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다시 작은외갓집으로
여러 날 고민하던 어머니는 ‘어린 딸이 냉방에서 혼자 떨며 굶는 것보다는 낫겠다.’ 하고 다시 작은외갓집으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나는 작은외숙이 펜치로 이를 뺐다는 말도 못 한 채 너무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지금까지도 이를 뺄 때 떨어져 나간 살점 때문에 볼살이 이 사이에 붙어 있어 불편하나 어머니는 끝까지 모르셨다.
22. 꼬마 일꾼
작은외갓집에 들어와 살기 전 한 번씩 들를 때면 내가 다섯 살일 때부터 집안의 잔일들을 시켰다. 셋집에서 잠시 살다 여섯 살이 되고 다시 들어오자 더 많은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 일곱 살이 되자 본격적으로 어른들이 할 만한 일을 시켰다. 집 안 청소, 갓난아이 돌보기, 똥 걸레 빨기, 불 때기, 설거지하기, 밥 하기, 밥 푸기, 새끼 꼬기, 꼴 베기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그 많은 일을 시키는 대로 황소처럼 해냈다.
부유한 집 3대 독자의 맏딸로 태어났던 나는 조부님의 극진한 사랑 속에 모든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었다. 피난 나오기 전까지는 밥 대신 당시 누구도 맛볼 수 없는 간식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귀하게 자랐다. 조부님께서는 어디에 다녀오시다가도 멀리서라도 내가 보이면 무거운 짐도 거기에 내려놓은 채 달려와 뽀뽀해 주시고, 몸이 으스러져라 안아주셨는데 그럴 때면 나는
큰 소리로 아프다고 소리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유복하게 자라 왔던 내 환경이 순식간에 백팔십도 바뀌어 집도, 세간도 없는 초라한 알거지가 되다시피 하니 적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외숙과 외숙모, 다섯 남매와 함께 생활하면서 내게 맡겨진 과중한 일 때문에 늘 힘들어 눈물겹도록 슬펐지만, 그 슬픔을 사랑받은 셈 치고 감추어야 했다.
23. 잉아 한 개가 끊어지자 나에게 누명을
철천리라는 곳에서 베를 매달라는 부탁(옷감을 만들기 위해 실에 풀을 적당히 먹여 뜨거운 불 위에서 하는 작업)이 와 어머니가 여섯 살이던 나를 데리고 가셨다. 어머니가 안 계시면 외가댁에서 일해야 했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하는 것이 너무 신이 나서 소풍이라도 따라가는 듯했다. 부탁한 분은 어머니의 가장 친한 동갑 친구이자 재종형제였다.그런데 집에 있는 잉아(베틀의
날실을 한 칸씩 걸러서 끌어 올리도록 맨 굵은 실)로는 안 되겠다며 그분은 딸인 영자에게 외가에 가서 가져오라 했다. 영자는 나보다 나이가 열 살쯤 많은 삼례 고모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어머니 곁에 있고 싶었는데 어머니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시며 눈짓을 하셔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우리는 2~30리 길을 걸어 영자네 외가에 도착해 잉아를 가지고 돌아가던 중 고모가 들고 있던 잉아를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둘은 곧 울상이 되었고, 이어서 둘이 소곤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영자야, 큰일 났다. 잉아 하나가 끊어졌으니 우리 혼나게 생겼다. 홍선이가 잘못해서 끊어진 걸로 하자.” “고모가 그랬잖아.” “영자야, 내가 시킨 대로 해.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응!” 고모는 “우리 오줌 누고 올게, 잉아 가지고 가고 있어.” 하며 내게 잉아를 건네고 사라졌다. 나뭇가지 사이로 그들이 보였는데 소변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참 서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돌아오더니 고모는 잉아를 살핀 후 나를 때렸다. “너 이제 어쩔 거야? 잉아를 이렇게 하나 끊어 먹었으니 어떻게 할 거냐고. 응?” 나는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나에게 덮어씌우기로 작정했는데 아니라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생긴 일이니 사랑받은 셈 치고 맞아주었다. 그 벌로 15리 정도 남은 산길을 그 무거운 잉아를 들고 낑낑대며 가는데 고모가 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하지만 잉아는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들 대신 야단맞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집으로 들어갔는데 어르신들이 고생했다고 나를 칭찬하자 잉아를 떨어뜨렸던 삼례 고모가 “홍선이가 이거 하나 끊어 먹었어.”라고 하였다. 하지만 어르신들 모두 “괜찮아. 걱정하지 말거라.” 하며 오히려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나에게만 먹을 것을 더 챙겨주시는 것이었다. 그들은 앉아서 넋 놓고 바라만 보았다. 후에
이 고모를, 우리 어머니가 가장 가까운 아끼는 분한테 중매하실 때 그때의 생각이 잠시 스쳐 걱정되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고 그들이 잘살기만 바랐다.
