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주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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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친정어머니

 

시아버님의 장례와 삼우제를 지내고 나서도 허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찾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아버지를 찾다가, 시아버님의 사랑이라도 받아보고자 했건만 사랑은커녕 무관심 속에서 무시당하고 구박만 받아오다가 이제 겨우 사랑을 나눌 수 있겠다 싶었는데, 시아버님마저 돌아가시고 나니 나의 마음은 너무 아파 그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장례식에 오셔서 5개월 된 큰아들을 봐주셨던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속이 좀 이상하니 집에 가서 약 먹어야겠다.” 하고 가셨다. 당시는 집에서 음식을 다 만들어 손님들을 대접해 장례식을 치렀기에 어머니가 가시면 내가 아이를 업고 일을 해야 하는 것을 잘 아시니 어지간해선 아이를 놔두고 가실 분이 아닌데 이상했다. 너무 걱정돼 삼우제까지 치르고 5일 만에 친정으로 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친정집에 들락거리고 있어 쏜살같이 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이부자리도 없이 그냥 자리에 누워 계셨는데 온몸이 싸늘했다. 나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면 안 돼요. 딸 때문에 고생만 하시고 이제 50세도 안 되었는데 꼭 더 사셔야 해요. 살려주세요.” 하고 어머니를 흔들며 절규했다. 3살 된 딸도 할머니를 부르며 울었고, 5개월 된 아이도 엄마가 우니 덩달아 소리 내어 울었다.

그때 앞집에 사시는 심평 아짐이 “아야, 어머니가 밥을 하시면 굴뚝에 연기가 날 텐데, 매일 봐도 연기가 나지 않아서 ‘어디 가셨나? 어디 가시면 언제나 나에게 말하고 가시는데?’ 하다가 달려와 봤더니, 어머니는 물 한 모금도 잡수시지 못한 채 죽은 듯이 저렇게 누워있어서 오늘은 당골네를 불러다 푸닥거리를 했단다.”라고 하셨다.

내가 “무슨 푸닥거리요?”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네 시아버님의 장례식에 갔다 병을 얻은 것인데 그건 장례 치르는 데서 지골 맞은 거란다.”라고 하셨다. 나는 지골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상에, 5일 동안 물 한 모금도 못 잡수신 채 불도 안 땐 차디찬 냉방에서 몸부림치셨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하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다 죽게 되어 물까지 토했을 때 친정어머니께서 녹두죽 쒀주시어 먹고 일어났던 기억이 떠올라 녹두죽을 멀겋게 쒀 아주 조금씩 입술에 적셔 드렸더니 입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나는 계속 그렇게 하면서 ‘우리 어머니의 생명을 살리는 음식이 되어 어머니가 살아나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구했더니 한참 후에 어머니가 정신이 돌아와 눈을 뜨며 “아야, 내가 죽었던가 보다.”라고 하셨다.

내가 깜짝 놀라 “기억나세요?” 하고 묻자 어머니는 “내가 어떤 동굴을 통해서 길을 따라가는데 산에 집 한 채가 있더라. 그곳에 갔더니 네 아버지가 깨끗한 하얀 옷을 입고 계시고, 할아버지도 똑같은 옷을 입고 계시다 나를 반겨주시더라. 그런데 나는 네 생각에 너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네 아버지에게 ‘나는 딸만 놔두고 와 여기서는 도저히 못 살겠으니 10년만 더 세상에서 살다가 올게요.’라고 했더니 아버지랑 할아버지가 그러라고 하셔서 그 집에서 나왔다.”라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어머니를 붙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49세밖에 안 되신 어머니가, 그것도 시아버님의 장례식에 오셨다가 돌아가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5일 동안 차디찬 냉방에서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도 못 잡수셨는데도 몸이 바로 정상으로 되돌아와 우리 아이들을 업어주기까지 하셨다. 이 또한 하느님의 계획이 아니시고 무엇이겠는가!

