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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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죠

 

나는 그렇게 집에서 미용을 하면서 틈틈이 4-H 활동도 했는데, 하다 보니 또 남자 회원들과 엮일 경우가 생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몇 달 후, 하루는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보리를 베러 간다고 하셔서 “어머니, 오늘은 제가 갈 테니 집에서 편히 쉬고 계셔요.” 하고 내가 대신 갔다.

먼 곳에 있는 밭으로 가다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에서 4-H 담당 김만복 선생님을 만났다. 나를 만나러 오는 길이라 했다.그날은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김 선생님이 왜 그리도 멋져 보였을까? 나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뺏기지 않기 위하여 확실하게 외면하기로 작정했기에 아주 퉁명스럽게 그를 대했다. “윤 양, 나 4-H 문제로 윤 양을 만나러 왔는데 잠깐만 시간 내주면 안 될까?” 하여 “보시다시피 저는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죠.” 하고 일부러 톡 쏘아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갔다. 함께 가던 아주머니들은 “아니, 항상 온유하고 얌전하기만 하던 네가 웬일로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한다냐?”라고 하였다. 한참을 걷다가 산속에 이르러 돌아보았더니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102. 동네 일터에서 불려 다니다

 

어머니 대신 일을 가서 아주머니들과 함께 호미로 밭을 맬 때, 나는 그들의 두 배를 했다. 아주머니들이 한 두렁의 풀을 맬 때 나는 두 두렁을 맸다. 그렇다고 삯을 배로 쳐주거나 이틀 일한 것으로 쳐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늘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 모심기할 때, 여자들은 온종일 부지런히 일해도 반나절로 쳐 줬지만, 나는 남자들과 똑같이 쳐주었다. 남자들 못지않고 오히려 똑바로 더 잘 심는다고 서로 데려가려고 했다.

소에 쟁기를 매고 마른 논을 간 뒤 논에 물을 채워 흙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면, 흙을 고르기 위해 소에 써레를 매 써레질을 한다. 그런데 쟁기질을 하던 아저씨가 힘들어해서 내가 해 보겠다고 했더니 남자들도 잘 못 하는데 어린 여자애가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난 자신 있게 “저 할 수 있어요.”라고 했다.

쟁기질과 써레질은 삯을 두 배로 받는데 돈보다도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보고 싶었다. 아저씨는 “쟁기질은 내가 할 테니 써레질은 네가 해 보거라.”라고 하여 너무 기뻤다. 그분은 정말로 써레질할 때 나를 불렀다. 물속으로 들어가 써레질을 하면서 소에게 “아무리 고되어도 고되다고 투정하지 않고, 주면 먹고 배가 고파도 주인이 먹을 거 안 주고 때려 가며 일해도 묵묵히 일하는 예쁜 소야! 나도 너처럼 묵묵히 살도록 노력할게. 오늘 내가 써레질을 처음 해보는데 내가 혹시 잘 못 하면 네가 더 힘들 텐데 미안해. 잘하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우리 힘을 합하여 잘해보자.”라고 했는데 소가 내 말을 알아들은 양 아주 말을 잘 들어 주어 흙이 아주 고르게 잘 섞였다.

그 논에 모를 심을 때 어른들이 모두, 흙이 아주 부드럽게 잘 갈려 모가 너무 잘 심어진다며 “윤 서방 댁은 딸을 잘 키웠구먼. 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어머니를 위한 마음이 지극한 데다, 착하고 어른들 섬길 줄 아니 열 아들 부럽지 않겠네.” 하고 칭찬을 계속해주어 너무 기뻤다.

내가 칭찬받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딸자식 하나 데리고 살아서 뭐 하느냐?” 하고 비웃던 사람들이었기에 그 칭찬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니께 힘이 되어 줄 거라 생각하니 내 마음은 하늘을 나는 듯했다. 나는 늘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을 알고 나서야 그 모든 것이 내가 잘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비하시어 체험하게 해주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103. 내가 잘한 것이 아닌데….

 

그 뒤, 여러 사람의 권유로 다시 4-H 클럽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김만복 선생님이 뒤에서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그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 면 지도소에서 경진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싫다고 했는데도 담당 지도사인 김만복 선생님은 기어코 나에게 연시(演示:대중 앞에서 어떤 물건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실제로 만들어 보이는 것)를 하라고 하였다.

그때까지 “입에 지퍼를 채웠냐?”라며 “저러다 벙어리 되는 거 아니야?”라고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말을 하지 않던 나에게 연시를 하라니 막막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윤 양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윤 양이 꼭 해야 해!” 하고 설득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하여 ‘계란 사과 만들기’를 가지고 경진대회에 나갔다.