24. 먹으려던 음식을 젓가락으로 쳐 버리니
어느 날, 나는 일찍 일어나 고픈 배를 움켜쥐고 밥을 짓기 위해 확독에 올라가 보리쌀을 아주아주 힘들게 갈았다. 일곱 살 어린 나에게 확독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리고 간 보리쌀을 깨끗이 씻어 아궁이로 갔다. 나무를 때어 초벌부터 끓이고 또 쌀을 씻어 가운데 얹어 한 번 더 끓였다. 밥물이 넘자 부뚜막으로 올라가 돌아가면서 행주로 깨끗이 닦아내었다. 조금 후에 또 불을
지펴 뜸을 들였다. 어른은 그냥 서서 밥을 푸면 되지만 어린 나는 부뚜막에 올라서서 밥을 퍼야 했다. 나는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한 번 집어먹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아니야, 허락받지 않고 먹으면 도둑이야. 안 돼.’라고 스스로 타이르고, ‘밥을 먹은 셈 치고’ 상을 차렸다. 온 식구가 함께 밥상 앞에 앉아 모두 수저를 들고 먹기 시작했을 때에야 나도 비로소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으려고 하는 순간 외사촌 언니가 사정없이 젓가락을 쳐버렸다. 아마 김치 줄기를 집었다고 그런 것 같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어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렸다. 다시 들어가면 때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오시는 날이 아니면 매를 맞으면서도 어김없이 일했겠지만, 그날은 어머니가 오시기로 한 날이기에 마음만은 조금이라도 편했다.
아침부터 밥도 먹지 못한 채 밖으로 나와 동구 밖에서 어머니를 기다렸으나 그날따라 밤늦게야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오셨다. 50리 고갯길을 그 무거운 곡식을 이고 오신 어머니는 허기까지 겹쳐 기진맥진하셨지만, 내 집이 아니기에 밥조차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힘들게 일하거나 당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것도 받아먹지 못한 배는 거짓말을
할 줄 몰라 자꾸만 꼬르륵 꼬르륵 했다.
힘에 부치도록 일을 하고도 늘 굶어야 했으나 힘들게 장사하시는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실까 봐 단 한 번도 말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꼬르륵 소리만은 감추지 못해 그 소리를 들으신 어머니는 “밥 안 먹었냐?” 하고 물으셨다. 먹었다고 거짓말은 못 하고 마음 아프실까 봐 그냥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는 내 사정을 짐작하여 눈물을 흘리셨고, 나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그 아픔을 알 수 있으랴.
25. 매 맞고 쫓겨나다
어느 날 밤, 나는 어머니와 이모가 나누는 이야기를 잠결에 듣게 되었다. “언니! 빨리 홍선이 데리고 면 소재지에 가게 하나 얻어 장사라도 해. 그동안에 돈을 많이 벌었으니 이제 장사 그만해도 홍선이를 키울 수 있잖은가?”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이제까지 번 돈으로 홍선이를 충분히 가르치고 살 수가 있는데 오빠가 그 돈을 줘야 말이지. 그 돈만 다 주면 홍선이 대학까지도
충분히 보낼 수 있는데 말이다. 그 돈을 노름하는데 다 쓰고 안 주니 어떡해. 그동안 홍선이 맡기고 양식과 소금까지 다 사줬는데….”라고 하셨다. 그때는 소금이 매우 귀해 소금값도 만만치 않았다 한다.
그 이튿날, 외사촌 언니는 자기 일을 빨리 안 해준다고 막 때리면서 “느그 집 가, 이년아!”라고 했다. 언니는 갈 곳이 없는 나를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때리며 “느그 집 가! 이년아!”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자기들이 부탁한 몫을 빨리 못 해주면 항상 때렸는데 나는 때리면 맞고 욕하면 다 받아 주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젯밤에 이모님과
어머니가 나누신 대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외사촌 언니에게 “그래, 우리 돈만 내놔! 그럼 나갈 테니까.”라고 할 때 외숙이 들어오다가 그 말을 듣고 나의 머리채를 잡고 왼쪽 귀뺨을 세차게 때렸다. 너무나도 아파 순간 ‘불이 나는가?’ 했는데 또다시 머리채를 잡고 빙빙 돌려서 발로 확 찼다. 나는 안방에서 마루를 지나고 토방을 거쳐 마당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 화는 장사 다녀오신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외숙이 어머니에게 “어린것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그런 말을 하냐?” 하고 야단치시고, 외숙모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돌봐주니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소? 어린것에게 시켜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하고 막 다그쳤다.
