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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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부끄러운 나를 숨겨준 코스모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나에게 맡겨진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그 일을 하지 못했을 때 돌아올 책망을 피하려고 늘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그래서 방과 후에 친구들과 어울려 마음껏 뛰어놀고 싶은 그 동심조차 아쉬운 마음속에 묻어 놓고,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놀고 있는 친구들과 즐겁게 논 셈 치고 나 혼자 총총걸음으로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일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집에 가는데, 나를 예뻐하시고 귀여워해 주시던 분이 트럭을 몰고 오고 계셨다. 그 차를 얻어타면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나를 보면 차를 태워 주시겠지.’ 하고 생각하며 서 있었는데, 그분은 나를 보지 못했는지 내 앞을 지나쳐 버렸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비 온 뒤 길에 생긴 물구덩이 위를 트럭이 지나가면서 사정없이 물세례가 내려졌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더러운 흙탕물로 흠뻑 적셔지니 순간적으로 너무나 당황하여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되어버린 초라한 내 모습에 울면서 집으로 가던 그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그때 누군가 지나가기에 부끄러워 어찌할 바 몰라하던 나는 길가에 활짝 피어 있는 코스모스 뒤로 숨고 말았다.

그때 코스모스들은 나를 향해 모두 정답게 웃어 주며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부끄러운 나를 숨겨 준 코스모스들아! 너희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구나. 나도 이제 그만 눈물을 멈추고 너희들처럼 곱게 웃으며 밝고 희망찬 내일을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띠며 살아갈게!’ 하고 나의 마음을 코스모스에게 전하니 울적했던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

 

42. 통신표를 받아오던 날

 

1학년 통신표를 받아오던 날 어머니는 많이 우셨다. 내 통신표 성적은 ‘수수수우수수’였고 한집에 사는 같은 반 외사촌은 ‘우우수우미우’였는데 외사촌이 그런 성적으로 우등상을 받아온 것이다. 아빠가 계시지 않아 소외당했다 여기시고 그런 내가 가여워 어머니는 그 서러움까지 북받쳐 올라 울고 또 우셨다.

나는 우등상을 탄 셈 치니 문제가 되지 않아 어머니를 위로해드렸다. 어머니에게는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나는 ‘어떻게 하면 매 맞지 않고 하루하루를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급급한 마음이었기에, 그것은 나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43. 담임 선생님의 호의

 

4학년 때 남자인 담임 선생님은 아주 젊고 여자처럼 예쁘장한 데다 다정다감해서 모두 잘 따랐다. 많은 학생이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아양을 떨고 아부들을 했지만, 선생님은 다 외면하고 피하기만 하는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늘 나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며 곁에 두고자 하셨기에 나는 학생들의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선생님이 나를 챙겨주시는 것은 무척 좋으면서도 친구들이 시기 질투하니까 그 아이들이 죄짓지 않게 하려고 선생님을 피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선생님은 면 소재지에 한 번씩 영화가 들어올 때면 나에게 조용히 오라고 하셨다. 그 당시는 모두 너무 가난해 영화가 보고 싶어도 돈이 없어 애들은 천막 구멍으로 몰래 들어가다가 붙잡혀 실컷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여준다고 혼자 조용히 오라니 갈등이 생겼다. 모두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나도 물론 보고 싶었다.

나는 저녁 설거지를 서둘러 해 놓고 한 동네 같은 반 친구인 귀순이한테 말했더니 너무 좋아 펄쩍 뛰면서 “그런 데를 왜 안가? 얼른 가자!”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3~4km 되는 거리를 달려, 면 소재지에서도 번화가인 선생님의 하숙집으로 갔다. 선생님은 귀순이에게 “아랫마을에 가서 과자를 사 오너라.”라고 하면서 나를 붙드셨지만 나는 얼른 손을 뿌리치고 귀순이와 함께 다녀왔다.

