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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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울며 겨자 먹기로 4-H 캠핑에 참석하다.

 

1967년 여름, 그 당시 군 4-H 여부회장이었던 나정순은 도 여부회장이 되어 사람들 앞에서 말도 곧잘 하게 되었는데, 말도 잘 안 할 뿐 아니라 못하는 나에게 공석이 된 군 여부회장을 맡으라고 하였다. 내가 할 수 없다고 거절했는데도 억지로 시켜, 이름만 군 4-H 여부회장으로 올려놓았다. 그때 군 지도소에서 완도로 4-H 캠핑을 하러 간다고 했다.

어머니께 드린 돈을 한 푼이라도 쓰지 않으려고 나는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우리 면 4-H 회원들에게는 참여하도록 권장했다. 캠핑 참가 희망자 몇 사람을 안내하였는데 내가 가지 않으면 그들도 가지 않겠다고 하여 ‘나로 인해 그들까지 가지 않으면 큰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짓으로 가겠다고 한 후, 금천에 있는 센터까지는 같이 가서 참가자들이 버스에 올라탈 때 나는 슬그머니 빠졌다.

그러나 우리 담당인 김 선생님과 도 여부회장인 나 양이 숨어버린 나를 찾아와 회비는 이미 둘이 냈고, 수영복을 비롯한 모든 준비를 다 해왔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계속 사양하자 “윤 양이 같이 안 가면 우리도 안 가겠다.”라고 하여서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차를 타고 완도로 향했다.

 

112. 연시(演示)와 백일장이 끝나자

 

캠핑 이틀째 되던 날 연시가 있었는데, 김 선생님은 복숭아를 주면서 화채 만드는 연시를 해 보라 하신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금천에서 온 4-H 담당 선생님은 연시에 참가할 여부원에게 계속해서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어떻게 하라는 언질 한마디 없었다. 관심을 가져준 셈 치긴 했지만, 몹시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캠핑만이 아니라 연시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금천 담당 지도자가 여부원에게 연습시키는 모습이 왜 그렇게 부러웠던 것일까.

연시 결과, 연습도 안 한 내가 1등을 하였다. 그러고 나니, 대부분의 남자 부원들이 나를 가까이하려고 애썼다. 연시에 이어 글짓기 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혼자라는 것을 안 남자들이 얼마나 외롭겠냐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하였기에, 외롭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학교 때 선생님과 함께 쓴 ‘소녀는 외롭지 않다’라는 시를 써서 냈다. 그런데 그 글이 또 1등으로 뽑히게 되어 남자들이 더욱더 극성을 부리며 접근했다.

 

113. 생명의 은인을 도둑놈이라고?

 

다음날 우리 일행은 완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가게 되었다. 혼자 남을 수가 없어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기는 했지만, 물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하면, 해수욕은 처음이거니와 수영도 못할뿐더러 속살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 양은 똑같은 수영복 두 벌을 사 와 하나를 내게 입히려고 했는데 싫다고 소리소리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체념하고 수영복을 입긴 입었는데 창피하여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행여 누가 나를 알아볼까 걱정이 되어 큰 수건을 빌려 온몸을 감싸고, 색안경과 밀짚모자까지 빌려 쓰고 나 양과 함께 일행과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튜브에 몸을 싣고 놀았다. 그런데 얼마 후, 평소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군 지도사가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사이에 함께 있었던 나 양까지 없어졌다. 당황한 나는 가까이 오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접근해왔다.

나는 튜브를 탄 채 그를 피해 정신없이 도망갔다. 바닷가의 위험 표지 선까지 넘어갔으나 계속해서 따라와서 내가 탄 튜브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나는 큰소리를 지르며 “안 돼, 저리 가요!”라고 자지러진 목소리로 외치니 깜짝 놀란 그가 튜브에서 손을 떼는 순간 나는 중심을 잃고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발이 땅에 닿았다.

나는 발로 땅을 박차고, 손으로는 물장구를 치며 물 밖으로 나왔으나 수영을 못하였기에 물을 먹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오고 들어가고를 몇 번 반복하다가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 누가 뒷덜미를 잡아 튜브에 올려놓고 끌고서 해변으로 나왔다. 그렇게 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에 내 살이 조금씩 닿았다. 죽을 수도 있었던 다급한 순간에 슬쩍 스친 남자의 손길이 어쩜 그리도 끔찍하고 징그러웠던지….

