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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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시동생들이 사랑스러워

 

한 번씩 시댁에 다녀올 때면 큰 시누이, 둘째 시동생, 셋째, 넷째 모두 나를 배웅하러 간다고 하고서는 함께 나와, 내 가방은 다른 곳에 맡겨 놓고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 구경, 다방, 공원 등에 가서 의좋은 형제의 사랑을 나누곤 했다. 늦게 집에 와서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남편도 너무너무 흐뭇해하며 기뻐하니 내 기쁨은 배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 시아버님을 비롯해 시동생들은 꼬막을 너무나 좋아해 한 번씩 시댁에 가면 꼬막을 사 가는데, 식구의 양을 채우기 위해 한 말씩 사 갔다. 내 입에 넣기가 아까워서 나는 맛도 보지 않고 다 내어주었는데 그 많은 꼬막이 순식간에 다 없어졌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아도 먹은 셈 치고 사랑하는 시동생들을 줄 때면, 내 배가 부른 듯 뿌듯한 기쁨으로 늘 채워졌다.

시어머니 돈 대드리느라고 무일푼이었지만 내가 입은 옷이 예쁘다고하면 당장에 벗어주고, 시동생이 목티 하나만 원해도 반지 팔고 또 뭘 원하면 가락지 팔고, 목걸이 팔고, 내게 있는 것 가운데 돈이 되는 것은 다 팔아서 해줬다. 내가 모든 것 다 가진 셈 치고 팔아서 해주고 나면 어찌나 기쁘던지!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시동생들이 “우리 형수는 꼬막 먹을 줄 몰라.”라고 말할 때, 나는 “내가 꼬막 먹을 줄 모른다고?” 하면서 꼬막을 맛있게 까먹으니 “꼬막을 못 잡순 것이 아니고 우리들 주려고 그러셨구나.”라고 하여 모두 웃었다.

 

192. 닭 잡는 것만 봐도 울던 나에게 토끼를 잡으라니

 

어느 날 시아버님은 친구분들을 집에 모시고 오셔서 토끼를 건네주시며 “애야! 빨리 토끼를 잡아 맛있는 요리를 하여라.”라고 하셨다. 나는 진퇴양난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며 속으로 ‘어머니, 나 어떡하면 좋아요? 닭을 잡는 것만 봐도 살생한다고 도망치면서 울던 나에게 토끼를 잡으라고 하시니 나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며 울먹였다. 그런데 그때 또다시 시아버님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토끼 다 되었니?” “아니요.”

또 조금 후에 “아직도 멀었니? 토끼를 산에서 잡아다 해줄래?” 하고 독촉하셨다. 닭을 잡거나 돼지를 잡을 때 불쌍해서 울면 어머니는 “울지 말아라. 닭과 돼지는 잡아먹기 위해서 키운 것이란다.”라고 하셨는데 그런 나에게 그 예쁜 토끼를 잡으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도움을 청해보려고 했으나 그러다가 우리 친정어머니에게 또 피해가 갈까봐 눈 딱 감고 토끼를 잡아 보려고 아니, 죽여 보려고 했다. 그러나 도저히 할 수 없어, 하느님을 모를 때였지만 “하느님, 어떻게 합니까? 도와주세요.” 하고 울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출가한 시누이가 들어와 도움을 받아 토끼를 잡아 요리해서 들어갔다. 아무도 없이 나 혼자였기에 묻지도 못했고 도움도 청할 수가 없어 곤욕을 치르고 있었는데,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웠다. 지금도 가끔 당황했던 그때가 생각나 웃음을 짓곤 한다. 하느님을 모르던 때였지만 하느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193.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요부

 

남편이 아무리 서운하게 해도 사랑받은 셈 치고 남편의 마음을 더욱 기쁘게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결혼 전에 나는 남자가 밖으로 돌면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남편을 위해 그렇게 노력을 기울였건만 남편이 밖으로 나도는 생활이 잦아지자 내 마음은 너무 아파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다시 힘을 내어 “자, 나의 사랑을 총동원하자. 잉꼬부부가 되겠다던 내 꿈을 실현시키자.” 하며 마음을 다졌다.

