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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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수술했던 병원으로

 

그 당시에는 일요일에도 진료하였기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픈 몸을 이끌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3개월 이상을 걸어서 병원에 다녔다. 그러나 겉만 아물었다가 다시 터져 피고름이 나는 게 계속되니 동네병원의 치료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영암 병원으로 갔더니 수술했던 병원에 가봐야지 더는 다른 곳에서 치료를 계속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며 어쩌면 다시 수술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내가 광주에서 수술한 대학병원에 가려면 누가 도와주어야 했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그동안 3개월이 지나가도록 가지 못했다. 친정어머니가 계셨지만 나 대신 네 아이를 돌보셔야 하니 함께 갈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 더는 이곳에서의 치료는 소용이 없고 다시 수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완전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니, 친정어머니께서는 어쩔 수 없이 7개월 된 아이를 업고 세 살 된 아이는 걸리며 우유 보따리, 기저귀 보따리 들고,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짜리 네 아이를 데리고 나를 부축하여 병원으로 향했다. 그 길은 정말로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 있는 딸을 반듯하게 기르시기 위해 잘살아 보라고 늘 엄하게 가르치시던 우리 어머니. 나 하나 때문에 수절하시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셨는데, 시집보낸 지 한참이 되어서도 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 아팠다. 출가시킨 딸이 건강할 때는 시댁만 생각했고, 아파 누우니 시댁의 도움은 조금도 받지 못한 채 그 뒤치다꺼리는 친정어머니 혼자서 도맡아야 했으니….

우리는 어렵게 버스를 타고 전에 수술했던 광주 대학병원으로 갔다. 대학병원의 수속은 또 얼마나 복잡한가. 온몸이 아파 꼼짝 못 하는 딸과 아이들 넷을 데리고 그 모든 일을 해야만 하시는 어머니, 나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는 것은 어떤 셈 치고로도 극복하기 힘들어 차라리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참고 봉헌해야 했던 그 눈물은 아마 보이지 않는 피눈물이었으리라.

 

322. 울면서 애원하고 간청했던 대가

 

진찰 결과, 장이 완전히 유착되어 수술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했다. 계속해서 먹지도 못할뿐더러 피고름이 나오고 있으니, 아마 장이 썩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소리를 듣게 되니 무서웠다. 나는 애절하게 울면서 애원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또 수술할 수 없으니 꼭 나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치료해 달라고 간청했다.

의사 선생님은 딱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더니 알았다면서 어떤 약을 발라 보라고 주고, 먹는 약도 다시 처방해 주면서 “이 약을 바르고 먹어도 소용이 없으면 하기 싫어도 살기 위해서는 수술을 해야만 되니, 수술 준비해서 다시 오도록 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의사가 시킨 대로 주사약을 사서 맞고, 병원에서 지어 준 약을 열심히 먹고 발랐다.

수술한 지 4개월이 넘어서야 겨우 수술 자국이 크게 흉이 지면서 아물게 되었다. 배에서 계속 흐르던 피고름만 멎어도 한시름 놓인 듯싶었다. 언제나 나에게서 고통이 멀어지려나?

 

323. 시외조모님 모셔오다

 

95세 되신 시외조모님이 며느리와의 갈등 때문에 견디기 어려워하신다고 했다. 내가 시댁에 들어가 살 때 시외조모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모든 일과를 마치고 할머니께 가서 말동무도 해드리고 안마도 해 드릴 때면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아났냐?”라고 하시며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그 할머니셨는데 불도 때주지 않는 추운 방에서 겨울을 지내며,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고 구박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시어머니에게서 듣게 되었다.

나는 이제야 조금씩 회복하고 있기에 여전히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홀대당하시는 할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보고 싶은 아버지 모시는 셈 치고 모셔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시어머님께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와주세요, 제가 모실게요.”라고 했다. “그래도 되겠냐?” “그럼요.” 그래서 시외조모님이 바로 다음 날 우리 집에 오시게 되었다.

