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시동생 가르치고 싶은 내 마음을 포기할 수 없기에데...
시부모님은 빚보증으로 가세가 기울어지자, 시동생들을 가르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법관이 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나는 다섯째 시동생을 서울대 법학과에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했는데, 가정 형편상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라며 모두가 반대하였다.
그러나 나는 가족들이 반대해도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내 의지를 꺾지 않고, 내가 가르치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하고 다섯째 시동생을 내방으로 불러 설득시켰다. “삼촌, 다른 잡념 다 버리고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가 삼촌 뒷바라지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서울대학 시험 볼 준비하도록 해, 알았지?” 시동생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형수님, 하숙비만도 이만 원이나 된대요.” 그래도 나는 “삼촌을 가르치기 위하여 내가 잉꼬리 장사(여러 가지 물건을 이고 다니면서 파는 장사)라도 해서 삼촌을 가르칠 거야.”라고 했으나, 시동생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이야기를 계속했다. “삼촌, 뭘 그렇게 걱정을 해요? 내가 고생하여 삼촌 가르치다가 돈이 없어 내 아이들을 못
가르친다면 삼촌이 도와주면 되잖아?”라고 했더니 그제야 시동생은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고맙습니다.”라고 하여 그때부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다.
212. 도둑을 맞다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하기 위하여 아이를 업고 친정 동네에 가서 파마를 하여 돈을 벌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이 엉망이 되어있었다. 도둑이 신발을 신은 채로 방에 들어와 조금 있었던 쌀, 보리쌀, 찹쌀 등 곡식을 다 가져갔다. 부엌에 있는 연탄집게로 자물쇠를 뜯어냈는지 그것도 다 구부러져 있었다. 그런데 돼지 저금통은 그대로 있기에 나는
“의리 있는 도둑이에요.” 하고 말했더니, 주인아주머니는 “이 순진한 바보야, 밑을 찢어서 다 가져갔잖아!”라고 하여 우리는 함께 웃고 말았다.
주인은 “도둑맞고 웃는 사람 처음 봤네.”라고 하며 동정 어린 타박을 하셨다. 그동안 조금이나마 모아두었던 돈까지도 다 가져갔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운 살림을 했기에 먹지 않고 ‘먹은 셈 치고’, 입지 않고 ‘입은 셈 치며’ 허리끈을 조여 매고 한푼 두푼 어렵게 모아두었던 돈이었다. 옷도 다 뒤져 마음에 드는 옷만 가져갔기에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없는 살림을 다시
시작하려니 너무 힘들었으나 ‘우리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겠지.’ 하고 생각하며 처음부터 없었던 셈 쳤다.
213. 또다시 다섯 집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사방 여덟 자 방에서 3년간을 살았다. 도둑을 맞아 무섭기도 했거니와 두 번째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방이 너무 작아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로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변두리로만 방을 얻으러 다녔다. 어느 곳에 가니 큰 방 두 개에 부엌 하나인 곳이 있었다. 그 방을 세 얻은 여자가 자기는 곧 서울로 이사 간다고 조금만 고생하라며 자기가 이사 갈 때 그 방 벽을 뚫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좋다고 생각하며 다섯 집이 살고 있는 그 집으로 이사하여 우선 방 하나만 사용했다. 한 부엌을 쓴 여자는 36살인데 바걸이라 했다. 바걸이 뭐냐고 했더니 “아, 춘원이라고 있는데 거기 출근한다.”라고 하더니 낮에는 자고 밤에 나갔다. 내가 시장에 갈 때마다 자꾸만 오이를 사 오라거나 또 다른 몇몇 심부름을 시키면서 돈은 주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돈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춘원이 뭐 하는 곳이냐고 남편에게 물어보니 “아니, 당신이 춘원을 어떻게 알아? 당신은 모르는 게 나아”라고 해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214. 한의원이 사라지다
1973년 3월경, 나는 둘째 아이 임신 중에 배가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직원 부인 셋이 와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들은 혼미한 상태에 있던 나를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갔는데 그곳은 아주 커다란 방이었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배가 너무 아파 거의 뒹굴다시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의원님 저 색시 먼저 봐주시죠.”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나를 한쪽 방으로 데리고 가셔서 팔을 걷으라고 하셨다. 내가 배가 너무 아파 힘을 못 쓰자 그분이 직접 옷을 걷어 올리고 양팔에 큰 침을 놔주셨다.
