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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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함께 살아갈 몸이기에

 

그이는 “술을 배에 담고는 가도, 지고는 못 간다.”라고 할 정도로 많이 마셨다. 밤마다 그이를 기다리며 날을 꼴깍 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살아야 할 몸인데 어찌 병들게 놔둘 수 있겠는가?’ 하며 마치 내 몸이 아픈 것처럼 생각하고 신경을 썼다.

나는 시댁까지 계속 신경 써야 했기에 쌀도 못 사 굶어가면서도 대추와 인삼을 떨어뜨리지 않고 준비하여 남편을 달여 주었다. 좋다는 식품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연구하여 보약도 해주며 몸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이는 매일 밤을 새워가며 술을 마셔도 몸이 좋아졌다. 그러자 여직원들이 찾아와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배워가겠다고까지 했다.

 

202. 술을 많이 들고 왔을 때는 이렇게

 

남편이 술을 마시고 오면 속을 풀어주기 위해 녹두를 삶아 거르고, 검은깨는 확독에 갈아 거르고 또 쌀을 갈아서 미음을 쒀주었다. 그러면 속이 가장 잘 풀린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비빔밥으로 건강을 회복시켰다. 그동안 술을 먹고 난 뒤에 어떻게 하면 몸에 좋은가 하는 것들을 물어 물어서 다해 보고, 거기에다 여러 가지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 보았지만 별로였다.

결국엔 녹두와 검은깨와 쌀을 걸러서 죽을 만들어 먹이는 것이 최고란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남편에게는 즉효였다. 검은깨와 쌀만 하면 소화하지 못하고 설사를 했으며, 녹두와 쌀만 하여도 효과가 없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외박하고 들어올 때면 “고생하셨어요.” 하고 이리저리 몸을 주물러 주고 안마해 주며 안심시킨 뒤 정성 들여 만든 죽을 들게 하였다.

그리고 비빔밥으로 저녁 식사를 하게 하면 불편한 속이 다 풀어진다.”라고 했다. 그것은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그 당시 믹서기가 없을 때라 구멍이 뽕뽕 뚫린 사기 확독을 사용했는데 거기에 작은 것을 갈면 뽕뽕 뚫린 구멍으로 다 들어가 버리니 갈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남편의 건강을 책임져야 할 아내로서의 의무감을 가지고 그에 더하여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요령껏 했다.

 

 

203. 중풍 걸리신 시아버님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다

 

광주 시댁에 들어가 살 때 내가 그렇게 사랑하고자 했고,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시아버님이 갑자기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셨다. 병원에 입원시켜드렸지만, 전혀 효과가 없어 시아버님 뜻에 따라 집으로 모셨다. 나는 백방으로 좋다는 약을 구하고 용하다는 의원을 모두 찾아다니며 집으로 모셔와 시아버님께 침도 맞도록 해드리고 한약을 달여 드렸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온갖 정성을 다해도 병이 날로 심해지시니 어떤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어떤 한의원이 나타났는데 그곳은 동쪽이었다. 나는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아기를 업고 그 한의원을 찾아 동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진짜 그런 한의원이 있어 나는 들어가 시아버님의 증상을 말하고 한약을 지어다 사랑과 정성을 다해 한 첩 한 첩 화롯불에 매일 세 번씩 달여서 드렸다.

3개월이 되자 마비되었던 손가락이 먼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차츰 차도가 있어 말도 조금씩 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가 탕약을 가지고 가서 “아버님, 약 드세요.”라고 하면 퉁명스럽게 “놔두고 나가!” 하셨다. 그러면 나는 “아가, 애기 데리고 수고가 많구나. 고맙다.”라고 하는 사랑의 말을 들은 셈 치니 그래도 기쁘게 봉헌할 수가 있었다.

 

204. 대가족 안에서의 희생

 

우리 시댁은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살았다.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집에 와 계시는 90세이신 시외조모님, 시부모님, 결혼하여 출가한 시누이와 시동생 6명, 시외숙의 아들 대학생과 고등학생 2명, 시외숙 친구의 아들인 고등학생 그리고 우리 부부와 아이가 살았다. 거의 혼자 살다시피 한 내가 열여섯이라는 엄청난 대식구의 일원이 된 것이다. 수도가 없어 바깥의 샘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와야 했고, 시아버님의 병간호를 해야 했다.