추운 방에서만 지내시다가 갑자기 따뜻한 방에 지내시게 되니 처음에는 숨을 헐떡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시더니 얼마쯤 지나니 괜찮아지셨다. 그리고 처음 오셨을 때는 그전에 제대로 잡수신 게 없어서 허기가 져서 그랬는지 밥도 두 그릇씩 잡수시고, 빵도 해 드리면 혼자 거의 다 잡수시는 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밥도 한 그릇씩 잡수시고 차츰 우리 집에 적응이 되어 가셨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나의 몸 상태가 그런 일을 하기에 도저히 불가능했지만, 몸이 아무리 아프고 고달플지라도 사랑으로 대할 때 불가능이 없음을 체험하게 되었다. 내가 고통스러워 죽는다고 하여도, 내 사랑이 병들은 영혼 육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 생각하며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할머니의 아픈 상처에 신약이 되어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직장 일에 더 충실한 남편이었지만 나는 모든 아픔을 숨기고 남편에게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며 “나의 몸이 으스러진다고 하여도 나는 당신 것입니다.” 하고 조금도 티 내지 않고 늘 미소와 사랑으로 대했다. 그리고 내 몸을 가누기조차 힘이 들었지만, 배의 상처가 아물자마자 할머니를 모셔다가 할머니를 업어 드리고 주물러 드리고, 맛있는 것 해 드리며 사랑으로 보살펴 드리니 할머니는 금방 회복되셨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죄 많은 나를 이렇게 극진한 사랑으로 눈물 흘리게 하다니 너는 아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임이 분명해.” 하시며 내 손을 꼭 잡고 우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더니 아이들도 덩달아서 울었다.

 

324. 우리 집 앞에 쌓아놓은 주인집 나뭇단에 불이 나다

 

“불이야, 불이야!” 소리를 듣고 놀라 나와 보니, 우리가 사는 마당에 땔감으로 쌓아놓은 주인집 소나무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불을 가까스로 끄고 나니 주인은 소리소리 질렀다. 무슨 영문인 줄도 몰랐는데 그것은 나에게 쏟아지는 소리였다. 우리 아이들이 놀다가 자기네 소나무에 불이 난 것이니 변상을 해주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라고 하기에 나뭇값을 다 배상해주고 더 살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집을 헐고 대나무를 심으려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집을 없앤다.’라고 하니 어쩌겠는가. 또다시 집 없는 설움이 밀려왔으나 지체할 새 없이 나는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집을 보러 다녀야 했다. 도시 같으면 셋방도 많겠지만, 이사철도 아니었기에 시골에서 비어있는 방 얻기가 무척 어려웠다. 복덕방도 없는 시골을 무작정 돌아다니다 보니 좋지 않은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325. 남편의 쓰라린 고백

 

시어머님께서는 자신의 친정어머니가 우리 집에 계시니 더 자주 오셨다. 어느 날은 시골 할머님과 함께 오셨다. 그때 친정어머님도 계셔서 어르신들이 네 분이나 되었다. 자주 오시는 것은 좋은데 그럴 때마다 우리 친정어머니가 그분들 뒷바라지까지 하셔야 했기에 너무 죄송하고 마음이 아팠다. 어르신들 네 분, 아이들 넷, 모두가 잠든 밤중이었으나 남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에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을 때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들어왔다. 남편은 나에게 “여보, 할 이야기가 있는데….” 하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잠들어 있는 방에서는 이야기하기가 어려워 마루로 나왔는데, 걱정이 앞섰다.

직장 일이라 했지만, 밤에는 거의 집에서 자는 일이 없었으니 행여라도 ‘아이를 낳아 들어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것보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아이가 셋일 때와 넷일 때 굉장한 차이가 나는 것을 잘 알기에 그것이 가장 걱정이고, 두려웠다. 지금도 네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은데 남편이 이야기를 하자고 심각하게 말하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무슨 이야기인지 해보라 했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자, 설사 아이를 낳아온다고 하여도 어쩌겠는가. 나의 운명이라면 그것까지 받아들이고 죽는 그 순간까지 그이를 사랑하며 살아야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마음을 가다듬고 “말씀해 보셔요.”라고 했더니 남편은 “당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죽을죄를 지었소.” 하고 머뭇거리기에 “괜찮으니 무엇이든 말씀해 보셔요.”라고 했다.