셋이 영화를 보는데 선생님이 내 손을 꼭 잡아 나는 얼른 손을 빼냈다. 선생님은 내게 “다음에는 꼭 혼자 오너라.”라고 했으나 난 항상 귀순이와 함께 갔다. 영화 볼 때 일부러 귀순이를 선생님 곁에 앉혔는데 귀순이 손은 잡지 않았다. 이런 일이 몇 번 계속되었다. 선생님은 귀순이를 멀리 심부름 보내려 해도 내가 항상 함께 가니 하루는 귀순이에게 부엌에서 물을 떠 오라 시키고는 따라가려는 나를 붙들고 품에 꼭 안는 것이 아닌가!

귀순이가 금방 왔기에 잠깐이긴 했지만, 그때부터 선생님이 보기 싫어 다시는 영화를 안 보려고 맘먹었다. 그런데 영화가 들어오자 선생님은 “이제는 정말로 꼭 혼자 오너라.”라고 하셨다. 안 가면 야단 맞을 것만 같아 고민하다가 귀순이에게 말하니 “가야지, 보고 싶다고 해도 아무나 못 보는 그 좋은 것을 우리는 공짜로 볼 수 있는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처음 몇 번은 괜찮았지만, 외갓집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사실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 큰 일은, 선생님한테 혼자 갈 수도 없고 귀순이랑 같이 가려고 해도 혼자만 오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린 것이 진퇴양난의 길에서 냉가슴을 앓아야 했다. 그런데 학교에 가니 발령 날 시기도 아닌데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나셨다. 지금 생각하니 주님께서 완벽하게 지켜주셨음이었다.

 

 

44. 재혼설과 꿈

 

어머니의 재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불안하여 좌불안석이었다. 아버지는 3대 독자로, 4대째에 딸인 나 하나로 끝났으니 주위 분들이 “아무 걸림돌이 없다.”라며 “딸 하나 데리고 그 고생하며 살지 말고, 재혼하여 팔자 고쳐 행복하게 살아보라.”라고 권유하던 주위 분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냉혹하기만 하였다. 그분들은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났느냐, 너만 아니면 느그 어머니는 이 고생을 안 할 텐디. 쯧쯧쯧.” 하였다. 그런 질시의 눈길들을 느낄 때마다 내가 찾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뿐이었다.

말 못 하고 가슴앓이하며 남모르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가!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어머니가 시집을 가시는데 긴 버스를 타고 가셨다. 내가 울면서 어머니를 부르며 따라가니까 어머니도 우시면서 아무도 모르게 나를 버스 천장 짐칸에 올려놓으셨다. 얼마만큼 갔을 때 차가 높은 벼랑을 달리다 밑으로 뚝 떨어지면서 꿈에서 깨어났는데, 나는 불안하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어 어머니가 돌아오시는 날까지 울었다.

여태까지 어머니께서 집에 돌아오시던 그 날 그때처럼 어머니가 반가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며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께서는 “걱정하지 말아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재혼하더라도 나는 재혼 안 한다. 그 꿈은 재혼을 하면 그렇게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고, 또 이미 떨어져 버렸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하시며 나를 안심시켜 주셔서 오랜만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3년간을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어머니가 나가실 때마다 불안해했었고, 돌아오시면 ‘또다시 보게 되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던 3년의 그 세월은 결코 나에게는 적은 세월이 아니었다. 그 걱정만 놓아도 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고, 여러 가지 어려움도 셈 치고 잘 견딜 수가 있었다.

 

45. 경사스런 날 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아이

 

내가 3학년 2학기 때 작은이모님이 결혼하셨다. 저녁이 되어 많은 친척과 친지들, 이웃들이 놀러 와서 신랑 신부 노래도 시키고 또 신랑 발도 때려 신랑 신부가 한 상 가득 차려 내오게 하기도 했다. 나도 거기에 끼어 구경하고 있었다. 신랑 신부를 보니까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경사스러운 날 아버지도 함께하셨을 텐데….’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신랑 신부를 비롯한 몇 사람에게 노래를 시키는가 했는데 어느 사이 나에게도 노래하라고 했다. 나는 노래도 못하는데 큰일이로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판 깨지 말고 어서 부르라고 재촉하시는 어르신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나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하늘마저 울던 그 날에 아버지와 이별을 하고

우리 모녀 갈 곳 없어 외가 마을 찾아왔네.