어머니는 우시며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외숙모는 “안 했는데 어떻게 어린것이 알 수가 있느냐?”라며 계속해서 다그쳤고, 외숙은 당장이라도 폭력을 쓸 기세였다. 어머니께서는 영문도 모른 채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하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에게 그런 말을 왜 했느냐고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 외숙에게 맞은 내 왼쪽 고막이 너무 아프고 말도 잘 못 알아듣게
되어 늘 야단맞았는데 후일에야 고막이 나간 걸 알았다.
26. 쥐와 닭에게도 쫓기며
이 사건으로 우리 모녀는 돈 한 푼 받기는커녕 오히려 쫓겨나 다시 셋방에서 지내야 했다. 어머니가 힘들게 버신 돈만 준다면 당장 면 소재지에 집도 살 수가 있었는데…. 우리가 방을 얻은 곳은 산꼭대기에 두 집이 살고 있는 외딴곳이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날은 나는 무서워서 잠을 거의 잘 수가 없었다. ‘가족이 함께 산다.’ 하고 셈 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서움을
유난히 많이 탔던 나는 밤마다 잠을 자는 게 아니라 눈물과 공포 속에서 몸부림쳤다.
왜냐하면 집주인의 남편은 군대에 갔고, 윗집도 혼자였기에 어머니가 장사 나가시면 그 외딴곳에 세 사람만 남았을 뿐만 아니라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이불을 둘러쓰면 쥐가 이불 속까지 들어와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포 속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워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베개가 젖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안방 새댁이 나를 불러 멸치젓갈
반찬에 밥을 주는데 그것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그때는 멸치젓갈이 굉장히 귀해 광 마루에 감춰놓고 먹을 때였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호강하던 나는 6·25 전쟁으로 인해 세상에서 버림받고 짐승들로부터도 무시당하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무서운 밤! 밤이면 쥐가 창호지와 문지방까지 뚫고 들어와 설치면서 물어뜯었다. 나는 갈 곳도 없고, 숨을 데도, 의지할 곳도 없어 피를 닦아내며 혼자 울어야 했다. 낮에 밖에 나가면 수탉이 달려들어 쪼아대니 겁이 나서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27. 물에 잠기려는 순간에!
먹는 것은 고사하고 잠도 못 자는 그런 처지에서 어머니는 한 번씩 들어오시면 늘 “같이 죽자.”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죽기 위해 물가에도 몇 번 갔다. 어머니는 먼저 나를 물속에 빠뜨리고 다음에 빠질 양으로 내 두 발을 잡고 거꾸로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머리가 잠기려는 순간 “나 죽기 싫어”, “나 안 죽을래.” 하며 소리치면 물속에서 다시 꺼내 주셨고 우리 모녀는
서로 부둥켜안고 목놓아 울었다. 목숨이 그리도 질긴 것인지, 살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른 것은 바로 죽음 앞에서였다.
어머니가 장사 나갔다 들어오시면 먼저 하시는 일이 쥐 잡는 일이었다. 팔뚝만 한 큰 쥐들이 달려드는 자루를 붙잡는 것은 너무나 무서웠다. 내가 문밖에서 자루를 들고 문구멍에 대고 있으면, 방에서는 어머니가 쥐를 쫓으셨다. 그럴 때마다 쥐가 자루로 들어와 몇 마리씩 잡았는데도 또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늘 쥐와 실랑이를 해야만 했다.
죽음과 삶의 뒤안길에서 몸부림쳐야 했던 시간들이 나를 압박했다. 살고 싶기도 하고 죽고 싶기도 했지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척 중에서 장사하도록 도와주신 연세가 많으신 태진이 조카가 찾아오셨다. 함께 자는데 큰 쥐가 이불 속으로 들어와 물어뜯자 그분은 쥐에게 물어뜯기지 않도록 밤새 쥐를 쫓아내 주셨다.
그분은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가 여기는 절대로 홍선이 혼자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이렇게 혼자 있다간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 다른 방도를 쓰라고 당부하고 떠나셨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찾아봐도 대책이 없던 어머니는 같이 죽자고 하시다가 내가 죽기를 거부하자 작은외갓집으로 다시 들어가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죽음 앞에서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것도
주님의 안배하심이었음을 주님을 알고 나서야 실감했다.
28. 국회의원에게 중매한다고 찾아오신 재종 이모
이 모든 사건을 잘 알고 계신 재종 이모님이 아이를 업고 어머니를 찾아와 나를 가리키며 “언니, 이제 저 어린것 데리고 그만 고생하소. 국회의원이 상처했는데 내가 중매하기로 했어. 그분도 홍선이를 데리고 와도 좋다고 했으니 그리 재혼하여 호강 좀 받아보소.”라고 하셨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가 큰소리로 ”얼른 느그 집 가! 그런 일로 다시 나를 찾아오거들랑
네 가랑이를 찢어불랑께. 나는 어린것도 어린것이지만 우리 선영을 지켜야 해. 보기도 싫으닝께 빨리 가!” 하고 당장에 내쫓으셨다.