그래도 말을 못 하자 “혹시 어떤 여자에게 아이가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 아니면 됐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하고 나는 괜찮다고 말했더니 남편은 그제야 여자 문제를 고백했다. “여보.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소.” 나는 그이가 너무나 안쓰러웠고, 측은하고 불쌍해 보였다. 나는 남편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나 괜찮으니 이제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 병은 나으면 되고, 돈은 벌면 돼요. 힘을 내세요. 당신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아파 있었던 나 때문이에요.” 하고 남편을 꼬옥 안아주었다.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여보, 고마워. 이렇게 착한 당신을 바보스럽게 생각했던 나는 천벌을 받아도 싸지. 천사 같은 당신의 그 마음을 나는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나의 잘못들을 보고도 안 본 척,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이모저모로 감싸주었는데도 이 못난 남편은 ‘무슨 여자가 저 모양이야, 질투도 없고 감정도 없는 바보 같은 여자야.’라고 생각하며 가정에도 소홀했으니 그동안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많이 아팠겠소?

피나는 노력으로 오직 남편을 위하여, 또 시댁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쉼 없이 일해 오다가 이렇게 많이 아프게 되었으니 그것은 모두가 이 못난 남편을 잘못 만난 때문이요. 다 내 탓이오….”라고 하였다. 남편의 고백에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새로운 삶을 약속했다. “여보, 나 이제 당신 외엔 절대로 곁눈질하지 않고 이제까지 못다 한 사랑을 열 배로 갚을게.”라는 그이의 말에 이제까지 참아왔던 10여 년 세월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326. 남편의 새로운 부활

 

그날 이후로 남편의 행동이 180도로 완전히 바뀌었다. 병원에도 오토바이로 태워다 주었고, 시장 보는데도 동행하면서 도와주며 가정을 돌보기 시작했다. 가정은 오랜만에 따뜻한 봄기운이 돌기 시작하여 아빠와 아이들의 화목한 웃음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은 아내를 그토록 사랑하여 마음은 늘 아내 곁에 있었지만, 생활이 그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으리라.

전에 잉꼬부부상을 마련해 주신 분들을 기억하며 그분들께도 감사를 드렸다. 남편 의 새로운 부활은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해주었고, 덕분에 나는 내 몸이 고달파도 고달픈 줄조차도 모르고 기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이 생김치를 좋아했기 때문에 겨울 김장을 하지 않고, 아무리 몸이 아파도 매일매일 배추 사 분의 일 조각을 내어 소금물에 담갔다가 식사할 때마다 바로 주물러 주면서 “하느님, 이 음식을 남편이 맛있게 먹게 해주세요.” 하고 나는 먹은 셈 치고 남편에게만 좋은 것을 주며 간구 했던 나의 작은 정성을 외면하지 않으셨나 보다 생각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가 했더니, 사랑의 메아리가 느지막이 이제라도 돌아왔구나. 이제는 소리쳐 부를 때 메아리가 빨리 돌아오도록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방을 얻으러 다녔는데, 몸은 힘들지라도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327. 쇠꼬챙이 같다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주인집 땔감에 불난 일 때문에 우리는 쫓겨나다시피 노인 부부가 사시는 집의 단칸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그 집으로는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 집 할아버지는 쇠꼬챙이 같아서 모두가 한 달도 못 채우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노인들을 워낙 좋아하였으므로 그 집으로 들어갔다.

많은 가족이 단칸방에서 살게 되자, 시외조모님을 다시 모셔가겠다고 하여 내가 할머니를 정류장까지 업어다 드렸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우리 집에서 떠나신 지 16일 만에 작고하셨다는 슬픈 이야기를 듣고 파란만장했던 할머니의 생애를 생각하며 울고 말았다. ‘집에 조금 더 계셨으면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을….’ 하는 생각에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세상을 떠나신 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좋은 곳으로 가시도록 기도할 따름이지 별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아버지를 잃고 겨우 사랑을 나누게 될 줄 알았던 시아버님마저 내 곁을 떠나셔서 허전하였는데, 아버지를 모시는 마음으로 안집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으로 마음 써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안집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사람들이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서 ‘혹시 아이들이 많아서 또 쫓겨나려나?’ 하고 걱정하며 갔더니 “색시, 방이 좁아 불편하지? 창고 하나 마련해 줄 테니 쓰도록 하게.”라고 하셔서 너무나 놀랐다.

아이들이 많아서 방 얻을 때마다 항상 어려움을 겪었는데, 쇠꼬챙이 같다던 할아버지가 이렇게도 자상하시다니! 할아버지는 곧바로 목수를 불러다가 부엌 바로 앞에다 마음대로 편하게 쓰라고 간이 부엌과 창고를 만들어주셨다. 누가 그를 쇠꼬챙이라고 했던가?

