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시어머님은 결혼 빚을 갚아달라고 하며
광주 시댁에서 일하다가 나주 미용실로 내려왔는데 시어머님께서 바로 찾아와 결혼 빚을 갚아야 하니 7만 원을 내어놓으라고 하셨다. 결혼하자마자 우리에게 무슨 돈이 있겠는가? 더구나 나도 빚을 내서 결혼한 터라 돈이 없어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다.
시어머니는 잔치할 때 음식을 간소하게 장만하지 않고 넘치게 하여 이틀간이나 손님을 치르셨다. 하루는 식당에서, 큰 잔치 하시고 다음 날은 집에서 큰 잔치를 여셨다. 잔치가 끝나고도 남은 음식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다른 음식은 고사하고라도 그 당시 무척이나 귀한 음식이었던 해삼만도 그 많은 사람이 먹고 남은 것이 큰 다라이로 반이나 되어 녹아나고 있었기에 얼마나 놀랐던고!
친정어머니는 빚을 내시어 시조부모님 이불, 요, 베개, 옷 두 벌과 시조부님께는 두루마기까지 해드렸고, 시아버님께는 최고 좋은 모직 양복에 조끼까지, 시어머님 한산모시 한복과 다른 한복, 시고모님 7분 옷, 시동생들 옷까지 다 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쓸 조개 장롱, 방안 찬장, 나와 함께 손수 짠 명주, 모시, 삼베, 무명, 그리고 내가 어릴 때부터 짬짬이 모아둔 옷감들,
그리고 이불이나 베개, 그릇 등을 많이도 해 주셨는데 “큰 며느리니까 하나도 못 준다.”라고 하며 나에게는 수저 하나도 안 주셨다.
또한 우리에겐 친척이 많지 않아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축의금까지도 남자 쪽에 다 들어가게 했다. 그뿐 아니라 시어머니가 혼수로 해주신 것까지 시누이 주라고 하셔서 가진 셈 치고 줬다. 아무튼 결혼할 때 우리가 쓴 돈은 정말 많았다. 그런데 혼수로 해간 물건들 중 우리 몫까지 하나도 주지 않아 우리 어머니가 또 빚을 내서 살림을 차려 주셨다. 그런데 나에게 아들 결혼
빚을 갚으라고 하신 것이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부모님의 말씀이니 사랑으로 받아들여 미용실이 원래 없었던 셈 치고 팔아야했다. 미용실을 12만 원에 내놓고 우리가 살 방을 얻으러 다녔다. 이제 미용실도 할 수 없게 되어서 앞으로의 삶이 난감하기만 한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또 오셔서 빨리 빚 갚으라고 독촉을 하셨다. 내 비좁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도 내 운명이려니 하고 사랑받은 셈 치고 미용실을 급매로 권리금도 받지 않고 10만 원으로 낮추어 내놓으니 금방 임자가 생겨 팔았다. 잘 되는 미용실이라 15만 원 이상 충분히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까지도 시어머니께 더 드린 셈 치고 봉헌하니 그래도 기쁠 수가 있었다.
182. 여러 집이 사는 문간채로 이사를
미용실을 급하게 팔아야 했기에 겨우 10만 원에 미용실을 팔아 7만 원은 시어머님 결혼 빚 갚아 드리고, 남은 돈 3만 원으로 문간채 방 하나를 얻었다. 그 후로 친정어머니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가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술과 화투, 그리고…. 남편은 월급은 가져다주지 않으면서 외박만 잦았다. 그러나 나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참고 기다리며 그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남편은 돈은 못 가져다주면서도 배부른 아내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미용도 못 하게 하니 몰래 나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머리를 해 돈을 벌어 시어머니를 도와 드리고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했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해주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기술이 좋다하더라도 사사로 머리를 하니 양심상 많은 돈을 받을 수가 없어 적은 수의 머리를 한 셈 치고 했다.
