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시어머님의 사랑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서 생각하니 살아갈 날들이 정말 암담했다. ‘시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돈 달라고 하시지, 안집에서는 부부가 저렇게 계속 물건이 날아가고 깨지는 등 크게 싸우는데 돈이 없어 이사 가기도 힘들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들을 품에 안고 잠시 누워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시어머님이
들어오셨다. “어머니 오셨어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고 징그러워 죽겠네. 정말, 새파랗게 젊은 우리 아들 어쩔거나?” 하고 문을 쾅 닫으셨다.
나는 얼른 일어나 시어머니를 부르며 재빨리 따라 나갔지만, 시어머니는 화가 나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셨다. 힘없는 내가 온 힘을 다해 뛰어가서 붙들고 “죄송해요. 어머니! 들어가셔요.”라고 하자 집으로 오셔서 또 돈을 내놓으라 하셨다. 앞이 캄캄했다. 시어머니 뒷바라지하다가 방 얻을 돈까지 써버려 친정어머니가 방값을 해주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돈을 달라고 하시는가?
그러나 나는 얼른 일어나면서 내가 건강하여 사랑받은 셈 치고 “잠시만 기다리셔요.” 하고 안집으로 갔다. 아쉬운 소리를 전혀 못 하던 나였지만 용기를 내어 물어봤더니 “돈 없어요.” 하고 문을 탁 닫아 버렸다. 사실 자존심이 상하려고 하여 뒤통수가 부끄러웠지만, 얼른 “미안해요. 돈이 있으면 빌려드리겠는데 우리도 없네요.”라는 부드러운 말을 들은 셈 치고 집을 나왔다.
빌리긴 빌려야 되겠는데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남편에게 신경 쓰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금반지를 가지고 나가 상점에 맡기고 돈을 빌려 시어머님께 드렸다. 돈을 들고 가시면서 “너는 큰 며느리이니 네가 다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많은 이들이 “형제가 많은 큰아들이니 그 결혼은 안 된다.” 하고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아, 이것이었구나.’ 그러나 ‘내가 선택한 일이니 남편을 위해서라도 죽을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자.’라고 마음을 다잡고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니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242. 최선을 다해 영양 보충을!
시어머니는 늘 시도 때도 없이 오셔서 돈을 달라고 하셨기에 나는 ‘언제 또 오시나?’ 하면서 마음을 졸였다. 식비조차 없어 항상 ‘어떻게 하면 돈이 적게 들면서도 영양분을 채워 가족들 건강을 지킬까?’ 하며 여러 가지로 연구했다. 그 당시 고등어는 가장 싼 생선이었지만 영양이 풍부해 요리만 잘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고등어를 자주 사다가 내장과 지느러미 등 못 먹을 부분만 떼어내고 뼈까지 칼로 아주 곱게 다지면서 ‘나도 이렇게 모든 이로부터 부서지는 사람이 되어서 모나지 않으리라.’ 하고 수없이 다짐했다. 그렇게 다진 고등어에 갖은양념을 더해 밀가루 반죽에 섞어 둥글게 만들면서는 ‘나도 이렇게 모가 없이 둥글게 살아가면서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모든 이의 기쁨이 되어
주리라.’라고 깊이 묵상했다.
고등어를 그렇게 동그랑땡으로 만들어 프라이팬에 부쳐 가족들에게 주면서 돈이 없어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못 먹지만 고등어를 먹어도 그 영양가까지 채워지기를 염원했다. 그렇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들여 만들면 고등어를 못 먹는 남편도, 또 아이들도 맛있게 아주 잘 먹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매일시장에 나가면 할머니들이 갓 따온 시금치, 상추, 들깻잎 등을 팔았는데 나는
필요한 것들을 50원어치씩 샀다. 양송이버섯을 살 때 사람들은 큰 것을 골랐는데 나는 작은 것이 영양가가 많을 거 같아서 작은 것을 골랐다. 그러면 상인들이 고맙다며 덤으로 더 많이 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골랐던 그 만큼의 작은 양송이가 영양가가 훨씬 많아 그것으로 통조림을 만들었기에 그 뒤론 작은 양송이는 나오지 않았다.나는 싸게 사온 채소와 양송이로 여러 가지 요리를 했다. 요리하면서 소고기 먹는 셈 치고 그 영양가가 그대로 가족들에게 흘러 들어가기를 염원했다. 나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밥을 잘 먹지 않아 건강이 좋지 않으면서도
그 음식을 안 먹고 김칫국만 먹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먹은 셈 치고 봉헌하니 얼마나 흐뭇했는지!
그 당시는 우리 가족이 잘 못 먹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완전 영양식이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시어 그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늦었지만 옛날을 회고하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243. 여직원이 숨겨둔 어떤 여자의 편지는?
