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땅과 하늘을 벗 삼아
나는 그일 이후, 무엇이든 말없이 다 받아주는 땅이 더 좋아졌다. 그래서 매일 땅을 내려다보면서 걸으며 ‘그래, 땅아! 나도 너처럼 한없이 내려가 너와 똑같이 될게. 꼭 해야 할 말은 해야겠지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을게. 때리면 맞아주고, 욕하면 들어주는 착한 소녀가 될 거야.’ 하고 땅과의 무언의 대화를 시작했다.
또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하늘아, 하늘아! 너는 늘 아래만 보이지? 더 높은 곳이 없잖아. 나도 너처럼 높은 곳을 올려다보려고 하지 않고 아래만 볼 거야. 내가 너를 올려다보는 건 높은 곳을 바라서가 아니라 아래만 내려다보는 너를 닮기 위함이야. 태양과 달이 뜨거나 눈, 비가 오고 번개가 치고 뇌성벽력이 내려치는 것도 네가 하는 게 아니고 자연의 이치여서 그냥 두는 거잖아.
나도 내가 가만히 있는데 돌이 굴러와 나를 짓이긴다 해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여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거야.’ 하고 다짐했다.
이때부터 주위의 어떤 것도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늘과 땅만 바라보며 다니는 나의 눈에 다른 것이 들어올 리 만무하였다. 그래서 주위에서 누가 지나가도 잘 모르니 선생님이나 어르신들이 인사를 잘 안 한다고 거만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누구를 만나던 인사하는 것만은 최선을 다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도 동네 저 먼 곳의 어른들께도 달려가 인사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면 험담과 판단과 불평들을 늘어놓기에 그런 말이 듣기 싫어 침묵하는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면서 걸었다. 어느새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52. 다 닳은 내 놋수저를 보면서
밥을 지을 때는 항상 뜸 들일 때 누룽지가 눌어 마지막 밥을 풀 때면 누룽지를 숟가락으로 긁어야 했다. 하루는 외사촌 언니가 와서 일부러 내 놋숟가락으로 누룽지를 박박 긁어대더니 “너 다음부터 누룽지 긁을 때 네 숟가락으로 이렇게 박박 긁고 그걸로 밥 먹어. 알았어?”라고 했다. 다른 집에는 누룽지 긁는 숟가락을 따로 두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이라고 하였다.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 숟가락은 점점 닳고 닳아 비스듬히 반으로 줄어들었고, 우리 어머니가 다른 숟가락으로 먹으라고 하셔도 나는 언니 말대로 내 것으로만 밥을 먹었다. 혹시라도 어디를 가게 되더라도 그 숟가락을 가지고 다니면서 밥을 먹었다. 숟가락이 닳으면서 생긴 날카로운 부분에 쓸려 입에 피가 나기도 해서 그곳이 닿지 않게 가만가만 먹었다. 그런데 밥 먹을 때는
괜찮았지만 국을 떠먹을 때는 국물이 떠지지 않고 다 흘러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 수저로 밥을 먹을 때마다 수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혼자 되뇌었다. ‘놋수저야, 놋수저야! 너는 너를 다 내어놓고 누룽지를 긁을 때마다 닳아지니 많이 아팠지? 너의 몸이 다 으스러져도 불평하지 않고 온전히 내어놓은 것처럼 나도 그럴게. 설사 내 몸이 이렇게 닳는다 해도 이웃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불평하지 않고 새것인 셈 치고 살아갈게.
그래서 나는 내 행동이 행여 소홀해질까 봐 이렇게 항상 너를 보면서 소중하게 보관하는 거야. 나도 너무 힘들어 모든 것 포기하고 싶거나 내려놓고 싶어질 때 너를 보면서 말없이 내어주는 너를 닮아 갈 거야.’ 하고 늘 이렇게 다짐하고, 다짐하고 다짐하는 어린 내 눈에서는 이슬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53. 당산나무와 바람에게!
