떻게 좀 해주세요, 더는 못 견디겠어요.”라고 하며 꼭 살아야 한다고 애원하는 나에게 의사는 “아줌마,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요. 더는 어떻게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큰 병원에 가도 소용이 없을 테니 집에 가서 맛있는 것이나 많이 잡수시고 푹 쉬세요.”라고 했다. 그들은 이제 치료도 해주지 않고,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그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암이 저렇게 항문과 발가락까지 다 퍼지도록 가족들은 이제까지 큰 병원에도 데려가지 않고 도대체 뭣들 한거야?”

나는 안쓰럽게 바라보는 의사들의 눈빛과 그 말을 듣고서야 내가 치료될 수 없는 심각한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우둔한 사람, 나는 왜 진작 느끼지 못하였을까?’ 의사들은 꼭 살아야 한다고 애원하는 내게 차마 암이라는 이야기를 직접하지 못하고, 말기가 되어 항문까지 퍼져버린 암을 간접적으로라도 알려주기 위해 항문을 벌려 가족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암이 말기가 되면 여러 곳으로 전이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발까지 그렇게 무섭게 전이되고 있었다니…. 죽음이 나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와 남편과 자식들 때문에라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부림쳤던 고통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이제 그 모든 피나는 노력들도 죽음이라는 어둠 속으로 묻혀서 사라지게 된다는 참담한 현실 앞에 세상은 온통 암흑이었다. 나는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었다.

이미 치료도 필요 없게 되었고 손도 쓸 수 없는 시한부 인생! 얼마나 생명이 연장될지 모르지만, 가족들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동안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까지도 가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죽을 목숨 아낌없이 불사르겠다.’라고 다짐하고 병원을 나오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억제할 길 없이 무너지는 마음,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꿈 많던 어린 시절의 나의 삶을 뒤돌아보며 저 높은 창공에 나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묻어 보냈다. 오! 슬프고 처절한 나의 인생 장막이여!

 

334. 나는 시골이 좋아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나는 도회지로 가지 않고, 방은 비좁고 어렵더라도 안집 노인 부부와 함께 오순도순 살다가 이곳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계속해서 여기서 살 순 없어요?” “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여기는 외진 곳이니 누가 오려고 하지도 않고, 모두가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니 괜찮아.”라고 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나는 혹시라도 갑자기 발령이 나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하자, 남편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발령을 낼 때 본인의 의사를 묻기 때문에 그때 내가 계속 있겠다고 하면 돼.”라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군 소장님께 미리 말씀드려요.” 했더니 “안 해도 된다니까.” 했다. 만약에 발령이 난다면 안집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도 슬프고, 돈도 없을뿐더러 아이들이 넷이나 되니 도회지에서 살려면 생활도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넷이나 된다고 시골에서도 야만인이라고들 하였는데, 도시로 나가게 되면 셋방 얻기도 힘들 것이고 그렇다면 독채라도 얻어야 할 텐데 그럴 만한 형편이 못 되었기에 걱정부터 앞섰지만, 남편이 그렇게 말하니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335. 오래오래 시골에서 살고 싶었는데

 

그런데 며칠 후 “사모님, 나주로 영전된 것 축하합니다.” 하고 영암군 농촌지도소 소장님의 비꼬는 듯한 흥분된 전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너무 놀란 나는 “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운동해서 나주로 가게 되었으니 축하받을 일 아니에요?” “소장님, 운동이라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우린 나주로 안 가요, 며칠 전에 우리는 여기에서 오래 살기로 약속도 했어요. 무엇인가 잘못되었겠지요.” “발령이 이미 났는데도 그래요?” “네? 언제요?” “내일이요.”

“소장님, 저 놀리지 마세요. 그럴 리가 없어요, 내일 날짜로 발령이 났다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잖아요.” “나주로 가는 것 정말 몰라요?” “소장님, 우리 정말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안 가게 좀 해주세요, 네?” 하고 사정하듯이 말하자 소장님은 그제야 정말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들은 말에 많이 놀랐지만, 그 말이 거짓말 같지가 않아 군 지도소에 계시는 직장 동료에게 물었더니 사실이라고 하였다.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냐고 하자 “우리도 오늘 공문이 와서 모두 다 놀랐어요, 영암에서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운동해서 간다면서요?”라고 했다. “윤 계장님도 그 말을 믿으세요? 우리는 여기에서 오래 머물러 살기로 며칠 전에 이미 그이와 약속했어요. 우리 나주로 가면 안 돼요, 어떻게 좀 안될까요?” “그럼 김 소장이 정말 모른단 말이오?” “예, 몰라요.” “그럼 어서 김 소장을 찾아서 말해 보세요.”

