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배가 찢어져 고픈 배를 움켜쥐지도 못하던 아이
요꼬 학원을 운영할 때, 출근을 하려는데 9시까지 호출전화(당시는 전화가 별로 없어 전화국에 가서 전화를 받았음)를 받으라는 연락이 와서 전신전화국으로 가다 계림동 파출소 사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무슨 구경거리가 있는지 많은 사람이 서로 뒤질세라 앞다투어 빙 둘러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시간이 급해 그냥 지나치려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 틈새로 비집고 안을 보니 이게 웬일인가! 17~18세쯤 된 거지 소년이 땅바닥에 뒹굴면서 크게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을 험담하는 게 싫어 사람들과 가까이하지 않았고, 말을 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나에게 벙어리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빽빽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큰소리로 구경하는 사람들을 나무랐다.
“당신들 목에 사챙이(넥타이) 매고 지금 무엇들을 하고 있는 짓이에요! 이 불쌍한 사람이 받는 고통이 어찌 당신들의 구경거리가 될 수 있어요, 네?” 그때 나는 사챙이가 무슨 말인 줄도 모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라도에서는 넥타이 맨 사람들이 잘못할 때 그렇게 낮춰 부른다고 했다.
무심하고 인정 없는 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하나씩 떠나가고 나와 그 아이 둘만 남았다. 그 아이에게 가까이 가보니 배가 찢어져 피가 나오고, 또 다른 곳에서는 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오,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 나는 그 아이에게 약을 사다 주기 위해 “배의 상처 말고 어디가 가장 많이 아프니? 약 사올게.”라고 하자 아이는 “아니에요, 지금 배가 너무 많이 아프지만,
배가 더 고파요. 먹을 것 좀 사다 주세요.”라고 하였다.
“먹을 것을 줄 테니까 우선 아픈 곳 먼저 치료하고 약부터 먹자.”라는 나의 말에 아이는 사흘이나 굶어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손을 움직이지 못하던 그 아이는 “미안하지만 내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니 그 돈을 꺼내다가 먹을 것 좀 사다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돈이 있어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먹지 못하다니!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 많은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하는 것을 구경만 했단 말인가?’
소년은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자꾸만 먹을 것을 이야기하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했다. 손이 말을 듣지 않아 잡아서 도와주었더니 돈을 꺼내어 먹을 것을 20원어치만 사다 달라고 했다. 내 도시락을 꺼내서 그에게 떠먹여 주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다 먹였더니 처음부터 나를 지켜본 약국 아저씨가 다가와 약값을 되돌려 주었다.
내가 거절하자 “아가씨, 부끄럽소. 저 아이는 밤낮 사흘 동안이나 저렇게 뒹굴며 울고 있었소. 그런데 돌봐주기는커녕 파출소가 옆에 있어도 신고하는 사람 하나 없었는데, 아가씨가 나타나 도와주었으니 거기에 나도 좀 끼워 주구려.” 하여, 할 수 없이 약값을 돌려받았다. 약사는 “와, 요즘 세상에 아가씨 같은 사람도 다 있네요.” 하며 감탄하기에 “저는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에요” 하고 아이의 찢어진 배를 치료해주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시누이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 “창피하지도 않아요? 빨리 가세요.”라고 하였다. 나는 “창피하다니요? 불쌍한 사람 도와주는 게 무엇이 그렇게 창피해요? 창피하거든 먼저 가시지요.”라고 했는데 기분이 조금 언짢았다. 누가 나를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모함하고, 사정없이 때리고 모멸해도 ‘사랑받은 셈 치고’ 다 봉헌했는데 시누이 남편에게
그런 생각이 들다니….
돈이 있어도 움직일 수가 없어 음식도 사 먹지 못하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어도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몸부림치며 외롭게 죽었을 수도 있었던 그 아이! 이 기막히고 냉혹하며 매몰찬 세상인심에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신전화국으로 전화받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시간은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수중에 있는 돈을 다 꺼내어 아이에게 건네주며, “내가 다녀올 동안 여기 있어. 알았지, 응?” 하고 급히 전신전화국으로 갔더니 전화는 이미 끊겨있었다. 나에게 아주 중요한 전화였고 전화 건 분에게도 미안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전화 덕분에 불쌍한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워 전화를 걸어주신 분에게 너무 감사했다. ‘그 전화가
아니었으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아찔하여 그분이 은인으로까지 생각되었다.