‘어떻게 하면 가정이, 남편이 쉴 수 있는 최고의 안식처가 될 수 있고, 휴식처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낮에는 현모양처와 요조숙녀, 밤에는 요부가 되어 보기로 했다. 새로운 각오로 그 사람에게 최고의 기쁨을 선사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때로는 조강지처가 되어 남편을 기다렸고, 때로는 첩이 되어 아양을 떨며 기다리기도 했다. 어떤 때는 숨겨 놓은 여자, 과부, 처녀, 애인 등등을 생각하면서 거기에 맞추어 화장도 다르게 하고 남편을 기다렸다.

술집 여자로 생각할 때는 술상을 차려 놓고, 화장도 짙게 하여 서비스도 잘해 주어 남편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또 반찬 만드는 것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연구하며 노력했다. 술을 담그면서 속으로 ‘내 사랑을 다 해 술을 담그니 그이가 이 술을 마실 때마다 내 사랑을 기억하게 해주세요.’ 했다. 심지어 안 담아본 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하느님을 모를 때였지만 속으로 부르짖었던 말들이 바로 생활의 기도였다.

 

194. 그이의 마음을 돌리고자

 

첫딸을 낳을 때, 힘이 너무 없어 아기가 나오다가 이마에 걸린 채로 쉬었기에 조금 자란 후에도 기대했던 것보다 예쁘지 않았다. 나는 아기를 어느 쪽으로 보면 더 예쁜가 살펴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예쁜 쪽을 남편이 있는 쪽으로 돌려가며 예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아이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라도 예쁘게 보여, 남편이 아이를 보는 기쁨으로라도 가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자존심도 누구 못지않게 강했던 내가 이런 비통한 모습으로 살아갈 줄이야! 한편으로는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가식 없이 그이를 사랑했기에, 그이를 만났던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고 ‘사랑받은 셈 치고’ 살고자 최선에 최선을 다했다. 친구들과 잘못 어울려 돈 잃고, 그로 인하여 방황하는 남편을 위해 나는 계속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

 

195. 눈물을 감추고 그이를 안마해 주다

 

남편이 야근할 때는 언제나 커피를 끓여 갔다. 어느 날, 남편이 야근한다고 하여 아이를 업고 커피를 끓여 사무실로 가지고 가는 길에 ‘닭집(불법으로 여자들 데리고 숨어서 술을 파는 곳, 일명 옴팍 집이라 일컬음)’이라는 술집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인생이란 것은….”이라고 하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남편 목소리와 비슷했다. “응?” ‘어떻게 내 남편의 목소리와 그렇게도 비슷할까?’ 하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여 사무실로 갔다.

그런데 군 지도소 정문이 활짝 열려있고, 사무실 문도 다 열려있어 급히 들어가 보니 한 사람도 없었다. ‘야근한다고 커피를 끓여 왔는데, 사무실 전체에 아무도 없으니 도둑이라도 맞으면 어떻게 해?’ 나는 커피를 숙직실에 놔둔 채 씁쓸하게 지도소를 나왔다. 그때 술집에서는 남자와 여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서로 짝지어 골목에 있는 하숙집과 여인숙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쳐서 모르는 척하고 집을 향해 가려던 순간, 어떤 남자와 여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다정스럽게 스킨쉽하며 부둥켜안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머머, 세상에, 저 남자 부인은 참 불행하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지나가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남자가 바로 내 남편이 아닌가! 짐작만 하다가 직접 내 앞에 펼쳐지는 그 광경에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뒤로 돌아갈 상황이 아니어서 ‘캄캄한 밤이니 알아보지 못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그대로 걸어갔다. 둘은 그렇게 좋아하며 아랑곳하지 않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이 과연 내 남편이란 말인가? 믿어지지 않았다. 눈을 의심해 보았지만, 확실히 아이의 아빠였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점잖게 손만 잡고 가는데, 혼자만 그렇게 끌어안고 좋아하는 모습에 내 모든 것이 허물어져 내렸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하늘이 빙빙 돌았다.

설마하니 그런 여자들과 함께 좋아서 시시덕거릴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 상상은 했었는데 막상 그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자 사랑받은 셈 치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내게 청혼을 할 때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가난해서 호강은 못 시켜주겠지만 여자 문제로만은 당신 마음 상하게 하지 않을게.”라고 했던 내 남편이 그런 모습을? ‘그러나 참고 인내해야 한다. 내 남편에게 사랑받은 셈 치기에는 너무나 버겁지만 사랑받은 셈 치고 감싸주자.’ 하고 다짐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세수와 화장을 했다. 잠옷을 입고 이불을 덮고서 잠든 척하며 기다리던 그 시간이 어찌 그리도 길게 느껴졌는지…. 다른 때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밥도 먹지 않고 이불을 펴거나 눕지도 않고 앉아서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이 들어오지 않은 날은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이 얼마였던가!