그래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수소문하여 어렵게 남편을 찾아, 남편과 함께 군 소장 님을 찾아가 애원하다시피 간청하였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공기 좋고  물 맑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남편이 “소장님, 나주로 가지 않도록 좀 선처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김 소장, 정말 운동하지 않았소?”라고 하셨다. 남편이 “소장님, 제가 자청해서 일을 많이 벌여 놓고 어디를 간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지만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어떻게 하겠나, 발령장이 이미 와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제일 믿었던 자네가 운동해서 가게 되는 줄 알고 처음엔 몹시 화가 났었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니 자네는 축하받을 일 아닌가? 축하하네.”라고 하셨다.

“소장님, 죄송합니다. 일만 많이 벌여놓고 떠나게 되다니요.” 하고 남편도 많이 애석해하였다. 그날 우리가 나주로 가게 된 경위를 소장님으로부터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나주군 소장님이 원장님에게 부탁하여 남편을 나주로 발령 나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영암 소장님이 본인에게 의사를 물어보겠다고 말하자 나주군 소장님은 본인이 원했다고 거짓말까지 하여 발령 시기도 아닌데 본인도 모르게 자기 곁으로 부른 것이었다. 전에 나주에서 영암으로 발령이 나서 갈 때는 승진이 되어 갔었는데도 노른자를 영암에서 빼 내갔다고 했는데…. 이렇게 우리를 속여서 데려가다니! 그때가 1980년 3월쯤이었다.

시골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던 소망마저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내 생애 끝자락에서의 작은 소망이었는데…. 다른 곳으로 발령 나지 않도록 미리 말을 전해놓으면 좋겠다는 나의 간청에도 괜찮다며 무시했던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으나 미안하다는 말 들은 셈 치고 봉헌해야 했다. 그 어떤 것 하나도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었지만, 나의 운명이려니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는가….

 

336. 외숙은 친정집을 불태워버리고

 

1980년 3월쯤 남편이 갑자기 나주로 발령이 났다. 아이들이 넷이나 되는 우리가 나주로 이사 가려면 독채를 얻어야 하는데 그럴 돈이 없었다. 나는 고심 끝에, 남편이 출퇴근하기 좀 힘들겠지만, 공기 좋은 시골의 친정집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나는 암이 온몸에 다 전이되어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기에 100% 황토로 지은 시골집에서 요양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집을 정리하기 위해서 친정집으로 가셨는데 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알고 보니 작은외숙이 집이 비어있는 틈을 타 몰래 우리 집 지붕에 얹은 슬레이트를 팔고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집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한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져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6·25 때 할아버지는 나와 큰 돈 가방을 함께 지게에 지고 피난 나오셨다. 그 큰 가방에 가득했던 고액권은 화폐개혁 때 바꾸지 못해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지만, 아버지가 남겨 주신 것이기에 간직하고 있었고, 돈보다 훨씬 소중한 아버지의 유품들이 그 가방에 다 들어있었다. 그동안 어머니가 그걸 지키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집을 불태우면서 집안에 고이 간직하던 그 가방도 함께 불에 타서 없어진 것이었다.

명필로 소문났던 아버지가 쓰신 붓글씨와 책들, 노트, 내가 어려서부터 써왔던 일기와 사진 등 여러 가지 중요한 것들이 다 들어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소중했던 모든 것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작은외숙의 작은 욕심 때문에 다 사라져 버렸다. 나의 물건들은 ‘원래 없던 셈 치고, 있는 셈 치고’ 봉헌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유품만은 ‘없어졌어도 있는 셈 치기’에는 완전 역부족이었다.

