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제목 없음
   

목차 보기 1

목차 보기 2

목차 보기 3

목차 보기 4

 

   
   

 

 

 

 


341. “다섯째 합격했단다.”라고 하는 소리에

 

나는 너무 힘든 고통 중에 있었지만, 모든 인류를 위하여 온몸을 다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또 나약한 인간이면서도 전쟁터에서 수류탄과 총알을 자기 몸으로 막아 동료를 구하는 희생정신을 가진 병사를 생각하며, 새로운 희망을 갖고 흐려져 가던 마음을 다시 새롭게 다잡아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주에 계신 시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다섯째가 합격했단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너무나 기뻐 눈물이 났다. 그동안 시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도 쉬지 못하고 고생하며 지내왔던 지난날들이 떠오르며 이젠 한시름 놨다고 생각하니 전화기를 든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소리 내어 울기만 했다.

아무도 힘이 되어주는 이 없이 나 혼자 도와주어야 했기에, 이번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학교 보내면서 빚진 돈을 모두 홀로 감당해야 했던 나로서는 얼마나 걱정이 되었는지 모른다. 더 어려웠던 것은 친정어머니께서 아픈 딸과 우리 아이들 넷까지 돌봐주시면서도 우리 집 생활이 어려우니 도움을 주시기 위하여 힘들게 시간을 내어 시골에 자주 가셔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점이었다. 편히 잘 모시기는커녕, 못난 딸의 시동생들까지 가르치기 위하여 쉴 새 없이 갖은 고생을 다 하시니 내 마음은 항상 죄송하기만 했다.

그동안 친정어머니께서 힘든 중에도 싫거나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도움을 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이제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니 공부하느라고 애쓰던 시동생이 편하게 되어서 좋고, 매달 돈 걱정하는 남편의 부담을 덜어서 좋고, 친정어머니도 더는 힘들게 농사짓지 않으셔도 돼서 좋았다. 내가 돈 벌어서 가르치려고 했지만, 죽어가는 고통 중에 있어 돈을 벌 수가 없었기에 난감했었는데 나의 마음 부담이 없어져서 좋고 모두가 부담감에서 해방되어 좋았다.

 

342. “다섯째 합격했으니 아파트 사줘야지?”

 

시어머님은 전화를 끊고 바로 나주에 내려오셨다. 우리는 너무 좋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어머님, 축하드려요.” 하고 인사하고 방으로 모시고 들어왔다. 시어머님은 방에 들어오시자마자 대뜸 “다섯째가 합격했으니까 이제 작은 아파트라도 사줘야지?”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쩔래?” 또 물어보셨다.

“예? 우리가 아파트를 사줘요?” “그래야지, 고시 합격하면 다 아파트 사준다고 하더라.” 시어머님의 말씀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우리는 전세방 얻을 돈도 없는 형편인데, 그걸 다 알고 계신 시어머님께서 어떻게 아파트까지 사주라고 하실 수 있을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남편을 바라보자 남편은 조용히 “동생은 이제 걱정 안 하셔도 알아서 잘할 거예요.” 하고 말씀드렸지만 “그것 하나도 못 해준다고 그러냐?!” 하고 역정을 내시며 일어나시기에 붙잡았더니 확 뿌리치고 휭하니 가버리셨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저려와 아픈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아마 내가 건강했더라면 그렇게 서글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건강해서 돈을 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돈이 있었더라면 다섯째 시동생에게 아파트도 사주고, 시어머님이 원하시는 것 다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지 못하는 내 처지가 너무 마음 아팠다. 그동안 매달 보내는 돈도 그렇지만 시어머님은 종종 10만 원 또는 20만 원씩 다섯째에게 보냈다고 하며 나에게서 돈을 가져가시곤 할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데….그렇게 가져가시는 돈만 해도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는 참으로 힘에 겨운 큰돈이었다. 그 돈을 지금까지도 갚지 못하여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친정어머님이 부지런히 농사지어 갚아주시느라, 내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제대로 보살펴 주시지도 못하셨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감추고 어떻게 해서라도 시동생 합격할 때까지 잘 버티어 보자고 했었는데….