누구 앞에서든지 말도 못 하던 내가 대회에 나가 대중들 앞에서, 계란을 쪄 뜨거울 때 손으로 사과 모양을 내서 붉은색 물을 들여 무 가운데 토막을 아래에 깔고 예쁜 동백나무에 꽂아 놓으니 “너무 예쁘다!” 하며 박수갈채가 대단했다. 또한, 처음으로 대중 앞에선 터라 수줍어하며 했더니 사람들은 그것조차 너무 예쁘다고들 하였다. 결과적으로 1등을 하여 부끄러움은 면했는데 그것은 내가 잘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비하셨음이었다.

 

104. 폭소를 터뜨리게 한 가성소다의 용도

 

그 뒤, 면에서 1등을 했으니 군 경진대회에 나가야 한다며 ‘옥견(쌍고치)을 이용한 마아다 만들기’(명주솜)로 연시를 하라고 했다. 지도사(지금의 남편)와 여지도사가 가성소다를 소다로 가르쳐줘서, 질문 시간에 심사석에서 ‘가성소다’가 무엇이냐고 묻기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빵 만들어 먹을 때 부풀리기 위해 넣는 종류입니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왜 이렇게들 좋아하나 어리둥절해하며 단상에서 내려올 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린 이유는 가성소다는 빵 부풀릴 때 쓰는 것이 아니라 수산화나트륨(양잿물)이라는, 먹으면 바로 죽는 독한 화학 물질이었기 때문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 생각만 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왜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했었던가? 나는 경진대회에 나갈 생각이 아예 없었기에 그냥 지도사와 자원 지도자가 시킨 대로만 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윤 양은 어쩌면 그렇게도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를 다분히 가지고 있어? 보기와는 전혀 다른데!”라고 말했다. 당황스러움과 계면쩍음과 창피함이 뒤섞여 교차했다. 창피했지만, 어쨌든 잘 모르고 있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덕분에 남에게 웃음을 마음껏 선사한 에피소드였다. 그 결과는 또 1등이었다.

 

105. 어서 일어나 가던 길 멈추지 말고 가야지?

 

전화도 없던 시절 아침을 먹고 있는데, 외갓집 친척이자 4-H 부원인 세권이가 찾아와 “홍선아, 빨리 지도소로 오래.” 했다. “지금?” “응.” “누가?” “소장님하고 김만복 선생님이.”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나는 서둘러 세권이의 자전거 뒤에 타고 면 소재지에 있는 지도소를 향해 질주했다. 집과 소재지 중간에 있는 장다머니는 마을 번화가로 사람들이 늘 많이 오갔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가파른 언덕길이라 자전거에서 내려서 가거나 아니면 천천히 가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서 사정없이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운동신경이 매우 발달해 사람을 잡지 않고 달리던 자전거 뒤에 올라탈 수 있었고, 달리던 자전거에서 혼자 뛰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수로 쪽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주면서 “어서 일어나 가던 길 멈추지 말고 가야지?” 하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내 손을 잡아주신 분은 보이지 않고 나는 낭떠러지 밑에 꼬꾸라져 있었다.

얼른 일어나 위를 올려다보았더니 여러 사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마를 입었던 나는 얼마나 창피했는지 바로 일어나서 사람이 없는 저수지 쪽으로 기어 올라가 몸과 옷에 묻은 흙을 깨끗이 씻었다. 사람들을 피해서 얼른 집으로 가고 싶었으나 “어서 일어나 가던 길 멈추지 말고 가야지?” 하는 소리를 들었기에, 가던 길을 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세권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걸어서 지도소로 가니 여러 가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쏜살같이 굴러 곤두박질친 낭떠러지와 그 밑에는 돌들이 많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어느 곳 하나도 다치지 않았음은 주님께서 지켜주셨음이다. 또한, 혼절해 있을 때 “어서 일어나 가던 길 멈추지 말고 가야지?” 하고 깨워 주신 분도 주님이셨다. 그 당시 이를 알 리 없었던 사고 목격자들은 “운이 좋아서 살아났다.”라고들 했다.

 

106. 그 많은 부원 중에서 나를 찾아오시다니!

 

면 지도소 4-H 담당 김만복 선생님이 도 경진대회에 출전해야 한다며 나를 찾아오셨을 때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런데도 김 선생님은 군 지도소에서 내가 하는 것으로 이미 결정됐다고 하면서 군에 함께 가기를 종용했다. 나는 자신이 없어 광주 이모님 댁으로 피해 버렸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권고하여 결국 참여하기로 하고 군 지도소에서 합숙을 했다.두 분의 여성 생활지도사가 교대로 가르쳤는데 정반대로 가르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난감했다. 이렇게 하면 저분이 야단치고 저렇게 하면 이분이 야단쳐 결국 주눅이 들어 못 하겠다고 했다. 그때 김 선생님이 여직원들에게 “내가 책임질 테니 그냥 가만히 놔두세요.”라고 하면서 나를 따로 불러 “윤 양, 남들이 윤 양이 하는 연시를 볼 때 안타깝지만 않도록 해요. 그리고 자신을 가져요.” 하고 말한 뒤 방법도 가르쳐 주지도 않고 가버렸다.

