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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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어머니가 호랑이를 만나다

 

어머니가 장사를 다녀오시던 어느 날, 나를 보시자 와락 끌어안으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평소에 눈물을 안 보이시던 어머니가 우셔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날 밤 외숙모님들과 외재당숙모님들이 모였는데 모두 어머니에게 “애기씨 무슨 일이 있었소?” 하고 물으니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셨다. 어머니가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놀랐다. 하마터면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아찔했지만, 살아오심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는 매뺑이 마을에서 장사를 마치고 하루라도 더 빨리 일을 끝내기 위하여 밤임에도 불구하고 다음 행선지인 준적굴 마을을 향해 10여 리 길을 혼자 걸어가셨다.길은 매우 험준하고 깊은 산으로 이어졌는데 반쯤 갔을 때 위에서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무섭던 차에 너무 놀라 숨이 막히는 듯하여 어머니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나다가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어머니 쪽으로 걸어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고, 이제 나는 죽었구나. 나 죽는 것은 괜찮은데 내가 죽으면 우리 선영은 어쩔 것이며 어린 홍선이는 어쩔거나?’ 하며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말았다. 한참 기다려도 조용해서 눈을 떠보니 호랑이가 앉아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어머니는 ‘혹시 가라고 그러는가?’ 하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벌벌 떨면서 일어나니 호랑이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식은땀을 흘리며 준적굴 장자굴 댁이라는 친척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 한참 후에 일어나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 혼비백산해 들어왔느냐?”라고 해서 그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이 “에이, 지금 무슨 호랑이가 그렇게 있냐?”라고 하였다. 그때 그 집 할아버지가 “아, 호랑이 한 마리가 가끔 보인다고 하더라.” 하여 모두 놀랐다.

장자굴 댁이 “호랑이가 있어도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다닌다는데 대모님이 효성이 지극하니 지켜주기 위하여 나온 모양이구먼! 아니면 시아버님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 호랑이를 직접 본 사람들이 없어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지만, 어머니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고 하셨다.

어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지켜주셨다.’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주님께서 나를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우리 어머니를 구해주셨음이리라. 호랑이가 고개를 두 번이나 끄떡였다는 것은 어서 가라는 신호였던 것이다. 이는 동화 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주님께서 하시고자만 하신다면 무슨 일인들 못 하시겠는가!

* 그 당시 작은 영혼의 모친은 장사를 나가면 보통 사흘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물건을 다 못 팔면 나흘 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작은 오빠 집에 홀로 남겨진 어린 딸은 모친이 집에 없으면 그 집의 온갖 힘든 일을 다 해야 했다. 딸은 자신의 처지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영민하셨던 모친은 금방 알아채고, 베개가 흠뻑 젖도록 울다 잠든 딸의 다 터진 손을 매만지며 혼자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모친은 장사를 빨리 마치고 귀가하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늘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이날도 어두운 산길을 밤에 혼자 걸어가다 호랑이를 만나 혼비백산한 것이다. 하지만 이 호랑이는 모친을 보호하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것이다.

깊은 그 산에는 호랑이나 곰, 늑대, 멧돼지 등등 위험한 야생동물이 많이 살기에 밤에 험준한 산길을 혼자 걸어가는 것은 건장한 남자도 극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모친은 밤에는 절대 산길로 다니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되면 불쌍한 어린 딸뿐만 아니라 선영을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32. 집에서 만든 술(막걸리)을 거르다 쓰러짐

 

내가 7살이 되던 해의 큰외가 제삿날이었다. 워낙 가난했던 그때는 떡은 어쩌다 제삿날이나 어르신 생신날 조금 얻어먹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떡 한쪽이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제삿날을 기다렸지만 나는 일에 치여서 아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날도 나는 아기를 업고 망아지에게 꼴을 먹이고 있는데 큰외가댁에서 부르기에 순간 ‘아, 떡 귀퉁이라도 조금 주려나?’ 하고 갔더니 아기를 내려놓고 막걸리를 거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예? 제가요?” 하자 “이런 일도 해봐야 하는 거야.”라고 하셨다. 그래서 “예!” 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막걸리는 찹쌀을 찌고 바로 펴 식혀서 누룩과 함께 버무려 물을 적당히 부어 섞은 다음, 따뜻한 아랫목에 두고 이불로 감싸서 발효시킨다. 발효가 끝나면 큰 항아리에 체를 올려놓고 쌀 알갱이랑 누룩을 손으로 주물러 짜고, 또 물을 부어 거른다. 그런데 어린 내가 그 일을 하기에는 키가 너무 작아 발밑에다 뭘 괴고 하려 해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그냥 부뚜막에 올라가 항아리에 체를 놓고 술을 거르기 시작했다.