어느 여름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번화가인 신석 다음에 구석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놀고 있었다. 귀순이와 점자랑 근처를 지나가는데 어느 어르신이 오라고 손짓하였다. 내가 그대로 지나치려고 하자 배가 고팠던 친구들이 내 손을 잡아끌어 할 수 없이 따라갔다. 그들은 좋아라하며 떡을 얻어먹는데 나는 얻어먹는 것에 익숙지 않아 먹고
싶은 떡이었지만 먹은 셈 치고, 그냥 그곳에 있는 엄청나게 큰 당산나무 아래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당산나무 밑에 앉으니 햇빛을 가려준 데다가 바람까지 불어와 시원했다. 나는 당산나무와 바람에게 말했다. ‘오, 당산나무야! 너는 이렇게 커서 많은 사람에게 뜨거운 빛을 가려 많은 사람이 시원하도록 해주는구나. 그런 역할을 하기까지 침묵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견디어내어야 했니? 사람들은 햇빛을 가려주는 너에게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 왔듯이 나도 그럴게.
그리고 바람아! 너는 사람들이 더위에 힘들어할 때 더위를 식혀주었지? 때로는 폭풍이 되어야 할 때도 있지만 아마도 피해를 주는 폭풍은 너도 싫을 거야. 그렇지만 하늘의 이치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처럼 나도 내게 주어진 일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숙명으로 받아들여 항상 말없이 최선을 다할게. 내가 많은 일을 했어도 칭찬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할 일을 최
을 다해 왔듯이 말이야.
행여 힘에 부쳐 포기하고 싶어질 때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너희를 생각하면서 모든 이에게 햇빛을 가려주는 역할과 폭풍이 아닌 시원한 바람이 되어 모든 이의 더위를 식혀주는 역할을 하여 사람들 마음에 위로를 주도록 할게.’ 하는데 누군가가 “에이씨.”라고 하며 당산나무를 발로 확 찼다. 눈을 감고 있던 내가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보니 “너는 누구야? 쪼그만 것이 궁상맞게
어른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뭘 생각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발로 나의 엉덩이를 걷어차 깜짝 놀라서 일어나 “죄송합니다.”라고 하는데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아 인사만 꾸벅하고 그 자리에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친구가 “홍선아, 괜찮아? 아팠지?” 하여 “응, 괜찮아. 그 사람이 시합에서 져 화가 나 당산나무를 차고 또 나를 찼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들이 싸울 수도 있었는데 내가 사랑받은 셈 치고 그 화를 받아줬으니
그 사람은 화가 풀렸을 거야.”라고 했다. “뭐야?” “내가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그 자리에 있었던 내 탓으로 받아들여야지”라고 했더니 “너 바보 아니야? 진짜 웃긴다. 발로 차이고도 그 자리에 있던 네 탓이라니? 그리고 거기다 사랑받은 셈 쳐? 야,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라.”라고 했지만, 바보라 해도 좋았다. 내 마음이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니 기쁠 수가 있었다.
54. 아카시아 종자를!
그해 가을, 담임선생님이 아카시아 씨앗 한 홉(180cc)씩을 한 달 안에 따오라고 했다. 초여름에 내 책보를 감추고 자기 엄마와 함께 나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행했던 점자가 “홍선아! 너 그때 구석 마을에서 발로 차이고 매 맞으면서도 사랑받은 셈 친다고 했지?” “응!” “그러면 오늘도 네가 사랑받은 셈 치고 내 아카시아 씨앗 좀 따주라.”라고 했다.
나는 외갓집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내 것만 따는 것도 불가능했다. 왜냐면 씨앗 크기가 좁쌀보다 작았기 때문이다. 꼬투리 하나 까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데 친구들은 아카시아 나무에서 꼬투리를 하나씩 따서 까고 있어 내가 “그러지 말고 꼬투리를 한꺼번에 많이 따가지고 앉아서 계속 까는 게 쉽지 않겠어?”라고 했지만 “너나 잘해.”라고 하였다.
점자는 자신의 엄마와 함께 나를 죽도록 구타한 친구였지만 사랑받은 셈 치고 그 친구 것도 해주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학교가 끝나면 쏜살같이 달려 나와 아카시아 가시에 찔리면서 씨앗이 든 꼬투리를 훑다시피 하여 책보자기에 싸갔다. 외갓집 일을 다 마치면 늘 밤이 됐는데 나는 아무도 모르게 거의 한 달 동안 잠도 설치며 캄캄한 바깥에서 밤새 작업해 두 홉을 만들었다.