지금 가난해서 배가 고프고 생활이 힘들다 할지라도, 남편에게만은 희망과 사랑을 심어주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내가 모든 고통을 받고 있지만, 남편에게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 때마다 마음 상할까 봐 위로해 주곤 했다. 어느 날, 여직원에게 전화가 와서 “사모님, 이야기할 것이 있어요.”라고 하면서 머뭇거리기에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하고 물었다.
남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싶어 또다시 “무슨 일이 있어요?”라고 했더니 “그래요, 사모님….”이라고 하면서 난처한 듯 머뭇거렸다. 재차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인지 빨리 이야기 좀 해봐요.” 하고 다그쳤더니 그제야 “사모님, 15일 전에 어떤 아가씨로부터 김 계장님에게 편지가 왔었어요. 사랑의 시가 쓰인 예쁜 꽃봉투에 두툼하게 넣어진 편지를 제가
얼른 감추었어요.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된 것이죠.”라고 하였다.
“계장님께 그냥 드려야 되나, 아니면 사모님께 말해야 되나 망설이다가, 사모님께 말씀드렸다가 그렇지 않아도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충격이나 받지 않으실까 염려하다가 편지 받은 지 3~5일까지는 그냥 참고 넘길 수 있었는데, 일주일이 지나자 어떻게 해야 될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계장님이 ‘누가 내 편지 안 봤어?’ 하셔서 찔끔했지만, 그래도 시치미를
떼고 사모님께 분명 알려드려야 될 것만 같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제가 먼저 내용을 읽어보고 충격받으실 것 같으면 없애 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차마 남의 연애편지를 뜯어 볼 수가 없어 놔둔 것이 15일이나 지나게 되었어요. 그런데 계장님이 오늘 또 ‘내게 온 편지 본 사람 없어?’ 하시기에 양심을 숨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드렸어요, 사모님 죄송해요. 김 계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잘 알지만, 같은 여자로서 그냥 침묵만
지킬 수가 없어서 전화했으니 참고로 해 주세요.”
어쩔 줄 몰라 하며 전화한 여직원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내가 소리 내어 웃자 여직원이 “어머, 사모님 지금 웃고 계시는 거예요? 아니면 우시는 거예요?” 하고 놀라서 묻기에 “웃고 있어요.” 했더니 어이없다는 듯 “어머머….”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걱정을 끼치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했더니 “걱정을 끼치다니요?” 하고 되물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너무나
많이 걱정을 끼치게 했잖아요, 그 편지는 제가 쓴 편지이니까요.”라고 했다.
여직원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아니지요? 김 계장님을 좋게 말씀하고 싶어서죠?” “아니에요, 겉봉투에 「옛날의 선아가」라고 쓰였지요?” 했더니 “맞아요.”라고 했다. 그제야 믿어졌는지 “어머머, 세상에 그럴 수가! 어쩌면 그렇게 소녀처럼 계장님에게 잘하셔요? 겉봉투에 사랑한다는 시가 쓰여 있어 영락없이 속았지요. 설마 사모님이 하셨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가 사모님께 더 많이 배워야겠어요.”라고 했다. 이렇게 배워야겠다는 전화를 다른 여직원들에게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남편이 퇴근하여 몹시 기분이 좋게 들어와서 “여보! 고마워.”라고 하며 사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직원이 당신하고 전화 통화했다고 하면서 사과하던데. 그래서 당신이 쓴 편지를 읽어보라고 했어.” “아이 당신도, 편지를 읽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라고 했더니 “오늘 당신 편지 사건으로 직원들 전체에게 화젯거리가 되었어.”라고 했다.
내가 편지를 보내고 나서 일주일이 지나도 남편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누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던데 혹시 못 받으셨어요?”라고 했더니 “응.”이라고만 했었다. 편지 보낸 지 15일이 되는 날 아침에, 이상하여 내가 편지 보낸 것처럼 하지 않고 “아직도 그 편지 못 봤어요?”라고 했더니 “응, 누가 보냈는데?” 하고 물었다. “당신 아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남편은 사무실에
가서 편지를 찾은 것이었다.
무조건 침묵을 지키면서 무심하다고 생각했더라면 어찌 되었겠는가? 여직원의 고민거리가 훨씬 연장되었겠지. 일상생활 안에서도 무심코 지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네가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너에게 해주면서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겠기에, 편지를 썼다고 해서 답장을 기대하지 말고 ‘내가 조금 더 노력해서 사랑을 주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속담에 ‘침묵은
금’이라고 했지만 때로는 돌만도 못할 수가 있다. 상대방의 의사를 전혀 모르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44. 할머니의 애틋한 사랑
우리가 이사 온 지 일주일쯤 되었는데, 전에 살던 집의 안집 할머니가 찾아오셨다. 집을 잘 모르셨기에 물어 물어서 어렵게 찾아오셨다 했다. 나는 너무나 놀랍고 반가워서 “할머니, 어서 오셔요.”라고 하면서 얼른 방으로 모셨는데, 할머니는 속옷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셨다.