그 와중에도 나는 남자는 아무도 곁에 오지 못하도록 하며 “남자는 다 도둑놈이야!” 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때 죽음 직전에서 구해주신, 내가 도둑이라고까지 표현했던 그분이 바로 해군 출신인 지도자 김만복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이 후일 나를 책임질 남편이 될 줄이야 어찌 감히 상상인들 했겠는가? 죽음에서 구해준 생명의 은인을 도둑놈이라고 했으니 나의 결벽증도 참 어지간했던 것 같다.

 

114. 매일 100여 통의 편지가 아궁이 속으로

 

4-H 회장이나 부회장 그리고 남자부원들 대부분이 나를 좋아했다. 그뿐인가, 농촌지도소 직원들과 그 밖의 수많은 남자들이 나를 좋아해 편지가 하루에 70~100여 통이 왔다. 그러나 나는 편지들을 뜯어보지도 않고 부엌 아궁이 속으로 던져 불태워버렸다. 그중에는 약사, 의사, 검사, 판사, 교사들도 있었지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편지를 뜯어보지는 않았으나 딱 한 번 답장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엽서로 “다시는 편지 하지 마세요.”라는 간단한 문구의 편지였다. 아마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고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관심조차 전혀 없을까? 아무리 남자에 대한 결벽증이 있다고 해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않을까 자문해 본다. 편지를 읽으면 ‘혹시라도 결백한 내 마음에 조금의 동요라도 생기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었던 간에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은 분명하다.

어머니가 원하신다면 곰보고, 째보고 간에 나는 없어지고 어머니께만 만족을 드리고 싶었다. 어느 날 외사촌 언니가 맞선을 보았다. 나에게 심부름하라고 하여 갔는데 학교 선생이었다. 그는 나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나는 그의 눈길을 피해 음식 심부름을 했는데 그는 돌아가서 중매하는 분에게 나를 중매해 달라고 했다 한다.

나는 절대로 안 한다고 했고, 심부름하라고 불러서 하라는 대로 도와줬을 뿐인데도 나 때문에 혼사가 깨졌다며 화가 나에게 돌아왔다. 어르신들이 “누구 선볼 때 너는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아라.”라고 하여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 당시 그 일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 또한 내 탓이 아니고 무엇인가!

 

115. 성실한 직원과 착실한 부원을 짝지어 준다고 하여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지도소 직원들이 나를 불러서 김 선생님 칭찬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 선생님에게는 나를 칭찬하고 또 나에게는 김 선생님의 좋은 점과 그 사람이 나에 대하여 하지도 않은 말을 좋게 지어내어 계속했었다 한다. 지도소에서는 이미 우리 두 사람을 화제에 올려놓고 있었다.

중앙경진대회에 다녀온 후 “성실한 직원과 착실한 부원을 짝지어 주자.” 하고 의견을 모아, 본소 소장님을 포함한 직원 모두가 우리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했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을 어머니께 맡기고,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일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번번이 거절했다.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하여 한 생을 아낌없이 바쳐 오신 어머니를 위해 나의 인생을 희생하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우자를 택하는 것도 어머니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때 면 지도소 소장님은 나를 불러 저녁때까지 일을 시키고 보낼 때마다 매번 김 선생님에게 데려다주라고 하여 함께 가게 되었다. 내가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주저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신 소장님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일을 꾸몄다고 나중에 고백하셨다.

 

116. 그 사람의 본심을 시험해 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내 인생을 맡겨야 할 사람이기에 어머니와 외가댁 어르신들께 말씀드렸더니 “사람은 괜찮은데, 집안이 어떤지 모르겠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 사람이 정말 나만을 사랑해주고 살 수 있을지, 소문대로 신뢰심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봉황면 소재지에서 3~4km 더 들어가는 시골이었다. 오전, 오후에 각 한 번씩 하루 두 번의 차편밖에 없어 교통이 불편하였다. 광주행 차편이 끊어졌을 경우, 금천을 가로질러 광주로 가야 했다. 금천으로 가는 길은 아주 험하고 숲이 우거져 혼자 가기에는 무서운 산길이었고, 광주를 가기 위해 큰 도로 금천으로 나오려면 12km나 되었다. 나가면 신사 들어오면 일꾼 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났을 때 나는 지게로 150근(90kg) 정도 졌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힘이 세져 나중엔 벼 80kg짜리 2가마(160kg)를 거뜬히 져 날랐다. 어떤 힘센 남자와 팔씨름을 해도 지지 않아 처녀 장사라는 말까지 들었다. 나는 자신 있게 그 사람에게 바래다 달라고 청했다.