그분은 “이렇게 큰 침도 잘 맞네?”라고 하셨다. 조금 지나자 배가 하나도 안 아팠다. 거짓말 같았다. 나는 ‘이게 현실인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가만히 허벅지를 꼬집어보니 아팠다. 나는 ‘아! 꿈이 아니구나.’ 하고 그 방을 나와 보니 엄청 큰 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때서야 ‘아, 이곳이 한의원이고 아까 그 분이 한의원 의원님이셨구나.’ 하고 깨달았다. 나를 데리고 간 직원 부인들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그들도 나도 돈이 없어서 “돈이 없으니 외상으로 해주시면 안 되나요?”라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다. 돈을 갚으러 오려고 그곳 위치를 아주 자세히 봐 놓고는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왔다.
집에 홀로 남겨졌던 두 살 된 큰아이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집에 와서 보니 잘 자고 있던 아이는 내가 도착한 그때서야 일어났다. 다음 날 돈을 가지고 나주군청 소재지인 과원동에 있던 그 한의원을 찾아갔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한의원은 온데간데 없었다.
분명 어제 자세히 봐 두었던 그 한의원이 없어지고 그 장소에는 그냥 집들이 있어 그곳의 여러 사람에게 물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이곳에는 원래 한의원 같은 것도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럼 사사로 하시는 분, 턱에 수염이 길게 예쁘게 난 분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런 분은 본 적도 없다고 했다.
‘분명히 꿈은 아니었는데?’ 하고 침 맞았던 자국이 있는지 찾아보니 양쪽에 세 번씩 맞았던 자국이 아주 선명하게 나 있었다. 너무나 황당하여 나를 그 한의원에 데리고 갔던 직원 부인들에게 연락해 보니 그들은 영문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그 직원 부인 셋은 전에 단 한 번 나를 찾아와 남편 간수 잘하라고 온 적이 있을 뿐, 그 뒤로는 전혀 왕래조차 없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이 내가 위급하다 하여 질질 끌어서라도 한의원을 데려갈 리가 만무했는데 그들은 누구였을까?
죽어가던 내게 적시적기에 찾아와서 혼미하여 무거워진 나를 옮겨 준 그들은…. 분명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였으리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의원님의 모습도 내가 평상시에 들어왔던 우리 아버지 모습과 같았다. 수염이 길고 하얀 옷을 깨끗하게 입으셨는데 글을 쓰는 지금도 너무 눈에 선하다. 아마도 시어머니 계속 돈 해 드리느라고 내가 임신해서도 먹을 것이 없어 너무 못 먹고
여러 가지 신경 쓰다가 쓰러져 죽을 것 같으니 예수님께서 살려주시려고 아버지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나 싶다.
* 2020년 8월 27일 오후 5시 30분경 이글 214번 일화를 편집할 때의 일이다. 작은 영혼이 마지막 부분 ‘아마도 시어머니께 계속 돈 해 드리느라고 내가 임신해서도 못 먹고 여러 가지 신경 쓰다가 쓰러져 죽을 것 같으니 그때 예수님께서 살려주시려고 아버지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나 싶다.’ 이 부분을 읽다가 ‘맞아. 예수님이셨어.’라고 하는 순간 하느님께서 빛에 싸여 나타나시더니
“나다.”라고 하시곤 금방 사라지셨다.
