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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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새끼줄 그네에서 새로운 그네로 바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그네 4개를 오동나무 밑에 설치했다. 당시 학생들은 새끼줄로 엮은 작은 그네만 타다가, 높은 나무에 매달아 놓은 그 그네를 보자 욕심이 생겨 그걸 타기 위해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에도 늘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한 사람이 앉아 있으면 한 사람은 서서 굴려 주는데, 학교에서는 내가 그네를 제일 잘 굴린다고들 했다. 그네 위에 있는 오동나무 가지가 머리에 닿으면 아주 잘 탄다고들 하는데, 6학년 학생도 닿은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굴려 보고 싶다며 나에게 아래에 앉아 굴리라고 야단이었다. 그러자 여럿이서 한꺼번에 부탁을 해 그렇게 했는데 모두 치마가 펄럭일 때마다 냄새가 얼마나 고약하게 나는지 다시는 앉아서 굴리지 않았다. 나는 오동나무가 머리를 지나 턱까지 닿곤 하니, 학교 전체에서 인기가 대단하여 6학년 언니들까지 나를 찾았다.

물론 남학생들도 나를 찾았지만, 그들에게는 응해주지 않았다. 면 소재지의 학교로는 다른 곳보다 학생 수가 몇 배가 많았는데 그네는 4개밖에 없어 몇 달이 지나도록 그네를 한 번도 타 보지 못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탈 수 있었다. 내가 가면 모두 다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기쁨이 되고자 최선을 다해 그네를 탔다.

 

62. 회전 그네와 팔씨름

그네 잘 타기로 유명해진 나에게 학교에 울력(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함.) 나온 어른들도 “그네 잘 타는 윤홍선이 누구냐?” 하며 나를 찾았다. 수줍어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던 나였지만 그들이 앉아 있으면 원하는 대로 내가 굴려 주었다. 그중에 잘 탄다는 다른 아이들을 불러 그네를 굴리라고 하니 어른들이라 무거워서 아무도 굴러주지 못했다. 그랬더니 나에게 회전 그네를 타 보자고 했다.

나는 자신 있게 어른들과 함께 갔더니 그네 잘 탄다는 아이들 몇몇이 따라왔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지그재그로 앉아서 회전 그네를 탔다. 얼마 안 가서 다른 아이들은 모두가 다 떨어져 다쳤고 나만 멀쩡했다. 그러자 나에게 빙 둘러서 어른들 위로 날아보라고 했다. 나는 내 자리에서 어른들 위의 반대로 돌아서 굴러 높이 날아 내 자리로 사뿐히 내려와 회전 그네를 계속 굴려 어른들과 함께 타게 되었다. 어른들은 “무슨 이런 아이가 있느냐?”라고들 했다.

그 자리에는 큰외갓집 큰오빠도 계셨다. 그래서 더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가려고 하자 얘가 힘이 굉장히 셀 것 같다고들 했다. “얘야, 너 팔씨름해 봤냐?” “아니요.” “그럼 해 볼래?” “아니요.” 하자 그들은 “팔씨름해서 얘가 이기는지 못 이기는지 내기하자.”라고 했다. 내가 안 한다고 했으나 그들의 반강제에 못 이겨 자신은 전혀 없었으나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팔씨름을 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내가 그 어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이겼다. 나도 놀랐다. 처음 한 사람 이겼을 때는 어쩌다 그랬겠지 했으나 모두를 다 이겨 내다니! 어른들 몇 사람과 팔씨름을 계속하면 힘이 빠지기도 하련만 마지막엔 바로 넘겨 버렸다. 그것을 본 아이들은 더 나한테 그네를 굴려 달라고 했다. 그때는 ‘와, 내가 이렇게 힘이 세구나.’ 하였다. 그렇지만 누가 나를 때려도 단 한 번도 상대편을 때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님을 알고 나서야 사랑 실천할 때의 그 힘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주신 일임을 알게 되었다.

 

63. 죽었던 나를 살려주신 분은?