물을 길어오니 바가지가 땅에 놓여있었기에, 불결하게 생각하여 얼른 땅에 닿은 데를 깨끗이 씻어 물통에 넣어놓았다. 그러나 사용하는 식구가 많아 돌아서면 금방 또 땅에 놓여있곤 하였다. 수십 번은 길어 와야 했기에 물 길어오는 것만도 중노동이었다. 아침이면 그 많은 가족이 씻고 빨래하는 것 말고도 밥하고, 여러 개의 도시락을 싸고, 설거지까지 하니 물이 아주 헤펐다. 두레박으로 일일이 물을 길어 와서 빨래하고 시아버님 한약을 달여서 짜 드리며 시중들다 보면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저녁밥을 먹고 난 뒤는 조금 한가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혼자 차분히 물을 길어다가 큰 다라이 세 개에 가득 담아놓고 가족이 쓴 그릇을 세 번씩 씻어 깨끗이 헹구었다. 그러고 나서 시외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안마를 해드렸다. 시외할머니는 “아가, 네가 쓴 걸레는 다른 사람이 쓴 행주보다도 더 깨끗하더라. 어떻게 걸레를 그렇게 하얗게 쓸 수 있다냐?”라고 하셨다. “매일 삶으니 그래요.” “이 많은 식구에 애기까지 데리고 네가 고생이 많구나.” “괜찮아요, 할머니. 저는 할머니가 계셔서 너무 좋아요.” “우메, 가족들도 싫다는 이 늙은이가 뭐가 좋다고?” 시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할머니와 사랑을 나누고 나면 어느덧 밤이 이슥해져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모두 끝내고 지친 몸으로 방에 들어와 아이 젖을 물리고 누워있으면 나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그런데 밤중에도 아이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일어나야 하니 늘 잠이 부족했다. 시아버님 병간호를 해드리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쉬는 셈 치고 몸을 아끼지 않고 잠시도 쉴 틈도 없이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늘 화평을 추구해왔던 나였기에 아무리 힘들고 고되고 어려워도 그것은 나의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205.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아났냐

 

시댁 식구들과 의좋게 지내고 우애를 돈독히 하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여러 가지로 많은 노력을 했다. 이를 본 이웃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형제들에게 잘할 수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복덩이가 들어왔다.” 하고 칭찬을 했고, 시어머니께서도 “정말 꾸며서는 그렇게 못해요.”라고 하셨다. 그때 수돗물도 없이 두레박 샘에서 물 길어다 쓰는데 아이 업고 그 일을 다 해냈다. 당시 90세가 다 되신 시외할머니도 집에서 모시게 되었는데 술을 좋아하셨다.

술을 사러 가려면 상당한 거리를 걸어가야 했지만 아이 업고 나가서 술을 사다가 맛있는 안주를 해서 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면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너는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아났냐? 혼자 컸는데도 네 시어미 좋으라고 너같이 착한 아이가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모르는 것 하나 없이 어른 공경 잘하고, 주물러줄 줄도 알고 말이야. 그리고 너는 어쩌면 그렇게도 네 입에는 무엇이든지 넣을 줄을 모르냐.”라고 하시면서 꼬깃꼬깃 숨겨 놓은 돈 몇 푼을 꺼내주시며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하셨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라고 하면 “워따, 말도 이쁘게 잘하네.” 하고 기뻐하셨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 마음 하나로도 모든 것을 다 얻은 양 기뻤다. 절대로 받지 않으려고 하면 “성의를 무시하면 안된다이.”라고 하시며 내 손바닥에 기어코 쥐여주곤 하셨다. 그 돈, 그 아름다운 돈을 내가 어찌 쓸 수 있겠는가? 내가 쓴 셈 치고 더 보태어 아무도 모르게 할머니 좋아하시는 술과 안주를 사다 드리면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셨다. 그러면 내 마음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206. 사랑 대신 받았던 시아버님의 무시와 냉대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을 하여도 그것이 나에게는 기쁨이고 보람이었지만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시아버님의 냉대였다. 그렇게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시아버님의 사랑이 멀게만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나도 그리웠던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눈물을 감추고 노력에 또 노력을 더 했다.

반신불수가 되신 지 3개월 만에 시아버님의 몸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셨다. 많은 노력의 결과였다. 내가 숭늉을 떠가지고 가서 밥상 옆에 놓으면 큰소리로 “거기 놓고 나가아!”라고 하셔서 너무 놀란 나는 “예.” 하고 빨리 방을 나오곤 하였다. 또, 몸이 조금만 더 풀리면 되겠다고 생각하여 어깨를 주물러 드리면 큰 소리로 “하지 말어!”라고 하며 내 손을 쳐버리셨다.