‘거리에서 자기의 행동을 본 사람이 혹시라도 자기 부인인 줄 알면 남편이 얼마나 무안했을까?’ 하는 생각에 내가 아니었던 것처럼 하기 위해 잠든 척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남편이 돌아오자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으응? 이제 오세요? 아기 잠재우느라고 누운 게 피곤했던지 초저녁부터 잠들어 버렸나 봐요.”라고 하자, “여자가 밤에 어디를 돌아다녀?”라고 하며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며 나를 나무랐다.

그이는 여자와 함께 지나갈 때 어둠 속에서도 나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야근할 때마다 커피를 끓여다 주는 걸 알면서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지금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단 말인가!

모른 척하며 감싸주려던 나 자신이 참으로 기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히고 초라하기 그지없어 눈물이 나왔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또, 가정을 지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속으로 울면서 내색하지 않고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고 하며 참고 봉헌하면서 고생했다고 어깨와 다리를 안마해 주었다. 그이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부터는 남편이 야근해도 남편의 자유를 위해서 커피를 끓여 가지 않았다.

 

196. 내가 살아온 희생을 통한 기쁨

 

나는 늘 외톨이였기에 화목하게 잘살아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이가 기뻐할 수 있다면 내 몸이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고픈 배를 움켜쥐면서 나 혼자 모든 일을 다 해냈다. 술 담는 유리 용기가 흔하지 않았던 그 당시, 술을 좋아하는 그이를 위해 안 담아본 술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 집의 옹기 그릇들은 반찬이 아닌 술로 거의 가득 찼다.

과일을 살 형편이 못되었지만 어쩌다 한 번 과일을 사면 깨끗이 씻어, 삶아서 말린 행주로 닦은 뒤 껍질을 깎아서 깨끗하게 소독하고 잘 말려놓은 옹기 그릇에 넣고 소주를 부었다. 그 뒤에도 과일 껍질이 생길 때마다 넣었다. 남편이 직장동료들을 초대하면 늘 술상을 차렸는데 한 번은 내가 담근 그 술을 내놓았다.

동료들이 너무너무 맛있다며 “이렇게 맛있는 술은 내 생전 처음 먹어보네. 무슨 술인가?” 했다. 남편이 나를 쳐다보며 “무슨 술인가?”라고 하여 “과피주예요.” 했더니 직원들이 “아, 외국에서 들어 온 술인가 보구나. 진짜 맛있네요. 어디서 살 수 있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과일 껍질로 담근 술이라 과피주(果皮酒)라 이름 지었다 하니 직원들은 입을 모아 “어떻게 사모님은 못 하는 것이 없어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구먼.” 하고 남편을 부러워하며 웃었다.

나는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아침마다 그이가 좋아하는 채소를 5원이나 10원어치 사다가 반찬을 만들고, 돼지고기를 200원어치 사서 몇 번으로 나누어 요리를 해주었다. 나도 먹고 싶었지만 맛있게 먹은 셈 쳤다. 가끔 채소 가게에서 버려지는 시래기를 가져와 삶아서 국을 끓여주어도 맛있게 먹었는데, 남편에게 주고 나면 내가 먹을 것은 없었다.

그 당시 국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던 나였지만, 남편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내가 먹지 못해도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시어머님은 늘 돈을 달라고 오셨기에 때론 쌀 5되(8kg)를 가지고 3개월에서 6개월도 살아갔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갔는데 그럴 때마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시어머니 오시면 돈을 만들어 드렸다. 쌀 살 돈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해야 했지만, 시어머니께서 원하는 것을 해드렸다는 기쁨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면서도 먹은 셈 치고 웃으며 견딜 수 있었다.

그때는 연탄불로 음식도 해 먹고, 난방도 해야 하니까 연탄을 때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연탄을 오래 땔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여 방법을 연구했고 절약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루에 두세 장 땔 때 나는 매일 밥하고, 채소 데치고, 국 끓이고, 아이 기저귀까지 삶아도 한 장으로 충분했으며 방도 뜨뜻했다.