 

매미가 평화롭게 울어대던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많은 학생이 쉬는 시간을 이용해 운동장으로 몰려나와 나를 찾았다. 그네에 오른 나에게 그들은 “더 힘껏 굴려봐.”라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신나게 그네를 굴렸고, 그걸 본 아이들은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윤홍선 최고야!” 그 소리에 나는 더 신이 나서 그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기 위하여 높이 치솟아 오르니 오동나무가 가슴에 닿았다. 최고 기록이었고,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나는 학생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오동나무 사이로 화답해주느라 웃어 주었다.

 

64.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다

 

나는 어딘가 아름다운 곳을 산책하고 있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아름다운 꽃들이 있고, 나비들이 날아다니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새들과 나비들은 다정스럽게 내 어깨에 앉았다 날아가곤 했다. 눈에 띄는 모두가 나를 반겨 주었다. 새들의 합창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음악 소리도 나를 마냥 기쁘게 하였다.

행복에 겨워 꽃밭을 거닐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기야, 아직은 때가 안 되었으니 어서 너를 낳아 기른 네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거라.” 하는 순간 두리번거리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귓가를 스치는 울음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나를 붙들고 울고 계셨고, 내가 누워 있던 곳은 우리 집 안방이었다.

장사를 나갔다 3일 만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방에 들어오시다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딸을 보고 놀라셨다. 밤이 아니면 절대 눕지 않던 딸이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이상한 느낌을 받고 가까이 다가가 흔들면서 “홍선아! 홍선아!” 하고 불렀는데 어머니 손에 닿은 딸의 체온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내가 죽음에서 깨어나자마자 어머니는 비틀비틀 잘 걷지도 못하는 내 손을 잡고 걸려서 병원에 데리고 가셨다. 의사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주사를 잘 맞자 “이렇게 주사를 잘 맞으며 인내심이 많은 애는 처음 봤다.”라며, 3일 전에 내가 그네에서 떨어져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업혀 와 주사 맞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머니와 나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정신을 잃고 그네에서 떨어져 혼수상태가 된 나를 아무도 없는 우리 집에다 그냥 눕혀 놓고 가서 나는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나게 된 것이다. 하마터면 딸이 죽었어도 모를 뻔한 3일을 생각하며 어머니는 목 놓아 우셨다.친구의 말에 의하면 오동나무가 가슴에 닿자 “윤홍선 최고야!”라고 할 때 내가 내려다보며 웃음 짓다 그대로 거꾸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머리가 먼저 땅으로 떨어지면서 “쿵!” 소리가 나도록 크게 다쳤는데도 피도 안 나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좋아했다 한다. 그런데 의사가 주사를 놔주면서도 “얘는 금방 죽을 것이다.”라고 하니 친구들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그것이 뇌출혈이어서 죽었었는데 주님께서 예비하셔서 살려 주셨음을 누가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어머니는 장사를 그만두자니 딸을 가르치기 어렵고, 장사를 계속하자니 딸의 신변이 걱정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하시며 딸이 불쌍하고 안쓰러워 우신 것이다. “어머니 괜찮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상처 자국도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3일간이나 혼자 빈방에서 죽어 있었지만, 그 이후로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렇게 자만했던 나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분이 하느님이셨음을, 그 당시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65. 우등상 대신 노력상을 받다

 

내가 6학년이 되었을 때 중학교 진학 이야기가 나왔다. 작은외숙은 당신의 아들 동갑내기 동생은 중학교에 보내기로 하고, 나에게는 “여자가 무슨 중학교에 가느냐!”라고 하시며 노발대발하므로 나는 중학교에 간 셈 치고 포기해야만 했다. 그런데 나에게 격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6학년 담임이신 이일헌 선생님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불러 안타깝게 말씀하셨다. “우등상을 네게 주어야 하는데, 줄 수 없는 내 마음을 이해해다오. 교장 선생님의 딸, 의사의 아들, 면장의 딸, 세력 있는 분들의 자제들 때문에 네가 제외되었으니 이해해다오.” 그러시면서 “예전에 없던 노력상을 만들어 너에게 주기로 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다오.”라고 하시는 제자에 대한 선생님의 배려심이 너무나 고마웠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나에게 진실을 밝혀 주시는 그 마음이 눈물겹도록 감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나에게 광주여중 원서를 써주시면서 “너는 전남여중도 갈 수 있으나 돈 때문에 갈 수 없으니 광주여중에서 열심히 하여 장학생으로 학교에 다니기 바란다.”라고 하시며 격려와 사랑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66. 호화로운 궁전에서 공주가 된 셈 치고