작은 영혼이 큰 소리를 내며 울자 협력자들은 작은 영혼이 고통이 심하여 그러는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자 작은 영혼이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나다'하고 확인해주셨다고 설명하니 모두가 경이로움 속에 눈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 날은 기적의 샘물을 주신 기념일(1992. 8. 27.) 이고 성체기적(1997. 8. 27.)을 주신 날이었다.
215. 잉꼬부부상을 타다
내가 둘째 아이 출산 예정일이 다가와 오늘내일하는데 “지도소 직원들이 부부 동반해서 놀러 간다.”라고 하며 나도 꼭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절대로 못 간다고 못을 박았지만, 다음 날 직원들이 몰려와 억지로 데리고 가면서 아기 낳을 준비도 해간다며 태평사로 갔는데 거기서 아기를 낳게 되면 이름을 태평이라 하자고 했다. 나는 겁도 났지만 혼자 가야 할 남편과 이웃의
화평을 위해서 편히 쉬는 셈 치고 따라나섰다.
힘은 들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모든 행사에 함께했는데 시상식 때 우리 부부에게 잉꼬부부상을 수여했다. “언제나 남편의 허물을 감싸주고 함께 뜻을 같이하여 남편의 뜻에 따라 모범을 보인 사모님께 존경을 보내드린다.”라고 하며 모두 기립박수를 하였다. 그들이 나를 직원 야유회에 기어이 참석시킨 것은 잉꼬부부상을 시상하고자 한 소장님의 특별지시였다. 나는 ‘그래,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더 열심히 남편 잘 보필하고 가정을 지키리라.’ 하고 다짐했다.
216. 둘째 아이는 아들이었다
밤늦게 태평사에서 돌아와 씻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진통이 시작되었다. 나는 배를 만지며 속으로 말했다. ‘착한 내 아가야, 오늘 수고했다. 너는 오늘 하루 종일 고생했으면서도 이 엄마한테 어떻게 씻을 시간까지 그렇게도 배려해주고, 잠자리에 들어오자 이렇게 신호를 주니 엄마가 어찌 감동하지 않겠느냐? 고맙다, 내 사랑하는 아가야.’다음 날 아침 진통이 심했지만 웃으며
남편에게 식사를 차려 주면서 ‘이럴 때 친정어머니가 오시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8시 40분경, 남편이 출근한 뒤 돈 때문에 병원 가지 않고 집에서 아기를 낳으려고 혼자 진통을 하면서, 그 당시 전화도 없어 연락할 수도 없었기에 친정어머니께서 찾아와 주시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청했다. 아이를 낳으면 몇 시간은 일을 할 수 없겠기에 진통이 조금 덜할 때 얼른 설거지하고 방으로 들어가 아이 낳을 준비를 했다.
내가 탯줄을 자를 가위와 아이를 씻길 대야를 끓는 물에 넣어 소독하고 있을 때 옆방 아가씨가 “어머, 아기 낳을 거 같아요?”라고 하여서 “네!” 하고 방으로 들어가 소리 없이 진통을 하고 있는데 친정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내가 마음속으로 부르짖던 그 시간에 갑자기 나주에 가야겠다며 급하게 나오셨는데 바로 첫 버스가 와서 타고 오셨다 한다. 아이를 낳을 때
소리 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입술이 다 부르텄다. 어머니가 한약을 끓이는데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소리 한 번도 지르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 9시 15분이었다.
“어머니 아기는요?” “응, 건강한 아들이다.” “아들이다.”라고 하는 말에도 나는 아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정상이에요?” 하고 물으니, 친정어머니께서는 “그럼!”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전에는 솔직히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보다는, 정상아를 낳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임신한 지 4개월에 가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병원에 가보지
않았는데, 달수가 거의 차면서 병원 앞만 지나가면 간호사가 늘 기분 나쁜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간호사는 나를 보기만 하면 “병원에 와서 한 번 진찰해 보세요. 그러다 기형아를 낳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하고 붙들었다. 사실은 무서웠다. 워낙 먹지 못한 데다가, 낳는 달까지도 배가 많이 부르지 않았으며 평상시보다 몸무게는 2kg밖에 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임신하여 병원에 한 번밖에 가지 않았던 나를 간호사가 어떻게 기억하고 늘 그렇게 얘기했는지 모른다.