 

328. 그렇게 좋으신 분을 쇠꼬챙이라니

 

내가 몸이 약하다고 안집 할아버지 내외분이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봐주셨기에, 다섯째 시동생이 합격할 때까지만 농사를 지어 도움을 주시겠다던 친정어머니는 오랜만에 안심하시고 농사일에 전념하실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다정한 할아버지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고, 할아버지 역시 외출할 때만 빼고는 늘 셋째 아이를 데리고 일도 하시고 놀아주기도 하셨다.

밭에 나가서 일하실 때는 아이를 데려다 세발자전거나 유모차에 앉혀 놓고 과자도 사주시고, 간식도 손수 만들어주기도 하셨다. 그렇게도 많이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난 기분으로 우리는 서로 따스한 정을 나누며 살게 되었고, 몸은 불편하더라도 오랜만에 사람 사는 기분이 들었다. 남편의 마음도 부족한 나에게로 향하였으니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지혜롭고 얌전한 세 살 된 셋째 아이가 실수로 끓는 라면에 손을 데어 사정없이 울어댔다. 소주에 손을 담가주니 울음을 그쳤다. 업고 잠을 재웠는데 손이 소주에서 나오기만 하면 또다시 울기에 안아주려고 하니 더 크게 울어 어찌하지 못하고 계속 업어서 달래고 있었다. 외출했다가 12시경이 되어 집에 들어오신 주인 할아버지 내외분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놀라 우리 방으로 건너오셨다.

아이의 덴 손을 보시고 감자를 찧어서 싸매주니 그제야 아이는 완전히 울음을 그쳤다. 두 분이 아이를 데리고 가시면서 그동안 수고했다며 좀 쉬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눈물이 났다. 평생 이런 사랑을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직장 일과 청소년들을 가르치기 위해 집에 들어오지 못하였지만, 마음은 가정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내 마음은 흐뭇하기만 하였다.당연히 내가 할 일을 한 것이었지만 수고했다는 그 한마디는 나의 텅 빈 가슴을 채워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시부모님의 그 많은 빚보증뿐만 아니라 시어머님이 빌리신 돈을 갚기 위해서 또, 시동생들 학교 보내느라 우리 아이들은 과일 하나도 제대로 사주지 못하고 그렇게 고생하며 헌신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큰 며느리니 네가 다 해야 한다.”라고 당연시하며 냉대와 무시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가족도 아닌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주시는 할아버지를 쇠꼬챙이라니!

 

329. 여섯째 시동생의 졸업식에 갔더니

 

여섯째 시동생이 대학교를 졸업한다고 하여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나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은 무리였으나 다섯째 시동생을 서울로 학교 보내느라 여섯째 시동생에게는 더 많은 관심을 가지지 못해 언제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기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갔다.

여섯째 시동생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대학등록금을 내어준다던가, 그것이 어려울 땐 학자금 융자 이자와 원금을 시어머니께 전해드려 납부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시동생은 전액 장학금도 받았고, 반액 장학금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둘째 시누이까지 세 사람이나 대학생이었기에 어렵게 어렵게 학교를 다녀야 했던 시동생이다. 졸업식이 끝나고 시동생은 형수가 이 모자를 써야 한다며 기어이 나에게 학사복을 입히고 학사모까지 씌우는 것이 아닌가.

“어머님께 해드려야 된다.”라고 하여도, “모든 것 형수님 덕분으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고,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었으니 꼭 형수님이 하셔야 한다.”라고 하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준 시동생의 마음에 보람을 느껴 더욱 잘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사랑이 불타올랐다. 부디 도련님의 앞길을 밝혀 주소서.

 

330. 큰딸이 학교에서 효행상을 받아오고

 

어느 날, 큰딸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어쩌면 그렇게 착한 딸을 두었냐며 연락이 왔다. 큰딸이 쓴 일기를 보고 놀란 담임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께 보여드렸고, 모든 선생님에게 공개되었는데, 교장 선생님을 비롯하여 그 일기를 읽은 모두가 울고 말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큰딸은 학교에서 효행상을 받게 되었고, 선생님들께 많은 귀여움을 받게 되어 기쁘기도 했지만, 쌀이 없어 아이들까지 굶겨야 했던 일들 등 우리 생활이 공개되어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딸이 그런 일기를 쓴다는 것도 몰랐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도 일기를 훔쳐보다가 울고 말았다.

