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부풀었던 기쁨은 잠시뿐
중학교에 다니던 동생은 입버릇처럼 공부하는 것이 꼴 베는 것보다 싫다고 하였다. 우리 집에 오기 전에는 학교에도 다니지 않았고, 집안일을 도와주며 소 키우고 꼴을 베러 다녔기에 그 일이 그리웠나 보다. 자유롭던 아이를 데려다가 갑자기 공부시킨다고 붙들어 놓으니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동안 외로웠던 나는 동생을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에 남자 동생이 생기니 얼마나 든든했던가! 손을 잡고 함께 다니기도 하고, 놀이도 하고, 학교에도 같이 갔다.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은 “공부가 싫어. 나중에 내가 커서 자가용 타고 누나랑 어머니랑 태우러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양동생이 떠난 뒤, 나는 허전함과 허탈감 속에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과 실망으로 채워지곤 했다. 내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이 좌절과 실망을 나는 반드시 희망과 기쁨으로 바꾸어 보리라고 또다시 다짐했다. 어차피 없었던 동생이었으니 없었던 셈 쳐 보지만 마음 한구석은 텅 빈 듯이 허전했다.
82. 우리 집 작은 방에 신혼부부가 이사를!
내가 중학생 때, 방앗간을 하는 형님을 도와주던 모람새 아재가 결혼했는데 집이 없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모람새 아재가 결혼하여 큰집에서 나와야 되는데, 돈이 없어 살아갈 집이 마땅치 않아 힘들어한대요. 우리 작은 방에서 그냥 살게 하면 어때요?” 어머니는 “그러자.”라고 하셨다. 우리 작은 방에는 부엌이 없었기에 일꾼을 사서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부엌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아재 부부를 우리 집 작은 방으로 이사 오라고 하여 혹시라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내가 먹은 셈 치고 그 아짐을 드렸다. 어머니가 안 계시면 언제나 혼자였던 내게, 사람이 있으니 든든하고 좋았다. 그런데 아짐이 임신해 어느새 배가 남산만 해졌다. 나 혼자 있을 때 밤에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머니께 배운 대로 준비했다. 언제 낳을지 모르니 가위도
미리 삶아 두었는데 내가 학교에 간 뒤 아이를 낳았다.
계획한 일이 없어진 만큼 나는 다른 일로 그 아짐을 도와드렸다. 밤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면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온 셈 치고 봉헌하면서 그때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주 열심히 일하여 돈을 모아 집도 사서 나가고, 나중에는 ‘장다머니’라는 곳에 있는 방앗간을 인수하였다. 방 한 칸 얻기 힘들 정도로 어려웠던 그들이 성공한 것은 우리 모녀의 큰 기쁨이요,
보람이었다.
83. 장사꾼들과 거지들이 머물러 가는 집
어머니께서 장사를 나가면 3~4일 걸렸는데, 무거운 물건을 이고 산골 마을을 걸어 다니면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을 것이다. 내가 겪어 왔던 배고픈 설움과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하면서 장사꾼들과 거지들이 찾아오면 밥도 먹여주고 따뜻하게 잠도 재워주고 보냈다. 때로는 너무나 측은해 보이는 이들에게는 없는 옷이지만 옷도 입혀서 보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을 ‘장사꾼들과
거지들이 머물러 가는 집’이라고 일컬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고서야 어찌 배고픈 설움을 알 수 있겠는가! 굶주림 속에서 울며 먹던 눈물 젖은 빵의 맛을 말이다. 어느 날, 한 장사꾼을 밥을 먹여주고 잠을 재워주었더니 조금 있던 돈과 물건들을 훔쳐 갔다. 또 어떤 날은, 거지를 재워주었더니 자신의 보따리에서 물건이 없어졌다고 얼마나 성화를 부리던지…. 거짓말인 거 뻔히 알면서도 조금 있던 쌀과 보리쌀을
퍼주면서 사랑으로 달래어 보내고 나면 내가 그만큼 먹은 셈 치고 굶어야 했지만,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흐뭇함에 혼자 미소짓곤 했다.
