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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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첫날밤부터 눈물을

 

그분의 주선으로 조그만 방이 하나 딸린, 나주 시내에 있는 서울 미용실을 12만 원에 인수하여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살림을 준비하였다. 방도 겨우 둘이 누울 수 있는 좁은 방이었지만 ‘기왕에 시작한 것이니 최선을 다하여 잘해봐야지.’라고 생각하며 신혼살림이 아닌 신혼살림을 꾸몄다. 고맙게도 주인집에서는 부엌을 더 크게 만들어 주셨고, 나는 갓 시집온 마음으로 이사를 하여 미용실을 개업하였다.

시댁에서는 김치라도 담아온다고 하여 기다렸는데, 결국은 아무도 와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밤이 되어도 그이는 소식도 없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첫날밤부터 눈물을 흘려야 했으며 그이를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아 손님을 받았다. 내 길이 아니면 옆도 보지 않고 다니던 나인지라, 오로지 그이만을 믿고 의지했던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172. 술과 화투로 나날을

 

아버지나, 오빠처럼 또는 어머니나, 언니나, 동생처럼 생각하며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겨 잉꼬부부가 되고자 했던 나의 꿈은 서서히 무너져 가는 듯했다. 그이는 친구를 잘못 만났는지 직장에서 매일 밤을 술과 화투로 보내기가 일쑤였다. 아침이면 집에 들어와 밥만 먹고 나가곤 했는데, 하숙을 정해 놓고 필요할 때 들어와서 밥이나 먹고 나가는 형국이었다.

 

173. 임신을 했는데 입덧은 심하고

 

파마를 할 때 아프지 않게 잘한다고 소문나 손님이 계속 늘어났다. 나는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을 하면서 그이를 기다렸지만, 그이는 가정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어쩌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와서 자고 출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입덧이 너무 심해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손님을 받아야 하는데 입덧은 자꾸만 심해지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임신한 아내가 온종일 일하고 저녁에 들어오면, 사랑하는 남편이 “여보, 고생했소.”라고 하며 어깨, 다리를 안마해 주는 ‘행복한 부부인 셈 치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174. 미용실에서 쓰러지다

 

그이는 그날도 술이 많이 취해 들어왔다. 나는 늦게까지 일하고 청소를 끝낸 뒤에도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술 곁에도 못 가는 내가 좁디좁은 방에서 술에 취한 그이와 함께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나도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나는 거울 앞 의자에 초라하게 앉아 있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닭이 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미용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연탄가스 때문이었다.

물동이에 물을 하나 채워 놓았는데, 넘어지면서 엎지른 물 때문에 겨우 정신을 차린 듯했다. 더듬더듬 기어서 방으로 들어가니, 그제야 그이는 무슨 일이냐며 불을 켜고 보더니 놀라서 나를 씻겨 주었다. ‘그이는 나를 무척 사랑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랬을 거야!’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며, ‘사랑 받은 셈 치고’ 위안으로 삼았다.

 

175. 수척해진 그이를 보며

 

시어머니께서 처음 나주에 내려오셨는데, 얼굴이 언짢아 보이셨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임신까지 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왜 언짢은 얼굴이실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네 남편이 왜 그렇게 시커멓게 수척해졌냐?”라고 하셔서 나는 깜짝 놀랐다. 어젯밤에는 들어오지도 않았을뿐더러, 오늘은 얼굴조차 보지 못했는데 언제 보셨다고 그러는가 싶어 “언제 보셨는데요?” 하고 물었다.

“내가 여기 올 때 출근하드구먼. 남편에게 잘해 주어야지, 옷도 꾀죄죄하여 쓰것드냐!” 하시는 말씀에 “네, 어머니. 더 잘할게요.”라고 했다. 평소에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며, 화투로 월급까지 다 날린다는 사실을 차마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나의 잘못으로 돌리고 속으로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집에 들어올 시간도 없이 화투만 쳤으니 옷이 꾀죄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잠시, ‘지도소는 터미널에서 반대편인데 광주에서 버스로 오신 시어머니가 보셨다면 그이는 어디서 자고 왔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사랑 받은 셈 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해야지!

 

176. 어떤 아가씨가 찾아오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찾아와서 “말씀 좀 묻겠어요. 여기가 김 선생님이 하숙하는 곳이에요?” 하고 물었다. 내가 “살림하는 곳인데요.”라고 하자, 그 아가씨는 실망하는 얼굴로 쏜살같이 미용실을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임신하여 거울에 비친 배가 부른 나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 마음 한구석에서 서글픔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면서 예술 감각을 살려 손님 머리에만 최선을 다하자며 자신을 달래며 맘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손님들에게 미소를 띄워 보냈다.

 

177. 시골에 내려가겠다던 그이

 

“나, 돈 2,000원만 줘.” “뭐 하시게요?” “시골 할머니께 다녀오려고.” “그러세요.” 1970년에 파마는 20원이었고 고데는 50원이었는데, 나는 금고를 털어서 있는 돈 모두를 그이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이는 술이 잔뜩 취한 채 밤늦게 술을 많이 먹고 돌아왔다. 나는 힘에 겨워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는데, 무엇이 못마땅한지 투덜거렸다. 그때 돈 2,000원이면 고데 40명을 해야 했고, 마무리 손질까지 한 번 더 해주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모두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고데 한 번 하면 고데한 지 3일 만에 다시 머리 손질하고, 일주일 만에 머리를 감았다. 머리 손질을 간단하게 해 줘도 되지만 나는 새롭게 한 것처럼 정성을 다하여 해줬기에 2,000원을 벌기 위한 시간이나 정성으로 치면 100명의 머리 손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데는 지금 드라이하고는 차이가 엄청 많이 나는 중노동이었다.