 

* * * * * 흐림

우리 엄마는 늘 아파 누워계신다. 나는 엄마가 불쌍해서 엄마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엄마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웃는다. 엄마는 우리들 모르게 우시면서 눈물을 감추시고, 혹시라도 우리들이 볼 때면 눈에 티가 들어갔다고 하신다. 이런 엄마에게 기쁨을 조금이라도 더 드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동생들도 잘 돌보고, 집안일도 더 잘 돌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 * * * * 흐림

오늘 빨래할 때는 무척 힘들었다. 특히 아빠의 민방위복을 빨 때는 개천에 물이 적어서 자꾸만 모래와 잔돌들이 옷에 묻어 들어와 헹구기가 힘이 들어 낑낑대고 있을 때, 저쪽에서 빨래하던 아줌마가 와서 헹구어 주셨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 * * * * 맑음

오늘은 엄마가 더 많이 아프신 것 같다. 나는 엄마가 숨겨놓은 빨래들까지 모르게 꺼내어 다 빨아서 널었더니, 엄마가 보고 놀라워하시며 “아니, 저런 옷들까지 어떻게 빨았니? 어린 네가 빨기 힘든 것들인데….” 하시며 나를 꼭 안아주시고 “엄마가 아파서 네가 고생이 많구나, 엄마가 빨리 나아야 할 텐데….” 하시며 우셨다. 나는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더 노력하겠다고 결심했다.

 

* * * * * 맑음

오늘은 어떤 거지 아줌마가 딸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는데, 우리 엄마는 옷이 없으시면서도 거지 아줌마에게는 엄마의 옷을 주고 그 딸에게는 우리들의 옷을 주셨다. 또 있는 밥을 다 먹이고, 쌀도 조금 있는 것 다 털어서 그 거지에게 주어 보내신 뒤에 우리들에게 “얘들아! 우리는 할머니가 쌀을 가지고 오시면 밥을 먹을 수 있지만, 거지들은 누가 주지 않으면 먹을 수 없으니 배고파도 조금만 참자, 응?”이라고 하여 우리는 배가 무척 고팠지만, 거지에게 베푼 엄마의 사랑을 우리들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엄마 말씀을 따르기로 하여 배고픔도 참았다.

 

* * * * * 흐림

엄마는 외할머니가 쌀을 가지고 오실 것이라고 있는 쌀을 다 털어서 거지에게 주셨는데, 외할머니가 오시지 않아 우리는 3일 동안이나 거의 먹지 못하고 굶게 되었다. 그런데 3일째 되던 날, 엄마 친구인 순경댁 아줌마가 햅쌀을 찧었다고 먹어보라고 가져와 우리는 3일 만에 맛있는 밥을 먹게 되었다. 그 밥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줌마가 너무 고마웠다.

우리가 배고픈 것을 아시는 것처럼 쌀을 가져다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 엄마는 배고픈 내색을 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배고픔을 감추었는데도, 우리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줌마가 쌀을 가져오신 것이다. 다섯째 삼촌을 가르쳐야 하니, 삼촌이 고등고시에 합격할 때까지만 잘 참고 지내라고 엄마는 당부하셨기에 삼촌이 빨리 합격하기를 우리는 기다린다.

 

* * * * * 맑음

오늘은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이가 자기 집에 가자고 해서 갔더니 맛있는 음식들을 내놓았다. 그런데 앓고 누워계시는 엄마 생각과 동생들 생각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왜 안 먹느냐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물이 났다.

집에 와보니 엄마는 일어나서 일하고 계셨다. 나는 얼마나 반가운지 엄마를 붙들고 “엄마, 인제 괜찮아?”라고 했더니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는 동생 기저귀를 엄마 몰래 빨아오다가 돌부리에 넘어져 무릎에서는 피가 났지만, 엄마가 걱정할까 봐 모르게 숨겼다.

이렇게 써 내려간 초등학교 4학년짜리의 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이 밖에도 엄마를 울리는 글이 많았다. ‘그래, 딸을 봐서라도 나는 죽을 수 없다. 더 힘과 용기를 내어 최선을 다해 병마와 싸워 이겨보자.’ 그래서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더 잘 사는 가정을 꾸려 보리라고 마음을 굳게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