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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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주인집 할머니의 극심한 고통

 

주인 집사는 아침에 가방 들고 나가면 저녁 늦게야 돌아왔다. 아이들이 다섯인데 친정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나가 버리니 80세가 되신 할머니가 살림을 모두 해야 했다. 식모 이상으로 혹사당하며 늘 눈물을 감추셔야 하는 할머니를 볼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할머니는 아들 한 분을 두고 계셨다. 외국에 가 있었는데 아들을 결혼시키기 위하여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어 한국으로 불러 결혼을 시키셨지만,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은 다시 외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소식이 끊어졌다 한다. 며느리가 임신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얼마 후 아이를 놔두고 재혼해 버렸기에 할머니는 그 아이를 맡았다. 고생이 많았지만 귀한 피붙이라 기쁘게 길렀다.

6·25 동란 때 어려움 중에서도 삯바느질하고 그것도 들킬까 봐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불빛을 가리고 밤을 지새우며 일했고, 손녀가 학교 오가는 길에 행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봐 십 리 밖까지 쓸곤 하시며 정성을 다해 손녀를 중학교까지 가르치신 훌륭한 분이셨다. 손녀가 성장하여 데릴 손자사위를 두었지만 늘 불화가 잦았는데 그 원인은 할머니를 모신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할머니는 추운 겨울에도 나무를 하고, 개천의 찬물에 빨래도 하는 등 모든 살림을 혼자 다 도맡아 하시며 고생하셨다. 그런데 그 손녀는 하느님을 전한다며 가방만 들고 다니니 ‘집안은 이렇게 엉망인데 저렇게 다니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하느님은 멀고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222. 무즙 한 잔에 할머니의 기침이 멎다

 

어느 날, 음식과 술을 드리기 위해 할머니를 불렀는데, 음식을 드시지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나 빨리 죽었으면 좋겠네, 영감은 혼자 먼저 가놓고 나도 안 데려가.”라고 하셨다. 겨울에 나무하고 냇가에서 아기 똥 걸레며 모든 빨래를 다 하다가 감기에 걸려 기침을 심하게 하였기에 손녀에게 무 하나 사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것 하나 사다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손녀는 누가 할머니에게 용돈 드린 것을 눈치채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빼앗아가 버리기 때문에 할머니는 돈도 없으셨다.

80세가 넘으신 할머니가 추운 겨울에 개천에서 아기 똥 걸레며 모든 빨래를 다 하다가 감기에 걸려 기침을 많이 하셨고 열이 나는데도 많은 일을 해야 했기에 손녀에게 “애야, 나, 무 하나만 좀 사다 다오.”라고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시장 다녀올 때마다 ‘오늘은 무 사다 주나?’ 하고 기다렸는데도 사다주지 않았다 한다.

술을 좋아하시는 할머니에게 술도 전혀 드시지 못하게 하여 나는 아무도 모르게 할머니를 불러서 술도 사다 드리고, 혹 맛있는 것 있으면 먹지 않고 아껴두었다가 드리니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놓고 드셨다. 할머니의 말씀을 들은 나는, 즉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시장으로 나가 무 하나를 사서 즙을 내어 드리니 그 심한 기침이 어느새 멈추었다.

이제까지 아파서 힘이 들어도 약을 먹어 보지도 못하셨는데, 무즙 한잔 잡수시고 금방 나은 것이다. 할머니는 내 손을 꼬옥 쥐시면서 “내가 요즘은 자네 때문에 사는 것 같이 사네.”라고 하셨다. 구더기가 집안 먼 곳에 있는 장독에서부터 부엌까지 기어 나올 정도인데 교우 방문을 한다며 집안 살림을 전혀 돌보지 않고, 할머니를 구박하는 그런 손녀의 모습을 보니 하느님이 멀게만 느껴졌다.

 

223. 하느님을 전도하던 그 집사

 

주인집 할머니는 그 많은 연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시며 아기까지 키워야 하니 늘 바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연탄불이 꺼지자 손녀는 할머니에게 불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나무를 해와 때셨는데, 한 부엌만 연탄을 땠기에 한 번 불이 꺼지면 되살리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번개탄도 없었던 때이다.