진흥원으로 출발할 때까지도 안 가겠다고 우겼더니 군 담당 지도사는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하라며 기어이 차에 밀어 넣었다. 밤이 되자 광주와 전남, 전국에서 모인 출전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웅변과 연시 등을 연습하는데 나를 가르쳐 주기로 되어있는 나주에서 함께 온 여직원은 나와 똑같은 제목으로 출전하는, 광산군 송정리에서 온 자매만 연습시켰다. 김 선생님이 “내가 책임지겠으니 놔두라.”라고 한 말에 자존심이 상해 다른 사람을 연습시키는 것이었으리라. 나는 안 하리라 생각했으니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연시자가 너무 많아 이틀이 꼬박 걸릴 정도였기에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는데 옆의 아가씨가 말을 걸어왔다. 알고 보니 그도 나와 똑같은 제목으로 나왔는데 고등학교까지 나왔다고 자랑하며 기선 제압하려는 듯 자꾸만 말을 시켰다. 원래 말이 없던 나는 말하고 싶지 않은데 누에는 얼마나 키웠냐고 묻길래 누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내가 가만히 있었더니 한 장 키웠냐고 해서 아니라고 했다.

자꾸만 여러 가지로 말을 시키며 그럼 두 장 키웠냐고 하길래 귀찮은 마음에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때부터 달달달 떨었다. 그가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연습도 한번 하지 못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자신 있게 나가서 연시를 하는데 평소 번데기를 전혀 먹지도 못하던 내가 쌍고치에서 나온 두 개의 번데기를 아주 맛있게 떼어먹는 척하면서 단백질과 모든 영양가에 대해서 말하니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질문에 대한 답까지 제대로 하고 나오니 두 여직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 내가 창피는 면했나 보구나.’ 하고 안심했다. 참가자 중 담양에서 온 여부원이 대나무를 가지고 하는 연시를 얼마나 잘하는지 1등은 당연히 그가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흥원 원장님은 점심시간에 그 많은 부원 중에서 나를 찾아와 함께 식사하셨다. 많이 먹으라고 밥까지 덜어 주시면서 “윤 양이 연시를 아주 잘하던데, 수고했어!”라고 칭찬하시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원장님께서 잘못 아셨지, 제가 잘하긴 뭘 잘했습니까. 창피나 당하지 않았으면 다행이지요.’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자신 있게 책임지겠다던 김 선생님께서 창피를 당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원장님이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를 기억했다면 김 선생님의 체면은 손상시키지 않았겠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107. 오락에 1등 상을!

주위에서는 여러 가지 상중에서 100점 만점에 20점이나 나가는 가장 중요한 상이 대중들 앞에서 직접 하는 연시와 오락과 웅변인데, 나주에서 다른 것은 저조하더라도 연시를 잘했으니 오락만 잘하면 나주가 1등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아, 내가 솔선수범하여 뛰어야겠다. 내가 처음엔 대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했지만, 이왕에 나왔으니 최선을 다해 보리라.’라고 굳게 마음먹고 머리를 맞대고 협의를 했다. 지도자들은 그런 나를 보고 희망이 있다며 흐뭇해하였다.

나주가 한 팀이 되어 각국 나라 대표들과 통역자들까지로 구성하여 연극을 했는데 나는 인도 간디 여사로 나갔다.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하여 나는 나를 내어놓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평상시 옷을 입어도 목도 나오지 않도록 입었던 나는 추운 날씨임에도 밑에는 살색 스타킹을 신고 스커트 대신 볏짚으로 아주 짧게 만든 의상을 걸치고 서툰 영어로 한국인들에게 하는 인사를 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악센트를 줘가면서 반갑다고 했더니 관중석에서 크게 환호하였다. 다음은 웅변하는 자매가 했는데 “안녕하세요?”라고 하자 통역자가 “님뽕.”하여 모두가 웃었다. 이제 춤을 추는데, 모두 한마음으로 일치하여 서로서로 연결하여 양어깨에 손을 얹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띠야야 이띠이띠야, 이띠야야 이띠 이띠야 이띠야야 이띠이띠야야 이띠 이띠야야 이띠이띠야.”라고 하면서 궁둥이를 흔들며 퍼포먼스를 발휘하여 춤을 추니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108. 총 1등 상 대표를 윤홍선이라 부를 때

 

