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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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수편물을 창문밖에서 배우다

 

나는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미용을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해야 하는가?’ 고뇌하며 무작정 걸었다. 그때 갑자기 수편물 학원이 눈에 들어와 그곳으로 가보았는데 호감이 갔다. 나는 수편물 학원을 다니고 싶었지만, 어머니께 차마 돈 얘기하는 게 너무 죄송해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배울까?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 방법이 없어 안타까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다음 날, 광주에 올라갔는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수편물 학원으로 옮겨졌다. 여름이라 선풍기를 틀고 창문을 열어놓은 채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께 이야기만 하면 얼마든지 학원비를 대 주시겠지만,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밖에서 배우기로 결심했다. 뜨거운 여름, 나는 흘러내리는 비지땀을 닦으며 창밖에서 배워 집에 돌아와 실습을 했다. 자존심을 던지고 행여 누구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며 눈동냥 귀동냥으로 배우긴 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여 수강생들 못지않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창밖에서 훔쳐보며 모두가 배우기 어렵다는 게이지(일정한 면적 안에 들어가는 코와 단의 수)내는 법도 문밖에서 제대로 터득하여 이종사촌 동생들에게 예쁜 옷을 만들어 주었다. 이 또한 나를 고통 속에서 단련하고자 하신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

 

152. 아이들 때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모님 뒷집은 담장이 낮아 안쪽이 다 보인다. 어느 날, 그 집에서 우당탕 큰 소동이 나서 보니, 부부가 서로 물건을 막 던지며 싸우고 있었다. 물건이 날아가 깨지고 애들은 울고 불며 야단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얘들아, 얼마나 아프니? 죄 없는 너희들이 희생을 치르는구나. 부모를 위해서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렴, 그러면 너희 그 희생을 통해 부모도 좋아질 거야.’

그리고 ‘나는 만약 결혼한다면 설사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사랑받은 셈 치고 다 져 줄 테니까 절대로 싸우는 일은 없을 거야.’ 하며 나와의 다짐을 하는 그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져서 보니 부인이 악이 복받쳐 아이에게 “뒈져버려라.” 하고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내가 어머니께 아무 잘못 없이 맞았을 때를 생각하면서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래, 실컷 울어라. 그러나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말아라. 흘러내리는 그 눈물에 모든 상처가 씻겨 나가기 바란다.’ 하고 기원하며 한도 쌓이지 않으며 사랑받은 셈 칠 수 있도록 내가 겪은 아픔과 고통들을 그 아이를 위해 기꺼이 봉헌했다.

내가 탁아소 보모로 일할 때, 이모뻘 되시는 분이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가서 시어머니, 시누이들로부터 시집살이를 엄청 하다가 몸이 너무 아파서 6살이 된 큰딸을 외갓집에 보냈다. 당시 내가 마을 탁아소 일을 맡아서 했는데 그 아이도 함께 돌보았다. 아이들이 다 돌아가자 그 애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때 아이 엄마가 쫓아와 아이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리자 와락 밀치며 “내 자식이니 너는 상관하지 마!”라고 했다. 엄마는 아이를 때리다 때리다 지치니 나중에는 허벅지고 어디고 입에 닿는 대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그냥 둘 수가 없어 아이를 엄마에게서 떼어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이튿날 함께 탁아소에 갔더니 아이의 엄마가 와서 “어제 미안했어. 시댁에 화가 나 죄 없는 아이를 때렸네.” 했다.

“아이들은 화풀이 대상이 아니에요. 다음에는 아무리 화가 나고 힘들어도 아이에게 그렇게 화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때려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많이 때려도 되지만 때린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때리면 그 순간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좀 지나면 마음이 더 아프잖아요. 그죠?” “맞아, 오늘 좋은 걸 배웠어!” 나는 결혼한다면 아이들이 잘못해도 절대로 때리지 않고 사랑으로만 다스리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153. 고향에서 수편물을 가르치다

 

이모님께서 아이들 스웨터를 짜달라고 하셔서 털실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뜨개질을 하고 싶어도 나처럼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시골 고향에 내려가 수편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모집하여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모두들 얼마나 좋아하던지! 가난한 아줌마들이 특히 더 좋아했다. 나도 배우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라 학원비가 없어 창문밖에서 배웠지만, 돈이 없는 이들에게 무료로 가르쳐 주게 된 것은 나에게 두고두고 큰 보람이 되었다.