밤에 으슥한 산길을 갈 때 얌전하게 간다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하겠고,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가지고 손이라도 잡으려 한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여자이지만 힘이 셌던 나는 만반의 준비로 방어 태세를 갖추고 그 사람과 함께 1시간 이상을 가는데도, 계속해서 점잖고 건전한 이야기만 하고 조금의 이상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광주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만으로는 마음을 결정할 수 없어서 다른 방법으로 두 번이나 더 시험해 보았지만, 그 사람은 한결같이 건전하고 믿음직하였다. 그때 만약에 나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으려고 했거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려고 했다면 다시는 그 사람의 얼굴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약혼한 뒤에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어이쿠! 그때 나를 시험하려고 한 줄도 모르고 내가 손이라도 잡으려고 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네.” 하면서 우리는 크게 한바탕 웃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러운 마음이 든다.

 

117. 다리 밑에서

 

1967년 12월 31일, 이날도 배 소장님은 나를 불러내어 일을 시키셨다. 그 당시 맛있는 음식을 맛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나는, 소장님이 나를 불러 일을 시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날만은 두 분의 하숙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해주고,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아닌가. 그날 배 소장님은 밤 11시경까지 일을 시키시고, 어김없이 김 선생님에게 나를 데려다 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눈 오는 밤길을 3Km쯤 걸어갔다. 도로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샛길로 들어서려는 순간, 어떤 남자분이 마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자자일촌하고 사는 마을이라 말도 많은데, 행여 어떤 소문이라도 날까 두려워 우리는 얼른 가까운 다리 밑으로 숨었다.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앉아서 이야기했다.

“가족은 몇이나 되세요?” “8남매.” “집은 어디에 있어요?” “집은 두 군데에 있지.” “예? 아니, 무슨 집이 두 군데에 있어요?” “광주 집은 부모님이 사시는 집이고, 시골집은 내가 하숙하는 집이지.” “아, 예.” 한참 동안의 이야기 끝에 김 선생님은 나에게 “내가 손잡아도 되나?”하고 물었다. “싫어요, 나 임자 있는 몸이에요. 내 몸에 절대 손대지 마세요.”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날이 새는 줄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밝자 그곳을 벗어나 함께 흰 눈 위를 걸었다.

김 선생님은 “우리도 저렇게 하얀 눈처럼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아보자.”라고 말했다. 이제는 정말 우리의 마음이 늘 이렇게 하얀 눈처럼 깨끗하게 유지되도록 노력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다리 밑에서 긴긴 겨울밤을 꼬박 새웠지만, 전혀 춥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젊고 건강했기 때문이리라. 우린 그때 서로에 대한 믿음이 뿌리내린 것 같다.

 

118. 농한기에 탁아소를 시작하고

 

시골에서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많은 부업을 했다. 그때 아이들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부모들도 많았고, 가르치고 싶어도 우리 소재지에는 유치원이 아예 없었다. 나주에는 유치원이 있긴 했지만, 먼 곳이라 마음은 있어도 형편이 되지 않아 보내지 못하였다. 그때 군에서 탁아소를 하도록 권하였기에 나는 보모 교육을 받고 마을 사당에 무료로 탁아소를 시작하였다. 보모는 자원 지도자와 4-H 부원 두 사람이 나와 함께 맡았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간식이 필요했기에 처음엔 나와 다른 보모가 함께 손수레를 끌고, 아이가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얻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나 혼자 하게 되자 가끔 김 선생님이 도와주어 둘이서 그 일을 이어갔다. 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면서도 아이들을 먹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 힘든 줄을 몰랐다. 우리는 그렇게 얻은 음식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기쁜 나날을 보냈다.

그때는 유별나게도 시골 아이 중에서 코 흘리는 아이가 많았다. 머리와 옷 속에는 이가 득실거렸고, 머리카락 속에 때가 가득 차 버짐처럼 꽉 붙어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깨끗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냄새가 나고 더러운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때는 수돗물은커녕 펌프 물도 없어 멀리 있는 샘물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조금씩 이고 와서 썼다. 그래서 지금처럼 아이들을 깨끗하게 키우기가 힘들었다. 나는 날마다 아이들의 때를 벗기고 깨끗하게 씻겨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립심을 심어주었다.

어떤 아이들은 노란 코가 순식간에 입까지 내려왔는데 내가 얼른 닦아주자 옆에서 지켜보던 보모가 “그 더러운 코를 어떻게 그리 쉽게 닦아줄 수 있느냐?”라며 비위도 좋다고 빈정대었다. 그러나 칭찬받은 셈 치니 기쁠 수가 있었다. 나는 사랑으로 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내 동생들인 셈 치고 아이들 머리도 예쁘게 빗겨 주고, 이발도 해주고, 무릎에 앉혀놓고 손톱도 깎아 주었다. 그런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너무나 보람되고, 기쁜 나날이었다. 노래와 춤도 가르치며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되니, 나의 마음도 어느덧 동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119. 보람을 느끼며

 

내 일을 뒤로하고 매일 탁아소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나도 기뻤고, 그렇게 정이 들었다. 내가 외로웠기에, 부모님이 농사만 짓느라 돌보지 않고 팽개친 아이들의 외로움을 내가 달래 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변화되자,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지 않은 부모들도 모두 보내게 되어 마을에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가득했다.