며칠의 행사가 끝나 드디어 시상식 날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숨을 죽이고 ‘어느 시, 군이 1등일까? 그리고 누가 1등일까?’ 하는 조바심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문득 원장님 말씀이 생각나서 혹시 나도 입선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아니야, 내 분수를 알아야지.’ 하며 아예 기대하지 않고 뒤에 차분히 있었다. 그런데 “시상식 발표를 하겠습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대표 윤홍선.” 하는 소리가 내 귓전을 스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총 1등 대표상은 웅변이 받아왔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한 채 서 있으니 나를 담당했던 김만복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와 “어서 나가.”라고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나갔다. 김만복 선생님은 여지도사들에게 자신 있게 책임질 테니 그냥 놔두라고 했던 터라, 내가 입선도 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아무도 모르게 뒤에 숨어서 서 있다가 대표로 내 이름을 부르니 너무 기뻐서 놀라, 서 있는 나에게 다가와 빨리 나가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후에 내 남편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109. 숨어 살고 싶었던 나의 의지와는 반대로

 

1등상품으로 탄 암평아리 50마리를 키울 수가 없어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고 하였더니, 김 선생님이 “내가 도와줄 테니 병아리를 키워 봐.”라고 했다. 훗날 남편이 된 김 선생님은 그때 나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리하였다고 고백했다. 어쨌든, 그때부터 병아리를 키웠는데, 커 가는 병아리를 볼 때 기쁨이 대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어려움이 닥쳤다. 중앙경진대회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키우던 정든 병아리를 어머니께 부탁드리고 또 이모님 댁으로 피해 숨어 버렸다.

며칠 뒤 직장에 가신 이모부님이 전화를 하셨다. 이번에는 도에서 나를 중앙경진대회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수소문하여 공무원이었던 이모부님을 설득했던 것이다. 이유인즉, 그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오락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윤홍선이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락 부분 때문에라도 꼭 참가해야 한다고 하여 쓴웃음이 나왔다. 그리하여 내 의지와는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중앙경진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노는 것은 나와 전혀 거리가 멀었으며, 흥미조차 없고, 오락이라는 것 자체를 그때 처음 해 봤는데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전에 미용실에서 그렇게 내성적이어서 말 한마디도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O형이 나올 수 있느냐고 할 때 “이 아가씨는 원래 굉장히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삶이 이렇게 만들었다.”라고 했던, 그 관상 본다는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1968년에는 흉작이 들어 곡식이 많이 부족할 때라 거의 모든 사람이 영양을 보충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번데기 보릿가루 부침’을 가지고 연시를 하기로 했다.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전진의 메아리』라는 신문에 세 사람이 소개되었는데 내가 거기에 나오게 되었다. 남의 앞에 서는 것은 물론 말도 잘 못 하는 나에게 대회 시작을 알리는 4-H 노래를 지휘하라고 해서 못한다고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자꾸만 할 수 있다고 해서 진짜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음에도, 그것도 중앙경진대회에서 하게 되었다. 순명하는 마음으로 했지만, 결과가 좋아 박수갈채를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부족한 나에게 일어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또한, 13회째인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리 전라남도가 우승하여, 진흥원 원장님은 “12번 딸을 낳다가, 13번째 아들을 낳았다.”라고 표현하며 눈물 흘리셨다. 우리 모두에게 악수를 청하셨는데, 나에게는 수고했다며 거듭해서 세 번이나 하셨다.

우승을 한 우리는 청와대를 거쳐 시가행진을 했고, 광주에 내려와서도 시내를 돌며 카퍼레이드까지 했다. 서울에서부터 시작하여 광주에서까지 푸짐한 선물을 받았다. 집에 돌아오니 군 지도소와 면 지도소에서도 경사가 났다고 모두 기뻐하였다. 그때 지도소 직원 한 분이 출장 중에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영화 시작 전 뉴스를 할 때 중앙경진대회의 모습을 비춰주었는데 윤 양 연시 하는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라고 하였다. 듣는 모든 이들이 아주 기뻐하였다. 그러나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싫었던 나는, 칭찬받는 것이 기쁘기보다는 착잡하기만 하였다.

 

110. 닭은 매일 99.9%의 알을 낳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에서 병아리 키우는 일에 집중했는데, 김 선생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니 처음 50마리가 한 마리도 죽지 않고 모두가 살아서 알을 낳았다. 닭장에 온도계를 두고 추우면 불을 피워 주고 더우면 물을 뿌려 열을 식혀주었다. 동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개구리를 잡아 오게 해서 먹이고, 메뚜기도 잡아다 먹이고, 클로버도 뜯어다 먹이니 영양가 좋은 알을 낳아 장사꾼들이 서로 와서 가져갔다. 또, 틈틈이 미용을 하여 어머니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 드림으로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