술 냄새에 취해 쓰러지려고 하는데도 ‘어린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할까?’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랑받은 셈 치고 했다. 하지만 독한 술 냄새만은 어쩔 수 없어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숨을 참다가 한 번씩 뒤로 돌아서서 숨을 쉬었는데도 결국은 술에 취해 부뚜막에서 거꾸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일을 시킨 어른들은 전혀 놀라지도 않고 일으켜 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내가 일하기 싫어서 꾀를 부린다고 생각했기에 발로 차고 때리면서 빨리하라고 재촉했다.얼마 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그 일을 끝마쳤다. 그 당시 내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니까 어르신들 칭찬이 자자 했지만 그런 일들을 어머니가 아시면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아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어린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하느님을 알고 나서야 이런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3. 초등학교에 입학

 

나는 여덟 살이 되어 동갑내기 동생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동생이 공부할 때 나는 일을 해야 했기에 예습, 복습은 물론 숙제조차 할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장사 나가시면 손등이 다 터지도록 쉴 새 없이 일하면서도 사랑받은 셈 쳤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 짓고, 설거지까지 하고 학교에 가야 했기에 언제나 바빴다. 학교에 다녀와서도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중에 어른들이 짜는 가마니에 필요한 새끼 꼬는 일들은 거의 내 몫이었다.

외사촌 언니나 동갑내기 남동생도 학교에 다녀와서 새끼를 꼬는데 둘이 오랫동안 꽈도 바닥에만 겨우 깔릴 정도로 느렸다. 나는 손이 안 보이도록 휙휙 순식간에 꼬아서 새끼줄이 쌓이면 묶어서 한편에 척척 던져 삽시간에 수북이 쌓였다. 일은 힘이 들었지만, 그들 몫까지 내가 해줄 수 있음에 마음은 늘 흐뭇했다.

그들은 새끼를 조금 꼬고도 쉬었지만 나는 많은 새끼를 꼬고도 밥과 설거지를 해야 했고 아이까지 돌봐야 했다. 많은 노동에 비해 밥은 별로 못 먹으니 늘 배가 엄청나게 고팠다. 보리쌀을 내가 퍼서 하면 밥을 좀 더할 텐데 외숙모가 주는 대로 하니 언제나 내 밥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 밥조차 외사촌들이 가져다 먹었다. 때로는 늦은 밤까지 일을 해야 했지만, 그러나 ‘나만 왜 이렇게 늦은 밤까지 일해야 될까?’ 하지 않고 어머니가 건강하시길 바라며 사랑받은 셈 치고 했기에 기쁘게 할 수 있었다.

 

34. 배가 고파 잠 못 이루던 나날들

 

외가에서는 그 많은 가족이 이불 하나로 함께 덮고 잤기에 나는 항상 발밑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야 했다. 겨울에는 이불을 위로 올려 덮었기에 나는 그들 발밑에서 추워서 떨어야 했다. 그러다가 이불 속으로 발이라도 조금 밀어 넣을라치면 동생에게 여지없이 발이고 배고, 구분 없이 채이고 말았다. 훌쩍이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가만가만 눈물을 닦아내며 ‘오, 내 아버지,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나요?’라고 생각하며 웅크리고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운명인가 보다.’ 했기에 그 애를 미워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느 날 밤 외당숙모와 외재당숙모들이 놀러 오셨다. 고구마를 찌라고 해, 찐 고구마와 싱건지(물김치)를 내놨다. 다들 깔끔하게 잘했다고 칭찬하며 나도 먹으라고 주셨다. 배가 너무 고팠지만 수줍어서 받질 못하고 또 다른 재당숙모가 재차 주셨으나 역시 받질 못했다. 나는 ‘다시 권하면 이제 용기를 내어 받아서 허기진 배를 채워야지.’ 하고 기다렸으나 더 이상 아무도 권하지 않았다.