시골에서 새 털실은 너무 비싸 살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기워 입다가 이제 어떻게 할 수 없어, 버리는 스웨터들을 얻어다 풀어 털실을 조달했다. 그리고 주전자에 물을 펄펄 끓여 뜨거운 김이 올라오면 우글쭈글한 털실들을 김에 쐬어 새 털실처럼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자존심을 팽개치고 문밖에 서서 배운 보람이 있어 그렇게도 흐뭇하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영덕이란 애는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하루 지나면 잊어버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나 ‘내게는 결코 포기란 없다!’ 생각하고 꼭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염원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르쳤더니 수학을 전혀 하지 못하던 그도 결국 게이지를 내어 스웨터도 짜게 되었다. 불가능이 없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 흐뭇함이란 겪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154. 광주의 요꼬 학원으로

 

그러던 어느 날, 광주 요꼬 편물 학원에서 편지가 왔다. 요꼬를 한번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일단 방문을 한번 해 보자는 생각으로 광주로 가 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정말 흥미 있고 호감이 갔다. 앞으로 전망도 좋고,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학원에 다니기로 하고 집으로 내려와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승낙해 주셨다.

나는 부지런히 배워 쉽게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장님께서 경리를 좀 보면 어떻겠냐 하셔서 ‘나는 이제 뭔가 쉽게 풀리는구나.’ 하며 좋아했다. 그때 요꼬 기사 자격증을 가지고 우리를 가르쳤던 두 분의 강사가 나를 따로 불러 함께 요꼬 학원을 차려 동업해 보는 게 어떻겠냐며 전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데 귀가 솔깃했다. 누구든지 내 마음과 같은 줄 알았던 나는 그 당시 그 이야기를 거짓으로 듣지 않았다. 그렇게 많이 속아왔으면서도 나는 누구의 말이나 행동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계속 남의 밑에서 소처럼 일하면서도 월급 한 푼 받아보지 못했던 나는, 단 한 분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고생이 되더라도 발 벗고 나서서 내 일을 찾고 싶었다. 얼른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원장님께는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와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쾌히 승낙해 주셨다.

 

155. 외가댁과 친지들의 약혼 반대

 

그이 하숙집 형님이 또다시 “결혼하지 못할 거면 어서 약혼이라도 해서 함께 살면 좋겠어.” 하고 그이도 “많은 여자들이 자신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한다.”라며 “우리 약혼식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했다. “결혼 대상자가 있다고 하지 그랬어요?”라고 했더니 “그랬지, 그래도 소용이 없어. 그 애들이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구니 우리가 약혼식이라도 한다면 포기할 것 아니야?”라고 했다. 하숙집 형님의 이야기와 종합해보니 딴에는 그렇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이에게 집안끼리 타협이 되어야 하니, 집안 어르신들께 먼저 말씀드려보자고 했다. 차라리 결혼식을 하는 것이 나으련만 나에게는 벌어놓은 돈이 없었다. 요꼬 학원을 경영하여 돈을 벌어 결혼하리라 생각하고 양가 어르신들께 허락을 받기로 했는데, 어머니만 제외하고 친척 어르신들은 모두 다 반대하셨다.

친척 어르신들은 그 사람은 집안의 대종손이고 6남 2녀 8남매의 큰아들이며, 시골에 조부모님도 계시니 그렇게 많은 가족을 어떻게 보필할 수 있겠느냐 하셨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형제가 많은 집의 큰며느리가 될 일은 절대로 아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니라, 잘 생각해서 해야 한다.”, “아이고, 어떻게 조부모님까지 계신 데로 시집간다니? 작은며느리로 가서 홀가분하게 살아라. 어머니도 생각해야지.” 하는 등 여러 어르신이 한마디씩 하셨다.

친구들까지도 “너 미쳤냐? 미치고, 돌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형제가 많은 곳으로 시집을 간다냐? 마음을 돌려라. 너 같이 예쁘고 마음씨 착한 사람은 서로 데려갈 거다.” 하고 말렸다. 나는 어르신들에게는 내색하지 못했지만, 친구들에게만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형제가 많은 사람은 결혼하지 말고 살란 말이야?”