‘오, 내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의 얼굴 대신 보며 그리움을 달랬던 유일한 아버지의 유품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다니! 작은외숙은 어머니와 나에게 언제쯤이나 고통을 주지 않으시려나?’ 가슴이 미어지는 이 아픔은 또 한 번 어머니와 나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러나 시한부인 나, 이대로 쓰러지지 않고 또는 좌절하지 않고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또다시 최선을 다하리라. 우리 모녀에게 계속 고통만을 안겨주신 작은외숙을 용서하며….

 

337. 헤어지기 싫어 많은 사람이 울다

 

영암 직장에서 나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가기 원치 않는 우리를 부르다니…. 삶의 마지막을 오래오래 이곳에서 살기를 원했지만 이렇게 가야 하니 내 가슴은 답답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부모님 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을 떠나는 것도 너무 가슴 아팠다. 사랑과 정에 굶주렸던 나는 오랜만에 정을 나누고 살게 되어 기뻤는데, 그것마저 허락되질 않았다.

자신감 때문에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은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어찌하겠는가? 국가 공무원의 부인이 남편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야지. 가장 섭섭해하시며 슬퍼서 우시는 분은 안집 노부부와 영농 단원들이었다. 밤이면 공부를 가르치고, 낮이면 일을 가르쳐주며 때론 아버지 같고 때론 형님 같아 많이 의지하고 따르던 소장이 자기들 곁을 떠나가게 되니 그들의 아픈 마음도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떠나야 하는 아쉬운 마음, 보내는 섭섭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4년 6개월을 이곳에서 살면서 아이들을 낳았고, 네 번을 이사했던 슬픔과 기쁨의 뒤안길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정이 든 곳을 할 수 없이 떠나야 하는 마음은 아프기만 하였다.

 

338. 애들 스무 명이 되어도 좋으니 교회만 다니지 말라!

 

나주에서 방을 얻으러 다니는데 아이들이 너무 많다고 아무도 방을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안집과 두 집이 살 수 있는 좋은 집이 있었는데, 주인은 나를 보자마자 “새댁이 맘에 드네. 우리 집으로 이사 와서 함께 사세.”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넷이나 있어요.”라고 했더니 “아이들 스무 명 있어도 좋으니 교회만 안 다니면 되네.”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왜냐하면, 시골에서는 교회를 다녔지만, 나주에서는 성당에 다니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내 주위의 여러분들이 방을 얻지 못해 쩔쩔매는 나를 보고 아이가 둘만 있다고 거짓말해서라도 일단 방부터 얻어 보라 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 사실대로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장 문제가 된 아이들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성당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방부터 얻기로 했다. 전세 돈이 없어 큰이모님께 또 70만 원의 빚을 얻어 겨우 방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집은 방 두 개짜리에 우물이 없어 먼 곳에서 펌프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기에 불편함이 있었지만, 집 안에 있는 땅을 우리에게 조금 나눠주어 남편이 애지중지하던 꽃나무들과 분재를 기를 수도 있었고, 건강에 좋은 신선한 채소를 직접 가꾸어 먹을 수도 있으니 시장에 다니지 않아도 되어 식비를 줄일 수 있어 여러모로 참 좋았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과 얼마나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개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 불렀다.

너무 마음이 아파 “왜 개 이름을 예수라 부르게 됐어요?”라고 하자 주인아주머니는 “아이고, 말도 마.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우리 아들들이 몇 번이나 호되게 당했어. 교회에서 이름 있다는 사람들인 목사와 장로들에게 어찌나 많이 당했던지. 도둑이나 불량한 사람 잡아 오라고 하면 교회에서 아무나 잡아 와 봐, 그럼 그 사람이 바로 불량한 사람이고 도둑이라는 거여.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 꼴도 보기 싫어 개 이름을 예수라 부른 것이라네.”라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 “아주머니, 안 그래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사람도 있고, 또 저런 사람도 있겠지요.”라고 했더니 “아이고, 그 이야기 고만 하세이.” 하고 정색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렇게도 많은 상처를 준 교회의 원로들 몇몇 때문에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이 판단 받으며 오히려 예수님께 못을 박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너무 안타까웠다.