목이 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아버지기에

오늘도 부릅니다. 아빠 이름을 목이 메어 불러 봅니다.”

 

노래가 끝나자 이게 웬일인가! 모두들 소리 내어 울고 계셨다. “홍선아! 이제 다시는 그런 노래 부르지 말거라. 알았냐?”라고 하시는 작은외숙모님의 말씀에 나는 “예.” 하고 대답하면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노래 가사를 즉석에서 지어 불렀던 것인데 좌중이 눈물바다가 되었으니 모두에게 미안하고 죄송해서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그리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있을 때 어머니가 나오셔서 눈물을 닦아주시며 “괜찮아.”라고 하시며 안아주셨다. 외숙모는 그런 노래 부른다고 야단하셨지만 늘 때리기만 하시던 어머니가 뜻밖에도 따뜻하게 안아주시니 그 품이 그리도 따뜻하고 포근할 수가 없었다.

 

46. 작은외숙은 말 장사를

 어린 망아지를 사다가 키워서 팔고 또 망아지를 사다가 크면 파는데 그 돈이 꽤 쏠쏠하다고 어르신들이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농사짓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번다고 했다. 외숙은 망아지가 싸게 나올 때면 두 마리도 사 오셨다. 그럴 때면 그 망아지 키우기 위해 날마다 두 배의 꼴을 베는 것은 어린 내 몫이었기에 항상 바빴다. 어린 것이 낫질하는데 낫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어르신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내가 잘한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쉬엄쉬엄하고 싶어도 그리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해서 상을 차려드리고, 설거지하고, 학교 다녀와서 꼴 베고, 새끼도 꽈야지, 아기도 봐야지, 똥 기저귀까지 빨고 또 밥을 해야 하는데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언제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 손은 빠른 데에 익숙해져 이미 번개 같다고 했다. 누가 보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가 하겠지만, 쉬고 싶을 때 쉬는 셈 치고 하니 기쁘게 할 수 있었고, 남이 못하는 것도 할 수 있어 늘 흐뭇했다.어른들은 자주 “너는 얼굴도 이쁜 것이 어찌 그리도 마음씨도 곱고 착하며 거기다 일도 어른보다 더 잘한다니? 나중에 복 받을 꺼여.”라며 “이 집 돈은 저 어린 것이 다 벌어 주는구먼.” 하고 칭찬했다.

 

47. 친구와 친구 엄마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

 

교실 앞의 목련꽃이 화려한 행진을 하며 자태를 뽐내던 4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특별 활동이 있었는데, 그날은 4~6학년 부장들이 모여 토의하는 날이었다. 부장들은 청소하지 않고 그 시간에 모이는데, 그때 한마을에 사는 친구 점자가 내 책보(옛날에는 거의 가방이 없어 책과 공책과 필통 등을 싼 보자기)를 가지고 있겠다고 했다.

내가 사양하자 그 친구가 다시 사정하듯이 말하기에 나는 책보를 맡기고 특별 활동에 다녀와 보니, 그 친구는 이미 가 버렸고 나의 책보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가지고 갔나 싶어서 지름길로 뛰어 달려갔다. 마을은 학교에서 3km쯤 되는데, 마을에 거의 다 다다라서 점자를 만나 책보를 어디에다 두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한마디의 대답도 듣지 못한 채 외가댁으로 와야 했다. 새끼 꼬고, 꼴 베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왔지만, 어머니가 안 계시니 이야기할 데라곤 아무 데도 없었다.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숙제는 못 하더라도 ‘월요일에 학교 가서 찾아봐야지.’ 하고 체념하며 꼴망태를 이고 꼴을 베러 가는데 점자가 동생을 업고 있었다.