다행히도 그 연탄 부엌은 안집까지 안 들리고 우리 부엌에서 돌아가기만 하면 되기에 그때부터 안집 연탄불이 꺼지면 아무도 모르게 우리 집 연탄불을 넣어드렸다. 80세가 넘으신 할머니가 너무 불쌍하여 내가 먹고 싶은 것 먹지 않고 늘 할머니께 드렸는데, 손녀나 증손녀들에게 들켜 혼이 나기도 했다.

그때 문간방에 사는 분들이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빵을 만들면 내게 꼭 가져왔는데, 나는 그들에게 맛있게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할머니께 갖다 드렸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게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아랫방에 살던 손녀가 알게 되자, 그들을 내보낼 심산으로 돈이 없어 사글세로 살던 그들에게 전세로 내놓아야겠다고 했다.

그들은 나의 곁을 떠나기가 싫어 빚을 내어 전세로 살겠다고 했으나, 며칠이 안 되어 주인은 그 방을 써야겠다며 비워달라고 하였다. 내보내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하는 것임을 다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윗방 사람들이 이사를 하게 되자, 문간방 사람들은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기에 방 하나로는 사는 것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결국 이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

 

224. 친정에 다녀오니 친구는

 

파마할 사람들이 모이면 친정에 간다고 하며 며칠씩 다녀오곤 하였다. 시어머니는 언제 오실지 모르니 항상 준비 되어 있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에서 돌아와 보니 누구보다 더 반겨줄 문간방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내보낸 것이다. 골동품 자개를 했던 친구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기 위하여 아침에 밥을 한번 지어 점심 저녁까지 먹었다. 그런데도 내가 친정에서 일주일간 있을 때, 그 친구는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맙게도 매일 그이 밥을 해주었다.

그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부엌에 나와 보면 벌써 따뜻한 밥이 새 반찬과 함께 상에 차려져 있었고, 저녁에 퇴근하여 집에 와도 늘 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들은 그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남모르게 봉사했다. 그들은 저녁을 집에서 거의 먹지 않으니, 늘 그이가 먹지 않은 찬밥을 먹었다. 자신들을 위하여 시장을 봐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들이 친구 남편을 위해서는 계속 시장 봐서 밥을 지어 준 것이다.

가난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하던 그들이 그런 사랑을 보이자, 그 모습이 아니꼬워 내보내 버린 안집 주인의 처사에 나는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빈부 차이로 인해 사람의 인격까지도 차별받는다면 그것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집 없는 설움을 나 때문에 더 쓰게 맛보아야 하는 그들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 우리는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다.

서로 돕고 사랑하며 친하게 지내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시기 질투 때문에 그 집사는 결국 우리를 갈라놓고 말았다. 그동안 한 번도 안집을 거치지 않고는 먹을 것을 나누어 먹어 보지 않았고, 언제나 안집 먼저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것조차 눈엣가시였나 보다. 집 없는 설움, 그것은 바로 가난 때문이 아닌가. 부자는 돈이 많아서 한없이 빌딩을 올리고 있지만, 돈 없는 사람은 길거리로 나가야 한다니….

 

225. 천장에서 썩은 쥐가

어느 날부터 방에서 계속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무리 청소를 해도 소용없었고 냄새는 점점 심해졌다. 단칸방이라 짐들이 쌓여 있어 모든 물건을 다 치우고 보니 천장 구석에 비가 샜는지 1m 정도 색이 이상하게 변해있었다. 연탄집게로 가만히 찔러보니 말랑했다. 나는 ‘천정에서 뭔가가 썩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밑에 큰 다라이를 놔두고 연탄집게로 쿡쿡 찔렀더니 썩은 쥐와 구더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으악!아! 아찔했던 진퇴양난의 그 순간의 상황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두 아이를 얼른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놀도록 했다. 그대로 놔두면 온 방을 기어 다닐 구더기를 생각하면서 무섭고 징그럽지만 더 이상 주춤할 수가 없었다.