그렇게 시동생을 도와주느라 더 어려워진 살림 때문에 아이들에게 싱싱한 과일 하나도 제대로 사주지 못하고 상해가는 과일 싸게 사서 오려 내 먹이면서 싱싱한 영양가 많은 과일 먹인 셈 치고, 내 몸이 아파도 시어머님께 돈 해 드리다 보니 나는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고 시한부 인생까지 되었다. 아마 그 돈으로 진작 병원에 갔으면 내 몸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시어머님의 무리한 요구에 섭섭함보다도 아파트를 사주지 못하는 내 처지와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343. 안집 할머니의 전언

 

안집 할머니가 나에게 오시더니 “색시, 시아재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며?”라고 하셨다. “예, 시동생이 공부를 잘했어요.” 자개를 가르쳐 주고, 시동생 가르치려는 나를 도와준 친구가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옆에 있다가 “큰형수가 공부를 가르쳤대요.”라고 하였다. 나는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하게 귓속말로 그런 소리 하지 말라 했다. 안집 할머니는 “우메, 어쩔꼬. 근데 자네 시어머니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얘들은 조금 보태주고, 큰 것은 다 내가 했어라우.’ 그러데.”라고 하여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가 이사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런 불필요한 이야기를 다 하셨을까? 굳이 그렇게 말씀하심은 할머니에게 칭찬받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가르쳤다고 자랑이라도 할까 봐 먼저 말씀을 하신 것일까? 나는 그렇게도 힘들게 돈을 여기저기서 빌려 가며 학비를 대주면서도 단 한 번도 시동생들 가르친다고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시어머니께서 시동생에게 보낸다며 가끔 10만 원에서 20만 원씩 가져가신 돈을 시어머님 이름으로 시동생에게 보내셨든지, 아니면 시어머님이 쓰셨든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동생 셋을 가르치기 위하여 힘겹게 보낸 돈들은 이미 우리의 희생과 사랑으로 시어머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아낌없이 다 바쳤으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나는 ‘그래, 그러실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시어머님을 더욱더 사랑해 드리자.’ 하고 마음먹었다.

 

344. 죽는 그 순간까지 필사적인 사랑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키자

 

어느 날 영산포에 사는 시외사촌 형님을 만났는데 “자네 다섯째 시동생이 사법연수원에 간 것 아는가?”라고 해서 모른다고 했더니 사람들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흐응! 아니, 다른 사람도 다 아는데 큰형수가 얼마나 무심하면 그것도 몰라?” 하고  면박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우리에게도 연락 좀 해주지. 죽음을 불사하고 가르친 나는 모르고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면박을 받게 하는가?’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래, 바빠서 그랬겠지. 사랑의 말을 들은 셈 치자.’ 하고 봉헌했다. 얼마 후인 1월 1일 신정 때, 형제들이 시댁에 모두 모여 아침에 떡국을 끓여 먹었다. 다섯째 시동생이 일찍 서울로 가야 해서 나는 상을 치우며 “삼촌, 어떤 일 있으면 우리에게도 말해주면 좋겠어요. 삼촌이 연수원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나한테 가족이 그것도 모르냐고 하니까 좀 민망했어요. 이제 우리 물질을 떠나서 마음으로 서로 위하고 사랑하며 일치해서 살도록 해요. 알았죠?”라고 했다.