아버님의 몸이 조금씩 좋아질수록 냉대는 더욱 심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시도록 노력을 거듭했다. 나에게 제시한 결혼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면 무조건 포기하고 아버지 계시는 이 집으로 시집왔는데 사랑은커녕 무시만 당했다. 그러나 항상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는 쓰라린 마음을 나 혼자 삭이며 보이지 않는 눈물을 하늘에 띄워 보냈다.

 

207. 마음 놓고 울 수도 없는 가련한 신세

 

몸이 불편한 시아버님이 일어나려고 하실 때 부축해 드리고 싶었지만, 나는 눈치만 살펴야 했다. 아버님이 외출하려고 밖으로 나오실 때 신발을 바로 놓아 드리니 큰소리로 “놓고 저리 가아!”라고 하셨다. 지팡이를 집어 드리니 또 큰소리로 “놓으란 말이야!”라고 하시어, 나는 서러운 눈물을 감추어야 했다. 그래도 외출하시는 아버님을 따라 대문 밖까지 나가 “아버님,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했더니 “제발 좀 그러지 마아!” 하고 큰소리로 언짢게 말씀하셨다.

그때 밖에 있던 한동네에 사는 몇몇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니 저런 효부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다고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자 나도 모르게 참아왔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급히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나 울고 싶어도 마음 놓고 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까지 울고만 있겠는가, 슬픔 중에서도 눈물을 감추고 쌓여 있는 일들을 부지런히 하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몸부림쳤던 지나간 날들이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시집을 잘못 왔나 보다. 더 잘 배운 좋은 집안의 규수가 들어왔어야 아버님 마음에 드실 텐데, 일본서 대학원까지 나오신 아버님이시기에 배우지 못한 나를 종보다도 더 못하게 생각하시나 보다.’ 하고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설움이 복받쳐 올라 나를 낳아주신 내 아버지가 한없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전에 큰외숙이 며느리에게 베푼 사랑을 보아 왔다. 며느리가 잘못하여도 시어머니가 알까 봐 감추어 주시는 그 사랑이 너무나 좋게 보여 나도 그런 사랑이 그리워서 시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시집가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자 했는데, 나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인 듯했다.

나는 ‘차라리 처음부터 가난하여 배우지도 못한 집안, 또는 고아에게 시집갔더라면 서로 위로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어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억제할 길 없었다. 그러나 사랑받은 셈 치고 마음을 달랬다.

 

208.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온 남편

 

온종일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시아버님 마음에 드는 며느리가 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보아도 시아버님의 마음은 냉랭하기만 하였고, 사랑을 드리고자 온갖 정성으로 애쓰며 노력하는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모멸감뿐이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나는 여기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의 사랑이 시아버님께 받아들여지리라는 희망을 안고 서러운 눈물을 감추고 또다시 노력하곤 했다. ‘최선을 다하여 시아버님 마음에 드는 며느리가 되리라.’라고 다짐하고 사랑받은 셈 치고를 되뇌며 애를 쓰던 어느 날 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의 걱정이 대단하였다.

통행 금지가 있었던 때라 12시가 넘으면 기다리기를 포기해야 하는데도, 나는 걱정이 되어 자정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를 업고 밖에 나가 계속 서 있었다. 그런데 새벽 두세 시쯤 되었을 때, 먼 곳에서 어떤 물체가 보여 황급히 달려가 봤더니 술에 취한 남편이 비틀거리며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서 보니 이게 웬일인가,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바지는 무릎이 찢어져 있었다. 아기를 뉘어 놓고 물수건으로 남편의 얼굴과 온몸을 닦아주고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하며, 온몸을 주무르고 안마해 주면서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됐건 남편이 건강해야 하니 우선 속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잠든 뒤, 시댁 식구 깰까 봐 조심스럽게 나와 남편이 먹으면 좋을 음식을 조용조용 만들고, 시아버님께 드릴 음식도 만들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었다. 눈 붙일 사이도 없이 서둘러 그 많은 학생을 학교 보내기 위해 할 일을 했지만, 사랑으로 할 수 있음에 감사드렸다.

 

209. 여름에 그렇게도 큰 마스크가 웬일인가!

 

나는 혼자서 15명 정도의 대가족의 식사와 학생 5명의 도시락까지 준비하느라 새벽부터 바빴다. 게다가 시아버님 식사는 따로 차려드리고, 중풍 탕약까지 달여서 드리고 설거지를 끝내니 그때까지 동네 공동 두레박 샘에서 아침에 들통으로 길어온 물이 20통 정도 되었다. 나는 학생들 도시락까지 싸서 모두 학교에 보내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남편이 지난밤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많이 다쳤기에 그대로 보낼 수가 없어 급히 털실로 마스크를 짜서 씌워줬다. 내가 학원 창문 밖에서 눈동냥으로 이 뜨개질을 배웠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줄 모르기에 털실도 흰색은 기본이고, 다른 여러 가지 색의 털실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놀다가 행여 옷이 찢어지거나 상하면 땜질 해주기 위해서였다.