세상을 살아가는데 진정 중요한 것은 인격을 존중해 주고, 감싸주고 위해 주며, 사랑으로 덮어주면서 부족한 것은 채워주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지 지위와 권력과 권세를 앞세우고, 재산과 학벌을 내세워 자신의 안락과 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다.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혼자 외롭게 커서, 형제가 많고 아버지까지 계신 곳을 택하여 우애와 신의를 지키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기에 그 사람과 결혼할 것이니 다시는 딴소리 하지 말라고 내 결심을 얘기했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자, 그 사람이 너무나 측은하게 생각되어 어떠한 반대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그와 결혼할 것을 다짐했다. 그는 결혼 대상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조건들을 골고루 많이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다른 여자들이 싫어하는, 짊어져야 할 짐이 많은 곳으로 가서 함께 짐을 져 주고, 형제들이 서로 우애 있게 지내게 하여 그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또, 많은 형제를 골고루 사랑해 줄 자신도 있었다. 나는 걱정하시는 분들에게 보란 듯이 잘살아 보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156. 그이 집에서의 반대

 

우리 집에서 허락받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이 아버님은 서울 경성대학을 졸업하시고, 일본에서 와세다대학을 나오셨다. 대학원 다니실 때 동경에서 그이를 낳게 되었는데, 아들이 귀했던 집안에서 태어난 그이는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광주에서 제일가는 명문 학교인 서중·일고를 나온 아들이었기에 아무에게나 혼인시키기가 싫은 것이다.

더더구나 8남매의 장손인데,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혼자 컸던 나를 며느리로 맞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큰아들이었고, 나는 외딸이었으니 그이 집과 우리 집 양가에서의 반대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들의 간절한 청에 못 이긴 그이 어머님은 “그러면 사람이나 한번 보자.”라고 하셨다 한다.

 

157. 선을 보다

 

24세의 나이로 처음 선을 보게 된 나는 너무 떨렸다. 광주의 어떤 제과점에서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이 어머니와 외사촌 동생까지 와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였다. 쑥스러웠지만 숨기지 않고 묻는 말에 소신껏 있는 그대로 대답하였다. 내가 처한 조건만 듣고 결혼을 반대하셨던 그이 어머니와 함께 따라 나온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마음에 들어 하며 결혼을 승낙해 주셨다.

양가의 허락을 얻은 나는 기쁘기에 앞서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자!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내가 선택한 길이니, 모두의 행복과 평화를 위하여 나의 한 몸을 사랑으로 희생하며 바치리라.’라고 다짐했다.

 

158. 결혼을 약속한 그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고

 

“윤 양, 김 선생이 위독해요. 빨리 병원에 가보세요.” “예? 위독하다니 무슨 일인데 그래요?” 너무 놀란 나는 소식을 전해주던 직장 동료에게 자초지종을 다그쳐 물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그의 말에 그대로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정신이 아찔해졌다.

‘만약에 그이가 죽게 된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심장이 멎는 듯했다. 하늘 아래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오직 어머니 한 분뿐이었던 나의 삶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험한 가시밭길이었던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와 형제가 그리워 남몰래 뿌렸던 그 눈물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이제 남은 한 생애에 힘이 되어 주고,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눌 동반자가 되어 주겠다며 내 앞에 나타난 사람. 훈훈한 입김으로 성에를 녹이듯, 얼었던 나의 몸과 마음을 녹여 주고, 내 곁에서 따사로운 햇살이 되어 희망과 의지가 되어 줄 그이가 심한 교통사고로 생사의 여부도 확실치 않다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문을 들어서자 그이 어머니가 밖에 서 계시다가 무섭게 날 위아래 훑어보셔서 쪼그라드는 거 같았지만 인사하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니 그이는 혼수상태였는데 머리를 많이 다쳤다고 했다. 그이는 군인의 날 행사에서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취중에 자전거를 타고 2차선인 나주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금성 여객버스가 멈칫멈칫하며 가는 것을 보고 앞질러 가기 위해 자전거를 옆으로 돌려 1차선으로 추월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광주 여객 직행버스가 과속으로 달려왔다.

주변에서 일하고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버스를 보면서 사고가 날 것 같다며 걱정스레 바라보는 순간 그이는 직행버스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머리는 땅 쪽으로, 다리는 하늘로 향한 상태에서 아스팔트 위로 머리가 내리꽂혔다. 버스는 급정거하면서 8m나 미끄러진 뒤 섰다고 한다. 사고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아이고, 아까운 사람 또 하나 죽었구먼, 쯧쯧쯧.” 했다 한다.