어쩌다 한 번쯤 일을 보기 위해 탁아소에 나가지 않을 때는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몰려와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왜 오늘은 안 나오셨어요?”라고 했다. “오늘은 일 좀 보고 내일 나갈 테니까 오늘은 ○○선생님하고 함께 공부하고 놀아요.”라고 했더니, 애들은 일제히 “싫어요.”, “안 해요.”, “선생님이 없으면 우리 공부 안 해요.” 하고 떼를 썼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조금도 귀찮지 않고 오히려 귀엽기만 했다.

이렇게 설득을 해도 아이들이 돌아가려고 하지 않아 다른 보모들이 속상해할 때가 많았다. 친척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 “엄마, 이제는 홍선이 언니가 선생님이 되었으니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해, 알았지?” 하더란다. 비좁은 집에서 내 일을 보며 아이들과 함께 보낸 적도 있었고, 쉬는 날 볼일을 보느라고 출근하지 못하면 아이들도 탁아소에 왔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기도 했다.

김만복 선생님이 “결혼하려면 상대자가 보모였는지를 먼저 봐야 하겠어.” 하고 진담반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보모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탁아소에 근무했는데, 진정한 사랑으로 보살펴주지 않고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돌보았다. 그러다가 나중엔 아예 나오지 않다가 김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누구보다 먼저 와 있곤 했다. 그런 보모들을 보니 마음이 씁쓸했다.

 

120. 오줌까지 싸고 쓰러진 나를 들쳐업고 온 그들은?

 

어떤 사람이 급하게 나를 찾아와 자기 마을 사람들 머리 좀 해줘야겠다고 하여, 쉬는 날을 택해 그 마을 사람들 머리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밤에도 계속하게 되었는데 시골 아줌마들이 참 재미있었다. “우리 심심풀이로 서리하러 가자.”라고 하기에 무슨 말인지 몰라 그것이 무엇인가 물었다.

그들은 “아이고, 순진한 우리 윤 양은 아직 서리란 말도 모르고 있네.” 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은 포대에 무엇인가 하나 가득 담아서 가져왔다. 알고 보니 그것은 고구마와 옥수수였는데, 주인 모르게 가져다 먹는 걸 서리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아! 그렇구나.” 문득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동네 처녀들이 밤이면 늘 모여 노는데, 어린 나를 유난히 예뻐했던 그들이 외로운 나를 가끔 불러주었기에 외로움을 조금은 달랠 때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들이 나를 불러내어 함께 가자고 하여 따라갔는데 어느 밭으로 가는 것이었다. ‘무엇 하러 밤에 밭에 갈까?’ 이상히 여기다가 ‘아, 낮에 바빠서 못다 한 일을 하러 왔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들은 나를 깊은 산속 밭에 세워 놓고 “이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사람이 오면 흙을 우리 쪽으로 던져라이.”라고 했다. 한 무리는 고구마밭으로 가서 고구마를 캐고, 또 한 무리는 옥수수를 땄다. 그때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무서워 떨었던 때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왔는데도 나는 벌벌 떠느라 신호를 보낼 수 없었다. 너무 놀라 흙을 던지기는커녕, 오줌을 싸며 땅에 엎어져 떨기만 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온 것을 안 그들은 일제히 밭에 엎드려 있었는데, 그도 주인 모르게 고구마를 캐러 온 사람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볼일을 마치고 가자 처녀들은 일어나서 고구마와 옥수수를 들고 밭을 나오며 조용하게 나를 부르는데도 말문이 막힌 나는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가만히 있었는데, 그들은 오줌을 싸고 쓰러져 버린 나를 더듬거려 찾아 업고 오느라 혼이 났다 한다. 집에 와서 고구마와 옥수수를 쪄서 나누어 먹으면서 나에게 주는데, 나는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게 훔친 물건은 나는 안 먹어요.” 하자, 그들은 일제히 “이 맹추.” 하면서 나의 머리를 꾹 찌르며 “그런 일은 재미로 하는 거야, 이것아!” 했다. 그때의 충격으로 나는 3일간을 꼼짝하지 못했는데, 지금 그 일이 생각나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그들은 자신들이 했던 행동 때문에 무색해 하며 왜 웃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옛날에 있었던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모두 함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