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제목 없음
   

목차 보기 1

목차 보기 2

목차 보기 3

목차 보기 4

 

   
   

 

 

 

 

 

71.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떡을 거지 아저씨에게

 

서울로 불러준 오빠가 울고 있는 나를 데리고 여러 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창경원에도 가고 오빠의 회사에도 데리고 갔다. 그때 대학교에 다니던 오빠의 여자 친구들이 나를 보더니 너무 예쁘다며 안고, 볼을 비비고, 뽀뽀를 하여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너무나 행복했다. ‘시간이 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오빠의 이모 집에 갔는데 돈암동 시장이었다. 처음 보는 맛있는 떡들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후에 그 떡집에 심부름을 가게 되었는데 떡 몇 개를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먹고 싶은 떡이었지만 어머니 생각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주인 보는 데서는 먹는 척하고, 기름이 묻어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않게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에게 먹으라고 준 떡이었지만 내 주머니에 넣었을 때 도둑질을 한 것처럼 왜 그렇게도 많이 떨렸는지….

‘이 떡을 어머니께 드리면 얼마나 맛있게 잡수실까? 행여 나에게 먹으라고 한다면 나는 거기서 많이 먹었다 하고 어머니 잡수게 해야지.’ 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가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지 아저씨를 발견하게 되었다.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생각으로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떡을 망설이지 않고 꺼내어 어머니가 맛있게 잡수신 셈 치고 모두 건네주었다.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뿌듯한지 내 배가 다 불렀다.

 

72. 나는 또다시 부부 교사의 집으로

 

영어를 가르쳐 준다는 대학생이 나에게 치근덕거려 어머니에게 집에 내려가자고 했으나 기왕에 올라왔으니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하셔서 그 윗집 부부 교사가 있는 집으로 가서 아기 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외가에서 아기 돌볼 때 소문이 날 정도로 아기를 잘 봤는데 아기 어머니는 남편과 싸움만 하면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아기를 잘 돌보지 못한다고 자꾸 윽박지르고 머리를 때렸다. 그분이 웃는 모습을 가족 안에서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일하니 행복한 분위기의 가정이 너무 부러웠지만 ‘행복한 분위기인 셈 치고’ 살았다. 혹독한 그분의 성격 때문에 일이 힘에 겨웠다. 매는 맞을 수 있지만, 눈이 너무 무섭고 주눅까지 들어 견딜 수가 없어 어머니에게 계속 졸라댔다. “어머니, 우리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요. 네?”

그러나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하셔서 또다시 어머니가 계신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 대학교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던 주인아저씨가 처음엔 나의 손을 잡더니 나중에는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 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즉시 어머니를 졸라, 짐을 챙겨 고향으로 내려왔다. 내려가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캐묻지 않으셨으나 짐작하시고 내 뜻에 따라 주셨던 어머니가 눈물겹도록 고마워 앞으로 더욱 큰 효심으로 잘해드려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다.

 

73. 어머니는 다시 장사를, 나는 학교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남자가 무서워 무작정 내려와 어머니만 피곤하게 해드리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다시 장사를 시작하셨다. 나는 학교 못 간 애들 몇몇을 모아 동네 서당에서 야간에 중학교 과정을 함께 공부하였다. 배우고 싶은 욕망이 그만큼 컸다. 우리 동네는 교육열이 낮아 중학교 나온 사람이 딱 한 명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남녀공학인 고등 공민학교가 봉황소재지에 설립되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면사무소에서 모든 걸 주관했는데 처음에는 선생님과 학생들을 모아 초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거기서 선생님들이 돈을 조금씩 내서 두 칸짜리 고등공민학교를 만들었다. 우리 동네에는 100여 호가 살았는데 남학생 2명, 여학생 3명이 그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동네 어른들은 가만히 있는 아이들을 부추겨서 그렇게 하도록 선동했다며 나에게로 화살을 퍼부었다. 따가운 시선으로 눈총을 주는 건 물론 심지어 우리 어머니에게도 “딸자식 가르쳐서 뭐 하느냐?”라고 하며 야단들이었다.