6·25 때 아버지께서 행방불명되시자 어머니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찾아 헤매셨다. 그때 내 동생 순덕이는 아직 젖먹이였는데 발에 난 상처에 구더기 떼가 구물구물 기어 다니며 파먹어도 어머니는 할아버지 찾으러 나가셨기에 치료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너무 무섭고 징그러워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기조차 싫다. 초등학교 때 여러 아이들이 내가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자 시기 질투로 괴롭히며 내 옷 속에 참깨 벌레를 집어넣고 좋아하던 사건 이후로 이런 끔찍한 일을 겪으니 참으로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낙엽이 떨어진 셈 치고 잽싸게 치웠다.

지금은 여러 가지 탈취제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도 없어 깨끗하게 치우고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퇴근한 남편이 “뭔 냄새냐?” 하고 묻기에 사실대로 말하면 너무 징그러워할 거 같아 “그냥 비가 좀 새서 냄새가 난다.”라고 했다. 나는 평생 구더기를 가장 징그러워하는데 지옥에 가면 활활 타는 유황불 속에서 이빨이 난 구더기들이 죄지은 곳을 영원히 파먹는 형벌을 받으니 내가 구더기를 가장 싫어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226. 시댁에 들어가 살면서 아이까지 유산이 되고

 

셋째를 임신한 지 3개월 됐을 때 시어머님이 “애들 데리고 집에 와서 지내라.”라고  하셔서 광주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님의 냉대와 구박은 더욱 심해져 갔지만 ‘사랑받은 셈 치고 최선을 다하자.’ 하고 다짐했다. 그러나 온갖 정성을 다하는데도 무시와 냉대가 계속되어 정신은 더욱 가물가물해져 갔지만, 사랑과 관심을 받은 셈 치고 사랑의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입덧이 심한 가운데 그 많은 일을 혼자 해내야 했기에 매일 반복되는 일들에 치여 정신이 가물거리고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그 많은 수의 밥을 차리다 보면 입덧이 더 심하게 올라와 너무 역겨웠다. 그래도 나는 건강한 셈 치고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방에서 기어 나오다가 마루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시궁창에 박혀버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뛰어가서 아이를 꺼내어 엉엉 울면서 씻어주었다. 시어머님과 형제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별거 아닌데도 혼자 애기 키우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는 식으로 말하여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것마저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했다. 시어머님이 퉁명스럽게 “물 떠와.”라고 하셔서 ‘아가야, 물 좀 떠오겠니?’ 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신 셈 치고 부엌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럴 줄 알았으면 임신하지 말 것을….’ 하는데 배가 슬슬 아파왔다.

나는 아픈 배를 움켜잡고 있다가 ‘큰일이다. 내가 뭐 하러 나왔지?’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을 때 방에서 시어머님이 “샘 파냐?”라고 하셨다. 나는 ‘아, 내가 물 뜨러 왔구나.’ 하고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 들었는데, 뭐 하려고 그릇을 들고 있는지 또 한참을 헤맸다. 그때 또 큰 소리로 “아직도 샘 파냐?” 하시어 얼른 물을 떠가지고 들어가서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빨리빨리 잘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정신은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냐? 느그네 집에서 그랬냐?” 하셔서 ‘내가 오늘도 우리 어머니를 욕먹게 했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나는 ‘윤홍선, 넌 잘 해낼 수 있어. 자, 힘을 내자!’라고 하며 설거지를 하는데 시어머님이 뭐라고 또 한마디 하셨다. “네, 어머니 정신 차려 잘할게요.”라고 하는데 아래에서 뭔가가 흘러내리는 거 같았다. 화장실에 가서 보니 출혈이!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일과 피곤함에 지쳐 애가 유산된 것이다.