먹는 모습을 안 보고 밖에라도 나가 있으면 배고픈 고통을 잊을 수 있을 텐데 심부름을 해야 하니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싱건지 무를 씹어 먹는 소리도 어찌나 맛있게 들리는지 배는 꼬르륵꼬르륵 신호를 계속 보냈다. 그러나 나는 맛있게 먹은 셈 치면서 심부름만 했다. 이럴 때 어머니가 너무 그리웠으나 옆에 계신 셈 치고 봉헌하니 그래도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맛있게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빨리들 안 가셨다. 나는 배가 너무 고팠지만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해 너무 지쳐 잠이 막 쏟아졌다. 그런데 잘 데가 없어 앉아서 기다려야 하니 잠자는 셈 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손님들이 다 가신 뒤 막상 자려고 하니 이번엔 허기가 너무 심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또한 내 영혼과 육신을 단련시키고자 하신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35. 가지 사건으로 누명

 

그러던 어느 날, 작은외숙모는 가지를 많이 따다 놨으니 먹고 싶은 사람은 먹으라 하셨다. 나는 그날도 학교에 다녀와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해야 했다. 아무리 가지를 먹어도 된다고 허락은 하셨다해도 내 손에 직접 쥐여준 것이 아니니 그것을 먹은 셈 치면서 꼴을 베고, 새끼를 다 꼰 뒤 밥하러 부엌에 갔다.

또다시 문 없는 찬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가지를 보자 너무나 배가 고파 먹고 싶어졌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래, 먹고 싶은 사람은 먹으라고 하셨으니 먹어도 되겠지?’ 하고 하나를 먹기로 마음먹었다. 어른들이 먹으라고 직접 주어도 몇 번 사양하다 놓치거나, 겨우 받던 나였으니 직접 건네받지 않고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두 나에게 청백(淸白: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함)이라고들 했다. 어쨌든 나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가지 하나를 들고 벌벌 떨면서 어렵게 베어 먹었다. 하필 그때, 언니가 들어왔다. 또 맞을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전에 그 언니가 자기가 할 일들을 빨리 안 해준다고 나에게 집을 나가라며 왼쪽 귀뺨을 때렸을 때 무척 아팠는데, 그 귀뺨을 외숙에게 또 맞고 고막이 나가 왼쪽 귀는 전혀 들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 사실이 떠올라 너무 두려운 나머지 먹던 가지를 얼른 옷 속에 집어넣었다. 그것을 눈치챈 언니는 나를 광속에 가두었다.

언니는 작은외할머니네 삼촌, 큰외갓집 오빠, 동갑내기 동생과 함께 미리 준비했던 솔잎을 내 입에 물려 놓고 “말 안 하고 먹거나, 도둑질하면 솔잎이 길어 난다.”라고 했다. 외숙모가 “먹고 싶은 사람 먹어도 된다.”라고 했기에 도둑질한 것은 아니지만 말 안 하고 먹으려다 그런 일을 당했으니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은 나는 큰일이라 생각했다. 지금 내게는 말하지 않고 먹으려던 가지가 있지 않은가!

나는 또 맞을 것이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떨면서 그 솔잎이 길어나지 않도록 자근자근 씹었고, 네 사람은 그런 나의 모습을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며 수군거렸다. 나중에 밝혀지긴 했지만, 이는 넷이서 돈 100환을 훔쳐다가 과자를 사 먹고 나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한 빌미를 만들려고 망을 보던 차에 내가 올가미에 걸려든 사건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고, 너무나 창피해서 죽어 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남의 물건에 손조차 대지 못했던 내가, 마음껏 먹으라고 한 가지 하나 때문에 돈을 훔쳤다는 누명까지 쓰고 광속에 갇혀 솔잎이 자라나지 않도록 잘근잘근 씹으며 마음 졸이던 기억은 지금까지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 누명은 한 점 부끄럽지 않은 결백한 삶을 살고 싶어 하던 나의 여린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결국, 돈은 그들이 훔쳐서 쓴 것이 밝혀졌지만 그것은 분명 이제까지 당해 왔던 그 어떤 고통보다 더 끔찍한 아픔이었다.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며 웃고 떠들면서 재밌게 놀지만 불쌍한 개구리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다. 나는 그 개구리의 심정을 알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나를 갖가지 방법으로 학대하면서 조롱하고, 사사건건 트집 잡았다. 어머니는 장사에서 돌아오시면 과자나 그밖에 필요한 것들을 사라고 100환씩 주고 다시 장사에 나가셨다. 나는 어머니가 힘들게 버신 돈임을 알기에 쓸 수가 없어 10환도 안 쓰고 옷 속에 넣어 두었는데 그들은 그 돈까지 모두 훔쳐다가 쓰곤 했다. 나는 그냥 내가 쓴 셈 치고 포기하고 어머니께는 한 번도 말씀드리지 않았다.