이런 일들이 있는 날은 그들에게 먹이고 내어준 만큼 이틀이고 사흘이고 온전히 굶으면서 먹은 셈 치고 봉헌했다. 가족 거지들이 왔을 때는 10인분의 밥을 해서 먹이고 나면 나는 10끼를 굶었다. 어머니의 장사가 잘돼 양식은 떨어지지 않았으나 고생하시는 어머니 생각에 ‘내가 먹은 셈 치고’ 그만큼 굶고 봉헌한 것이다. 고맙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때로는 무지막지하게
행패를 부리는 이들도 있어 그럴 때면 ‘오죽하면 그럴까?’ 하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당했던 일과 배고픔을 어머니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응당 내가 받아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지만, 그들이 집 없이 떠돌아다니며 굶주리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며 고통을 받는다 생각하니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그들을 돌봐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굶어 배가 고파도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흐뭇하고 기뻤는지!
내가 받아왔던 고통이 너무나 컸기에, 불쌍한 사람들만 보면 사랑을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불타올랐다. 가진 것이 없어 그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나에게는 안타까움이자 큰 아픔이었다. 나는 혼자 눈물을 훔쳐내면서 이런 아픈 마음을 독백으로 달래곤 했다. 그동안 거지나 장사꾼들에게 먹이느라 며칠간씩 안 먹고 굶는 일이 많았지만 나는 늘, 잘 먹고 잘사는
집 아이들보다 건강했다.
지금 돌아보니 어머니가 계실 때는 거지나 장사꾼이 한 번도 오지 않았고, 한번 다녀간 거지나 장사꾼도 다시 오지 않았다. 거지들은 잘해주면 또 찾기 마련인데 단 한 번도 새로 찾아오지 않았음은 주님과 성모님께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84. 아버지, 어디로 가셨나요?
아버지 제사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행여나 돌아오시지 않을까 하여 낮에는 밖을 내다보며 눈물짓고, 밤에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아버지를 불러 보았다. “아버지! 아버지! 어디로 가셨나요. 멀고 먼 황천길에 누굴 따라가셨나요. 못 가라고, 못 가라고 울며불며 잡았건만 왜 갔나요, 왜 갔어요. 인자하신 우리 아빠, 밤마다 꿈길에도 아빠, 아빠 부릅니다.”
하고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어느 날 방과 후에 나는 이문희 선생님과 함께 나에 대한 시를 읽으며 마음속으로 울었다. 선생님들은 나를 굉장히 잘 사는 집의 딸로 보셨기에 늘 말없이 땅만 내려다보며 인사도 안 한다고 거만하게 여기셨는데, 가정방문을 하셔서 우리 집의 형편을 보시고는 모두 놀라워하셨다. 함께 시를 읊었던 선생님은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시며 나에게 그 의지를 살려 노력하여 잘살아 보라고
위로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의 미움을 더 받게 되었지만, 늘 그 시를 생각하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하였다.
85. 소녀는 외롭지 않다
소녀는 외롭지 않다.
비록 하늘 같은 파파가
소녀와 가정을 버렸다 해도
그리고 위안의 말 한마디 들을 수 없이
오빠와 언니와 동생이 없다 하더라도
소녀에겐 봄빛같이 따사로운 마마가 있다.
이리처럼 잔인스레
전율을 느끼게 하는 폭풍우의 심야도,
헐벗은 맨발에 동상을 입히는 싸늘한 설한풍도
결코 소녀를 외롭게 할 순 없다.
대지보다 더 든든하고
하늘의 보료보다도 더 부드러운
마마의 변치 않는 숨결이 있지 않던가.
천애 고아가 모두 통곡하고
약은 중생이 한가지로 한숨짓는
추야장 달빛 밝은 야반에도
소녀의 얼굴에는 장미꽃 같은 웃음만이 번지리.
외로움을 넘어, 험한 삶의 파도를 넘어
소녀의 붉은 마음은 아침 해를 잉태하는
동녘 하늘과도 같이 그윽한 미소를 금칠 않아.
비록 서 있는 오늘의 지점이
하늘 끝, 바다 끝 보이지 않는
망망 대 해상의 조각선 위라 해도,
어쩜 다시 황량이 말라버린 모래알만 풍기는
뜨거운 지역에의 사막 한가운데라 해도
마마의 숨결이 살아 있는 소녀의 마음은 외롭지 않다.
86. 연애편지의 배달부
국문학 이문희 선생님께서는 홀로 “교육이 힘이다.”라며 학교에 헌신하셨다. 다른 많은 선생님들이 자신의 시간만 채우고 소재지에 가서 놀거나 유흥을 즐길 때 이문희 선생님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찌그러져 가는 세 칸 집을 보수하셨고, 손수 흙을 날라다 볏짚을 잘라 흙과 함께 짓이겨 벽에 미장까지 하셨다. 나도 선생님을 도와 등에 물집이 잡히고 껍질이 다 벗겨지도록 지게로
흙을 날랐다. 밤이 되어 캄캄해서 안 보일 때는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남폿불을 비춰 드리면 선생님은 벽을 바르셨다.
