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나를 두고 서로 싸우다니
나는 서리해온 고구마와 옥수수를 하나도 먹지 않았다. “왜 안 먹어요? 그때처럼 그런 마음이에요?” 하여 나는 그들이 진짜 무안해할까 봐 “아니에요, 뱃속이 너무 좋지 않아서 그래요. 그리고 좋아하지도 않고요.”라고 했더니 그들은 “우리 밤에까지 머리하는데 입이 궁금할까 봐, 먹을 것은 없고 하여 윤 양을 먹이기 위해서 했는데….” 하며 무척이나 섭섭해했다.
그런데 내가 머리를 하는 중에 한쪽에서는 싸움이 벌어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서 말렸는데, 한 사람은 나를 자기 동서 삼겠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은 자기 동생댁 삼겠다고 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은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라고 했던가? 나는 어이가 없어 그냥 웃고 말았다.
122. 셈 치고 살자고 했는데도 먼저 가버린 내 친구!
나와 처지가 비슷한 유순이라는 친구가 한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와는 말이 조금 통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는 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한없이 울었다. 그 친구도 나처럼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어 어머니와 단둘이 살다가 외갓집에 맡겨졌는데, 그 친구는 나와는 달리 외갓집에서 잘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재혼하게 되자, 저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다.
‘유순아! 그렇게도 삶이 고통스러웠니?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탓하던 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지. 이 세상을 탓하기 전에 우리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아버지가 계신 셈 치고 또 모든 것을 셈 치며 살아가자고…. 너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우린 영원히 변치 말자고 했잖아. 그런데 너만 먼저 혼자 가다니…. 6·25의 비극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불쌍한
것! 고이 잠들어라.’우리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워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123. 귀뺨을 맞고 고막까지 터지는 사랑
내가 23살 때, 직장에서 쉬는 날 광주에서 시골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리자 작은외숙이 계셔서 인사를 했더니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다 큰 계집년이 어디를 쏘다니냐?” 하며 귀뺨을 사정없이 때리더니 갑자기 머리채를 잡은 채 발로 확 차 버렸다. 눈에서는 번쩍하며 불이 났다. 나는 4m 정도 높이의 낭떠러지 밑에 있는 보리밭으로 나가떨어졌는데, 그때 들고
있던 미용기구가 든 지퍼 없는 가방도 함께 떨어져 미용기구가 보리밭으로 다 흩어져 버렸다.
쉬는 날 홀로 계신 어머니를 뵈려 집에 오다가 외숙에게 사정없이 맞고 발로 채여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이다. 나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엎어져 있다가 겨우 일어나 어둠 속의 보리밭에서 흩어진 미용기구들을 더듬더듬 찾아 하나씩 주워 담으며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내 처지가 한심하고 비참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바로 외숙에게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어머니는 절뚝거리며 집에 온 딸의 옷매무새와 상처들을 보고 깜짝 놀라 “뭔 일이라냐?” 하고 걱정하셔서 “지름길로 오다 미끄러졌어요.”라고 했다. “조심하지. 밤에는 큰길로 다녀라.” “네, 더 조심할게요.” 고향 사람들은 내가 집에 오기를 기다려 파마를 했는데 그렇게 번 돈을 어머니께 드리면 매우 기뻐하셨다. 하지만 검지를 크게 다쳤기에 파마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아, 이번엔 쉬라고 외숙을 통해 손가락을 다치게 하셨구나.’ 하고 돈 벌어 어머니 드린 셈 치며 쉬었다.
124. 파렴치한 사람들의 정신 상태를 타파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중앙경진대회에 다녀온 그즈음, 남자들이 더욱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와 사귀기를 원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까지 나와 가까이하고자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헛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윤 양과 내가 사귀고 있으니 넘보지 마라.”, “윤 양과 나는 결혼할 사이다.”, “윤 양과 나는 동거생활을 6개월이나 했다.”, “윤 양이 내
아이를 임신한 지 3개월이나 되었다.” 등 있지도 않은 헛소문을 퍼트려놓고, 각자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혈안이었다.