“자네가 수제비 좋아하는디 끓여주고 싶어도 못 해줘서 늘 마음이 아팠어. 그래서 수제비 끓여주려고 이렇게 밀가루를 가져왔네.” “할머니, 그냥 오시지 그랬어요. 할머니 마음 제가 잘 알고 있어요, 다음에는 그냥 오셔요, 네?” 그런데 할머니는 옷 속에서 또 무엇인가 꺼내셨다. “이것 적지만 반찬에 넣어 먹으소이.”라고 하며 비닐종이에 조금씩 싸 온 볶은 깨와 고춧가루를
내놓으셨다.
85세나 된 할머니인지라 그렇게 안 하셔도 된다고 극구 말려도, 수제비를 하기 위하여 부엌으로 나가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할머니의 그 정성과 사랑은 결국 나의 여린 마음을 울리고 말았다. “자네가 내 곁을 떠난 뒤, 나는 자네가 보고 싶어서 매일 울다시피 했다네. 어려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 몸이 아프고 슬플 때 오직 자네만이 나의 힘이 되어 주었고 희망과 기쁨을 주었는데….”라고
하시며 또 울음을 터트리셨다.
“자네가 없는 집은 썰렁할 뿐이라네. 차라리 내가 자네를 몰랐더라면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허전하지는 않을 텐데….” 인정이 메마르고 사랑에 굶주렸던 할머니와 나는 함께 붙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함께 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시간 되는 데로 찾아뵙기로 했다.
245. 몸은 더욱 쇠약해지고
그동안 나의 몸은 더욱 쇠약해지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오기 시작했다. 병원에 다녀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신경성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했다. 내가 아프기 시작하자 그렇게 좋던 시댁 식구 중 몇몇 분은 나를 바라보는 눈도, 나를 대하는 말씨도 거칠게 변했다. “꾸며서는 하지 못한다.”라고 칭찬하시던 시어머님도 “저 애 아픈 것은 혼자 무남독녀로 옹호하고
키워서 그렇다.”라고 하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픈 말로 상처를 주셨지만 사랑받은 셈 치고 봉헌하려 노력했다.
주위에서는 “건강한 아들 걱정은 하면서, 아픈 며느리를 걱정하지 않는다.” 하고 쑤군거릴 때면 나는 “아녜요. 건강하지 못한 제 탓이에요. 우리 시어머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에요.”라고 했다. 내 마음은 그랬지만 시어머님은 거의 매일 찾아와 돈을 해달라고하시니 나는 돈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에는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남편에게도 말 못 하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가슴은 터질 듯이 아팠다. 돈이 없어 남들 다 먹이는 아이들 이유식을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다. 반찬도 그 당시에는 매우 쌌던 고등어를 사다가 곱게 다져서 여러 가지로 요리해서 먹였다. 그 정도는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 주면 되었기에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시어머님이 계속 찾아와 돈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시어머님이 언제 또 오셔서 돈 달라고 하실까?’ 하는 생각과 ‘이제 어디에다가 손을 벌릴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하루 종일 불안증에 시달려 문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랐다.
일류 기술자지만 내 미용실이 없어 돌아다니며 개인적으로 파마를 해주니 돈을 조금밖에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힘들게 노력해 돈을 번다고 해도 한정된 것이거늘 시어머님은 늘 찾아오시니…. 나는 그런 생각에 밤잠을 설치면서도 ‘호화로운 궁전에서 사는 셈 치고’ 이겨내려 노력했다.
246. 성당에 나가다
1973년, 우리 부부는 누구의 권유도 없이 성당에 나갔다. 신부님은 조철현 비오 신부님, 원장 수녀님은 황 아나다시아 수녀님이셨다. 나의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성당에 다니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느님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하느님 생각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사 참례를 했다. 교리 받는 일, 미사 다니는 일은 나의 행복이었다.
토요일 특전 미사에도 헌금하고, 일요일도 헌금하고 나면 세상에 그보다 더 기쁜 것이 있을까? 없는 돈이지만 반찬값에서 떼고 머리도 미용실 가서 한 셈 치고 내 손으로 만지면서 조금 떼고, 용돈에서도 줄여 절약한 돈을 헌금하면서 나는 너무 기쁘게 성당엘 다녔는데, 그런 나를 주위에서는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집안에서 “종손 며느리가 무슨 교회를 다니느냐?” 하고 책망했다. 시골 할머니는 늘 “네가 기어이 교회를 다닌다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라도 너를 다니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에 한편으로는 괴로우면서도 나는 하느님이 너무 좋아 기쁘게 다녔다. 신부님께서 가정 방문이라도 하실 때면 그 긴 골목길까지 깨끗이 쓸어놓고 예수님을 맞는 그런 마음으로 맞이하곤
했다.