이렇게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에는 매일매일 일을 했지만, 선생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 고되지 않고 무척이나 기뻤다. 수업 시간에는 영어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영어 시간만 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 시간만 되면 혼자 손들고 발표하고 무엇이든 혼자 다 한다며 ‘영어 시간은 윤홍선의 시간’이라고들 했다.
영어 선생님도 이런 나를 좋아하시고 칭찬해주셨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양장을 가르치는 여선생님과 사귀면서 나에게 연애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셔서 난 사랑의 배달부가 되었다. 결국, 두 분은 결혼하셨다. 결혼식 때 선생님들이 우인으로 따라가셨는데 학생 대표로는 초등학교 교장 딸과 나, 둘만 가게 되었다. 서로 가고 싶어 했던 터라 그 후 난 여학생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기 시작하더니 온갖 모함으로 이어졌다.
자신들은 남학생 여학생이 한 방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나를 거기에 빗댔다. 너무너무 심한 악성 유언비어를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고 잘살아 보려고 애를 썼지만 공부가 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학생들 말만 듣고 학교를 그만두라고까지 했다. 어느 선생님은 나에게 열심히 일하시는 이문희 선생님까지 엄청 나쁜 사람으로 세뇌시키기도 했다. 나는 믿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부터 간절하게 배우고 싶었던 영어를 비롯하여 모든 공부가 다 멀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고 생각하려 했는데 모두가 이방인 같았다. 그러나 사랑받은 셈 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다.
87. 어디 가서든지 가지런히 정돈을
나는 어디를 가든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 친척 집이나 이모님 댁이나 어디를 가도 무엇이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으면 ‘우리의 질서가 잡혀야만 가정과 사회와 세상의 질서도 잡힌다.’라는 마음으로 항상 바로바로 정리했다. 그래서 집주인이 돌아와 어지러웠던 집이 정리되어 있으면 “홍선이가 왔다 갔구나.”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너 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지?”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해 왔던 일이었기에 나 혼자 정리 정돈하는 일을 누구도 모르게 숨어서 했는데도 선생님들이 어떻게 알고 나를 더 예뻐하시니 친구들의 시기 질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런 나는 늘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로 모함을 받았다. 그들은 “홍선이는 아버지 제사도 친구 정자와 거지들을 앉혀놓고 지낸다.”라고 하며 놀려댔지만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중학교 선생님 중에 외재종당숙인 홍 선생님의 여조카 둘도 나와 한동네에 사는 같은 반 학생이었다. 그 둘은 시기 질투가 특히 심했다. 모함 거리가 떨어지니 나중에는 “홍선이는 생활이 문란하다.”라는 끔찍한 모함을 했다. 홍 선생님은 그들의 거짓말을 당사자인 나에게 확인도 않고 다른 선생님들에게 전했다. 그러자 선생님들이 나를 제적시키겠다고 한 일도 있었다.
당시는 남녀가 같이 걸어가기만 해도 손가락질을 하던 때였다. 그런데 홍 선생님의 조카들은 남학생들과 학교 옆에서 밤을 새우고 놀고 한방에서 잤는데도 그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내 친구 정자는 나를 제적시킨다고 하자 화가 나서 “네가 죄가 있다면, 남의 흉보고 험담하고 판단하는 거 싫어서 하늘과 땅만 보고 다닌 죄와 거지들을 챙겨준 죄밖에 없는데 너를
제적시킨다고? 가서 따져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따질 거 뭐 있냐? 나만 결백하면 됐지.” 했더니 “넌 억울하지도 않아?”라고 했다. “난 괜찮아. 어찌 되던 하늘에 맡길래.” “아이고 참말로, 죄는 지네들이 다 짓고 너에게 덤터기 씌우네. 나쁜 것들!” 나는 선생님들을 찾아가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면 나를 모함했던 그 친구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고, 그러면 그들이 앙심을 품어 또 다른 죄를
지을 수 있고, 서로가 더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를 잘 아는 이문희 선생님께서 “죄 없는 윤홍선을 제적시키면 나도 학교를 그만두겠다.”라고 하시자 선생님들은 아무 소리도 못 했다 한다. 이 선생님이 아니면 학교를 이끌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이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그 사실을 45년 만에 만난 이문희 선생님께서 알려주셔서야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나를 고통의 화덕에 넣어 철저하게 단련시키셨으나 일촉즉발의 위기에서는 늘 구해주셨는데 과묵하고 사려 깊으신 이문희 선생님을 나에게 보내신 것은 바로 하느님의 섭리였다.