나주에서 따로 살았으면 얼른 병원에라도 갔을 텐데 나는 말도 못 하고 끙끙대며 그 많은 일을 계속해야 했다. 나중에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일을 하는데 계속되는 냉대 속에 몸은 더욱 힘들어졌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는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이러다가 내가 정신병자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병원에는 가야겠는데 돈이 없어 이모님께 돈을 빌려 시어머님 모르게 산부인과에 가보려고 어렵게 시어머님에게 “이모님께 금방 다녀오면 안 될까요?”라고 했더니 “그래라.” 하고 쉽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모님한테 가서 돈 20만 원 좀 빌려 오너라.”라고 하시어 ‘또?’ 하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모님께 가서 20만 원을 빌리고 산부인과는 돈이 없어 갈 수가 없었다. 차마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내 정신병원에 들렀다. 나는 애가 유산된 일은 빼고 자주 잊어버린다고 요즘 사정을 다 말했다. 원장은 “잘 알겠습니다.”라고 하더니 볼펜 하나를 주면서 “1주일 후에 이 볼펜을 가지고 오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1주일 후에 볼펜을 가지고 갔더니 원장은 “정신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으니 안심하고 집에 가서 안정을 취하시고 편하게 지내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희망조차 없어졌다. ‘그래도 정신병원에서 무슨 약이라도 좀 줘서 먹으면 낫지 않을까.’ 하고 찾아갔기 때문이다. 아이가 유산이 되고 있는데도 쉴 수가 없었다.

걷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냉대와 무시와 면박과 핀잔 속에서도 사랑받은 셈 치고, 사랑과 관심 속에서 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사랑을 나눈 셈 치고 봉헌하면서 부서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몇 개월간을 최선을 다해 일했다.

 

227. 아! 꿈은 아니었구나

 

마지막 폐물까지 팔아서 시아버님께 소뼈를 거의 떨어지지 않도록 고아드리고, 시동생들이 가지고 싶은 것을 해주었다. 아낌없이 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 때문에 폐물을 팔고 돈을 손에 쥘 때면 ‘아, 이 돈이 우리 시댁 식구에게 무엇인가 보탬이 되겠구나.’ 하고 기쁘게 보석상을 나오곤 했다. 해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스럽고, 보람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아버님은 피조개를 좋아하시니 시댁에 갈 때마다 피조개를 사다가 구워드리는 것이 하나의 일과처럼 되었다. 시동생들 좋아하는 꼬막도 한 말씩 사 가지고 갔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사간 피조개를 시아버님께 구워 드리면서 술을 대접하고, 꼬막을 삶아서 까먹으며 실로 오랜만에 온 가족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시아버님께서 옛날이야기며 살아오셨던 이야기도 해주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셨는데, 나를 바라보시며 “얘야! 그동안 형제 많은 곳에서 고생이 많았구나. 그동안 나에게 너무나 잘해 주었는데 섭섭하게 했던 일들 미안하다.”라고 하시는 말씀에 나는 너무 놀라 ‘혹 꿈은 아닌지?’ 생시이기를 바라며 내 허벅지를 힘 있게 꼬집어보았다.

‘아! 꿈은 아니었구나.’ 나의 볼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까지 쌓여왔던 모든 응어리가 한꺼번에 다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시어머님은 “애야, 네 시아버지가 어찌 너를 모르겠느냐? 속이 있으시면서도 표현만 안 했을 뿐이지 다 아신단다.”라고 하셨다. 나는 어릴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께 감사했다. ‘오, 이미 하늘나라에 가 계신 내 아버지여! 당신의 사랑을 이제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렇게도 그리워 애태우던 제 마음을 아시고, 이제야 저에게 사랑을 보내주셨군요.’

 

228. 시아버님이 위독하시다고?