 

74. 교복도 직접 만들어 입다

 

교복을 맞추려면 돈이 꽤 들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영산포 장에 가서 교복 천을 끊어 직접 만들어 입었다. 바지는 미군들이 입던 중고바지를 사서 검은색으로 염색하여 만들었다. 그 당시는 다리미질하기가 쉽지 않아 바지를 매일 잘 개켜 요 밑에 넣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탁소에서 다린 것처럼 줄이 서게 되어 새것 같았다.

교복 웃옷 하얀 깃 카라도 2개를 만들어서 감자로 갈분을 내어 풀을 먹여 항아리에 붙여놓았다가 사용했다. 그러면 다림질한 것처럼 반듯하게 된다. 나는 깃을 매일 빨아서 교대로 달아 깨끗하게 하고 다니니 다들 부러워하였다. 자신들은 어머니가 안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언제 그걸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어렵게 버신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평상복도 싼 천을 사서 예쁘게 지어 입었다.

 

75. 농한기에 들에 나가서도

 

농한기에는 시골에 일손이 부족하여 학생들도 들로 나가 보리도 베고, 나락도 베었다. 일을 도우러 가면 학생들은 거의가 한 번에 한 포기씩만 슬슬 베며 농땡이를 치지만, 나는 ‘편하게 쉰 셈 치고’ 한 번에 세 포기씩 세 번을 순식간에 베어 그들 몫까지 하려고 애써 노력하였다. 그들은 내가 9포기 벨 때 겨우 한 포기 베었기에 새참 시간에도 ‘새참을 먹은 셈 치고’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했다. 친구들은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그런다고 비난했지만, 사랑의 말을 들은 셈 치고 가능한 한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다. 일이 끝난 뒤 주인들이 “어떻게 그리도 일을 잘하느냐? 우리보다 더 잘한다.”라고 하며 따로 먹을 것을 챙겨주면 그것도 내가 먹은 셈 치고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줬다. 남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고, 조금일지라도 친구들이 못다 한 몫까지 할 수 있었음에 흐뭇할 수 있었다.

 

76. 시련은 계속 내 곁에서

 

공부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선생님들이 모두 나를 예뻐하니 또다시 급우들의 시기 질투로 모함이 시작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이들이 많아 시기 질투가 더욱 심했다. 2학년 때, 국문과, 문학 선생님이 나에게 1학기까지 나오다 그만둔 한 여학생을 나에게 찾아 학교에 나오도록 하여 공부 좀 가르쳐 주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그 학생을 수소문하여 찾아가 학교에 나오도록 권유하여 방과 후에 영어며, 뒤처진 여러 가지 과목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나를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무슨 음식이든 내가 생각나 집에서 혼자 먹을 수가 없다며 학교에 가져와 함께 먹었다. 어느덧 그 친구의 진도가 거의 다 따라오게 되었다.

그때쯤, 한동네에 살던 두 여학생의 모함과 이간질이 시작되었다. 그 둘은 나와 그 친구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내가 하지도 않은 말들을 마구 해댔다. 예를 들면, 친구는 목걸이를 찬 적이 없는데, “윤홍선이가 너더러 목걸이를 찼다고 했다.”라고 하는 식이다. 평소에 말이 없던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친구는 나에게 확인도 하지 않고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그렇게 믿었던 홍선이가 그럴 수 있어?”라고 하며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들을 퍼부으며 나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들과 합세하여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친하게 지내며 나를 괴롭혔다. 내가 그를 맡아 가르쳤던 것은 그와 친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사랑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선생님 말씀에 순명하여,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뒤로 하고 사랑으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기에 해명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사랑받은 셈 쳤지만, 남몰래 흐르는 이슬방울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자라는 친구가 내 곁으로 다가와 “이렇게 착한 너를 왜 미워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처음에는 그 애들이 욕하니까 네가 그렇게 나쁜 아이인 줄 알았어. 내가 계속 지켜보니까 너는 정말 순박하고 착한데 왜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로 너를 괴롭혔는지 이해가 안 돼. 그 애들 정말 이상해! 나도 그 애들과 함께 너를 나쁜 애로 생각해서 욕하고 미워했던 것을 용서해 줘. 이제 나하고 친하게 지내자. 응?” 하며 “네가 안 한 것은 안 했다고 말해! 네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너를 배신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괜찮아. 그렇게 확인도 안 하고 그 애들 말만 듣고 험담하는 그런 애하고는 가까이 안 하는 게 나아.” 하자 “맞아.” 하며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그 친구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친구 아버지는 양복점을 하셨기에 여유가 있었는데 내가 배고플 땐 눈치를 채고 데리고 나가서 풀빵도 사주었다. 우리는 서로 울고 웃으며 우정이 듬뿍 담긴 눈물 젖은 빵을 함께 먹었다.