그중 한 명인 아주 잘 생기고 직업에 ‘사’자가 붙어 많은 여자들이 좋아하며, 어떤 여자는 열쇠 몇 개를 해놓고 기다릴 만큼 인기가 높았던 그런 남자가 모든 청혼을 다 뿌리치고는 나를 찾아와서 대뜸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배움이 없지만, 마음이 천사 같아서 결혼하겠습니다.” 하고 자기 부모에게 승낙까지 받아왔다고 말했다. 내게 단 한마디 상의도 없었던 터여서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할 수가 있는가? 돈 많고 배운 사람들은, 돈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인격을 그렇게 쉽게 무시해도 되는가? 어처구니없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완강히 거절하자 그때부터 큰 시련이 닥쳐왔다. 그는 여러 방법으로 설득하고 사람을 시켜서도 설득하려고 했지만,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재산이 없고 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인격은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인격이 모든 것에 우선하여 존중되어야 하는데, 배우지 못하고 재산이 없고,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하여 인격까지 무시당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 당시 꽤 많은 여자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헛소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문을 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내 주위에서도 몇몇 사람이 있었다. 외재당숙도 그렇게 결혼했다.
나는 그러한 헛소문에 의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싫어도 결혼해야 하는 비극을 막고, 마음에 들면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연약한 여자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들의 정신 상태를 타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외당숙이 나를 찾아오셔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너 혹시 ○○하고 결혼할 생각 없니?” “예.” “왜?” “인격을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은 싫어요.” “그래도 최고의 조건을 가졌는데 그가 좋아하면 할 수 있지 않겠니?” “저는 턱 없이 못 배우고 집안도 그렇고, 시집가서 꿀리게 살고 싶지 않아요.” “응, 그러면 알았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사람에게서 잠깐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만나 달라는 연락이 왔다. 외당숙은
“한번 만나서 확실하게 네 생각을 밝히고 오너라.” 하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침도 안 먹고 첫 버스로 만나러 갔다.
잠깐이면 되는 줄 알고 밥도 안 먹고 만나러 나갔는데 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았다. 내가 결심을 굽히지 않자, 그 사람은 나를 필사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달래 보기도 하고, 화도 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난생처음으로 너에게 캐이오(KO) 당했다.” 또, “내 생전 처음으로 너에게 넉아웃 당했는데 네가 도대체 뭐가 그리도 잘났니, 응?
나는 너를 가만 놔두지 않겠어. 너를 말려 죽이는 흡혈귀가 되겠어.”라고도 했다.
아침부터 실랑이하다가 막차를 놓치면 안 되니 막차를 타겠다고 했는데도 나를 계속 따라왔다. 우리 동네에서 내리면 혹여 누가 볼까 봐 다도면까지 가서 내렸다. 무서웠지만 마침 작은외숙과 먼 친척분이 거기에 함께 계셔서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작은외숙도 내가 그 사람과 만나 매듭지으라 하셨기에 안심이 되었다. 그 사람이 외숙과 친척분에게 3분만 얘기하겠다며 통
사정을 하자 친척분이 세 걸음 뒤로 따라가겠다고 허락하셨는데 가다 보니 그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다시는 붙잡지 않을 것이니 자기 집에 한 번만 다녀가라고 사정하였으나 절대로 따라가지 않으려고 도망가다 붙잡히고 도망가다 붙잡혔다. 하루 종일 두 사람 다 화장실 한 번도 가지 않았는데 잠깐만 있으라며 볼일 보러 간 것 같아‘이때다.’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4-H 활동으로 우리 동네에서 영화 감상을 하기로 되어있어 나주시 지도소와 봉황면 지소에서
직원들이 다 오는데 4-H 부회장인 내가 그러고 있었으니….
그런데 어느 사이 직원들이 탄 오토바이와 자전거들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저 오토바이에 치여 죽더라도 여기서 벗어나자.’라는 생각으로 달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맨 뒤에 가던 자전거까지 나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들어가 버렸다. 나는 논둑길로 뛰기 시작했다. 키가 큰 그가 어느새 달려와 뒤에서 사정없이 붙드니 윗옷과 주름치마가 찢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남녀 문제가 있으면 동네에서 쫓아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당하느니 누가 오면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전깃불이 반짝이며 누가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큰 소리로“사람 살려!” 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나에게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어머니셨다. 싫다는 사람 만나러 나간 사람이 밤이 늦도록 안 오니 한번 안 한다면 안 하는
딸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신 어머니는 내가 말을 안 들으니‘영산강에 빠뜨려 죽인 것이 아닐까?’하고 울며 딸을 찾아다니신 것이었다.
