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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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작은외갓집은 우리 집으로 이사를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안방은 이미 작은외숙 가족이 쓰고 있었고, 우리 짐은 작은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작은외숙이 완전 망하여 갈 곳이 없어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다 한다. 우리는 작은방 하나밖에 쓸 수 없었지만 모든 것 다 가진 셈 치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주객이 전도되었다고들 했다. 외사촌 언니는 재봉틀로 바느질을 하여 근근이 생활하였고, 나도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내서 도와주면서 내 옷도 재봉질로 손수 해 입었다.

 

92. 기숙사에는 불이 나고

 

어머니께서 시골에서 올라오셨다는 전갈을 받고 이모님 댁으로 갔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학원 동기 두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 “지금 학원 기숙사에 불이 나 물건들을 찾아야 하니 빨리 가야 한다.”라고 하였다. 너무 놀라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은 마구 뛰었다. 급히 기숙사로 달려가 보니, 나의 물건은 이미 하나도 없었다. 불이 나서 밖으로 다 내던져졌다는 것이다.

아래에 내려가서 몇 가지 물건은 찾았는데, 일기장이며 이제까지의 사진들과 하나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둔 어머니께서 주신 돈은 찾지 못했다. 그동안 고생하며 먹고 싶고, 입고 싶은 것을 먹는 셈 치고, 입은 셈 치며 모아둔 돈도 돈이지만, 소중한 사진들과 일기장까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으니 말문이 막힐 뿐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원래 없었던 셈 치고 봉헌했지만,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93. 모두가 축하해 주었는데

 

학원을 더 다니자니 돈이 걱정이고, 그렇다고 그만두자니 아직 취직할 정도의 기술이 안 되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한 점잖은 중년 부인이 미용 연습을 하는 내 곁으로 다가와 한참을 바라보다가 갔다. 얼마 후, 그분은 학원 원장님과 함께 나에게 다가와 “윤 양 모습을 보니 내가 배울 때와 비슷해서 내가 윤 양을 데려다가 기술을 가르쳐 일류로 키우고자 하는데, 어때? 꼭 성공시켜 주겠으니 우리 집으로 가지 않을래, 응?” 하였다.

원장님도 나에게 “윤 양에게 훌륭한 미용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으니 축하해! 저분은 미용계에서 이름이 있는 훌륭하고 유력한 분이신데, 윤 양이 무척 마음에 들어 꼭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 하시니 정말 다행스럽고 잘된 일이야!”라고 하시기에 너무나 기뻤다. 이것이야말로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있던 나는, 기쁘게 그분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는 미용실에 취업하기가 무척 어렵던 시절이어서 학원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얻지 못해 기다리고 있는 원생들이 많이 밀려 있었다. 얼굴이 예쁘지 않거나 뚱뚱해도 취업이 잘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모두가 부러워하면서 축하해 주었다. 시간을 얻어 집에 내려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대뜸 화를 내셨다. “내가 너 학원 졸업도 못 시켜줄까 봐 그러냐? 빨리 가서 학원 졸업하고 취직해, 알았어?” 라고 하시며 돈을 손에 쥐여주셨다.

나는 어머니께 순종하기 위하여 주어진 그 좋은 기회를 포기하였으나 다시 학원에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연구과를 졸업하려면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어머니께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씀드리면 빚을 내서라도 돈을 마련해주실 분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터였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께서 그만큼 더 고생하셔야 했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부족한 기술을 가지고라도 취업을 하기로 했다.

그동안 연구과 학생들에게 모델을 서줄 때 눈동냥을 했기에 조금은 할 수 있었다. 생각처럼 취직이 여의치 않아 나에게 찾아왔던 그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하지만 좋은 자리에서 최고의 예술혼을 피워내는 셈 치고 내일을 꿈꾸며 푸른 하늘 위로 아쉬운 마음을 띄워 보냈다.

 

94. 배우지도 않았는데 예쁜 고데 파마가!

 

나는 취직하기 전에 커트와 파마하는 것을 눈여겨보고 집으로 내려와, 처음으로 외사촌 언니를 실습 대상으로 삼아 머리를 해주었다. 과감하게 커트하고 파마를 했는데 너무나 예쁜 고데 파마가 되었다. 그 정도면 전남에서 가장 비싸고 잘하는 충장로에서나 나올 수 있는 고데 파마라고들 칭찬이 자자했다.