외갓집에서 매일 새끼 꼬고, 꼴을 베어 말에게 먹이고, 밥 짓기, 설거지, 아기 똥 걸레까지 빨면서 집안일을 혼자 다 하느라 내 손은 다 부르터 아물 새가 없었다. 그런데 캄캄한 밤에, 행여 누가 볼세라 불도 없는 밖에서 하는 작업은 아무리 ‘불 켜고 환한 곳에서 한 셈 치고’ 해도 터진 손이 너무너무 쓰리고 아파 힘에 부쳤다. 더구나 좁쌀보다 조금 작은 아카시아 씨앗은
까도, 까도 늘어날 줄 몰랐으니 누가 두 홉을 깔 수 있을까?
한 달 안에 씨앗 한 홉을 가져온 학생은 몇 명 되지 않았고, 거의가 아주 조금씩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몫과 점자 몫으로 기어코 두 홉을 해낸 것이다. 늘 혼나기만 했던 점자는 씨앗 한 홉을 가져왔기에 선생님께 칭찬받으면서 의기양양해 했다. 나를 그렇게 구타한 친구지만 그래도 그 모습을 보면서 친구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 있었음에 흐뭇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은 왜 자꾸 내 볼을 타고 흘렀을까?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절규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안 계셔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라도 계시니 저는 아버지가 계신 셈 치고 견딜 수 있어요. 어머니가 저를 늘 때리시는 건 제가 미워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55. 아카시아 잎줄기로 파마와 올림머리를!
아카시아 종자를 받을 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빨리빨리 훑다 보니 잎이 붙은 줄기도 따라 들어왔다. 버리려다가 ‘아, 잎을 훑어버리고 이 줄기로 파마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들 머리를 줄기로 말았더니 완전 곱슬머리가 되었다. 친구들도 따라서 하는데 아무리 가르쳐줘도 끝이 쭈뼛쭈뼛 튀어나와 예쁘지 않으니 친구들이 내게 몰려왔다.
우리 집을 지어 외가에서 나간 뒤에는 시간이 더 자유로워져 원하는 어른들에게도 그렇게 해 드렸더니 “물만 안 닿으면 1주일은 간다.” 하고 좋아들 하셨다. 옛날에 나이 드신 어른들은 거의 낭자를 하여 비녀를 꽂았지만 그래도 괜찮게 사는 분들은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하기도 했다. 하루는 아랫동네에 사시는 멋쟁이 이모가 소문을 듣고 나에게 왔다. 그분은 “신석 미용실에
가서 올림머리를 했는데 금방 풀렸다. 네가 한번 해봐라.”라고 하셨다.
내가 머리를 풀어 다시 올림머리를 해 드렸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미용사 뺨치겠네!”, “미용사보다 훨씬 예쁘게 했다.”라고 하며 다음에도 해 달라고 했다. 파마머리는 잘 되는데 생머리는 흘러내려서 잘 안되었기에 아카시아 줄기로 파마를 하여 올림머리를 하면 오래간다고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찌 어린 것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이것
또한 주님께서 예비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6. 오두막집을 마련하고
오두막집이라도 마련해보자고 하시던 어머니께서는 고향에 가서 집 지을 나무를 하나씩 얻고, 자자일촌을 이루고 사는 외가 동네에서는 마름(이엉을 엮어서 말아 놓은 단)과 짚을 얻어 산속에 집을 짓기 시작하셨다. 큰외숙이 목수 일을 하시고 작은외숙과 여러분들이 도와주셨는데, 나도 집 짓는 데 가서 신이 나게 일을 도왔다. 우리의 보금자리가 생긴다는 것 때문에 너무나 신이
나고 기뻤기 때문이다.
온갖 고생 끝에 방 두 칸과 광, 마루, 그리고 부엌이 딸린 황토 흙담집을 완성해 이사했다. 작은외숙은 그동안 어머니가 버신 돈을 다 가져가셨는데 겨우 180평짜리 논 하나 주셨다. 그래도 이제는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마음 설렘도 잠시뿐, 산에다 집을 지어 놓으니 나는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산에는 우리 집 한 채만 있었는데, 어머니가
장사하러 가시고 나면 혼자 집에 있게 되었다.