183. 먹지 못해도 셈 치고 봉헌하다
미용실을 하면서 임신을 했으나 그이를 위해 쓰는 돈은 아끼지 않으면서도 나를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을 모으기 위하여, 입덧을 하면서도 먹고 싶은 과일 한 번도 사 먹은 일이 없었지만 먹고 싶은 과일을 먹은 셈 치고, 머리할 때 늘 미소를 잃지 않으니 누구도 임신한 줄조차 모를 정도였다.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과일 장수가 다니면서 과일을 팔았다. 미용실에 와서 사라고 성화를 하면 어쩌다 그이가 먹을 과일만 사고 내가 먹고 싶은 과일은 먹은 셈 치고 사 본 적이 없다. 미용실을 할 때 돈을 벌면서도 과일 하나 안 사 먹었는데 이제 미용실까지 그만두었으니 어떠하겠는가. 미용실 팔아 장만한 돈은 남편을 위해서 쓴 3,000원 빼고 시어머니 다 드렸으니
돈 한 푼 없었다.임신 9개월 되었을 때 밥도 거의 못 먹던 내가 친정어머니와 길을 가는데 배장수가 배를 리어카에 싣고 지나갔다. 내가 무심히 배를 바라다보았더니 우리 어머니가 ‘아, 배가 먹고 싶구나.’하고 생각하시고 5원짜리 배 하나를 사주셨는데 그걸 먹으니 속이 편안해졌다. 어머니가 남편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남편이 또 배 하나를 사다 줘서 많은 배를 받은 셈 치고 고맙게 잘 먹었다.
184. 양수가 터진 지 1주일 만에 첫딸을 낳다
아이 낳을 때가 된 줄 어찌 알고 산파가 찾아와 “아이를 집에서 낳고 그대로 놔두면 헌 고무신 신은 것처럼 철떡거린다.”라고 하며 자기가 받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첫아이 낳기 직전에도 시어머님이 있는 돈을 다 가져가셨기에 산파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 낳기 7일 전, 나는 재래식 화장실에 갔다가 기겁하였다. 갑자기 힘이 주어지더니 양수가 터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아기가 나오면 똥통에 빠질 것이 너무나 자명해 아이가 나오지 않도록 손으로 막으며 화장실에서 급하게 나왔다. 그리고 아이 낳을 준비를 했으나 나오려고 하던 아이는 나오지 않아 나는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다행히 예정일이 다 되어갈 때라 친정어머니가 오셔서 먹을 것을 해주며 시중을 드셨다. 그 당시 너무 먹지 못하여 애 낳을 힘이 없어서 나오려던 아이가 양수가 터지고 나서도 나오지 못하고 진통만 계속되었다. 그러나 돈이 없어 병원은커녕 산파도 부르지 못하는 처지로 몸부림쳐야만 했다.
진통이 계속되는 일주일 동안 나는 토마토 3개밖에 먹지 못했다. 힘이 없는 상태에 몸부림까지 치면서 친정어머니가 차려 준 밥상에 앉았으나 밥을 한술도 먹지 못하자 친정어머니께서는 화가 나셔서 밥상을 밀쳐 버리시고 “죽든지, 살든지 나도 모르겠다.” 하고 가 버리셨다. 양수가 터진 지 나흘 만이었다. 그때 나는 혼자 얼마나 외롭게 울었는지….
그런 딸이 못 미더워 어머니께서는 이틀 만에 다시 돌아오셨고, 다음 날 밤 0시 15분에 아이를 낳았다. 너무나 힘이 없었기에 아이를 낳으면서 힘을 주지 못하여 아이의 머리만 나오다가 얼마나 쉬었는지, 어머니는 아이와 내가 둘 다 죽는 줄 아시고 안절부절못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남편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는데 어머니는 “애랑 어미가 다 죽게 생겼다.”라고 하시며 사위를 불러 댔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안 돼요. 들어오지 마세요.” 하고 소리 질렀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산파라 할 정도로 아이를 수없이 많이 받았지만, 이때는 딸이 죽는 줄 알고 “힘줘라!”라는 소리 한마디도 못 하셨다 한다.