 

선생님께 더 감사했던 것은 당신의 사비를 들여서 주신 상품이 바로, 사랑의 선물인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책 한 권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셈 치고의 영성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너무나 소중한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그동안 모든 것을 셈 치고 살았지만, 이제 초라한 한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더 기쁘게 호화로운 궁전에서 공주가 된 셈 치고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바로 ‘소공녀’였다. 전체 1등 교육감상을 탔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무익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셈 치고 살아가는 나를 격려하시는 주님의 사랑이었음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67. 젖의 의미

어느 날 선생님은 몇몇 학생들을 불러 U자보다 옆이 더 넓은 그림을 그려놓고 “여기다 너희들이 생각나는 그림을 그려 보거라.”라고 하셨다. 나는 그림 밑에 젖꼭지 하나를 순식간에 그렸다. 다른 아이들은 밥그릇으로, 꽃 화분으로, 아주 여러 가지의 그림이 나왔다.

밥이 수북이 담아진 그림을 보시고 “너는 밥은 굶지 않고 살겠다.” 등등 여러 가지 설명을 하신 뒤 내 그림을 보신 선생님은 “와, 윤홍선은 사랑이 많아서 욕심 없이 다 퍼주겠네. 젖은 내가 가진 자양분을 아이들에게 다 짜내어 먹이는 거잖아. 너무 많은 희생이 따르겠는데? 어떻게 주기만 하냐?”라고 하셨다.

* 이것은 훗날 많은 영혼을 양육할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68. 사랑받은 셈 치고 용서했다

 

아버지를 모함하여 아버지 대신 중학교로 영전했던 그 사람이 후환이 두려워 경찰들과 합세하여 영산포 장에 가시던 아버지를 붙잡아 죄인으로 몰아넣어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시지 못하셨다. 사람들이 “네가 커서 꼭 복수해라.”라고 하여서 나는 ‘아버지는 반란군의 이발을 해준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교감에서 중학교로 영전 가시려던 아버지를 내치고 자기가 가기 위해 동료인 아버지를 모함한 것이니 그 억울함을 밝혀내고야 말리라.’라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억울하다고 그들을 고발한다면 그들은 불행해질 텐데 그러면 나에게 돌아올 이익이 무엇이겠는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도록 용서해 주자. 우리는 복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이기에 이 슬픔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어머니만이라도 허락해 주심을 감사하자.’라고 생각하고 그때부터는 ‘아버지와 형제가 있는 셈 치고’ 살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마을에서 돼지만 잡아도 울고, 어머니께서 닭만 잡아도 울었던 모질지 못하고 마음 약한 나에게 다 잊고 잘 살아가라고 위로는 못 해줄망정 크면 복수하라고 부추겼던 사람들이 야속했지만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이해하고 다 나를 위한 것이니 사랑받은 셈 쳤다.

 

69. 호남 로켓 공장에 취직하다

 

1961년, 광주에서 제일 좋은 여중이 전남여중이고 다음이 광주여중인데 6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집 형편을 아시고 나는 전남여중을 충분히 갈 수 있는데 형편이 어려우니 장학금을 받고 다니라고 광주여중 원서를 직접 사다가 써 주셨다. 그러나 작은외숙이 원서를 쫙쫙 찢어버리고, “가스나 년이 중학교 가서 뭐 하느냐?” 하며 나를 끌고 가다시피 하여 건전지를 만드는 호남 로켓 공장에 취직시키셨기에 나는 공녀가 되어 일하게 되었다.