요강을 쓰지 않았던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너무 무서워 날이 밝을 때까지 그대로 참아야 했다. 산을 깎고 지은 집이기에 겨울에 눈이 오면 서릿발(땅속의 물이 얼어 기둥 모양으로 솟아오른 것)이 일어나 마당이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눈을 치워야 했다. 어린 내가 눈을 치우기에 무척 힘이 들었지만, 아무도 없으니 ‘여럿이 한 셈 치고’ 나 혼자서 눈을 쓸고 울면서 언
손을 ‘호호’ 불며 녹였다.
배가 고파도 어머니가 너무나 고생해서 벌어야 했기에 양식이 있어도 밥을 조금 먹거나 아니면 먹은 셈 치고 봉헌할 때가 많았다. 그래야 거지가 찾아오면 내 몫을 먹여 보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밥도 먹지 못한 채, 10리나 되는 거리의 학교를 고픈 배를 움켜쥐며 외롭게 갈 때가 많았다. 방과 후에 아무도 없는 빈집으로 돌아오면 산새 소리만이 외로운 나의 가슴을
달래 주었고, 푸른 하늘 높이 두둥실 떠가는 새하얀 구름만이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57. 어머니는 그 지역 최고의 과방장(果房長)
우리 집이 생겨 외갓집에서 일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나를 불러 또 일을 시켰다. 그래도 저녁에는 집에서 편하게 잘 수 있으니 한결 수월했다. 어느 날 노깽이 아재 집에서 잔치를 했는데 그의 동생 모람새 아재가 나를 데리러 와서 갔더니 잔칫집에 아이들이 많이 와있었다.
그 당시에는 먹을 게 부족해서 어느 집에 잔치가 있으면 동네 아이들은 모두 몰려나와 전 부스러기 하나라도 얻어먹기 위해 과방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과방에서 일하던 자기 엄마가 보이면 달려가서 뭐라도 하나 얻어오면 아이들은 서로 뺏어 먹으려고 달려들었다. 완전 거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지만 배고프던 그때 그 시절에는
그랬다. 나는 아귀다툼을 하는 그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쳐서 집으로 와버렸다.
밤에 어머니가 오셨는데 내가 먹을 만큼 음식을 가져오셨다. 나는 “어머니, 그런 거 가지고 오지 마셔요. 그 집 음식 부족하면 어떡해요. 난 안 먹어도 ‘맛있는 거 먹은 셈 치니’ 괜찮아요.” 했다. 어머니는 “내가 가져온 거 아니고 그 집에서 싸준 거야. 아까 너 데려다가 먹이려고 모람새를 보냈는데 네가 도망가 버렸다고 너 갖다주라고 싸줬어. 어서 먹어.”라고 하셨다.
“예,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나는 평상시에는 접하지 못하는 그 맛있는 음식들을 다 먹고 싶었지만 ‘다 먹은 셈 치고’ 조금만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작은외갓집 동생 점영이와 길영이에게 먹으라고 갖다 줬더니 허겁지겁 금방 다 먹었다. 나는 그 애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내 배가 부른 듯 마음이 흐뭇하고 뿌듯했다.
다음 날 밤, 잔칫집 일을 끝내고 돌아오신 어머니가 대나무로 만든 큰 석작(상자)을내려놓으시며 “홍선아, 노깽이 아재 집에서 너 먹으라고 이걸 보냈단다.”라고 하셨다. “뭔데요?” “이바지야.” “무슨 이바지요?” “잔치 때 다른 사람들은 주방 일을 좀 도와주면 그 자식들이 계속 들락거리니까 그럴 때마다 음식도 사라진단다. 그런데 그 집에서 “홍선이는 과방장까지 하는 어머니가 있는데도 주방 근처에도 얼씬거리지도 않는다.”라고 해서 어머니가 “홍선이가 ‘음식이 부족하면 어떡하냐!’며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고 하니 ‘착한 줄은 알았지만, 아직 어린 것이 속도 꽉 차부렀네이.’ 하면서 이렇게 음식을 한 석작이나
줬단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시골에서 음식을 다 만들어 잔치를 했다. 그리고 사돈댁에 보내는 이바지도 석작으로 3~4상자를 해 가는데 세상에 나에게 한 상자나 보내 주시다니!