 

232. 시어머님이 서 주신 빚보증 때문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가정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빚보증을 많이 서주신 시어머님은 그 돈을 갚아야 했기에 늘 돈이 없어 나에게 돈을 요구하셨다. 보다 못한 우리 큰이모님께서 여름에 시어머님께 돈을 빌려 드리며 “이 돈은 겨울에 갚아야 할 돈이니 밭에 채소라도 심어서 보탬이 되도록 하시고, 겨울에 갚아주십시오.”라고 하셨다.

시어머님은 집 바로 곁에 500평짜리 논과 200평짜리 밭을 가지고 계셨기에, 이모님이 주신 돈으로 채소 농사를 지어 아주 좋은 수확을 보셨다. 그런데 시어머님은 겨울이 되어도 돈 갚을 생각도 안 하시니 이모님은 갚아야 할 돈을 갚지 못하셨고, 돈을 빌린 사람에게 사정하여 앞으로 이자를 쳐주기로 했다고 하여 내가 그때부터 계속 이자를 갚았다.

그뿐만 아니라, 빚보증 서주셔서 빚진 돈도 갚기 위해 나는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역전이 새로 생겨 시댁 집이 반으로 잘려나갔는데, 그 보상으로 좋은 곳에 땅을 주었으므로 그 땅이 팔리면 이모님 돈이랑 빚내드린 돈을 맨 먼저 갚겠다고 하시며, 또다시 나에게 빚을 좀 내달라고 하시기에 여러 곳에서 빚을 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하지 않은 몸으로 시댁 살림까지 해야 하니 무척이나 어려웠는데, 이제 시어머님 빚보증 건으로 매달 감당키 어려운 이자까지 내야 했다. 더구나 다섯째 시동생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곗돈을 넣고 있었기에 살림하는데 무척이나 힘들었다. 나는 땅을 팔면 갚아주겠다고 하신 시어머님의 말씀을 믿고 땅이 빨리 팔리기를 기다리며 허기진 배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233. 땅은 팔렸지만

 

시어머님은 이모님께서 무이자로 빌려주신 돈을 갚지 못하시자 “사돈, 미안해요. 땅이 팔리면 제일 먼저 갚아 드릴게요, 조금만 참아주셔요.”라고 하셨다. 그 뒤에도 시어머님께서 몇 번에 걸쳐 돈을 부탁하시니, 아는 사람이 없던 나는 하는 수없이 다시 이모님께 부탁하여 많은 빚을 내어드렸다. 땅을 팔면 갚겠다고 하시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그 이자는 내가 다 감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땅이 팔렸는데도 시어머님은 이모님 돈을 갚을 생각이 전혀 없으셨다. 묻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3개월이 지나자, 땅값이 10배로 뛰어올랐다. 아는 사람에게 땅을 파셨기에 배상을 받으셨지만 그래도 이모님 돈을 갚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아도 이모님께서는 사람은 마음에 들어하셨지만, 형제가 많은 집 장손이기에 결혼을 반대하셨었다.

“사람 하나만 좋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란다.” 하고 걱정 어린 말씀을 하셨던 이모님은 당신도 큰 며느리로 시집가서 숱한 마음 고통으로 인하여 많은 질병까지 앓고 계셨다. 그런데 나까지 고통을 더 가중해드렸으니 이렇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울 데가 어디 있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던 나는 더 이상은 이모님께 고통을 드릴 수가 없어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아쉬운 소리도 전혀 하지 못했지만 알음알음으로 여러 곳에서 다시 빚을 얻어 이모님이 얻어주신 빚을 갚았다.

그러다 보니 매달 나가는 이자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아픈 몸을 이끌고 돈이 없어 미용실을 할 수가 없으니 사사로 머리를 해주기 위하여 남편 몰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어렵게 머리를 하면서 자개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이자를 갚으며, 틈틈이 모아둔 돈은 시댁에 써드리곤 했다.