“점자야! 내 책보 어디에다 뒀냐?” 몇 번을 물었지만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또 대답을 듣지 못한 채 꼴망태를 이고 꼴을 베러 갔다. 그런데 무방비 상태였던 내가 갑자기 ‘툭!’ 하고 논둑 밑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점자는 동생을 어디에다 두었는지나에게 와서 나를 밀어뜨린 것이다. 무방비상태에서 갑자기 당한 터라 어리둥절해 하며 일어나자 다시 밀어뜨려 또 넘어졌는데, 어느 순간 그 친구 엄마까지 와서 나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그해처럼 지독한 가뭄이 없었다고 한다. 물이 귀했던 그 당시 갈아엎어 놓은 논의 흙은 돌덩이처럼 단단해져 있었는데, 그런 논바닥에다 엎어놓고 때리며 머리채를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지만 말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는데 보니 그 가운데 외사촌 둘째 오빠도 있었다.

어느덧 반죽음이 되도록 맞은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 사방을 둘러보니 그 친구 아버지가 똥장군을 지고 가다가 받쳐 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울고 나서, 피투성이가 된 그 몸으로는 도저히 꼴을 벨 수가 없어, 꼴 베기를 포기하고 망태기를 겨우 끌고 절뚝거리며 집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외숙과 언니에게 맞을까 봐 걱정은 되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사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께서는 누구에게 들으셨는지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나의 처참한 모습을 보시고 한없이 우셨다.

머리카락은 많이 뽑혀 버렸고, 또 그때가 여름이어서 옷을 짧게 입었기에 얼굴, 어깨, 다리, 할 것 없이 많은 상처를 입어 피와 피멍으로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다행히도 그날은 어머니께서 들어오셨기에 조심스럽게 씻겨 주시고 옷을 갈아입혀 주셨다. 어머니와 함께 책보를 찾으러 가는데, 그 친구가 길가에서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부드럽게 “점자야, 뭐라고 하지 않으마. 책보를 어디에다 두었는지 이야기만 해봐라.” 하고 묻자 그 친구는 내 눈치를 보더니 “몰라라우.”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 가서 교단 밑을 비롯해 있을 만한 곳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아 온 산을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앞산 나무숲에서 책보를 찾았으나 공책도, 연필도, 옷핀도, 좋은 것은 다 없어지고 남은 것은 책 한 권과 거의 써 버린 공책 한 권뿐이었다. 선생님들이 나를 너무나 얌전하고, 착실하고, 온순하고, 착하다고 칭찬하며 귀여워하니 그때부터 학생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2학년 말쯤에는 전교생들이 참여한 글씨쓰기 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내가 1등을 하여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큰 공책을 타기도 했으니 질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때가 4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특별히 귀여워해 주실 때였으므로 나 혼자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한 것이었다. 지금은 책을 얼마든지 살 수 있으나 그 당시에는 책은 살 수도 없어 포기해야 했다. 어머니와 함께 공책, 연필을 모두 사서 오는데 그 친구의 할머니를 만났다.

점자의 할머니는 대뜸 “홀엄씨 딸이라 어쩔 수 없구먼.” 했다. 그 말은 어머니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가슴에 비수를 꽂히는 듯한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참고 인내하며 돌아오시던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과 휘청거리던 걸음걸이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만 해도 돈이 없던 시절이라 돈 대신 곡식을 받을 때였기에 어머니는 나 하나를 위하여 당신 몸을 아끼지 않고 그 무거운 곡식을 머리에 이고 30~40리 거리의 산을 오르내리며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골병이 들도록 장사를 했는데 이렇게 번 돈을 외숙이 다 갖고 가 한 푼도 돌려주지 않으셨다.