어머니를 보자 그는 어머니와 얘기하겠다며 나더러 먼저 들어가라고 하여 나는 들어가서 아침에 어머니가 잘 갈아 놓은 식칼을 들고 나왔다. 나를 기다리고 계시던 작은외할머니가“뭐 하려고 그러느냐?” 하기에 “그 사람 죽이고 저도 죽으려고요.” 라고 했다. “너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네 어미를 생각해라. 그 집은 엄청난 권력가 집안이란다.”그 말을 듣고 땅에 털썩
주저앉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울고 있을 때 어머니가 오셔서 칼을 뺏어 들고 “너 이년, 너 죽고 나 죽자!”라고 하셨다.“어머니, 나 살고 싶진 않은데 왜 어머니하고 같이 죽어야 하는지 알고 죽을게요.” “이년, 너 임신 3개월 되었다며? 동거생활도 계속했고 손가락 깨물어 혈서도 썼다며?”
“어머니. 내가 죽는 건 좋은데 그런 누명을 쓰고 죽고 싶진 않네요. 내가 언제 어머니 곁을 떠났으며 매일매일 파마하면서 손이 다 닳아 비닐로 동여매고 한 거 안 보이세요? 근데 내가 어떻게 손가락을 깨물어요.” 하자 “어? 그러네. 너 매일 머리했지. 그래, 요 근래에는 어디 간 적도 없지.”라고 하셨다. “어머니, 어쨌든 저 때문에 생긴 일이니 죄송해요.” 작은외할머니랑
어머니랑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다음 날 그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나는 얼른 광으로 숨었다.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해도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가 들어와서 윤양이 결혼하자고 했다며 계속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광에서 뛰어나와 “야, 이 자식아, 내가 언제 결혼하자고 했어?”라고 하자 그는 큰 손전등을 내 머리를 향해 사정없이 던졌다. 좁은 방에서 쏜살같이 나에게
날아오는 그 손전등을 어머니가 번개처럼 날아오시듯 하여 받아치셨다.
처음에는 그것이 모성이라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주님이 받아주시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왜냐면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계셨기 때문이다. 그걸로 머리를 맞았으면 뇌진탕으로 즉사할 수도 있었다. 그는 허탈감을 내비치며 나를 향해 “그동안 미안했어요. 잘 사시오.” 하고 나가자 우리 어머니가 “너도 어서 나가서 잘 살라고 말해라.”라고
하셔서 그대로 했다.
우리는 좋게 헤어진 줄 알았는데 그 뒤로도 그는 계속해서 나를 아는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모르는 사람들까지 다 붙들고 입에 담지 못할 엄청난 헛소문을 퍼트리는가 하면, 사람들을 시켜 괴롭히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남자들이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별별 소문을 다 퍼트려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여기 가나 저기 가나 모두가 차가운 질시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세상에 네 어미를 생각한들 어찌 그럴 수가 있냐? 정신 차려라. 우리는 너를 그렇게 보지 않았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라고 하면서 비난하였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아버지가 계신 셈 치고 산다 해도 때로는 기막히고 서러운 일이 많이 생기는데, 나는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억울한 일까지 당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까지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기에는 너무 버겁다는 생각에 이르자 눈물이 쏟아져 억제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시고 가족들이 있는 사람은 별짓을 다 해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잘만 사는데, 스스로를 지키며 잘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나에게 벌어진 이 상황은 사랑받은 셈 치고로는 버티기가 버거웠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가?
125. 삶과 죽음의 뒤안길
이런 일들이 있자, 어머니께서도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하셨다. 마음의 상처와 고통으로 몸져누운 딸이 측은하고 불쌍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해주셨지만, 전혀 먹지 못하고 물만 먹어도 토하니 어머니께서는 “차라리 우리 죽어버리자.”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짓이겨 뭉개져 버린 나의 자존심은 던져버리더라도, 어이없이 당해야만 했던 냉혹한 현실에 갈기갈기 찢긴 나의 가슴은 불이 붙는 듯 타올랐다. 말 못 할 냉가슴을 앓으며 서러움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나의 간절한 소망과 의지를 지켜나가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여, 아무리 셈 치고 산다지만 나 혼자 지고 가기에 벅차고 힘겨웠다.