중요한 전화를 받지 못해 일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더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어서 너무너무 기뻤다. 전화국을 나와 달리다시피 하여 아이에게 갔더니, 그 소년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약사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두가 다 “어? 좀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라고 할 뿐이었다. 아이의 행방에 대해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배가 터져 손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아이가 멀리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 근방을 샅샅이 뒤져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었다.
왠지 안타깝고 짠한 마음이 들어 그 자리를 뜨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 일로 학원에 늦게 출근하여 핀잔을 들었으나 “윤 양, 좋은 일 하고 오느라고 수고했어.”라는 부드럽고 친절한 말을 들은 셈 치니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아올랐다. 용돈을 다 털어준 덕분에 한동안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했지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내 마음은 초라하지만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건강하기를 바란다.
162. 며느리의 구박에 죽으려던 할머니 쓰러지시다
그 아이가 때때로 생각났다. 찢어진 배를 치료해 주고 약을 먹였지만, 상처가 아물었는지 또 어디서 또 다른 고통을 겪으며 굶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어느 날은 조금 일찍 출근길에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애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 가보기도 했다. 숙식하고 있던 이모님 댁에서 학원까지는 6km 남짓 되었다.
그 거리를 ‘누가 쓰러지지는 않았나? 굶고 있지는 않나?’ 두리번거리며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다 거지가 발견되면 내 도시락을 먹이고 나는 점심을 굶었다. 아는 사람이 그런 나를 보면 늘 “더럽지도 않냐?”라고 했지만, 배고픈 사람의 허기를 면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더러움을 느끼지 못했고 도시락도 내어 줄 수가 있었다.
이 일을 이모님께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도시락과 수저를 학원에서 깨끗이 씻어가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꺼림칙하게 생각하실까 봐서다. 그런데 어느 날 학원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오늘은 배고프고 불쌍한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도 못했는데 괜히 먼 길을 돌아왔구나.’ 하고 도시락 먹여줄 사람이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걷는데, 어떤 할머니가 내 앞에서 푹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즉시 달려가서 할머니를 일으켜 앉히고 어떤 사정인지 물어보았다.
할머니의 남편이 돌아가시자 며느리의 구박이 심해져 아들이 출장을 가면 밥도 주지 않는다 했다. 급기야 며느리에게 쫓겨나게 되셨고, ‘이제 세상을 더 살아서 무엇하겠느냐.’ 하며 죽기 위해 약을 사러 나왔다가, 허기로 기진하여 쓰려졌다 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위로해 드리고 “배가 고프실 텐데 우선 식사 좀 하셔요.” 하며 도시락을 꺼내 주었더니 죽기로 결심하였다는
사람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 치우셨다.
도시락을 다 드신 할머니께서는 “나 죽을란디 왜 먹였어?” 하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죽기도 쉬운 일은 아니구먼이. 처녀는 잘 살소, 처녀의 시어머니 될 사람은 참 좋겠다.” 하시더니 “처녀, 처녀는 백년해로하고 잘 살소이. 부부는 좋아도 싫어도 함께 살다가 함께 죽어야 써.”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할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나 함께 울었다.
어떻게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때 나는 이다음에 자식이 있어도 외롭고 소외된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한 양로원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고부 갈등으로 인한 이런 일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이웃을 위하여 사랑의 마음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염원해 본다.
163. 아주머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른 봄의 늦은 밤, 야간 수강생들을 모두 보내고 집으로 가기 위해 학원을 나섰다. 그런데 버스가 끊긴 정류장에 어떤 초라한 아주머니가 남루한 여름 옷을 입고 홀로 앉아,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한곳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왜 여기 앉아서 계셔요?” 하며 보았더니, 울고 있었다.
아침에 허기진 할머니의 굶주림을 채워드리기 위해 있는 돈을 다 써버려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어 시내버스를 두 번 타야 하는 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기에, 그 아주머니를 데리고 한 시간가량 걸어서 이모님 댁으로 갔다. 내가 입던 옷 몇 가지를 내어주고 내가 먹을 음식을 먹였더니,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인심은 없다.” 하며 눈물지으며 돌아갔다.