의사도 “그 정도로 심하게 머리를 다쳤으니 살아날 가망성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구토하는지 잘 관찰하면서 48시간을 지켜봐야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나는 혼수상태의 그이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입에 입김을 불어 넣으면서 호흡이 돌아오기를 염원했다. 모든 정성을 기울여 간호했더니 하루 만에 정신이 돌아오고 하루하루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기 시작하면서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완쾌되어 퇴원할 수 있었다. 병원을 나올 때의 그 기쁨과 안도의 마음을 저 푸른 하늘도 알고 있는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 같았다.

 

159. 약혼식을 올리다

 

1970년 3월 16일, 눈물겨운 일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어려운 과정을 다 이겨내고 약혼식을 하기로 했다. 일등 부부 즉, 잉꼬부부가 될 것을 약속하며, 광주에 있는 일등 호텔에서 양가 가족들과 친지 몇 분이 모인 가운데 조촐한 약혼식을 올렸다. 우리 어머니는 시댁 쪽에 기죽지 않기 위해 빚을 내어 비용을 혼자 다 부담하셨다.

약혼식장에서 친정 식구들이 다 계심에도 불구하고 시아버님이 나를 두고 혀를 차며 “내 딸만큼 한 사람은 없구먼.” 하며 눈을 흘기셨다, 우리 외갓집 식구들이 유학까지 다녀온 분의 인격을 의심할 정도였고 “너 시집가면 좀 힘들겠다.”라며 한마디씩 하셨다. 설사 자기 딸만큼 못하다 할지라도 어떻게 처음 대면한 사돈들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며 언짢아하신 것이다. 그날 시댁에서는 남자분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그분들의 구두까지 모두 닦게 하여 친정어머니가 그 돈까지 지불하셨다.

없는 돈에 딸의 기가 꺾이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라고 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또 그렇지가 않았나 보다. 남에게 기도 죽지 않고,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도 듣지 않게 하려고 나를 엄하게 다루기도 하며 얼마나 애를 쓰셨던가! 그렇게 키웠던 딸자식이 약혼하게 되니, 무리해서라도 약혼식만은 남부럽지 않게 해주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에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애쓰며 살아왔지만, 저의 바람과는 달리 세상이 나를 받아 주지 않았기에 어머니를 편히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되어서, 부족하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한 어머니를 편히 모시도록 노력할게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160. 요꼬 학원을 시작하다

 

학원을 열기 위해 빚을 내야 했기에 많은 분들이 알게 되었다. 도움도 주지 않는 분들이 오히려 어머니를 질시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반대하고 욕을 하기도 했으나 어머니께서는 나를 믿고 그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빚을 내어 자금을 대주셨다. ‘그들은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그랬겠지. 우리를 사랑했기에 걱정되어서 욕도 했겠지.’ 하며 좋은 쪽으로 받아들여 마음은 아팠지만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했다.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더 노력해서 그들에게 성공한 모습을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니 기쁘기만 했다. ‘이제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신바람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일을 했다. 학원은 야간까지 했다. 요꼬는 동업자들이 하고, 나는 편물, 수편물, 아후강, 뜨개질을 했는데 쉬는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쉬는 시간에는 학교 학생들 추리닝을 만들어 납품하였고, 일요일은 포스터를 써서 광주 일대 먼 곳까지 붙이러 다녔다. “윤 선생이 글씨를 잘 쓰니 포스터는 윤 선생이 써요.” 하여, 잘 쓰지 못하는 글씨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뜻을 따라야 했기에 더욱 바빴다. 학원에서 번 돈은 일본에서 비싼 기계를 들여와야 했기에 모두 다 재투자되어 차비조차 각자 부담해서 다녔다.주머니가 가벼우니 도시락까지 싸서, 차도 타지 않고 걸어서 다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모님 댁에 밥을 해드리고 도시락을 싸서 다녔지만, 그 당시 거지가 아주 많아 도시락은 거의 그들 차지가 되었고 내가 먹은 적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야간 수업에다 학교 납품일까지 겹쳐 일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끼니를 거를 때가 부지기수여도 먹은 셈 치고 일하고, 또 훗날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은 들어도 희망이 있었기에 기쁘게 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