“어머니 기왕에 가져오셨으니 이 음식으로 우리 모두 나누어 먹어요.”라고 하자 어머니도 “그래, 그렇게 하자.”라고 하셔서 그 음식을 이웃과 외갓집까지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나는 귀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모두와 함께 나눌 수 있어 너무너무 기뻤다. 어머니는 이 음식보다도 딸이 칭찬받는 것이 기쁘셨고, 나는 어머니가 음식에 전혀 손도 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음식 솜씨나 과방장으로서 최고’라고 칭송받으시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과방(果房) : 큰일을 치를 때 음식을 차려놓고 내가는 곳
석작 : 대나무로 네모지게 짠 뚜껑이 있는 상자로, 주로 제사 음식이나 이바지 음식을 담는 고급 상자로 쓰였음.
* 작은영혼의 모친은 음식솜씨도 좋았지만 매우 영리하셨다. 그래서 동네에 잔치가 있으면 늘 뽑혀가 주방과 과방의 총 책임자로 일했는데 책임을 맡으면 잔치가 끝날 때까지 음식이 모자라지도 않았고 많이 남지도 않았다.
58. 겨울엔 거지를 내 옆에 재우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그 당시에는 무슨 거지가 그리도 많았는지 며칠 지나면 오고 또 왔다. 여름엔 작은 방에 재우면 됐지만, 겨울엔 불을 땐 안방 내 옆에다 잠을 재웠다. 때로는 그들이 더럽게 생각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만약 내가 저렇게 돼 아무도 안 재워주면 어땠을까? 겨울에 얼마나 춥고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떤 누구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사람이 처음부터 거지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처럼 부잣집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불행해질 수도 있고, 거지로 태어났지만 좋은 곳에 입양되어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그 누구도, 거지라고 돌을 던져서도 안 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지의 편에 서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리라.’ 하고 다짐했다.
당시 어린 나는 추운 겨울에도 땔감이 조금밖에 없어 이틀에 한 번 불을 때고 추위만 겨우 면하고 잤다. 나는 아궁이에 소나무를 넣고 부뚜막에 올라가, 키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있는 힘껏 아궁이 입구로 내리쳤다. 아궁이 깊숙이 바람을 세게 불어 넣어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궁이 앞에 서서 바람을 부치면 열기가 솥으로도 올라가고 아궁이 밖으로도 빠져나가
열 손실이 크다. 부뚜막에 올라서서 부치면 키가 아궁이 입구를 막아줘 바람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고, 불길도 아궁이 깊숙이 들어가 솥을 데우지 않고 구들로 열이 바로 전달된다. 그러면 소나무를 한 번만 넣고 불을 때도 추위를 면할 수가 있다. 나무도 절약하고 방도 따듯하게 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거지들이 찾아오는 날엔, 그들을 더 따뜻하게 재워주고 싶어서 소나무에게 필요하지 않은 생솔 옆 가지를 골라 베어다가 아궁이에 세 번이나 땔감을 넣어 불을 땠다. 나는 따뜻한 물로 거지를 씻긴 뒤, 한 상에서 반찬 한 가지라도 똑같이 나누어 먹으며 식사를 하고,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게 하여 그들의 추위를 달래주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밥을 해 먹기 때문에 나무를 더 많이 때도 방이 그렇게까지 따뜻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밤에 군불을 땔 때 나무를 두 번만 넣고 내 방법으로 했더니 어머니가 “그것만 때도 방이 따뜻하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런데 방이 따뜻하니 어머니가 놀라시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라며 대견해하셨다.
생소나무는 물기를 머금고 있어 불쏘시개로 불을 붙여도 잘 붙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더구나 생소나무 잔가지들을 아궁이에 두세 번 넣어 불을 때서는 물이 데워지지도 않을 정도인데 방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내가 거지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가상히 보신 주님께서 해주신 일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들을 하느님을 알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집에 계실 때는 거지든 장사꾼이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 중학교 과정인 고등공민학교에 진학한 나는 ‘사람은 모두 존엄성을 갖고 태어났기에 높고 낮음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신념이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어린 나를 찾아온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장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거지와
장사꾼들은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천사들이거나 혹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율리아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직접 찾아오신 것일 수도 있다.”라고 하셨다.