나가서도, 들어와서도 잠시도 쉴 새 없이 일만 하시는 우리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여 가슴이 아팠다. 아무 잘못도 없이 폭행당한 것도 모자라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다니….

집에 돌아온 나는 내가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어머니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한 것이 어머니께 미안해서 울고,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자식을 키우는 설움에 또 우시고 우리는 함께 부둥켜안고 밤이 새도록 울었다. 나는 그때 굳게 결심했다. 악착같이 잘 살아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애비 없는 자식, 아니 홀엄씨 딸이라도 열 아들 못지않게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효도하겠노라고.

 

48. 땅아! 풀들아! 돼지야! 나도 너 닮을게

 

1950년대 시골에는 공중화장실이 없어 많은 사람이 맨땅에 대소변을 봤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고향에 가실 때면 나는 소변이 마려워도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도 절대 안 봤다. 하늘과 땅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가려주신다고 해도 “하늘과 땅은 보고 있으니 못 본다.”라고 했다. 고통받기 전까지는 남자가 멀리서만 보여도 화장실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열 살 때인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한 학생이 대변 옆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친구가 더럽다고 침을 탁 뱉었는데 땅은 아무 소리 없이 모든 것을 다 받아줬다. 나는 땅을 보면서 말했다. “땅아, 땅아! 나도 너 닮을게! 더럽다고 침을 뱉어도, 똥을 싸고, 오줌을 싸도 그리고 아무리 짓밟고 짓이겨도 소리 없이 다 받아주는 폭넓은 너 닮을게!” 모든 것을 받아주고 덮어주는 땅을 어루만지면서 한 땅과의 깊은 다짐이었다. 또 길을 가는데 신작로 가에 수많은 풀들이 있었다. 그 풀들에게도 속삭였다. “풀들아! 너희도 사람들이 밟으면 그대로 다 밟혀주는구나. 그러나 아프지? 미안해. 내가 다시 세워줄게.” 하고 세워주면서 “나도 너희들 닮을게. 밟고 또 짓밟아도, 오줌을 싸고 똥을 싸고 침을 뱉어도 다 받아주는 너희들 닮을게. 아파도 사랑받은 셈 치고 참을게, 너무 아파하지 마.”라고 하는데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에 가면서 풀들과 대화하면서 보니 어제 밟혀져 짓눌려진 풀들이 탁 서 있어 그 풀들을 만지면서 말했다. “오, 풀들아! 짓밟힌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줘서 고마워. 나도 고통을 너희들처럼 꿋꿋하게 승화시킬 거야.” 하자 풀들도 대답이라도 하듯이 바람에 펄럭였다.

돼지 밥을 주러 갔다. 돼지 밥이라야 보리쌀 갈아 씻은 물과 구정물 가라앉혀서 주는 정도지만 그래도 그들은 고마운 듯이 쩝쩝 소리 내며 잘도 먹었다. 어느 날 작은외갓집에서는 코가 짧고 통통한 어미가 새끼를 낳았는데 코가 짧고 통통한 새끼였고, 큰외갓집에서는 코가 길고 날씬한 어미가 새끼를 낳았는데 코가 길고 날씬한 새끼였다. 그리고 친구 집의 하얀 점 있는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들에게도 하얀 점이 있었다. 어찌 그리도 어미를 똑 닮았는지 너무 신비스러웠다. 나는 그들에게도 말했다. “돼지야, 돼지야! 너희는 구정물을 주던, 쉰밥을 주던, 썩어가는 음식을 주던 어떤 것을 주어도 투정하지 않고 잘 먹는구나. 나도 너희들 닮아 좋은 음식을 먹는 셈 치고 아무것이나 투정 부리지 않고 잘 먹을게.” 하고 돼지들 하고도 다짐했다.