 

95. 미용실에 취직했는데

 

용기를 얻어 광주 호남동에 있는 미용실에 취직했는데, 머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아기를 맡겨 아기를 업고 미용실에서 시중을 들었다. 잠자리도 없이 미용실의 딱딱한 긴 나무 의자에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우며 좋은 침대에서 잠잔 셈 치고, 그 집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가방 하나 놔둘 자리조차 없어서 미용실 안집 좁은 선반에다가 짐을 두면서 좋은 내 방에 둔 셈 쳤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앉아 보지도 못하고 일만 해야 했던 나는, 아기를 업고 미용실 일을 시중들면서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힘에 겨운 중노동이었지만 호화로운 궁전에서 미용하는 셈 치고 했다. 나에게는 잠자리도 없었고, 짐을 가져올 때는 미용실 밖으로 나가 대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늦은 시간에 일이 끝나면 대문은 이미 잠겨 버렸고 미안하여 대문을 열어 달라고도 못 했다. 잠자리도 없고 내 짐조차 마음대로 만질 수도 없는 처지에 밤마다 눈물지으며 좋은 잠자리에서 잔 셈 치고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공무원이던 주인아저씨가 “윤 양은 미용실에서 일하기가 너무 아깝다.”라고 하시며 다른 곳에 취직을 시켜준다고 하여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미용실 건물 주인의 아들인 남자대학생이 내 짐을 뒤져서 일기장을 보고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그를 피해 고향 집에서 조금 쉬고 있는데, 미용실 주인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검사의 비서 자리가 있다 하여 그리로 가기로 결정하고 기다렸는데 출근하기로 약속된 날짜가 임박해서 “검사님께서 서울 대검찰청으로 발령이 나서 가시게 되었으니, 서울로 같이 가자.”라고 하셨다.

꿈을 펼쳐 볼 수 있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시골에 가서 어머니와 외숙들께 말씀드리니 서울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기에 포기해야 했다. 검사 비서 자리의 여러 후보 가운데 대학까지 나온 검사님의 처조카도 있었지만, 검사님이 굳이 나를 택하셨는데 “계집애를 혼자 어떻게 서울로 보내느냐.”라며 극구 반대하신 것이다. 배우고 싶은 열망에 불타던 어린 마음, 고통으로 뒤범벅이 된 여린 가슴이 또다시 상처를 받아야 했다. 나도 떳떳하게 누구 못지않은 사회인이 되고 싶었고 나의 꿈을 펼쳐 보고 싶었다.

나를 소개해주신 분은 “이런 좋은 기회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라며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딸자식 하나 키워서 뭐 하려고 혼자 고생하며 살아?” 하고 빈정대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하여 내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드리고 싶었고, 어렸을 때의 고생을 바탕 삼아 훌륭한 사회인으로 거듭나 남 부럽지 않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가족들의 반대로 눈앞에 찾아온 행운을 놓쳐야 한다니…. 외가댁과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포기해야 하는 쓰라린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좋은 기회가 없었던 셈 치고 봉헌했지만, 이건 나에게 또 하나의 비극으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뜻이라면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어차피 어머니의 뜻대로 살기로 했는데…. 그분은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결정지은 일이라며 많이 애석해하시며“대학원 나온 처조카를 물리치기까지 부인과 상당한 갈등도 있었지만 다 물리치고윤 양이 더 마음에 들어 윤양을 원했는데, 검사님께서 서울로 가시게 되니 할 수 없군요.” 하였다.

 

96. 남자에 대한 결벽증 때문에

 

검사님의 비서직을 포기하고 나서 큰 허탈감에 빠져 지냈지만, 곧 어머니를 생각하며 자격 없고 부족한 나를 추천해준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검사님의 비서직을 한 셈 치고 우울한 감정들을 애써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기 위해 다시 미용실에 취직했다. 그리고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일과 행동에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이것은 어머니가 가장 바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자나 깨나 내가 “애비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노심초사하셨다. 그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아버지가 계신 셈 치고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 못지않게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어머니에게 딸에 대한 걱정을 덜어 드리고, 남편 잃은 슬픔을 드리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는 곳마다 남자들이 치근대며 나와 가까이하려고 했다. 그런 빌미가 생기기만 해도 주인이 나를 내보내기가 아쉬워 사정하며 붙잡아도 나는 기어이 그 미용실을 뿌리치고 나왔기에 돈을 제대로 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사람들은 “윤 양은 남자들에 대한 결벽증이 있나 봐, 남자들이 잡아먹나 뭐?”라고 하며 놀릴 때도 있었다.