그러나 나를 헐뜯던 그 친구들이 계속해서, 하지도 않은 행동까지 했다고 지어내 별의별 소문을 다 퍼트려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했기에 공부도 되지 않았다. 나는 사랑 받은 셈 치고 잘살아 보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면서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기만 했다. 그런데 주님을 알고 나서야, 주님께서 나를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친구까지도 멀리하게 하시기 위한 계획이셨음을 알게 되었다.

 

77. 재단과 바느질하는 것을 눈여겨보고

 

친구 박정자는 가끔 나를 집으로 데려가 맛있는 걸 먹이곤 했는데 부엌에서 뭐 한다고 방에 혼자 있으라 하면 방문을 열고 내가 보이도록 했다. 행여 뭐가 없어지면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였다.나는 정자 아버지가 재단하고 재봉질하는 것을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재봉틀이 있는 친척 집에 가서 천을 재단하고 재봉질을 해 옷을 만들었다. 그걸 보고 모두들 “아니, 어찌 그렇게 잘할 수 있느냐?”라고 하며 놀랐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어머니랑 천을 사다가 대충 어림잡아 교복을 만들어 입었는데 이제는 바이어스도 비스듬히 재단해 여러 가지 옷을 확실하게 만들 수 있었다.나는 어려서부터 무슨 일이든 한 번만 봐도 다 할 수가 있었고, 표정만 봐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알아차리고 모든 일을 해왔기 때문에 누구한테도 “너 왜 그러냐?”, “너 뭐 하는 거야?”란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어른이 물 마시고 싶어 한다는 생각에 물을 떠다 드리면 “너, 내가 물 먹고 싶은지 어떻게 알았니?” 하며 놀라는 일이 빈번했다. 나는 거의 이렇게 살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예비하신 삶이었음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 성모님이 발현하신 뒤, 주님께서는 작은 영혼의 이런 재능을 거둬가셨다. 사랑이 많은 작은 영혼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재능을 사용할 것이 뻔한데 그러다 보면 자칫 성모님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이 재능이 필요할 때는 필요한 만큼 허락도 하신다.  

 

78. 시신 없는 아버지의 묘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그 당시 비신자였던 어머니는 행방불명이 되어 소식이 없는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이제는 돌아가셨다.’ 하고 체념하시며, 법사를 모시고 초혼장해서 아버지 묘를 만들어 드리기로 하셨다. 가까운 문중 산에 모시기로 하고, 우리 일행은 음식을 장만하여 길을 떠났다.

그때 조부모님의 이장까지 함께하기로 했으므로, 조부모님과 아버지의 묘를 거의 팠을 때,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안 된다고 반대하여 실랑이가 벌어졌다. 비까지 오는데 이런 난감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집안 어르신들과 모두 타협이 되어 결정한 것이었는데, 일이 잘못되자 어머니는 통탄하며 우셨고 그 모습을 본 나도 따라 울었다.