난방만으로도 한 장을 다 쓰는 다른 이들은 내 얘기에 “그럴 수가 없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하여, 하던 대로 자세하게 방법을 가르쳐 줬다. 밤에는 연탄공기통을 적당하게 꺼지지 않을 정도로 막고, 두꺼비 집을 방으로 가게 해 놓으면 열기가 방으로 들어간다. 두꺼비집 위에 뚜껑을 닫고 뚜껑 위에 솥을 올리고 물을 부어놓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솥의 물이 뜨겁게 데워지는데 더운물이 필요할 땐 그 물을 이용한다. 두꺼비집과 연탄구멍을 열고 국을 끓이고 채소를 데치고 밥을 한다. 밥을 뜸 들일 때는 연탄 공기통 뚜껑을 닫기 전에 헝겊에 물을 흠뻑 적셔서 구멍을 막고 뚜껑을 꼭 닫아놓으면 밥은 뜸이 들고, 연탄불이 거의 꺼져가려고 하는데 그때 물을 짜 버리고 닫아놓으면 불이 살아나며 밑으로 쏙 들어간다.

혹시라도 꺼질까 자주 봐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아끼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희생은 필수적이 아닌가! 또 빨래를 삶을 때는 두꺼비 집을 닫지 않고 연탄 공기통은 열지 않고 연탄 아궁이에 올려놓으면 빨래가 삶아진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꺼지지도 않는데 자주 봐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으니 희생으로 봉헌하면 된다고 하면서 직접 보여주니 그때 그 방법으로 그들이 하루 체험해 보고 나서야 믿게 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여러 사람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줬지만 “그렇게 하면 연탄이 꺼져버린다.”라며 거의 해내지 못했다. 주님께서는 내게 많은 고통을 허락하셨지만,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늘 옆에서 지켜보시며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하느님을 알고 나서야 깨달았다.

 

197. 시어머님을 위하여 전세를 사글세로

 

남편은 화투로 월급을 거의 다 날렸는데 미안하니까 나 모르게 조금씩 빚을 내어다 주곤 하였다. 빚에 이자까지 늘어 가는 상황인데도, 광주 시댁을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원하는 대로 해드렸다. 남편에게 친정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아기를 업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머리를 해주고 돈을 벌었다. 시어머니가 원하는 돈을 해드리고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못 하게 말렸으나 그만둘 수는 없었다.

시어머니가 쓰신 결혼 빚을 갚기 위해 미용실만 안 팔았어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는데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원래 미용실이 없었던 셈 치고 봉헌했다. 그 당시 우리 집 살림은 친정어머니께서 조금씩 도와주시는 것으로 겨우 꾸려나가고 있는 처지였는데, 시어머님이 오셔서 또 돈 20,000원을 해달라고 하셨다. 돈이 하나도 없는 터라 답답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주인아주머니께 사정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집 전세를 사글세로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에는 안 된다고 완강히 거절하셨지만 “시어머님께서 급히 쓰셔야 하는데 당장 제게 돈이 없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청하니, “아니,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돈을 달라고 오신대?”라고 하여 “아니, 시어머님이 갑자기 너무 급한 일이 있으셔서 제가 해드리기로 했어요. 죄송해요.”라고 하자 시어머니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나 가상하다며 30,000원 전세를 7,000원 사글세로 해주고 23,000원을 내주셨다.

주인아주머니께 얼마나 고마웠는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돈을 가져다 시어머님께 20,000원 드리고 3.000원은 남편 몸보신 해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니 나의 마음이 너무 흐뭇했다.

 

198. 나를 구경하러 온 구경꾼

 

어느 날, 아주머니들 세 분이 나주에서 세 얻어 사는 초라한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는 직원 부인들이었다. 나는 그분들을 정중히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며 그들의 말을 들어 주었다. 나는 원래 사람들과 섞여서 이야기 나누는 걸 싫어하는데, 그것은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려봤자 쓸데없는 대화들로 인하여 시간이 낭비될 게 뻔하다.

남편 흉, 시어머니 흉, 시댁 흉, 등 온통 험담만 일삼는 그곳에 발을 들여놓기가 싫었다. 그런데 그들은 “만복 씨 부인이 도대체 얼마나 못생기고 부족하고, 아무것도 못 하는 형편없는 바보인지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고 왔는데, 세상에 이렇게 예쁜 미인에다가 얌전하고, 음식 솜씨 좋고 애교도 만점인데, 이런 아내를 놔두고 그렇게 바람을 피우다니 만복 씨 정말 나쁜 사람이네.”라고 하면서 그들은 남편을 가만 놔두지 말라고 설득하려 하였다.