그러자 시어머니께서 내가 치우고 있던 밥상을 사정없이 엎어버리며 남편에게 “저 봐라. 저년이 네 아버지 안 계시니 저렇게 우리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한다. 내가 분해서 못 살겄네! 아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꼬?”라고 하시며 방바닥을 치며 우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놀라 가슴을 부여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전에 시어머니는 우리 큰이모님께 돈을 몇 번이나 빌리셨지만 한 번도 갚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해 다음에 갚겠다며 또 빌려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하신 돈도 모두 다 내가 갚아드렸다. 그럴 때마다 큰이모님은 “얘야, 너도 시어머니에게 할 말은 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날, 이모님이 하셨던 그 말씀이 생각나서 ‘그래, 시어머님이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으니 오늘은 말씀을 드려야겠다.’ 하고 처음으로 입을 뗐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어머니! 진정하세요. 제가 어떻게 어머님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하겠어요.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서로 일치해서 잘살아 보자고 한 것이에요.”라고 했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년 봐라, 저년 봐! 이제 시어미한테 대든다, 대들어!”라고 하시며 분이 안 풀려 방바닥을 꽝꽝 치셨다.

나는 곧바로 “어머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아무 소리도 안 할게요.” 하고 용서를 청했으나 계속 소리소리 지르며 신세 한탄을 하시니 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 왔다. 이제까지 수많은 것을 요구하셨어도 단 한 번도 거절치 않고 죽음을 불사하고 도와드렸건만….

내가 그렇게 울고 있어도 남편은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앉아 있었고 큰딸만이 나를 붙들고 슬피 울었다. 시어머니는 방에 계셨고, 나는 밖에서 울고 있었는데 막내 시누이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엄마, 올케언니 잘못한 거 없어. 엄마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라고 하니 시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랬냐?”라고 하셨다.

그때까지 내가 시댁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시댁 식구들이, 남편까지도 그 모습을 보고도 침묵을 지킨다는 것이 무척 서글펐다. 시어머니는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들에게까지도 천사처럼 잘 대해 주시면서도, 나에게만은 늘 서릿발같이 매서우셨다.

내가 아무것도 못 먹고 죽어갈 때, 나에게는 무심하시면서 이웃집 사람에게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주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가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했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 누구보다도 내 맘을 알아주어야 할 남편에게까지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기엔 너무 혹독한 아픔이었다. 그러나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그래, 내 생명 다할 때까지 필사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자.’라고 다짐했다.

 

345. 그렇게도 착하던 동생이 저세상으로 가다니

 

나의 삶은 늘 고통스러웠지만, 그런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기 위해 ‘눈물을 미소 뒤에 감추며’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슬픈 소식이 날아왔다. 그렇게도 착하던 작은외가의 동갑 남동생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럽고 놀라운 소식에 나는 슬퍼 한없이 울었다. 너무나 착한 동생이었는데 그렇게 쉽게 이 세상을 떠나 버리다니…. 그 동생과 나는 어려서부터 작은외숙에게 매를 자주 맞았는데, 특히 귀뺨을 많이 맞아 우리 둘은 늘 명태 찜질을 했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했기에 너와 나는 왜 이러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단 말이냐?’ 작은외숙은 아들이 둘 있었으나 작은아들만 편애하셨기에, 큰아들은 늘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친정어머니는 그 동생을 아들처럼 사랑하셨기에 충격이 너무 심하여 출상이 끝나고 집으로 오셨을 때 심장병까지 유발될 정도였다. 어머니는 집에 와서도 계속 중얼거리며 “내가 죽으면 네가 나를 염한다더니, 내가 너를 염하게 하느냐, 이놈아!”라고 하면서 우셨다.