‘불쌍한 사람들을 마음껏 도울 수 있는 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탓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도시락이라도 먹이기 위해 매일 점심시간에 시내버스 승강장이 있는 그 자리로 나오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 이후에 점심때마다 내려가 보았지만, 아주머니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164. 동업자의 엉큼한 생각
동업자들에게 늘 약혼자 이야기를 해왔고 시댁 자랑도 했었는데, 원장과 다른 한 선생은 엉큼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원장이 “○선생은 돈을 줘서 내보내고 둘이 학원을 하자.”라고 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거절했지만, 날이 갈수록 더 극성이었다. 동업자들이 나에게 천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원장은
더 많이 극성을 부렸는데, 나중에는 나랑 살기 위해 이혼까지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치근덕거림이 너무 고통스러워 어쩔 수 없이 학원을 그만두고 이모님 댁에 있었다. 며칠 후 원장이 나를 만나러 왔는데, 만나 주지 않자 두툼한 편지를 써서 두고 갔다. “윤 선생이 안 계시면 학원을 도저히 운영할 수가 없으니 제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한번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해 봅시다.” 하는 4페이지나 되는 장문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나는 그들을 믿어보자는 새로운 각오로 학원에 나갔는데, 며칠이 지나자 그들의 눈길이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약혼한 그이와 상의를 하고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학원을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통보했다. 그들은 “그러면 할 수 없지요.” 하고 며칠 후에 오면 그때 돈을 주겠다고 하기에, 그날을 기약하며 돌아왔다.
165. 동업자 가족들의 잔혹한 집단폭행!
동업자들과 약속한 날, 학원에 나가려고 하는데 이모님께서 “예감이 이상하다.”라고 하며 중학교 2학년인 이종 남동생을 데려가라고 하셨다. 나는 무슨 일이 있겠느냐고 했지만, “그래도 함께 가야 한다.”라고 해서 동생을 데리고 학원을 찾았다. 학원엔 아무도 없었고, 원장님이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는 경리의 전갈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짧은 한복을 입고 갔는데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미처 손쓸 새도 없이 갑자기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무방비 상태인 내 위에 두 여자가 올라탔다. 하나는 어깨를 사정없이 꺾으려고 하더니 머리채를 잡아 뜯으며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쿵쿵쿵 쳐댔고, 다른 하나는 다리를 꼬집고 비틀고 물어뜯으며 부러뜨리려 했다. 마치 나를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잔인하게도 나를 일으켜서
물어뜯고, 비틀고 하여 힘이 장사라고 하던 나도 순식간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러다가 나를 일으켜서는 “요이땅!” 하면서 요꼬 기계에다 몇 번이나 머리를 계속 짓찧으니 눈에서 불이 번쩍번쩍 났다. 나는 꼭 죽는 줄만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원장 부인과 어머니였는데 입에 담기도 민망할 터무니없는 말로 누명을 씌우며 오히려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부인은 내가 자기 남편을 좋아해 이혼시키려 했다며 “유부남을 좋아해
이혼시키려 하는 이런 년은 죽어도 싸다.” 하고 죽이려고 한 것이다.
내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력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둘이 나를 번쩍 들어, 내 머리를 큰 기계의 쇳덩이에 계속 종을 치듯 짓찧는 바람에 나는 결국 혼절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놀란 이종 동생이 집으로 뛰어가 이모님을 모시고 왔을 때는, 이미 그들이 사라진 뒤였다. 이것이야말로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모님이 오셔서 줄줄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주며 내 머리에서 뽑혀 나간 몇 뭉텅이의 머리카락을 집어 들고 “고소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내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기는 아픔이었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사랑받은 셈 치자.” 하며 이모님을 달랬다. 그러나 이모님은 피투성이가 된 나를 데리고 원장 집을 찾아갔는데, 원장은 없었다.
이모님은 “빨리 원장 찾아내라. 안 그러면 내가 너희들 집단폭행으로 가만 안 놔둔다.”라고 하셨다. 원장 부인은 오히려 “처녀가 유부남을 좋아하고 우리 돈을 먹고도 돈을 안 내놓으려고 하니까 그랬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모님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야, 이년아! 똑똑히 들어. 우리 홍선이가 네 남편 어디를 보고 좋아하겠냐? 검사, 판사, 약사, 다 버리고 우리
김 서방을 택했다.