 

234. 시어머님께서 빌린 시골의 빚

 

농사철이 끝나고 나서 남편의 고향인 시골에서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다. 시골에 가보니 시어머님이 농사지으면 갚겠노라 하고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려 썼는데 갚지 않으니,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큰아들인 우리가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어머님께 돈을 빌려주신 모든 분들에게 갚아 드리고 보니 그 동네에서 시어머님께 돈 빌려드리지 않은 분이 거의 없었다. 그 돈도 결국 내가 다 갚아드렸다.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창피하기도 했고, ‘오죽했으면 그렇게까지 하셨을까?’ 싶어 시어머님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서 시어머님께 더 잘 해드려야 되겠다고 남편에게 말하니 남편은 고맙다며 나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그런데 시어머님이 또 돈이 필요하다고 찾아오셨기에 나는 돈을 해드리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지만, 빌린 곳이 하도 많아 빌릴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친정어머니께 부탁하여 시골의 나락 빚을 내서 해드렸다.

 

235. 둘째를 키우면서

 

둘째 아이를 모유로 키웠는데, 10개월쯤 되자 유두에 하얗게 반점이 생기며 아이가 젖을 빨 때마다 온몸이 딸려가는 것처럼 아팠다. 하얀 반점 부위가 찢어져 피가 나기도 했지만, 우유조차도 사 먹일 돈이 없었기에 울면서 젖을 먹였다. 유두암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지만 너무 아파 ‘유두암이 아닌가?’ 하면서도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 보지 못했다.

친정어머니는 한 돌이 지나자, “1년을 먹였으니 이제 젖을 떼자.”라고 하시어 젖을 떼려고 했으나 젖을 먹으려고 얼마나 울어댔다. 방 하나에서 친정어머니와 남편, 아이들과 다섯이 자면서 아이와 나는 이쪽과 저쪽 끝에서 자도 캄캄한데도 어떻게 찾아와 젖을 먹으려 했고, 쓰디쓴 것을 발라도 소용없이 젖만 먹으려 하자 어머니가 아이를 친정으로 데리고 가셨다. 안 그래도 심한 유선염에 젖이 퉁퉁 불어 젖몸살에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젖먹이가 없을 때 일을 좀 도와드리기 위하여 큰아이만 데리고 시댁에 갔다.

 

236. 절구질해서 떡을 만들어 드리다

 

광주 시댁에 가서 시어머님께 이러이러해서 젖을 떼었다고 말씀드리자 갑자기 집에서 절구질하여 떡을 하라고 쌀을 내주셨다. 그 당시 계속 시어머니 빚 갚고 이자에 매번 돈 대드리느라고 돈이 없어 젖 짜는 유축기를 못 사 젖이 불어 젖몸살에 어깨조차 들 수 없었다. 그런데 절구질해서 떡을 하라고 하시니 눈앞이 캄캄했다. 친정어머니는 그동안 고생했다고 아이를 친정으로 데려가시면서 편히 좀 쉬라고 하셨다. 그러나 시어머님은 심한 유선염에 젖몸살을 앓고 있는 며느리에게 집에서 쌀을 불려 절구질해서 떡을 하라고 하시니 눈앞이 캄캄해지며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편하게 쉬는 셈 치고 쌀을 불려 절구질을 하는데 안 울려고 해도 너무 아프니 내 의지와는 달리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안 그래도 유선염을 심하게 앓은 상태에서 큰 가슴에 젖까지 불어 천근만근 무거움을 느꼈는데 절구질을 한 번씩 할 때마다 꼭꼭 묶은 가슴에서 젖이 흘러내려 배까지 다 젖어왔다. 편하게 쉬는 셈 치기에는 너무 힘겨웠지만 ‘시어머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해드린 떡을 맛있게 드실 수만 있다면야 내 팔이 끊어져도 하자.’ 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고통을 봉헌하면서 절구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방문을 여시면서 큰 소리로 “아이고, 얼마나 독한 년은 지 새끼가 꿀꺽꿀꺽 먹는 젖을 떼는지 모르겠다! 혼자서 옹호 받고 큰 애라 확실히 다르구먼. 건강한 며느리 얻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고 좋을 거나.”라고 하시는 그 말을 들은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나 혼자 크면서 그 숱한 슬픔과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아비 없는 자식, 홀어미 딸 소리 듣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건만, 좋을 때는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아났냐?”라고 하시던 분들이 내가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도 아프다고 “쯧쯧쯧. 여자가 손도 쬐깐해가꼬 어디다 써먹을 거나?” 하고 모진 소리로 압박하셨다. 그러나 “너 젖 몸살까지 심한데 이렇게 와서 수고가 많구나.”라는 소리를 들은 셈 치면서도 속으로 ‘그래, 기죽지 말자. 그래도 이 작은 손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하며 자신을 위로했지만, 우리 어머니가 욕먹은 거 같아서 마음은 무척 아팠다. 그냥 나만 욕하시면 더 나은데 혼자 옹호 받고 컸다니…. 설사 옹호 받고 컸다 하더라도 내가 시집와서부터 어떻게 살아왔는데….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말고 일어나 사랑받은 셈 치고 더 잘해드리자.’라고 생각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떡을 해드렸더니 가족들이 맛있게 드셨다.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오시는 날까지 시댁에서 머물며 시어머님과 형제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바로 쓰러질 것 같았지만 몸을 추슬러 건강한 척하면서 어머니와 남편에게 시댁에서 사랑 많이 받고 왔다고 전하니 남편은 흐뭇해했고, 친정어머니는 기뻐하셨다.