시댁에 돈을 계속 대드리느라고 우리가 쓸 돈이 한 푼도 없어 변변히 먹지도 못한 채 병원에도 가지 못해 출산할 때까지 얼마나 초조했는지…. 악몽 속에서 깨어났을 때의 그런 기분이랄까? 아들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 기뻐했다. 그동안에 ‘내가 아들을 낳으면 남편이 나에게 돌아올 수 있을까?’라고 하는 말들을 얼마나 되뇌었던가?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고, 남편이
기뻐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서슴없이 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아버님은 아들이 여섯이나 되지만 내가 첫딸을 낳았다고 더 미워하셨기에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그래서 마음속으로 ‘오, 사랑하는 아기야! 아들로 태어나줘서 너무 고마워. 네 할아버지 원을 채워드렸구나!’ 하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또 딸 낳으면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해방된 것이다. 밖에서 우리를 늘 챙겨주던 친구와 옆방
아가씨가 진통하는 소리가 들리면 들어오려고 부엌에서 기다렸는데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들어와 “와, 지독한 사람이네! 어찌 아기를 낳으면서 소리 한 번도 안 지른대? 아기가 쉽게 퐁 나왔어?”라고 했다. 그래서 “방안 찬장을 붙잡고 신음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입을 꼭 다물고 진통을 했더니 입술만 조금 까졌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데 그만한 희생은 감수해야지. 아프다고 막 악을 쓸 순 없잖아.”라고 했더니 또 “와, 지독한 사람, 암튼 특별한 사람이야!”라고들 했다.
217. “우리 오빠가 대검찰청 검사인데요.”
서울 시고모 딸 결혼식에 가는데 아이 둘을 다 데려갈 수 없어 둘째는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큰아이만 데리고 갔다. 시고모 딸은 서울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를 들러리로 세워 함께 행동했다. 그런데 신랑 신부와 함께 우인들이 어디에 놀러 간다고 하여 나는 안 간다고 했더니 시어머님이 “큰아이를 봐줄 테니 같이 가라.”라고 하셔서 할 수 없이 따라갔다.
어딘지 잘 모르지만, 배를 타고 가서 신랑 신부와 함께 모두 음식을 먹었는데 신랑 친구 중 두 남자가 나를 좋아했다.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난 뒤에 좋아하는 눈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에 내가 “두 아이의 엄마다.”라고 해도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하며 믿지 않았다. 서울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나를 데려다준다고 하며 끝까지 따라다녔다.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맛있는
거 사주면서 데려다주지는 않아 “제발 데려다주세요. 우리 딸이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 애가 막 탔다. 그들이 나를 어떤 술집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주기에 “술을 전혀 먹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러자 뭔가를 술에 타고는 “이 술은 물과 같다. 이 술만 먹으면 꼭 데려다준다.”라고 했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나 여기가 어딘지 또, 어디로 가야 할 지 난감했다. 시고모님 댁 전화번호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답답해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아버지,
저 어떡해요?’ 하고 아버지를 부르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3년 전에 나주 영산포에서 만났던 외사촌 오빠가 “너 혹시 서울에 오거든 우리 집에 한번 와라.” 하고 전화번호를 적어준 것도 아니고 불러줬던 것이 생각났다.