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이모가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이모님은 한동네에 있는 친정집에도 못 들르고 어머니에게 사정없이 쫓겨 가셨다.
29. 다시 외가댁으로
다시 외가에 들어갔다. 내가 할 일들은 예전과 똑같았는데 아무리 잘해도 욕설을 듣고, 매를 맞고, 꾸중을 듣고 온갖 간섭을 다 받는 것은 더 심해졌다. 그래도 혼자 셋방에서 쥐와 닭에게 물리고, 쫓기며 무서워 떨면서 굶고 있을 때보다는 더 나았다. 나는 암흑에서 해방된 느낌으로 최선을 다하여 정말 열심히 일했다. 어느 날 작은외숙모는 방에서 부엌 쪽문을 열고, 설거지하는
내게 말씀하셨다. “홍선아! 설거지할 때 그릇 똥구멍(밑바닥)까지 잘 닦고 구석구석 청소도 잘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하는지 내 눈에 다 보인다. 장독도 밑에까지 깨끗이 닦아야 한다. 알겠느냐?” “예.” 대답은 했지만, 두레박 샘에서 물 길어다 설거지해야 하고, 꼴 베어야 하고, 새끼도 꼬고, 아기도 봐야 했으니 할 일이 많고 너무 바빠 그릇 밑은 지나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광 마루에 있는 쌀, 보리쌀, 찹쌀, 서숙, 밀가루 곡식 담아둔 항아리들까지 팔이 닿지 않아 낑낑대면서도 구석구석 더 열심히 닦았다. 외숙모가 볼까 봐서가 아니라, 어느 항아리 하나라도 안 닦아주면 섭섭해할까 봐 “걱정하지 마. 내가 너 깨끗이 닦아줄게.” 하고 빠짐없이 다 닦았던 것이다.
그때 외숙모가 낳은 아이를 예뻐했더니 모두 “그렇게 예쁘냐?” 하고 물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렇게 예쁘면 아이 똥을 먹어 봐.”라고 해서 망설임 없이 맛있는 사탕을 먹는 셈 치고 먹었다. 아이 똥일지라도 너무 썼다. 시키는 대로 했다가 때로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지만, 외갓집에서 하라고 하는 일은 모두 다 해냈다. 아직은 어리고 키가 작아, 높은 확독에다
보리쌀을 갈 때는 낑낑댔고, 큰 가마솥에 밥할 때 밥물이 넘치면 부뚜막에 올라가 솥 주변을 걸어 다니며 행주로 닦았다. 밥을 풀 때도 부뚜막에 올라가서 해야만 했으나 쉬운 일 하는 셈 치고 했으니 힘들다고 짜증을 내거나 누구도 원망할 필요가 없었다.
30. 사랑채에 모여 어른들이 싼 오줌
말 장사를 했던 외숙 집은 화장실이 딸린 사랑채까지 두 개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컸다. 나는 매일 꼴을 베다가 말에게 먹이고, 사랑채에 어른들이 모여 화투 치고 놀 때면 술도 내오는 등 시중까지 들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술 마신 어른들이 항상 마루에서 뒷문 쪽 땅에 놓인 큰 항아리에 소변을 보는 것이다. 마루에서 내려오기만 하면 바로 화장실인데도 그게 귀찮아서다.
소변이 마루와 땅으로 다 튀면 내가 닦는다. 그 앞에서 내가 말에게 꼴을 먹이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변을 봐, 어렸지만 황당할 때가 얼마였던가! 소변을 바로바로 닦으면 괜찮은데 다른 일 하다 좀 늦으면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원래 비위가 약한 나는 숨을 참으며 ‘맹물을 닦는 셈 치고’ 맨손으로 다 닦았다. 그런 역겨운 소변이 발효되면 거름이 더 잘 된다고 한
달 동안 그대로 놔두었다.
그들이 버린 쓰레기는 또 얼마였던가! 또 재래식 화장실에서 일을 본 뒤 똥을 닦은 휴지나 지푸라기를 아무 데나 버리면 그것까지 치워야 했다. 다른 형제들이 놀고 있을 때 혼자 일했어도 내 일이려니 하고 최선을 다했다. 우리 어머니가 계실 때는 새끼 꼬기, 꼴 베기, 아기 보기와 천으로 된 똥 기저귀 빠는 일을 했으니 한결 수월했다. 그래도 나는 내가 해야 했던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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