 

237. 또다시 이사를

 

옆방 여자는 금방 서울로 간다고 하고선 계속 살았다. 그는 간호장교였는데 군 생활 중에 만난 장교와 결혼을 약속했다. 먼저 제대하고 내려가 있는 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하여 그녀 역시 제대하고 그 집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그녀는 남자를 만나기 전에 먼저 머리 손질을 하려고 한 미용실에 들렀는데,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그 남자와 똑같이 생겨 “아버지가 누구냐?”라고 물어보았더니 그 남자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그래도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 그녀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시냐?”라고 물어보고는 자기가 찾아가는 사람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상상하지도 못할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 후로 방황하다가 춤을 배우게 되었고, 방황 끝에 나주에까지 내려와 춘원이라는 바에서 바걸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낮에는 잠자고 오후 6시쯤 출근했다. 나는 그동안 그 여자의 심부름으로 온갖 것을 사다 주고도 돈을 받지 못했지만, 실체를 알고 나서는 너무나 불쌍하게 여겨져 나 스스로 시장도 봐주고 반찬도 만들어 주었으며 불러서 밥을 같이 먹기도 했다.

그녀는 유부남을 총각인 줄 알고 사귀어 결혼도 하지 못한 채 36살이 되도록 어쩌다 한 번씩 찾아 주는 그 남자를 기다리며 독신으로 한 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찾아올 때면 오이 마사지를 하려고 늘 오이를 사다 달라고 했다. 우리 윗집은 남녀가 모여 춤을 추는 집이다. 안 보려고 해도 부엌에서 빤히 다 보였다.

처음에 옆방 여자가 서울로 이사를 한다며 우리에게 오라고 하여 그 집으로 이사했는데 갑자기 이사 갈 형편이 못 된다고 하여 우리는 또 이사를 해야 했다. 불쌍한 할머니를 두고 가는 것이 물가에 어린아이를 두고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애가 둘이라 방 한 칸에서는 살 수가 없어 우리가 희생하기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아이들이 커 가는데 춤추는 사람들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게 다 보여도 울타리도 안 막아줘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238. 할머니의 눈물

 

이사를 해야 하는 나를 보고 주인집 할머니는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나는 자네 보는 낙으로 살았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해?” 하고 눈물범벅이 되도록 우셨다. 우리는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 자네 가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네.”라고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께 여러 가지 말로 위로해 드렸지만, 할머니의 슬픔은 가시지 않았다.

가족 몰래 눈물 흘려야 하는 할머니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슬퍼하시는 할머니께 몇 가지 약을 챙겨드리면서 당부했다. 글자를 모르시는 할머니에게 “파란 종이의 것은 머리 아플 때 잡수시고, 하얀 종이의 것은 배 아플 때, 감기 걸리시면 빨간 종이의 것을 잡수세요.”라고 가르쳐 드렸다. 나를 보내는 것을 아쉽고 섭섭해하시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아픈 마음으로 우리는 서내동 상 하방으로 이사를 했다.