마스크가 눈 밑까지 거의 덮여 상처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여름이라 보기에 별로 좋지 않았다. 그날은 남편이 도(道) 농촌진흥원으로 출근했는데 친한 직원이 “여보게, 마스크 좀 벗게. 아무리 감기가 왔더라도 그렇지 원장님 앞에서까지 그렇게 흉하게 쓰고 있는가?”라고 했다. 남편은 쉬는 시간에 한쪽으로 그 직원을 불러 마스크를 가만히 열어 보여주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빨리 덮게!”라고 했다 한다.

일이 끝나고 오토바이 면허시험에 합격하여 귀가한 남편은 “여보, 나 당신 덕분에 오늘 진흥원에도 잘 다녀왔고, 또 오토바이 면허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어.”라고 했다. “당신이 잘하신 거지요.” “오늘 진흥원에 가서 원장님을 꼭 만나야 했고, 오토바이 시험도 오늘 안 보면 안 되는데 당신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서 사고까지 나 상처 범벅이 된 나를 오히려 지극한 사랑으로 감싸준 덕분이야!”“또 당신은 내게 더 다칠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자면서 걱정하지 말고 힘내라고 안마까지 해주며 격려해주고 상처도 보이지 않도록 마스크를 크게 짜주어서 창피를 면했어!”라고 하며 남편은 매우 기뻐했다. 집에서 나갈 때는 내가 어르신들 보시지 않도록 가려 줬는데 가족들이 갑자기 회의하자고 하여 남편 모습을 보고는 “여름에 그렇게 큰 마스크를 왜 쓰고 있느냐?”라고 묻는데 갑자기 셋째 동생이 마스크를 확 벗겼다.

가족들은 안면에 푹푹 깊게 패인 상처들을 보고 모두 놀랐다. 그이는 할 수 없이 사고 경위를 말했다. 직원들과 술을 마셨는데 자정이 넘어 통행 금지 때문에 집에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몰래몰래 기찻길을 따라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사정없이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추슬러 일어난 남편이 다시 발걸음을 떼는데 또 누군가가 사정없이 밀어서 넘어졌다.

이번에는 남편도 그 사람을 꼭 붙들려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집에 왔던 것이다. 남편은 그렇게 두 번이나 사정없이 넘어지면서 얼굴과 팔을 많이 다쳤고, 옷도 찢어졌다. 다음 날, 그 장소에 가보니 누가 밀어서 넘어진 게 아니라 전봇대의 줄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가족은 모두 배꼽을 쥐고 웃었다.

  

210. 반신불수가 되신 시아버님이 쾌유하시어

 

반신불수가 되신 시아버님이 6개월 만에 완전히 쾌유하시자 우리 가족은 나주의 셋방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방은 문간에 달린 사방 여덟 자 방인데 앉은뱅이책상 하나와 쌀자루며 모든 것을 그 좁은 방에 놓아두었다. 신혼살림답지 않고 자취방처럼 살았다. 이런 사정이기에 나주로 내려가기 전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내가 시집올 때 해온 찬장 하나만이라도 좀 달라고 시어머님께 조심스럽게 사정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시집갈 때 해 가는 물건들을 시댁으로 먼저 가지고 가서, 살림날 때 다시 가지고 나오던 때였다. 그런데 살림을 나왔는데도 시어머님께서는 내가 해서 온 물건들을 큰며느리이니까 줄 수가 없다며 하나도 주지 않으셨다. 친정어머니께서 힘들게 장사하시면서 틈틈이 모아두었던 옷감들이며 살림에 필요한 물건들을 많이 해 주셨다.

그런데 장롱은커녕 당장에 덮어야 할 이불이나 요, 베게는 물론 수저 하나도 주지 않으셨기에 찬장 하나 달라고 사정을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그동안 시아버님께 한 정성을 봐서 주신다고 했다. 나는 찬장 하나를 가지고 오면서도 시어머님의 마음을 언짢게 하지나 않았는지 마음이 무겁기만 하였다. 결혼 빚부터 갚으라고 하셨기에 미용실까지 처분해야 했고, 시댁을 위해 없는 돈까지 마련할 때였으니 어쩔 수 없이 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