마르지 않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던가. 딸이 말기암 시한부로 얼마나 살지도 모르는데 ‘친정 조카가 죽었어도 저 정도이신데, 딸이 죽으면 과연 어머니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빨리 내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조급해졌다.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께 동생이 죽은 이유를 들었는데 그 사연이 기가 막혔다. 동생이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총알 파편이 옆구리 쪽에 박히게 되었는데 빼내지 못한 채 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아파도 부모님이 ‘남묘호랑개교’를 믿어 병원에도 못 가게 막아 치료도 못 하고 그대로 방치한 채 그런 몸으로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큰외가의 큰오빠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월남전 때 입은 상해 후유증을 보상받을 수 있도록 서류를 작성해주었는데도 또다시 남묘호랑개교를 이유로 막는 바람에 서류조차 제출하지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때 그 오빠의 노여움도 대단했다. 그 서류만 제출했다면 동생이 평생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지낼 수 있는 경제적 보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는데 남묘호랑개교 때문에 그걸 포기하게 하다니 동생이 너무 불쌍했다. 사실 동생은 남묘호랑개교를 잘 믿지도 않았는데 남묘호랑개교를 믿는 부모님의 강요로 인해 아무리 아파 일을 제대로 못 해도 병원에도 못 가고, 보상도 못 받고 아픈 몸과 마음으로 혼자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사철에 농약을 살포하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도저히 따를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너무나 아파 기진하여 엉거주춤 기어가면서 “아버지, 오늘은 몸이 너무 아파서 못하겠어요. 내일 할게요.”라고 하니 “네 이놈, 그렇게 일도 못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어버려라.”라고 하자 동생은 “그래요,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것이 낫겠지요.” 하고 농약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외숙은 설마하니 죽겠냐며 그대로 한참 있었는데, 아들이 방에서 계속 나오지 않아 들어가 보니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외숙은 후회하며 땅을 쳐보았지만, 아들은 이미 죽어버렸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은 지 이틀 만에야 소식을 들은 친정어머니가 슬픔에 잠겨 서둘러 가보니, 오줌과 똥으로 범벅이 되었는데도 동생의 시신을 그대로 놔두고 남묘호랑개교 교인들이 모여 “남묘호랑개교.”만을 부르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기막힌 사정을 아신 어머니께서는, 농약을 먹고 얼마나 몸부림하여 온 몸에 오줌, 똥으로 범벅이 된 죽은 동생의 시체를 직접 다 씻어 염을 하시다가 심장병까지 유발되었던 것이다. 나는 불러도 대답 없는 동생을 향하여 속으로 부르짖었다.

‘점영아, 불쌍한 점영아! 어려서부터 그렇게도 열심히 살려고 몸부림치며 노력하던 네가 그렇게 가버리다니…. 세상이 불공평하고 사랑이 불공평하다고 슬퍼하면서도, 편애하는 아버지로부터 늘 소외당하면서도 동생을 사랑하고 아버지에게 잘하려고 노력하며 착하게 살더니, 사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길을 거침없이 택해버렸니? 건강한 사람이 어찌 너의 그 고통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 오죽했으면 그런 길을 택했겠니. 불쌍한 것, 유순이도 가더니 너도 이렇게 먼저 가버렸구나. 이제 한 많은 세상을 뒤로하였으니 나 때문에 행여 상처 받은 것이 있다면 용서해주고 착한 너의 그 마음에 부디 빛을 받아 고이 잠들기 바란다.’

 

346. 세상을 사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는가?

 

어느 날, 큰시누이와 그의 남편을 시댁에서 만났다. 대화 중에 시누이의 남편은 “세상을 사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은데, 왜들 그렇게 돈타령인지 원.” 하고 돈을 중요시하는 이들이 한심하다는 듯 말하여 내가 “그렇지만 돈도 필요해요. 돈이 없으면 꼭 해야 할 일도 못 하고, 많이 아파서 죽게 되어도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 죽어가게 되잖아요.”라고 했다. 한사코 돈이 필요 없다고 하는 시누이 남편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옛날의 나를 보는 듯했다.

결혼 전 남들이 돈이 있어야만 한다느니, 또는 돈이 없으면 살아가기 어렵다느니 할 때 나는 사람은 돈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더 중요하다며 돈의 중요성을 한사코 부인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여러분들은 살아가는 데 돈은 중요하다며 결혼 상대자로 돈이 많은 사람을 골라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나는 돈은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하며 마음만을 보고 가난하고 형제가 많은 곳을 택하였는데, 이제까지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