 

239. 새로운 셋방

 

처음으로 넓은 방에서 살게 되니 마음까지 넓어진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또다시 찬바람이 감돌았다. 처음으로 주인집과 우리 두 집이 살게 되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무엇이든지 나누어 먹고 싶었던 내 마음은 여지없이 꺾여버렸다. 물건을 사다가 똑같이 반으로 나눈 음식까지도 탓하기 시작하여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너무나도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계속 사랑을 베풀었다. 아기도 봐주고 먹여주기도 하며 계속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 사랑은 통하지 않았다.

그 집 부부는 싸움이 잦아 우리 장독까지 깨지는 소동이 벌어졌고 계속해서 찬바람이 돌아 견디기 힘이 들었다. 그 집 아이가 호미로 우리 큰아이를 때려 피가 나는데도 오히려 우리 아이에게 야단치고 나에게는 아이 교육 잘 하라는 등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다.

나보다 어린 그녀는 이사 오기 전에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집으로 이사만 와보세요. 그러면 우리 집 땅에 무엇이라도 심으면 두 집이 충분히 먹을 수 있어요. 그러면 시장에 가지 않아도 되고, 펌프를 사용하니 물세도 들지 않고, 오물세 낼 필요도 없어요. 그러면 얼마나 이익이에요?” 그런 말과는 달리 “펌프값 내라, 똥 푼 값 내라.” 하며 지나치게 많은 돈을 요구해 왔다. 그리고 집안 터에 심어놓은 채소들을 먼저 남에게 다 가져다주어 우리가 먹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240. 용왕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사람들이 물을 아끼지 않고 쓰면 안타까웠다. 펌프로 물을 퍼서 쓰므로 수도세는 나오지 않지만, 기계는 마모될 수 있으니 나는 물을 최대한 아껴 썼다. 안집 주인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세수하면서도 대야로 하나 가득 퍼서 비누칠하여 세수하고 헹구지도 않고 버리는데 그러면 깨끗하지도 않고 비눗물이 조금이라도 남는다. 아이들 씻길 때도 마찬가지다. 많은 물을 가지고 씻기더라도 헹구지 않는다면 깨끗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세숫대야로 하나의 물의 양으로도 아이들을 다 씻기고 두 번이나 행궈 깨끗하게 씻길 수가 있었다. 첫 물은 버리고 나머지 행군 물로는 걸레를 빤다. 빨래도 마찬가지다. 목욕할 때도 적은 양의 물로 씻고 몇 번 헹구니 많은 물이 들어가지 않아도 깨끗이 할 수 있었다. 물만 아낀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느님의 하자도 모를 때 ‘이렇게 모든 것을 아끼면서 정성을 다해 사랑으로 생활한다면 용왕님이 기뻐하시겠지?’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물을 아껴 썼는데 펌프값 내라고 하여 수도세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 가더니 또 갑자기 물세를 내라고 했다. “펌프 쓰니 물세 안 내도 된다고 안 하셨어요? 그리고 펌프값이라고 받아 가셨잖아요.”라고 했더니 “펌프값은 펌프를 쓴 값이고 물세는 물을 쓴 값이니 받아야 하는 거 안 맞아요?” 하여 바로 “예 알겠습니다. 달라는 대로 드리지요.” 하고 물값을 줬다. ‘내가 조금만 더 굶으면서 먹은 셈 치자.’ 하고 봉헌했다.

처음엔 “우리 함께 재미있게 살아봐요.” 하고 살살거리더니 막상 함께 살게 되자 늘 돈타령이고 부부 싸움은 너무 잦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악영향이 끼칠까 두려워하던 차에 와장창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부부 싸움으로 자기네 간장, 된장 항아리가 완전 박살이 나 있었고 간장은 마당을 흠뻑 적셨다. 우리 큰아이는 “엄마 무서워. 아줌마랑 아저씨랑 다 무서워.”라고 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과자를 사주며 안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