그 당시 나는 그 오빠 집에 가리라고 생각을 안 했기에 그냥 흘려들었는데 그때 한번 들었던 번호가 기억나 전화를 했더니 오빠가 받았다. 오빠는 너무 반가워하며 “택시를 타고 돈암 극장 앞으로 와. 50분 걸리니 빨리 와!”라고 했다. 그 당시 택시가 많지 않아 합승을 했다. 그런데 기사는 다른 승객들은 다 내려주고도 1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나만 태우고 어디론가 자꾸만 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차 번호를 적으면서 “오빠 집은 50분밖에 안 걸리는데 왜 이렇게 늦죠?”라고 해도 그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면서 계속 갔다. 아무래도 기사가 심상치 않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근데 나도 모르게 “우리 오빠가 대검찰청 검사인데 지금 올케언니가 애기를 낳으려고 해요. (그 당시에는 119구급차가 없었음) 근데 오빠가 바쁘다고 저더러 언니를 데리고 병원에 가라고 부탁했는데
애기 낳아버리면 어떻게 해요?”라고 했더니 바로 차를 되돌려 데려다줬다.
1시간 반이 넘도록 나를 기다렸던 오빠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아니, 그런 지혜가 어디서 나왔니? 안 그래도 네가 어려서부터 영특한 걸 알았지만 정말 잘했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런 놈은 잡아서 혼내줘야겠다.”라고 하며 경찰에 차량번호를 연락하려고 해서 “오빠, 내가 무사히 왔으니 됐어. 그 사람 혼낸다고 내가 달라질 건 없잖아.”라고 하였다. “아이고, 못 말려.
너는 여전히 착한 심성 그대로구나.”오빠 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남편에게 연락하여 시고모님 댁이 어딘지 물어 찾아갔더니 많이들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하느님은 몰랐지만, 그 위급한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게 한 것은 하느님께서 인도해주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성폭행하려는 그 남자로부터 구해주신 것이다.
218. 남편이 결국 눈물 흘리다
아들을 낳으면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남편은 돌아오기는커녕 계속 방황하였다. 화투를 쳐서 잃은 돈을 계속 포기하지 못하고 잃은 돈을 찾아보겠다며, 거기에 연연해 있었다. 하루는 남편이 나에게 다정스럽게 말했다. “여보, 이번에 한 번만 더 할게.”라고 하는 남편의 말에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셔요.”라고 했다. 그날은 월급날이었다.
그날 밤에도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긴긴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얼굴이 시커멓게 되어 너무나 안쓰러워 보였다. 나는 그이를 반갑게 맞이하며 “고생했어요.”라고 말하며 여기저기 주물러 주고, 안마해 주며 위로해 주었다.
“여보 미안해, 이번에도 월급 다 날렸어.” “괜찮아요, 그 돈 없었던 셈 쳐요. 우리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되잖아요. 용기를 내세요. 그렇게 괴로워하면 잃었던 돈이 돌아오나요?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요? 어서 이 약 드시고 죽이라도 들고 힘을 내세요.” 남편은 딸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당신이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지만, 나는 당신을 믿어요. 그리고 당신이 다시 새롭게 일어설 때까지 나는 언제나 당신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노력을 아끼지 않고 뒤에서 힘이 되어드릴게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다시 한번 용기와 힘을 내어 일어서 봐요, 네?”라고 하며 아픈 마음을 애써 감추고 남편이 사기를 잃지 않게 하려고 마음을 다해 위로하며
격려했다. “이렇게 착한 당신을 내가 고생만 시켜서 어떡하지? 내가 나쁜 놈이야, 나 이제 잘할게.”
219. 폐품을 이용하여 멋진 작품을!
엄마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젖을 먹여 아이를 키우는데도, 아이는 놀랄 정도로 잘 자랐다. 아이를 돌보며 키우는 기쁨이 컸지만,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릴 여유가 없었다. 없는 살림에 시동생들 대학 공부까지 시켜야 해 가끔 하는 미용만으로는 돈 벌기가 쉽지 않아 골동품 자개 일을 또 시작했다.