시누이 남편은 건축 회사에 다녔는데, 내가 시누이 집에 갔을 때 과일을 상자째로 두고 풍족하게 먹었지만, 우리 아이들은 낱개로라도 사 먹이지도 못하여 가슴이 얼마나 저렸던가. 그는 이미 풍족하게 살고 있기에 돈이 중요치 않다고 고집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아파서 죽게 되어도 돈이 없어 제대로 병원에도 가보지 못하고 혼자 견뎌야만 했는데 돈이 필요 없다니…. 세상은 정말 불공평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내가 돈이 있었더라면, 영암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할 때 바로 가서 치료받았더라면 나의 건강이 이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시한부 삶을 살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돈이 많은 사람과 행려자의 차이는? 누구는 돈이 원수라고 했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 병을 키워 지금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래, 아무리 돈 때문에 힘이 들고 고달파도 돈보다는 마음이 중요해, 돈은 있는 셈 치고 살면 되니까 말이야.’ 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347.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나의 병이 막바지에 이르게 되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무슨 방법이든 총동원하여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다 써봤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 때문에라도 죽을 수 없어 여러 사람의 권유로 마지막 방법이라 생각하고 시댁과 남편이 싫어하는 굿도 해보고 부적도 사용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누가 총각 점쟁이가 아주 꿰뚫어 본다고 하여 찾아갔더니 외출 중이어서 없었고, 누군가가 옆에서 그의 형은 총각 점쟁이를 가르쳤던 선생이니 한번 보라고 하여서 보게 되었는데, 굿을 하면 나을 수 있다고 하였다. 모든 것이 돈 문제가 대두되기에 그냥 나오려고 하는 찰나에 어떤 청년이 책을 들고 들어왔다.

‘오! 이 사람도 점 보러 오는 사람인가보다, 아직 젊은데 무엇이 그리도 답답한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대문으로 나오는데 그 청년이 “저어, 아줌마.” 하고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왜 그러세요?”라고 했더니 “아줌마는 수술을 할 때 배를 10cm쯤 쨌군요.”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의 수술 자리는 정확히 10cm쯤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줌마는 지금 발까지 암이 번지고 있네요.” ‘어머나, 세상에 이럴 수가….’ 나는 너무 놀라 온몸이 경직된 것 같았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보니, 그 사람이 바로 총각 점쟁이였다. ‘진짜 꿰뚫어 보네.’ 나는 너무 감탄하여 ‘이 사람이야말로 나를 살려줄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금성산 산신령에게 100일간 공을 드리면 살 수 있어요.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산에서 나오는 첫물을 떠서 바치고 공을 드려야 살 수 있어요.”라고 하였다.

‘나는 이제는 살길이 열렸구나.’ 생각했다. “30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특별히 아줌마는 20만 원만 내면 백일 간 함께 산에 가서 공 드려줄 테니 서두르시오, 서두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소.” 그 말이 틀림이 없는 것도 같았다. 병원에서도 더는 손 쓸 도리가 없다며 어쩔 수 없어 퇴원시켜 버렸고, 어떤 방법을 다 써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 곧 죽을 수 있다고 한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었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슬쩍 지나면서 본 나를 그렇게도 잘 알 수 있었다니…. 너무나 놀랍기만 하여 집에 돌아와 신이 나서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딸이 살아날 수 있다니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어머니께서 돈은 어떻게 해서라도 대주겠다고 하셨다.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한 나는 퇴근한 남편에게 말했더니, 남편은 너무 놀라 “여보, 정신 차려. 그것은 미신적인 행위야, 그런 것들은 마귀도 알아낼 수 있어. 절대로 그런 생각하지 마, 알았지, 응? 내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하고 나를 달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살아야 해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단 한 번만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꼭 한 번이에요. 내가 건강이 회복되어야 당신도 편할 게 아니에요. 이번만, 네?” 그렇게도 나를 다 알고, 친정집이 어떻게 생겼고, 밤나무, 감나무가 어느 쪽으로 몇 그루가 있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으니, 죽음을 앞두고 나약해진 나는 이성을 잃어 ‘내 병도 낫게 해주리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런 부탁을 한 것이다.