 

36. 똥칠해버린 내 옷

 

나는 깨끗한 옷 한 벌을 놔둘 데가 없어 외갓집 장롱 틈 사이에 넣어 두었다가 학교 갈 때 꺼내어 입고 갔다. 어느 날 학교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옷에 똥칠이 되어있었다. 외숙모가 자꾸 언니와 동생에게 칠칠치 못하다며 홍선이처럼 옷을 깨끗하게 입으라고 꾸중을 하시니, 심술이 난 그들이 가끔 똥이나 다른 오물들을 내 옷에 묻혀 놓았던 것이다.

학교에 다녀오면 소처럼 일해야 하니까 집에서는 헌 옷을 입는데, 학교 갈 때만 입던 단벌의 옷을 버려 놓으니 부끄럽지만 할 수 없이 일복을 입고 좋은 옷 입은 셈 치고 학교에 다녀와서 얼른 옷부터 빨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난처할 때가 많았지만 그들이 야단맞을까 봐 좋은 옷 입은 셈 치고 외숙모나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전혀 말을 하지 않으니 어머니도 여벌 옷을 해줄 생각을 안 하셨지만, 여벌의 옷이 있는 셈 치니 기쁠 수 있었다.

 

37. 귀가 들리지 않아 명태 찜질을 하다

 

공부 시간에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데 듣지 못하여 가만히 앉아 있다가 매를 호되게 맞았다. 아이들이 뭐라고 해도 잘 알아듣지 못했고, 외갓집에서 나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도 못 알아들어 매를 맞았다. ‘나는 왜 이렇게 못 알아들을까?’ 하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나를 불러도 대답이 없자, 놀라서 다시 부르시고 여러 번 시험했는데 아픈 왼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오른쪽 귀만 조금 들리니, 어머니께서 “너 귀뺨 맞았지?”라고 하셨으나 마음 아프실까 봐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명태를 사다가 왼쪽 귀에 찜질을 해 주셨다. 화롯불 위에 단지를 올리고 명태와 물을 넣은 뒤 김이 나면 뜨거워도 참으며 귀에 대고 쏘인 것이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명태 찜질을 했지만, 어머니가 안 계시면 그마저도 못 하고 계속 일만 해야 했다.

 

38. 그래도 들리지 않는 왼쪽 귀

 

왼쪽 귀는 전혀 들리지 않고, 오른쪽 귀만 겨우 들을 수 있어 나는 그동안 영문도 모르고, 듣고도 모른 척한다고 많이 당해 왔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내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걸 모르는 선생님과 외갓집 식구들과 친구들은 내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안타까웠다.

어린 나의 귀뺨을 계속 때려 들리지 않게 하신 외숙을 생각하니 아버지가 더 그리웠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사랑받고 살았을 텐데…. 그러나 모든 것을 사랑받은 셈 치며 더 굳세게 일을 했다. 수많은 일을 쉼 없이 척척 해내자 작은외숙모는 큰외가에서 제사 때 얻어온 죽상어로 국을 끓여 나에게는 작지만 두 토막이나 주시고 외사촌들에게는 일을 안 했다고 국물만 주셨다. 나는 너무 감격하여 먹고 싶은 귀한 죽상어 고기 두 토막을 외사촌들에게 한 토막씩 나눠주며 먹은 셈 치고 국물만 먹었어도 내 몫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39. 외톨이의 설움

 