 

339. “일어나 집에 가야지.” 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먹지도 못하고 토하기까지 하면서 온몸이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누워있었다.  작은외숙모님이 화장품 대리점을 하고 있던 외사촌 남동생 길영이의 밥을 해주시기 위하여 와 계셨는데, 밤이 되었는데도 아파서 누워있는 나에게 녹두죽이라도 끓여주신다며 방으로 들어오셨다. 작은외숙모님은 아파서 누워 몸부림치는 나의 배를 어루만지시며 “남묘호랑개교, 남묘호랑개교….” 그 말을 반복해서 자꾸 하시니 내 머리가 터질 듯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나에게도 그 말을 소리 내어 외라고 하며 부엌으로 나가시자마자 나는 도저히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 혼미해져 가는 정신과 가누기 힘든 몸을 이끌고 무작정 밖으로 향했다. 목적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갔는데 도착한 곳은 철 창살문으로 굳게 닫혀있는 성당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열 수 있는 작은 문이 어디엔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저기 만져 보니 예상대로 작은 문이 있어 그 안으로 손을 넣어 문을 열 수 있었다.

그 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예수님! 예수님! 불쌍한 저를 당신 품에 빨리 데려가 주세요. 빨리 데려가 주세요, 네? 저는 모든 이에게 도움과 사랑을 주고자 살아왔고, 어떤 고통 중에서도 제 한 몸 희생해서라도 내 이웃이 화평하기만을 바라며, 어떤 모진 고통과 모욕을 받더라도 기쁘게 감수하고 인내하며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많은 어려움 중에서도 저 하나만을 위하여 수절하고 힘들게 살아오신 불쌍한 어머니의 여생을 편하게 모시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남편과 아이들을 위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미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그 희망과 소망들을 이루지도 못한 채 이제는 제가 숨만 쉬고, 살아있는 것이 모든 이의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진정 당신이 저를 잘 아시오니 살려주시든지, 데려가시든지 빨리 어떻게 좀 해주세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에요. 흑흑흑.”

이제까지 참아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전이 되어버린 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짐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마지막 남은 삶까지도 가정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기에 평소와 다름없이 최선을 다해 가정을 돌보며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혹시 모를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버티어 온 내가 예수님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목 놓아 큰 소리로 운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울다 실신하여 쓰러진 내 귓가에 “일어나 집에 가야지.”라고 하는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누구일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찾아 살펴봐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성당 제대 반대편에 걸린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340. 집에 돌아와 보니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거동하기도 힘든 사람이 소리 없이 갑자기 없어졌으니 남편은 너무 걱정스러워 내가 갈 만한 곳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한다. ‘혹시 어디서 죽은 것은 아닌가?’ 싶어 오토바이를 타고 다리 밑이랑 저수지, 영산강, 풀밭, 사람이 죽어있을 만한 모든 곳을 다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하여, 가족들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안절부절못한 채 울고 있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집 밖에서도 다 들릴 정도였다.

내가 집에 들어가자 남편은 “여보, 살아와 주어서 고마워. 당신은 살아야 해, 꼭 살아야 해. 당신이 이렇게 된 것은 이 못난 남편 때문이야. 이제 잘할게, 정말 더 잘할게.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던 10배, 20배, 아니 그 이상으로 잘해줄게, 응?” 했다. 나는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었다. “당신은 나에게 너무 잘해주었어요, 부족한 아내 때문에 당신이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와요. 미안해요, 저 아니었더라면 더 좋은 사람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여보, 아니야. 내가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죽었을 목숨이오. 당신의 그 지극한 정성과 사랑 덕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오. 천사 같은 당신이,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 당신이 절대 죽어서는 안 돼. 여보, 힘을 내요. 이제는 내가 당신을 지켜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남편은 울먹였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나 죽지 않아요, 당신이 내 곁에 있는 이상 나 죽지 않아요. 꼭 살아서 당신과 아이들을 데리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불쌍한 우리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거예요. 한 생을 나만을 위하여 아낌없이 바쳐 오신 어머니의 가슴에 무덤을 만들 수는 없어요.” 우리는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던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남편,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을 남겨두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함께 가자고 나를 찾아온 ‘죽음’이라는 녀석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남편의 그 깊은 사랑에 다시 힘을 얻어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나의 삶을 바꿔놓고야 말리라고 굳게 다짐하면서 어머니와 가족 모두를 위하여 내 한 몸 아낌없이 바쳐 불태우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아직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다시 살아날 생각으로 희망을 꿈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