착각하지 마라. 네 남편 같은 사람은 100 트럭이 있어도 우리 홍선이에게는 다 쓰레기일 뿐이다, 이년아! 그리고 너희가 돈을 안 주는 것이지, 우리 홍선이가 무슨 돈을 내어놓는단 말이냐?”라고 하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이모님은 큰 소리로 “오늘만 날이 아니다. 너희들 각오해!” 하고 원장 집을 나왔다.
166. 당신의 억울함을 내가 풀어주겠소
견딜 수 없는 치욕적인 그들의 행위는 나도 그냥 사랑받은 셈 치고 넘어가기가 힘들어 약혼자인 그이를 찾았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창피했지만, 찾아갈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이는 나의 모습을 보고 놀라 “당신의 억울함을 내가 풀어주겠소.”라고 하며, 당장에 친구 한 분을 불러 광주로 올라와 원장 집을 찾았다. 그의 부인과 계속 실랑이를 벌이며 원장을 찾아보려 했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원장은 나의 투자금을 돌려주지 않기 위해 그리고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산으로 가족들이 화가 나도록 거짓을 꾸며 그들을 분노케 한 것이다. 나를 반병신 만들 작정으로 가족 전체가 합세하여 횡포를 부린 것이니 모두가 “진단서를 끊어서 고소하자.”라고 하여 파출소를 찾아갔다. ‘명예 훼손죄’, ‘집단 폭행죄’ 등으로 고소할 수 있다며 서류를 주기에 작성하다가
중간에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억울하고 분하긴 하지만, 처녀가 재판하여 이긴다고 한들 한번 잃었던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고소를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가족을 시켜 누명을 씌우고 온갖 욕설을 퍼붓게 하고 몸을 숨긴 채 나타나지 않는 그 뻔뻔한 사람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167. 누명은 벗겨졌지만 참담한 내 마음은
다음 날, 원장의 부인이 내 약혼자에게 귓속말로 무언가 이야기하자 그의 낯빛이 대번에 변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구나.’ 직감하고 “왜 그러세요?” 하고 물어보니, “당신 ×월 ×일 ×시에 그 사람하고 ○○여관에 함께 있었다며? 그랬어?”라고 했다. 내가 “예? 세상에 그 말을 믿으세요?” 해도 “빈총도 안 맞은 것만은 못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신의 억울함을 내가 풀어주겠소.”라고 하던 그이까지 어떻게 이럴 수가! 견딜 수 없도록 치욕적이어서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았다. 나는 잘살아 보려고 작은 일에도 늘 최선을 다했다. 내가 불편하더라도 이웃이 화평하기만을 바라며 오직 선을 향하여 살아왔지 않은가! 그러나 갈수록 비참해지는 이 현실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나?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아버지 계시지 않는 집안을 빨리 일으켜서 한 분뿐인 어머니를 잘 모셔 보려고 노력했던 잘못밖에 없는데…. 이제까지 모든 어려움을 늘 셈 치고 잘 봉헌해 왔지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처절한 절망감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를 이런 식으로 골탕 먹인 뻔뻔스러운 그 원장은 철면피 중에서도 철면피였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그때 나는 마음과 육신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상태여서 그 어떤 해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원장도, 믿었던 약혼자인 그이도 나는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이 친구는 “투자한 돈 주지 않기 위해 사람을 저 모양으로 만든 그들의 말을 믿는다면, 자네는 졸장부야!” 하고 매우 화를 내며 그냥 가 버렸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나는 파렴치한 그 부인이 모함한 날짜를 달력에서 찾아보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여자가 콕 집어 말한 날짜의 그 시간에 나는 학원에 출근도 하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시댁에서 함께 지냈던 날이었다. 그날이 바로 시아버님 생신이었기에 생신상을 차려 드린 것이다. 그 사실이 확인되자 그이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친구도 “그것 봐. 이 사람아,
내가 뭐라고 했나.” 하고 핀잔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치욕적인 누명이 벗겨졌다. 학원을 시작하고 일요일에도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는데, 그날 하루 시아버님의 생신상을 차려 드리기 위하여 시댁에 갔던 것이다. 사자 굴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다니엘을 살려내셨고, 다니엘을 통해서 수산나를 죽음 직전에 살려내신 하느님께서 나를 고통의 화덕에서 단련시키시고자 이 일을 예비하신
것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168. 긴장이 풀린 나도 쓰러졌다
이틀 만에 우리는 원장을 붙잡았다. 나를 좋아해 매일 같이 학원에 들락거렸던 그의 형과 어머니, 부인과 친구들과 동업자까지 모였다. 우리 이모님은 내 머리에서 뽑힌 머리카락 한 뭉치를 들고 오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형이란 사람이 “지가 좋아해서 ○한 번 해준 것이 뭐가 잘못했다고 저 난리라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말이 너무 끔찍해 여러 사람이 모인
앞에서 처음으로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야, 이 나쁜 놈아, 내가 언제 너를 좋아했냐? 모두 모인 앞에서 말해 봐!” 하고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지금까지 투자한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나 선하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던 나의 영혼을 깡그리 짓밟았기에 아버지 안 계신 설움이 복받쳐 올랐으며 견딜 수가 없었다. 사정없이 뺨을 맞은 원장은 바로 무릎을 꿇고 “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였다. 그것을 본 그의 어머니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긴장이 풀린 나도 쓰러졌다.