원장 수녀님께서는 나를 너무 예뻐해 주셨다. 감도 떨어지면 주워다 주시고, 호박잎과 애호박도 따다 주시곤 하셨다. 미사 없는 월요일 하루 성당에 못 가면 수녀님이 너무 보고 싶어 다음날을 무척 기다리곤 하였다.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했고, 마음을 열지 못했던 나는 성당에서 신부님과 수녀님께로부터 잃었던 부모의 정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247.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
그해 어느 날, 기도 중에 묵상을 하다가 나는 이런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 큰 황금 덩어리가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기도 장소로 내려왔다. 기도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놀라 다 도망가는데 나도 그들과 함께 도망가기 시작했다. 산을 거쳐 들로, 들을 거쳐 또 산으로 계속 도망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나 혼자였다. 그 황금 덩어리는 도망가는 나를 계속 따라오기에 너무 두려워 사력을 다하여 도망갔다.
그런데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벼랑 끝에 서게 되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였고,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내 앞길이 막혀 진퇴양난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그 큰 황금 덩어리가 나의 가슴으로 쏙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 가슴을 내려다보며 만져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너의 그 인내심과 착함을 보고 나의 유산, 즉 나의 전 재산을 너에게 전하노라.”라고 하는 다정하면서도 위엄이 있는 말씀이 들려왔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으니 남편도 너무 놀라 “당신 왜 그래?” 라고 하여 내가 본 모습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남편은 나에게 “좋은 일이 당신에게
있겠네.”라고 말해 우리는 함께 웃었다.
248. 세례받기 전날 시조부님 돌아가시다
그렇게도 고대했던 세례식이 내일로 다가왔다. 나의 마음은 너무 기뻐 들떠있었다. 하얀 한복도 마련해놓고 빨리 내일이 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또 웬일인가? 시조부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종손 며느리가 안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례를 안 받을 수도 없었기에 신부님께 달려갔다. 그때는 1년에 두 번 세례식이 있었기에 그때 세례받지 못하면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그리 생각하니 아득했다.
“신부님, 시조부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저는 꼭 세례를 받고 싶은데 안 갈 수도 없고….”라고 했더니 신부님께서는 “조부님이 돌아가셨는데 가지 않으면 안 되니 다녀와요, 다녀오는 대로 미사 때 혼자 세례를 줄 테니까.”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뛸 듯이 좋아하며 시골로 내려가 일했다. 온전히 밤을 새워 일하면서도 세례식만 머리에 떠올라 어떤 일을
해도 기뻤다. 그해처럼 눈이 많이 온 적이 없었다. 집에 샘이 없었기에 발목까지 찬 그 많은 눈을 헤치고 10분 거리의 내리막길을 물동이이고 내려가고 올라가기를 수십 번 하다 다 보니 나중에는 너무 미끄러워 몇 번이고 미끄러질 뻔했지만, 예수님을 부르면서 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모두가 잠을 자는 동안 나 혼자 할아버지 시신 앞에서 지키고 앉아 기도하고 있었는데 온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249. 유혹에 빠진 나날들
시골에 다녀와 세례를 받기 위하여 성당을 가야 하는데 이건 또 웬일인가? 성당에 가는 것이 두려워졌고, 하루만 보지 않아도 그렇게 보고 싶었던 신부님과 수녀님이 먼발치에서만 보여도 벌벌 떨렸다. 그분들이 보이면 숨어 있다가 지나간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을 보곤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말이 씨가 된다.” 하는 말이 실감 났다. 시골 할머니께서 “네가 교회 다니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라도 너를 다니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는 말이 이루어졌음을 먼 훗날에서야 깨달았다.
250. 또다시 이사를
자신의 집으로 이사만 오면 텃밭에 채소를 심어 놨으니 같이 먹으면 되고, 펌프 샘물이니 물값도 공짜고, 화장실은 시골에서 퍼가니 그 또한 돈 들 일 없다고 하던 안집에서는 약속과는 달리 돈을 자주 내라고 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아이들까지 괴롭혔다. 특히 부부 싸움이 날로 심해져 간장, 된장, 고추장이 담긴 장독이 깨지고 물건들이 날아가는 큰 싸움이 계속되니 셈 치고
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엔 그 집 아들이 큰딸 머리를 호미로 찍어 피가 나는데도 미안해하기는커녕 “애 좀 잘 보지 그래요? 애 교육 좀 잘 시켜요!”라고 하면서 자기 아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 시어머님께서 또 돈이 필요하다고 오셨다. 우리는 시어머니께 드릴 돈이 없어 생각 끝에 다시 전세에서 사글세로 이사하여, 남은 돈을 드리기로 하고 또 이사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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