남편도 나를 살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것은 사이비 종교나 미신적인 행위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극구 반대하면서도,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부드럽고 자상하게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내가 알아봐 줄게.” 하고 나를 달랬다. 남편은 안타깝고 측은하여 어쩔 줄 모르는 눈길로 바라보며 삐쩍 마른 나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348. 그 사람은 사기꾼이며 강간을 일삼던 자

 

남편이 퇴근하여 급히 들어와 “여보, 당신이 말한 그 사람은 사기꾼이며 강간을 일삼는 자였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나의 볼에는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과연 내가 살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며 어떻게 알아냈냐는 물음에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라고 하며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그 사람은 예쁜 여자만 골라 그들의 약점을 알아내어 새벽에 금성산 산신령에게 공을 드려야 한다며 누가 옆에 있으면 부정 타니 혼자만 오라고 하여 겁탈을 일삼았다 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욕을 보이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으니 자기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여 많은 여자들이 병도 낫지 못한 채 봉변만 당했으며, 어떤 여자는 그로 인하여 산에서 자살까지 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이성을 잃어 가던 나는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암흑으로 빠질 뻔했는데, 남편으로 인하여 이번에도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였지만, 그것을 모르던 당시의 나는 왜 이렇게 무슨 일이 될 듯 하면서도 잘 안 되는지 가슴을 태워야만 했다.

 

349. 포도당 주삿바늘을 온몸에

시어머니와 시댁을 도와주느라 돈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병이 점점 깊어져 암으로 발전했고, 급기야 온몸에 전이된 암 덩어리가 항문 밖에까지 튀어나와 대변조차 볼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배를 뚫어 인공 항문을 만들기도 하는데 내 상태는 그것마저도 할 수가 없는 최악의 상태였다.

안 그래도 밥을 잘 먹지 못하던 내가 먹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그 당시 내 혈압은 50-40인 데다가 모든 기능이 다 저하되어 혈관도 찾을 수 없었기에 수술은커녕 링거 하나도 맞을 수 없었다. 간호사 셋과 의사와 원장까지 나서서 간신히 혈관을 찾은 것 같다가도 결국은 주사를 놓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더는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집에 가서 맛있는 것이나 먹으며 쉬라.”라고 하며 퇴원시켰다. 이제는 집에 가서 임종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늘 미소를 잃지 않으며 최선을 다하면서 건강한 셈 치고, 아이들 넷을 돌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사는 것이 죽음보다 더 힘들었다.’라고 표현해야 맞지 않을까? 나는 어떻게든 대변을 보려고 관장약을 사다 항문에 넣어도 약물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다 새어 나왔다.

이를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그 고통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저 어쩌면 좋아요? 제가 세상을 떠나면 저 하나만을 믿고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해요? 아버지! 저 너무 힘들어요. 어머니 가슴에 무덤이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착한 우리 아이들도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데 어떻게 해요. 아버지, 아버지!’

이렇게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아파하는 모습도 그 누구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소리 없는 침묵의 절규로 가슴 태우며 울부짖었다. 그러다가 ‘그래,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착한 내 아이들을 위해서도 내가 살아야 한다. 이대로 포기하고 죽을 수는 없다.’라고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영암 병원에서 간호사들과 의사, 원장까지 내게 주사를 놓다가 주사가 들어가지 않아 포기했을 때 남편이 집에서 손가락에 링거를 놔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링거가 들어갔기에 나는 남편에게 “영양제라도 하나 맞아보면 어떨까요?” 하니 “그래.” 하고 영양제를 놨으나 들어가지도 않을뿐더러 너무 아팠다. 남편은 “여태껏 먹지도 못하고 주사도 못 맞았으니 영양제는 안 되겠고 포도당이라도 한번 맞아 보자.”라고 하여 병원 원장도 포기한 포도당 500cc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이 주사를 놓자 바늘이 혈관에 잘 꽂혀 처음에는 포도당이 들어가는 듯하다가 이내 혈관이 터졌다.