그 사람은 “돈을 꼭 갚겠습니다, 며칠만 여유를 주십시오. 다른 사람이라도 보내면 꼭 돈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돈을 포기했다. 어머니가 나락 빚을 내어 학원을 하도록 해 주셨기에 그 빚을 갚아야 했지만, 사람의 탈을 쓴 짐승 같은 그들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추잡한 그들을 통해서 나온 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 원래 있던 돈을 도둑맞은
셈 치고, 그리고 나락을 빚내 가지고 방에다 놔뒀는데 집에 불이 나서 탄 셈 치고 돈을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169. 너무나 큰 시련 속에서
이 사건은 내게는 헤쳐나가기에 너무 벅찬 시련이었으며 어머니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 새로 일어서자 다짐하며 또다시 셈 치고 살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나에게는 함께 의논할 친지도, 친구도 없었다. 늘 혼자 울며 하늘을 바라보고 아버지를 찾았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고, 요꼬 학원을 하기 위해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는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눈은 늘 충혈되고 부어 있었다.
나의 머리에는 이러한 걱정들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걸으면서도 어디가 어딘지 몰라 헤매고 다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늘 다니던 터미널을 찾지 못해 당황한 적도 많았다. “여자가 무슨 사업이냐?”라고 반대했던 사람들로부터 어머니께 비난의 화살이 다 쏟아졌다. 어머니께서는 입버릇처럼 “풀리지 않는 이 세상, 차라리 함께 죽어 버리자.” 하고 한탄을
하시니 애타는 나의 가슴을 그 누가 알 것인가?
170. 미용실을 개업하기로
약혼자인 그이가 하숙했던 집주인이 금천면장이었는데, 그이를 동생으로 생각하고 의형제를 맺어 그이를 그곳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그 면장님의 부인이 나를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갔다. “어이, 우리 애들 삼촌(그이)하고 결혼하면 안 되는가?” “저는 아직은 결혼할 형편이 못 돼요.”
“그럼 나주 시내에서 미용실을 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자신이 없다고 했더니 “약혼자 밥을 해주면서 미용실은 취미로 해 봐.” 하셨다. 그 말에 내가 펄쩍 뛰며 “그래도 어떻게 결혼 전에 같이 살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까 “뭐 어때? 지금은 약혼하지 않고도 사는데, 약혼했으니까 괜찮아.”라고 하셨다.
내가 그래도 안 된다고 하자, 그분은 솔직히 털어놓으셨다.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려도, 밤마다 여자들이 찾아와서 12시가 넘어도 돌아가지 않으니 걱정돼서 그래. 결혼을 빨리하던가, 지금 못하겠으면 약혼식 올렸으니 함께 사는 게 좋지 않아? 남자 밥해주면 여자들이 오지 않을 거야. 남자 안 뺏기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내 말대로 해봐.”라고 하면서 계속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결혼 전에 같이 지내는 건 좀 그렇다고 계속 말하자 “그럼, 나도 모르겠네, 자네 알아서 하소.” 하셨다. 고민 끝에 딸 하나 아무렇게나 시집보내지 않으시려는 어머니의 뜻도 있고 하여,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미용실을 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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