 

97. 혈액형 검사에서

 

월산동 미용실에서 손님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데 어떤 분들이 와서 혈액형 검사를 한다고 했다. 주인 언니와 미용사들이 검사한 뒤 나에게도 하라고 하였으나 나는 사양했다. 그전에 제로라고 놀려대던 일이 생각나서였다. 그런데 주인 언니의 성화에 할 수 없이 했더니 O형이라며 모두가 놀랐다. 그들은 “윤양은 손님한테 인사도 못 할 정도로 너무 내성적이어서 O형은 절대 아니다.”라고 우겨 세 번 연속했는데 계속 O형이 나와 모두 “믿기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렇게 내성적이어서 인사도 못 하는데 어떻게 O형이 나올 수 있느냐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자 혈액검사를 한 사람이 “이 아가씨는 원래 굉장히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삶이 이 아가씨를 이렇게 만들었다.”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관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혈액형이 제로가 아니라 O형이란 걸 알고 나니 전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놀림을 받았던 초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나 씁쓸히 웃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병원에서 의사들이 와서 귀에서 피를 빼내 검사를 한다고 했다. 모두들 A형, B형, AB형이 나오는데 나만 제로라고 했다. 아이들은 “너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어머, 그럼 나는 뭐지?’ 선생님들도 “어? 이상하다. 홍선이가 그렇게 나올 리가 없는데….”라고 하셨기에 혈액형이 틀렸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한 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가 봐.’ 하며 잠깐 고민했으나 외가댁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잊어버렸다. 그런데 3학년 때 또 혈액형 검사를 했는데 또 제로라고 했기에 나는 혈액형이 0(제로)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98. ?나가면 신사, 들어오면 일꾼―생활력이 강한 여자?라고 신문에 보도

 

직장에서 쉬는 날 집에 내려갔더니, 어머니께서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계셨다. 방아를 찧기 위해 2km 떨어진 장다머니 방앗간에 벼를 가져가야 하는데, 삯꾼을 사려 해도 없다 한다. 방앗간에 벼를 가져갈 수가 없으니, 쌀이 없어서 밥을 지어 먹지도 못하고 계셨던 것이다. “상순댁은 남편이 없어도 너와 동갑인 아들을 길러 놓으니 나락을 지게로 방앗간에 져다 주어 방아를 찧어 오는데, 나는 딸을 낳았으니 방아도 못 찧어 오는구나.”라고 하셨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어머니와 함께 울고 말았다. 외가 마을에 살면서 외가 친척들이 많은데도 이런 작은 도움조차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어머니, 제가 할게요. 아들 못지않게 어머니 편히 모셔 드릴게요.” 하고 말씀드리고 나서 벼 한 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방아를 찧어 오니 어머니의 슬픈 마음이 풀렸다. 일거리를 찾았더니, 어머니께서 당신 혼자 농사를 짓고 계셨던 터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퇴비를 밭에 내야 하는데, 망태기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시니 일이 줄지를 않았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이제 일을 하시지 말라 당부하고, 직장에서 쉬는 날이면 집에 와서 소처럼 일했다. 내가 한 일은 쟁기질만 빼고 농촌에서 하는 일은 거의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퇴비 내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심평 아짐이 어머니께 “형님, 일꾼을 못 얻어서 안달하더니, 어디서 그렇게 상일꾼을 얻었소? 거름을 수북하게 한 바작씩을 져 나르데요. 나도 그 일꾼을 얻어야겠소. 도대체 누구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만족하게 웃으시며 “우리 홍선이여~”라고 하셨다. 그분은 “우메 우메, 시상에! 어떻게 그렇게 일을 잘한다요? 형님, 이제 걱정 놔도 되겠네요!”라고 하셨다. 내가 퇴비를 낼 때 모자를 쓰고 수건을 둘러써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 했던 것이다. 그때는 90kg까지 질 수가 있었다. 이렇게 소처럼 일하다 보니 ?나가면 신사, 들어오면 일꾼―생활력이 강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99. 돈방석에 앉혀놓는다고 해도

 

그즈음 재종 이모님은 “좋은 혼처 자리가 났다.”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나에게 선을 보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부모님을 잃고 고모님 밑에서 자랐는데, 지금은 자수성가하여 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다른 건 안 보고 사람 하나만 본다고 하였다. 나는 단번에 거절했다.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보고 싶어서 시아버지가 될 분이 있는 곳에 결혼하고 싶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종 이모님은 나에게 “다른 사람은 다 싫다 하고 너만 원하니 어쩌냐? 네가 거기로 시집만 가면 돈방석에 앉혀 놓을 텐디이….”라고 하셨지만,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안달이 나서 “아무것도 해 오지 말라고 했고, 너 하나만 데려간다고 했어야!”라고 하셨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자 “금목걸이, 금팔찌, 다이아몬드 반지, 네가 원하는 것 다 해주고, 서울, 광주, 목포에 큰 집이 한 채씩 있는데 네가 원하는 데서 살겠다고 했응께 다시 생각해 봐, 응?” 하고 애원하다시피 또 말씀하셨으나 나는 그 즉시 밖으로 나와 버렸다.