왜냐면 불에 달군 고데기로 머리를 꼭꼭 말아 또다시 예쁘게 펴야 했고, 모양을 만들어야 하니 아주 힘들었다. 더구나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계속 서서 하는 중노동이었기에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편하게 쉰 셈 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견디기가 힘들었으나 예술도 살리고, 돈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이에게 잘해주기 위해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178. 어떤 여자의 편지를 발견하다

 

다음 날 그이가 벗어놓은 바지를 빨려다가 호주머니에 뭔가가 있어 보니 쪽지 편지였다. ‘불륜’ 이 두 글자는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초라한 것 같으면서도 행복한 집 앞에서 나는 가위 소리를 듣습니다. 내 심장을 오려 내는 듯한 저 가위 소리….’ 나는 배신감에 견딜 수가 없었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

전에, 그이는 묻지도 않는 나에게 “내가 비록 가난하여 호강은 시켜주지는 못해도 여자 문제로는 당신을 속상하게 하지는 않겠어.” 하고 나에게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함께 살게 된 첫날부터 외박을 하여 고통을 겪어야 했는데 살아온 날들이 너무 쓰라리고 아팠다. 임신한 아내가 몸이 퉁퉁 붓도록 고생하며 어렵게 번 돈을 다른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것도 할머니 핑계를 대고 그렇게 쉽게 가지고 나가다니, 그이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애처롭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사랑받은 셈 치고 인내하고 봉헌하며 그이를 이해하고 감싸주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이가 외도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야. 마음은 변함없지만 내가 미용실을 하여 함께 있을 시간이 없고, 손님 머리 손질하느라 음식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밥도 제때 차려 주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러니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당연하지.’ 하며 스스로 위로하면서 사랑받은 셈 치고 마음을 추슬렀다.

 

179. 미용실을 철장질하다

 

그이는 임신 중의 아내가 손님을 받느라고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했던지 출근하면서 미용실을 하지 말라며 문을 잠갔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까닭에 손님을 받았더니, 미용실 문을 아예 철장질 해버렸다. 그래도 손님들은 나에게 해야만 마음에 든다며 돌아가지 않고 문 앞에서 한나절을 기다리며 앉아 있기도 했다.

나는 늘 뒤로 들어오게 하여 머리를 해주곤 했다. 어느 날, 이발소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머리 손질을 하러 왔다. 그동안 그 아가씨 머리를 손질할 때마다 냄새가 너무 고약하였기에 “팬티 좀 자주 갈아입어요.”라고 했더니, 그녀는 “하루에도 몇 개씩 갈아입고, 늘 씻어도 그래요. 그런데도 남자들이 좋아하는데요, 뭐.”라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연실색하였다.

“월급만 가지고 어떻게 살아요. 나는 남자들을 상대하여 큰방도 하나 마련했고, 이발하러 온 손님 중에 마음에 드는 남자들을 불러 밤마다 즐기고 돈을 버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지 뭐예요.” 그녀가 그다음에 한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중에 유부남이 부담이 없으니 훨씬 더 좋아요.” 나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얼마 후에 나는 그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일에서 이제 그만 손을 떼세요. 돈도 좋지만 건강도 생각해야죠. 그렇게 행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병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하고 충고하자, 그녀는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그래서 자주 치료를 하죠.”라고 했다. “그러면 남자들은?” 하고 묻자 “그 사람들이 알아서 치료하겠지요.” 했다. 세상이 이렇게도 심하게 부패하고 썩어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머리 손질을 해주기 싫어졌다. 모두 불결하게만 느껴져 그런 사람들이 오면 차례가 되어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기다리다 지쳐 화를 내고 다른 데로 갈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노리는 바였다. ‘가정 파괴범들!’ 이렇게까지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후일에 하느님을 알고 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더욱더 따뜻하게 돌봐주고, 사랑으로 감싸주며 돈을 생각하지 않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머리 손질을 해주게 되었다.

 

180. 결혼식을 올리다

 

1971년 4월 19일, 우리는 나주 ‘고향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첫날은 친정집에서 잔치를 하고 이튿날에 시댁에 가서 잔치를 했다. 폐백을 올릴 때는 천막을 치고 울퉁불퉁한 마당에 멍석과 자리를 깔아 구경꾼 앞에서 많은 분들에게 절을 했다. 얼마나 많은 절을 했는지 임신 8개월이었던 나의 다리는 이미 퉁퉁 부어올라 힘들어 몇 번이고 쓰러질 뻔했다. 그러나 ‘아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예의를 지키며 쉬는 셈 치고 절을 했다.

시외숙은 친지도 많은 시가집과 시외갓집 사돈네 팔촌에게까지 절을 다하게 하셨는데, 아이가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큰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옛날의 풍습대로 집에서도 잔치를 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결혼식을 올린 직후에도 신혼여행은커녕 임신 8개월에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너무나 힘들었지만, 이 모든 일을 사랑받은 셈 치고 기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