고급 자개로 자개장롱 등을 만들고 나면 작은 조각들이 나온다. 버려질 그것들을 헐값에 사다가 니퍼로 잘라 예쁜 모양을 만들어 붙여 작품을 만들었다. 원래 손으로 뭘 만드는 일을 잘했다. 니퍼를 사용해 동그라미를 잘라낼 때는 얼마나 정교한지 모두들 감탄하였다. 어려서부터 폐품 이용을 많이 해 왔던 터라 버려질 것이 이렇게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질 때마다 마음이 흐뭇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나를 궁상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버릴 물건이나 버려질 음식까지 다 활용해 온 나로서는 폐품을 이용해 작품을 멋지게 만드는 이 일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돈이 없어 미용실을 차리지 못해도 미용실에서 일 한 셈 치고 봉헌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4-H 활동을 하면서도 폐품을 이용해 만든 작품들로 많은 상을 탔고, 어려서도, 미용실에 근무하면서도, 이모님 댁에서 밥을 하거나 설거지하면서도, 아이들 키우면서도, 살림하면서도 나는 버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느님을 모를 때 ‘물을 아껴 쓰면 용왕님이 기뻐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또 ‘반찬을 비우면서 그릇에 묻은 고춧가루까지 다 씻어 먹으면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시댁에서 생선을 먹고 남은 뼈나 머리까지도 다 씹어 먹었으며, 과일을 깎아 가족들 주고 버리는 껍질이나 고갱이(과일 심지 부분)도 씨만 빼내고 좋은 것을 먹은 셈 치고 먹었다. 꼭 버려야 될 것은 버리지만 어지간하면 굶주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이 영양분이 흘러가길 바라며 먹었다.
그랬더니 이모님은 “우리 홍선이 큰일 났다. 어려서부터 저렇게 아까워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고춧가루까지 다 씻어 먹으니 그러면 가난하게 산다는데 가난한 집으로 시집가면 어째?”라고 걱정하셨었다. 나는 잘 먹지도 못하면서 아이에게 젖을 주고 하루 종일 고개를 숙이고 골동품 자개 일을 계속하다 보니 가슴과 머리뿐 아니라 모든 곳이 다 아파졌다. 그래도 병원에 가지
않고 병원비 아껴 아침마다 남편에게 녹즙을 내주었다.
안집 할머니는 아픈 사람이 아침마다 무엇을 그렇게 꽁꽁 찧느냐고 물어보셨다. 그때는 녹즙기나 믹서기가 아니라 큰 돌 위에 채소를 놓고 작은 돌로 찧어서 짰기 때문이다. 내가 의지할 사람은 오직 남편이기에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 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이 건강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면서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할 때 토사곽란이 나도 건강한
셈 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남편을 잘 챙겨 줄 수가 있었다.
아프면서도 건강한 셈 치고 안 아픈 척해도 눈물이 나오면 보이지 않게 울었다. 그러나 남편이 보는 앞에서는 늘 웃어 주며, 잘살아 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 마음속에는 늘 ‘낮에는 요조숙녀와 현모양처, 밤에는 요부가 되어 남편을 더욱 기쁘게 해주리라. 그리고 형제간에 우애를 도모하리라.’ 하는 이 생각이 자리했기에 건강한 셈 치고 고통도 잘 봉헌할 수가 있었다.
220. 어느 집사에게 기도 받다
안집 여주인은 개신교인 장로교 집사였는데 아픈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느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서 자리에 눕혀놓고 머리를 때려가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기도가 끝나자 감사 헌금 2,000원을 내라고 하여 돈을 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또 교회로 데리고 가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헌금 1,000원을 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또 돈을 내고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하느님은 전혀 알지도 못했고, 교회라는 곳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나에게 갑자기 큰돈을 자꾸 내라고 하니 못 다니겠다고 했다. 그때 7급 공무원 월급이 10,000원 정도였었는데 화투노름으로 돈을 다 잃고 어렵게 사는 우리에게는 교회에서 내라고 하는 돈이 큰돈이 아닐 수 없었다. 교회뿐만 아니라, 기도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기도해 주고 없는 돈을 요구하니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며, 그래야 천국 간다고 말하는데, 천국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에게는 주인아줌마가 하는 행동만 보였다. ‘하느님은 과연 누구신가?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라고 교회로 부르시는가?’ 나는 그 집사님을 보고 하느님에 대한 실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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