재종 이모님은 확답을 듣기 위해 내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며, 밖에까지 쫓아 나오셨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며칠 후에 재종 이모님이 또 오셨다. “네 처지에 뭐 볼 것이 있다고 고집부리냐, 응? 네가 재산이 있냐, 배움이 있냐. 그 사람은 대학까지 나와서 그 많은 재산을 모았는데 뭐가 아쉬운 것이 있겠냐. 워낙 네가 맘에 들어서 그러니 너는 땡잡은 거지 뭐, 안 그러냐? 그 집에 시집가면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것도 걸리는 것도 없지 않냐. 너 혼자 호강하고 잘 살 수 있는디 왜 그러냐, 그래도 싫어? 응?” 하고 다그쳤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어머니를 설득시키려 하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여라.”라고 하시기에 거절했다. “이모, 난 이모가 말한 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재산도 없고, 내놓을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난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오르지 못할 나무를 왜 제가 쳐다보겠어요?”라고 했더니, “그것은 상관이 없지 않냐, 그 사람이 원하는 것잉께 아무 걱정 안 해도 된다.”라고 하여 나는 또다시 말했다.

“아니에요, 나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형제가 없어 외로웠기 때문에 고생이 되더라도 아버지가 계시고, 형제가 많은 곳에 가고 싶어요.”라고 하자 이모님은 결국 눈을 흘기며 나가 버리셨다. 그 뒤, 외가 친척들의 말들이 많았다. “그렇게 좋은 곳에 안 가면 지가 얼마나 좋은 사람 만나겠다고 그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얘야! 어머니를 생각해라, 너 하나 키우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냐? 이제 어머니 호강 좀 시켜 드려라.” 등의 소리에 “차라리 나를 파시지 그래요, 네?” 하고 울고 말았다.

가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어머니를 위해 나의 모든 뜻을 포기하고 호강시켜 드리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그 자리가 나와는 너무 조건이 맞지 않았거니와 양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 결혼을 돈을 보고 결정짓고 싶지 않았고 어머니도 그런 식으로 호강시켜 드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모두 돈이 전부인 양, 돈이 행복의 조건인 양 말하여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차라리 나를 파세요. 돈 때문에 저를 그 집에 판다면 갈게요.”라고 하자 아무 말이 없었다. ‘왜 사람들은 돈이면 무조건 행복할 수 있다고 착각할까! 행복은 결코 돈에 달린 것이 아닌데….’

 

100. 마음이 조급했던 찰나에

 

2년 동안 나는 남자가 없는 곳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 보았다. 옷 만드는 곳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아름다운 옷도 만들어 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돈을 주지 않아 당장 넣어야 할 곗돈도 넣지 못한 데다가 그곳도 남자와 관련되어 있어 그만두었고, 수예점에 취직하여 수예도 해 보았지만 고등학교에 납품해야 하니 여선생을 만나도 거기있는 남자 선생이 호감을 보여 그만두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다가 일본으로 수출하는 홀치기 작품을 만드는 곳에 들어갔다. 손이 빠른 나는 잘만하면 상당한 돈이 된다고 모집을 하여 ‘아, 이제야 비로소 남자 없는 곳에서 돈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여럿이 모여 일했다.

몇 개월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작품을 여러 개 만들었다. 그러나 돈을 주지 않아 눈이 아파 더는 할 수가 없다며 그만둔다고 하자 “조금만 기다리면 일본에서 돈이 나온다. 윤양처럼 손 빠르게 일하면 상당한 돈이 될 거야!”라고 하며 그냥 있으라 사정했다. 굳이 말렸으나 기약 없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돈을 받은 셈 치고 미련 없이 나왔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해 보았지만, 될 듯 될 듯하면서도 되는 일이 거의 없어 마음이 조급했던 찰나에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네가 집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느냐? 이제 그만 집에 와서 살림이나 하다가 시집가도록 하여라.”라고 하셔서 집으로 갔다. 마을에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어 사사로 미용을 하여 어머니께 도움을 드렸다. 손이 다 터지도록 일을 하여 힘은 들었지만 인정받고 일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웃 마을에서도 자연히 나를 찾게 되어 신부 화장까지도 거의 도맡아 하게 되었다. 소재지에 미용실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하던 사람들까지 나에게 해야 마음에 든다고 몰려오니 그 미용실이 한산해져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일은 많이 하고 돈은 적게 받았기 때문에 수입이 적었지만, 남자가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 당시 (1966~1968년) 신부 화장 200원, 파마 50원, 고데 20원, 커트 10원을 받았는데, 그렇게 돈을 모아 논 300평을 사게 되었다. 그러기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계를 넣고, 옷 하나 사 입지 않았다. 1원 하나도 마음대로 쓰지 않고 먹고 싶은 거 먹는 셈 치고, 입고 싶은 옷 입은 셈 치고 그렇게 돈을 모아 논을 샀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그것 하나로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