천신만고 끝에 양수가 터진 지 일주일 만에 아이를 낳으니, 아이의 머리는 길고 이마 쪽이 움푹 패도록 들어갔기 때문에 눈은 쭉 올라가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또 놀라 나의 힘없음을 탓하며 울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아이를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가셨다.
나는 임신해서 먹지 못한 데다가 아이를 낳고도 거의 먹지 못하여 너무 힘겨웠지만, 아이를 돌보면서 남편이 요구한 것은 모두 다 그대로 들어주고 편하게 산후조리 한 셈 치고 최선을 다해 아내와 엄마 역할을 해냈다.
185. 아이 낳고 미역국은 남편에게
그래도 아이 낳았다고 친정어머니께서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그 당시만 해도 돈이 귀해 미역국 먹기가 힘든 상황이었기에 미역국은 남편만 먹게 했다. 어머니는 아이 낳고 어혈이 풀리도록 미역국은 산모가 먹어야 한다고 하시는데도 “나는 미역국이 역겨워 도저히 먹을 수 없어요.” 하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남편을 먹였다. 미역국을 양푼으로 하나 가득 떠줘도, 미역국을 좋아하는
남편은 남기지도 않고 다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내가 먹은 셈 치니’ 기쁠 수가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농사일 때문에 일주일 만에 미역을 사다 주시면서 “혹시 입맛이 돌아오면 끓여 먹어라.”라고 하시며 집으로 가셨다. 그러나 미역국을 끓여 남편에게 다 먹였고 나는 ‘먹은 셈 치니’ 배가 고파도 기쁘게 봉헌할 수가 있었다.
나는 임신해서부터 먹지 못한 데다가 아이를 낳고도 거의 먹지 못하여 젖이 잘 안 나왔다. 그래서 아기를 위해 싼 돼지 발목을 사다가 고아 먹으면서 그나마 지탱하고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자꾸 찾아와서 돈을 달라시니 하루하루가 너무너무 힘겨웠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면서 남편이 요구한 것은 그대로 다 들어주고 최선을 다해 아내 역할을 해내니 마음은 풍요로웠다.
186. 처음으로 담은 간장과 된장
결혼한 첫해에 처음으로 간장과 된장을 담갔다. 장 담는 걸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본 적도 없었지만, 누구에게 묻지도 않고 내가 한번 담가 보기로 했다. 먼저 천일염을 바구니에 담아 겉에 묻은 불순물을 물로 얼른 씻어내고, 그 소금을 물에 녹여 계란으로 염도를 측정했다. 그리고 메주를 솔과 물로 깨끗이 씻어 소금물과 함께 항아리에 넣어 낮에는 뚜껑을 열어 햇빛을 비추어
주고, 해가 지려고 하면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50여 일이 지나 메주를 건져내 간장물을 조금씩 뿌려 차지게 치댔다. 그리고 치댄 된장은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고 입구를 비닐로 꽁꽁 묶어 철저하게 단속을 잘했다. 그 당시 나는 된장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것을 많이 봐왔기에 다른 집에서는 된장국도 안 먹었다. 그런데 우리 된장은 꽁꽁 잘 묶어 놓으니 구더기도 없었고 날된장을 먹어도 된장 냄새도 없이 고소하고 너무
맛있었다.
된장을 뜰 때 지나가던 집 주인이 냄새에 이끌려 와서는 조금 맛보더니 “아니, 무슨 된장이 이렇게도 맛있대? 언제 그렇게 잘 배웠어? 그 집이 잘 되려면 간장, 된장 맛이 좋아야 된다는데 새댁 집 좋겠다.”라고 했다. 이 소문이 금방 났다. 이웃에 네 집이 사니깐 네 집에서 한 그릇씩만 가져가도 얼만가?