어느 여름밤, 외사촌 언니와 오빠, 동갑 동생, 외갓집 집안 삼촌, 이렇게 넷이서 놀다가 갑자기 나를 불러 함께 놀자고 하였다. 늘 외톨이였던 나는 나를 끼워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너무 좋아 함께 놀았다. 조금 후에 두레박 샘에 가서 눈 감고 병에 물 한 병씩 담기 시합을 하였는데, 병에 물을 부을 때 병을 잡지 않고 눈을 감고 부어야 했다. 그중에 가장 늦게 물병에 물을 채운 사람은 모두에게 두들겨 맞기로 했다. 나는 설령 내가 져 두들겨 맞는다고 해도 나를 자기들 노는 데 끼워 준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있었기에 넘어지지 않도록 병을 붙잡아 주겠다는 외사촌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런데 모두가 한 두레박으로 물병에 물을 다 채웠는데, 몇 두레박을 부어도 내 병에는 물이 전혀 차지 않아 나는 네 사람에게 혼쭐이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저희끼리 히히거리며 “홍선이는 우리가 병 넘어질까 봐 잡아 준다면서 병 입구를 막아버린 것 모를 거야.”라고 하는 소리에 그들을 철저하게 믿었던 바보 같은 내 모습이 한심해 처참하게 울어야 했다.

그들은 계획적으로 나를 때려 주기 위하여 그 방법을 쓴 것이다. 병을 잡아 준다는 핑계로 병의 구멍을 손으로 막고, 눈을 감고 부으라고 했으니 물이 들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외숙모에게 일 잘하고 깨끗하다고 자주 칭찬받고 선생님에게는 늘 귀여움만 받으니 그들에게 나는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그들이 함께 놀자고 하니 순진하게도 좋아했던 나의 초라한 모습!

나를 때려 놓고 통쾌해하는 그들의 만족한 모습을 보며 외톨이의 서러움에 목이 메어 울며 아버지를 불러보았지만, 애끓는 그 외침은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아버지가 계신 셈 치고 살기에는 어린 나에게 너무나 힘에 겨웠다. 대답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나의 처지에 대한 슬픔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웠다.

 

40. 재종 이모님 재행을 통해 받은 사랑

 

1학년 겨울 방학 때 작은외할머니 딸(재종이모)의 전통 결혼식이 있었다. 옛날엔 결혼 후 3일 만에 부부가 다시 처가에 와서 3일 정도 쉬다 가면서 이바지를 해 갖고 가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걸 재행(再行)이라고 한다. 키도 크고 잘생긴 이모부님은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는데 나를 재행에 데리고 가고자 하셨다. 나는 외갓집 일 때문에 못 가는 상황이었으나 이모부님이 작은외숙모와 어머니께 허락을 받아 기어코 데리고 가셨다.

다음 날부터 이모부의 친척들이 돌아가며 음식을 거나하게 차려 주셔서 함께 간 나도 먹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이라 너무 맛있었지만, 이모 욕 먹일까 봐 많이 먹은 셈 치고 조금씩만 먹었다. 닷새 동안 먹으러 다녔는데 이모가 한집에서는 밥을 남기셨다. 그런데 남긴 밥그릇이 지저분해 보여 “죄송해요. 저 밥을 제가 좀 먹어도 될까요?” 하니 모두가 “그 밥이 더 맛있게 보여? 그래, 많이 먹어라.”라고 하였다.

한쪽 손으로 가리고 지저분한 곳을 깨끗하게 정리하면서 먹는 시늉을 했다. 그랬더니 어른들이 눈치를 채고 “우메 우메, 뭔 이런 이쁜 애가 다 있다냐?”, “어린 것이 별 것이네이.”, “커서 뭣이 될거나?”, “크면 우리 며느리 삼으면 좋겠네.” 등의 말을 하며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이모님이 흉잡힐까 봐 잘한다는 게 오히려 이모님을 난처하게 한 것이 되어 홍당무가 되어 어쩔 줄 모르며 “죄송해요. 죄송해요.”란 말만 되풀이했다.안 그래도 나를 예뻐하시던 이모부는 더 예뻐하며 나랑 계속 놀아주셨다.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할 때 “…하지람짱.” 해가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신혼 초였지만 항상 나를 가운데 누우라고 하셨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 같은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날을 무려 5일간이나 누렸다. 그러나 신부인 이모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허탈하셨을까? 그래도 나는 소처럼 일하면서도 헐벗고 굶주리며 학대와 폭행만 당해 오다가 처음으로 관심과 사랑과 배려를 받았기에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천식이 심하셨던 그 이모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지금까지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