 

지난 저녁부터 날이 샐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몸이 불편한 내가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오기가 힘들어 남편이 출근할 때 함께 오기 위하여 일찍 밥을 해서 먹고 나주로 내려갔다. 새벽에 들려주신 시아버님의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 귓전에서 맴돌고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기쁜 마음으로 남편의 기분을 전환해 주고자 집안을 치우면서 ‘남편에게 더욱 잘해주고 기쁨을 주는 아내가 되어야지.’ 하고 중얼거렸다. ‘내 집이 남편이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고, 휴식처가 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과 아이디어를 총동원해야지.’라고 하며 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의 직장 직원이 찾아와서 “사모님, 아버님이 위독하시니 빨리 집에 가 보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예?” 하고 나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왜냐하면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우리는 함께 있었으며 헤어질 때 시아버님께서는 건강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독하시다니 말이 되는가? “집에서 오늘 왔어요. 다른 분인데 잘못 아신 것 아니에요?”라고 했더니 “아니에요, 사모님 빨리 가보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하던 일을 대강이라도 정리하고 가려 했더니 “안돼요, 빨리 가셔야 해요.” 하고 재촉하여 나는 그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광주로 출발했다.

 

229. 그 높은 장벽이 무너졌나? 했는데

 

너무 놀라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에게 직원이 말했다. “사모님, 진정하십시오.” 무슨 말인가 하려다 그만두는 그의 눈치가 심상치 않아 “어디가 어떻게 편찮으셔서 위독할 정도예요?” 하고 다그쳐 묻자, 그 직원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사모님께서 워낙 시댁 식구 모두에게 정성을 다하여 어른 공경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며 잘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 주위에 퍼져, 저 또한 그렇게 알고 있기에 충격받으실까 봐 시아버님께서 작고하셨다는 얘기를 차마 못 하고 있었습니다. 김 계장님은 직장에서 연락을 받고 먼저 가시고, 저더러 몸이 불편하신 사모님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너무나 놀라 주체할 길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 받아 본 아버지의 사랑이었기에 ‘이제는 시아버님과 서먹했던 모든 장벽이 무너졌으니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의 꿈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계시지 않아 받아온 숱한 설움들 속에 짓눌려왔던 세월을 뒤로하고, 시아버님의 사랑만이라도 받아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무시와 냉대 속에서도 남몰래 눈물을 감추며, 그동안 시아버님께 드렸던 온갖 정성과 노력으로 그 높은 장벽이 무너져서 이제는 마음껏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다고 기뻐했는데, 시아버님마저도 그렇게도 급히 저세상으로 가버리셨네요. 오! 나의 고통, 나의 슬픔이여.’

 

230.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요

 

떨리는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시아버님이 깊은 잠에 취해 계신듯해 붙들고, “빨리 잠에서 깨어나세요, 네?”라고 하며 계속 흔들었다. 그렇게 하면 눈을 뜨실 것만 같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했던가. 한번 멈춘 숨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눈앞이 캄캄하여 쓰러졌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시상에, 시아버지에게 그렇게도 효성을 다하더니 이렇게 슬퍼하는구먼. 자, 일어나 정신 차리게. 죽은 사람은 이미 갔으니 산 사람이나 살아야 될 것 아닌가? 물이라도 좀 마시게.”라고 하며 위로했지만 나는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시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며느리가 저렇게도 슬피 우는데 진짜로 슬퍼서 우는 것일까?” 하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 사랑하고 싶어 몸부림쳤던 아버지는 가셨구나.’ 나의 정성을 인정해주시던 아버님의 다정한 말씀 한마디에 ‘이제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버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하는 희망과 기쁨이 생겼는데, 장벽 없이 마음껏 사랑해 드릴 수 있다는 그 부푼 마음이 하루를 채 넘기기도 전에 어이없이 꺾어지다니….

그동안 아버님을 향한 사랑이 이토록 허망하게 막을 내리다니, 사랑의 열망으로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없게 되니, 마음이 달랠 길 없이 허탈하게 되어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전생에 무슨 업이 있었기에 모든 것을 사랑하고자 하는 이 마음에 그토록 끈질기게 고통 위에 고통이, 슬픔 위에 슬픔만이 이어지는지…. 저 하늘에도 나의 슬픔이 메아리쳐 울리는 것만 같았다. ‘아버님! 사랑하는 가족들이 눈에 밟혀 가시는 그 황천길이 얼마나 멀고 또 멀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연을 여기다 풀어놓으시고 편안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