이제까지 그 많은 고통의 세월 속에서 수없이 당하고 상처 입고, 소외당하고 짓밟혀도 꿋꿋하게 자신을 지키고 셈 치며 버텨왔는데, 그 누구 못지않게 성실히 잘 살아서 불쌍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도와주고, 나처럼 고통받는 이들과 목마르고 배고픈 이들을 도와주고자 했는데 이제 어이해야 한단 말인가. 또, 가련하고 보잘것없고 불쌍한 우리 모녀가 죽는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울어주기보다는 오히려 비판하고 판단하여 조소 거리가 될 것이 뻔한데…. 육신을 죽이진 않았지만 이미 나의 모든 것을 죽여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게 한 사람들, 나의 의사 따위는 헌신짝처럼 여기던 소위 잘난 사람들의 의기양양한 태도, 그리고 헛소문에 그럴싸하게 장단 맞추는 무리들. 사랑받은 셈 쳐 보지만 모두가 무섭기만 했다. 울고 또 울면서 어머니를 위로해 드려야
했고, 밤잠을 설치고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르며 몸부림쳐야만 했다.
126. 한마디의 말도 없이 돌아간 그 사람
삶과 죽음의 뒤안길에서 시련을 겪으며,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자리에 몸져눕게 되었다. 김 선생님이 소장님과 함께 문병을 오셨는데, 소장님께서는 얼마나 고생이 많냐고 위로하시며 마음 굳게 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조리 잘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김 선생님은 얼굴이 말할 수 없이 핼쑥했고 새까맣게 야윈 모습이었는데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가 버렸다.
그로 인해 마음이 더욱 심란해져 그 사람을 잊어버리리라 마음먹었다.
나에게는 이제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적막감이 덮쳐왔다. 외로움과 고독함에 상처 입은 나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허전했으며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좋을 때만 좋은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서로 고통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나는 결혼은 아예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혼자 살아갈 때 나를 괴롭힐 무서운 남자들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127. 모처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과 싸우며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을 때, 김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윤 양, 미안해. 빈총이라도 안 맞은 것만은 못 했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서로 위로해 주고 도와주어야 하는데 말이야. 누구보다도 윤 양을 잘 아는 내가 어떻게 그토록 몰인정하게 한마디의 위로도 없이 가 버렸는지 몰라. 윤 양 곁을 떠난 뒤 후회하고 바로 윤 양에게 돌아오고 싶었지만 돌아오지
못했던 내 마음도 무척 아팠어. 용서해 주는 거지?” “용서라니요?”
나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윤 양,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나는 윤 양을 믿어. 윤 양이 살아온 삶이 어떤 삶인데 그래, 나는 윤 양이 참으로 여장부로서의 장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어서 용기를 가지고 새 삶을 개척해보자고. 지금까지 혼자 받아왔던 그 많은 고통을 이제는 내가 덜어 줄게. 알았지, 응?” 이 세상에
태어나 난생처음 들어본 따뜻한 말로 상처로 뒤범벅이 되어있던 나의 가슴의 응어리들이 녹아내리는 듯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보아 왔던 김 선생님이라면 나를 맡길 수 있다는 신뢰심이 생겼고, 김 선생님도 나를 신뢰했기에 우리는 서로 미래를 약속했다.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내 상대자가 누구인지를 완전히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날을 약속하고, 서로가 의지하고 위로하며 힘이 되어 주기로 한 김 선생님은 해남군으로 발령이 나 멀리
가버리셨다. 그 당시에는 전화도 없으니 연락할 수도 없고, 편지가 오면 그 사람을 좋아했던 한 동네의 부잣집 딸이 중간에서 가로채 다 분실되어 버리는 상황이었으나 말도 못 하고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128. 몇 달이 지나도 월급은커녕 차비 하나도
미용 재료를 사기 위해 미용 재료상에 들렀는데 고흥에 사는 선배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 언니가 나에게 고흥군 과역면 소재지의 자기 미용실에서 일 좀 해달라고 사정을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자기 미용실에는 남자도 안 올뿐더러 남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남자 걱정만 안 할 수 있다면…. 게다가 월급도 많이 준다고 하여 조건이 좋았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편하게 해드릴 수만 있다면야. 광주에서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기서 일을 하기로 하였다.