 

49. 외숙은 학교까지 그만두라 하시고

 

학교 가는 시간 외에는 예습과 복습은커녕 숙제조차 못 하고, 아예 글 한 줄 읽지 못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만 해야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계집년을 학교에 보내면 뭐 하느냐, 눈만 떠주면 된다. 이제 학교는 그만 보내도록 해라.” 하는 작은외숙의 말씀은 여리고 어린 내 가슴을 또 울렸다. 이제 와서 학교까지 그만두라니!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겨우 3학년인 나를 학교 가는 시간마저 빼앗아 일을 시키려고 하여 초조한 마음으로 눈물의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외숙과 반대로 외숙모는 나를 칭찬도 해 주셨고, 일을 잘한다고 먹을 것도 한 번씩 챙겨주셨기에 더욱 열심히 일하면서 어머니와 나는 외숙에게 통 사정을 하였다. 학교만 가게 해주시면 일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숙모는 나에게 짐을 한가득 쌓아놓은 부엌방을 쓰도록 하셨기에 그 좁은 공간이지만 저녁에 그래도 공부할 수가 있었다.

가족이 한방을 쓸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전혀 할 수가 없었지만, 부엌방에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남들이 자는 밤에라도 마음껏 할 수가 있었고 숙제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이불 하나로 가족들이 자면 그 밑에 쪼그리고 누웠다가 발로 차이기도 하며 처절한 고통 속에 힘들게 살다가 외숙모의 배려로 짐으로 가득 차 좁지만 내 방을 갖게 되자 그동안 남몰래 눈물짓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밀물처럼 어린 내 마음에 밀려와 공책이 다 젖도록 울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으려고, 매일 나에게 주어진 힘든 일들로 인하여 손등과 손이 다 터져 피가 흘러도 그 아픔까지도 숨기고 모든 일을 나 혼자 눈물을 삼키며 ‘사랑받은 셈 치고’ 지냈었다. 어머니가 보실까 봐 손을 감추었지만 일할 때 순간순간 나의 손등과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신 어머니께서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나의 고통을 짐작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장사하고 늦게 돌아오셔서 울다 잠이든 불쌍한 딸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가슴 저리도록 아파하셨고, 그런 나를 부둥켜안고 우셨다. 나도 어머니를 안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이제는 너도 이만큼 컸으니 오두막이라도 지어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해 보겠다. 울지 말고 조금만 더 참고 있어라.”라고 하시며 나를 쓰다듬어 주셨다.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해 보겠다는 그 한마디의 말에 나는 금방 생기가 돋아났다.

 

50. 큰 벌레를 내 옷 속에

 

어느 날 하굣길에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함께 가자고 해 “나는 빨리 가서 할 일이 있다.”라고 했더니 자기들도 함께 빨리 가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어떤 선생님은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며 다른 이들을 험담했다. 내가 그들과 말을 섞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하자 “너는 왜 말을 안 해?” 하여 “나는 듣는 것을 더 좋아해.” 하고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까지는 3~4km쯤 되는데 1km쯤 남아 있을 때 갑자기 친구들이 큰소리로 “홍선아, 홍선아!” 하여 돌아다봤더니 “바빠도 잠깐만 있어 봐.”라고 했다. 어느 순간 친구들이 내 주위로 삥 둘러섰기에 “진짜 나 빨리 가야 해.” 하고 돌아서려는데 앞에 있던 한 친구가 붙잡고 한 친구는 윗옷 속에 뭔가를 집어넣었다.

처음엔 찬 기운이 있어 돌인 줄 알았는데 뭔가 꾸물거려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며 옷을 털어 낼 때 친구들은 큰소리로 웃어댔다. 옷 속에서 나온 것은 어른 가운뎃손가락만 한 큰 참깨 벌레였다. 나는 너무 놀라 기절하여 잠깐 그 자리에 쓰러졌다.

친구들이 막 흔들어 깨어났는데 그들은 그때까지도 웃고 있었다. 그들은 재미있어하며 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 큰 벌레의 징그러움에 도저히 사랑받은 셈 칠 수가 없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