59. 땔 나무 할 때는 이렇게
나는 늘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더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가 화가 나시면 사정없이 때리기도 하시지만, 그것은 딸이 미워서가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장사 다녀오시면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밥을 드실 수 있도록 땔감이 떨어지지 않게 늘 가득 쌓아 놓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우리 초등학교는 무척 컸지만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등교했다. 오전반이면 더 괜찮은데 오후반일 때는 일할 시간이 줄어들어 땔감 걱정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리했다. 봄, 여름에는 낫으로 땔나무를 베어올 때도 있었지만, 가을 이후에는 거의 매일같이 갈퀴로 땔감을 마련했다. 그래서 가을에 노랗게 단풍이 들어 떨어지거나 나무에 붙어
있는 솔잎을 갈퀴 자루로 털어서 잎이 떨어지면 긁어모아 가져왔다.
그 당시 산에는 커다란 멧돼지도 많이 있다고 해 나는 나무 할 어른들을 찾아 같이 가서 나무를 했다. 다른 이들은 소나무 하나를 털어서 긁어모았지만 나는 그 근방을 쭉 둘러보며 어느 곳에서 하면 효율적으로 빠르게 더 많이 할 수 있을지 봐가면서 소나무 여럿을 한꺼번에 털어 긁어모으니 짧은 시간에 어른들보다도 몇 배는 더 많이 했다.
한번은 일요일에 아줌마들과 함께 갔는데 그들이 나무가 적으니 좀 달라고 해서 내가 적게 한 셈 치고 조금씩 줬는데도 많았다. 나는 나무를 수북이 모아놓고, 일부만 큰 뭉치로 만들어 힘들게 이고 집에다 내려놓았다. 다시 나무를 가지러 갔더니 그 많은 나무가 다 없어졌다. 마음은 아팠지만, 그 나무를 안 한 셈 쳤다.
그리고 그 나무로 땔감을 사용하여 얻게 될 따뜻함이 헐벗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이들에게 온기로 흘러 들어가길 염원했다. 나는 ‘나무를 몰래 가져간 사람은 나 때문에 도둑이 되는 거니까 내가 죄를 짓게 한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심평 아재와 동춘 아재에게 내가 해놓은 나무 3분의 1을 줄 테니 지게로 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두 분은 두 바자기를 우리 집에 져다 주고 한 바자기는 가져갔다. 두 분이 힘이 덜 들게 나는 나무를 최대한 많이 머리에 이고 왔다. 이 사실을 안 몇몇 분이 “힘들게 한 나무를 그렇게 많이 주면 아깝지 않느냐?”라고 했다. 나는 “제가 조금이라도 노력하여 나눌 수 있어서 좋고, 가져다주시니 제가 힘들지 않아 좋은 데다 또 다른 사람이 도둑질 안 하게 되니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요.”라고 했다.
그분들은 “요 쪼그만 것이 뭔 속이 그렇게 넓다냐?” 하시며 “너 진짜 아깝지 않냐?” 하셔서 “네. 제가 나무를 조금 한 셈 치면 되고, 나누니 뭐가 아깝겠어요.”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어른들은 “애가 천성이네! 천성이여!” 하며 기분 좋게 웃으셨다.
60.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았던 악몽 같은 3일
어머니께서 한 번 장사 나가시면 3~4일 만에 오시기에 어린 내가 큰 가마솥에 불을 때고 밥을 지어 먹어야 했는데, 몸이 아플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던 추운 겨울 어느 날,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때다가 ‘옻’이 올라 배와 아랫도리까지 전체가 땀띠 같은 것이 올라와 그 가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온몸의 앞쪽으로는 모두 다 번져 심하게 아파 걸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기에 부엌에 있는 물조차 뜨러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어머니를 기다리며 밤낮 3일을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셔서 어린 딸이 그 심한 고통 중에 혼자 있는 모습을 보시고, 너무나 불쌍하고 안쓰러워 목이 메도록 슬피 우셨다. 나의 치료를 위하여 여러 방법을 쓰신 어머니의 정성으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던 몸이 서서히 좋아지긴 했지만, 마음은 늘 춥고 외로웠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제가 있는 셈 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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