그 미용실에는 나를 도와줄 중급 미용사와 견습생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아픈 상처를 달래가며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사랑으로 손님 머리를 했다. 여느 때 같으면 쉬는 날에 어머니를 뵙기 위하여 집에 갔을 텐데 집에도 가지 않고 돈 벌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었고, 그것만이 최고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미용실은 한 달에 두 번 쉬었기에 나는 쉬는 날이면 집에 가서 어머니 일을 도와 드려야 했지만, 주인이 쉬는 날에도 동네에 들어가서 파마해주기를 원했기에 집에도 가지도 못하고 집에 가서 어머니를 도와드린 셈 치고 여러 마을에 들어가 10~20여 명 정도 파마를 했다. 그렇게 번 돈은 주인에게 고스란히 갖다주었다. 그러면 수고비를 조금이라도 줄줄 알았는데, 수고비는커녕
차비조차 주지 않았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수고했다는 말을 들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나중에 알아서 일한 만큼 생각해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가고 몇 달이 지나도 월급은 줄 생각도 하지 않고, 주인 부부는 물건들을 다 집어 던지며 계속해서 싸우기만 했다. 그전에도 늘 그랬었기 때문에 그 미용실에 붙어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다.
동네 사람들은 “오랜만에 좋은 미용사 들어왔네.”라는 말들을 했고, 계속해서 손님이 많아졌다.
129. 소록도 나환자촌에 방문
그러던 어느 날 주인 언니에게 말하고 고흥에서 가까운 소록도 나환자촌에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보다 한 살 많은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우리 작은 오빠가 나병 환자로 판명됐어. 격리시켜야 할 병이라 소록도로 갔는데 나도 검사를 받아야 된대.”라고 했다.
나는 나병 환자가 뭔지도 잘 몰랐지만, 친구가 많이 걱정되어 검사 결과를 물어봤더니 음성으로 나왔다며 기뻐했기에 나도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오빠가 나환자라는 사실을 안 친구들은 그 친구에게 균이 잠재해 있다가 언제 발병할지 모른다며 함께 있기를 꺼렸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와 더 가까이하려고 노력했고 4학년 담임 선생님이 면 소재지에서 영화를 보여줄 때면 꼭
그와 함께 갔다.
바로 그 친구의 오빠가 소록도에 있기에 친구 오빠도 만나보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록도는 아무나 못 들어간다고 하여 손님 중에 그곳을 잘 아는 사람을 소개받아 그분과 동행했다. 함께 일하던 한 미용사는 질겁하며 “그 무서운 곳에 뭐 하러 가냐?”라고 하였고, 다른 미용사는 주춤거리다 함께 갔다.
검문과 함께 여러 가지 확인 절차를 거쳐 소록도에 들어갔는데 나와 동행해 주신 분이 그곳에서 그들을 굉장히 많이 도와주는 영향력 있는 유지였기에 그날 방문이 가능했다. 말로는 들었지만, 막상 나환자들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같이 간 미용사는 모골이 송연하다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들은 코가 뭉개지고 상처에서 피고름이 흘러나왔으며, 눈에서도 고름이 흘러내려 이미 시력도 상실되고, 손발은 다 오그라지고 썩어갔다. 다리 하나를 절단한 사람, 둘 다 절단한 사람, 팔이 하나인데 그나마 쓸 수 없는 사람 등, 너무나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육신의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사람들의 지독한 편견과 손가락질로 괴로워하는 그들 앞에서 나는 오열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때까지 수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분들의 고통을 접하고 내 몸이 정상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었다. 친구 오빠의 이름을 대며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모두가 무서워 도망가는 그들의 벗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 곁으로 다가가 힘내라고 안아주자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무슨 말인가를 했다.
발음이 명확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으나 나는 그 말이 고맙다는 말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들었다. 함께 간 미용사는 이미 나가 버렸고, 다른 이들이 질겁하며 말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곳 관계자들은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되어 찌그러져 있었으나 아가씨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미소를
볼 수 있었다.”라며 고맙다고 했다.
그들이 똑같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처절한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 절절히 전해오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걸요.”라고 했더니 “이제까지 여기 오래 있어 봤지만, 아가씨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전염될 가능성이 있고 냄새가 나기에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오기는
하지만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갑니다. 그런데 아가씨는….”라고 하더니 그분도 울먹였다.