88. 어머니를 위하여 한 생을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무척이나 하고 싶은 영어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나의 마음 한구석은 늘 텅 비어 있었다.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면서 온갖 모함과 악성 유언비어로 시달리다가 졸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고등학교에 가는 친구들도 많은데, 나는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간 셈 쳐 보지만 슬픈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학교에 가는 셈 치고 이제는 일하자, 어머니를 위하여 일하자. 그동안 나 하나만을 위해 모진 고생을 하시며 한 생을 아낌없이 바쳐 오신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를 위하여, 이제부터 내가 열심히 일해 편안하게 모셔야겠다.’ 그렇게 결심하니 나의 마음은 기쁨과 희망으로 부풀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를 위하여 이제부터 부족한 제가 한 생을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89. 미용학원을 지망하고
1965년 봄,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할 상대를 찾아 학교에 가서 가정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이 미용을 하면 좋겠다고 권유하시고 친절하게도 나를 직접 데리고 광주 충장로에 있는 서울 미용학원으로 가서 접수하게 해 주셨다. 졸업 후 6일 만이었다.
나는 상하 방을 전세로 사는 이모님 댁에 가서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좁은 집에 내가 끼어 있으니 더욱 비좁아져 미안한 마음에 학원 기숙사로 옮겨가기로 했다. 기숙사는 다다미로 된 큰방 하나가 전부였는데 거기에서 그 많은 학원생이 연탄불에 밥도 해 먹고 잠도 잤다. 쌀 조금, 냄비 하나,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한 벌, 양념간장을 가지고 학원으로 향했다.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돈이 적게 들도록 모든 생활을 줄여서 했다. 미용 재료도 최소한 적게 샀고 식사도 성인의 한 끼도 안 되는 한 그릇의 밥을 하루에 나누어 먹었는데 반찬은 양념간장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진수성찬인 셈 치고 먹었으니 나는 항상 부잣집 딸이었다.
친구들이 어떻게 간장으로만 밥을 먹느냐고 묻기에, 나는 행여 어머니께 욕이 될까 봐 “우리 어머니가 많은 반찬을 해주시는데, 나는 이 반찬이 제일 맛있어.”라고 했더니 원생들이 바꾸어 먹자고 했다. 다른 반찬이 없어서 그런다고 판단하지 않게 하도록 간장을 주고도 그 애들 반찬은 한 번도 먹지 않았다. 그들이 간장을 먹어 보더니 “우와, 정말이네. 이렇게 맛있는 양념간장은
처음 먹어 본다.”라고 했다. 나는 간장 하나로 진수성찬에 배불리 먹은 셈 치고 먹으니 이렇게 먹고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머니께 무한 감사를 드렸다.
90. 힘든 나날들
미용기술을 배우면서 실기나 이론, 모든 것을 잘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고졸, 대졸의 원생 둘이 “네게 배울 것이 너무 많다.”라며 자신들이 자취하는 데 함께 있자고 했다. 쌀도, 방값도 내지 말고 공짜로 함께 지내며 미용기술을 좀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생하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가 번 돈을 조금이라도 축내지 않기 위하여, 고생할 것을 무릅쓰고 그들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자취방은 학원에서 멀리 떨어진 극락강 쪽에 있었다. 나는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밥해 먹고, 5시에 출발하여 7시에 학원에 도착했다. 두 시간 동안 그들을 가르치고 학원 수업을 받은 후 끝나면 또다시 두 시간 동안 가르쳤다. 하루에 왕복 4시간을 걷고, 4시간을 가르치고, 8시간을 배웠으니 하루에 16시간의 중노동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어머니가
힘들게 모은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었기에 행복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서로가 모르게 나와 더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귀한 물건들을 구해 선물하기도 했으나 내가 받지 않자, 서로 흉을 보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남을 중상모략하고, 흉보고, 욕하는 것인데…. 나 때문에 그들의 사이가 나빠진다는 걸 용납할 수 없어 그 집을 나와 기숙사로 왔다. 그들 사이는 다시 사랑으로 돈독해졌다. 이 세상 사람들의 그 끈질긴
시기와 질투는 언제쯤 사라지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