그런데 다른 이웃들까지 된장을 얻으러 왔다. 아침에 된장국을 끓이려고 가서 보면 밤중에 누군가 퍼가고 된장을 제대로 눌러 놓지도 않고 비닐로 항아리 입구를 잘 싸 놓지도 않았다. ‘그래, 필요하니까 떠갔겠지.’ 하고 없는 사람 퍼준 셈 치고 봉헌했지만, 위생 관념이 철저하고 청결했던 나는 된장을 그렇게 더럽게 가져가는 것만은 셈 치기가 힘들었고 많지도 않은 된장을
모르게 퍼가는 일이 매일 계속되니 서로 나누기를 좋아한 나였지만 할 수 없이 항아리를 안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된장이 별로 없어서 나는 못 먹었지만 먹은 셈 치고 남편을 해줄 수 있어 그래도 기쁘게 봉헌할 수 있었다. 또 어느 날은 멸치젓을 직접 담아 김치를 버무렸는데 그 냄새를 맡고 이웃집에 사는 사람들까지 밥을 가지고 김치를 먹으러 온 일도 있었다. 어디서 배운 적도 없었는데 처음 담아본 간장, 된장이 그렇게 맛있었던 것은 ‘없는 살림일지라도 어떻게 하면 남편에게
좀 더 맛있고 몸에도 좋은 것을 해드릴 수 있을까?’ 하고 연구하며 최선을 다하려 하는 마음을 가상히 보시고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함께해 주셨기 때문이었으리라.
187. 아이를 구경 오다
많은 분들이 “이 부부는 둘 다 잘 생겼으니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예쁜 아이를 낳을까?” 하고 크게 기대했기에 남편 사무실 직원들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구경 왔다가 모두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라도 “아이가 왜 그러냐?”라고 물어본다면 답변을 해줬을 텐데 묻지 않아 아무 말도 안 했더니 다들 “크면 예쁘겠네.” 하고 돌아갔다.
나는 ‘나의 힘없음과 가난 때문에 아니, 시어머님 도와드리기 위해 돈 한 푼도 쓸 수 없었기에 먹지 못하여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아이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일만은 그냥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다. 그러나 ‘아이가 예쁘게 자라도록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키우리라.’ 하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188. 밤을 새운 적이 얼마였던가!
남편의 가정생활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늘 화투와 씨름했고, 술과 그리고…. 밤마다 밥도 먹지 않은 채 울면서 기다리다 지쳐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빌고 또 빌었다. 잠도 자지 않고 남편을 기다리며 예전에 사랑했던 때를 떠올렸다. “선아! 우리가 쉴 수 있는 한 치의 땅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가난이라는 죄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 선아! 불행했던
만큼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 줄게!”
나는 행복했던 시간만을 생각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이를 기다렸다. 그동안 오토바이 사고가 수없이 났었기에 늦어질 때마다 ‘혹시 술 마시고 오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쓰러져 잠이나 들어버리지 않았을까? 그러면 혹 죽어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누가 발견해서 병원에라도 데려가야 하는데….’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면 아이를 업고 ‘어쩜 좋아?’ 하고 얼마나 애타도록
밤거리를 돌아다녔는지….
‘그이는 분명히 나에게 한 약속을 지키리라.’ 하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사랑받은 셈 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 흘리고, 보이는 곳에서는 기쁜 얼굴로 그이를 대했다. 혹시 늦게까지 안 들어오면 ‘그동안 좋아했던 여자와 함께 만나 차라도 마시려니.’, 더 늦어지면 ‘함께 식사라도 하겠거니’ 또 더 늦어지면 ‘영화라도 한 편 보려니.’ 했다.
그러다 더 늦어지면 ‘그 여자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오려니.’ 생각하며 기다리다가, 12시가 지나고 1시가 넘어도 오지 않으면 ‘함께 자다가 혈압으로 떨어지는 일이나 없었으면….’ 하면서 남편과 함께한 셈 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눈물로 밤을 지새운 적이 얼마였던가!