그러기를 계속 반복되니 온몸에 주삿바늘을 꽂을 수 있는 혈관이 있는 곳(어깨, 팔, 팔목, 손, 손가락, 다리, 발가락, 머리 등등)은 모두 터져 멍이 들었다. 결국, 나는 24시간 동안 포도당 300cc도 채 맞지 못했다.

이는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지만 ‘오히려 죽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모든 것이 고통이었다. 이는 내가 주님을 만나 암을 치유 받기 전 마지막 맞은 링거였다.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하면서도 죽기는 살기보다 더 어려웠다.

 

350. 나를 방문해온 두 여신도

 

어느 날, 자리에 누워있는데 나주 교회에 다니는 두 여자가 방문하여 기도 해주고 방에서 나갔다. 그들이 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33세의 한창나이에 안됐지만, 병은 나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저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떻게 해.” 라고 하자, 또 한 사람이 “그러게 말이야. 목숨이 아깝고 인생이 불쌍하지만, 차라리 죽어주는 것이 산 사람들의 걸림돌을 치워주는 것이지, 쯧쯧쯧.” 하는 것이었다.

모든 기능이 상실되어 가고 있었지만, 청각은 살아 있었기에 밖에서 자기들끼리 조용히 이야기해도 그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위대한 무엇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구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병들어 누워만 있는 내가 산 사람들에게 걸림돌이라는 것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나 하나만 이 세상에서 없어져 준다면 남편과 많은 사람이 오히려 편해질 텐데….’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걸림돌이 되었으면서도 걸림돌이 된 줄도 모른 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지내왔던 어리석고, 추하고, 보잘것없는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이 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오열을 금치 못했다. ‘불쌍한 내 어머니의 가슴이 나를 묻는 무덤이 되게 할 수 없어 어떻게든 잘살아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건만, 영영 일어날 수 없다면 내 한목숨 희생으로 아낌없이 바쳐 모두를 편하게 하리라.’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하면서 0.5g만 먹어도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청산가리’를 사러 철물점으로 갔다. “꿩 약 좀 주세요.” “뭐 하시게요?” “꿩 잡으려고요.” “아줌마가요?” 청산가리를 사기 위해서 나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남편이 사 오라고 했어요.” “그러면 아줌마, 경찰서장 싸인 받아오세요, 그러면 줄게요.” 나는 계속 사정을 하였지만 절대 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내가 자살하기 위하여 약을 사러 온 사람임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청산가리를 먹으면 100% 죽기 때문에 자살미수 소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나의 고향에 나와 처지가 비슷한 언니가 있었는데, 6·25 때 어머니가 남편을 잃고 자기만을 바라보며 외롭게 사시는 것이 안타까워 어머니가 재혼해서 잘 사시라고 청산가리를 먹고 죽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꿩을 잡기 위하여 콩에다 청산가리를 넣어 산에 놔뒀는데, 꿩이 콩인 줄 알고 먹으면 꿩은 즉시 죽어 사람들은 그 죽은 꿩을 주워다 요리해 먹었다. 그런데 그 엄마도 가난한 살림에 딸에게 고기를 해먹일 수가 없자 ‘꿩이라도 잡아서 해 먹일까?’ 하고 꿩 약을 만들어 놓았는데, 꿩 약이 없어진 것을 보고 ‘딸이 꿩 약을 놓으러 갔나 보다.’ 생각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이상한 예감이 들어 횃불을 들고 딸을 찾아 나섰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기다리다가 아침이 되어 어떤 쪽지를 발견했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어머니, 재혼해서 행복하게 사세요.” 너무 놀란 어머니는 울며불며 딸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도 아끼고 사랑하던 딸은 대나무밭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엄마의 서러움은 그 어느 누구도 달랠 길이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자 딸의 소원대로 재혼하게 되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지난 일들이 생각나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니, ‘나는 정말 불효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죽으면 당분간은 내 가족들이 슬퍼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 불쌍한 내 아이들은? 아니야, 더 좋은 엄마를 만나 더 잘 살 수도 있어. 이 모든 생각들을 떨쳐버리자! 내가 없음으로써 내 가족들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