그때서야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아신 집안 어르신들이 여기저기 알아보시고 나서 ‘나주 산포면 내기리’라는 곳으로 모시고 가서 조부모님을 합장해 드리고 아버지를 안치했다. 우리 일행이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 동네 친척들이 쉬었다 가라고 하여 쉬고 있는 도중, 회의를 한다고 하여 나와 어머니는 밖으로 나와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79. 어머니께서 얻은 양자

 

친척 어르신들의 회의가 끝난 후 어머니와 나를 들어오라고 하시기에 방에 들어갔더니, 어떤 아이를 우리 앞에 데려오셨다. ‘누굴까?’ 하고 생각하는데 어르신들이 “이 아이는 이제 너의 동생이다.”라고 하셨다. 갑작스러운 말씀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 아이를 한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아이는 귀엽게 생겼다. ‘오! 나에게 동생이 생기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내 마음은 기쁨으로 벅차 소리 없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날 우리는 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이의 이름은 ‘윤흥선’이고, 나의 이름은 ‘윤홍선’인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나와 같은 무송 윤씨 집안 5남매의 3형제 중 둘째 아들인데,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다가 우리 집에 양자로 오게 된 것이다.

3대 독자의 딸로 태어난 나는 가까운 친척도, 형제도 없이 외롭게 지내다가 갑자기 동생을 얻게 되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양동생을 데려다가 공부를 시켰지만, 그 애는 공부는 잘 안 하고 놀기만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일을 해서라도 이 동생만은 잘 가르쳐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켰다. 그것이 나의 기쁨이자 희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동생에게 “흥선아! 공부 열심히 해야 해, 응? 아무리 어려워도 이 누나가 너만은 대학까지 가르쳐 줄게, 함께 노력하자. 너는 농부가 되지 말고 아버님의 뒤를 이어 훌륭한 학자가 되어야 해, 알았지?” 하고 말했더니 동생은 “어떻게 대학 다녀?” 하고 물었다. 나는 자신 있게 “이 누나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너만은 대학까지 보내주겠다.”라고 약속했고, 그날 우리는 어렵더라도 열심히 공부해 대학까지 가도록 노력하자고 함께 다짐했다.

 

80. 택시기사와 짜고 한 시간 동안을

 

윤흥선을 양자로 삼아 우리 집에 데리고 왔지만 ‘호적에 입적시켜야 되는데 혹시라도 아들을 내어주고 후회하지나 않나?’ 싶어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산포면 내기리에 있는 시골집으로 그의 부모님을 찾아갔다. 그들은 “흥선이는 이미 네 동생으로 내어주지 않았느냐? 걱정하지 말고 이제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였다.

나는 봉황면에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려고 광주에서 다도면으로 가는 버스 시간에 맞춰 나갔다. 흥선이 친누나가 차 타는 신작로까지 바래다줬는데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왔다. 나는 그녀와 함께 우산을 쓰고 버스를 기다렸는데 두 대가 동시에 왔다. 그녀가 한 버스를 가리키며 “저게 다도 가는 차다. 어서 타!” 하여 그 버스를 탔다.

그런데 가는 길이 이상해서 기사에게 물어봤더니 다른 방향이었다. 나는 분기점인 영산포 터미널로 되돌아왔는데 이미 우리 마을로 가는 막차가 떠나 버렸다. 택시 타고 갈 형편이 못 돼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봉황에서 약국을 하는 약사가 “어? 윤홍선, 왜 여기 있는 거야? 차를 놓쳤어?”라고 하였다. “예.” “그럼 잘됐네. 내가 택시를 타고 갈 건데 같이 가자.” “예, 감사합니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약사가 자꾸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창밖만 내다보았다. 그런데 목적지 중간쯤에서 택시가 섰다. “왜 안 가지요?”라고 했더니 운전수는 “차가 고장 나서 못 간다. 수리공이 와서 고쳐야 갈 수 있다.” 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그렇게 퍼부어 대던 비도 어느새 그쳐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약사도 따라 내렸는데 운전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약사가 자꾸만 말을 걸며 곁으로 다가오기에 나는 이리저리 피하면서 ‘아버지, 저를 지켜주세요.’ 하고 속으로 부르짖으며 계속 달아났다. 한 시간가량을 그렇게 실랑이를 했는데 기사가 나타나 수리공이 못 온다며 차를 몇 번 흔들더니 이제 고쳐졌으니 타고 가도 된다고 하여 약사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아무 일이 없었기에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그날 약사는, 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한 시간의 택시비를 더 얹어주고 택시기사와 짜고 그렇게 하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느님을 알고 나서야 그날 밤 무사했던 것 또한 주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이미 하느님께서 내 친아버지가 되어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