본래 나에게 주어진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이 칠해져 있는 양철을 암모니아수로 지우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그 일을 나에게 맡기고 내가 하던 쉬운 일을 그가 했다. 그래도 나는 쉬운 일 하는 셈 치고 맡은 일을 다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장갑을 껴야 하는데도 장갑을 주지 않았고, 돈이 없어 살 수도 없었기에 그냥 하다 보니 너무 힘이 들었다.

조금만 깨끗하지 않아도 야단을 맞으니, 손이 아플 것을 무릅쓰고 암모니아 묻은 양철을 맨손으로 만지게 되었다. 어느새 내 손에서는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내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누구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묻지도 못해 늘 주눅이 든 채 언제나 움츠려 들어있었다.

또 그 공장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는 이도 없었기에 더욱 어려워 눈치만 살피다가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언제나 셈 치고 살았던 나는 공장에서도 중학교에서 공부하는 셈 치고 일했으며 아파도 건강한 셈 쳤으며 밥을 먹지 못하고 굶주릴 때도 ‘진수성찬에 아빠와 함께 오순도순 밥 먹은 셈 치고’ 그렇게 모든 것을 셈 치고 살다 보니 혼자서 굶주려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아파도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손이 너무 많이 아파서 능률이 오르지 않았기에, 눈치만 보이고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돈이 없어서 약도 바를 수가 없어 상처는 더욱더 깊어져만 갔다. 아무리 사랑받은 셈 치고 산다고 해도 어린 내가 그 일을 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손이 터져 피가 나올 때도 양철을 만져야 하니, ‘맛있는 음식을 만지는 셈 치고’ 일을 해도 너무 많이 아프기 때문에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손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니 어깨, 겨드랑이까지 결리기 시작하였는데 그 고통은 죽음보다 더욱 심한 고통이라고 느껴졌다. 15살의 어린 나이로 참을 만큼 참고, 인내하고, 사랑받은 셈 치고 극복하려 했지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울면서 공장을 나와야 했다. 다 터져 피가 흐르는 손을 보면서도 작은외숙은 나의 사정은 헤아리지도 않으신 채 그런 나를 때리고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등 그 노여움과 성화는 대단하셨다. (월급은 작은외숙이 다 가져가셨음)

 

70. 엄마와 서울로

 

진학을 하지 못하고 공장도 그만둔 나는, 배우고 싶은 욕망밖에 없었다. 외숙의 성화에 못 이긴 어머니와 나는 울면서 외숙 몰래 서울로 올라갔다. 친척 오빠가 서울로 올라오면 미용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갔는데, 우리가 소개받은 곳은 국회의원 이○○의 집이었는데 하숙도 치는 집이었다. 그 집 아저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홍선이는 너무 착하고 영특하고 예쁩니다. 아까운 아이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대학까지 보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배우고 싶은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기에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올해는 늦었으니 내년부터 학교에 가도록 하자.”라고 했으나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애태웠던 나는 하숙생이었던 대학생에게 공부를 부탁했고, 그동안 하숙집의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아침에 아이를 보행기에 태우고 나가서 보고 싶은 내 아버지를 그리며 한강 한 바퀴를 돌았다. “아버지 어디 계시나요? 내 아버지 어디 계시나요? 거지라도 좋으니 돌아와 주세요, 이 딸이 보고 싶지도 않으시나요?” 배가 고픈지,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울며 아버지를 찾다가 밤이 이슥해지는 것도 몰라, 가끔 주인 집에서는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루는 공부를 시작하자고 한 대학생이 영어책을 구해다 주면서 꽃을 사 오라고 500원을 주었다. 250원어치 꽃을 사다가 거스름돈을 주었더니 “그건 너 가져.”라고 하면서 나를 포옹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2층에서 뛰어 내려와 그 즉시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어머니를 졸라댔다. 그러나 아무리 뿌리 내리지 못한 생활이라 하지만,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