189. 시댁에 정성을 다하다
나는 아버지 안 계신 것이 한이 되었기 때문에 결혼 전에 시아버님이 계신 곳을 원했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혼처도, 아버지가 안 계신 곳은 모두 거절했었다. 나를 4년간이나 좋아하며 따라다녔던 어떤 사람은 사법고시에 붙어 판사가 되기도 했는데 그 사람뿐만 아니라 거의 모두가 좋은 환경과 좋은 조건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중매쟁이에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윤 양은 천사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선녀처럼도 보인다.”라고 하면서 나와 결혼을 성사시켜 달라며 “윤 양은 아무것도 해 올 것 없이 몸만 오라.”고 애걸하다시피 아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그런 요청들에 응하지 않자 많은 사람이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사랑이라도 받고자
하는 나의 마음을 충분히 말씀드렸더니 결국 모두가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계신 곳에 시집와서 온갖 정성을 다했다. 시아버님의 건강을 위해서 소뼈를 거의 떨어지지 않도록 고아 드렸고, 돈이 없어 어려울 때 패물을 하나씩 팔아서 해드리고 싶은 것을 해드리고 나면 얼마나 뿌듯했는지…. 그 기쁨을 누가 알겠는가?
우리가 쓰기 위해 패물을 파는 것이 아니고, 시댁을 위해 패물을 팔겠다고 하면 그이는 “여보, 고마워! 다음에 더 좋은 것 해줄게.” 하며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그때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이 기쁘기만 했다. 그이는 한 번도 약속을 지킨 적이 없었지만 나는 다 받은 셈 치니 그래도 기쁠 수가 있었다.
내가 시부모님께 해드려서 기쁘고, 또한 자기 부모님께 해드리니 남편이 좋아해서 또 기쁘고, 그럴 때마다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다 가진 셈 치고 남편을 더욱 사랑하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기뻐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더 기쁘게, 더 즐겁게 사랑으로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190. 시동생들과 잘 어울리다
형제 없이 살아왔던 나에게 시동생들은 얼마나 소중한 동생들이었는가? 특히 그이의 바로 밑 큰 시누이는 나와 친형제처럼 지내며 입에 있는 것이라도 내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며 서로를 위해 주었다. 나와 동갑내기인 둘째 시동생은 워낙 말이 없었기에 동네 사람들이 “말을 해도 대답도 잘 안 하는 사람이 형수하고는 무슨 말을 그렇게 잘하는지 모르겠어, 정말 별일이야.”
하고 이야기했다.
또, 셋째 시동생은 군대에 가서도 나를 ‘누나’라고 부르며 말도 내리라고 했다. 내가 “법도가 있는데요?” 하고 말하면 “그러면 아무도 없을 때는 말을 내리고, 누구 있을 때만 말을 올리면 되지 않아요, 예?”라고 하면서 사랑스러운 말들을 했다. 너무나 착했던 넷째 시동생은 언제나 나와 함께 어울리고, 모든 것을 따르며 일치했다. 다섯째 시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내가
약혼했을 때부터 얼마나 잘 따르며 좋아했는지, “이 세상에 우리 아짐(형수)보다 더 예쁜 사람은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결혼하여 신혼 초에 시댁에 있을 때 다섯째 시동생은 우리가 자는 방 한쪽에서 스탠드를 켜 놓고 공부하면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거의 한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런 다섯째 시동생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는지…. 여섯째 시동생은 시어머님이 오라고 하셔도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나도 보내지 않았다. 그때 여섯째 시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내가 업어
주고 안아 주고 하니까 시부모님들도 좋아서 늘 싱글벙글하셨다. 막내 시누이는 내가 약혼했을 때부터 친정집에도 데리고 가고, 얼마 동안 닦아주고 업어 주면서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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