누구하고도 좋아하고, 누구하고도 어떻고 하며 남편 흉을 보았다. 예전에 “빈총도 안 맞은 것만 못하다.”라고 그이가 말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더 이상 다른 얘기를 하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가 못났으면 여자가 따르지 않겠지요. 여자가 잘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잘난 것이겠지요. 그리고 나중에 뉘우치게 되면 미안해서라도 오히려 더 잘할 수도 있겠지요. 사모님들이 지금 이야기한 그 애하고는 진작 끝났어요.”

조금 있다가 사진첩을 좀 보자고 하여 아무 생각 없이 꺼내 줬다. 한 여자를 가리키더니 “이 여자가 누군 줄 알아요?” 하고 묻기에 나는 “고향 동생 되는 처녀래요.” 하고 대답했다. 그 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저런, 바보처럼 순진하기는…. 그 애가 효○이에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나 놀랐지만, 자존심을 억누르고 “그러면 또 어때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뭐!”라고 했다.

그들은 사진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남자들은 일찍 잡지 않으면 안 돼요, 좋게만 대해 주면 바보 취급받아요. 그 여자는 만복 씨 알기 전에도 애를 몇 명이나 낙태시켰어요.” 그들이 떠난 뒤 나는 짓이겨진 자존심과 배신감으로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왜냐면 그 사진은 전에 남편이 우리 결혼사진을 넣어놓은 사진첩이었는데 한 여자의 사진을 가르키며 “이 사진 어때. 이쁘지?”라고 해서 “이 아줌마, 누군데?”라고 했더니 “아가씨야. 시골 동생이야.”라고 했었다. 그래서 내가 “가슴은 축 쳐지고 안 이쁜데?”라고 했더니 ”예쁜데 사진이 안 예쁘게 나왔나 보네.”라고 하던 사진이 아니던가. 마치 내가 창경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현재가 중요하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했다.

 

199. 들으면 병, 안 들으면 약

 

그이가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이에 대해서 심한 이야기를 한 그 부인들이 더 야속했다. 그이를 잘 단속하라고 일러 준 나이 많은 그 사람들이 전혀 고맙지 않았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 단죄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들이 있으니 마음 아파도 남편에게 더 잘해주도록 노력해 봐요.” 하고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말은 언제나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부풀려진 말을 전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들으면 병, 안 들으면 약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기왕이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여자가 잘 참고 남편에게 잘해야 해, 설사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더 잘해주면 미안해서라도 돌아올 수 있거든.” 하고 얼마든지 좋게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나는 그들과 같이 그렇게 하지 않고 부부들이 더 잘살 수 있도록 부추겨주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200. 흉보는 게 싫어서

 

다섯 집이 사는 집인데 여름이 되어도 나는 문을 잠가놓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사방으로 다 막혀 있어 바람 한 점 없는 방에서 선풍기는 물론 부채 하나도 없이 땀 흘리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셈 치고 봉헌했다. 미용해서 돈을 벌어도 시댁에 계속 대어 드려야 하니 선풍기는커녕 부채 하나 구입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 번씩 직원 부인들이 찾아올 때면 그런 모습을 보고 “어찌 그리 바보 같이 사느냐?”, “남편은 초창기에 잘 잡아야 한다.”라고 귀에 못이 박이게 얘기했다. 서로 흉보는 게 질색인 난 그런 소리가 너무나 듣기 싫어 누가 와도 없는 척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물을 길어다 먹으려면 네 집을 거쳐야 했는데, 그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듣지 않아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누구 손을 잡아봤냐는 등 남자들과 춤춘 이야기를 하며, 남편이 술 먹고 들어오면 자기들은 나가서 외식하고 남편은 가만 놔둬 버려야 한다고 나에게 일러주는데, 나는 그런 말들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여라도 나를 붙들면 너무 놀라 집에 바쁜 일이 있다고 그 자리를 피해 얼른 발길을 돌렸다.

그들과 어울려 험담과 민망스러운 말들을 듣기보다 혼자 있으면서 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는 것이 오히려 견디기 쉬웠다. 오! 그들을 용서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