곁에서 보는 것도 힘들어하던 함께 간 이들이 무섭지 않았냐고 했지만 나는 건강한 사람을 안아준 셈 치니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안쓰럽고, 귀엽고, 불쌍하기만 해 꼭 끌어안고 울며 “힘내서 이 병마와 잘 싸워 이기셔요.” 하고 그들을 격려하였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내가 그동안 받아왔던 고통들과 이 안타까운 눈물을 통해 이분들의 아픔이 씻겨지고, 마음의 위로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간절히 바랐다. 내가 그때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더 좋은 말과 더 큰 사랑의 기도를 많이 해주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불쌍한 그들의 영혼을 성모 성심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해 본다.
130. 논두렁을 거쳐서 간 곳은?
과역 5일 장날, 그날따라 많은 손님을 받느라고 힘이 드는데 주인집 부부의 싸움이 살림이 날아갈 정도였기에 내 피곤은 한층 더 가중되었다. 주인 언니가 남편에게 얼마나 심하게 하는지 여자인 나도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나 맞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두 사람에게 다 문제가 있겠지…. 여자는 심하게 대들었고 남편은 임신한 아내를 밟아버려 아기가 유산되어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아무리 여자가 대든다고 하여도 임신한 아내를 밟아 버린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 아닌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손님은 계속 많아졌지만, 월급도 주지 않고 늘 심하게 싸우기만 하는 그 부부를 보며 함께 일하는 애들이 불안해했다. “언니! 우리 다른 데로 가자.”라며 자꾸 졸라댔지만, 나는 “저 사람들이 불쌍해서 어떻게 다른 데로 갈 수 있겠니?” 하고 그들을 달래가며
계속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과역장 날, 그날은 손님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매월 곗돈이 들어가야 하는데 월급을 주지 않아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피곤하여 쉬고 싶었는데, 종업원들이“언니! 오늘 우리 마음도 심란하니까 산책하러 나가지 않겠어?”라고 하여 “나는 쉬고 싶으니까 가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다녀와.”라고 했다. “언니가 안 가면 우리가 무슨 재미로 가? 언니랑 가기 위해서 먹을 것도 준비했단
말이야.” 하고 계속 조르기에 너무 피곤하였지만, 힘들어하는 그 애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따라나섰다.
그런데 논두렁을 거쳐서 가기에 “무섭게 어디를 가는 거야?” 하고 물었더니 그들이 괜찮다며 계속 가더니 도착한 곳은 묘가 많은 무서운 산이었다. “빨리 가자, 이런 곳 난 싫어. 너희들 안 가면 나 혼자 간다.” “언니, 언니 오기 전에도 우리 여기 와서 자주 놀던 곳이야, 괜찮아.”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꺼내 놓고 먹다가 “언니, 잠깐 볼일 보고 올게.”라고 하면서 두
사람이 다 일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안 돼, 같이 가. 나 무섭단 말이야.” 하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들은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막 달려가고 있었다. 나도 일어나서 그 애들을 따라 달려가려고 하자, 평소에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왔으나 내가 외면해 버리자 애가 탔던, 한 잘생긴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윤 양, 윤 양을 도저히 만날 수가 없어서 내가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용서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한마디 대꾸도 없이 피해 달아났으나, 그는 나를 붙들고 사랑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닌가!
단호히 거부하고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나를 붙들고 기어이 자기 사람을 만들고야 말겠다고 하며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다. 맞구멍이 나도록 여러 곳을 물어뜯겨도 요령껏 힘을 써서 다리를 꼬아 방어하니 끝내 어쩌지 못하였다. 그는 결국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며 “세상 여자들 모두가 윤 양처럼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몸을 보호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거의 그렇지 않았는데, 정말로 윤 양을 존경합니다.”라고 했다.
그런 후에 혹시라도 얼굴을 마주치면 존경한다며 얼마나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지….집에 돌아오니 함께 일하던 종업원들이 계면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지 못하기에, 아무 일 없었으니 다시는 그런 일에 합세하지 말고 몸조심 단단히 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들은 “언니, 미안해요. 다음에는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용서해 주세요.” 했다.
언제나 끝날 것인가? 남자라면 모두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겨웠다. 나를 방어하다가 생긴 상처를 보면서 ‘그래, 내가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니 내 탓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상처도 사랑받은 셈 치자.’라고 생각하니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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